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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천주교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인식과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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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0 ㅣ No.676

천주교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인식과 기여

 

 

1. 머리말 

2. 교회의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
3.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유엔의 승인
4. 맺음말

 

 

1. 머리말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천주교회는 국가의 해방과 아울러 종교 해방을 동시에 얻으면서 남달리 기쁨을 맛보았다. 국내에 있던 대다수 지도자들과 같이 교회 지도자들도 아무런 대책 없이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해 9월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남과 북을 점령하여 군정이 실시되었고,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신탁통치안(信託統治案)이 알려지면서, 한국 사회는 엄청난 소용돌이를 겪게 되었다. 결국 유엔의 결정으로 1948년 5월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2월 12일 유엔의 승인을 얻게 되었다. 이때 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서울교구장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와 장면(張勉, 요한) 등은 미군정하에 우익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해 갔다.

이 시기 교회의 활동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자는 강인철이다.1) 그는 ‘비판적 · 반성적’ 차원에서 이 시기에 교회가 독립 국가의 수립과 분단체제의 형성 과정에서 한 태도와 역할을 밝혔다. 그러나 역사학 차원에서 이 시기 교회 지도자들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인식과 기여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먼저 공산주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이에 따른 교회의 반공주의, 박해받는 연길과 북한 교회의 상황을 보겠다. 이를 통해서 천주교회가 반드시 공산주의를 막고자 했으며,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섰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한 교회가 미군정하에서 적극적으로 가톨릭운동을 하고, 신탁 통치 반대 활동과 5 · 10 총선거에 참여, 이어 유엔 총회에서 성공을 위해 지원 활동을 한 교회의 모습을 교회 관련 잡지 · 신문 · 회고록 등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천주교회 지도자들이 갖고 있었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인식과 기여한 바를 새롭게 조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교회의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

해방된 후 소신학교 교사였던 장금구(莊金龜, 크리소스토모) 신부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뜻밖에도 38선이란 말이 나오고, 이북은 소련이 점령하고, 이남은 미국이 점령한다는 말이 우리에게는 청천하늘에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소련’ 하면 공산주의가 연상되고, 공산주의와 우리 신앙과는 공존할 수 없는 존재”라고2) 하였다.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겠다.

1) 교회의 가르침

당시에 나온 사회 교리 문헌은 교황 레오(Leo) 13세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1891)와 비오(Pius) 11세의 《사십주년》(Qurdragesimo Anno, 1931),3) 비오 11세의 《하느님이신 구세주》(Divini Redemptoris, 1937) 등이다. 이 문헌에 나오는 주요 내용은 계급 투쟁을 전제로 하고 유물사관에 의거하여 반종교적·반교회적 정치 노선을 선포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사회주의를 반대한 이유는 첫째, 사회주의 이론이 노동자들에게 손해를 주고 정당한 소유주들에게 폭력을 가하며,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유재산권의 포기인 재산의 공유화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노동 계급에도 극심한 해악이 된다고 분명히 반대하였다. 즉 교회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동시에 개선을 촉구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문제를 사회주의로 해결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 입장을 표시하고 있다. 둘째, 사회와 인간의 특성에 대한 사회주의의 개념은 그리스도교 진리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즉 소유권, 자본, 노동의 사회적 객관적 성격만으로 강조하는 무신론적인 태도를 거부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주의의 실천 운동으로 현실에서 정치 체제의 변화 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공산주의이다.4)

공산주의에 대하여 비오 9세는 〈오류 목록〉(Syllabus, 1864)에서 “만인의 권리와 사유권과 소유물이 철저히 유린되며 나아가서는 사회자체가 파괴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고, 레오 13세는 “인간 사회의 골수에까지 침투하여 그 파멸만을 가져오는 치명적인 전염병”이라고(1878) 하였다(《하느님이신 구세주》 4항). 비오 11세는 공산주의의 목표는 “무자비한 계급 투쟁과 사유 재산의 완전 철폐”이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광포한 폭력까지 포함하는 모든 수단을 써가며 달성하려 한다. … 공산주의가 성교회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대하여까지 보여준 적대와 공공연한 적의는 통탄스럽게도 모든 이에게 알려진 사실에 의하여 여실히 증명된다.”고(《사십주년》 45항) 비판하였다. 또한 《하느님이신 구세주》는 부제,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관하여’에서 볼 수 있듯이 공산주의를 명백하게 거부하면서 ‘가톨릭운동’(액션)의 전개를 촉구하고 있다. 볼셰비키 무신론적 공산주의 목적은 사회 질서를 전복하고 그리스도교 문명의 토대 자체를 침식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공산주의는 그 본성상 반종교적이고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간주한다고 하면서, 마르크스의 혁명적 유물론과 무신론적 요소 때문에 반대함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면서 공산주의 체제의 논리적 귀결인 잔혹한 학살과 박해가 러시아, 멕시코, 스페인에서 드러났음을 밝혔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어떠한 형태로도 공산주의와 협력해선 안 된다고5)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결과, 유럽의 천주교 전통을 지닌 국가들인 폴란드, 헝가리 등에 공산 정권이 수립됨으로써 이러한 사태는 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공산 정권은 주교들과 성직자들을 투옥하였으며, 교황청으로부터 분리된 국가 교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에 비오 12세는 1946년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하였고,6) 1947년 8월 미국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과 ‘인류의 신앙을 재건하고 영원한 세계 평화를 수립하는 데 협력하자’는 서한을 교환하였다.7) 그리고 1949년 7월 공산주의자들의 유물론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인 사상을 공언하는 신자들은 파문(Excommunicatio)을 받는다고 하였다.8)

이와 같이 비오 9세, 레오 13세, 비오 11세, 비오 12세들은 철저한 반사회주의 · 반공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 교황문헌인 《새로운 사태》, 《사십주년》, 《하느님이신 구세주》 등에서도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철저히 배격하였는데, 집단 체제 및 독재 체제로서 개인의 자유로운 인격적 영역을 빼앗고, 유물론과 무신론적 요소가 있는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거부하였기 때문이다.9) 이러한 인식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벌어지는 잔혹한 박해로 인해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2) 한국 교회의 반공주의

한국 교회는 1940년대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산주의가 교회를 박해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톨릭청년》 1947년 7월호에 폴란드에 공산 정권, 8월호에 남아메리카의 공산주의, 12월호에 소련 공산주의 진상, 1948년 5월호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1949년 8 · 9월호에 체코의 공산주의, 《경향잡지》 1947년 10월호에 박해를 받았던 우크라이나, 1949년 4월호에 리투아니아의 종교 박해, 5월 · 10월호에는 유고슬라비아의 종교 박해, 《천주교회보》 1949년 9월 1일자에는 체코에서 공산정권에 항쟁하는 베란(Josef Beran) 대주교의 활동 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1949년 1월 이후 중국 공산정권 하의 중국 교회의 소식들이 《경향잡지》, 《천주교회보》, 《가톨릭청년》 등에 자세히 실려 있다.10) 또한 1949년 4월 한국 모든 감목들의 연합 교서에서는 헝가리 민첸티(Jozsef Mindszenty) 추기경의 처형을 반대하는 항의서를 발표하였다.11)

이와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교회는 교회 출판물에 이 사실을 전하며 반공 투쟁적인 글을 발표하였다.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글은 《가톨릭청년》 1947년 4월호에 김약망의 ‘비오 12세와 정치’, 6월호에 조 마리아의 ‘내가 공산주의가 될 수 없는 이유’, 7월호에 C.S 미하노비취의 ‘티도 정권의 조감도-유고국의 적화 경위’, 8월호에 막스 아쓰트만의 ‘공산주의 소련의 진상’과 안민호의 ‘공산주의의 신조’, 10월호에 석동수(石東洙)의 ‘공산주의와 기독교’, 11월호에 윤공(尹空)의 ‘볼쉬뷔키적 공산주의를 배격함’과 월터 더슈닉의 ‘강제 노동수용소의 내막’, 12월호에 ‘공산주의자의 윤리’(정욱진 역) 등이 있다. 1948년 5월호에 ‘알바니아는 왜 적화되었는가?’, 7월, 8 · 9월호에 풀톤 쉰(Fulton J. Sheen) 주교의 ‘공산주의는 인민의 아편이다’, 10 · 11월호에 ‘스탈린 지옥’, 1949년 5월호에 김신월(金信越)의 ‘공산주의와의 투쟁’, 8 · 9월호에 ‘맑시즘 이론 해부’ 등이 실려 있다. 


교회 지도자들은 신자들의 반공적 행동을 촉구하였다.12) 스펠만(Francis J. Spellman) 추기경은 1946년 10월 “소련 당국은 공산주의를 부식하기 위하여 정당한 평화를 원치 않고 혼란을 야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13) 하였다. 교황사절 번 몬시뇰은 1947년 10월 천주교 청년연합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열린 ‘가톨릭운동의 의의’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공산주의가 무신론을 가지고 조선을 휩쓸려고 하는 이때에 있어서 가톨릭운동이야말로 그를 격파할 수 있는 유일한 역량”이라고14) 하였다. 1948년 5월 총선거를 앞두고 노 주교는 공문을 보내 “공산주의적 세력 밑에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하루바삐 천주께서 주신 인권과 자유를 찾기 위하여, 또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회개하기 위하여”15) 성모께 특별히 전구토록 하였다. 1949년 연두사에서 노 주교는 “공산주의 독재 정치 밑에 신음하고 있는 북한 동포들이 하루속히 해방되어 분열이 벗는 한 나라 땅 안에, 한 주권 밑에, 완전히 통일된 국가가 세워져야 할 것이다. 국민의 사상을 좀먹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적 사상이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고16) 하였다.

당시 신자들이 교회 잡지에 발표한 글을 보면, 방제거(方濟巨, 鄭芝溶)는17) “다다넬스(Dardanelles) 해협(터키)과 38선은 세계의 양극단이 직접 부닥치는 곳이다. 이 공방선은 역사의 필연성에 수종(隨從)하는 사상적 경계선인 동시에, 민족국가 발달사상에 있어서의 미영(美英) 국가군과 소련 국가군의 대치선이다. … 소위 소련식 민주주의권에서는 인간과 세계를 일원적으로 규정한 무신 유물론의 과오를 과감히 청산하고 전체주의의 비밀에 쌓인 철의 장막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것을 실천할 수 없다면 역사상의 한낱 이단으로서 불원(不遠)한 장래에 존재의 가치와 의의를 잃고 지옥의 나락으로 행진할 따름일 것이다”고18) 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은 “이 땅의 종교 청년들에게 무엇이 가장 요망하는가. 승리만을 위한 투쟁의 진두에 설 임무밖엔 없다. 타협할 수 없고 공생할 수 없는 마(魔)와의 최후적 투쟁의 전체를 인식하고 항쟁의 국제적 귀추를 응시하면서 그때그때의 하나하나의 임무를 다하여 나가자”고19) 하였다. 그래서 “진리를 항거하는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니, 이것은 우리의 영적 전투의 일부이다. … 가톨릭 청년 단체가 십자군이 되어 사상전에 출정하자면 각종의 준비와 작전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고20) 하였고, 또한 “우리의 생명인 신앙을 보전하려면 유물주의를 이 지구상에서 말살하여야 할 것이며, 세계 평화를 확립하려면 유물주의에서 일관된 공산주의를 없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강토에서 공산주의를 말살하기 전에는 38선도 해결치 못할 것이요, 남북 통일은 물론 이 강토의 구원(久遠)한 평화는 오지 못할 것이다”고21) 하였다.

이와 같이 《가톨릭청년》과 《천주교회보》를 비롯하여 《경향잡지》는 북한과 동유럽에서 일어나는 공산당에 의한 교회 박해 소식을 자세히 전함으로써 교우들에게 반공사상을 널리 고취시켜 나갔고,22) 이후에도 이러한 가르침은 계속되었다.23) 이러한 때에 박해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된 것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는 연길 · 북한 교회의 참상이 교회에 알려지면서부터였다.

3) 박해받는 연길 · 북한교회

당시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연길 지역은 1920년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베네딕도회가 담당한 원산교구에 소속되었다가 1946년 중국 봉천(奉天, 현재 심양)교구에 속했었지만, 한국 교회의 관심 속에 머물러 있었다.

1937년 연길교구 설립 이전부터 본당들이 거의 모두 공산당이나 마적, 비적들에게 피해를 입었고 성당까지 불타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1946년 4월 러시아군이 만주를 떠나면서 통치권을 중국-만주 공산 정권에 넘겨주었다. 그해 5월 연길 수도원 및 본당의 수도자들을 체포하여 2년간 남평 수용소에 투옥시켰고,24) 수도원을 약탈하였다. 1947년 1월부터 공안국 계통의 민간 단체인 공작대가 적극적인 ‘반종교운동’을 일으켜서 신자들에게 배교를 강요하였다.25) 이는 곧 연길 교구에 본격적으로 박해가 일어날 조짐이었고, 이 천주교 탄압을 ‘가톨릭과 악마의 전쟁’으로26) 표현하였다. 노 주교는 그해 3월 연길에서 피난 온 채 데레사(22세)를 만났는데, 박해로 말미암아 많은 공소 신자가 배교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4월 간도에서 피난 온 이태준(李泰俊, 야고보) 신부와 11월에는 연길교구 감목대리 김성환(金成煥, 빅토리오) 신부를 만났고, 이들에게서 구체적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27) 그는 7월 16일 전국 각 교회로 공문을 보내 연길, 덕원 교구를 위하여 의연금을 보내주도록 요청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구제품이 ‘경향잡지사’에 답지하였다.28) 이러한 사정을 알리고자 12월 16일 명동성당에서 ‘가톨릭전재교우회’ 주최로 김성환 신부를 초빙하여 ‘연길지방 박해 진상 보고 강연회’를 개최하였다.29) 또한 김 신부는 이듬해 2월 ‘자신이 체험한 공산주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물론을 주장하고 비인간적 무자비한 투쟁으로 모든 사회의 전통적 질서와 평화를 파괴하고 있다. 교회의 일대적인 동시에 전 인류의 공적(公敵)인 현대 볼세비키 공산주의 사상을 대적하는 방어할 만한 사상은 가톨릭시즘일 뿐이다. 하느님께로부터 부과된 교회의 현대적 과업은 지옥의 문인 적색주의와의 투쟁’이라고30) 강조하였다. 그리고 허창덕(許昌德, 치릴로) 신부는 공산당에 의해 박해를 받는 교회와 성직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동만현지보고기’(東滿現地報告記)를 《가톨릭청년》에 세 번에 걸쳐 연재하였다.31) 동북사정협회(東北事情協會) 백우학(白羽鶴)은 종교 탄압의 실정을 알리기 위해 ‘동북조선동포실정보고’라는32) 기고를 하였다. 이처럼 연길교구는 중국 공산당 등으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있었고, 이 참상이 교회 잡지의 기고문과 강연회 등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교회는 박해받는 성직자와 신자들을 위해 전국적으로 의연금을 모아 보내면서, 박해받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하였다.

해방 후 북한의 정치 상황을 보면, 소련은 1945년 8월 11일 함북 옹기 상륙작전을 벌인 후 8월말 북한 전역에 진주하였다. 8월 17일 평남 건준을, 열흘 후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하였고, 8월 26일 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부를 평양에 설립하였다. 그리고 해방된 지 한 달 남짓 지났을 때인 9월 20일경 북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할 결심을 굳혔다. 이날 스탈린(Stalin)은 “반일적이며 민주적인 정당·사회단체들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33)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고, 이북 5도 행정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11월 19일에 임시적으로 중앙 행정기구의 역할을 수행하는 10국이 설치되었다. 이것은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섰다는 조짐으로 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10월 10일 ‘이북 5도 열성자 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하기로 결정했고, 10월 14일 소련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로 선택된 김일성이 평양에서 군중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조만식을 위시한 조선민주당 계열은 배제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2월 8일 사실상의 정부 기구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가 발족되었고, 7월 22일 북조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었으며, 8월 30일 북조선노동당이 출범되었다. 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고,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으며,34) 4월 29일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헌법이 채택되었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해방 후 북한의 종교 정책을 보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신앙 생활에 대해 제한 · 탄압 · 말살정책으로 발전하는 단계적인 방법을 취했다.35) 1946년 11월에 종래의 기독교 단체들로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설립하였으나, 평양교구장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보르자) 주교는 이 연맹에 가입하기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제한 정책에 이들의 허위 선전 자료로 이용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46년 4월 평양교구에서는 각 본당 대표 40명으로 ‘평양교구 사업 기성회’를 조직하고 관후리에 대성당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대성당을 세워 공산주의자들 앞에 신앙의 승리를 과시하자’는 열성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성전 지붕이 완성되어 가고 있던 1949년 12월 끝내 준공을 보지 못하고 강제로 몰수를 당했다.36) 


1947년 9월호 《가톨릭청년》에서는 북한 천주교의 위기와 관련하여 “국토가 양단(兩斷)된 위에 무신 공산주의는 그 악극(惡棘)한 갖은 수단을 부리며 이 강토에 그 독아(毒牙)를 벌이고 있잖은가. 보라! 38이북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신앙을 보지하고 조국을 사랑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그들은 검속, 혹형, 주륙을 당하고 있지 않는가?”라고37) 경고하였다.

