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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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번역논문: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 연구의 최근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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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20 ㅣ No.1546

[번역논문]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 연구의 최근 동향1)

Current Trends in the Study of Early Christian Martyrdom

 

 

초기 그리스도교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게 순교는 그치지 않는 관심을 받는 주제이다. 초대 교회 이후로 그리스도교의 확산과 성공은 부분적으로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데 기인한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확산하는 데 있어서 순교가 수행했다고 추정할만한 이러한 중요한 역할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졌다고 추정되는 박해의 예외적인 본성은 박해의 원인이나 그리스도인 순교의 규모 또는 순교를 다룬 작품들의 역사성과 신뢰성 등을 연구하는 수많은 학문분야를 만들어 냈다. 최근에는 순교에 관한 연구가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다. 몸을 둘러싼 논쟁에 관심이 더 많이 집중되고 현대 세계와 순교 간의 관련성이 9.11 이후 증가했다는 것은 21세기에 그리스도교 순교 연구가 상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면에서 순교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1643년 볼랑디스트(Bollandist) 협회2)가 결성된 반종교개혁 기간에 시작되었다. 볼랑디스트 프로젝트의 목적과 그 전신인 헤리베르트 로스웨이드(Heribert Rosweyde,1607)의 목적은 성인들의 삶의 역사성에 대한 권위 있는 진술을 하기 위해 역사적이고 언어적인 기준을 사용하는 데 있었다. 또한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필사본을 수집하고, 전통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순교 전통의 성장을 분석하는 데 있었다(Delehaye 1922; Godding 2007). “성인행전”(Acta Sanctorum)의 출판과 이를 뒷받침하는 볼랑디스트 출판물인 “성인전 저술 방법론”(Subsidia Hagiographica) 및 “볼랑디스트 연보”(Analecta Bollandiana)는 역사성과 진정성에 기초하여 초기 그리스도교 텍스트라는 다루기 힘든 문제 덩어리의 덩치를 작게 만들었다.

 

역사성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순교에 대한 연구가 관련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히폴리트 델레하예(Hippolyte Delehaye)와 같은 19세기와 20세기 학자들은 특히 장르 범주가 특정 텍스트의 신뢰성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한에서 장르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였다. 전통적인 순교연구에서는 순교 이야기를 악타“행전”(acta) 또는 “수난기”(passio) 장르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했다.3) 전자의 장르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사형 선고를 받는 동안의 재판 보고 또는 절차를 다루었다. 후자는 순교자들의 고통, 고문, 처형을 심도 있게 묘사했다. 이러한 두 가지 작성 양식 간의 포괄적인 차이점은 역사성이라는 개념과 겹쳐 있다. 볼랑학파는 순교자들의 다소 무모한 행동을 역사적으로 두 가지 중 더 신뢰할 만한 것으로 간주했다. “수난기”는 양식화된 서사와 전설을 더 많이 다루었으며 덜 신뢰할 만한 것으로 간주되었다(Delehaye 1921). 이 두 장르 사이의 경계는 가장 취약하다. 일부 이야기는 두 장르의 요소를 결합했고 학자들은 이러한 구별이 개념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그 유용성과 정확성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의견에 다다랐다.

 

이와 유사하게, 순교 행위와 변증 사이의 일반적인 경계는 간신히 침투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변증 작품(첫 번째 변명 First Apology, 두 번째 변명 Second Apology, 트리포와의 대화 Dialogue with Trypho)의 저자인 순교자 유스티노(Justin Martyr)는 순교자에 대한 기술을 자신의 작품에 통합했으며 자신도 165년경 로마에서 순교했다.

 

호교론에서 순교학적인 위상은 순교가 호교론적인 수사학 프로그램에 전해주는 수사학적 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예리하게 감지된다. 즉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 또는 성인전의 원자료는 ‘호교론’ 및 “외경 사도행전”과 같은 관련 장르와 구분된 별도의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헬렌 리(Helen Rhee(2005, 1-8)는 최근 저서에서 이러한 구분이 역사성에 대한 관념과도 관련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녀는 보다 비교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외경 행전이 ‘호교론자’의 순교 기록 및 저작물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해 왔다.

