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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최덕홍 요한(1902~1954) 주교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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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09 ㅣ No.706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최덕홍 요한(1902~1954) 주교의 초대

 

 

대구에 산다고 하면 반색을 하는 이들이 있다. 한국전쟁 때 피난 갔었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은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이 때 국민적 대이동이 발생했다. 그리고 사회가 변했다. 그때 한반도에 사용된 폭탄의 양이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양과 같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한국인들은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전 세계 4억 5천만 가톨릭신자들에게 한국문제의 해결과 세계평화의 보존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훈령했었다. 이 기간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엄청난 일을 해냈다. 특히 대구교구는 이 시기 한국 가톨릭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최덕홍 주교는 6·25 당시 참 많은 이들을 교구에 초대했다. 그리고 그 열매에서 오늘 우리는 최덕홍 주교의 진면목을 본다.



6·25 한국전쟁과 사연 많은 사제

최덕홍은 1914년 12세에 새로 문을 연 유스티노신학교에 첫 신입생이 되었다. 당시 동기들 중에는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학업 속도는 빨랐다. 그리고 당시는 학생들 간의 투표로 모범생을 선출하는데 그는 모범상도 받았다. 1926년 사제로 서품된 뒤로는 교육사목도 했다. 1937년 그는 유스티노신학교에서 철학, 교회사와 음악을 강의했다. 1940년부터는 동성상업학교 사감을 했다. 그리하여 사연 많은 사제들을 알고 돕게 되었다. 6·25는 갖가지 사연을 만들어냈다. 그중 한 명이 김수환이었다. 김수환은 1934년 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1936년 대구교구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던 소신학교인 서울의 동성상업학교(을조)에 진학했다. 공부하는 사이 최덕홍 신부가 기숙사 사감으로 왔다. 김수환은 1941년 졸업 후에는 교구장학금으로 떠나는 유학을 지명(指命)받았다. 무세주교는 그를 도쿄의 죠치(上智)대학에 보냈다. 그는 1944년 학도병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김수환은 괌에서의 전쟁범 진술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해방 후 1년이나 지난 뒤 귀국했다. 그는 1947년 성신대학에 1학년으로 입학할 때까지 주재용 교구장을 돕다가 후배들과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6·25가 일어났다. 그래서 4학년이 된 김수환은 후배인 정하권과 대구교구청에서 최덕홍 주교와 전에 유스티노신학교 교수를 했던 신부들의 지도로 학업을 계속했다. 일종의 속성과정으로 한 과목을 마치면 최덕홍 주교 앞에서 시험을 봤다. 이렇게 하여 1950년 12월 23일 김수환은 차부제품을 받고 다음 날 부제품을 받았다. 그는 교구청 당가신부인 장병화 신부를 도우면서 사제서품식을 준비했다. 1951년 사제가 되었다. 최덕홍 주교는 비서로 일하는 김수환 신부가 하도 욕심이 없어서 ‘바보’라고 놀렸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말을 자신의 아호로 삼고 살았다.

북한출신 신학생들은 6·25를 더 힘들게 견디어야만 했다. 얼마 전 4월 19일 선종한 이종흥 몬시뇰도 그랬다. 그는 1923년 5월 24일 함경북도 경흥읍에서 태어났다. 군청 직원이었던 아버지가 경흥군청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에 경흥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고향은 강원도 이천이었다. 이종흥이 태어난 지 일주일쯤 후 원산교구장 사우어 신 주교와 후일 연길교구장이 된 테오도르 브러허 백 주교가 훈춘으로 가는 도중 그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지역에서 유일한 신자집이었기 때문이다. 주교는 이튿날 아침 미닫이문을 뜯어 상위에 올려놓고 미사를 봉헌하고 이종흥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1939년 17세 때 서울 동성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학교에서 세례증명서를 요구했는데,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어 해결했다. 신주교가 꼼꼼하게 기록해 둔 덕이었다.

