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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천주교회의 연령회 연구 - 연령회의 연원과 성격 변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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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20 ㅣ No.1545

한국천주교회의 연령회 연구

- 연령회의 연원과 성격 변화를 중심으로 -



국문초록

 

한국 천주교회에서 장례 봉사와 관련하여 설립된 최초의 단체는 베르뇌 주교 시기의 인애회이다. 인애회는 병인박해가 발생하면서 활동을 중지했다가 1882년에 블랑 신부에 의해 재설립되었다. 블랑 신부는 가난한 신자들을 위한 무료 장례 봉사를 위해, 베르뇌 주교 때의 전통과 1648년 로마에 설립된 선종회를 모델로 인애회를 조직하였다.

 

인애회의 활동은 1890년대 이후 각 지에 성당이 세워지고 본당 조직이 정비되면서 본당 활동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1910년 이전부터 금전적인 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상장계가 생겨나면서 연령을 위한 단체의 설립도 권고되었다. 이에 인애회는 ‘연령을 위한 단체’로 성격이 변화되었고, 단체명도 1930년 이전부터 등장하는 연령회로 점차 대체되었다.

 

한편 1930년대에는 일부 본당에 ‘호상(護喪)’을 위한 단체도 있었다. 이에 1930년대에는 ‘장례 봉사’와 ‘연령 구제’를 위한 단체가 병존했고,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본당마다 호상을 위한 단체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하면서, 기존의 연령회가 이 역할을 맡거나, 관련 단체가 없는 본당에서는 연령회를 새로 조직하였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의 연령회와 달리, ‘장례 봉사’를 전담하는 오늘날의 연령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Ⅰ. 머리말

 

오늘날 대부분의 본당에는 연령회(煉靈會)가 있고, 서울대교구, 의정부교구, 인천교구, 수원교구, 원주교구 등에는 연령회 연합회도 조직되어 있다.1) 연령회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와 전구, 장례 봉사’를 통해, ‘비신자의 입교, 냉담자의 회개, 회원들의 신앙 심화’를 이루어 교회의 발전과 선교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다.2)

 

연령회에서 하는 활동은 박해시대에도 행해졌고,3) 단체로서의 연령회는 블랑 주교가 사목하던 1880년대에 조직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특히 이 시기에 행해진 무료 장례 봉사는 개화기 한국교회의 재건과 관련해서 주목되었다.4) 그리고 2007년에는 블랑 주교가 설립한 단체가 인애회(仁愛會)이고, 인애회의 설립 시기가 1882년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5)

 

그러나 블랑 주교가 설립한 인애회는 주목적이 ‘무료 장례 봉사’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연령회와 성격이 같지 않다. 즉 인애회가 몇 단계의 변화 과정을 거친 후 탄생한 것이 오늘날의 연령회였다. 그리고 연령회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일제강점기인데, 당시의 연령회는 오늘날의 연령회와 성격이 달랐다. 따라서 오늘날의 연령회는 시기에 따라 명칭과 성격에 차이가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기존에는 이에 대한 탐구 없이, 연령회가 박해시대 이래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으로 이해해 왔다.

 

물론 연령회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6) 하지만 인애회, 선종회, 연령회 등 당시에 등장하는 단체들 간의 관계와 인애회에서 연령회(현재)로의 변화 과정이 명확하게 설명되지는 못했다.

 

주지하듯 장례 봉사 활동은 박해시대부터 있었고, 개화기에는 교회의 재건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도 교세 확대에 일정한 공헌을 하였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단체는 한국천주교회의 유지와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이 단체의 연원과 시기별 변화 과정을 밝히는 것은 교회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Ⅱ. 인애회의 설립

 

1876년 5월에 입국한 블랑 신부는 1877년 9월에 리델 주교가 입국하자 전라도로 내려가 사목했다. 그러나 리델 주교는 1878년 1월에 체포된 후 6월에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차쿠에 머물던 리델 주교는 9월에 블랑 신부를 대목구장 직무대행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임명 당시 전라도에서 사목하던 블랑 신부는 1882년 4월 22일에 상경하여 서울에 정착하였다.7)

 

블랑 신부는 상경 직후인 1882년 4월 26일에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재판을 위해 뮈텔 신부를 판사, 로베르 신부를 서기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5월에는 교회에서 구입해 두었던 인성붓재(서울 중구 인현동)의 집에서 학교[인현 서당, 漢韓學校]를 시작하였다. 그런 다음 블랑 신부가 관심을 가진 것이 바로 무료 장례 사업이었다.

 

[자료1] 구상 중인 다른 계획은 선종회(la Confrérie de la bonne Mort)를 설립, 보다 정확히 말씀 드리면 재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장례를 치러주는 것입니다. 선종회는 이전에 [미판독] 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였습니다.

 

서울의 신자들은 대부분이 그날그날 살아가는 젊거나 늙은 과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교우 친척들도 없고, 죽을 때나 죽고 나서 돌봐줄 사람도 없기 때문에 말씀 드린 단체가 정말로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완전히 해결되면 승인하시도록 주교님께 규정을 보내드리겠습니다.(1882년 5월 24일 서한)8)

 

[자료2] 주교님께 승인해 주실 것을 요청하며 인애회의 규칙을 보내드립니다. (1882년 10월 8일 서한)9)

 

[자료3] 작년에 저는 수도(서울)에 선종회[une association de la Bonne Mort]를 세웠습니다(그것은 대목구장인 베르뇌 주교 시기부터 있었지만, 그 시기의 불행이 그것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 단체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방문과 기부를 통하여 그들의 선종을 돕는 것과 ② 가난한 동료들과 다른 신자들을 무료로 장사 지내는 것입니다.

 

동료 신부들은 매달 소액의 기부금을 내고 선종의 주보이신 선하신 요셉 성인에게 매일 짧은 기도를 바칩니다. 저와 동료들의 바람은 회원들을 위한 한대사와 전대사를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 필요한 사업을 하는데, (신자들의) 열성과 자선을 높이는 중요한 수단이 될 것입니다.

 

서울의 신자들은 대부분 돈도 없고, 그들이 죽을 때나 죽은 다음에 그들을 돌봐 줄 신자 가족도 없는 과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1883년 7월 26일 서한)10)

 

[자료1]~[자료3]에 따르면, 블랑 신부는 1882년 5월경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선종을 돕고, 가난한 사람들의 장례를 무료로 치러주는’ 선종회(la Confrérie de la bonne Mort)를 설립하고자 회칙을 준비 중에 있었고, 10월 초에는 작성한 회칙을 리델 주교에게 보내 승인을 요청함으로써, 인애회(仁愛會)라는 이름의 선종회를 설립하였다.