 

장르 간의 경계가 흐려짐에 따라 학자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의 범위를 확장하여 순교 전통의 필사본 역사(Cooper 2000)와 순교 문헌에서 성서와 성인전 전통의 수용, 순교의 수사학 (Castelli 2004), 그리고 후기 강론가들의 설교 (Lamberis 2011) 등을 포함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Moss 20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 연구의 특정 핵심 주제는 보다 최근에 이루어진 발견과 방법론에 비추어 재설정되고 재구성됨에 따라 학문적인 연구로 지속되고 있다.

 

 

순교의 기원

 

20세기 초, 학자들은 순교 자체의 기원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교회 학자인 캄펜하우젠(Hans Freiherr von Campenhausen, 1936)은 순교의 개념이 새롭게 출현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집단의 독특한 특징으로서 자체적으로 유래했다고 제안했다. 캄펜하우젠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리스어 martyrs는 종교적 고백이나 증언의 결과로 개인이 죽는 특정한 종류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 견해는 독일 학자 집단, 특히 노르베르트 브록스(Norbert Brox)의 언어 연구에 의해 뒷받침되고 전파되었다. 브록스의 1961년 저서, “증인과 순교”(Zeuge und Märtyrer)는 이 용어의 기원을 법적 용어의 어원에서 현재의 어휘 정의까지 추적했다. 브록스는 2세기 중반 폴리카르푸스의 순교가 있기 전까지 순교는 기술적인 용어로 사용되지 않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순교가 탄생했다는 최종 결론을 제시했다.4)

 

이 접근법이 지니는 난점은 순교의 기원을 다양하고 점진적이며 불규칙한 언어 변화와 동일시한다는 점이었다. 폴리카르푸스의 순교가 새로운 방식으로 순교를 사용했다고 해서 중동지역이 자동적으로 이를 따랐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순교의 기원을 문헌학과 연결시키는 이러한 고유한(sui generis) 이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학자들은 종교사 전통을 따라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가치나 개념이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접근은 프렌드(W. H. C. Frend)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유대민족의 고통의 역사에서 순교의 기원을 찾고 그리스도교 순교 이해에 유대교 배경이 매우 강하게 작용했다고 주장했다(Frend 1965). 이러한 프렌드의 주장보다 조금 덜 단순한 비전의 이론은 마카베오 순교에 대한 헨텐(Jan Willem van Henten)에게서 재현되었다. 그는 유대교 전통에 있는 민족의 구원을 위한 유대교 영웅의 죽음이 초대교회의 순교 개념을 형성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5) 또 다른 학자들은 순교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그리스와 로마의 사례나 순교 이야기의 문학적 조상을 연구했다(고귀한 죽음의 전통과 예수 운동의 문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Seeley 1990 및 Droge & Tabor 1992를 참조할 것). 그리스도교인의 순교와 그리스-로마 서사 사이에는 놀라운 문학적, 주제적 유사점이 많이 있다. 이 이야기는 더 일반적으로 “고귀한 죽음”이라고 한다. 아킬레우스와 소크라테스라는 상징적 인물들과 아테네의 장례연설에서 볼 수 있는 국가에 대한 열광적인 죽음의 애국심, 그리고 에우리피데스 남녀 영웅들의 비극적인 죽음 등이 자기희생과 고귀한 죽음이라는 아이디어가 형성되는 데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인류 역사에서 순교의 기원에 관한 이러한 모든 이론에 내재된 것은 순교가 단일 출처와 불변의 성격을 지닌 안정적인 신학적 개념이나 실천이라는 사고에 대한 헌신적인 자세이다. 그러나 순교에 대한 고대의 견해는 단일하거나 유전적으로 서로 동일하지 않았다. 지역적 또는 “종파적”에 따른 순교자 개념의 다양성(Tilley 1996), 개별 순교자에 대한 숭배(Eastman 2011), 그리고 최근의 순교역사(Moss 2012a)에 대한 연구가 보여주듯이 그리스도교 안의 여타 관습이나 교리만큼이나 순교는 다양하고 이질적이었다.

