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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최고의 명인들, 관덕정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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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12 ㅣ No.590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최고의 명인들, 관덕정을 꿈꾸다


순교자들은 무엇 때문에 순교했을까? 순교란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마땅한 도리를 깨달아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 신앙의 핵심인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이다. 전국의 많은 성지들은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던 일상생활과 그 믿음을 증거한 신앙활동, 순교의 순간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성지마다 순교의 정신을 드러내는 상징을 찾아내어 가시화하고 있다. 영남지역의 유일한 순교기념관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 관덕정순교기념관도 당대 최고의 명인들이 모여서 꿈 불어넣기를 했다. 그리고 거의 30여 년이 흘렀다. 설계란 건물에 대화를 불어넣는 것인데, 오래 있어야 그 대화가 들린다고 한다. 때로는 그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여 소통이 단절된 건물들도 있다.

1983년 한국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여, 이윤일 성인의 시성을 앞두고 순교기념관 건축이 시작되었다. 이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순교한 조석빈 순교자가 경상감사로부터 마지막 신문을 받으면서, “저희들은 지금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지지만 장차 이곳에 성당이 들어설 것이며 감사님의 후손도 저희와 같은 천주교 신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한 말이 이루어진 것이라고들 한다. 즉 관덕정은 이윤일 성인을 포함한 많은 천주교인들이 믿음을 버리지 않아 처형된 성지이다. 교구에서는 형장이었던 이곳의 가옥 3채를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매입하여 1985년 9월 이윤일 기념관의 기공식을 했다. 공사는 1986년 2월에 착공되었고 1990년 4월에 이르러 준공되었 다. 1991년 1월에는 우선 성당과 제대 축성식만 올리고 이윤일 성인의 유해를 제대에 봉안했다. 개관식은 1991년 5월 31일 이문희 대주교의 주례로 이루어졌다.

이 기념관은 교구민의 정성인 사순절 특별헌금 및 그 밖의 특별모금으로 세워졌다. 기념관 건립은 서정길 대주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서 대주교는 관덕정이 이윤일 순교성인의 피로 축성된 대구의 유일한 성지인데, 그 순교 이후 120년이 되도록 그 형장에 비석 하나 세우지 못함을 안타까워 했다. 실제로 대주교는 1986년 매일신문에 연재한 ‘나의 회고’에서 성직 48년 중 가장 잘못한 일이 성인 이윤일 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어 있는 관덕정 부근 일대의 부지를 미리 확보해 두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이문희 대주교도 교구장에 부임한 초기부터 관덕정 건축에 힘을 모았다.


관덕정에 스며든 대화, 김영태 교수가 그리다

기념관을 설계한 사람은 영남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교수였던 김영태이다. 이 건물은 전통과 현대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된 작품으로 그는 이로써 대구건축작품상을 수상했다. 또한 이 건물은 『대구·경북의 건축』이란 책자에도 소개되어 있는 대구에서는 손꼽히는 대표적 현대건축물이다. 김영태는 ME활동을 열심히 했고, 이 부부는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대구에 오셔서 미사를 집전할 때 예물 봉헌을 맡기도 했다. 1983년 이문희 주교는 그에게 특별히 지형과 순교역사를 설명하시면서 설계를 부탁했다. 그는 우선 세 개의 시안을 만들었고 그 중 하나가 채택되어 본 설계에 착수했다. 설계는 남양건설의 임봉수가 했다. 이 건물은 대지가 50m 주도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출입동선을 북쪽에서 끌어들이도록 했다. 1층의 채광은 현관홀의 남쪽에 있는 원형 스테인드글라스와 홀 상부 원형 개구부를 통해서 빛이 들어오도록 했다. 상부에서 내려오는 빛을 중심으로 순교자들의 굳건한 신앙정신을 보이기 위해 건물 자체를 네 기둥으로 떠받치는 형상을 그렸다. 그런데 공사과정에서 설계가 변경되어 이 상징적인 개구부를 막아 진열실로 사용했다. 이에 따라 1층 홀의 조명에 문제가 있고, 그 웅장한 기둥은 의미를 잃게 되었다.