 

블랑 신부가 작성한 ‘인애회 회칙’의 전문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자료3]을 통해 이 단체의 목적은 분명히 알 수 있고, ‘블랑 주교부터 수백 금을 내어 장례지내는 데 도움을 주고, 날짜를 배정하여 연령들을 위한 미사를 1년 내내 봉헌했다.’11)는 김기호(金起浩) 회장의 언급에서, ‘무료 장례와 연미사 봉헌’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82년 5월 24일 블랑 신부가 리델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 ‘뮈텔 신부와 함께 희년에 모은 200냥 이상의 돈과 회원들에게 요구할 회비를 가지고 시작할 예정’이라는 내용이 있고, 1883년 7월 26일자 서한에는 ‘동료 신부들이 매달 소액의 기부금을 낸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교구의 기금, 회원들의 회비, 신부들의 기부금이 인애회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다만 당시 신자들의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대부분의 자금은 교구와 신부들이 마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자료1]과 [자료3]에는 인애회와 관련해서 중요한 내용이 있다. 1882년에 설립한 인애회가 ‘베르뇌 주교 시기에 있었던 단체를 재설립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베르뇌 주교 시기에도 선종을 돕고, 가난한 사람들의 장례를 무료로 치러주는 단체가 있었는데, 병인박해로 사라진 것을 1882년에 다시 설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지금까지 추정만 하던 ‘박해시대에도 연령회와 비슷한 단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이다. 그리고 [자료1]에서 조만간 승인받을 규정을 보낸다고 했고, [자료2]에서 ‘인애회 규칙’을 보내며 승인을 요청한 사실에서, [자료1]의 미판독된 단체명이 ‘인애회’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블랑 신부의 말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병자들에 대한 신입교우들의 박애심, 죽은 이들에 대한 경건한 돌봄과 장례 예식의 점잖은 품위가 천주교에 대한 편견을 억제하는 데 이바지하였다.”12)는 다블뤼 주교의 말에서 인애회 활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서한이 번역·간행되었지만, 인애회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없다.13) 특히 신자들의 장례 모습을 소개한 다블뤼 주교의 서한에 인애회의 존재가 찾아지지 않는 것은, 베르뇌 주교 시기에 인애회가 있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모든 사항을 서한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또 블랑 신부의 언급은 당시 신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했을 것이므로, 박해시기 인애회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14) 다만 그 성격이 1882년의 인애회와 같았는지는 좀 더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인애회의 활동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이 1830년대 조선에 조직되어 있었던 매괴회와 성의회의 활동이다.15)

 

[자료4] “(성모 매괴회) 회우가 병든 이를 돌보며, 죽은 이를 장사하면, 300일의 대사(大赦)를 얻는다.” “(성모 성의회) 죽은 이를 장사하며, 가난한 이를 구제하며, 화목함을 권하며, 우몽한 이를 가르치는 모든 선공을 행하면, 매 차에 100일의 대사를 얻는다.”

 

[자료4]는 1886년 블랑 주교가 감준한 필사본 『미과수원』(美果收園)에 소개된 매괴회와 성의회의 활동 중 일부이다. 이에 따르면 매괴회와 성의회의 활동에는 병든 이를 돌보고,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 단체는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 1838년경에 설립16)되었으므로, 이후 신자들은 신심 단체를 매개로 장례 봉사에 참여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신자들은 그 이전부터 장례식에 참석해서 필요한 봉사를 했다. 즉 [자료4]에서 언급된 내용들은 교회의 설립 초기부터 강조되던 형애긍(形哀矜)과 신애긍(神哀矜)17)의 내용이며, 그 중 형애긍의 하나인 ‘죽은 이를 장사 지내는 것’은 교회의 엄규(嚴規)이기도 했다.18) 따라서 신자들은 일찍부터 이러한 애긍을 실천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다가 1838년 이후 신심 단체가 조직되고, 장례 봉사가 은사(恩赦)와 연계되면서, 참여가 좀 더 활성화되지 않았나 생각한다.19) 그리고 교회 조직이 정비되는 베르뇌 주교 시기(1856~1865)에 이르면, 『천주성교예규』(1863년)의 내용이 공포되면서, [자료5]와 같은 상황도 전개되었다.

 

[자료5] 조선말로 된 장례식 기도문과 예절을 공포한 뒤로 많은 신자들이 외교인을 상관하지 않고 그것을 공공연히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조선에서 대낮에 십자가를 앞세우고, 참석자는 각기 촛불을 들고 성영(聖詠)을 큰 소리로 외면서 동네 길을 지나가는 장례 행렬을 펼친다는 것을 상상하시겠습니까.20)

 

이처럼 베르뇌 주교 시기에는 대낮에 천주교식 장례가 행해질 정도로 천주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변화하였고, 한글로 된 ‘장례예식서’(『천주성교예규』)도 공포되었다. 이에 신자들의 장례 봉사는 더욱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회장을 도와 조직적으로 장례 봉사를 담당하는 신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을 ‘인애회’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베르뇌 주교 시기의 인애회’는 회규가 있는 공식단체라기보다는, 초상이 났을 때 회장의 지휘 아래 장례 봉사를 전담하던 신자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애회의 활동은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다가, 블랑 신부가 1882년에 재설립함으로써 재개되었다. 그러나 1882년에 설립된 인애회는 베르뇌 주교대의 인애회와는 성격이 달랐다. 이 단체는 정식 회규와 회원, 회비가 있으며, 회원들에게 은사(恩赦)까지 부여하는 공식단체였다. 블랑 신부는 은사를 단체의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인식하고, 리델 주교에게 회원들을 위한 전대사와 한대사를 요청하였다.

 

인애회의 존재는 1883년 7월까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은 알 수 없다. 다만 전주 본당 보두네 신부의 1894년 보고서를 보면, ‘이미 서울과 제물포와 대구에 있는 일종의 자선적인 장례식 사업을 시작했다’는 내용이 있다.21) 이것은 서울과 제물포, 대구에 이어 전주에서도 무료 장례 예식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자료지만, 다른 한편 서울의 인애회 활동이 이 시기까지 이어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애회가 서울에 설립된 이후 이와 같은 성격의 단체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1885년에는 대구 지역에 무료 장례를 위한 단체가 조직되었고,22) 제물포에서도 무료 장례 예식이 실시되었다. 1891년에는 전주에서 무료 장례 예식이 시작되었으며,23) 1897년에는 아산의 공세리 본당에 장례회가 결성되었고, 부산에서도 비슷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02년 이전에는 평양에 인애회가 설립되었으며,24) 1909년경에는 안성 본당의 권씨가 근방의 신자들을 모아 장례식을 주관했다는 기록도 있다.25)

 

인애회의 활동은 박해시대와 마찬가지로 천주교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교세를 확장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동안 천주교 신자는 조상을 공경하지 않는 집단으로 인식되었는데, 천주교의 장례 예식이 신자들에 대한 편견을 씻어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서로 돕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비신자들의 개종을 유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전염병이 도는 시기에 신자들이 콜레라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며 장례를 치러주는 모습은 비신자들을 교회로 이끄는 충분한 동인이 되었다.26)

 

한편 블랑 신부가 ‘인애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베르뇌 주교 시기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베르뇌 주교 시기에는 왜 ‘인애회’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까? 이와 관련해서 『천주성교예규』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목된다.