 

 

순교, 정체성, 성별, 그리고 몸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순교의 어원적 기원과 역사적 근거가 순교를 이해하는 자원으로 크게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많은 학자들은 순교가 초기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 정체성의 형성에 있어서 역할을 했다는 담론적 기능을 살펴보았다. 쥬디트 리우(Judith Lieu, 1996)와 데니얼 보이아린(Daniel Boyarin, 1999)의 연구는 순교가 ‘유대인’ 또는 ‘이교도’가 의미하는 것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인’이 의미하는 것을 수사학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구분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 그 방식을 탐구했다(Castelli 2004, Leemans 2006 참조). 많은 학자들이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또는 그리스도교와 이교도 사이의 극명한 분열이 문헌과 이차 자료에 과장되어 있다는 점을 인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순교자의 몸에 어떻게 깊이 새겨져있는지, 즉 순교의 모습이 그리스도인됨의 의미를 확고하게 만들어준 양상을 보여주었다.

 

순교 문학이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에 관해서라면, 특별히 의미 있는 결실을 맺은 탐구의 한 가지 길은 몸이 순교 신학에 작용하고, 그에 의해 형성되고, 형성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피터 브라운(Peter Brown), 캐롤라인 워커-바이넘(Caroline Walker-Bynum), 버지니아 버러스(Virginia Burrus) 등의 선구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많은 학자들은 문화적 저항과 협상의 장소로서 순교자의 시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논의해 왔다.6) 이 연구 분야는 특히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에서 성별과 권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 이야기에서 성별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leitmotif]였다. 페르페투아(Perpetua), 펠리치타스(Felicitas), 블란디나(Blandina), 아가토니케(Agathonike), 아그네스(Agnes), 아가타(Agatha)와 같은 저명하고 중요한 순교자들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별은 종종 모호하거나 변덕스럽고 논쟁의 여지가 있다.7) 종종 언급되는 바와 같이, 여성 순교자는 종종 남성화된다. 학문적 분석에서 볼 때, 여성성에 대한 이러한 거부는 그리스-로마 제국의 성의 구조에 대한 거부나 로마 제국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 또는 로마의 권력 구조에 대한 전유로 해석된다.

 

젠더와 권력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종종 순교자들의 행위에서 스포츠적이고 검투사적인 이미지를 해석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스테파니 콥(Stephanie Cobb)의 연구(2008)가 보여주듯이 순교 이야기에서 남성다움의 묘사는 원형 극장을 훨씬 넘어 순교자 자신뿐 아니라 이야기의 다른 등장인물([유대인, 폭도, 총독])을 아우른다.

 

 

순교와 “정통”

 

그리스도교는 순교가 정통파의 법전이라고 주장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그의 “잡기장”(Miscellanies)에서 “진정한 순교”를 두 극단 사이에 있는 중도[via media]로 설명한다. 즉, 화염 속으로 급히 달려드는 “어리석은” 열광자들의 입장과 구원을 위해 순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순교를 피하는 다른 그룹의 의견 사이에 진정한 순교가 있다고 설명한다(Van den Hoek 1993). 클레멘트의 분류 체계는 다른 그리스도교 그룹 -특히 새 예언 운동(또는 몬타누스주의자)과 “영지주의자”의 지지자들의 의견-과 대조적으로 순교에 대한 정통파와 원-정통파[proto-orthodox]의 입장에 대한 학문적 평가에 영향을 미쳤다(Ste Croix 1963; Ste Croix 2006; Dearn 2006; 정통파도 자발적 순교를 행했다는 견해는 Droge 1995, 155-70 참조). 전자는 클레멘트가 비난한 열광자이고 후자는 마지못해 이단자들로 간주되었다.

