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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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고통 속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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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8 ㅣ No.937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고통 속의 하느님


‘삶의 고통’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시는… 포기치 말고 이겨내길 바라시는 하느님

 

 

찬미 예수님.

 

지난주에 신앙생활의 기쁨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그리스도교 삶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결국엔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고,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이나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떠세요? 이 말에 동의하시나요?

 

사실 우리 삶에는 많은 고통들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병이나 사고도 그렇거니와 사랑하는 이의 죽음, 가족 구성원 간의 불화, 경제적 어려움, 무엇 하나 만족스럽지 않은 현실 등등. 신앙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이런 일들이 안 생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불쑥 불쑥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통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면, 우리 삶에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을까요? 이 고통들 앞에서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로마에서 공부하던 첫해, 부활 방학 때의 일입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계신 신부님과 함께 부활을 지내러 그곳에 갔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서 수속을 다 마치고 탑승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제 앞쪽에 아이 둘을 데리고 있는 젊은 엄마 한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큰 아이는, 한 네댓 살 정도 되었을까요, 혼자서 주위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고 엄마 옆 유모차에는 이제 갓 돌이 지난 듯한 어린 아기가 누워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어린 아기가 그리 비행을 잘 견딜 수 있을까 싶어 걱정스런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탈만 하니까 데리고 왔겠거니 싶어 더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되어 비행기는 출발했고, 저는 금세 잠이 들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탑승구에서 봤던 그 아기가 뭐가 좋은지 까르륵까르륵 웃으며 노는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에 깨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가 잘 노니 다행이다 싶었죠.

 

그런데, 한 십여 분 정도 더 갔을까요? 기류가 안 좋았는지 갑자기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치도 놀이동산의 청룡열차가 천천히 올라가다가 뚝 떨어지는 그런 모양새로 흔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 어땠겠습니까? 어른인 저도 그런 느낌을 견디는 게 쉽지 않은데, 그 아기는 훨씬 더 힘겨웠을 겁니다. 아기는 금세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어른이라면, 비록 그 느낌이 힘들긴 하더라도, 그 이유가 뭔지를 알기 때문에 ‘금방 지나가겠지’ 하고는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 입장에서는 그렇지가 않죠. 그저 만지고 느끼는 것이 전부인 그 아기에게는 자기 존재 전부가 무너지는 듯한 힘겨운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흔들림이 꽤 오래갔고, 결국 그 아기는 울다 지쳐 울음소리도 못 내고 나중에는 그저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마음이 참 안 좋았습니다. 아기를 위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죠.

 

그런데, 사실은 그 아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제 마음도 이런데,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자녀를 키워보신 분들께서는 아마도 잘 아실 겁니다. 영문도 모르게, 막 죽을 것처럼 아파 우는 아이를 품에 안고 한밤중에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던 경험들이 한 번쯤은 다들 있으시겠지요. 그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품 안에 안고 있는 아이가 지금 당장 죽을 것처럼 아파하고 있는데, 그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조금 큰 아이여서 말이라도 통했더라면 나았을지 모릅니다. “얘야, 지금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인데, 난기류라는 걸 만나서 비행기가 흔들리는 거란다.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금방 지나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많이 힘들더라도 걱정 말고 조금만 참아라.” 이렇게 설명이라도 해줄 수 있었다면 좀 나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갓 돌이 지난 아이에게 무슨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비행기에서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흔들림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저 자기 품의 아이를 끌어안고 그 아이가 지금의 힘든 시간을 잘 버텨내기를, 아프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잘 버텨내기를, 참아내기를 바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도 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도 많은 고통을 겪죠. 힘든 일이 생깁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하느님께 의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픔들, 고통들을 겪게 됩니다. 그 이유, 의미라도 알면 차라리 나을지 모르겠지만, 그마저도 알 수 없기에 더 비참하고 고통스럽죠. 그래서 우리는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느냐”며 하느님을 원망하고, 눈물을 흘리고 신음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어떤 위로도 느껴지지 않고, 하느님마저도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 마음은 어떠실까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왜 고통스러워하는지를 하느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고통의 의미를,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말씀을 알아들을 능력이 우리에겐 아직 없는 겁니다. 마치도 아직 말을 할 줄 모르는 그 갓난아기처럼, 우리 역시도 하느님 말씀을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알려주고 싶으셔도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눈앞에 두고서, 하느님께서는 그저 우리가 잘 버텨내기만을 바라고 계십니다. 아기를 품에 안고 함께 울고 있는 그 엄마의 마음 이상으로,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가 포기하지 않기를, 잘 버텨내고 이겨내기만을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고통 속에서 나 혼자 아파하고 나 혼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아파하시고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고 우리가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버려두고 침묵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한마음으로 울고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5월 7일,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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