 

[자료6] “성교회에 인애(仁愛)하는 모든 일 중에 천주의 인자하심을 본받아 사람의 영혼을 흉험(凶險)한 곳에서 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인애하는 덕이 있는 자와 더구나 남의 영혼을 돌볼 책임이 있는 부모, 친척, 대부, 대모, 회장 같은 사람은 친우(親友)나 자기 소임(所任)에 속한 교우가 병들어 위태하다는 소식을 듣거든 청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흔연히 가보고 좋은 말로 권면하여 선종(善終) 얻기를 일찍부터 예비하게 하고…”27)

 

[자료6]은 『천주성교예규』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선종을 돕는 공부」의 시작 부분이다. 즉 천주교의 상장례를 규정한 지침서의 첫머리에 ‘인애’라는 단어가 언급되고, 또 인애와 관련된 여러 행동 중에 ‘선종을 도와 죽은 이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가장 크다고 하였다.

 

천주교의 상장례는 ‘선종’을 돕는 것에서 시작하여, ‘하관(下棺)’ 예절로 끝이 난다. 따라서 비록 인애하는 행동의 으뜸이 ‘선종을 돕는 것’이라고 했지만, ‘선종~하관’에 이르는 상장례 전과정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실제 『천주성교예규』에는 “교우가 죽으면 각 처의 교우들이 ‘인애하는 덕을 채우고’ 또 성교회가 진실됨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많이 모일 것이며, 각자 형편대로 상가에서 긴히 사용할 것을 가지고 와 부조함이 좋다.”28)고 하여, 문상(問喪)하는 것도 인애하는 덕을 채우는 행동으로 간주하고 있다.

 

결국 ‘인애회’라는 단체명은 상장례를 돕는 것이 인애하는 행동의 으뜸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토대로, 그러한 활동을 하는 신자 집단을 ‘인애를 실천하는 모임’으로 간주한 데서 나온 결과라고 하겠다.

 

 

Ⅲ. 선종회와 인애회

 

[자료1]에 따르면 블랑 신부가 설립하려고 했던 단체는 선종회(la Confrérie de la bonne Mort)였다. 선종회는 서양 교회에 이미 존재하는 단체이며, 조선에는 1871년에 중국에서 간행된 『선종회규경』(善終會規經)이 알려져 있었고,29) 1886년에는 한글로 필사된 『미과수원』(美果收園)에 선종회가 소개되기도 했다.30)

 

선종회는 1648년 로마의 예수회 성당에서 설립되었고, 주보는 성 요셉이다. 설립자는 예수회의 7대(1646~1649) 총장인 카라파(Carafa) 신부이며, 1827년 이후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 회의 목적은 ‘회우로 하여금 죽을 때를 잘 예비하여 자기 영혼을 타당이 구하게 하는 것이며, 오 주 예수가 십자가상에 죽으심과 성모 마리아의 통고하심과 주보 성 요셉을 사모하여 공경함’에 있었다.31) 즉 회원들이 선종의 은혜를 얻기 위해 예수와 마리아, 요셉께 기도하며, 회원으로서 여러 가지 실천 사항을 행하는 단체이다.

 

회원들이 행하는 실천 사항으로는, 정해진 날에 성당이나 집에서 기도하며, 매월 첨례육에 생존했거나 사망한 모든 회원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다. 그리고 입회한 날, 임종할 때, 예수성탄 등 정해진 첨례날에 고해영성체하면 전대사를 얻었고, ‘병든 이를 돌보고, 임종을 도와주며, 죽은 이를 장사지내면’ 1년의 한대사를 얻었다.32)

 

선종회의 실천 사항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선종을 돕고,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 무료로 장사를 지내 주는’ 인애회의 목적과 비슷하다. 다만 인애회의 주목적이 ‘무료 장례’에 있는 반면([자료1] 참조), 선종회는 ‘회원들이 선종의 은혜를 얻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며, 인애회의 주된 활동인 ‘병든 이를 돌보고, 임종을 도와주며,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선공(善功)’은 선종의 은혜를 얻기 위한 실천 사항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선종회도 [자료4]의 매괴회와 성의회처럼, 장례 봉사가 단체의 주목적은 아니라고 하겠다. 아울러 선종회는 자신의 선종을 위해 애긍 활동을 하는 반면, 인애회는 온전히 ‘남을 위한 애긍’을 목적으로 설립된 것도 다른 점이다.

 

그렇다면 블랑 신부는 왜 선종회를 세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무료 장례 봉사를 주로 하는’ 인애회를 설립한 것일까? [자료1]과 [자료3]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서울의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과부였고, 이들은 죽을 때나 죽은 다음에 돌봐 줄 신자 가족이 없었다. 따라서 누군가는 이들의 임종과 장례, 그리고 사후 미사를 책임져 줄 필요가 있었다.

 

블랑 신부는 이러한 문제를 선종회의 설립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고, 실제 ‘선종회’로 번역되는 ‘une association de la Bonne Mort’를 설립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블랑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장례 봉사’가 당시 서울 신자들에게 시급하다고 보고, 본래의 선종회가 아닌 선종회의 활동 중에 ‘병든 이를 돌보고, 임종을 도와주며,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설립했던 것이다. 개화기 조선 교회가 처해있던 현실을 고려한 조치라고 하겠다. 다만 단체명을 ‘une association de la Bonne Mort’로 표기한 것은, 선종회를 토대로 인애회를 만들었고, 또 인애회를 선종회의 일종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1882년의 인애회는 베르뇌 주교 시기의 인애회를 계승하는 가운데, 선종회를 모델로 설립되었다고 하겠다.

 

 

Ⅳ. 인애회의 성격변화와 연령회

 

선종을 돕고 무료 장례를 목적으로 설립된 인애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성격이 변화되었다. 즉 1911년 6월에 발행된 『경향잡지』에는 대구의 인애회를 ‘죽은 자의 연령을 구하기 위해 신애긍(神愛矜)하는 단체’라고 소개하였고,33) 로베르 신부의 1914년 보고서에는 ‘① 경상남북도의 여러 지역에 장례회(l’œuvre des enterrements)가 있다. ② 매년 회비를 거두어 적립한다. ③ 적립된 회비의 이자로 회원이 죽었을 때, 그리고 매년 기일(忌日)에 정해진 회수의 미사를 드려준다. ④ 회의 기금으로 영구대와 상여, 그리고 그 밖의 물품(accessoires)들을 구입하여 보존한다. ⑤ 기금의 일부를 빈곤한 사람들의 장례를 돕기 위해 사용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34) 로베르 신부가 언급한 장례회는 인애회로 추정된다.

 

1914년에 간행된 『대구대목구 지도서』35)에도 인애회를 ‘죽은 후에 망각하지 않도록 보증해 주는 단체’(societas assecurationis contra oblivium post mortem)로 규정하고 있다. ‘망각에 대한 보증’이란, 결국 죽은 사람을 잊지 않고 연옥에 있는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대사(大赦)를 양보하고 연미사를 바치는 것을 말한다. 이 표현은 로베르 신부의 보고서에도 나오는데(une assurance contre l’oubli après la mort), 『경향잡지』, 「로베르 신부의 보고」, 『대구대목구 지도서』의 내용은 인애회가 당시 연령과 관련된 단체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잘 말해준다.

