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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광복 70년 분단 70년3: 분단의 비극,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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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14 ㅣ No.707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3) 분단의 비극, 6·25 전쟁


전쟁의 포화로 폐허된 교회, 그래도 기도는 이어지니



6ㆍ25 전쟁 중 방화로 전소되다시피 한 덕원수도원. 출처=「눈먼 이들에게 빛을」(분도출판사)


1894년 신축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인천 제물포분원이 뼈대만 남긴 채 허물어졌다. 6ㆍ25 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된 제물포분원은 1952년 미군 원조로 2층으로 복구됐고, 지금은 해성보육원으로 쓰고 있다. 이뿐 아니라 1949년 5월 11일 공산 정권에 의해 폐쇄된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도 전쟁 중 방화로 전소하다시피 했으나 훗날 복구돼 원산 농과대학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당시 파괴됐던 교회 건축물은 지금까지 사진으로 전해져 전쟁의 참상을 증언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시작된 만 3년 1개월 2일의 전쟁은 겨레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 한반도 전역은 ‘폐허’가 됐다.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고, 한 달이 채 못 된 7월 20일에 대전이 함락됐으며, 그로부터 또 닷새 뒤 낙동강에 전선이 형성돼 남북 135㎞, 동서 90㎞만 남았다.

전쟁이 벌어지자 장면(요한) 초대 주미대사는 당시 미 유엔 수석대표 오스턴 상원의원, 미 국무부 고문 덜레스 등과 접촉, 유엔군 파병에 총력을 기울였다.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은 것이 큰 힘이 됐다. 그해 7월 7일 유엔군 16개국의 파병이 성사됐다.

6ㆍ25 전쟁 중 폭격으로 골조만 앙상하게 남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인천 제물포분원. 출처=「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888∼1988」


전쟁 발발 당시 프랑스 파리를 방문 중이던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는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으며, 귀국하던 중 일본 주둔 유엔군사령부의 요청으로 ‘유엔군이 파병됐으니 공산도배의 최후 발악적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천주께 기구하라’는 취지의 격려 방송을 한 뒤 미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으로 귀국했다.

‘포연 속 교회’의 전쟁에 대한 입장은 어떠했을까? 노 주교는 1951년 1월 14일 자 천주교회보를 통해 “형제 살상의 비극적 전란의 원인은 무신론 공산주의의 마수”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대구대목구장 최덕홍 주교 또한 한국전쟁을 “국토 통일과 평화 건설을 위한 역사적 과업”으로 봤다. 한마디로 ‘성전’(聖戰)이라는 게 교회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0년 8월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대구대교구 김동한 신부 등 사제 10여 명은 ‘가톨릭 청년 결사대’ 결성을 시도했으나, 군이 무기공급의 어려움을 전해오며 좌절됐다. 하지만 그해 9월 지학순과 김창렬, 김옥균 등 신학생 30여 명은 당시 서울대신학교 학장 정규만 신부 인솔 아래 육군에 자원 입대한다. 또 1950년 9월에는 군종제도가 도입돼 1951년 2월 가톨릭 사제 11명이 육군에 군종장교로 입대해 활동한다.

전선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1950년 9월로 접어들며 낙동강 전선의 유엔군은 어려운 고비를 맞고 있었다. 이에 맥아더는 10군단을 창설, 지상군 7만 5000명에 함선 261척을 투입해 인천에 상륙했다. 뒤이어 공산 치하 93일 만인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고, 10월 20일엔 평양을 수복했다. 통일이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중공군이 개입했고, 1ㆍ4후퇴에 이어 3ㆍ8선을 사이에 둔 지루한 공방이 2년 6개월간 이어졌다.

6ㆍ25 전쟁 당시 피란민 가족들. 평화신문 자료사진


전쟁 시기 교회는 엄청난 피해를 봤다. 성당이나 교회 학교, 병원 등이 공산군에 징발돼 파괴된 것은 물론이고 인명 피해도 컸다. 1947년 10월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부임, 대한민국 건국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패트릭 제임스 번 주교, 용산 성신중학교 교장이던 이재현 신부 등 숱한 성직자들이 ‘죽음의 행진’에 끌려가거나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피랍 일자만이 간간이 전해질 뿐 순교 일도, 순교 터도 알 수 없는 죽음의 길이었다.