 

한편, 최근에 이루어진 새예언자운동[New Prophecy Movement]과 영지주의[Gnostics]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이들 그룹 중 하나가 순교 문제에 관하여 단일한 입장을 엄격하게 고수했다는 가정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새 예언 운동과 관련하여, 윌리엄 태버니(William Tabbernee)는 몬테누스주의자들이 자발적으로 순교하는 경향이 있다는 가정이 오류임을 보여주었다(1978, 3.128-139; 1985; 2007, 201-242). 몬타나주의자들이 당대의 원-가톨릭(proto-Catholic) 동료들보다 순교를 위해 자원할 가능성이 더 많았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폴 미들턴(Paul Middleton, 2006)이 주장했듯이, 이러한 형태의 ‘급진적 순교’는 고대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관련하여, 또다른 연구자들은 범주로서 자발적 순교는 시대착오적이며 3세기로의 전환기에 일어난 진정한 순교에 대한 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Moss 2012b). 

 

이레네우스(Irenaeus)와 클레멘트(Clement)의 진술에 따라 순교와 ‘영지주의’에 관한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소위 “영지주의자들”이 순교의 관행에 격렬하게 반대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 반대는 역으로 육체에 대한 그들의 일반적인 이해와 특히 육체의 부활과 결부되었다(보다 자세한 논의는 Pagels 1980; Pagels 1979, 70-101를 볼 것). 순교에 대한 ‘영지주의적’ 태도의 이러한 특성화는 악명 높은 유다 복음이 포함된 텍스트인 챠코스 고문서(Tchacos Codex)가 발견된 결과로 순교에 대한 논의의 선두 자리를 되찾았다.

 

유다 복음에 대한 초기 반응이 세티아누스(Sethians)와 발렌티니아누스(Valentinianus) 및 영지주의자들이 순교를 반대하는 자들이었다는 생각을 재차 강화시켰다면(Pagels and King 2007, 59-75; Painchaud 2008), 야고보 1차 묵시록에 대한 보다 최근의 연구는, 비록 무엇이 순교를 구성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논쟁에 부쳐졌지만, 정통과 이단 사이에 엄격한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King 2009). ‘영지주의자’로 지정된 수많은 집단 간에 순교에 대한 생각이 상당히 다양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다지 놀랄 만한 내용이 아니다. 이는 ‘영지주의자’가 결코 동질적인 실체가 아니며(Brakke 2012), 순교가 결코 동질적인 실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Moss 2012a, 2-7).

 

 

순교, 박해, 폭력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에 대한 전통적 연구는 박해라는 주제와 결합되었다. 기번(Gibbon)이 로마인을 변호하고 그리스도교 순교 신화를 반박한 이후로 고전주의자와 종교학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박해를 받았을까? 그리고 받았다면, 얼마나, 얼마나 자주, 왜 받았을까?”를 묻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한 표준적인 대응은 박해 기간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예수의 사목부터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까지, 대화재부터 서기 250년까지의 기간, 서기 250-51년 데키우스 치하에서 시작된 박해에서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개종까지의 기간.8) 비교적 최근까지 학자들은 신약성서 내 복음서와 행전이 제공하는 역사적 서사를 따랐고, 예수의 추종자들이 처음에는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는 견해에 동의했다. 이러한 관점은 이제 거의 보편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이러한 거부는 고대 유다교를 구성하는 관습과 전통의 복잡한 그물 안에서 1세기 말까지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또다른 작은 종파 정도로 간주되었다는 점에 기반을 둔다.

 

한편, 로마인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는가의 문제는 완전히 다른 사안이다. 현재 신약성서에서 발견된 문서들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학대와 박해를 받고 있다고 항의하지만, 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불연속적으로 인식했고 2세기 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로마인들이 그리스도교인을 별개의 문제 집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데 수렴된다(Mommsen 1899, 346-351).

 