 

그런데 세 자료에서 언급한 인애회와 블랑 신부가 설립한 인애회와는 차이가 있다. 즉 블랑 신부의 인애회도 회비를 걷지만 주된 재원은 교구와 선교사들이 마련한 기금이며, 주된 활동은 ‘가난한 사람들의 장례를 무료로 치러 주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대의 인애회는 ‘회원들이 낸 회비를 적립하여 기금으로 사용’하고, 주된 활동은 ‘회원들을 위한 연미사 등 신애긍’에 있었다. 물론 회의 기금으로 영구대와 상여 등을 구비했다는 사실에서 회원들의 장례 봉사에도 관여했고 또 ‘빈곤한 사람들의 장례를 돕는 애긍 활동’도 하였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행동은 ‘기금의 일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부수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36) 따라서 인애회는 ‘빈민들을 위해 형애긍(形哀矜)하는 단체’에서 ‘회원 상호간의 신애긍(神愛矜)을 주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변화되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인애회의 성격이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인 자료가 없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의 상황이 변화된 결과로 추정된다. 즉 1886년에 조불조약이 체결되고, 1895년에는 뮈텔주교와 고종의 만남까지 이루어지면서, 천주교는 더 이상 박해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신부들의 지방 정착이 수월해 졌고, 성당 건축 및 본당과 공소 조직도 정비되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 인애회의 무료 장례 사업이 ‘본당 사업’으로 전환된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1923년에 간행된 『회장직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자료7] ① 본당 교우가 죽거든 즉시 신부와 의론하여 장사지낼 일자와 방법을 마련하고, 형편을 보아 할 만한 모든 예절을 행할지라. 회장이 교우들을 영솔하고 시체를 본집에서 성당에 들여 사도예절을 마친 후에 묘지로 가게 할지니…,

 

② 공소에서 초상이 나면, 회장과 교우들이 합력하여 아무쪼록 합당하게 장사지낼 것이오. 장사하는 예절도 다 『예규』에 있으니, 회장이 평상시에 『예규』를 잘 숙습하여 두었다가 초상이 나거든 그대로 준행할 것이며 …

 

③ 초상집이 아주 가난하거나 혹 무의무탁한 이어든 회장과 교우들이 특별히 극력 주선하여 표양답게 장사지내여 줄지니, 이런 아름다운 선공은 영혼육신의 마지막 큰 애긍이 될 뿐더러 또한 외교인을 이끌어 성교회에 나오게 하는 아름다운 기회니라.37)

 

즉 본당 신자든 공소 신자든, 신자 집안에 상사가 나면 회장과 교우들이 상사를 도왔고, 가난하거나 무의무탁한 신자는 회장과 교우들이 특별히 주선하여 장사를 지내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애회’의 활동이 본당 회장이 주도하는 ‘본당 사업’으로 전환되면서, 인애회의 성격도 1882년의 인애회와 다르게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38)

 

본당 조직의 정비와 함께, 1910년을 전후하여 종현 본당의 의친회(義親會, 1909)39), 되재 본당의 상여계(喪輿契, 1910년 이전)40), 천주교중보험회(天主敎中保險會, 1912), 진남포 본당의 상장계(喪葬契, 1917)41) 등 ‘회비를 거두어 회원 간에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상장계(喪葬契)’가 조직된 것도 인애회의 성격 변화에 영향을 준 듯하다.

 

[자료8] 천주교중보험회 규칙 : 우리 교중인이 이 회를 설립함은 일개인의 사욕을 위함이 아니라, 교중 남녀를 위함이니, 이 회에 가입한 회원들은 망자(亡者)난 발문(跋文)을 보거든 수렴전(收斂錢) 7전 5리(백동은 3푼)를 삼일 내로 지체 없이 납부하여 상가에 폐단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一. 회에 드는 사람은 성, 본명, 거주 통호를 자세히 적어 보낼 것.

一. 이사한 사람은 즉시 새집의 동명 통호를 적어 보낼 것.

一. 수렴전을 세 차례 납부하지 않으면 출회(出會)시킬 것.

一. 영세하지 않은 사람은 회에 들지 못할 것.

一. 먼 지방에 사는 사람은 회에 들지 못할 것.

一. 한 사람을 두 사람이 입록(入錄)하지 못할 것.

一. 나이 많은 노인을 대망으로 드는 것은 불가함(혹 내 부모, 조부모, 처부모, 처조부모, 외가 조부모, 백숙 부모, 이모 내외, 고모 내외, 자매형제와 서모, 수양부모를 위하여 드는 것은 무방함).

一. 이 회의 성립이 완전한 후, 추후로 드는 사람은 선수렴(先收斂)을 나이대로 납부 한다 (20세 이상은 50전, 30세 이상은 1환, 40세 이상은 2환, 50세 이상은 4환, 60세 이상은 5환).42)

 

[자료8]은 1912년에 설립된 ‘천주교중보험회’의 규칙인데, 이 내용을 보면 상장계의 성격이 ‘무료 장례’를 목적으로 하던 ‘인애회’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남을 위한 애긍 보다 회원 상호간의 금전적인 부조가 주된 목적이었다.

 

이처럼 장례 비용을 미리 준비하는 상장계가 조직되는 가운데, 죽은 신자들을 위해 미사를 예비하는 단체의 설립도 요구된 듯하다. 1914년 로베로 신부의 보고서에 등장하는 장례회가 그것인데, 회원들에게 회비를 거두어 적립하고, 그 돈으로 회원이 사망했을 때와 기일에 정해진 회 수의 미사를 봉헌해 주는 단체였다. 대구대목구와 서울대목구에서는 『지도서』를 통해 이러한 성격의 단체 설립을 공식적으로 권고했고, 인애회를 그러한 역할을 하는 단체로 규정하였다.

 

요컨대 기존의 인애회 활동이 본당 활동으로 전환되고 상장계의 조직이 활발해지면서, 인애회의 성격은 ‘가난한 사람들의 무료 장례’를 위한 단체에서 ‘죽은 회원들의 미사 봉헌’을 주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변화되었다고 하겠다.

 

인애회의 이러한 성격은 1920년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23년에 간행된 『서울대목구 지도서』에는 ‘고인을 위한 미사 봉헌을 위해 인애회의 설립을 권유하는 내용’이 있고,43) 같은 해에 간행된 『회장직분』에는 ‘인애회를 모든 지방에서 설립할만한 단체’로 소개하고 있다.44) 실제 고초골 공소(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는 1927년경에 인애회가 설립되었는데, 현재 관련 자료인 『인애회계책』(仁愛會契冊)45)이 남아 있다.

