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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그리스도인이 일상에서 거룩해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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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6 ㅣ No.1196

그리스도인이 일상에서 거룩해지는 길

 

 

인간에게는 일차적 욕구인 생존의 욕구 외에 감성적 욕구인 사랑, 안정, 인정, 지성과 무엇보다 영적 충만함을 갈구하는 욕구가 있다. 즉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는 “교회 안에서 모든 이는 교계에 소속된 사람이든 교계의 사목을 받는 사람이든 다 거룩함으로 부름받고 있다”(제5장 39항)고 말한다. 거룩함은 무엇일까? ‘거룩함(sanctification)’이란 한마디로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상에서 어떻게 성화의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

 

구약의 히브리어 ‘카도쉬’나 신약의 그리스어 ‘하기오스’는 모두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 단어와 연결된 거룩한 시간, 사람, 장소, 사물 등이 모두 ‘하느님’과 연관된다. 탈출 19,6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내 백성’으로 불린다. 백성 전체가 거룩하다는 속성을 부여받는다(신명 7,6; 14,2.21; 26,19; 28,9 참조).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sanctified)’ 사람들을 “성도”(1코린 1,2)라고 부르며, 하느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것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1테살 4,3)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도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을 겪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화의 삶은 하느님과 함께 그분의 본질인 거룩함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일상에서 우리 모두는 어떻게 성화의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 이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가 아주 명쾌히 잘 설명해 준다. 라너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은총으로 인간에게 당신을 내주셨기에 인간은 원칙적으로 성화되어 있다고 보며, 이 성화는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구체적 일상의 삶에 현존하실 뿐 아니라 그 일상의 삶을 통해 거룩함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일상의 삶을 벗어난 은둔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고, 흔히 기도 중에 일어나는 어떤 황홀한 경험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출발점으로 하고, 실제로 역사에 현존하셨고 구체적 현실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화도 우리의 육체와 마음, 지성이 통합된 가운데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야 한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에게 성화의 삶이란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현실을 직시하며 하느님뿐 아니라 이웃과 함께 매일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의 봉헌 생활의 길은 ‘관계’와 연결된다

 

보편적 성화의 소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삶의 길은 각 개인이 맺는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이를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로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자신과의 관계이다. 누구보다 자신을 알고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내가 존재해야 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관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배우고 타인에 대해 잘 파악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가장 먼저인데도 그렇게 하기가 가장 어렵다. 그러나 위대한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모든 것은 ‘자신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성화되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을 수용해야만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불행의 요인을 타인이 제공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행복과 불행을 내 안에서 체험하도록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바로 ‘나’다. 현대인은 한순간에 동시다발적 행위를 자주 한다. 예를 들면, 커피를 마시면서 이어셋을 끼고 전화를 받고, 한 손으로는 컴퓨터로 검색하고, 그 사이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틈틈이 훔쳐보며, 머릿속으로는 또 다른 생각을 한다. 한편으로 보면 인간의 능력이 이렇듯 위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순간도 제대로 깊이 존재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이러한 번잡함 속에서 자신의 전일성(wholeness)을 위해 작고 고요한 소리로 자신에게 말하는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신학에서 말하는 ‘지금 바로 여기(here and now)’에 머물기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의 감정, 생각,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느님과 함께 현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일을 하는데 내가 아닌 타인이 그런 나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현재의 자신이 어떤 배경을 지니고 살아왔는지, 그 배경이 현재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19)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까?

 

각자 맞이하는 ‘현재’는 과거의 투영임이 인지된 사실이고, 그 과거는 여전히 자신 안에 살아 있다. 그러므로 과거를 보내고 현재를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즉 현재 자신에게 일어나는 긴장, 두려움, 슬픔, 분노의 감정, 생각, 열망, 행동의 패턴 등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지켜보고 정화할 수 있어야 한다. 집회 3,25에는 “눈이 멀고서야 어찌 빛을 보랴? 자신도 모르면서 남을 설득하려 들지 말아라”(《공동번역 성서》)고 쓰여 있다. 놀랍게도 우리는 자신을 아는 만큼 이웃을 알고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한다.

 

둘째, 이웃과의 관계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인류를 위해 자신이 무엇인가를 기여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각 개인이 자신을 더욱 잘 아는 것은 세상의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 자신을 고귀하게 사랑할 때 자신이 속한 가정, 사회, 세상을 살리기 위해 행동한다.

 

사람들은 종종 이 세상이 힘 있는 나라들이나 몇몇 정치 지도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각 개인이 뿜어내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힘’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바로 거미줄처럼 엮인 ‘인간관계의 그물망(web)’에서 나오는 힘의 연계성으로 지구가 존속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무질서는 인간 각자가 창조해 내는 무질서(chaos)의 결과이며, 세상의 조화는 인간 각자가 창조해 내는 조화(cosmos) 덕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삶에 의미를 주는 진리는 사랑이 우리를 어루만질 때 비로소 빛을 주며, 사랑하는 이가 체험하는 진리는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받는 사람과의 일치를 통해 현실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이다(회칙 〈신앙의 빛〉 27항 참조).

 

셋째,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명제를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현실에서는 상황에 따라 하느님을 좋은 분, 나쁜 분으로 판단하며 살아간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하느님은 배워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기에 기도로써 그분을 알아가야 한다. 하느님을 깊이 아는 것은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무지의 구름》에서 말하듯 ‘하느님은 생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시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은 의인 욥은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공동번역 성서》 욥 42,5)라고 고백한다. 욥이 그 전에 하느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을 깊이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체험되고 인식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깊이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은 바로 앎과 연결되고 진정한 관계가 맺어진다. 사랑은 불타오르는 감정의 변화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가지고 그 대상과의 관계를 이끌어 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숨을 쉴 때 드나드는 그분의 숨결(창세 2,7 참조)을 느끼고, 자기 삶 전반에 현존하시는 그분을 느낄 때 하느님의 거룩함은 자신의 전 존재에 젖어들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히브 13,8)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화’의 삶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일상을 살면서 자신을 정화하고 알고 사랑하며, 동시에 하느님을 섬기고 자신이 세상(이웃)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뭔가로 기여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단지 오늘 이 순간 내 곁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보내는 순수한 한 번의 ‘미소’일지라도 말이다.

 

* 허귀희 수녀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소속이다. 미국 엘름스 대학과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서강대학교 내 예수회센터에서 ‘성경과 영성’을 강의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2월호(통권 455호), 허귀희 글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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