이 두 번째 시기의 중심에는 서기 110년에 트라야누스 황제와 비티니아 총독 플리니우스 사이의 서신 교환인 플리니-트라얀(Pliny-Trajan) 서신이 있다. 고전주의자의 전통적인 학문에서 ‘플리니우스-트라야누스’(Pliny-Trajan) 서신은 그리스도교인 박해의 법적인 기반을 확인하는 자료로 사용했다.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G. E. M. de Ste. Croix 와 A. N. Sherwin-White간의 학문적인 대화를 통해 형성되었다(Ste. Croix 1963; Ste. Croix 1964; Sherwin-White 1964; 성. Croix의 입장은 Barnes 1968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이 대화에서 쌩뜨 크롸(Ste. Croix)와 셔윈-화이트(Sherwin-White)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관심과 ‘박해’의 동기에 대해 논쟁했다. 셔윈-화이트(Sherwin-White)는 그리스도인들이 완고함 때문에 로마의 표적이 되었다고 주장한 반면, 쌩트 크롸(Ste. Croix)는 그리스도교인들이 기소된 것은 그리스도인됨이라는 이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공식적인 법적 혐의 외에도 몇 가지 범죄에 대한 의심 - 64년의 대화재 뿐 아니라 근친상간과 식인 풍습의 혐의 - 과 그리스도인이 불복종적이고 반사회적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박해와 연관되어 추가될 수 있다. 플리니우스-트라야누스 서신의 법적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이 시점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공식적인 입법이 없었고, 또 심지어 이 편지를 주고 받은 이후에도 그리스도인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제국의 명령이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각 지방 통치자는 자신의 명령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2세기 초의 법적 상황이 어떠했든, 많은 학자들은 3세기 중반부터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들 -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 이 실행한 제국주의적이고도 조직적인 박해의 희생자라는 가정 하에 연구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소위 '박해의 시대'조차도 재평가되었다. 최근의 연구는 그리스도교인들이 황제 Decius(ca. 250)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는 기존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했다(Rives 1999). 이러한 연구들은 박해의 원인에 다양한 차원과 내용을 더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으로 체제전복적이며 사회적으로도 매우 의심스러운 집단이었다는 일반적인 주장에 대해 학자들은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앨런 브렌트(Allen Brent)와 제임스 리브스(James Rives,1996)는 로마 제국과 그들이 속한 지역에서 개인의 경건함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접근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Brent 2010 참조). 비슷한 맥락에서 엘리자베스 데팔마 디게저(Elizabeth DePalma Digeser, 2012)는 철학과 철학적 원칙에 대한 논쟁이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의 토대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개인의 관점과 종교적·정치적·사회적 동기 및 개인적 경쟁이 뒤섞여 박해자의 불길을 부채질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박해 문제가 재평가되고 로마인에 대한 날카로운 비난이 누그러진 가운데, 학계의 관심은 순교와 박해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그리스도교인의 폭력을 조장하는 방식에 대한 논쟁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이것은 ‘정통파’가 그리스도교 종파나 분파를 지속적으로 표적으로 삼는 경우(또는 그 반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9) 드레이크(Drake 2011; 1996), 시즈고리치(Sizgorich 2008) 및 가디스(Gaddis 2005)의 연구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평화 이후 다른 종교 집단의 구성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경계를 감시하는 데 박해의 수사학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자료, 연대 및 고고학

 

담론과 정체성 형성 수단으로서의 순교에 대한 관심은 더 많은 세월 동안 학문적인 논쟁의 법정 유지를 약속하는 유익하고 도전적인 탐구분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 문헌에 기술된 사건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순교 연대와 그 이후의 설명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이는 들르아예(Delehaye 1921, 1906), 폰 루이나르트(von Ruinart 1689), 폰 게바르트(von Gebhardt 1902)와 같은 역사적 사고를 지닌 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신세대 학자들의 지속적인 헌신 덕분이다. 현대 순교학에서 논의된 문헌의 대부분은 19세기 및 20세기 학자들에 의해 진정한 목격담으로 판단된 문헌들이다. 그러나 역사적 순교자를 찾아내는 학자의 능력에 대한 학계의 회의론이 대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볼란디스트와 그들의 후계자, 그리고 이러한 기록에 기인한 전통적인 날짜로 추정되는 정경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방법론적 분열로 이어진다. 텍스트는 특정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취급되지만, 이 텍스트를 해당 기간에 적용하는 것은 텍스트 자체가 목격자 증언이라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연구의 주요 증거를 임의로 선택해 보면, 2~4세기에 여성 순교자들이 어떻게 묘사되었는지에 대한 연구에 일관성이 거의 없다.

 

최근의 연구는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과 방법론적 발전에 비추어 성인전의 자료와 진정성 및 작성연대에 대해 보다 전통적인 질문들을 다시 제기하고 있다(예: Barnes 2009; Moss 2010).

