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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고서: 모방 신부 서한에서 확인되는 1830년대 이전 순교자들의 기록 - 이도기, 박취득, 김세박, 황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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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20 ㅣ No.1547

[보고서] 모방 신부 서한에서 확인되는 1830년대 이전 순교자들의 기록


- ‘복자’ 이도기 바오로 · 박취득 라우렌시오 · 김세박 암브로시오, ‘하느님의 종’ 황석지 베드로 -*

 

 

현재까지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교회사 전공연구자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도 계속 축적되고 있다. 각지의 교구와 교회사연구소에서 기초 사료의 수집 · 정리, 역주 · 간행 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자들이 다양한 주제에 걸쳐 연구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고 있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수원교회사연구소도 ‘수원교구 역사총서’, ‘교회사 자료집’, ‘고전신심서적총서’, ‘교회사 번역총서’, ‘교회사 학술총서’, ‘선교사제 서한총서’를 기획, 편찬, 간행하고 있다.

 

그런데 기존의 서책이나 논저 중에는 나중에 오류로 확인되거나 명확하게 사실 · 인과 관계를 밝히지 못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활자화된 저서를 통해 잘못된 정보가 고쳐지지 않고 확대 · 재생산되어 온 것이 교회사학계의 현실이고, 인터넷의 발전과 웹사이트의 확산으로 이러한 문제점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잘못 알려진 부분을 바로잡고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나 재해석을 통해 사실과 인과 관계를 재조명하는 작업은 매우 필요하면서도 시급한 과제이다. 교회사학계의 일원으로서 필자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으며, 오류라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이를 고쳐나갈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필자는 수원교회사연구소의 소식지인 『상교우서』와 학술등재지인 『교회사학』의 지면을 통해 기존의 연구성과나 자료 해석에서 오류로 확인되는 내용을 찾아 수정하고, 새로 밝혀진 사실이나 이에 기반한 추론 등을 소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한국천주교회사에 관심 있는 신자나 연구자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새로운 자료와 시각[접근 방법]을 제시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 글도 그러한 작업 중의 하나이다.

 

 

Ⅰ. 모방 신부 서한에 나오는 순교복자 3위와 ‘하느님의 종’ 1위 기록

 

필자는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하는 ‘선교사제서한 대역총서 2’ 『모방 신부 서한』(2022년 간행 예정)을 편찬하면서 기존의 자료에서 나오지 않는 새로운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모방(Maubant) 신부는 자신이 겪었던 1839년(기해) 천주교 박해 때 목숨을 바친 순교자에 대해 자신이 직접 목격하거나 들은 내용을 기록에 남겼다.1) 또한,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에 순교했던 조선 신자들에 대한 자료도 모아 자신의 서한에 기록했다.

 

1836년 1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서울과 지방을 돌면서 신자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는 등 사목 활동에 매진했다. 동시에 조선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행적과 기적 일화에 대해 조사하여 서한에 그 내용을 기록했다. 그중 124위 순교복자 중 3위와 ‘하느님의 종’으로 현재 시복 수속 절차에 있는 순교자 1위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 나온다.

 

모방 신부의 서한에 나오는 3위 순교복자는 1797년에 잡혀 1798년 정산(定山)에서 순교한 이도기(바오로), 1798년에 자원으로 잡혀 1799년 홍주(洪州)에서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 1827년에 잡혀 1828년 대구(大邱) 감옥에서 순교한 김세박(암브로시오)이다. 1위 ‘하느님의 종’은 1833년 11월(음력) 이후에 서울 감옥에서 옥사한 황석지(베드로)이다.

 

위의 3위 순교복자에 대한 교회측·관변측 자료들은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자료집』 1집과 4집에 정리되어 있다.2) 하지만 자료집이 편찬될 당시에는 모방 신부 서한이 잘 알려지 있지 않았기 때문에 3위 순교복자에 대한 모방 신부의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다. 현재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모방 신부 서한의 대조역주본을 편찬하고 있기 때문에 3위 순교복자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석지에 대한 교회측 · 관변측 자료들은 아직 수합 · 정리 · 간행되지 않았다. 대신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달레(Dallet) 신부의 저서를 역주한 『한국천주교회사』3)와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편찬한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4)에 황석지의 약전이 실려 있고, 관련 자료가 각주로 소개되어 있다. 두 책자가 편찬될 때에는 모방 신부 서한의 내용이 잘 알려지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황석지에 대한 모방 신부의 기록은 수록되지 않았다.