1948년 9월 공산 정권이 정식으로 수립되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했으나, 황해도에서 공산 당국의 탄압은 1945년 9월경과 이듬해 11월 해주 본당 김철규(金哲珪, 바르나바) 신부를 포섭하려고 집요하게 유혹과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매화동 본당의 봉삼(奉三)학교 학생들을 주일에도 수업을 시켜 주일 미사 참여를 방해하고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받은 어린 학생들이 학교 수녀들을 조롱하고 증오하게 하였다.38) 1949년 5월 10일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장이자 초대 원산교구장인 사우어(Sauer Bonifatius) 주교와 신부, 수사, 원산의 신부와 수녀들을 납치 감금하고 수도원과 신학교, 수녀원의 건물과 가구 전부를 몰수하였다.39) 그해 5월 14일 평양교구장 홍 주교가 행방불명되었을 때, 패트릭 J. 번(Patrick James Byrne) 몬시뇰이 교황사절로서의 첫 공식 성명을 통해 북한에서 성직자 체포 및 투옥을 비난하였다. 즉 북한이 사제들을 공격하는 수법은 유럽 공산주의자들과 똑같으며, 이로써 그들의 조직이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질상 반그리스도교적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40) 그는 1949년 8월에는 “한국 정부의 유일한 적은 공산주의이다. 교회가 바로 같은 적을 반대하여 단호한 싸움을 하고 있기에, 한국 정부는 우리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다”고41) 하였고, 김일성에게도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42)

이와 같이 한국 교회가 공산주의로부터 위협을 느끼게 된 직접적 인식은 박해받는 연길교구와 북한 교회의 참상을 직접 경험하면서부터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를 반그리스도교로, 공산주의자들을 악마로, 교회와 인류의 공적으로 표현하였고, 박해받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물질적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공산주의 국가를 거부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행동은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한 실천이었고, 당시 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에 승리해야 한다는 국민적 감정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3.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유엔의 승인

1) 교회의 정국 인식과 활동43)

(1) 해방을 맞이한 교회

해방을 맞이한 후 미군이 진주해 올 때까지 서울시내는 문자 그대로 혼돈 상태였다. 노 주교는 시국을 신중히 지켜보면서 먼저 신자들에게 자중하도록 지시하였다. 1945년 8월 16일 노 주교는 신부들과 각 방면의 유지 교우들을 소집하였고, 시국의 동태를 세밀히 분석하고 있었다.44) 17일 신자들에게 “현금 시국은 우리 앞길에 중대한 관계를 좌우하는 열쇠를 잡고 있는지라 그러므로 경솔한 언어와 행동을 삼가 피하여 극력 자중하는 동시에 새로운 우리의 정당한 정부가 조선 내에 자리를 잡고 모든 정무를 완전 인수할 때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하여 기도하라”는45) 고유문(告諭文)을 발표하였다. 이 고유문을 19일(일) 10시 미사에 각 본당에서 발표하도록 하였으며, 22일 각 지방 성당과 각 교구장에게도 발송하였다.46) 그는 17일 프랑스 영사관을 방문하여 긴밀한 연락을 요청하였고,47) 중도좌파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8월 16일에 좌우연합세력으로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48) 방문하여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하였는데, 사무처에서 파벌과 자리 다툼을 보고 개탄과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49) 이후 건준과 9월 6일에 설립된 인공과 관계를 하지 않았다.

(2) 미군정하에서 가톨릭운동

9월 8일 서울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교회는 1930년대부터 도입되어 실천되던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을50) 새롭게 해석함과 동시에 거기에 종전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부여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인들과의 교류 및 연대, 정당활동과 선거에 참여하였고,51) 1949년 8월 26일 가톨릭운동의 전국적 결합체인 ‘대한천주교총연맹’(총재 노기남 주교, 부총재 김철규 신부)을 결성하였다.52)
 
첫째, 교회와 미군정과의 관계는 스펠만 대주교가 명동 성당을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45년 9월 9일 뉴욕대교구장이자 미 군종 책임자 스펠만 대주교가 여러 미군 장성들과 같이 명동 성당에 와서 ‘승전과 해방의 미사’를 집전하였다.53) 13일 노 주교는 미군정 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중장의 정치고문인 나이스터(Nister) 준장의 부탁으로 장면(張勉, 요한)과 장시간 상의한 후 한국인 지도자 60명(이승만, 임정요인들, 송진우, 김성수, 김병로, 장덕수 등)을 추천하면서, 혼란한 시국을 속히 진정시켜 줄 것과 좌익 계열의 민심 선동과 모략 선전에 특별 조처를 취해 달라고 부탁하였다.54) 18일 조선호텔에 자리를 잡은 하지 중장을 방문하였다. 노 주교는 26일(한국순교복자축일)에 명동성당에서 미군을 초대하여 ‘세계 평화 회복을 감사하는 미사’를 봉헌한 후 미군 장병 환영식을 거행하였다.55) 이후 명동 성당에서 매주 일요일 오전 9시 30분에 거행된 ‘미군을 위한 주일미사’에 미 고위 장성과 신자들이 명동 성당을 찾기도 하였는데, 특히 초대 미군정장관인 아놀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은 1946년 9월 21일 귀국하기까지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노 주교를 비공식으로 방문하기도 하였다.56) 1946년 5월 입국한 메리놀회(Maryknoll)의 페티프런(Petipren, 邊) 신부, 캐롤(Carroll, 安) 신부, 1947년 1월에 입국한 부드(Booth, 夫) 신부가 본격적인 본당 사목에 착수하기까지 약 1년 동안 명동 성당 구내에 거주하면서 “교회와 군정 당국 사이에 여러 가지 주요 사무”를57) 맡아보았다. 11월 1일(모든 성인의 대축일) 노 주교는 제2차 세계대전에 희생된 미군 장병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이때 하지 중장도 참석하였다. 이처럼 교회와 미군정과는 가까워졌고, 긴밀히 협조 관계를 이어나갔다.

둘째, 해방 이후 독립 운동가들이 입국하자, 교회는 건전한 민주 국가를 건설해 줄 것을 바라면서 이들을 환영하였다.58) 10월 16일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李承晩) 박사는 23일 좌우를 망라한 200여 개 정당 및 사회 단체들의 협의 기구 형식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기 위한 회의를 열었고, 11월 2일 50여 정당 및 단체들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결성 대회를 열었다. 노 주교는 11월 5일 이승만을 방문하였고, 30일 이승만을 주교관에 초대하여 환영 만찬을 베풀어 주었다. 이 자리에는 몇몇 신부들과 장면 형제, 교회 유지 몇 사람도 참석하였다.59) 이에 이승만은 수차례 노 주교와 라리보(Adrien Joseph Larribeau, 元亨根) 주교 등을 초대하여 만찬을 같이한 일이 있었다.60) 또한 노 주교는 이승만이 1946년 12월 미국에 가서 의회, 국무부 등에서 외교 활동을 한 후 이듬해 4월 귀국했을 때61) 4월 23일 창덕궁에서 열린 귀국 환영회에 참석하였다.62)

중국에서 활동하던 김구(金九) 이하 임시정부(이하 임정) 요인들은 11월 23일과 12월 2일에 귀국하였다. 노 주교는 12월 8일 이들의 귀국을 환영하는 미사를 봉헌하고 환영식과 오찬회를 거행하였다.63) 1946년 1월 21일 임정 국무회의에 교회를 대표하여 남상철(南相喆, 프란치스코)이64) 참석하였다. 그해 노 주교는 1946년 5월 2일 김구가 탈장 수술로 용산병원에 입원하자 3일 병문안을 다녀왔다. 그리고 김구를 7월 18일에 만났고, 12월 20일 김구로부터 ‘축 주교승품 4주년’이라는 휘호를 선물받았다.65) 이처럼 교회는 미군정뿐만 아니라 우익 세력과의 협조 관계도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1947년 3월 11일 서재필(徐載弼) 박사 환영준비회의에 남상철이 참석하였고, 7월 12일 노 주교는 서 박사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셋째, 교회는 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정당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도록 하였고, 신문을 창간하였으며, 노동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교회가 선택한 정당은 미군정 시절 사실상 여당이자 보수 세력을 대표하던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이었다. 1945년 9월 4일 개최된 한민당의 발기인 대회에는 서울교구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인 조종국(趙鍾國, 마르코)과66) 박병래(朴秉來, 요셉), 장발(張勃, 루도비코) 등이 참여했고, 한민당 최고 지도자들로부터 참여 부탁을 받은 노 주교의 권유로 16일의 창당대회 시까지는 40여 명이 입당했다. 더 나아가 1947년 초에는 일부에서 ‘그리스도교 민주정당’을 결성하자는 주장에 대해, 이완성(李完成, 요한) 신부는 시기의 미성숙, 민중의 이해 부족 등 특수한 사정을 들어 반대하며 민주 계몽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하였다.67) 그해 9월에는 “민주주의란 그 무엇에 있어서든지 간에 만민을 위한 만민에 의한 만민의 것이래야 하는 것이거든 어찌 만민의 사회생활을 위하는 정치가 일부 정치인에 농단되어야 옳다는 말일 손가? … 나는 교인이 된 자는 우선 탁월한 정치인이 되기를 바란다. … 우리는 세계적인 가톨릭이고 지상에서 주님의 낙원을 건설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정당도 가져야 하고 모두 다 같이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싶다”라며,68) 교회와 신자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기존의 가톨릭운동 영역들 가운데서는 언론 분야가 현저히 발전하였다. 먼저 서울교구에서 발행하는 종합 월간지인 《경향잡지》를69) 1946년 8월에 복간하였다. 언론 기관을 필요성을 느낀 노 주교는 “이러한 현실에 진정한 민주 대한을 이룩하고 참 평화와 자유를 이 나라에 가져오기 위해서는 우선 중상과 모략 파괴와 분열을 위해서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유물 공산주의 극좌 악질분자들의 선전을 봉쇄하고 국민의 정신을 계몽 선도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나는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언론 기관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고70) 하였고, 일간 신문인 《경향신문》을71) 1946년 10월에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한국 교회를 한국 사회와 매개해 주고,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을 급격히 키워준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72) 노 주교는 경향신문의 사시(社是)를 시시비비(是是非非)로 정하는 동시, 유물 · 무신 · 공산주의 사상을 결사 배격할 것도 사시로 정했다.73) 《경향신문》은 창간 3개월 후에 국내에서 최고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제일 큰 신문이 되었고, 다른 군소 신문들은 좌익 우익으로 갈라져 있던 시국에 가장 엄정 중립을 지키는 제일 신임할 수 있는 일간 신문이 되었다.74)

그리고 서울교구 산하 ‘가톨릭청년사’에서 1947년 4월 종교 · 교양 월간지인 《가톨릭청년》을75) 복간하였다. 또한 대구교구 가톨릭 청년 연합회에서 주간 신문인 《천주교회보》를76) 1949년 4월에 복간하였다.

이 밖에도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신부는 1949년 11월 28일 런던에서 열린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 결성식에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77)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는데, 이는 교회가 노동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78)

이와 같이 교회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를 막고 민주 국가를 만들기 위해 미군정과 우익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신자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리고 교회 신문 및 잡지를 창간 · 복간하는 등 언론 분야의 활동이 두드러졌고, 노동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노력하고 있었다.

(3) 신탁통치 반대 및 5 · 10 선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信託統治, trusteeship)안이79) 1945년 12월 28일에 알려지자 전국적인 반탁(反託)운동이 전개되었다. 신탁 통치를 일제의 식민 통치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 모스크바 결정을 전면 거부해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가 흐르게 된 것이다.80) 처음에는 반탁 입장을 취하던 좌익 세력(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은 박헌영(朴憲永)이 평양을 방문하고 온 직후인 1946년 1월 초부터 찬탁(贊託)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이 문제는 우익과 좌익을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다. 1945년 연말과 1946년 벽두에 남한에 몰아닥친 반탁 투쟁의 열풍과 신탁통치 논쟁은 남한 정치에 좌 · 우 대립이 확연하게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81)

첫 번째 반탁운동은 1945년 말부터 이듬해 3월 초까지 전국적인 지지를 얻으며 전개되다가 제1차 미 · 소 공동위원회(이하 미 · 소 공위)가 가동되던 3월 하순부터 5월 초까지는 약화되었다. 신탁통치안이 나오자 임정(한국독립당), 한민당,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등의 우파는 즉각 반발하면서 ‘반탁’을 결의하였다. 거세게 반발하는 임정이 12월 31일 미군정을 대체하는 정부임을 내세우는 내무부 포고문을 선언했다가, 미군정과 한국독립당(이하 한독당)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때 천주교는 다른 주요 종교들과 연합하여 반탁 입장이었다. 즉 ‘대한독립촉성 종교단체연합회’에는 12월 28일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는데, 여기에 천주교도 가담하였다. 29일 임정 요인이 와서 노 주교의 뜻을 물었고, 31일 노 주교는 임정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날 오후 2시 임정 중앙위원회에서는 신탁통치 반대 시위운동을 하였다.82)

임정은 1946년 1월 21일 처음으로 독립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고, 비상국민회의가 소집되었다. 1월 20~24일 열린 주비회의에는 남상철이 천주교를 대표하여 주비회원으로 참여했고,83) 29일 임정에서 비상국민회의 장소로 강당을 사용하도록 요청이 오자 노 주교는 승낙하였다.84) 그리하여 우파는 1946년 2월 1~2일 반탁 및 자주적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비상국민회의’를 명동성당에서 개최하였다. 이때 임정을 중심으로 한 이 회의에 좌익계는 주비회의에서부터 참가를 거부하였다. 2월 1일 회의에서는85) 서울교구 청년회 연합회장 장면이 천주교 대표자격으로 28인의 최고 정무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2월 14일에는 미 군정청의 요청에 따라 최고정무위원회가 본래의 성격을 달리하여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와 김규식)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민주의원은 5월 상순 미 · 소 공위가 결렬된 뒤로는 그 기능이 정지되고 말았다.

좌우합작운동이 그해 10월 7일 재개되었고, 회담의 결과로 10월 2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을 공포하였다. 미군정은 이 운동이 좌파의 공산당, 그리고 우파의 김구와 이승만 세력을 끌어들이지 못한 채 중간 세력의 통합에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12월 정치적 자문기구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장 김규식)을 만들었고, 민주의원이던 장면이 관선으로 입법의원이 되었다.86) 노 주교는 1946년 12월 12일 입법의원 개원식에 참석하였다.