 

사도 순교자를 받아들이는 문제에 관한 데이비드 이스트만(David Eastman)의 연구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바오로 숭배가 어떻게 출현하고 확산되었는지를 추적하기 위해 고고학 연구와 수용 역사 및 전통적인 성인전의 방법을 결합하여 사용한다(Eastman 2011). 티모시 바른(Timothy Barnes)의 연구를 묶은 책, “초기 그리스도인 역사와 로마사”(Early Christian Hagiography and Roman History)는 최근의 고고학 및 비문 연구에 비추어 순교 연구의 주제를 새롭게 다루고 있다(Barnes 2010). 그리고 5세기 로마 순교에 대한 케이트 쿠퍼(Kate Cooper)의 연구는 물질 문화와 성인 숭배에 대한 초기 연구를 바탕으로 고대 후기의 유해와 순교 이야기집 연구의 길을 열었다(이에 관한 Cooper 1999; 또한 성인 숭배의 사회적, 경제적, 개인적 역할을 연구한 Denzey-Lewis 2008 및 Bowes 2008의 흥미로운 작업을 볼 것). 여러 가지 방법으로 중세 성인전과 고대 고고학을 파고드는 것은 볼란디스트를 괴롭히던 문제를 부활시키는 동시에 출처와 데이터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정교하고 진지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분명히 현재는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에 관한 전통의 기원과 기능을 새롭게 고려할 때이다.

 

 

[부록]

 

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황제의 편지

Epistle Ⅹ. ⅩCⅥ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 61-113)은 법률가이자 작가이며 로마 지배령의 통치자였다. 이 편지는 그가 흑해 남부 해안에 경계를 두는 비티니아, 폰투스 속주에서 총독으로 재임한 동안 작성한 편지를 묶은 Epistolae에 포함된 내용이다. 트라야누스 황제(Imperator Caesar Nerva Traianus Augustus, 53-117)와 112년에 주고받은 이 편지는 당대 그리스도교 교회의 교세와 이들에 대한 로마의 인식 및 태도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서기 112년경에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에게 보낸 서신

 

폐하, 의심스러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폐하에게 제 자신을 적용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폐하 이외의 그 어떤 이가 폐하보다 더 훌륭하게 저의 우매한 방식을 지도해 주거나 저의 무지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른 사람들이 실행한] 그리스도인 심문에 참석한 적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이 경우에 저는 무엇을 조사해야 하는지, 또한 그들에게 어떠한 처벌을 어느 정도 내려야 할지 모릅니다. 또한 저는 어떤 나이를 기준으로 정하여 심문해야 하는지, 연약한 청소년도 건장한 남성과 같이 처벌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면 용서받을 여지가 있을까, 아니면 한번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교를 버린다 하더라도 이익을 주면 안 되는 걸까? 그가 그 밖의 어떤 죄를 짓지 않았어도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 처벌될 수 있는지 또는 그 이름에 붙여진 죄로 처벌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 앞에 세워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우선 그들이 그리스도인지를 심문했습니다. 제 질문을 받고 그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 저는 그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세 번째로 물을 때에는 질문할 때 처벌된다는 위협을 가하면서 물었습니다. 만약 신앙 고백을 고수하면 저는 그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들의 신앙고백이 어떠한 것이었든 간에 그들이 보여준 적극성과 완고한 고집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데에 대해 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또한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죄를 범했지만 그가 로마인인 경우에는 로마인이라는 이유로 저는 그를 로마로 되돌려 보내라는 명령에 서명했습니다.