 

이러한 순교복자 3위와 ‘하느님의 종’ 1위에 대해 모방 신부 서한에서 확인되는 내용을 정리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Ⅱ. 순교자 박 라우렌시오 기록 - 순교복자 박취득

 

 

 

모방 신부는 1836년 12월 9일자 서한에서 어느 신자가 기록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박 라우렌시오의 순교 관련 내용을 서술했다. 여기에는 박 라우렌시오의 체포 · 순교 연도, 순교 장소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대신 순교자의 성(姓)과 세례명, 체포와 순교 사정 등을 다블뤼 주교의 기록5)과 비교해 보면 1799년 홍주 순교자 박취득(라우렌시오)에 대한 기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충청도 황무실(Houangmusil)이라는 동네 출신의 박 라우렌시오(Laurens pac)는 이웃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매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형벌을 받는 동안에 그는 고통을 묵묵히 참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용감하게 고백하자고 함께 있던 신자들을 격려하였습니다. 관장과 포졸들이 신자들이 배교하도록 번갈아 달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했을 때에, (박) 라우렌시오는 신자들에게 영원한 진리를 기억하자고 쉴 새 없이 말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믿음을 꼭 지키라고 권고했었습니다. (박) 라우렌시오의 태도를 보고 화가 난 관장은 포졸들에게 “그가 죽기까지 매질하라”고 하였습니다. 100대쯤 맞았을 때, 포졸들은 (박) 라우렌시오가 이제 죽은 것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초 후에 (매를 맞아 누워 있던) 라우렌시오가 한 대도 맞지 않은 것처럼 일어나서 활기찬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이 기적적인 일에 놀란 포졸들에게 (박) 라우렌시오는 “나는 아무리 매를 맞아도 죽지 않을 터이니, 나를 죽이려고 할 것 같으면 내 목을 매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포졸들이 그의 목을 졸라 죽였지만, 박) 라우렌시오가 죽었을 때나 죽은 다음에 그의 전구(轉求)를 통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놀라운 일[기적]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위에서와 같이 박취득이 혹독한 심문에도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했으며, 무수한 매를 맞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회복했다는 점, 특히 자기를 죽이려면 목을 매어야 한다고 직접 말했다는 내용은 다블뤼 주교의 기록6)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박취득의 출생지에 대해서 모방 신부의 서한에는 ‘충청도 황무실’7)로 나오고, 다블뤼 주교의 ‘박 라우렌시오 순교 보고서’에는 ‘홍주 원당산’8)으로 나와 서로 기록이 다르다. 이와 같이 박취득의 출생지가 황무실이었다는 증언을 모방 신부 서한을 통해 새롭게 확인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언급해야 할 것은 다블뤼 주교의 ‘순교 보고서’에 나오는 박취득의 출생지 ‘홍주 원당산’이 교회사학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교회사개설’[통사]로 널리 읽혔던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박취득의 출생지가 나오지 않은 이유가 크다고 생각한다.9) 순교복자의 자료를 종합·정리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자료집』의 박취득 항목10)에도 ‘순교 보고서’[『전교회연보』]가 아니라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내용만 수록11)되어 있다.12)

 

‘순교 보고서’에 나오는 박취득의 출생지를 ‘홍주 원당산’이라고 번역한 최석우는 원당산의 현재 지명을 추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자가 지명 관련 참고서적을 활용하여 홍주 원당산이 현재 어느 곳인지 추정해보았다.13) 『고지도를 통해 본 충청지명연구(2)』에 의하면 ‘홍주 원당산’은 현재 당진시 합덕읍 운산리에 해당한다.14)

 