두 번째 반탁운동은 1946년 5월 9일 제1차 미 · 소 공위가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자 전개되었다. 이때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같은 좌파를 억압하고, 이승만과 한독당 등의 우파를 배제하여 온건한 중간파 세력을 양성해 자신들의 세력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이러한 미군정의 의도에 따라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여 중도우파와 중도좌파를 연합하는 좌우합작운동이 5월 25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노 주교는 김규식 박사를 1946년 8월17일, 10월 26일에 만났고, 1948년 1월 6일 프랑스 영사관에서 만나기도 하였다.87) 이때 노 주교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이 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나누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천주교가 포함된 ‘대한독립촉성 종교단체연합회’는 1946년 10월 18일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였다. 《경향신문》은 창간호에서 좌우합작은 필연의 길일 것이고, 반드시 성공해야 될 것이라고88) 하였다. 또한 좌우합작운동을 7월과 10월에 회담을 열면서 타협적인 7원칙을 발표하기도 하였다.89) 이에 반대하는 극우 및 극좌 세력에 대해 경고하였다.90) 이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것은 현실 정치에서 각각 좌우의 세력을 대변할 만큼의 세력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여운형 중심의 중도좌파가 좌우합작운동에서 떨어져 나갔고, 중도우파 위주의 운동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경향신문》은 미 · 소 공위의 활동을 촉구하였다.91)

세 번째 반탁운동은 1947년 초 미 · 소 공위가 재개될 움직임을 보이던 때에 전개되었다. 1947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이 ‘미국은 전체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자유 국가와 제도를 수호할 것’이라는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미국의 세계 전략의 기조가 바뀌었다. 사회주의 국가들까지도 포함된 대부분의 국가들과 호혜적이며 우호적인 통상 및 교류관계를 유지하는 국제주의에서 소련을 배제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적극적으로 봉쇄하는 정책으로 변화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의 한반도 정책도 남한에 단정을 수립하는 방향으로 점차 수정되어 갔다.92) 미군정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 · 소 공위를 재개시킬 방침을 고수하여, 제2차 미 · 소 공위가 1947년 5월 재개되었다. 그해 1월 반탁을 주장하는 정당 및 사회 단체는 미 · 소 공위의 협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소련측의 주장이 담긴 서한이 공개되면서, 한독당과 임정계 중심의 ‘반탁독립투쟁위원회’와 한민당 주도의 ‘애국단체협의회’가 결성되어 미·소 공위 보이콧 및 좌우합작운동 거부에 나섰다. 이에 미군정은 미·소 공위가 반드시 탁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석명(釋明)을 여러 번 되풀이했고, 4월 2일 전 군정장관인 아놀드 소장이 노 주교에게 탁치 문제에 관한 서한이 전달되었다.93) 이때 《경향신문》은 미군정 당국과 중간파 세력의 정치적 선택을 지지하는 듯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94)

1947년 신년호 사설에서 “통일정부 통일건국이 우리의 불이(不易)의 염원이라면야 공위 속개와 그 성공밖에는 재개에 무일책(無一策)이요 공위의 전위로 좌우를 아무래도 웅뚱그려 놓지 않고는 도리가 없음을 이미 당론화하는 바이다. … 공위의 속개가 절대 요건”이라고95) 하였다. 미 · 소 양측이 공위 재개에 합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에 희망의 빛’이며 ‘민중의 열원(熱願)과 성원이 헛되지 말기를’ 원하였으며, “비단 조선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만 경하한 일이 아니다. 서구 문제의 절충 해결은 물론 신 평화수립에 있어 양대 세력의 동향 지향과 그 두리(?裏)를 서로 타진하고 공개하며 나아가서는 세계의 전도를 점하는 일대 시련 내지는 역사적 신 발족의 계기가 여기에 있다”고96) 하였다. 또한 “이 회의의 성공은 다만 조선인을 위한 활로의 신개척일 뿐 아니라 실로 제공(諸公)이 대표한 국가적 성공을 의미한다”고97) 하였다. 이처럼 《경향신문》의 입장은 미 · 소간의 합의를 통해 조선의 즉시 독립을 이뤄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1947년 7월 10일 미 · 소 공위가 사실상 결렬 상태에 이르렀다.98) 이에 미국이 소련과의 협조 및 좌우합작운동을 통한 통일 임시정부 수립 노선, 이 노선에 포함되어 있던 소련을 포함한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 구상을 포기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9월 17일 미 국무장관 마셜(George C. Marshall)은 한국 문제의 유엔총회 상정을 유엔 사무총장에게 요구하고, 신탁통치가 없는 한국 독립을 즉시 실현할 방도를 강구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정치적 쟁점도 신탁통치를 둘러싼 찬반에서 단정 수립에 대한 찬반으로 바뀌어 갔다. 결국 이승만과 한민당 중심의 단정 노선이 급속도로 힘을 얻어갔다.

이러한 때에 7월 노 주교는 《경향신문》의 진용 개편을 지시하였고, 8월초 정지용(鄭芝溶, 프란치스코) 등이 퇴진하였다.99) 그러나 8월까지만 해도 《경향신문》은 종전의 입장을 갖고 있었다. 즉 “공위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그것의 추진은 지극히 간단한 한 개의 수속으로 당면의 장벽이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반탁 특위계의 ○원 단체는 이참에 일단 동 특위로부터의 탈퇴를 석명(釋明)하면 좋을 것이다. … 최후의 경우 또다시 우리에게 책임이 돌아올 구실을 없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100) 하였다. 모스크바 결정의 조속한 이행, 즉 미 · 소 공위 촉진을 통한 정부 수립을 건국의 유일한 방책으로 기대하고 있었다.101) 그해 9월초에 문단의 대표적 우파 인사인 오종식(吳宗植)이 주간 겸 편집국장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경향신문》의 논조는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9월 18일자 사설(‘UN총회에서 무엇을 기대하나’)에서는 반탁의 입장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자체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유엔에서 이 결정을 철폐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102) 9월 28일자 사설(‘동시 철병 성명에 대하여’)에서는 소련측이 미 · 소군이 동시 철병을 주장하자, 이는 “조선에 대해서는 음모적 복선을 숨긴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고, 미국측의 제안인 연합국 감시하의 총선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공산주의 극복을 민족 통합과 민주 국가 건설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미 · 소 양군이 주둔한 채로 연합국의 감시하에 진정한 민주주의적 선거로 남북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은 우리 민족의 요청이기 전에 연합국 특히 미 · 소 양국의 국제적 책임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동시 우리들의 명념(銘念)하고 유의하여야 할 것은 공산주의 사상을 어떻게 극복하여야 할 것인가이다. 이것의 극복과 새로운 민주주의 이념의 수립 없이는 민족 통합과 민주 국가의 재건은 그 만전을 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고103) 하였다.

《가톨릭청년》은 “신탁 내지 후견제야말로 연합국의 자가당착에서 나온 것이요 대국의 체면에 관계되는 큰 실수의 하나인 동시에 조선 삼천만 민족에게 대해서는 은수만대(恩讐萬代)의 기로에 서는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연합국이 공약한 조선 독립의 지연의 원인으로 여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 조선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해결치 못하게 하고 미소 공위를 정돈(停頓)시키고 있는 신탁 문제 그 자체를 취소해야 하는 것이 막부(幕府) 협정의 수정 없이는 조선 문제의 해결은 보지 못한다. …현하(現下)에 있어서 유일한 조선 문제 해결의 방도는 유엔에 상정하는 데 있다고밖엔 더 관찰할 여지가 없다”고104) 하였다. 《경향신문》은 10월 9일자 사설(‘국민대회의 결의 실천에 대하여’)에서 “마샬(George C. Marshall) 장관을 지지하는 것은 우리들의 한결 같은 염원을 관철하는 데 절호의 기회”이기105)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소련 및 좌파와의 모든 협조 노력이 이단적, 반가톨릭적 행위로 단죄되는 가운데, 1947년 9월 이후 교회의 선택은 자연스럽게 남한 단정 노선을 지지하였던 것이다.106)

1948년 1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전후해 이승만-한민당의 단정 수립 추진세력과 중도파-임정 세력(한독당)의 통일 정부 추진세력 사이의 대립은 격화되어 갔다. 이때 한민당은 미 · 소공위에 참여함으로써 반탁 진영에서 이탈하였고, 총선거에 적극 응하였다. 한독당(김구)은 반탁에서 반단정, 즉 통일 정부 수립으로 주장을 바꿔 1947년 9월부터 남북 총선거론을 들고 나오면서 점차 중도 노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좌우합작파(중간파)는 민족자주연맹이라는 연합체를 결성하였는데, 여운형이 암살된(1947년 7월 19일) 후 구심점을 잃은 근로인민당 계열과 여타 중간파들이 김규식을 중심으로 모였다. 이때 노 주교는 김구를 1947년 9월 25일, 10월 11일, 1948년 1월 24일에 만났는데,107) 김구와 김규식의 태도를 주목하고 있다고 하면서 김구의 주장을 모호한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108)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거부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한독당과 노선을 같이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4월말 단독 선거를 막기 위해 북한의 김일성과 협상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지만, 북한이 1948년 2월 6일 인민회의를 열어 헌법 초안을 공포하고 인민군의 창설을 결정하여, 처음부터 통일정부를 수립할 의사가 없었기에, 성과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해 3월 북한에서 남북대표가 협상키로 했다는 소식에 대해 《경향신문》은 조심스럽게 기대를 하면서도 비판하였다. 즉 양군 철퇴를 선행 조건으로 한 남북을 통한 총선거 문제가 주로 제의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그것은 첫째 유엔 결의를 보이콧한 소련의 의도에 부합되어 버리는 폐단이 생길 염려가 있다, 둘째 남북 협상의 원래의 목적은 통일이 소련식 방촌(方寸)에 섭일화(攝一化)될 위험성이 불선(不?)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유엔 결의에 의한 선거에 일분의 지연이 없도록 진력해야만 비로소 협상의 진가를 발휘할 것이라고 하였다.109) 김구와 김규식이 주장한 통일우선주의는 고귀한 소망임에 틀림없었지만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꿈이었다. 이미 스탈린의 1945년 9월 20일 지령이 민족 통일의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청년》은 남북협상노선을 비판하면서, 총선거를 지지하였다. 1948년 3월호에 “공염불처럼 남북통일이란 주장만을 위한 주장으로서는 일시는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될지는 모르나 … 공상에 가까운 구두선(口頭禪)으로 민중을 미혹케 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로부터 도피자라 규정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고, 4월호에 안민식(安民植)은 ‘남북협상의 모순성’이라는 글에서도 현실을 망각하고 이상주의적 관념정치가라는 점, 정치 주장에 있어서 자기 모순을 무비판적으로 긍정하고 있고, 협상파의 모순성을 들어 남북협상론을 비판하였다.110) 《경향신문》은 4월에는 ‘남북 협상이란 이북 협상이요, 그보다도 이북 인민위원회의 독백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111) 비판하였다. 5월호에 남북 협상은 북조선의 협상 의도와 남조선 요인의 의도와는 동상이몽이기에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112) 강조하였다. 8 · 9월호에는 해외 임정 일원이었던 한형권(韓馨權)이 쓴 ‘임시정부의 대아(對俄) 외교와 국민대표자회의의 전말’에서 임정의 대소련 정책을 비판적으로 다룸으로써 당시 정국에서 임정 세력의 남북협상노선을 간접적으로 공격하였다.113) 이처럼 1948년 초부터 남북협상파를 비현실적인 관념론적 정치 세력으로 비판하였다.

1948년 1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하자, 번 몬시뇰은 “정당 단체를 초월하여 단결하고 유엔위원단에 협력하여 유엔위원단의 활동을 더욱 강력하게 하여야 한다. 이것이 소련에 대항하는 것이 될 것이다”고114) 하였다. 장면도 “우리 조국의 완전 독립을 달성시키자는 유엔의 결정대로 국제 정의의 사도적 임무를 띠고 멀리 내조(來朝)한 조선위원단들은. … 최대의 관용과 협조 정신으로 민족적 여론을 통일하여 우리의 공통한 염원과 건국 대업의 구체 방침을 제시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고115) 하였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오자 환영했으나,116) 소련군 사령관은 북한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였다.117) 그해 2월 유엔은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에서만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미군정은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에 교회는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노선에 대해서는 지지를 보내면서 총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그해 《가톨릭청년》 4월호에는 조선 문제의 유엔 이관은 “조선 민족의 지극한 숙망인 동시에 세계가 그 자신의 모순 해결을 위한 정당한 노력의 표시”였고, 남북한 총선거안의 가결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내한은 “진실로 오천년 역사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으며, 기로에 선 민족의 총희망의 정점이며 행운의 희열과 소생의 흥분이 아닐 수 없었다”고118) 하였다. 《경향신문》은 ‘통일의 길은 총선거뿐’이라는 사설에서 “정작 남북통일의 유익한 방도는 유엔 결정을 무시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총선거를 반대하고는 절대로 기(期)할 수 없는 것이다”고 하였고, “남북 협상을 도모하는 일파인 남로당계에서는 유엔 결의에 의한 이번 총선거를 단정 선거라 하고, 이 총선거는 장차 수립될 정부는 단독 정부라고 판정하는 것”에119) 이의를 제기하였다. 5월호에는 “이번 5 · 10 선거는 민족적 성업일 것이다. … 총선거는 4천만의 우리 역사를 더욱 빛나게 할 수 있고, 조국을 영원히 멸망의 심연에 던져버릴 수도 있는 생사의 기도에 선 사업 … 이제 국제적으로 약속된 총선거로써 우리는 정부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오직 이 길만이 최후로 우리에게 남은 독립의 유일한 길이다. 이 대도(大道)를 버린다면 또 무슨 기회가 있을 것인가”라고120) 하였다.

이에 서울교구는 1948년 1월 11일에 각 본당의 유지 교우들로 ‘가톨릭 시국대책위원회’(위원장 조종국)를 구성하였고, 각 본당 차원에서도 ‘본당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경향잡지》 2월호와 4월호에는 당면한 총선거에 대한 상세한 행동 지침을 전하였다.121) 서울 종로 을구 장면(무소속)을 비롯하여 충남 서산 백낙선, 충남 당진 전재익, 황해도 웅진 전덕규, 경남 진양 정순종, 목포 김동신, 충북 진천 박노열, 대구 갑구 김영호 등 8명의 신자 입후보자들을 사진, 주요 경력, 선거구와 기호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122) 특히 교황 비오 12세가 1948년 부활대축일 기념 방송을 통해 “오는 이탈리아의 선거는 공산주의와 비공산주의 간의 시련이다. 이 문명의 소요지는 로마는 그리스도교의 성직과 신자에게 최고의 경계심과 무조건 행동을 요구하는 시대의 발전 속에 잠겨 있다. 그리스도교적 양심의 위대한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하였다.123) 이탈리아 총선거에서 7 대 3의 비율로 그리스도교 민주주의가 승리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조선이 독립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문제가 이로써 결정될 것”이라고124)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장면은 “우리는 5월 10일의 총선거로서 우리의 조국을 찾게 되었다. … 신탁 없는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할 수 있게 됨을 생각할 때 5월 10일 선거는 참으로 민족적 성업”이라고 하였다.125) 총선거에 의해 제헌 국회가 성립된 직후인 1948년 6월 20일 명동 성당에서는 노 주교의 초청으로 입후보한 신자들 중 당선된 이는 장면을126) 포함한 국회의장 이승만 등 국회의원,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 등 과도 정부 차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 촉성을 기원하는 대례미사와 환영 다과회가 베풀어졌다. 이때 국회의장 이승만은 “여기 있는 윤을수 신부와127) 메리놀전교회 안(G. Carroll) 신부도 나와 같이 독립운동을 한 분들입니다. … 어느 해 3 · 1운동을 기념하기로 우리가 모였을 때 교황청 대표 고등 성직자 한분도 우리와 자리를 함께하여 우리 운동을 축복하여 주었습니다. … 이제 우리 대한이 독립하여 견고한 기초를 세우려 함에 있어서 우리는 천주교회 대하여 기대하는 바 실로 큽니다”라고128) 하였다. 23일 노 주교는 비원에서 국회의원 환영회에 참석하였고, 7월 19일 이승만 박사를 방문하였다. 20일에는 국회에서 역사적인 초대 정 · 부통령 선거를 실시한 결과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李始榮)이 당선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 지도자들은 신탁 통치에 대해 반탁 입장을 갖고 있었고, 명동 성당을 우익 세력의 반탁을 위한 집회 장소로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이 회의에서 장면은 최고정무위원이 되었고, 그 후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을 지냈다. 교회지도자들은 좌우합작운동의 성공을 위해 지지를 보냈으나 실패하게 되자, 미·소 공위 활동을 촉구하였다. 또한 그들은 남북대표협상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비판을 하였고, 유엔의 결정대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환영하고 총선거에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적극 참여하였다. 총선거에 8명의 신자 후보자가 참여했으나, 단 1명 장면이 당선되었다.

2) 유엔의 승인 지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북한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승만 정부는 수립 직후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천명하고 그것을 국제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다. 정부 수립과 더불어 한국 외교의 핵심은 신생 정부의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승인 외교였다.129) 현실적으로 남북한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국제적 승인의 획득 여하가 국가 생존을 위한 최우선의 과제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130)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승인 노력에 교회의 활동과 수석대표 장면을 비롯한 대표단의 노력을 살펴보겠다.