원래 이 기념관은 지나친 조명을 제한하고 계단실 상부 천정으로부터 유입되는 빛만을 허용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옥상에는 전통양식의 누각을 설치하여 건물 안의 폐쇄감을 덜어내어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이 기념관의 부속건물도 생각했었다. 김영태는 후진 양성과 건축이론 연구 및 건축 작품활동을 통해 건축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로 수상도 여러 번 했으며, 특히 ‘2009년에 수상한 대구시문화상’은 문화계의 화재가 되었다. 서예가인 선친 소헌 김만호가 이 상을 수상했고, 맏형 김상대도 1987년에 이를 수상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념관 이외에도 영남대 사회관 등을 설계하여 호평을 받았다. 청도성당 소속 동곡공소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건축뿐 아니라 건축회화 분야의 개인전을 다섯 차례나 열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다.


천주교 문양으로 단청을 한 콘크리트 한옥

이문희 대주교는 순교기념관에 전통 누각의 설치를 제안했다. 이에 현대건축과 고건축을 함께 해온 경일대 장석하 교수가 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는 콘크리트로 한옥을 구상했다. 이 아이디어는 망우당 공원에 있는 영남제일관문을 지으면서 얻은 것이었다. 콘크리트 한옥은 당시로는 전례가 없었던 것이었지만, 경상북도 대목장인 김범식이 이를 담당했다. 콘크리트로 누각을 짓고 나니 단청을 해야 했다. 그런데 교구에서는 단청에 반대했다. 장석하는 석달 가량 설득에 나섰다. “단청은 위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평민집에는 단청 올리지 못하며, 궁궐이나 사찰, 향교, 불천위 사당의 경우에나 단청을 한다. 즉 전통적으로 단청은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의 최고 권위자가 있는 공간을 나타낸다. 예수님 계시는 집에 단청은 당연하다. 단지 문양을 달리하면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반향을 이끌어냈다.

장석하는 천주교 독자적 단청 문양 구상에 들어갔다. 그는 문화재 단청 기술자인 박현수에게 가톨릭의 상징인 밀, 포도, 비둘기 등 자료를 보내주고 새로운 단청 문양의 제작을 의뢰했다. 그리고 붉은색 사용은 자제하고 주로 푸른색 계통으로 사용하도록 부탁했다. 결국 그는 네 개의 형상을 만들어 기둥 안쪽에 초안으로 그려놓고 교구청 관계자들을 모셨다. 대주교는 포도그림을 선택했다. 서까래에는 비둘기를, 기둥과 서까래가 닿은 곳에는 알파와 오메가를 그리고, 중앙부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모습이 단청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그는 문화재 보수공사에 사용되는 기와를 거의 전담하던 고령기와에 관덕정 기와의 제작을 의뢰했다. 기와의 제작은 김원동 사장이 특별히 도와주었다. 수키와에는 십자문양과 빛을 새겼다. 특히 막새기와에는 밀알이 세 이삭 이어져 있고, 타원형 테두리를 쳐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이라 써 넣어서, 12개를 구워 10개를 사용하고 2개는 나중을 위해 보관토록 했다. 이렇게 하여 현대식 건물과 조화된 콘크리트 한옥 누각을 얹으면서 천주교의 상징을 철저히 살린 건물이 탄생되었다. 그래서 관덕정은 국내외에서 유일한 성당건물이 되었다. 굴뚝도 십장생을 그린 궁전의 굴뚝을 본떠 건물 앞면으로 빼내어 기와를 덮고, 그리스도의 약자인 문양을 새겼다.