 

이로부터 얼마 지난 후에, 언제나 그러하듯, 절차가 진행됨에 따라 고소가 확산되었고,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익명으로 작성된 문헌이 많은 사람의 이름을 담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었거나 한때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들은 제가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자극했을 때 유향과 포도주를 가지고 당신의 형상을 향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신들의 형상을 가져와서 그 앞에 기도하라고 명령했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저주하라는 명령도 내렸습니다.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금지된 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정보제공자에 의해 거명된 사람들은 이를 부정하며 예전에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이후에 그만두었다고 진술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3년 전에, 또 다른 사람들은 수년 전에, 심지어 20년 전에 그리스도인이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신상들과 당신의 초상화를 경배하며 그리스도를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이나 실수의 요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자신들은 날이 밝기 전에 정해진 날에 만나서 신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에 대한 찬가를 노래하는 것에 익숙해졌고, 어떤 범죄에 대해서가 아니라, 성사(또는 서약)에 의무를 다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사기, 절도, 간통을 저지르지 않고, 그들의 약속을 파기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도록 요구받았을 때에도 그 어떤 대가를 위해 신뢰를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관습에 따르면, 이후에 그들은 평범하지만 단순한 식사에서 다시 만납니다. 그러나 저는 폐하의 명령에 따라 정치적 결사를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고, 그들은 이 칙령 반포 이후에 더 이상 이런 모임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그들의 진술이 의심스러웠기에 여성 부제(deaconesses)라고 불리는 두 여성 노예를 고문해서라도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아낸 것은 오직 타락하고 지나친 미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 이상의 조사를 미루고 폐하에게 호소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이 일은 많은 사람이 관여되어 있기에 폐하에게 여쭈어볼 충분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연령, 모든 계급, 남녀 모두가 위험에 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러한 미신이 도시들 뿐 아니라 시골의 마을과 농장에도 확산되어 이들을 오염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러한 상황을 점검하고 치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확실히, 거의 버려졌던 사원들에 사람들이 이미 자주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기존의 종교적인 의례들이 다시 거행되고 있고, 최근에는 구매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희생제물이 도처에서 바쳐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그들이 회개할 기회를 부여받았을 때 교정될 수 있는지 상상하는 일은 매우 쉽습니다.

 

 

트라야누스의 플리니우스에게 보내는 서신

 

나의 플리니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된 사람들의 원인을 조사할 때 마땅히 해야 할 방법을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어떤 일반적인 규칙을 고정된 기준처럼 확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을 찾아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으면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감안하는 가운데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하고 우리 신들에게 간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분명히 입증하는 사람은 이전에 그렇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익명으로 작성된 명예 훼손은 어떤 비난에도 설 자리가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나쁜 본보기가 될 것이고 우리 시대의 정신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 번역의 원자료 출처 : Bradley M. Peper and Mark Del Cogliano. “The Pliny and Trajan Correspondence.” The Historical Jesus in Context,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6): 366-71. 중 369-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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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 “Voluntary Martyrdom in the Early Church.”0In Christian Persecution, Martyrdom, and Orthodoxy, edited by G. E. M. de Ste. Croix, Michael Whitby, Joseph Streeter, 153-200.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Strathmann, H. 1939. “Martus, etc.” In Theologisches Worterbuch zum Neuen Testament, edited by Gerhard Kittel, 4.477-520. Stuttgart: W. Kohlhammer.

Tabbernee, William. 1978. “Christian Inscriptions from Phrygia.” New Documents Illustrating Early Christianity, edited by G. H. R. Horsley and S. R. Llewelyn, 3.128-39. Grands Rapids: Eerdmans.

―――. 1985. “Early Montanism and Voluntary Martyrdom.” Colloquium 17: 33-44

―――. 2007. Fake Prophecy and Polluted Sacraments. Supplements to Vigiliae Christianae, 84. Leiden: Brill. Tilley, Maureen. 1996. Donatist Martyr Stories: The Church in Conflict in North Africa. Liverpool: Liverpool University Press.

Trevett, Christine. 1996. Montanism: Gender, Authority and the New Prophec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

 