이종흥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신학교내에 식량이 없어서 형편이 닿는 학생들은 집에서 미숫가루 등을 보내와서 먹기도 했다. 그러나 38선 이북에 집이 있는 학생은 집의 지원은 고사하고 왕래조차 쉽지 않았다. 덕원신학교도 폐교되어 그 학생들도 서울로 편입되어 있었다. 이종흥이 부제품을 받고 바로 6·25가 터졌다. 고향이 이북인 학생들끼리 모여 전국을 헤매다가 부산까지 내려왔다. 그는 미군 접시닦기도 했다. 백응복, 이중현 셋은 미군부대에서 거처하면서 일을 했고, 지학순, 김창렬은 중앙성당에서 통근을 했다. 그러다가 부제반들도 대구 교구청에 집결하여 못다 배운 사목분야의 공부를 마치고 신품 받을 준비를 했다. 그때 대구에서 준비한 부제들은 춘천, 대전, 대구교구 부제들이었다. 최덕홍 주교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백응복과 이종흥은 춘천교구 소속이었는데 교구장 퀸란(Quinlan, 具仁蘭) 주교가 납치된 상황에서 서품신청서를 승인받지 못하여 수품을 못하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서울에서 노기남 주교로부터 신품을 받았다.

사제서품 후 이종흥 신부는 강원도 평강, 이천 두 본당의 보좌로 발령을 받았으나 그곳은 이미 공산화가 되어 갈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골롬바노회 한국지부에 머물렀다. 지시받는 장소가 늘 공산군에 의해 막힌 곳이었다. 그러다가 춘천교구에서 파견하는 군종신부로 대구에 오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종흥은 소신학교 때 은사인 최 주교께 사정을 고하고 1954년 4월 대구교구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 최덕홍 주교는 백응복, 이중현 두 신부도 받아주었다.


성베네딕도수도회를 교구로 초대

성베네딕도회는 1909년 서울로 진출했다. 그리고 1921년 원산으로 갔다. 그들은 성당, 수도원, 신학교, 학교, 병원을 고루 갖춘 수도원 구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공산화가 시작되면서 고통이 시작되었다. 특히 독일에서 선교사들이 파견된 이 수도회는 독일이 패전국이 됨으로써 연락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그들이 미국을 통해서 독일로 보낸 편지에 “수도복이 다 헤어져 수도복 만들 옷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이미 얼마나 힘든 처지에 처했는가를 알게 한다. 결국 1949년 5월 11일 덕원에 있던 외국인 수도자들이 체포되어 갔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이틀 뒤 모두 내쫓겼다. 그들은 밖에서조차 수도생활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수도복과 기도서를 빼앗겼다. 그리고 인적사항을 자세히 기록한 후 한 명씩 차례로 쫓겨났다. 쫓겨난 이들은 차례로 수도원 앞에 다시 모였다. 100여 명이 모이자 행렬을 지어 교회를 지나 골짜기 오른쪽 아래 비탈길로 내려갔다. 학생들이 앞서고, 평수사들과 성직지망 수사들이 뒤따랐다.

<공산당들은 총부리를 들이대며 우리를 내쫓았다. 교회를 지날 무렵 순교자 찬가인 “장하다 복자여”가 절로 흘러 나왔다. 그들은 조용히 하라고 총칼로 윽박질렀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성가 소리에 그들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도로까지 500m를 걸어가면서 노래불렀다. 노랫소리는 성난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수도원 아랫마을 신자들이 소리를 듣고 뛰어나와 행렬에 합류했다. 십자가의 길 제8처가 생각났다.>
 
덕원의 수사들과 마찬가지로 원산수녀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는 땅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아직도 전선 어드멘가 헤매고 있을 수도가족들을 제외하고 1950년 12월 9일 밤, 부산 중앙성당에 모두 모였다. 이튿날 중앙성당 사제관에 ‘방을 배정받았다.’ 원산수녀 14명, 연길수녀 15명, 서울 성바오로회수녀 7명, 가르멜수녀들, 덕원수사 15명이 각각 방 하나씩을 배정받았다. 주임신부는 이층의 작은 방으로 옮겼다. 사제관이 만원이라 300여 명이 마당에 진을 쳤다. 제의방에도 50명은 더 들어갈 수 있었다. 제대 주위는 휘장이 둘러쳐져 있었는데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거기서 잠을 잤다. 아침 미사 전에는 말끔하게 정리해 두었다. 가구와 식기도 없고 돈도 없었다. 먹을 게 생기면 돌아가며 겨우 먹었다.