1859년 다블뤼의 ‘순교 보고서’에 나오는 홍주 원당산은 현재 당진시 합덕읍 운산리로 추정되며, 모방 신부의 1836년 12월 9일자 서한에 나오는 충청도 황무실과는 서로 다른 박취득 출생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 지도를 보면, 현재 운산리[원당산]와 호음리[황무실]는 4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방 신부와 다블뤼 주교는 다른 시기에 다른 자료를 입수하여 기록에 남겼는데, 두 기록에 나오는 박취득의 출생지가 서로 가까운 지역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모방 신부는 박취득이 죽기 전후에 있었던 일들을 목격한 세 명의 증언자[신자의 보고서에 언급되었을 것임]를 수소문하여 직접 확인하려 했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 모방 신부가 순교자의 시복 절차를 염두해 두고 증언 기록의 신빙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Ⅲ. 순교자 이 바오로 기록 - 순교복자 이도기

 

모방 신부는 위와 같은 1836년 12월 9일자 서한에서 순교자 이 바오로도 언급했다. 박(취득) 라우렌시오의 순교 사정을 보고서로 작성했던 신자가 이 바오로에 대해서도 기록했다고 한다.

 

 

 

모방 신부의 서한에서 이 바오로의 순교 사정에 대한 내용은 없고, 묘소에서 일어난 기적 일화만 나온다. 다블뤼 주교의 기록15)과 비교해 보면 1798년 정산 순교자 이도기(바오로)에 대한 기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앙을 굳건히 지켰기 때문에 이 바오로(paul y)라는 사람은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시신이 묻힌 곳을 지키도록 지시받은 포졸들은 밤중에 그 묘소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고 이 바오로의 아내를 찾아가 “남편이 죽었으나 슬퍼하지 마시오. 그는 분명히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묘소에서 나는 광채를 보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신자가 작성한 보고서를 얻어 프랑스어로 번역한 다음 1855년에 서한으로 보냈는데, 여기에 이도기의 순교 사정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그 서한 마지막에 감옥의 간수가 이도기의 아내에게 전해주었다는 기적 일화가 언급되어 있다. 다만 모방 신부의 서한에서는 ‘묘소’에서 광채가 났다고 했는데, 다블뤼 주교의 서한에서는 순교한 날 밤새 광채가 ‘시신’ 주위를 둘러쌌다고 나온다.16) 증언이 채록되어 후대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위와 같은 차이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모방 신부는 이 기적 일화도 확인하기 위해 목격자들을 수소문했지만 실패했다. 모방 신부는 박 라우렌시오와 이 바오로가 대략 1800년 이전에 순교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40년이 채 안된 사건을 알거나 들었다고 하는 신자를 찾을 수 없다고 한탄했다. 

 

 

Ⅳ. 순교자 김 암브로시오 기록 - 순교복자 김세박

 

 

 

모방 신부는 바쁜 사목 활동 일정 중에서도 1837년 11월 17일경 서한을 작성하면서 또다른 순교자 김 암브로시오에 대한 내용을 기록했다. 이 서한에서도 체포·순교 연도가 나와 있지 않지만, 다블뤼 주교의 기록17)과 비교해 보면 1828년 대구 순교자 김세박(암브로시오)에 대한 기록임을 확인할 수 있다.

 

(1801년)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 때에, 김 암브로시오(Ambroise Kim)가 서울을 떠나 남쪽 지방으로 피난했다. 이 지방은 일본과 가까운 곳이다. 체포된 그는 경상도 (감영이 있는 대구의) 감옥에 다른 여러 명의 신자와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그는 어떤 음식도 섭취하지 않았으나, 함께 갇혀 있던 다른 신자들에게 자기를 본받지 말고 음식을 먹으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김 암브로시오는, 결심에 따라 철저한 단식을 한 결과 20일 만에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이처럼 철저한 단식을 하기로 한 이유가 천주님께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기 때문인 것인지 제가 알아보았으나, 사람마다 모른다는 대답만 하였습니다. 김 암브로시오가 죽자, 신자들은 그의 유품을 가져가서 서로 나누어 가지고 귀한 유물로 모셨습니다. 저는 이 신자들에게 김 암브로시오가 옥사한 것과 관련하여, 또 그분의 전구(轉求)로 일어나는 기적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았으나, 모두가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위에서와 같이 경상도 감영이 있는 대구의 감옥에서 스스로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서 생을 마감했다는 내용은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모방 신부는 김세박이 단식을 한 이유가 특별한 계시 때문인지 확인하기 위해 신자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모른다는 답변만 받았다. 반면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는 신자들 사이에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그렇게 처신했다는 말이 있다고 나온다. 모방 신부의 질문이 신자들 사이에 퍼져 하느님의 영감 때문이라는 전승이 생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김세박의 생애와 순교, 순교 이후 신자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내용은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나오지만, 1801년 이후 김세박이 피신한 곳이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 남쪽이라는 것과 그의 죽음 이후 신자들이 유품을 나눠 가졌다는 내용은 모방 신부 서한에서만 확인되는 새로운 것이다.