(1) 교황사절 번(Byrne) 몬시뇰의 활동

교황청은 1947년 8월 12일 교황사절(敎皇使節)로131) 초대 평양지목구장(1927~1929년)과 일본 교토(京都) 초대 지목구장(1937~1939년)을 지낸 후 일본에서 사목 활동 중인 번 몬시뇰(1888~1950년)을 임명하였다. 임명되기 전 우연한 기회에 일본 주재 교황사절인 마렐라(Paolo Marella) 대주교가132) 그에게 한국에 갈 의향이 없는가를 물었을 때, 그는 기꺼이 찬성하였다. 항구적으로 머물러야 할 공식 지위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얼마 후 교황사절로 임명된 것이다.133)

그는 1947년 10월 9일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이때 노 주교와 각 교구장 등 교회 인사를 비롯하여 김규식 박사, 안재홍(安在鴻) 민정장관, 김병로(金炳魯) 사법부장, 이철원 공보부장 등의 마중을 받았다. 교황청의 교황사절 파견이 미친 효과는 매우 컸는데, 국제공법과 외교 관례상 한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김규식 박사는 “교황의 사절로 오는 것은 곧 종교 사절뿐 아니라 외교 사절까지 의미하는 것이고, 바티칸으로서는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한국을 독립 국가와 동등한 대우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특별한 의미 있고 감격한 마음으로 환영하는 바이다”고134) 하였다. 그래서 미군정 당국과 각 정치 단체 및 교회는 국가로서의 바티칸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135) 교황사절 환영준비위원회(위원장 이기준 신부) 주최로 12일 오전 10시에 명동 성당에서 환영미사를 봉헌하고 11시에 환영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각 교구장과 성직자 외 하지 중장 대리 헤렌 대장, 헬멕 군정장관 대리 등 50여 미군들과 서재필 박사, 김구, 안재홍 민정장관, 경무부장, 문교부장, 이철원 공보부장, 대법원장, 서울시장 등이 참석하였다.

이때 노 주교는 ‘조선의 독립을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교황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므로 거국적으로 경하 감사한다.’고 하였다. 헬멕은 ‘건국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초로 하여야 되는데 교황사절이 이 땅에 주재하게 되어 이 후 그리스도의 정신을 더욱 보급, 추진하게 될 것이므로 건국을 위하여 심행’이라고 하였다.136) 서재필 박사는 ‘누구보다도 가톨릭이 솔선으로 조선 독립을 염원, 승인하며 열국 중 미국이 가장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 데 사절이 미국인이며 또 사절은 조선을 오랫동안 체험하신 만큼 조선의 현실을 가장 명백히 알아보실 것은 우리의 큰 행복이다’는 요지의 환영축사 등이 있었다.137) 번 몬시뇰은 답사에서 “나는 교황사절의 자격으로 교황 성하의 여러분께 대한 인사의 말씀을 전하여 드리고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여러분의 행복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 계시고 지금 여러분이 새 국가를 건설함에 있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우리의 모든 율법과 도덕적 의무의 근본이요, 우리 영원한 장래의 화복을 결정하실 주재자로 승복하는 그리스도의 원칙을 기본으로 하여서 진정한 자주적 민주주의의 새 국가를 건설하는 데 여러분의 굳센 신앙이 크게 이바지하리라는 깊은 신뢰를 가지고 계십니다”고138) 하였다.

《가톨릭청년》도 1947년 10월호 권두언에서 “조선이 독립될 것은 〈카이로〉(1943년 11월 27일), 〈포츠담〉(1945년 7월 26일) 회담에서 공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느 한 나라도 독립을 승인하지 못하고 있는 이 마당에 교황청에서는 제국에 솔선하여 조선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조선 독립을 승인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며 국제 공약 이행을 추진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사절의 내조(來朝)는 조선역사상 획기적 성사(盛事)이며 역사적 의의가 깊다”고139) 하였다. 정규만(丁奎萬, 마르코) 신부도 “이번 교황청에서 직파되신 교황순찰사를 맞게 된 것은 해방 이후뿐만 아니라 조선역사상에 처음 되는 일이다. 이것으로 보아서도 교황청에서 조선의 교회에 대하여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크다는 것과 또한 조선의 자주 독립을 촉진하고 축하하는 가장 뜻 깊은 사실 증거로 본다”고140) 하였다. 《경향신문》은 1947년 10월 12일자 사설에서 “우리는 이로써 그것이 비록 국제법에 의하여 승인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미 운동을 통하여 신앙을 통하여, 두 번째 독립을 승인받았다고 할 것”이라고 하였고, 장면은 “교황청에서 단연 솔선하여 우리 조선을 종교적 견지에서 일개 독립 국가로 승인하여 주는 것은 일대 영단인 동시에 열강에 대한 정의의 시범이다. … 금번의 교황사절 파견은 우리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고도로 향상시켜 준 것”이라고141) 하였다. 조병옥은 1949년 1월 30일 대구교구 최덕홍(崔德弘) 주교 서품식 후 축사에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크나큰 공헌을 남긴 천주교회에서는 제일 먼저 바티칸에서 대한을 승인하여 교황대사를 임명하고”라고142) 하였다.

그리고 10월 18일 오후 2시 서울시 주최로 ‘교황사절이 조선에 주재하게 된 것은 민족적 경사’라 하여 창경원 비원에서 교황사절 환영식을 열었는데 식장에는 미군 장성, 관계, 정계, 학계 요로인들이 5백여 명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143) 당시 각 정파에서 번 몬시뇰을 모시려고 하였으나 모두 거절하고 서울시 주최에만 참석하였다.144)

교황사절로 온 그는 외교관 및 정치가들과의 만남 및 교회 기관 등에서의 연설을 통하여 외교관으로서 많은 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는 1947년에 북조선을 시찰하고자 미군정을 통하여 소련측에 교섭하기도 하였다.145) 3월 1일 이승만 박사, 하지 중장, 군정 장관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대표 및 각급 외교 사절과 각계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그는 외교 사절을 대표하여 “유엔 소총회의 결정은 가능한 지역에서 속히 총선거를 실시함으로써 한국의 중앙 정부를 수립하자는 기쁜 소식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 여러분은 전 세계 민주 국가의 절대적 후원과 지지 하에 소련의 가진 모략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가장 굳센 신념과 씩씩한 보조로 전 국민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서 용감하게 전진하고 계십니다. … 세계의 오늘날은 천주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자들과 천주를 믿고 받드는 국민과 사이에 투쟁, 즉 공산주의의 노예된 자들과 우리 천주 앞에 단결된 자유를 가진 형제들과 사이에 2대 진영에 나누어서 투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세계 여러 민주 국가들은 조선국인 여러분을 형제 국가로 맞아들였습니다. 유엔을 구성한 이 여러 민주 국가들은 반드시 최후의 승전가를 내고야 말 것입니다”는146) 기념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4월 2일 연희대학 강당에서 천여 명의 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배격하라는 강의를 하였다.147)

1948년 8월 15일 역사적인 정부가 수립되는 날 그는 외교사절을 대표하여 “교황청에서는 한국 국민들에 대한 오랜 이해와 함께, 한국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들과 이제 새롭게 구성된 정부가 조화롭게 통치를 할 것임을 충실하고 신중하게 확신합니다. 또한 세계의 자유주의 국가들의 존경을 점점 더 많이 모을 것도 확신합니다. 교황청은 한국에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보내는 결정을 내리고, 이 나라를 독립국의 일원으로서 신속히 인정하는 결정을 내린 유엔의 형제적 관심과 완전히 일치를 이루어 왔습니다. … 이 선거의 실제 과정을 위임했던 유엔 총회에서 이 정부에 대한 완벽한 승인을 할 것이라고 우리는 확실히 자신 있게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유엔 총회의]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새 정부를 한국 정부로서 인정하는 개별 국가들이 꾸준히 증가하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는148) 요지의 축사를 하였고, 비오 12세의 축전을 전하였다.149)

그는 1949년 2월 일본에 있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아마도 당신의 주된 어려움은 공산주의자의 위협일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같은 상황입니다. 두 나라가 공동의 적에 대항하고 상호 번영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것으로 봅니다”고150) 하였다.

대한민국 승인을 위한 그의 활동은 1948년 7월 30일 천주교 신자인 캐나다 외무장관 생 로랑(Louis S. St. Laurent)에게 한국을 지지하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즉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국회의원 선거와 정부 수립을 세울 수 있도록 감시하기 위해 왔다. 그런데 위원단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을 소련이 거부하자 다시 유엔 본부에 회부하여 임시위원회의 투표결과 31 대 2(캐나다와 호주)로 가결되었다. 이에 남한에서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한국의 ‘국민 정부’(national government)를 만들 수 있었고, 소련을 제외한 전 세계의 갈채를 받으며, 이번 선거와 민주주의 승리를 기뻐하였다. 그런데 위원단 9개국(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로,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 구성원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즉 우크라이나는 사절을 보내기를 거절하였고, 시리아는 돌아가 버렸으며, 3개국(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로)은 찬성, 3개국(호주, 캐나다, 인도)은 반대, 불분명은 프랑스다. 반대한 3개국은 모두 영연방 국가들인데, 다른 영연방 국가들은 명백히 호주와 캐나다의 방침에 찬성할 것이다. 또한 프랑스 대표인 봉쿠르(Paul Boncour)가 한국 문제의 해결은 미소간의 협상을 통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엔 총회 결의안 1항을 들어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보고에서 새 정부가 국민의 정부로 인정될 것과 곧 이어 유엔 총회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유엔이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보다 더욱 효과적이고 성공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시험 기회가 바로 한국이다. 이를 위해 장관이 힘써 주기를 바란다’고151) 하였다. 이어 8월 1일 캐나다 교황사절 안토니우티(Antoniutti) 대주교에게 서한을 보내어 “캐나다 대표인 패터슨(Patterson)이 여전히 소련을 자극하는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내용의 보고가 끊임없이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태도가 캐나다 정부의 지침에 의한 것이라는 보고도 있다. … 소련 공산당에 반대하는 한국의 새 정부를 지지할 기회가 캐나다에 주어진다면 캐나다가 그렇게 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이 편지를 보낸다”고152) 하였다.

이에 대해서 외무장관 생 로랑은 안토니우티 대주교에게 ‘번 몬시뇰의 서한을 받았는데, 그는 단지 미국 정부의 정책의 목소리를 내는 일개 미국인일 뿐이다. 패터슨은 캐나다가 영국 연방에 속하기에 미국 정책과 다르더라도 영국 연방의 외교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패터슨에게 개인적 친필 서신을 보내어 그의 태도를 누그러뜨리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그때 마침 뉴욕 메리놀 본부를 방문한 안토니우티 대주교는 맥카시 신부에게 ‘전혀 비판적이지 않았고 우호적이었으며 친절했다. 대주교는 번 몬시뇰의 서한을 받았고, 외무장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황청의 방침 때문에 캐나다 정부에 의사를 표현한 그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번 몬시뇰에게 직접 연락할 수 없었다. 교황청의 방침은 교황사절이 그 나라의 정치적 현안들을 직접 해당국의 선교사나 정부관계자들에게 보내지 않는다. 교황사절이 그 현안들을 교황청 국무장관(Tardini 추기경)에게 보내면, 국무장관이 그 나라 주재 교황사절에게 보내고, 교황사절이 그 현안들을 정부 관계자에게 보낸다’고153) 조언하였다.

번 몬시뇰이 캐나다 외교장관과 교황사절에게 서한을 보낸 것은 유엔 총회에서 캐나다가 한국 정부 승인을 반대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 총선거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1948년 1월 서울에 온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명백해지자, 타개책을 둘러싸고 현저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 중국 등은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으나, 호주 · 캐나다 · 인도 · 시리아 대표 등은 그러한 조치를 반대하였다. 이때 영연방 국가(호주 · 캐나다 · 인도)가 중심이 되어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해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 지역에서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국안을 31 대 2(호주 · 캐나다), 기권 11로 가결한 것에서 알 수 있다.154) 캐나다가 반대할 것 같다는 것은 이승만이 정치고문인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드러난다. 즉 이승만은 “호주는 파리에서 한국 정부 승인을 절대 반대하고 있고, 캐나다 역시 그 뒤를 따를 것이오. … 인도가 또한 반대요, 이 3개국과 또한 시리아가 승인 반대인데, 그 이유는 ‘한국 분단이 영속화’된다는 것이오. 이것이 그들의 주장이오, 워싱톤에서 우리가 호주에 압력을 가할 입장에 있지 못하다면 영국은 이들 두 개 대영제국 연방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 영국이 뒤로 처질 경우 중국 역시 승인을 주저하게 될 것이오. … 캐나다는 시리아, 인도, 아라비아 블록과 더불어 우리를 반대하고, 전 북유럽권을 끌어들여 반대할 것이고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도 우리를 반대하는 등 치열한 싸움이 예상되오. 귀하는 최선을 다해 호주에게 압력을 가하시오. 그들이 지금 선봉에 서서 우리를 반대하고 있소. 호주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다면 캐나다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게 될 것이오”라고155) 하였다.

이러한 번 몬시뇰의 노력에 대한 노 주교의 생각은 번(한국명, 方溢恩) 주교 성성식(1948년 6월 14일) 후 축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방 주교가 우리 한국 독립 건설에 남긴 공적을 말씀드리면 작년 5 · 10 선거에 있어서나 국회 성립에 있어서나 정부 수립에 있어서나 특히 유엔 총회의 한국 승인에 있어 세상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공로와 위대한 숨은 활동이 있었던 것을 본인이 잘 알고 있습니다”고156) 하였다. 또한 이해남(李海南, 요셉)도157) “주한 교황사절이 대한의 오늘을 위하여 얼마나 공헌을 하였다는 것을 아는 이는 적다”고158) 하였다. 


이와 같이 교황사절 번 몬시뇰의 입국에 대해 교회 및 국가 지도자들은 바티칸이 우리나라를 승인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번 몬시뇰은 교회 내의 활동만이 아니라, 교황사절로서 외교 사절들을 대표하여 연설 및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특히 유엔 총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반대가 예상되는 캐나다의 외무장관과 교황사절에게 서한을 보내는 등 적극 지원하였던 것이다.

(2) 노 주교 및 성직자들의 활동

노 주교는 1948년 2월 25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중국대표 류위완(劉馭萬) 박사를 주교관에 초대하여 만찬회를 열었다. 이때 류 박사는 “그들은 건설보다 파괴를 일삼고 있습니다. 즉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이 그것입니다. 북조선과 만주에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을 어떤 짓을 하고 있는가를 …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를 통해서 공산주의 배격에 전진해야 하며 전 민족이 협조하여 이를 반대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고159) 하였다. 또한 2월 26일 필리핀 대표를 초대하였고, 3월 31일 인도 대표단의 초대연에 참석하기도 하였다.160)

서울 가톨릭 청년연합회 주최로 1948년 9월 5일 10시에 혜화동에서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유엔 한국수석대표 장면 박사를 위한 미사봉헌이 있었고, 11시에 동성중학교 강당에서 서울 가톨릭 청년 연합회가 주최한 장행회(壯行會)가 성대히 개최되었다. 장행회에는 노 주교를 비롯하여 서울시내 각 교회 신부와 신도들이 수백 명 참석하였다. 특히 가톨릭운동 지도자인 김철규 신부의 긴급 근의(勤議)로서 교황께 바치는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감사의 메시지를161) 이해남이 낭독하였다.162)

그리고 유엔 총회 표결에 즈음해서 각국 대표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 당시혜화동 본당 주임(1939. 7~1949. 5)이던 성재덕(成載德, Pierre Singer, 1910~1992) 신부의 도움도 있었다. 장면은 “최종 날이 가까워지니까 여러 나라의 대표들이 자기네들의 이해 관계가 깊은 의제가 끝났다거나 또 크리스마스도 가까워지고 하여 짐을 꾸리고 선박 비행기 편을 예약하며 귀국할 차비를 하고 있어 우리가 발이 닳도록 그들을 찾아다니며 호소도 하고 붙잡고 늘어지기도 하였으며 가결 전일의 야간 회의 때도 날은 춥고 배는 고픈데 새벽 두 시까지 문에 지켜 서서 우리 편 제국 대표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애쓰던 일과 다음날 고단해 잠자는 각국 대표들을 찾아가 깨워서 오후 3시까지 회의에 참석하도록 사정사정했다”고163) 하였다. 이때 휴가차 프랑스에 있던 성재덕 신부가 친구들을 동원하여 자동차를 대표들에게 보내어 한국이 유엔의 승인을 얻게 되어 있는 회의석상에 참석하도록 배려를 하였기 때문에 많은 숫자가 참석하여 결국 승인을 받게 되었다.164)

1948년 12월 15일 명동성당에서 있은 ‘유엔 한국승인 감사기원제’에서 노 주교는 ‘오늘 대한민국은 세계 열강의 일원인 영광을 획득하게 되었다. 한국이 승인을 받았다 함은 유물론인 무신론과의 싸움에 있어 유신론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신론을 타파하는 최후 단계에 이르렀다. … 열강국은 한국을 승인하였으나 38선으로 남북은 여전히 양단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앙으로써 전 정신을 기울여 한국의 평화를 위하여 대주보이신 성모 마리아께 남북 통일과 완전한 평화를 갖춘 행복된 나라가 되기를 열심히 기구하여야 할 것’이라고165) 하였다.