 

1932년에 간행된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에도 『서울대목구 지도서』와 같은 ‘인애회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서는 1931년 9월에 개최된 전조선주교회의(지역 공의회)의 결의 사항이며, 그 내용은 『경향잡지』(1934)에 「전조선성 교회법규」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었다. 이 「전조선성교회법규」 제422조를 보면 “인애회 같은 것을 창설하고 후원하여, 죽은 후에 연령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할지며, 대소기뿐만 아니라 가끔 연미사를 드리도록 할지니라.”46)라고 하여, 인애회를 기도와 연미사를 봉헌하는 단체로 소개하고 있다.

 

인애회의 성격이 변화하는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 1930년대 『경향잡지』에 등장하는 ‘연령회’이다. 이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47) 연령회는 1910년대의 인애회와 같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즉 1929년경 용소막 본당에 설립된 연령회는 회원을 모집한 후 회비를 받아 적립하고, 회원이 사망했을 때나 추사이망, 사계(四季) 때에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1933년에 조직된 남곡리 본당(용인)의 연령회48)와 1933년 말(12. 25) 안성 본당의 회장들이 설립한 ‘(회장) 연령회’도 연미사 봉헌을 목적으로 하였다.49) 연령회가 연령과 관련된 단체라는 것은 『경향잡지』에 남곡리 본당의 연령회를 ‘연령을 위하는 회’라고 소개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연령(煉靈)을 돕기 위한 단체(Auxiliatrices des âmes du purgatoire)는 18세기 중반에 프랑스 파리에 설립되었고, 중국에는 구연령회(救煉靈會)로 알려져 있다.50) 따라서 ‘연령회’라는 명칭은 조선 교회에도 낯선 용어는 아니었다.51) 그런데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인애회가 ‘연령을 돕는 단체’로 변화하고, 교회에서는 이러한 단체의 설립을 장려하였다. 이에 본당과 공소에 인애회가 조직되었는데,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새로 조직된 단체들 중에는 인애회 대신 ‘연령회’라는 단체명을 사용하기도 한 듯하다. 아마 ‘인애회 = 연령회’라는 인식하에, 두 명칭 중 연령회가 회의 목적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이 회장과 교우들은 신자의 상사에 관여했고, 가난한 신자들의 장례도 본당에서 치러주었다. 그런데 일부 본당에는 이 업무를 담당하는 별도의 단체가 설립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36년에 간행된 『가톨릭연구』에는 전동 본당의 ‘경애회’를 소개하면서, “회장들과 각 호주들이 정목(丁目)을 나누어 임종 대세자와 교우 사망 시에 호상(護喪)하여 극빈자를 구제한다.”52)고 했다. 이것으로 보아 1930년대에는 ‘경애회’와 같이 ‘호상’하는 단체가 조직되어 ‘인애회(연령회)’와 병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장례 봉사’와 ‘연령 구제’를 구분하여, 장례 봉사는 경애회와 같은 단체가, 연령 구제는 인애회(연령회)가 맡았다고 하겠다. 물론 모든 본당에 경애회와 같은 단체가 설립된 것은 아니다. 장례 봉사는 특별한 단체 없이 본당 회장이 중심이 되어 호상(護喪)하는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장례 봉사와 연령 구제 단체는 1950~1960년대에도 구분된 듯하다. 이 시기 연령회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데, 1956년 11월호 『경향잡지』에 ‘혜화동 본당’의 연령회 설립 소식이 있어 주목된다. 이 기사에 따르면 혜화동 본당에는 1956년 9월 16일에 “선조 추모 사상의 함양과 보급, 회원 신앙생활의 향상, 교회 발전에 힘쓸 것”을 목적으로 연령회가 결성되었다.53)

 

‘선조 추모 사상의 함양과 보급’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의미하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연령회가 ‘수개월 동안 본당 묘지를 조성하기 위해, 연령 기구와 기금 마련을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설립’되었다는 점, 1964년 7월 26일에 발족된 도비아회가 ‘오래전부터 교우들이 상가를 방문하여 장례를 도왔으나, 불미한 행동으로 본당 전체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 발생하여, 이를 좀 더 규율 있는 조직체로 묶기 위해 설립’되었다는 점, ‘연령회가 활동하고 있기는 했으나 단체로서 미비한 점이 많았고, 그러다가 도비아회가 발족되었다.’는 『백동 60년사』의 내용54) 등을 통해 볼 때, 1956년에 설립된 연령회는 호상을 전담하는 단체라기보다는 연령을 위한 단체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1964년 도비아회가 설립될 때까지 혜화동 본당에는 ‘규율 있는 호상 단체’가 없었다고 하겠다.

 

물론 연령회의 초대 회장인 이선길이 장의사를 운영했고, 상가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는 점55)에서 연령회가 호상 활동에도 참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호상을 위한 규율 있는 조직체’가 없어 도비아회가 설립되었다거나, ‘연령회가 단체로서 미비한 점이 많아 도비아회가 발족했다’는 것은, 연령회가 호상을 전담하는 단체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이에 체계적인 호상 활동을 위해 본당에서는 1964년에 도비아회를 설립했는데, 도비아회가 연령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두 단체의 성격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도비아회는 “본당 내에서 발생하는 임종자를 방문하여 제성권면하고 선종토록 도와주며, 사망자가 났을 때 상가를 방문하여 망자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예식대로 장례를 도와주며, 특히 위험대세를 받고 선종한 이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협조와 위로와 좋은 표양을 줌으로써 전교 사업에 이바지 하는 것”56)을 목적으로 했다.57)

 

도비아회는 1977년 이전에 해체되었는데, 그 뒤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도비아회가 하던 일을 해오다가, 연도와 초상집 돕기를 조직적으로 해나갈 필요성을 느낀 교우들이 1980년 9월부터 단체 설립을 위한 논의를 시작한 결과 12월 1일에 연령회를 재발족하였다.58) 1980년에 발족한 연령회는 “상가 방문, 연도와 유족 위로”59)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도비아회와 같은 성격의 단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도비아회가 아니라 연령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이 시기에 연령회의 성격이 호상 단체로 굳어진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혜화동 본당의 사례처럼, 1950~1960년대까지는 연령 구제와 호상 단체가 구분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이것은 1958년에 재발행된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에 1932년의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의 인애회 내용이 그대로 수록된 사실에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60) 그리고 호상은 대체로 본당 차원에서 이루어지거나 1953년에 도입된 레지오 마리애 회원들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으므로,61) 대부분의 본당에서는 호상을 위한 단체의 필요성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듯하다. 혜화동 본당도 연령회가 없을 때에는 안나회, 레지오 마리애, 요아킴회의 회원들이 ‘상가 봉사, 초상집 돌보기’ 등의 활동을 하였다.62) 물론 혜화동 본당처럼 호상 단체를 둔 본당도 있지만, 그 경우 연령회가 아니라 도비아회와 같은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대도시의 신자수가 증가하고 자본당(子本堂)이 늘어나면서 본당마다 ‘호상’ 단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에 본당들은 기존의 연령회를 활성화하거나 새로 연령회를 조직하여 교우들이 선종했을 때 수행해야 할 업무들을 맡겼다.63) 그 결과 일제 강점기의 연령회와 성격이 다른, 오늘날의 연령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Ⅴ. 맺음말

 

한국 천주교회는 100년 동안 박해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의 신자들이 순교했다.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박해한 이유 중의 하나는 조상제사 문제였다. 즉 진산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신자들이 조상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모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천주교를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는 집단으로 인식하여 탄압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달랐을 뿐, 천주교 신자들이 조상을 공경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다블뤼 주교가 1863년과 1864년 서한에서 언급했듯이, 천주교 신자들의 점잖은 장례 예식과 신자들의 헌신을 보면서, 천주교에 대한 편견이 억제되고 입교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던 것이다.