 


Ⅴ. 순교자 황 베드로 기록 - ‘하느님의 종’ 황석지

 

모방 신부의 서한에는 다른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더 있는데,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 수속 절차에 있는 ‘황석지 베드로’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 나온다.

 

모방 신부가 1836년 4월 4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배교를 거부하고 옥사한 신자의 이름과 그 진술 내용을 언급했다.

 

 

 

수원(Souan)에서 살던 황 베드로(pierre houang)는 … 체포되어 작년[1835년]에 한양(Haniang)에 있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배교하라고 강요하면서 자기를 고문하게 하는 관원들에게 베드로는 “시간이 좀 지나면 제가 너무 늙어서 죽을 텐데, 왜들 그러신가? 저는 지난 30년 동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그 주인이 되시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왔는데, (이제 배교한다는) 혐오스러운 말을 한 마디 하여 천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분께 등을 돌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했다.18)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옥중 순교자의 이름이 ‘황 베드로’이고 수원에서 산 적이 있으며 1835년에 서울의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사망 당시 나이나 고향, 가족 관계, 입교 과정, 교회 내 활동, 체포된 연도 등 더 자세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대신 심문 과정에서 황 베드로가 배교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한 말이 전해져 기록되었다. 간략한 내용이지만 다른 자료와 비교해 보면,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나오는 황사윤(Hoang Sa ioun) 베드로, 『일성록(日省錄)』에 나오는 황석지(黃石之)와 동일 인물임을 추정할 수 있다.

 

다블뤼 주교는 1858~1859년에 편찬한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ff.68~70)에서 1833년 음력 5월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옥사한 황사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19) ‘순교자 약전’에 의하면, 황사윤은 지방 가문 후손으로 수원 샘골에 살았는데 40세 때 천주교를 알게 되어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다. 이후 아내와 자식 모두를 잃었고, 서울로 올라가 조카의 집에서 살았다. 1832년 음력 9월 20일(양력 10월 13일)에 이웃에 사는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배교하지 않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다른 감옥으로 옮겨진 그는 옥중의 비신자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66세 또는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때가 1833년 음력 5월이었다. 그에게 교리를 들은 비신자 죄수[김 진사]는 감옥에 찾아온 황사윤의 가족들에게 그의 임종과 관련된 기적 일화를 알려주었다.

 

‘순교자 약전’의 황사윤 기록은 위에 언급한 모방 신부의 서한 내용에 비해 더 자세한다. 이름[황사윤]과 거주지[수원 샘골]가 더 구체적으로 나오며, 입교했을 때 나이, 가족 관계, 체포된 날짜, 사망 당시의 대략적 나이와 시기, 옥중에서 전교 활동과 임종 당시 기적 일화도 나온다. 반면, 옥중에서 사망한 일시는 두 기록이 서로 다른데 모방 신부는 서한 작성 시점에서 ‘작년’(1835년)이라고 했고, 다블뤼 주교는 1833년 음력 5월이라고 했다. 사망 일시 문제는 뒤에서 『일성록』 자료를 소개할 때 다시 살펴보겠다.