이와 같이 수석대표 장면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장행회를 개최하는 등 한국 교회가 한 마음으로 후원하였고, 총회 당시 파리에 있던 혜화동본당 주임 성재덕 신부가 장면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유엔 총회의 승인을 받은 후 교회는 감사 미사를 봉헌하면서, 통일을 기원하도록 하였다.

(3) 수석대표 장면의 활동166)

유엔 총회는 대한민국을 1948년 9월 21일에 개최되는 제3차 회기에 참석하도록 초청하였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그 해 8월 11일 미군정 시절 입법의원에서의 외교적 경험을 살려 제헌 국회에서 외교통으로 활약하였고, 국회 외무위원회 소속이며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천주교의 후원을167) 받고 있던 장면을 유엔 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선출하였다. 대표단은 수석대표 장면, 차석대표 장기영(張基榮), 정치고문 조병옥, 법률고문 전규홍(全奎弘), 경제고문 김우평(金佑枰), 고문 정일형(鄭一亨), 김활란(金活蘭),168) 모윤숙(毛允淑), 김준구 등 9명으로 구성되었다. 장면 대표 일행은 9일 출발, 뉴욕을 거쳐 15일 선편으로 프랑스 르아브르 항을 거쳐 기차 편으로 20일 파리에 도착하였고, 조병옥 일행은 10월 17일 파리에 도착하였다. 유엔 총회는 샤이요 궁(Palais de Chaillot)에서 9월 21일부터 12월 12일까지 58개국 대표가 모인 가운데 열렸다.

장면과 대표단원들은 58개국 대표들을 접촉하여 한국 승인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했다. 장면은 유홍렬(柳洪烈, 라우렌시오) 박사의 조언을 받아 조선고적 도보(圖報) 16권을 호텔의 응접실에 비치해 놓았다. 특히 유엔 대표나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기자에 이르기까지 이 책을 보이며 한국이 비록 신생국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과 역사는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소개하였다. 그는 당시 총회 의장인 호주대표인 에밧트(H.V. Evatt)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0월 3일 소화 데레사 축일 아침에 성재덕 신부와 함께 리지외(Lisieux) 성지를 참배하기 위해 기차를 탔는데, 마침 호주 시드니 교구의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를 만났다. 그의 도움을 받아 호주대표단에서 한국 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Jim Plinscott를 소개받았다. 이들의 도움으로 유엔 호주대표부 대사로 미 · 소 공동위 결렬 후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을 반대해 온 에밧트를 설득해 한국 승인 약속은 물론 적극적으로 승인 외교에 협력해 줄 것을 다짐받았다.169) 또한 주(駐)프랑스 교황청 대사인 Roncalli 대주교(후에 요한 23세)를 찾아가 한국 문제를 설득시켰고, 성녀 소화 데레사가 방문하던 수녀원 수녀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170)

장면은 파리에 도착한 이후 프랑스 정부와 긴밀히 접촉하였고, 유엔 사무국과 절충하여 대표단 일행 전원이 유엔 각종 회의에 옵서버의 자격으로 출석할 수 있도록 절차를 밟아 놓았다. 장면과 조병옥은 아랍블럭(6개국)에 속하여 한국 문제에 관한한 냉담한 입장을 가진 시리아 수석대표 엘쿠리를 방문하여 호소한 결과 동정적 태도를 보이며 아랍블럭도 설득하겠다는 언질을 받았다. 그 결과 시리아는 적극적 태도로 지지하였고 아랍블럭 전체가 가담하였다. 그리고 장면과 조병옥은 인도 수상 네루(Nehru)를 만나 인도의 지지를 요청하였지만 그의 답변은 실망을 주었다. 이에 조병옥의 설득으로 인도 또한 지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각국 대표단을 개별적으로 방문하게 되어 어떤 대표단은 2, 3차례나 방문한 일도 있으며 어느 대표단이든지 1차 이상의 방문을 받지 않은 대표단은 없을 정도였다.171)

이들의 3개월간에 걸친 노력이 있었고, 12월 6일 장면의 요청으로 미국대표단의 무초(John J. Muccio)가 중국대표에게 부탁해서 옵서버석에서 방청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대표를 정치위원회에 초청하자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설전 끝에 한국대표 초청안은 가결되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가 제기한 북한측 초청안은 부결되었다.172) 7일 한국대표는 정치위원회에 참석하였고, 오후에 중국대표 류위완 박사의 보고연설이 끝난 다음 장면은 유창한 영어로 약 40분간에 걸쳐 대한민국의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어 중국을 비롯해 여러 대표들의 지지 연설과 소련측 6개국의 반대 연설이 있었고, 8일(수) 밤 11시경에 투표한 결과 41 대 6, 기권 2표로 한국 독립승인안의 총회 상정을 가결했다. 이어 12일 오후 제187차 본회의에서 찬성 48, 반대 6(소련, 우크라이나,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벨로루시), 기권 1표(스웨덴)로 승인을(결의안 번호 제195호-Ⅲ)173) 획득하였다. 그리고 소련이 제출한 안은 6 대 46표로 부결되었다.174)

장면은 “유엔 총회에 모인 세계 열강 외교단들에게 우리의 실정과 승인의 필요성을 납득시키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소련을 비롯한 공산 국가 대표들의 악착같은 악선전과 방해 공작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우리는 우리 일행이 헤이그의 이준(李儁) 열사 묘지를 참배하고 비장한 결의를 피력한 후, 진실성 있는 노력으로써 50여 개국 대표를 돌아가며 설복하여, 드디어 제3차 유엔 총회 마지막 날 밤의 최종 안건으로 국제 승인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날의 나의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만큼 큰 것이었다”고175) 회고하였다. 이때 그의 노력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엔 총회에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친 장면은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하여176) 비오 12세 교황을 예방하였다. 이때 서울교구 신자들의 서한을 전달했고, 신생 대한민국의 정신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4. 맺음말

해방을 맞이하였을 때,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교황과 교황 문헌을 통하여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해선 안 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세계 여러 나라의 공산정권하에서, 특히 연길과 북한 지역에서 벌어지는 박해 소식을 들으면서 더욱 굳어져 갔으며, 신자들에게 반공 사상을 널리 고취시켜 나갔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은 이 땅에 세워질 국가는 반드시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기를 기대하였다.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교회 지도자들은 가톨릭운동을 새롭게 조명하였고, 교황 비오 12세가 행동의 시대를 강조하자, 적극적으로 정치인들과 교류 및 연대, 정당 활동에 참여를 강조하였다. 이 땅에 자주 독립 국가가 세워지길 바라며 미군정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이어나갔고, 이승만과 김구 등 우익세력을 환영하였다.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주장하여 신자들이 한민당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언론 분야에서 교회 잡지인 《경향잡지》, 《천주교회보》를 복간하고, 《가톨릭청년》과 《경향신문》을 창간하여 신자들을 교육하고 국민들을 계몽하고 선도하는 데도 앞장을 섰다.

1945년 12월 말부터 일어난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교회도 적극 참여하였다. 노 주교는 임정회의에, 장면은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하였고, 회의 장소로 교회 건물을 빌려주기도 하였다.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중도좌 · 우파의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나자, 교회 언론도 지지하였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자, 미 · 소간의 합의를 통해 독립을 이뤄주기 바라면서, 미 · 소 공위 활동의 의미를 부여해 가며 재개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미 · 소 공위가 결렬되고, 유엔으로 한국 문제가 넘어가자, 단정노선이 힘을 얻어갔다. 미 · 소 공위를 통하여 정부 수립을 기대하던 《경향신문》은 1947년 9월부터 소련측을 비난하고 미국측의 제안으로 유엔에서 결의한 대로 총선거를 지지하면서 민주 국가 건설에 앞장서게 되었다. 이때 일어난 남북대표 협상에 대해, 북한측이 현실적으로 소련의 의도대로 될 폐단을 예상하면서 남북 협상을 비판하였다. 5 · 10 총선거를 신탁 없는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민족적 성업으로 규정하면서 시국대책위를 구성하였고, 선거에 임하는 행동 지침을 내리기도 하였다. 8명의 신자 후보가 입후보했지만, 결국 미군정하에서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을 지낸 장면이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는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다했다. 이에 앞서 교황사절 번 몬시뇰의 입국은 교회 및 국가 지도자들에게 바티칸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승인한 것으로 여겨졌고, 번 몬시뇰도 교황사절로서의 임무를 적극 수행하였다. 즉 외교사절을 대표하여 공식 행사에서 연설하고, 교회 및 대학에서 강연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유엔 총회에서 반대가 예상되는 캐나다의 외무장관과 교황사절에게 서한을 보내어 지지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수석대표 장면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로써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성재덕 신부는 그를 위해 여러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장면의 눈부신 활약을 바탕으로 유엔에서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유엔의 승인을 받은 후 교회 지도자들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공산주의자들의 회개와 통일을 위해 성모께 기도하며 도움을 청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 지도자들, 특히 노 주교와 장면은 사명감을 갖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에 함께하였고, 자유 민주주의 독립 국가 건설에 적극 협력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한 교회의 노력은 1970년대와 1980년대 군사 독재 시기에, 이 땅에 민주화를 위해 김수환 추기경 등 지도자들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적극 사회 참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앞으로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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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인철,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권하에서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가톨릭대출판부, 1997 ; ―――, 〈해방정국과 한국천주교회〉,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 ―――, 《한국천주교의 역사사회학》, 한신대출판부, 2006.

2) 장금구, 《사목반세기》, 사제 서품 50주년 기념, 1989, 95쪽. 장금구(1911~1997) 신부는 1939년 6월 사제서품, 장호원 본당 주임(1943. 7~1944. 2)을 거쳐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 교사(1944. 2~1945. 2), 경성천주공교신학교 초대 교장(1945. 2~1947. 4), 성신대학 초대 학장(1947. 4~1948. 2)이었다.

3) 〈새로운 사태〉와 〈사십주년〉을 함께 번역하여 《사회 질서의 대헌장》(이해남 역, 경향신문사)으로 1948년 초에 발행하였다. “지금 사상의 혼란기에 처하여 있는 우리 조선 실정에 꼭 맞는 책이다”(《경향잡지》 1948년 3월호, 45쪽). 1948년 4월호 사설 ‘우리는 정말 놀랐다’에서 일반 서점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고 하였다(《경향잡지》 1948년 4월호, 49~53쪽).

4) 최창무,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반성과 새로운 역할〉, 《민족의 화해를 향하여》,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1996, 348~349쪽 참조.

5) 〈하느님이신 구세주〉3항, 7항, 9항, 19~24항, 58항 ; 변진홍, 〈1930년대 한국 가톨릭교회의 공산주의 인식〉, 《한국교회사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447~460쪽 참조 ; 이동익, 〈사회교리해설〉, 《교회와 사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965~966쪽 참조.

6) 《한국가톨릭대사전》 6,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3787쪽.

7) 교황 서한의 요지는 “1) 귀관의 신앙 재건과 세계 평화 수립에 관한 서한은 세계 평화에 의구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격려를 주고 그들의 신앙을 더 一層 견고하게 할 것이다. 2) 신을 추방한 국가가 인간의 제 권리를 보장하게 된다면 인류는 그 후 노예 상태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고 이러한 결과는 전쟁을 초래할 것이다. 3) 나는 귀관과 신앙의 재건과 세계 평화 수립에 관하여 전력으로 협력할 것이며, 이러한 노력이 성공하기를 희망한다”이다(《가톨릭청년》 1947년 9월호, 42쪽). ; 《경향신문》, 1947년 8월 30일자.

8) 크로닌 신부, 〈맑시즘 이론 해부〉, 《가톨릭청년》 1949년 8 · 9월호, 59~61쪽 ; R. C. 롤렛, 〈파문선언과 공산주의〉, 《가톨릭청년》 1949년 8 · 9월호, 61~62쪽 ; 김춘호, 《사회주의 -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그리스도인》, 가톨릭출판사, 2002, 60~61쪽.

9) 여진천, 〈한국전쟁에 대한 교회의 입장〉,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98~109쪽 참조 ; 나정원, 〈한일합방 이후 한국가톨릭 지도자들의 국가관 연구〉, 《가톨릭 사회과학연구》 16, 한국가톨릭사회과학연구회, 2004, 2~4쪽 참조.

10) 《가톨릭청년》 1947년 7월호, 1947년 6 · 7월호, 1950년 3월호 ; 《경향잡지》 1949년 2월호 ; 《천주교회보》 1951년 2월 25일자, 3월 20일자, 7월 15일자, 10월 1일자, 1952년 9월 5일자, 1953년 4월 1일자 ; 중국에서 공산 정권이 1949년 10월 1일 수립되자마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일변도 정책’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소련과 여타 공산주의 세계와의 일치를 모색할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탕요한, 허종렬 역, 《도전과 희망》, 가톨릭출판사, 2007, 39쪽).

11) 《경향잡지》 1949년 5월호, 66~69쪽 참조. 《천주교회보》는 “우리는 항상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언론과 신앙의 자유를 삭탈하고 있는 비인도적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바이다. 철의 장막 안에서 상습적으로 계속되는 종교 탄압에 제하여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여 왔지만 헝가리 공산당에서 민첸티 추기경에 대하여 취한 독선적 공판에 관해서는 정의의 의분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공판은 가톨릭교회를 전복시키려는 조작으로써 문명사회에 있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폭행으로 규정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천주교회보》 1949년 5월 1일자).

12) 해방 후의 천주교의 반공주의는 훨씬 더 강력한 행동을 동반하였다. 첫째, 미국과 소련을 양 진영의 맹주로 하는 양극화된 냉전적 세계 질서를 배경으로 한다, 둘째, 전후의 세계적 대립에서 한국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공산화된 지역들에서 종교 탄압에 주목한다. 넷째, 중국 및 북한에서 진행된 공산주의자들과의 ‘실제적인’ 접촉과 그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의 경험에 의해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훨씬 증폭되었다. 다섯째, 공산주의의 종교적 성격이 전례 없이 강조됨으로써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극적으로 강화되었다, 여섯째, 자유민주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친화성을 강조한다. 일곱째, 이른바 자유 진영의 맹주인 미국과 교황청의 동맹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강인철, 위의 책, 135쪽).

13) 《가톨릭청년》 1947년 11월호, 7쪽.
14) 《가톨릭청년》 1947년 11월호, 2~3쪽.
15) 《경향잡지》 1948년 5월호, 75쪽.

16) 《경향잡지》 1949년 1월호, 2쪽 ; 노 주교는 1949년에 북한의 성직자와 신자들을 향한 방송 연설에서 “이미 유물론 공산주의자들은 유엔 총회에서 참패에 참패를 거듭하고 있으며 서구 동구 지역에 있어서도 서로 분열되고 서로 투쟁하며 최후의 말로를 걷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세로 보아 불원간 장래에 저 악마적 유물론 공산주의는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라고 봅니다”고 하였다(《가톨릭청년》 1949년 11 · 12월호, 85~86쪽).

17) 정지용(鄭芝溶, 프란치스코, 1902~1950?)으로 당시 그는 경향신문사 주간(1946. 10~1947. 8)이었다. 그는 세례명인 프란치스코, 이것의 한자식 표기인 방제각(方濟各), 방제각의 중국식 발음인 방지거란 이름으로 가톨릭 문헌에 글을 발표하였다.