그러나 설계자 장석하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한 부분도 있다. 그는 누각을 설계하면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하고 각 칸 사이에 이문희 대주교가 선택한 포도문양의 화반을 그렸다. 이 화반 밑에 14처 중 2개씩을 얹으면 14처가 된다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천정을 우물천정으로 하여 그곳에 성화를 그리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순교기념관을 돌아 누각으로 올라온 신자들이 사면이 트인 누각에 앉아서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배려하고자 했다. 장석하는 일찍부터 대하건설을 운영하던 김인호 교수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그는 대학원에서 김익진 교수를 만났고 또한 김영태 교수와도 함께 일하다가 그 밑에서 의장을 전공했다. 그는 고건축을 처음으로 실측하는 작업을 했으며, 최연소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문화재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는 김동현, 김정기, 김동욱 등과 함께 숭례문 재건축 자문위원을 맡았고, 잠실야구장, 매일신문사, 황룡사, 월정교 등을 설계하거나 관여했다. 그의 동생은 예수회 신부이고 외가에는 수녀가 있다.

한편, 기념관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프랑스에서 제작해 왔다. 당시는 한국에서 막 스테인드글라스의 제작을 시작하던 터여서 파리에 작업장을 가지고 있는 김은호가 이 일을 맡았다. 따라서 세밀한 작업은 서신으로 의논했다. 그는 3층 유리창에 이윤일 성인의 생애와 대구대교구 발전사를 그렸다. 1층과 2층 계단에는 <이땅에 빛을>을 설치했다. 이는 붉은 십자가를 그리고 그것을 창틀로 잘라, 뜨거운 빛이 신자 개개인에게 내려 튼튼한 영신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하고자 했다. 1층 현관 중심 창에는 이윤일 성인의 목이 잘리는 순간 쏟아졌던 피를 상징하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천주께서 그를 천당으로 이끌어 올리는 동시에 희광이는 천둥에 놀라 쓰러지는 순간을 구현했다. 김은호는 이 작업을 하는 동안 폐 수술을 받았고, 병마와 싸우면서 작품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그 생애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관덕정은 현대건축에 전통누각을 조합한 결과로 건물이 성벽처럼 보이게 되자, 옆을 늘리는 퇴물림을 만들었고, 이로써 새로운 조각과 만날 기회를 얻었다. 문 크리스티나 수녀는 김경식 신부로부터 이윤일 성인 순교상을 제작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785㎝×485㎝×15㎝의 부조 작품을 남겼다. 이 부조는 이윤일 성인과 순교자들이 우리나라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불가마를 타고 승리의 빨마 가지를 들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는 엘리아가 불가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에서 영감을 얻은 결과였다. 작가는 승리의 빨마 가지로 큰 원을 만들었고, 불가마의 불살은 동양의 선녀의 날개 같은 분위기를 보이도록 했다. 현재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부원장인 문 크리스티나 수녀는 대구수녀원 본원 건물의 부조도 작업했다. 그는 성모자상을 주로 작품으로 남겼다. 특히 ‘예수회 말씀의 집’ 정원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작가가 아끼는 작품이다. 부활도 의미하는 십자가 밑의 아기 예수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피정의 집에서 순교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전한다.

건축이란 설계자의 언어이고, 건축주의 꿈을 품으며, 보는 이의 희망을 담는다. 그래서 오래가는 건물일수록 많은 이야기를 한다. 관덕정은 그렇게 많은 이들의 정성을 담아 이루어졌다. 한 사람의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고 했다. 지고의 원(願)을 품은 건축주들과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머리를 맞댄 관덕정에서 그들의 꿈을 느낄 때에 그것은 우리의 현실이 된다. 그렇게 일상에서 순교를 실천할 수 있고, 일상이 순교가 될 수 있다. 일상에서의 순교를 알리기 위해 관덕정은 우리 일상이 전개되는 시내 한 복판에 있다.(도움 : 김영태, 장석하, 최종훈, 문크리스티나, 이찬우)

[월간빛, 2013년 7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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