 

모방 신부가 기록한 황 베드로의 배교 거부 진술은 위의 ‘순교자 약전’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다. 하지만 다블뤼 주교가 1860년경에 편찬한 『조선 순교사 비망기』(ff.353~356)의 황사윤 기록에는 아주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20) 따라서 모방 신부 서한의 ‘황 베드로’와 다블뤼 주교 기록의 ‘황사윤 베드로’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다블뤼 주교는 ‘순교자 약전’을 마무리하는 순교자 명단 부분(f.286)에서 황사윤 베드로를 다시 언급하면서 ‘새 증언을 확보했다’고 적었다.21) 아마 그 내용이 ‘비망기’에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비망기’의 황사윤 기록은 ‘순교자 약전’에 비해 양도 더 많고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순교자 약전’에는 사망 당시 나이나 66세 또는 67세로 나오는데 ‘비망기’에는 70세 가량으로 나온다. 대신 ‘순교자 약전’에서 조카라고만 나온 것을 ‘비망기’에는 황 안드레아라는 조카 이름이 명시되어 있고, 같이 붙잡인 신자의 숫자에 대해 ‘비망기’에서는 10명이라고 명확히 나온다. ‘비망기’에는 황사윤의 태생지가 수원 샘골로 나오며, 자녀가 네 명이라고 나온다. ‘비망기’에는 심문 과정과 옥중 생활이 ‘순교자 약전’보다 좀 더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 중 배교를 거부한 황사윤의 진술[‘비망기’ f.355]이 포함되어 있다.

 

뭣이요? 나는 곧 늙어 죽을 것이오. 내가 하늘과 땅을 빚어 만드신 주님의 계명을 지켜온 지 서른 해가 되었소. 나더러 더러운 말 한마디로 일순간 내 하느님의 사랑을 잃기를 바라는 것이오?22)

 

모방 신부 서한과 ‘비망기’에 나오는 황사윤의 진술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번역문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문[판독]을 직접 비교해 보면, 이러한 사실을 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황사윤 진술의 앞 부분은 모방 신부 서한이나 ‘비망기’ 모두 거의 똑같다. ‘vieillesse’ 다음에 오는 문장 부호 차이라든가, ‘du Seigneur’ 다음에 쉼표가 있느냐 ‘et’라는 단어가 더 있느냐의 차이뿐이다. 뒤의 부분도 문장의 표현 방식이 약간 다를 뿐,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모방 신부와 다블뤼 신부가 각자 다른 자료를 입수하여 프랑스어로 번역했는데, 그 자료의 내용이 아주 비슷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교회측 자료 외에 관변측 자료인 『일성록』에도 황사윤 베드로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천주교 신자 ‘황석지’(黃石之)가 확인된다. 순조 33년(1833) 10월 27일(양력 12월 8일), 11월 8일(양력 12월 18일), 11월 9일(양력 12월 19일) 기록에 의하면, 황석지는 충청도 홍주 당산리(堂山里) 출신으로 수십년 전에 이웃에 사는 김취득(金取得)에게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고, 1816년 김취득이 순교한 이후에도 그의 집에 찾아가 천주교 서적을 가져오는 등 신앙생활을 충실히 했다. 1821년 처자식을 모두 잃고 나서 서울 아현에 사는 조카[형의 아들] 집을 왕래했다. 그러다가 1833년 10월 21일(양력 12월 2일) 밤에 아현동에서 인근 거주 신자들과 함께 붙잡혔다. 배교한 다른 신자 6명과 달리 황석지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1월 9일(양력 12월 19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황석지의 마지막 진술은 “(천주교) 책을 읽고 배운지 이미 수십 년이나 오래되었는데 어찌 갑자기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誦習此書 旣爲數十年之久 則何可猝地變改)”였다. 즉, 수십 년이나 믿고 따랐던 천주교를 배신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황석지에 대한 『일성록』 기록이 ‘순교자 약전’이나 ‘비망기’의 내용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모방 신부 서한에 나오는 진술과 황석지의 최후 진술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일성록』 기록에는 ‘수원 샘골’에 대한 내용은 없고, 체포된 시기와 사형 선고를 받은 시기가 다른 자료와 일치하지 않다.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는 1832년 음력 9월에 체포되고 1833년 음력 5월에 옥사했다고 나오지만, 『일성록』에는 183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고, 11월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1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황석지가 황사윤과 동일 인물이라고 한다면, 다블뤼 주교 기록에서 나오는 1833년 음력 5월은 사망[순교] 일자가 될 수 없다. 또한, 『일성록』에는 황석지가 사형을 당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즉, 정확한 사망[순교] 일자를 알 수 없고, 옥사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다블뤼 주교 기록과 『일성록』 자료를 종합하여 황 베드로의 이름과 순교일[순교 형식]을 ‘황석지 베드로’와 ‘1833년 11월(음력) 이후 옥사’로 정했다.23)