18) 《가톨릭청년》 1947년 7월호, 29~30쪽.
19) 《가톨릭청년》 1948년 10 · 11월호, 1쪽.
20) 《가톨릭청년》 1948년 8 · 9월호, 102, 104쪽.
21) 《가톨릭청년》 1948년 12월호, 49쪽.
22) 윤세민, 《창간 100년 〈경향잡지〉 연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6, 33쪽.

23) 1950년 2월 주교들이 발표한 공동사목교서(‘사회 질서 재건에 대하여 교도와 동포에게 고함’)에서 “오늘날처럼 공산주의야말로 ‘인민의 아편’임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아야 할 필요가 절실한 시대는 다시없는 것이니, (1) 그것은 소수 공산당이 전 무산대중을 인민의 이름으로 착취하는 것이며, (2) 그것은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지상천국의 헛된 약속으로 무산자를 잠들게 하는 것이며, (3) 그것은 인간을 공산당의 한 부분품으로 만들어 독자적 창조력을 죽여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경향잡지》 1950년 4월호, 52쪽).

24) 연길교구 성직자들의 체포 및 남평에서의 포로생활은 주성도,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주성도 신부 자서전, 분도출판사, 1993, 246~258쪽 참조.

25) 〈연길교구의 참상〉, 《경향잡지》 1947년 4월 1일, 54~59쪽 참조.
26) 《경향잡지》 1947년 6월호, 91쪽
27) 《노기남 대주교 연보》, 1947년 3월 17일, 4월 24일, 11월 8일, 17일자.

28) 《경향잡지》 1947년 6월호, 90~91쪽 ; 8월호, 124쪽 ; 《경향잡지》 1947년 2월호, 22~25쪽 ; 1947년 3월호, 44쪽 ; 1947년 4월호, 60쪽 ; 1947년 6월호, 29쪽 ; 1947년 7월호, 108쪽 ; 1947년 8월호, 124쪽 ; 1947년 9월호, 140쪽 ; 1947년 10월호, 155쪽 ; 1947년 11월호, 171쪽 ; 1947년 12월호, 185쪽. 원조운동은 1947년 3월부터 연길교구를 위해 하다가 7월경부터는 덕원교구까지 포함하여 1948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29) 《경향잡지》 1947년 12월호, 188쪽 ; 서울교구에서는 1948년 1월 27일자로 ‘재 만주간도 천주교도들의 박해진상’을 발표하였고, 《경향신문》에 그 내용이 실렸다(《경향신문》 1948년 1월 28일~30일자).

30) 《경향잡지》 1947년 12월호, 184쪽 ; 《경향신문》 1948년 5월호, 73~74쪽.

31) 《가톨릭청년》 1948년 6월호, 19~43쪽에는 제1期, 소련군 진주로부터 철병하기까지, 제2期 소련군 철퇴 후 ; 7월호 75~87쪽에는 제3期 전반적 박해, 8 · 9월호 82~96쪽에는 성직자들의 수난 과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32) 《가톨릭청년》 1948년 3월호, 59쪽.

33) 이정식, 〈이승만의 단독정부론 제기와 그 전개〉, 《한국사 시민강좌》 38, 일조각, 2006, 73쪽. 미국 신탁통치정책의 목표가 남북의 통일 정부 수립이었던 것에 반해, 소련의 점령 정책은 처음부터 북한에만 소련에 우호적인 단독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지령에 나타난 ‘민주주의 통일전선’ 전략은 소련이 당시 동유럽의 모든 점령지에서 공산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구사했던 기본 정책이었다(황수익, 〈5 · 10 선거의 재조명〉, 《한국사 시민강좌》 38, 80~81쪽) ; 소련은 점령 초기에 소련에 우호적인 북조선만의 정권적 조직의 형성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일정한 시기까지 미 · 소 협조를 유지한다는 기조가 깔려 있었다(서동만,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성립사》, 선인, 2005, 59~60쪽).

34) 《가톨릭청년》에서는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공산주의 팟쇼 정권이니 타도해야 될 것”이라고 하였다(《가톨릭청년》 1947년 9월호, 62쪽) ; “이북 인민군은 소련의 자의로써 이루어진 것으로서 국제법상 괴뢰정권의 불법 군비(軍備)인 것이다”고 하였다(《가톨릭청년》 1948년 10 · 11월호, 1쪽).

35) 김동규, 《북한학 총론》, 교육과학사, 1999, 153쪽 ; 윤공희 대주교는 1961년 7월 KBS 종교시간에 “그들의 세력이 아직 뿌리 깊이 박히기 전까지는 적어도 종교를 허용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 그들의 세력이 차차 확고해지기 시작하자 드러나지 않게 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 얼마 안 가서 종교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하나씩 둘씩 잡혀가기 시작했다”고 방송하였다(윤공희 · 정진석, 《라디오의 소리》, 가톨릭출판사, 2006, 18쪽 참조).

36) 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186~187, 194쪽.
37) 《가톨릭청년》 1947년 9월호, 1쪽.
38)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황해도 천주교사 간행사업회, 1984, 135~139, 181, 348쪽.

39) 《경향잡지》 1949년 6월호에서는 ‘북한 종교박해의 시작인가?’라고 보도하였다 ; 김남수 주교는 “덕원 수도원은 신학교뿐만 아니라 병원, 농장, 제과실, 포도주 양조장, 목공소, 인쇄소 등 거대한 현대식 시설물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북한 공산정권이 그 재산을 몰수하기에 혈안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한국 천주교회와도 연계를 이루어 북한 지역의 천주교 총본산처럼 되어 있었으니 공산정권에게는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리 부정, 불온 인쇄물 배포 등의 죄목을 붙여 신 주교님을 비롯하여 외국인 신부 11명, 한국인 신부 4명, 외국인 수사 22명을 체포하고, 한국인 수사 26명과 신학생 등 73명은 강제 해산시키고 수도원도 몰수하였다”고 하였다(김남수, 《모두 하나되게 하소서》, 천주교 수원교구, 1998, 163쪽)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는 1949~1952년에 순교한 ‘신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6위에 대한 시복시성운동을 선포하였다(《가톨릭신문》 2007년 12월 11일자).

40) 레이먼드. A. 레인, 박준영 역, 《기억의 돋보기》, 성바오로 출판사, 1994, 225쪽 ; 번 주교는 1948년 4월 평양방송이 자신에게 경고와 협박을 한다고 메리놀회에 보고한 적이 있으며, 자신이 순교자 중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Charles F. McCarthy, The Case of the Missing Bishop, MARYKNOLL The Field Afar, 1953, 3, p. 25).

41) 번 주교가 Sr. Elizabeth에게 보낸 1949년 8월 16일자 서한.
42) 번 주교가 Carrie와 Louis에게 보낸 1949년 12월 13일자 서한.
43) 강인철, 〈해방 정국과 한국 천주교회〉, 7~89쪽 참조 ; ―――, 위의 책, 109~115, 123~183쪽 참조.

44) “해방의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으나, 한편 한국의 돌변한 정세와 질서는 어찌될까 마음이 극히 산란했다. 이런 때일수록 일시적 흥분이나 난동을 피하고 극히 냉정한 이성으로 시국과 정세를 잘 파악해야 되리라 생각했다.”(노기남, 《나의 회상록》, 가톨릭출판사, 1969, 308쪽).

45) 《경향잡지》 1946년 8월호, 6~8쪽.
46) 《노기남 대주교 연보》, 1945년 8월 17일, 19일, 22일자.
47) 《노기남 대주교 연보》, 1945년 8월 17일자.

48) 건준은 8월 17일 위원장(여운형)과 부위원장(안재홍) 아래 5개 부서를 설치했다. 2차 조직개편(8월 22일)은 12부 1국제로, 8월 31일 145개 지부 조직, 3차 조직개편(9월 4일)은 미군 진주가 확정되자 중도 우파 안재홍 계열이 탈퇴, 박헌영의 재건파 공산당 계열이 강화하였다. 박헌영 등은 미군이 서울 진주에 앞서 사실상의 정부로서의 위치를 합법화시키기 위해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 회의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을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건준은 모든 사업을 인공으로 넘기고 9월 7일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이완범, 《한국 해방 3년사》, 태학사, 2007, 68~84쪽 참조).

49) 노기남, 위의 책, 309~310쪽 ; 당시 상황을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이인(李仁)은 “몽양(여운형)은 …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간판으로 일본 관리와 접촉을 하고 마치 일본으로부터 정권 이양이나 받은 듯이 날뛰고 있다는 것이다”고 하였다(김학준, 《가인 김병로 평전》, 민음사, 2001, 276쪽 재인용).

50) 가톨릭 액션이란, 비오 11세가 “성직자의 사도 직무를 봉조하는 것임에 이 운동을 여러 성직자들은 자기 본래의 직무상 필요한 부분임을 깨달아야 하고, 평신도는 교우 본분상 당연히 이에 참가해 할 것이다”고 하였다. 가톨릭 액션은 그 조직 자체가 어떠한 당파적 정당에 가담해선 안 된다. 그러나 정치 문제는 언제나 교회의 가르침과 권익과 복지에 심대한 관련성을 가진 만큼,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직간접으로 교회의 교훈과 권익을 침해하는 어떤 율법의 제정이나 정당의 발호가 있다면, 단호히 궐기하여 교회를 옹호하는 행동으로 들어가는 것이다(장면, 〈가톨릭 액션이란〉,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261~268쪽 참조). 행동을 강조한 것은 “공산국가의 유물사상과 세속적 정신이 범람하는 현대에 있어서 교황은 3억 3800만 신자에게 일대각성과 사회적 또는 정치적 행동을 요청하고 신앙을 입증할 필요를 강조하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가톨릭청년》 1947년 4월호, 16쪽). 1947년 9월 7일 비오 12세가 ‘이탈리아 가톨릭 행동대회’에서 “반성과 계획의 시대는 지났다. 행동의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하였다(《가톨릭청년》 1947년 9월호, 1쪽). “가톨릭 신자와 모든 신심자들은 이제 待機의 시기를 지나 행동의 시기에 당면하고 있음은 교황성하께서 갈파하신 바와 같이 주의 이름으로 역사가 명령하는 것이다”(《가톨릭청년》 1947년 11월호, 1쪽). 1949년 4월에 복간된 《천주교회보》도 “굳게 단결할 때요 힘차게 나아갈 때다. 이때는 행동할 때요 발전할 때다”라고 강조하였다(《천주교회보》 1949년 4월 1일자 사설).

51) 노 주교는 “나는 한국을 완전한 민주국가로 건설하고 적색 마수의 공세를 분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일반 신자들에게 순교정신을 가지고 반공 투쟁에 나서기를 호소했고, 일편 뜻있는 신자 유지들에게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당에 가입하여 민주국가 건설에 앞장서기를 격려했다”고 하였다(노기남, 위의 책, 318쪽). 강원길은 “現下 조선의 혼란된 사상계를 바로잡는 확고부동한 지도 이념은 철학에서부터 정치사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망라하고 그러면서도 혁신적인 사상체계가 아니고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오직 가톨릭시즘뿐이다”고 하였다(《가톨릭청년》 1948년 1~2월호, 20쪽).

52) 《천주교회보》 1949년 9월 1일자.

53) 스펠만 대주교는 미사 후 신자들에게 “조선은 이제 해방되었습니다. … 이제 국가를 건설하여 융성케 하는 것은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이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모든 이가 천주의 법칙과 양심을 잘 지켜 각각 자기 책임을 완전히 실행함이 필요합니다”고 하였다(《경향잡지》 1946년 8월호, 12쪽). ‘스펠만 대주교’에 관한 기사가 《가톨릭청년》, 1946년 6월호, 11~18쪽에 실려 있다. 미국에서는 뉴욕대교구장 스펠만 추기경의 후원 아래 1946년 뉴욕에서 Catholics for Korea라는 조직이 생겼다. 이는 미국 신자들에게 극동의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 나라의 하나인 한국을 알리고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Florence D. David, Faith through a Tunnel, The Field Afar, 1946, p. 9).

54) 노기남, 위의 책, 312~313쪽 참조.

55) 이때 하지 중장은 노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어 “조선천주교회 신자들이 새로 얻은 그 신앙의 자유와 이 자유를 잘 씀으로 인하여 국가에 광명을 펴고 모든 조선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새 건설을 하는 데 참된 도움이 될 줄을 아는 본관의 기쁨과 신뢰를 일반 천주교 신자들에게 전하여 주기를 바라며 지금 귀 교회 신자들이 누리고 있는 신앙의 자유가 다시 상실되지 않기 위하여 본관은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굳이 약속하나이다”고 하였다(《경향잡지》 1946년 9월호, 27~28쪽).

56) 《경향잡지》 1946년 11월호, 62쪽 ; 1946년 12월 20일 노 주교 서품일에 로벤손 대좌 이하 7명의 장교들이 주교를 모셔다가 축하를 드리며 만찬을 같이하였다(《경향잡지》 1947년 1월호, 12쪽).

57) 《경향잡지》 1947년 2월호, 29쪽.

58) 노 주교는 “속히 국내 지도자들과 해외에서 입국한 지도자들이 일치단결하여 임시정부라는 명칭을 떼고 완전한 한국 자주독립 정부가 세워질 것을 믿고 기원하며 뒤에서 가능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였다(노기남, 위의 책, 327쪽).

59) 이때 이승만 박사는 “미국 내에서도 조선독립을 가장 주창한 것은 다른 어느 교파보다도 가톨릭교회가 제일 열렬하였다”고 하였다(《경향잡지》 1946년 10월호, 42쪽).

60) 노기남, 위의 책, 322쪽.
61) 이한우,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해냄, 2008, 343~349쪽 참조.
62) 《경향신문》 1947년 4월 24일자. 이때 김구, 김규식, 안재홍, 오세창, 이청천 등이 참석하였다.

63) 임정 요인들은 답사에서 “특히 임정은 중국 어디에서든지 가톨릭교회의 동정과 원호를 받아왔고, 남경 우빈(于斌) 주교는 장개석 씨의 정치고문으로 김구 주석을 만나면 국제 정세를 보아 조선 독립을 위하여 꾸준히 분투하라고 많이 격려하였으며, 특히 포츠담회담에도 나아가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은 반드시 독립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셨다”고 하였다(《경향잡지》 1946년 10월호, 43쪽). 우빈 주교가 구미각국에서 조선 독립 필요를 역설한 것은 1947년 3월 12일 중국 가톨릭 일간 신문인 익제보(益世報) 사장 우요한 신부가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도 말하였다(《경향잡지》 1947년 4월호, 60쪽). 김구는 우빈 주교를 조선 독립 공약에 숨은 은인이라고 술회하였다(《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자).

64) 충북 도의회 의원이었던 남상철은 1942년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 연맹이사장으로 임명되어 노 주교의 외무에 관한 보좌역을 담당하였다(《경향잡지》 1942년 7월호).

65) 《노기남 대주교 연보》, 1946년 5월 2-3일자, 7월 18일, 12월 20일자. 노 주교는 김구의 며느리인 안미생(안중근의 질녀)을 통하여 김구와 친밀한 연락을 하고 있었다(노기남, 위의 책, 323쪽).

66) 조종국(趙鍾國, 마르코, 1896~?)은 1945년 조선 독립 촉성 종교단체 연합대회 재무부장과 1949년 2월 남북 통일 촉성 종교단체 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명동본당 청년회 회장으로서 가톨릭 청년운동의 활성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명동본당사》 Ⅱ,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 2007, 202쪽).

67) 이완성 신부는 “건전한 민주사회 건설은 민주 정당의 실천적 행동에 앞서 인민의 적확한 민주주의 인식에 있어서일 것이다. … 따라서 급선무는 정당 정치에 있지 않고 신문, 잡지, 출판, 교육기관을 통한 민주 계몽에 있을 것이다. 서구의 그리스도교 민주 정당을 선망하여 성급히 초조하는 것은 自警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하였다(《가톨릭청년》 1947년 5월호, 8~9쪽).

68) 《가톨릭청년》 1947년 9월호, 61~62쪽.

69) 1906년 10월 19일 한국 천주교회에서 창간한 《경향신문》의 부록인 《보감》(寶鑑)이 그 전신이다. 1911년 1월 15일 《보감》을 격주간 종교잡지인 《경향잡지》로 변경 · 발행, 1945년 5월 15일자로 폐간, 1946년 8월 1일자로 복간, 1950년부터 7월부터 휴간에 들어가 1953년 7월 1일자로 다시 간행하였다.