그때 미군종신부들이 열정적으로 도왔다. 머피신부는 수사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했고 다른 군종 장교들과 함께 후원금을 모아 기아를 면하게 했다. 수사 세 명은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고, 한 명은 지역 은행, 두 명은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일했다. 수녀들도 미군부대 빨래 등을 맡아했다. 이석철 수사와 김재환 수사는 매일 영내 카지노에 가서 남은 음식 중 먹을 만한 것을 골라왔다. 한 번은 급양장교가 수사들을 보더니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책임자 김영근 부제에게, 배식 때 남는 음식뿐만 아니라 취사장 솥까지 비워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스무 양동이가 넘는 음식을 거둬들였다. 이로써 피난 온 수도자와 신부들, 피난민까지 약 500명이 함께 먹을 수 있었다.

성베네딕도회를 대구교구에 연결한 사람은 당시 군종이던 뉴햄프셔주 맨체스터 성안셀모 베네딕도수도원의 맥카시 신부였다. 수녀들은 원산에서 수도복을 전부 빼앗기고 아줌마로 불리며 내쫓겼다. 이 힘든 상황에서 수도복을 다시 챙겨입은 한 원산수녀에게 그는 자신을 베네딕도회원이라며 인사했다. 그가 덕원수도원의 서상우 신학생과 452 포부대에서 만난 것이 계기라고도 한다. 당시 수사들은 군복을 검은색으로 물들여 입고 있었다. 본당을 방문하던 맥카시 신부는 수도회가 처한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맥카시 신부는 원산 수녀들을 위해 신임 광주교구장 헤롤드 헨리 신부와 상의했다. 그리하여 원산수녀들은 1951년 두 팀을 광주교구로 파견했다. 또 대구로 전출된 맥카시 신부는 대구교구 최덕홍 주교와 상의했다. 최 주교는 성요셉본당(현 남산동성당) 바로 옆에 공동체를 위한 작은 한옥을 지어 ‘조건 없이 즉각’ 사용하도록 했다. 그들은 오트마라 압만 분원장 수녀의 입국을 기다렸다가 1951년 10월 23일 대구 주교관 한옥에 도착했다.

성베네딕도회 수사들을 위해서는 메리놀회 그레이그 신부가 최덕홍 주교를 만났다. 주교는 수사들이 성니콜라오관을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다시 맥카시 신부가 수사들을 데리고 주교를 만났다. 주교는 베네딕도회원들에게 주려고 했던 건물을 학교로 만들게 되었다면서 신학교 부속건물 2층의 방 다섯 개를 쓰라고 제의했다. 또한 주교의 소경당을 미사와 영적수련을 위해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1951년 6월 6일 맥카시 신부는 신학생 수사 5명과 평수사 6명의 이사를 감행했다. 그는 트럭 석 대와 버스 한 대를 마련하고 수도자들은 수도복 차림으로 버스에 올랐다. 맥카시 신부가 지프를 타고 앞장섰다. 그렇게 베네딕도회가 대구에 들어왔다. 이러한 인연으로, 성베네딕도회는 최덕홍 주교를 깊이 기억하고 있다. 1954년 11월 주교는 경북지역에 안동교구를 설치할 의향으로 지방 실정 파악을 겸하여 각 본당을 사목 방문했다. 이때 11월 23일에는 베네딕도회의 왕묵도 레지날도 신부가 신축한 함창성당 축성미사를 집전했다. 그리고 주교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수녀원 부지 확보를 위한 포교성성에서 보낸 영수증 부본과 함께 건축지원금을 들고 직접 수녀들을 찾았다. 그는 이후 바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12월 14일 53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수녀들은 주교가 이미 암세포가 몸 전체에 퍼진 상태였으나 내색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최덕홍 주교는 이렇게 전란으로 집을 잃은 한국교회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감쌌다. 이후 10년간 한국교회는 해마다 10%를 훨씬 웃도는 신자증가율을 보였다.

최덕홍 주교에게 초대받은 이들은 이 일터에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자신이 어려운데도 1000만 타지인을 품은 우리 사회의 건강함이 있었다.(도움: 이종흥 몬시뇰 인터뷰, 김순복 수녀, 『芬道通史(분도통사)』)

 

[월간빛, 2015년 6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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