 

만약 황석지가 사형에 처해지지 않고 감옥에서 죽었다면, 모방 신부가 언급한 1835년일 가능성도 있다. 사형 선고를 받고 난 뒤에도 장기간 감옥에 갇혀 있던 신태보 베드로의 사례를 생각해 본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른 1차 사료가 발굴되지 않는 한 황 베드로=황사윤 베드로=황석지의 사망[순교] 일시는 지금처럼 1833년 11월(음력) 이후로 볼 수 밖에 없다.

 

 

Ⅵ. 모방 신부 서한에 나오는 순교자 기록의 의의

 

이와 같이 모방 신부의 두 서한을 통해 순교복자 이도기(바오로), 박취득(라우렌시오), 김세박(암브로시오)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그중 박취득의 출생지에 대해 모방 신부의 기록[충청도 황무실]과 다블뤼 주교의 기록[홍주 원당산]을 비교하고, 현재 지명을 추정했다. 이 기록들은 3위 복자에 대한 교회측 자료 중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즉, 모방 신부가 3위 복자에 대해 교회측 최초로 기록을 남긴 것이다.

 

또한, 모방 신부의 서한과 관련 자료들을 통해 ‘하느님의 종’ 황석지(황사윤) 베드로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모방 신부 서한이 황석지 베드로에 대한 최초의 교회측 기록이라는 사실과 황석지 베드로의 순교 일시가 모방 신부 서한의 기록처럼 1835년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1) 모방 신부는 1839년 8~9월에 쓴 마지막 서한[박해보고서](A-MEP, Vol.1260, ff.157~187)에서 앵베르 주교의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를 참조하고 인용하면서 앵베르 주교의 서술을 보충하거나 설명을 추가했다. 특히 모방 신부와 직접 관련된 신자나 공소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덧붙였고,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석원, 「프랑스 선교사제의 서한을 통해 본 기해교옥과 조선대목구의 실상-모방 신부·샤스탕 신부·앵베르 주교의 서한을 중심으로」, 『교회사학』 17, 수원교회사연구소, 2020, 158~159쪽.

 

2) 이도기와 박취득의 자료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자료집 제1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05, 190~227쪽, 234~261쪽에 수록되어 있다. 김세박의 자료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자료집 제4집』, 2007, 517~531쪽에 수록되어 있다.

 

3)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196~200쪽.

 

4)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편찬,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8, 109~111쪽.

 

5) 박취득에 대한 다블뤼 주교의 기록은 「박 라우렌시오 순교 보고서」(1859년),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1859년),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1860년)이다. 이중 ‘순교 보고서’가 제일 내용이 상세하며, 특히 순교의 구체적 과정은 이 보고서에만 나온다.

 

6) 다블뤼, 「박(취득) 라우렌시오 순교 보고서」, 『전교회연보(APF)』 186, 1859, 392~400쪽. ; 최석우 번역,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사본」 22~23, 『교회와 역사』 377~378,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그런데 『교회와 역사』의 ‘순교 보고서’의 번역은 완료되지 못했다. 『교회와 역사』 379에 마지막 부분의 번역이 실려야 했는데, 어떠한 공지 없이 ‘비망기’(f.75)의 번역본이 대신 실려 있다. ‘순교 보고서’의 내용은 1874년 달레 신부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1권 pp.93~99)에 실려 있으며,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 상권, 분도출판사, 1979, 410~417쪽에 나온다.

 

7) 현재 충남 예산군 호덕면 호음리이다. 조선시대에는 덕산군 고산면에 속했는데 1914년에 예산군에 편입되었다.

 

8) 역주자인 최석우는 박취득의 출생지 ‘Ouen-tang-san’을 ‘원당산’으로 읽었다. 최석우,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사본22」, 『교회와 역사』 377,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5쪽.