70) 노기남, 위의 책, 327쪽.

71) 소공동 74번지에 있던 건물은 본래 일본인 소유였던 ‘근택 인쇄소’로 해방 후 군정청의 관리하에 들어간 것을 조선공산당 세력이 장악하여 ‘조선정판사’로 이름을 바꾸고 당 본부를 둠과 동시에 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발간하였다. 1946년 5월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공산당이 불법화되고 건물이 다시 미군정 관리로 넘어간 것을 같은 해 8월 가톨릭교회에서 교섭하여 불하받은 것이다. 9월 초순 ‘대건 인쇄소’라는 이름으로 점진적으로 업무를 개시하여, 10월 6일 이곳에서 《경향신문》을 창간했다. 초대 사장은 1946년 서울교구로 입적하여 명동성당 성가기숙사 사감이던 양기섭 신부이고, 부사장은 윤형중 신부이다.

72) 1948년 1월 16일자 미군 주간 정보고서에 따르면, 《경향신문》은 극우지로 분류되어 있었고, 발행 부수는 71,000부로서 당시 중앙일간지 23종 가운데 《서울신문》(76,000부)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발행부수를 기록했으며, 전국에 142개의 지국을 두고 있었다(강인철, 위의 책, 226쪽) ; 천주교가 해방 후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된 요인은 무엇보다도 전교에 있었으나 전교의 수단으로 《경향신문》을 가졌던 것이 큰 힘이었다(송원영, 《제2공화국》, 샘터사, 1990, 234쪽).

73) 노기남, 위의 책, 330쪽.
74) 윤형중, 《복자수녀원과 순교자현양회와 나》, 한국순교복자수녀회, 1972, 36쪽.

75) 서울교구 산하 ‘가톨릭청년사’에서 발행하던 종교 및 교양 월간지로 1933년 6월 10일 창간호가 간행되어 1936년 12월까지 발행되었다. 서울교구에서 1947년 4월 ‘신앙과 사회 이념과의 결합’ 목적으로 복간되어 1950년 6월까지 발행되었다가 1955년 1월 속간되었다.

76) 1927년 4월 1일 대구교구 천주공교청년회에서 창간한 월간 《천주교회보》가 그 전신이다. 이 교구 회보 형식의 월간지는 1933년 4월에 폐간되었다가 1949년 4월 1일에 다시 복간되었으며, 1953년 《가톨릭신보》로, 1954년에 《가톨릭시보》로, 1980년에 《가톨릭신문》으로 개칭되었다.

77)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은 1946년 3월 10일 총재 이승만, 부총재 김구, 초대위원장 홍윤옥으로 15개 단체들이 참여하여 결성되었다. 미군정과 우익인사들이 자신들의 세력 확장과 좌익이 1945년 11월 5~6일 조직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를 타도할 목적으로 하향식으로 조직한 노동조합이다. 전평은 1947년 6월 프라하 세계勞聯 총회에 이인동과 한철을 파견하여 정식 가입하였다(《가톨릭청년》 1947년 12월호, 61쪽).

78) “自由世界勞聯의 결성은 세계노동운동사상의 획기적 쾌거인 것이요 반공운동의 대결실이다. … 윤 신부님이 한국대표의 한 사람으로 나서게 된 것은 … 가톨릭에서 노동문제, 사회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큰 관심과 가톨릭적 해결을 주기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 세계 각국에서 특히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반아 등 여러 나라에서 가톨릭 신부들이 노동운동의 제일선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는 사실과 함께 앞으로 우리들의 가톨릭운동의 지향할 바가 무엇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천주교회보》 1949년 11월 10일자).

79) 신탁통치의 “내용은 미 · 영 · 소 · 중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로서 한국 독립의 준비단계로 삼는다는 것과 한국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미 · 소 대표자들이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 좌익에서는 이 trusteeship을 ‘후견, 후원’이라 하여 신탁 통치가 아니라고 辨解해왔고, 미군정도 처음에 ‘원조, 고문’이라는 뜻의 오용이라고 하였으나, 유엔헌장에도 명시되어 있는 트러스트십이 신탁통치임은 분명한 일이었다”(천관우, 《자료로 본 대한민국 건국사》, 지식산업사, 2007, 19쪽).

80) 김학준, 위의 책, 302쪽. 윤형중 신부는 “금년 정초 신탁 문제가 대두하였을 때에 단군의 혈통과 정신을 타고난 조선 인민은 누구나 다 신탁 통치를 절대 거부하는 봉화를 높이 들었으니, 이것은 인간의 천성 바로 그것의 당연한 발로였다”고 하였다(《경향신문》 1946년 10월 27일자). “삼천만은 후견 내지 신탁이라는 문구에 대하여 분노하였다. 36년간의 쓰라린 자주권의 상실을 경험한 민족으로서는 한사코 신탁 통치를 반대하겠다는 결의를 제외국에 표시하였다. 그때의 민족적 감정은 반미반소 반연회적(反聯會的) 死의 抗爭의 기색이었다”(《가톨릭청년》 1947년 9월호, 46쪽).

81)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중심, 2003, 53쪽.
82) 《노기남 대주교 연보》, 1945년 12월 29일, 31일.

83) 남상철은 1945년 12월 15~16일에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정용욱, 위의 책, 45쪽, 각주 6). 1946년 1월 2일 대한독립촉성 종교단체연합회에서 남상철을 군정청 교섭으로 정하였다.

84) 노 주교는 여운홍이 중도좌파노선인 ‘사회민주당’ 발당식을 위해 강당 사용을 요청해 오자 거절하였다(《노기남 대주교 연보》, 1946년 7월 11일자).

85) 이날 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 건국적 회의〉, 곧 국회를 자처하면서 정부격인 최고 정무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고, 그 구성을 이승만과 김구에게 위임했다.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통합되고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추대했다(김학준, 위의 책, 306쪽).

86) 장면은 “정계에 투신하여 민주의원의 의원이 되고, 연달아 입법의원의 의원이 되었다. 과도기 입법의원으로서 나는 주로 좌익 계열과 투쟁, 군정당국과의 절충, 미 · 소 공위에 대한 대책 수립 등으로 정계의 말석에서 일해 오면서 혼란한 정계를 수습하여 독립 국가 체제의 완비와 정권 이양 단계로 지향시키는데 모든 정성을 기울여 노력하였다”고 하였다(장면,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37쪽). 입법의원의 의원인 장면 박사는 공창(公娼) 폐지 문제를 일으켜 회의를 통과시키기에 성공하였다(윤형중, 위의 책, 36쪽).

87) 《노기남 대주교 연보》, 1946년 8월 17일, 10월 26일, 1948년 1월 6일.

88) “우리의 민족적 총역량을 종합 통일함에 있다. 이 단계의 과정을 부정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누구도 좌우 합작을 거부하지 못한다. … 조선의 자주 독립을 필연의 요구이라면 좌우 합작은 또한 필연의 길일 것이다. … 합작공작은 반드시 성공해야 될 것이요, 반드시 될 것으로 믿는다”(〈좌우 합작의 전망〉, 《경향신문》 1946년 10월 6일자).

89) 좌우 합작 7원칙은 좌익 5원칙의 주장에 매우 근접된 감이 있다고 하면서, 위원회의 구성 조직에 있어서 국민의 위임을 받을 만큼 완벽한 진용을 정비해야 하고 대 미 · 소 외교정책의 기준을 확립하여 국민의 총의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좌우 합작의 전도〉, 《경향신문》 1946년 10월 8일자).

90) 극좌 극우를 비판하면서 “좌우 양익이 십분 애국자일 수 있으며 좌우 진영이 도로혀 우리 건국 홍업의 쌍익이 될 수 있음은 다만 좌우 합작에 가능한 것이다”고 하였다(〈좌우 합작 노선〉, 《경향신문》, 1946년 10월 19일자).

91) “조선의 자주 독립은 미 · 소 공위의 속개에 의한 과도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는 것은 벌써 국제 공약일 뿐 아니라 국민의 상식이다”(《경향신문》 1946년 11월 6일자). 황을용은 “이 순간에는 반미 반소의 언행을 삼가고 공위 속개의 국민운동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경향신문》, 1946년 11월 21일자). “공위를 실패케 하려는 반동적 음모와 결정적으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공위를 촉진시키는 당면 과업인 것이다”(《경향신문》 1946년 11월 22일자).

92) 김일영, 《건국과 부국 : 현대한국정치사 강의》, 생각의 나무, 2004, 53~61쪽 참조.

93) 아놀드 소장은 “탁치는 모스크바 협정에서 조력과 원조 이외에 다른 설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 조선인은 실제적이어야 하며, 현실적이어야 하며, 트러스트쉽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고찰이 있어야만 한다. … 모스크바 협정 작성자들은 이 조력과 원조를 ‘트러스트쉽’으로 표현했다”고 하였다(《경향신문》 1947년 4월 23일, 25일자).

94) 경향신문의 초기 경영진이 폭넓은 편집 자율권을 보장하였다. 사장 양기섭 신부, 주간 정지용, 편집국장 염상섭 등이었는데, 양 신부는 편집 부문은 편집국장과 부장들에게 완전히 일임하였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중간 노선을 가졌던 정지용과 염상섭 등은 교회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사설을 집필하고 신문을 제작할 수 있었다(경향신문 사사편찬위원회, 《경향신문 40년사》, 경향신문사, 1986, 88~90, 96쪽). 노 주교는 《경향신문》에 대해 교회 내 인사들로부터 많은 항의와 충고를 받았고, 여러 번 회의를 열면서 걱정하고 고민하였다(《노기남 대주교 연보》, 1947년 1월 11일, 15일, 26~28일, 2월 2일, 9일, 13일, 3월 14일, 6월 19일, 30일, 7월 3일, 10~11일, 29일, 8월 21일, 27일 등). 노 주교는 “경향신문으로 인해 교회 내의 많은 신부와 신자들로부터 많은 충고와 항의를 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신문의 논조가 타당했으면 누가 아무리 무슨 비난을 해도 편집자에게 소신대로 해 나가라고 격려하였다”고 하였다(노기남, 위의 책, 331쪽).

95) 《경향신문》 1947년 1월 1일자.

96) 《경향신문》 1947년 4월 24일자. 《경향신문》은 이날 “미 · 소 공위를 오는 5월 20일 서울에서 개개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에 … 미묘한 국내 사태 가운데 불길한 단독정부설이 떠돌아 앞날의 거친 폭풍을 예감시키는 음산한 암운이 잠기었던 혼탁한 공기가 이 한 가지 사건으로 혈로(血路)를 타개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경향신문》 1947년 4월 24일자).

97) 《경향신문》 1947년 5월 15일자.

98) 《경향신문》은 ‘공위의 촉진을 위하여’라는 사설에서, “그동안 우리는 거족적으로 공위를 지지하여 조속한 임시정부의 출현을 기대하여 왔다. … 우리들로 하여금 공위의 전도에 대한 불안을 갖게 하고 있다”고 하였다(《경향신문》 1947년 7월 31일자).

99) 주간 정지용은 1947년 8월 2일까지 근무, 새 주간으로 8월 3일 조용만(趙容萬), 9월 13일 오종식 부임.
100) 《경향신문》 1947년 8월 5일자.

101) 1947년 8월 15일 사설(‘해방 제 2주년에 제하여 삼천만 동포에게 호소함’)에서 “우리가 자주독립의 신 국가를 갖게 되는 길은 연합국 특히 미 · 소 양국이 3상 결정을 급속히 실천하여 주는 데 있다. … 양국이 화충(和衷)과 협조를 쾌속한 타결에 도달하여 우리로 하여금 고대하는 임시 정부를 수립하게 하여 주기를 절망(切望)하는 바이다”고 하였다(《경향신문》 1947년 8월 15일자).

102) 1947년 9월 18일 사설에서 “유엔 각 대표는 38선 장벽의 철폐, 모스크바 삼상 결정 중의 신탁통치안의 철폐를 기필(期必)함으로서 우리 민족 독립의 선결 조건이 된다는 것을 명기하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경향신문》 1947년 9월 18일자).

103) 《경향신문》 1947년 9월 28일자.
104) 《가톨릭청년》 1947년 9월호, 49, 52, 54쪽.
105) 《경향신문》 1947년 10월 9일자.

106) “《경향신문》이 이렇게 유물 공산주의 타도에 앞장서고 동시에 남한에만이라도 독립 정부를 수립하는 데 적극 지지 협조한 것은 바로 이승만 박사의 정치 노선을 지지 협조한 것이 되었다”(노기남, 위의 책, 333쪽). 유엔에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파견이 가결되었음에도 소련이 거부하자, 《경향신문》은 “길은 눈앞에 바로 놓여 있다. 남조선만이라도 爲先 독립하여야 한다는 길뿐이다. 좋든 싫든 이 길뿐이다. 이 길만이 우리 민족이 당면한 역사적 필연이요 긴급한 과업이다”고 하였다(〈‘보이콧트’의 뒤에 오는 것〉, 《경향신문》 1947년 11월 2일) · 《가톨릭청년》은 “남조선 단정은 이·영·중의 원조로 유엔에 가입하여 국제 무대에 등장하게 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나설 때 북조선인민위원회 단독 정권은 더욱 더 경제적 곤란에 봉착하고 민심은 완전히 남조선으로 쏠리고 북조선은 허무한 소련의 일연방화하고 암흑과 빈곤의 세계화할 것이다”고 하였다(《가톨릭청년》 1947년 9월호, 57쪽).

107) 《노기남 대주교 연보》, 1947년 9월 25일, 10월 11일, 1948년 1월 24일자.

108) 《노기남 대주교 연보》, 1948년 1월 29일자, 2월 7일자. 박석흥은 “김구와 민족자주연맹의 이러한 통일 방책은 남과 북 모두에서 수용되지 않았다. 김구·김규식의 협상에 의한 통일 방안은 현실 정치와 양립 가능성이 없었다”고 하였다(박석흥, 《건국 60년 한국의 역사학과 역사의식》, 한국학술정보(주), 2008, 402쪽). 미군정 정치고문인 제이콥스(Joseph E. Jacobs)는 여러 차례에 걸친 전문에서 남한 중간파가 애매하고 유동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보고했다(도널드 스턴 맥도널드, 한국역사연구회 1950년대반 역, 《한미 관계 20년사(1945~1965년)》, 한울아카데미, 2001, 73쪽).

109) 《경향신문》 1948년 3월 28일자.

110) 《가톨릭청년》 1948년 3월호, 1쪽 ; 4월호, 76쪽. 4월 19~28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는 남북 46개 단체 54명이 참석하였다. 그 뒤 며칠 동안 이른바 지도자 회담이 열렸다. 그 결론으로 발표된 것은 미 · 소 양군 철수 뒤에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협의회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뒤 전국 총선거로써 입법 기관을 설치하여 헌법을 제정, 정식으로 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공산측이 주장해 오던 방안과 일치하여, 결과적으로는 북한 공산 정권의 예정표에 따라 남한의 총선거를 방해하고 소련의 양군 철수안을 지지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천관우, 위의 책, 38쪽). 평양회의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성공한 회의였으나 양 김에게는 북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이용만 당한 실패한 회의였다(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사》, 현음사, 2001, 498쪽).

111) 《경향신문》 1948년 4월 10일자. 14일자에는 ‘협상실패면 何面目?’ 기사가 실려 있다.
112) 《가톨릭청년》 1948년 5월호, 80쪽.
113) 《가톨릭청년》 1948년 8 · 9월호, 68~73쪽.

114) 《경향신문》1948년 1월 10일자. 그는 신년사에서도 “방금 조선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즉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두 가지 사상이 대립되어 민족을 분열시키고 건국을 지연시키고 있다. 이제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촉진시키고자 UN위원단이 來朝하게 되었으니. … 국내 각 정당은 일치단결하여 UN을 추진시켜 속히 조선이 독립되기를” 기원한다고 하였다(《경향신문》 1948년 1월 1일자).

115) 《경향신문》 1948년 1월 22일자.

116)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맞이한 것은 “독립의 선물을 안고 이 땅에 우리를 찾었다. 오직 이 기회가 국제적으로 공약된 독립 달성의 최후의 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가톨릭청년》 1948년 1 · 2월호, 1쪽). “조선 민족에게는 이 길이 최후로 남은 국제 노선이기 때문에 민족 청년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사로 간주하게 되었다”(《가톨릭청년》 1948년 1 · 2월호, 102쪽).