 

조선의 신자들은 일찍부터 형애긍의 하나로써, 그리고 ‘어려운 때 서로 돕는’ 환난상구(患難相救)의 전통 아래 장례 봉사에 참여했고, 1830년대에는 매괴회와 성의회의 은사와 연계되면서 활동이 좀 더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천주성교예규』가 간행되는 베르뇌 주교 때에는 장례 봉사를 위한 ‘인애회’까지 조직되었다. 그러나 신자들의 장례 봉사 활동은 병인박해로 중지되었고, 1882년 블랑 신부가 회규를 갖춘 ‘인애회’를 설립하면서 재개되었다.

 

인애회는 가난한 신자들을 위한 무료 장례 봉사가 주목적이며, 베르뇌 주교 때의 전통과 1648년 로마에 설립된 선종회를 모델로 조직되었다. 인애회는 처음 서울에 설립되었으나, 각 지의 선교사들도 조직함으로써 개화기 천주교회의 재건에 일조하였다.

 

그러다가 1886년에 조불조약이 체결되고, 1895년에 뮈텔 주교와 고종의 만남까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인애회의 성격도 점차 변하였다. 즉 각 지에 성당이 세워지고 본당 조직이 정비되면서 인애회의 ‘무료 장례 봉사’는 본당 활동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1910년 이전부터 금전적인 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상장계가 조직되면서, 연령을 위한 단체의 설립도 요구되었다. 그 결과 인애회는 ‘연령을 위한 단체’로 성격이 변화되었는데, 이것은 『대구대목구 지도서』(1914), 『서울대목구 지도서』(1923),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1932) 등 교회의 『지도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애회 외에 연령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단체로서, 연령회가 1930년대 『경향잡지』에 등장한다. 연령회의 활동은 인애회의 활동과 같았는데, ‘연령을 위한 단체’라는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인애회보다는 연령회라는 명칭이 더 적합했다. 이에 1930년을 전후하여 새로 설립되는 ‘연령을 위한 단체’는 인애회 대신 연령회를 단체명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생겼고, 그 결과 이 시기에 연령회가 새롭게 등장하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전주 본당의 경애회 같이 일부 본당에는 ‘호상(護喪)’을 위한 단체도 존재했다. 따라서 1930년대에는 ‘장례 봉사’와 ‘연령 구제’를 위한 단체가 병존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혜화동 본당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호상을 위한 단체의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본당들은 기존의 연령회에 이 역할을 맡기거나, 관련 단체가 없는 본당에서는 새로 연령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의 연령회와 다른, 호상을 전담하는 오늘날의 연령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단체로서 한국 교회의 연령회는, 베르뇌 주교 때에 단초가 마련되었고, 1882년 블랑 신부가 설립한 인애회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역할 면에서는 처음에 선종을 돕고 무료 장례를 치러주던 단계에서, 연령을 위한 기도와 미사 봉헌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변화되었다가, 1970년대 이후에 호상을 전담하는 단체가 되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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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산교구에는 연령 연합회, 대전교구에는 위령 봉사 연합회가 있다.

 

2) 의정부교구 연령회 연합회 회칙(제2조 목적).

 

3) 김진소, 『전주교구사Ⅰ』, 천주교 전주교구, 1998, 854쪽; 장동하, 『개항기 한국 사회와 천주교회』, 가톨릭출판사, 2005, 31쪽.

 

4) ‘연령회는 1880년대에 서울, 제물포, 대구에서 이미 시작하였고, 전주 본당은 1891년경 조직되어 활동하였다.’(김진소, 『전주교구사Ⅰ』, 689쪽); ‘1887년 (대구의 로베르 신부로부터) 시작된 무료 장례예식제도(연령회)는 그로부터 7년 뒤 서울은 물론 제물포와 전주 등 선교사들이 부임한 본당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각 지방의 특색에 따라 정착되기 시작했다.’ (장동하, 『개항기 한국 사회와 천주교회』, 34~35쪽)

 

5) 『명동본당사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108쪽.

 

6) 방상근, 「연령회」, 『교회와 역사』 308호,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방상근, 「개화기 천주교회의 연령회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제195회 연구발표회 발표논문, 2018. 4. 7.

 

7) 블랑 신부는 1882년 7월 26일에 부주교로 지명되었고, 1883년 7월 8일 일본 나가사키 주교좌 성당에서 프티장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그리고 1884년 6월 20일 리델 주교가 고향인 프랑스의 반(Vannes)에서 선종하면서 대목구장직을 승계하여 제7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

었다.

 

8) Un autre projet qui est encore en plan, c’est l’établissement ou plutôt le rétablissement de la Confrérie de la bonne Mort et des enterrements gratuits pour les pauvres, elle existait jadis sous le nom de [미판독] Avec une population telle que celle des chrétiens de Séoul, dont le grand nombre se compose de veuves jeunes et vieilles, vivant au jour le jour, ordinairement sans parents chrétiens, sans personne qui s’occupe d’elles à leur mort et après leur mort, la Confrérie en question est vraiment nécessaire. Quand tout sera réglé définitivement j’en enverrai les Statuts à Sa Grandeur pour les faire approuver.

 

9) j’envoye à Sa Grandeur le règlement de l’인애회 en la priant d’y donner son approbation.

 

10) L’année dernière j’ai établi à la Capitale (Séoul) une association de la Bonne Mort(elle existait du temps de Mgr Berneux v.ap., mais le malheur des temps l’avait fait disparaître) son but est double 1° de prier pour les mourants et de les aider à bien mourir par visites, dons etc., et 2° d’enterrer gratuitement les confrères pauvres ou autres chrétiens ; les confrères paient chaque mois une petite obole et récitent chaque jour une petite prière au Bon St Joseph, patron de la Bonne Mort. Mon vœu et celui des confrères serait d’obtenir des indulgences partielles et plénières pour les associés ; si peu que ce soit, ce serait un moyen considérable d’augmenter le zèle et la charité d’une œuvre nécessaire pour une ville comme Séoul, don't la population chrétienne se compose en grande partie de veuves pour la plupart sans ressources, et sans famille chrétienne qui puisse s’occuper d’elles à leur mort et après leur mort.

 

11) 김기호, 「봉교자술」, 『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 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247쪽.

 

12)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365쪽.

 

13) 다블뤼 주교 저, 유소연 번역,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8; 『베르뇌 주교 서한집』(상 ·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14) 블랑 신부가 서울 신자들을 대상으로 인애회를 설립했다는 것은, 베르뇌 주교 때에도 서울에만 인애회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15) 매괴회와 성의회에 대해서는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157~164쪽 참조.