전쟁에 앞서 해방 이후 ‘수난의 길’을 걸었던 북녘 교회 또한 초토화됐다. 북녘 교회는 해방 당시 교세가 5만 7000여 명에 이르렀지만, 공산 통치 5년과 전쟁 중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 등 숱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끌려가 행방불명되고 교회 또한 몰수되면서 5년여 만에 거의 다 와해했다.

그럼에도 교회는 군·피란민 사목과 함께 구호 활동에 집중했다. 군 사목과 함께 군 병원 의료 봉사(제5 육군병원)가 이뤄졌다. 거제도ㆍ광주ㆍ논산ㆍ부산 포로수용소 사목 등을 통해 1만 5827명의 영세자를 배출했다. 미국 가톨릭 사회복지협의회(NCWC) 지원으로 대구교구가 주도하는 피란민 구호를 하기도 했다. 이 같은 활동과 함께 교회 내적으로는 성모 신심과 함께 순교 신심을 강화, ‘기도의 십자군 운동’을 전개했다. ‘파티마의 푸른 군대 운동’이 소개된 것도 이때였다.

1953년 7월 27일 포연이 멎었다. 하지만 전쟁은 폐허만 남겼다. 남북 합쳐 300여만 명이 사망했고, 국토는 초토화됐다. 그리고 정전 63년째가 되도록 풀리지 않는 증오만 남았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14일, 오세택 기자]



“평양 수복 후 미사 봉헌의 ... 감격 아직도 생생해”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김득권 신부



김득권 신부


“제게 6ㆍ25전쟁은 ‘해방’이라는 의미가 큽니다. 공산 치하에서 5년을 살았기 때문이죠. 동시에 분단이 시작된 시점이기에 이산의 의미도 엇갈립니다.”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김득권 신부는 6ㆍ25전쟁 개전 당시 평양에 있었다. 1933년생이니, 18세였다.

어려서 부모가 타계해 평양교구 관후리주교좌본당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에서 살다가 덕원소신학교에 입학했던 김 신부는 수도원이 폐쇄되면서 1949년 5월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쟁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남포로, 서포로 피신을 다니며 바보 흉내를 내 겨우 인민군 징집을 면했다. 개전 이후에도 4개월 가까이 공산 치하에 살다가 1950년 10월 20일 평양이 수복되자 당시 소신학생으로서 평양교구장 서리 캐롤 안 몬시뇰, 윤을수 신부 등과 함께 관후리본당을 지켰다.

“수복 뒤 노기남 주교님이 오셔서 미사를 보던 기억이 납니다. 짓다가 만 관후리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는데, 성당 유리창을 달지 못해 어찌나 추웠는지 주교님 손이 다 얼어 터졌어요. 10월이면 평양의 밤은 영하 15도로 뚝 떨어지는 기온이었으니 낮에도 추울 수밖에 없었지요. 숨어 있던 교우들이 200명쯤 나와 미사를 봤는데,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침략으로 수복된 지 40여 일 만에 김 신부는 월남한다. 평양에서 평북 중화군, 황해북도 황주시, 사리원시, 개성시를 거쳐 서울에 들어왔지만 1ㆍ4후퇴로 서울대목구 식구들과 함께 피란을 떠나 대전과 대구, 부산을 거쳐 제주도와 밀양에서 소신학교 과정을 거쳤다.

“제주도 홍로 교우촌, 지금의 서귀포시 옛 성당 건물에서 5∼6개월가량 피란살이를 했는데, 밤이면 공비가 쳐들어와 숨어 있던 기억이 납니다. 한라산 공비 활동이 활발했기에 수업을 재개할 형편도 아니었지요. 나중에 밀양으로 돌아와서야 어설프게 개설된 임시학교에서 중등학교 과정을 밟았지요.”

이후 1961년 사제품을 받고 46년간 서울대교구에서 사목한 뒤 2006년 사목 일선에서 물러난 김 신부는 최근 들어 1999년에 펴냈던 「북녘땅의 순교자들」(1999년) 등 북녘 교회 관련 자료를 전자책(e-book)으로 내는 데 전념하고 있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14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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