117) 《가톨릭청년》은 “우리가 냉혹한 무력 없는 전쟁에서 악몽처럼 연상되고 예측할 수 없었던 행운 중의 비애는 당연히 운명적으로 도래하고야 말았으니, 그것은 38 이북에 진치고 있는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전적 거부였다”고 비판하였다(《가톨릭청년》 1948년 4월호, 3쪽).

118) 《가톨릭청년》 1948년 4월호, 2~3쪽.
119) 《경향신문》 1948년 4월 13일자, 14일자.
120) 《가톨릭청년》 1948년 5월호, 3쪽.

121) 행동 지침으로 “총선거를 앞두고 각 지방 유지 교우들을 향하여 진심으로 말하노니, … 교우 중 유망한 이가 있거든 출마시키라. … 교우 중에 이런 이가 없거든 외교 사회에서 출마하는 이들의 인격, 사상, 품행 등을 조사 연구하여 그 중에 가장 가톨릭 정신에 가까운 자를 가리어 모두들 일치하여 투표할 것이다.”(《경향잡지》 1948년 2월호, 17~18, 27~28쪽. 교황은 “이탈리아 全土의 가톨릭 교도에 대하여 오는 4월 18일 선거에서 신의 섭리와 신앙 및 교회의 권위를 지지하는 입후보자에게 투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였다(《경향신문》 1948년 3월 6일자). ‘총선거에 임하는 국민적 태도 - 어떻게 투표할 것인가’(《가톨릭청년》 1947년 4월호, 2~8쪽 참조). 교황 비오 12세는 1946년 3월 12일 동년 7월에 실시될 이탈리아 총선거에 대하여 한 강연에서, ‘천주와 종교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자에게만 투표하라’고 권고하였다. 교황이 4만 명 이탈리아 부인들에게 한 말은 곧 전 세계 가톨릭 신자에게 한 말과 같다. 즉 ‘선거에 있어서 양심적 책임을 수행하라. 먼저 모범을 보이라. 그리고 누구를 선거해야 옳을지 모르는 무지한 대중의 벗이 되어라.’(《가톨릭청년》 1947년 4월호, 17, 19쪽).

122) 《가톨릭청년》 1948년 5월호, 68~76쪽 참조. 이 책에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대변자 장면 씨를 국회에 보내자’는 광고가 실려 있다.《경향잡지》 1948년 4월호, 75~76쪽에는 이들 외에 울산 을구 文昌俊, 창원 갑구 玄在萬 등이 나온다.

123) 《가톨릭청년》 1948년 5월호, 37쪽.
124) 《경향잡지》 1948년 5월호, 68~69쪽.
125) 《경향신문》 1948년 5월 8일자.

126) 장면은 당선 소감에서 “불초한 이 사람에게 전 투표의 5할 이상이 왔다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며, 여러분의 과분한 신임에 대하여 극히 책임이 중함을 느낀다. 앞으로는 유권자 제위의 충복이 되어 미력이나마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전 심혈을 바치려 하며, 여러분의 후의에 깊이 감사하는 바이다”고 하였다(《경향신문》 1948년 5월 13일자).

127) 윤을수 신부는 미국에서 조선 독립을 위하여 ‘조선가톨릭회’를 조직하였다. 회원은 약 160명가량으로, 뉴욕 교구장 스펠만 대주교를 고문으로 두고 미국 상 · 하 양원의 대의원을 비롯하여 ‘내 길을 가련다’라는 미국 영화의 주역인 Bing Crosby도 가입하였다고 한다(《가톨릭청년》 1948년 4월호, 86쪽).

128) 《경향잡지》 1948년 8월호, 124쪽 ; 《경향신문》 1948년 6월 22일자.
129) 고휘주, 〈제1공화국의 대외정책〉, 《한국외교사 Ⅱ》,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집문당, 1995, 325쪽.

130) 허동현, 〈제2공화국 국무총리 장면(1899~1966)의 삶과 꿈〉, 《장면 총리와 제2공화국》, 경인문화사, 2003, 74쪽.

131) 번 몬시뇰은 조선이 아직 독립되지 못하였으므로 교황 순찰사(Apostolic Visitor)로서 부임하나 교황 사절(Apostolic Delegate)과 동등한 권한을 갖고 있었고(《경향잡지》 1947년 9월호, 140쪽), 1949년 4월 7일 교황 사절이 되었다. 교황 사절은 지역 교회를 위해 파견되는 사람들을 말하며, 이 사절에게 국가에 대한 임무가 더 주어지면 교황 공사 또는 교황 대사로 불린다. 1963년 12월 11일 교황 사절이 교황 공사로, 1966년 9월 5일 교황 대사로 승격되었다(최석우, 〈한국 천주교와 로마 교황청〉, 《한국교회사논총》 Ⅰ,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731~733쪽 참조).

132) 마렐라 대주교는 일본의 4번째 교황 사절(1933년 10월~1948년)이었다. 오기선 신부는 1941년 12월 25일 일본에 가서 교황 사절인 마렐라 대주교를 만나 서울 교구장으로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을 임명해 달라고 설득했고, 그 결과 1942년 1월 18일 노기남 교구장이 착좌하였다(오기선,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성 황석두 루가 서원, 1986, 225~227쪽 참조).

133) 레이먼드 A. 레인, 위의 책, 184~185쪽.
134) 《경향신문》 1947년 10월 11일자.
135) 《경향잡지》 1947년 11월, 163, 172쪽.

136) 이러한 견해는 《가톨릭청년》에서도 발견된다. 즉 “그리스도교 근본 정신에 입각한 적어도 이와 배행하지 않는 민주주의야말로 진정한 것일 것이다. 교회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원천이요 배토인 때문이다.”(《가톨릭청년》 1947년 6월호, 38쪽), 그리스도교 교회는 대립하는 양 진영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중심적 세력이고, 교회야말로 ‘민주주의의 중추세력’이라고(《가톨릭청년》 1948년 4월호, 1쪽) 하였다.

137) 《경향잡지》 1947년 11월호, 161~163쪽 참조.
138) 《경향잡지》 1947년 11월호, 164~165쪽.
139) 《가톨릭청년》 1947년 10월호, 권두언, 1쪽.
140) 《가톨릭청년》 1947년 11월호, 4~5쪽
141) 《경향신문》 1947년 10월 12일자.
142) 《가톨릭청년》 1949년 1~3월호, 3쪽.
143) 《경향잡지》 1947년 11월호, 172쪽.
144) 《노기남 대주교 연보》 1947년 10월 17일자.
145) 《가톨릭청년》 1947년 10월호, 7쪽.
146) 《가톨릭 청년》 1948년 3월호, 40~41쪽.
147) 《경향잡지》 1948년 5월호, 75쪽.

148) 《경향잡지》 1948년 9월호, 140쪽. 이때 번 몬시뇰은 유엔 총회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을 대체로 방해했던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프랑스 및 캐나다 사절들을 풍자적으로 공격했다. 즉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려 ‘만장일치’로 그들 스스로 감독한 총선거에 선출된 새 정부에 보내준 공정한 지지에 대해 칭찬하였던 것이다(번 몬시뇰이 Dear Mother에게 보낸 1949년 5월 11일 혹은 12일 서한). 맥아더 장군은 그가 모든 연사들 중에서 가장 큰 갈채를 받았다고 하였다(레이먼드 A 레인, 위의 책, 193쪽). 선거 결과에 대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공보 59호’를 발표하여 총선거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에 이승만의 교섭과 한민당의 규탄 성명, 유엔 위원단의 규탄 시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한 설득과 압력을 통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6월 25일 5 · 10 선거의 효력을 인정하였다(이한우, 위의 책, 314쪽).

149) 교황의 축전 내용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들의 중대한 책임감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이승만 대통령과 새 정부의 모든 각료들을 지켜주시고 강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한국 전체가 통일과 평화, 행복을 이루도록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빕니다”이다(번 몬시뇰이 메리놀 본부에 있는 Charlie McCarthy 신부에게 보낸 1948년 8월 17일자 서한에 동봉되어 있다).

150) 번 몬시뇰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1949년 2월 28일자 서한.

151) 번 몬시뇰이 Louis S. St. Laurent에게 보낸 1948년 7월 30일자 서한. 프랑스 대표인 Boncour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으로서 절대 찬성 혹은 절대 반대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늘 양다리를 걸치면서 5·10 선거를 적법한 선거로 인정하기를 거절했다. 이에 미군정은 그를 접대하기 위해 1주일에 50만 엔을 썼지만 선거를 적법하고 공정한 것으로 인정하게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번 몬시뇰이 Dear Mother에게 보낸 1949년 5월 11일 혹은 12일 서한).

152) 번 몬시뇰이 Antoniutti에게 보낸 1948년 8월 1일자 서한. 캐나다 대표인 Patterson은 ‘공산주의에는 정말로 무엇인가가 있는 듯하다. 공산주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보라’고 하였고, 적법한 선거로 인정하기를 거절했다. 또한 그는 ‘번 몬시뇰은 미국인이고, 한국에서의 미군 정책을 후원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번 몬시뇰이 Dear Mother에게 보낸 1949년 5월 11일 혹은 12일 서한).

153) Charlie McCarthy 신부가 번 몬시뇰에게 보낸 1948년 9월 17일자 서한.

154) 이완범, 《한국 해방 3년사》, 태학사, 2007, 181~183쪽 참조 ; 김학준, 〈분단의 배경과 고정화 과정〉,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2007, 105~107쪽 참조.

155) 이승만이 올리버에게 1948년 7월 26일 쓴 서한(로버트 T 올리버, 박일영 역,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계명사, 1990, 251쪽).

156) 《가톨릭청년》 1949년 6 · 7월호, 2~7쪽.

157) 이해남(요셉)은 성신대학 교수(1946. 4~1948. 12)로 재직하고 있었다. 장금구(경성천주공교신학교) 교장 신부, 장면 박사, 이해남 교수 등이 노력한 결과 학무 당국으로부터 1947년 4월 대학승격을 인가받았으니, 당시의 인가 명칭이 성신대학이었다(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편찬위원회,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2007, 199~200쪽).

158) 《경향신문》 1948년 9월 12일자.
159) 《가톨릭청년》 1948년 3월호, 52~53쪽.
160) 《노기남 대주교 연보》 1948년 2월 26일자, 3월 31일자.

161) 비오 12세께 ‘가톨릭적 교육 사업을 주로 한 문화 사업, 서울대교구 창설과 노 주교의 대주교 승품, 교황사절의 교황 대사 승격과 주교 승품, 시복되지 못한 순교자의 시복’을 간곡히 요청하였다(《경향잡지》 1948년 10월호, 150~151쪽). 이에 대해 비오 12세는 “이 기회에 우리는 그들에게 이를 말이 없는 바도 아니니, 비록 현금 시대가 위험하고 안정되지 못한 형세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굳세게 항구할지며, 신덕과 애덕으로써 부지런히 활동하여 경쾌하게 행진할지며, 항상 서로 화목하여 일치단결할지며, 효성 있는 자녀처럼 교회의 권위자들을 존경할지며, 자기 신익을 위하여 노력하는 성직자와 전교사들에게 순종하고 사례하는 마음을 보존할지니라”는 글을 보내 주었다(《경향잡지》 1949년 2월호, 18~19쪽).

162) 《가톨릭청년》 1948년 8 · 9월호, 112쪽 ; 《경향잡지》, 1948년 10월호, 155쪽 ; 백동 70년사 편찬위원회, 《백동 70년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 교회, 1997, 105~106쪽.

163) 장면, 〈(한국의 은인) 덜레스 씨를 추억한다. 상〉, 《조선일보》 1959년 6월 1일자.

164) 유영도 신부가 로마에서 장면에게 직접 들었다고 증언하였다(서울성가소비녀회 역사자료실 편, 《성재덕 신부》, 서울성가소비녀회, 1993, 269쪽). 성 신부는 1948년 12월 16일 장면의 교황청 방문에도 함께하였다.

165) 《가톨릭청년》 1948년 12월호, 48~49쪽.

166) 허동현, 〈대한민국 승인을 위한 수석대표 장면의 활동〉,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유엔의 승인》 - 대한민국 유엔승인 6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 서강대학교, 2008, 87~122쪽 ; 홍순호, 〈장면 외교의 명암(1946~1952)〉, 《경기사학》 5, 2001, 150~158쪽 참조.

167) 이승만은 정치고문인 로버트 T 올리버에게 보낸 서한(1948년 7월 26일)에서 “그는 유엔한위가 가장 쉽사리 동의해 줄 인물이오. … 그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단장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오. … 어딜 가나 가톨릭교회의 후원이 있을 것이고 그는 국회의원이오”라고 하였다(로버트 T 올리버, 위의 책, 251쪽).

168) 김활란은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한국 문제의 유엔 총회 상정이 연기될 가능성이 보이자 이승만에게 긴급 연락하여 즉시 상정하도록 국제적 압력을 가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 한국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시도하였다(《서울신문》 1948년 12월 4일자).

169) 건국기념사업회, 《대한민국 건국 10년지》, 1955, 535~536쪽 ; 유홍렬, 〈민주주의 상징〉,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402~404쪽 참조. 그런데 유영도 신부는 1992년 3월 18일 한 · 불 문화 교류 연구회 창립 기념 간담회에서 ‘파리 UN총회에서의 한국 교회와 성재덕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를 발표하였다. 장면 박사에게 로마에서 들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루르드로 가는 길에 만난 분은 브라운 주교라고 하였다(《성재덕 신부》, 268~269쪽). 12월 13일 장택상 외무장관은 총회의장 에바트에게 경의와 감사를 드리는 전보를 보냈다(《경향신문》 1948년 12월 14일자).

170) 윤형중, 〈다채로운 업적〉,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412쪽.

171) 조병옥, 《특사 유엔 기행》, 덕흥서림, 1949, 53~54, 64~68쪽 참조 ; 조병옥, 《나의 회고록》, 민교사, 1959, 252~261쪽 참조.

172) 박헌영, 홍명희, 홍기주, 박정애, 이영 등으로 구성된 20여 명의 북한 대표단은 파리총회 개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유엔총회에서 초청 결정을 하지 않는 한 북한 대표의 입국을 거절키로 하였다. 이때 체코슬로바키아 대표의 북한 대표단 초청을 동의하여 표결에 붙인 결과 38대 6으로 부결되었다(조병옥, 《특사 유엔기행》, 71쪽).

173) 제3차 유엔총회는 “임시위원단이 감시 및 협의를 할 수 있었으며, 또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한국 지역에 효과적인 통치와 관할권을 가진 합법 정부(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과 또 이 정부는 한국의 이러한 지역의 유권자의 자유 의사의 정당한 표현이고 임시위원단이 감시한 선거에 기초를 두었다는 것과 또한 이 정부가 한국 내의 여사(如斯)한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하였다(정일형, 《유엔과 한국문제》, 국제연합 한국협회, 1961, 9쪽 ; 외무부, 《〈유엔〉과 한국문제의 역사적 배경》, 7~8쪽).

174) 당시 《경향신문》은 제3차 UN 총회 도미(掉尾)의 쾌거, ‘세계 만방 대한민국 공동승인’이라고 대서특필하였다(《경향신문》 1948년 12월 14일자). 그런데 《경향잡지》는 장면 박사가 교황께 알현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국제총회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48대 6의 절대 다수로 승인시키기에 성공한 요한 장면 박사”라고 하였다(《경향잡지》 1949년 1월호, 13쪽) · 《가톨릭청년》은 1949년 4월호에 ‘장면 박사 외교 활약 화보’ 12장을 실었을 뿐이다.

175) 장면,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37~38쪽 ; 장면, 〈한국민주주의 십년, 외교 (上)〉, 《중앙일보》 1955년 8월 2일자 ; 장면, 〈(특별기고) 내가 걸어온 길〉, 《희망》 1957년 1월호, 45쪽 참조.

176) 《경향신문》은 “이는 전후 외교상으로 바티칸의 의의가 국제적으로 중대한 만큼 금번 장면 씨의 교황청 방문은 남북 통일을 앞둔 신생 대한 외교 면에 일대 비약이 아닐 수 없으며, 동 방문의 결과는 국제적으로 지대한 好영향을 초래할 것으로 자못 기대된다”고 하였다(《경향신문》 1948년 9월 8일자).

[교회사 연구 제32집, 2009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여진천(배론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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