 

16) 필자는 이전의 연구에서 매괴회와 성의회의 설립시기를 1836~1838년 사이로 추정하였다(『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160·163쪽;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내포교회사연구소, 2018, 159쪽). 그런데 2022년 3월 한국천주교사료목록화사업의 단체 관련 작업을 하면서, 모방 신부가 1839년에 쓴 마지막 서한에서 ‘1838년에 남명혁의 가족을 매괴회에 입회시켰다’는 기록을 보았고, 또 페레올 주교가 1846년 11월 7일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대목구장의 특별 권한 중에 성의회와 매괴회의 설립 권한”이 있음을 확인했다(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2, 477쪽). 그리고 두 단체의 설립권이 대목구장에게 있고, 남명혁 가족이 1838년에 매괴회에 입회했다면, 두 단체의 설립 시기는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 1838년경으로 좁혀 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최근 수원교회사연구소의 이석원 연구실장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특별 권한 중에 성의회의 설립권이 있다는 점,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망으로 모방 신부가 대목구장 직무 대행으로 성의회의 설립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모방 신부가 1837년 11월 26일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성의회와 매괴회를 언급했고, 1839년의 서한에서 남명혁 가족을 매괴회 회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토대로, 두 단체의 설립 시기를 1836년으로 추정하였다(이석원, 「신심단체 성의회(聖衣會)와 매괴회(玫瑰會)의 설립 관련 기록-모방 신부 서한에서 확인되다」, 『상교우서』 88호, 수원교회사연구소, 2022. 8). 그러나 모방 신부의 대목구장 직무 대행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있고(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의 관계에 대한 고찰」, 『교회사연구』 4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5, 30~38쪽), 또 모방 신부가 1837년 서한에서 언급한 성의회와 매괴회에 대한 내용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이미 모아 놓은 의심스러운 사항들’[notas sequentes colligerat Illus Capsen episcopus]을 포교성성 장관에게 문의하는 내용 중에 포함되어 있다. 즉 이 내용은 모방 신부가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라, 브뤼기에르 주교가 제기한 의문점을 모방 신부가 재차 문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만으로는, 물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1837년 이전에 모방 신부가 조선에 두 단체를 설립했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아울러 모방 신부가 1836년에 매괴회를 설립했다면, 당시 남명혁의 교회 내 위치를 고려할 때 남명혁과 그의 가족을 1838년에야 입회시켰을까도 의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좀 더 확실한 자료가 나올 때까지, 두 단체의 설립 시기를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 1838년으로 보고자 한다. 성의회와 매괴회의 구체적인 설립 시기는 본 논문의 논지와는 크게 관계가 없지만, 편집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정리했음을 밝혀 둔다.

 

17) [형애긍 7단] ① 주린 이를 먹임이요 ②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줌이요 ③ 헐벗은 이를 입힘이요 ④ 병든 자와 옥에 갇힌 이를 돌봄이요 ⑤ 나그네를 집에 대접함이요 ⑥ 사로잡힌 이를 속량함이요 ⑦ 죽은 이를 장사함이요. [신애긍 7단] ① 선으로써 남을 권함이요 ② 우몽(愚蒙)한 이를 가르침이요 ③ 근심하는 이를 위로함이요 ④ 잘못하는 이를 책선(責善)함이요 ⑤ 나를 업신여긴 이를 관사(寬赦)하여 줌이요 ⑥ 남의 악한 행실을 용서하여 줌이요 ⑦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기구함이요 (『경향잡지』 347호, 경향잡지사, 1916. 4, 159쪽; 『요리강령』(제3판), 성조사, 1956, 67~68쪽).

 

18) 形哀矜第七端所云塟死者 此聖敎之嚴規也 (陽瑪諾 譯, 『聖經直解』(第六卷), 4-b쪽); 『셩경직 광익Ⅱ』(영인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411쪽.

 

19) 이것은 블랑 신부가 인애회를 위해 대사(大赦)를 요청한 이유에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20) 1863년 9월 13일자 다블뤼 주교 서한(『한국천주교회사』 하, 349쪽).

 

21) 『서울교구연보(Ⅰ)』, 명동천주교회, 1984, 150쪽.

 

22) 로베르 신부의 1884-1885년도 사목 보고서를 보면, ‘천주교식 무료 장례 예식’이 4~5년 전에 시작되었으나, 그 사이 신자들이 가난하고 규칙이 없어 시행되지 못하다가, 1885년에 자신이 부활시켰다고 한다(『대구의 사도 김보록(로베르)신부 서한집-1』, 영남교회사연구소, 1995, 24쪽).

 

23) 김진소, 『전주교구사Ⅰ』, 689쪽.

 

24) 『병인순교자 시복 재판기록』(Ⅶ, 1922), 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33쪽. 당시 우세필과 유정률에 대해 증언한 이기하(바오로)는 20년 전에 평양에서 인애회와 숭의회의 회장으로 활동했다고 하였다.

 

25) 방상근, 「개화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착과 한국 인식」, 『동양학』 68집, 동양학연구원, 2017, 182~183쪽.

 

26) 방상근, 「개화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착과 한국 인식」, 182쪽.

 

27) 「선종을 돕는 공부」, 『천주성교예규』 제1권, 1-a쪽. 聖而公會 仁愛諸行 莫大於體天主仁慈救人靈魂于凶險 以保求久之生命也. 

 

28) 「상장규구」, 『천주성교예규』제2권, 50-b쪽.

 

29) 강남대목구장이었던 Languillat 주교(1864. 9~1878. 11 재임)가 감준했으며, 『선종회규경』의 한글 번역본도 있다.

 

30) 블랑 주교가 감준했으며, 예수성심회, 건도종회, 성모매괴회, 성모성의회, 성모성심회, 성모칠고회, 선종회, 전교회, 영해회 등 9개의 단체를 소개한 책이다. 

 

31) 『미과수원』, 22장; 『善終會規經』, 1장.

 

32) 『善終會規經』, 1~4장; 『미과수원』, 22~25장

 

33) 『경향잡지』 231호, 경향잡지사, 1911. 6, 246쪽. 한편 본당사와 교구사에는 계산 성당의 인애회가 1917년 2월 1일에 발족했고, 인애회에서는 ‘세상을 떠난 회원들을 위해 연미사를 한 대 봉헌하고, 모든 회원을 위해서는 매년 생미사를 올렸다.’고 한다(대구대교구사편찬위원회, 『대구본당 백년사』, 대건출판사, 1986, 242쪽; 천주교 대구대교구, 『은총과 사랑의 자취 - 천주교 대구대교구 100년사』, 분도출판사, 2012, 750쪽). 그러나 계산 본당의 인애회는 1911년 이전에 이미 설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1917년에 발족했다는 것은 착오가 아닌가 생각한다. 다만 1917년에 인애회가 재발족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사실 관계는 알 수 없다.