1) [역주] 이 글은 모스(Candida Moss)의 논문 Current Trends in the Study of Early Christian Martyrdom, Bulletin for the Study of Religion 41.3, 2012, pp.22-29을 번역한 글이다. 2017년부터 영국 버밍엄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모스는 최근 초기 교회 순교역사 연구 영역에서 ‘떠오르는 샛별’이라 부를 수 있을만큼 탁월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학자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2010년에 The Other Christs: Imitating Jesus in Ancient Christian Ideologies of Martyrdom을 발표하고, 2012년에 Ancient Christian Martyrdom, 2013년에 The Myth of Persecution: How Early Christians Invented a Story of Martyrdom을 발표했다. 이 세 권의 저서를 통해 그녀는 로마 정부에 의해 오랫동안 지속된 그리스도인 박해는 없었으며, 순교 이야기는 여러 지역공동체가 각각의 필요사항을 반영하며 만들어갔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이러한 모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 성과들을 강조하는 가운데, 순교사의 흐름을 집약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2) [역주] Oxford English Dictionary에 나타난 볼랑디스트(불어 Société des Bollandistes) 또는 볼랑학파의 의미는 쟝 볼랑(Jean Bolland S.J.,1596-1665)의 뒤를 이어 소위 “성인행전”(Acta Sanctorum)을 편집하는 데 관여하는 예수회 회원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예수회원이 아니더라도 성인전을 연구하는 학자를 볼랑디스트로 구분한다.

 

3) 처음부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추가적인 문제는 용어 문제이다. 순교 연구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순교 이야기가 다른 형태의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과 인위적으로 단절되었다는 인식은 순교 이야기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의 불일치를 초래했다. 그 결과, 많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학자들은 "순교학"이라는 더 넓은 용어를 사용하여 이 문제를 회피하려고 시도했다. 이 단어의 어려움은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역사학의 다른 분야들, 특히 중세 연구와 초기 현대사에서, 순교학이라는 용어는 축제일에 따라 달력순으로 배열된 순교자의 카탈로그나 순교자 목록에 사용되는 기술적인 용어(terminus technicus)이다. 이러한 순교명단은 4세기부터 남아 있는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인데 이 자료는 이전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필사본의 편찬과 그리스도교 전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이 용어를 오용하는 것은 필사본의 역사와 순교이야기의 수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의미하기에 전반적으로 보자면 피해야 하는 대목이다.

 

4) Brox 1961. Strathmann 1939; Baumeister 1980, 239-45 등과 Buschmann 1998, 98-107을 보라. 이들 학자 모두는 순교라는 개념이 2세기 중반에 나타났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여준다.

 

5) 판 헨텐(Van Henten 1997). 마카베오를 순교자로 규정하는 것은 프렌드(W. H. C. Frend)가 지은 명저 “순교와 박해”(Martyrdom and Persecution)가 주장하는 주요 내용이다. 이 책에서 마카베오의 순교가 첫 장을 차지한다. 이러한 생각은 순교 기록에 대한 개별 연구에서도 널리 퍼져 있다. 예를 들어 헤페르난(Thomas Heffernan,1988, 201)은 마카베오 염마의 생각이 페르페투아(Perpetua)의 일기에서 ‘반향’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Frend의 주장에 앞서 제시되었다. 그 생각은 프렌드보다 앞선다. 이에 관하여 Othmar Perler 1949를 볼 것.

 

6)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 연구에서 이러한 탐구의 길을 조성한 중요한 연구로는 Peter Brown의 명저, The Body and Society(1988)와 Caroline Walker Bynum(1995) Virginia Burrus(2008)가 있다.

 

7) 여성 순교자에 대한 문헌은 방대하며 주로 Perpetua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예로, Lefkowitz 1976; Frend 1993; Cardman 1993; Jensen 1996,90-95; Salisbury 1997, 87-88; Corrington 2006, 254-64; Corrington 2009; Perkins 2007, 313-32; Cobb 2008, 102-5, 108-9, 112-13, 115, 119, 120-22; Farina, 2009; Bremmer 2002, 77-120; Trevett 1996를 들 수 있다. 

 

8) “배교자” 황제 율리우스가 짧은 시기 동안 통치하던 365년에 이교도가 부흥하고, 부유하고 권력을 누리던 그리스도인들이 지배 계층에서 쫓겨난 잠시의 기간이 있었지만, 이것은 대체로 박해에 대한 연구에 포함되지 않는다.

 

9) Donatists의 순교에 대해서는 Frend 1952a 와 후속 연구 studies (1952b; 1969; and 1985)를 볼 것. Circumcellion 문제에 대한 재평가는 Shaw 2004를 볼 것.

 

[학술지 교회사학 제21호, 2022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번역 : 권영파(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418690&Page=2&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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