 

9) ‘박 라우렌시오 순교 보고서’를 역주한 최석우는 『전교회연보』와 『한국천주교회사』의 기록이 서로 차이가 있는데 그 일례로 박취득의 출생지가 달레 신부의 기록에 빠져 있음을 밝혔다.(『교회와 역사』 377, 2006, 5쪽) 그러나 최석우의 지적은 교회사학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0)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자료집 제1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 2005, 234~261쪽.

 

11) ‘시복자료집 제1집’의 편집자는 『한국천주교회사』의 박취득 관련 내용이 ‘전교 잡지’[전교회연보]에 실린 다블뤼 주교의 전기[보고서]에 근거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241쪽 각주5번] 그러나 두 자료 사이에 차이가 있으며, 특히 박취득의 출생지가 『한국천주교회사』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12) 박취득 출생지 관련 자료에 대한 비교는 이석원, 「순교복자 박취득 라우렌시오의 출생지 관련 자료를 비교하다 - 모방 신부 서한과 다블뤼 주교의 기록」, 『상교우서』 89(2022년 10월호), 수원교회사연구소, 1~2쪽을 참조할 것.

 

13) ‘홍주 원당산’의 현재 지명 추정 과정은 이석원 글(『상교우서』 89, 3~4쪽)에 나와 있다.

 

14)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옛 지도와 문헌에 나타난 지명을 조사했는데, 조선시대 홍주목(洪州牧) 합북면(合北面)에 속한 원당산남리(元堂山南里)와 원당산북리(元堂山北里)가 확인된다. 즉, 남리와 북리로 구분되어 있는 원당산(元堂山) 마을이 홍주에 속해 있었고, 현재 지명으로는 당진시 합덕읍 운산리이다. 『고지도를 통해 본 충청지명연구(2)』, 국립중앙도서관, 2014, 149쪽.

 

15) 이도기에 대한 다블뤼 주교의 기록은 「이 바오로 순교 보고서」(1855년),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1859년),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1860년)이다. 이중 ‘순교 보고서’가 제일 내용이 상세하며, 특히 순교의 구체적 과정은 이 보고서에만 나온다. ‘순교 보고서’는 다블뤼 주교가 1855년 2월 22일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동봉되었으며, 『전교회연보(APF)』 164, 1856, 12~27쪽에 실렸다. 그 번역본은 최석우,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사본」 20~22, 『교회와 역사』 375~377,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이다. 

 

16) 최석우,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사본22」, 『교회와 역사』 377,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4~5쪽.

 

17) 김세박에 대한 다블뤼 주교의 기록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1859년),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1860년)이다. 

 

18) 최세구 신부 번역, 「모방 신부 서한 3」, 『상교우서』 54(2017년 봄), 수원교회사연구소, 35쪽.

 

19) 다블뤼 주교 저,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107~109쪽.

 

20) 연숙진 역,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26」, 『교회와 역사』 487(2015년 12월), 한국교회사연구소, 6~9쪽.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27」, 『교회와 역사』 488(2016년 1월), 4~7쪽.

 

21) 다블뤼 주교 저,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413쪽.

 

22) 연숙진,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27」, 『교회와 역사』 488(2016년 1월), 5쪽. 

 

23)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2018, 16쪽(이벽과 동료 132위 일람표 28번), 109~111쪽.

 

* 필자가 수원교회사연구소의 월간소식지인 『상교우서』에 연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글이다. 이석원, 「순교복자 이도기 바오로, 박취득 라우렌시오, 김세박 암브로시오에 대한 최초의 교회측 기록 - 모방 신부 서한에서 확인되다」, 『상교우서』 86(2022년 7월호), 수원교회사연구소 ; 「‘하느님의 종’ 황석지 베드로에 대한 최초의 교회측 기록 - 모방 신부 서한에서 확인되다」, 『상교우서』 87(2022년 8월호) ; 「순교복자 박취득 라우렌시오의 출생지 관련 자료를 비교하다 - 모방 신부 서한과 다블뤼 주교의 기록」, 『상교우서』 89(2022년 10월호)

 

[학술지 교회사학 제21호, 2022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418691&Page=2&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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