 

34) 부산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敎區年報』, 천주교 부산교구, 1984, 49쪽. 본문 중 일부 내용의 해석은 필자가 다시 했다.

 

35) Directorium Missionis Taikou, Hongkong : Imprimerie de Nazareth, 1914, p.42.

 

36) 계산 성당의 인애회에서도 ‘납부된 회비를 활용해 의탁할 곳 없는 노약자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다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고 했다(『대구본당 백년사』, 242쪽; 『은총과 사랑의 자취 - 천주교 대구대교구 100년사』, 750쪽).

 

37) 르 장드르,『회장직분』, 성서활판소, 1923, 125~126쪽.

 

38) 원주 본당의 폴리(Polly)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1925~1926년 연례보고서」를 보면, ‘무료 장례 봉사’가 본당 청년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젋은이들의 특성과 선교 활동을 위한 그들의 방식은, 무엇보다 가능한 한 가장 적절하게 가난한 교우들이나 죽는 순간에 대세를 받은 외교인들의 장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가 없이 잡일들을 하면서 도와줄 뿐만 아니라 망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해 선의를 가진 교우들을 모으기도 하고 장례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또한 장례비용을 위해 헌금을 거두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는 일은 무료로 장례 봉사자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매우 헌신적이고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 시복 자료집 제2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19, 27~28쪽).

합덕본당에서도 청년회가 1923년에 가난한 교우의 장례비를 도와주고, 협력하여 장례를 치러 준 사례가 있다. 이외 1927년에는 교우들이 극빈한 신자가 선종하자 연도와 장례를 지내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33년에는 대세받고 사망한 사람을 위해 청년들이 연도와 장례를 치러준 기록도 있다(『구합덕본당 100년사 자료집』, 천주교 구합덕교회, 1990, 472·469쪽).

 

39) 1909년 12월에 종현 본당의 신자 김경진과 문영석 등 21인은 서로의 상사(喪事)를 돕기 위해 10환씩을 내여 의친회를 조직했다(『명동본당사Ⅰ』, 108쪽).

 

40) 「경향신문」, 1910년 1월 21일자.

 

41) 천주교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天主敎平壤敎區史』, 분도출판사, 1981, 360쪽.

 

42) 『천주교중보험회규측』(1912),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43) 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 Hongkong : Imprimerie de la Société des MissionsEtrangères de Paris, 1923, pp.143~144.

 

44) 르 장드르,『회장직분』, 150쪽.

 

45) 임성빈(수원교구 수지 본당) 선생님의 미발표 원고에 언급된 자료이다.

 

46) 『경향잡지』 787호, 경향잡지사, 1934. 8, 431쪽.

 

47) 개화기와 1910년대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록을 번역한 자료를 보면 ‘연령회’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l'œuvre des enterrements를 번역자가 오늘의 관점에서 연령회로 번역한 것이지 자료에 ‘연령회’라는 단체명이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l'œuvre des enterrements는 ‘장례회’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것을 ‘연령회’라고 번역하면 ‘연령회’라는 단체가 개화기부터 있었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

 

48) 남곡리 본당 연령회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① 생존한 회원이 사망한 부모나 혹 다른 이를 위하여 본회에 연령기구를 요구함이오. ② 생존한 회원은 미사에 참예하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연도나, 매괴 5단을 요구자의 원의대로 봉헌할 것이오. ③ 일자는 요구하는 회원이 임의로 정하여 본회에 통지하여야 할 일. ④ 회원은 매월 회비 10전씩을 드려, 요구자의 뜻대로 미사 한 대씩을 하월 하일이든지 요구대로 매년 1대씩을 드려줌이오. ⑤ 출회는 회원이 사망하였거나, 입회금을 내지 못하는 때이니, 내지 못하여 출회하였다가 다시 입회할 수도 있음. ⑥ 매년 1원 20전을 12개월에 10전씩 내든지, 혹 일시에 내든지 회원의 임의로 하고, 기부와 여 재를 적립하여 회원 사망시에 미사 1대씩을 봉헌함. ⑦ 본회 관리는 본당 신부를 총재로 추대하고 총재는 수의로 회장을 간선하여 관리케하고 회원은 지방과 노소 남녀를 불구함이러라. (『경향잡지』 764호, 1933. 8, 368~369쪽)

 

49) 방상근, 「연령회」, 12쪽.

 

50) 『聖三救煉靈會』, 北京救世堂, 1886 참조(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한편 “Auxiliatrices des âmes du purgatoire”는 Marie de la Providence(Eugénie smet, 1825~1871)가 1856년에 프랑스 파리에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聖三救煉靈會』에는 설립자인 瑪利亞 白類蘭이 1847년에 파리에 세웠고, 설립자의 사망 연도도 1865년으로 되어 있다.

 

51) 이문어 신부가 저술한 『煉獄略說』(상해 자모당, 1871)에는 ‘구연령회’가 ‘증망회(拯亡會)’로 표기되어 있다. 이 책은 1871년 이후 어느 시점에 조선에 입수되었고, 1896년 이전에 한글로 번역되었다(이문어 지음, 임치균·조현범 옮김, 『연옥약설』, 한국교회사연구소, 2021, 34·156쪽).

 

52) 『가톨릭연구』, 1936, 6, 142쪽; 김진소, 『전주교구사Ⅰ』, 824쪽.

 

53) 『경향잡지』 1064호, 1956. 11, 418쪽; 『백동반세기-혜화동본당 50년사』, 혜화동교회, 1977, 198·218쪽.

 

54) 『백동반세기-혜화동본당 50년사』, 198·218쪽; 『백동 60년사』, 천주교 혜화동교회, 1987, 179~180쪽.

 

55) 『백동반세기-혜화동본당 50년사』, 198쪽.

 

56) 『백동반세기-혜화동본당 50년사』, 218쪽.

 

57) 혜화동 본당에서는 연령회가 도비아회로 명칭만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백동 70년사』, 천주교 혜화동교회, 1997, 335쪽; 『혜화동 본당 90년사』, 천주교서울대교구 혜화동교회, 2017, 399쪽). 그러나 1977년에 간행된 『백동반세기』에는 연령회가 도비아회로 바뀌었다는 내용이 없다.

 

58) 『백동 60년사』, 180쪽.

 

59) 『백동 60년사』, 250쪽.

 

60) 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 1958, p.209.

 

61) 박명진, 『한국천주교회 상장례 - 어제와 오늘-』, 가톨릭출판사, 2016, 458쪽.

 

62) 『백동반세기-혜화동본당 50년사』, 292·294·302쪽.

 

63) 박명진, 『한국천주교회 상장례 - 어제와 오늘-』, 459~460쪽. 명동 본당도 1970년에야 연령회를 설립하였다. 1968년 10월부터 14명이 모여 사망한 교우들의 장례 절차를 도와주었는데, 본당의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이들을 중심으로 1970년 4월 28일에 정식으로 연령회를 출범시켰다(『명동본당사Ⅰ』, 228쪽).

 

[학술지 교회사학 제21호, 2022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418689&Page=2&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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