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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시대를 읽은 선교사, 그의 손이 된 동정녀 - 용평본당 삼덕당 여섯 정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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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9 ㅣ No.638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시대를 읽은 선교사, 그의 손이 된 동정녀 - 용평본당 삼덕당 여섯 정녀들 (1)

 

 

삼덕당 수녀원에서 구워내는 빵을 보았을 때 나는 프랑스와 한국의 절묘한 만남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몇 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가장 프랑스적인 추억을 하나 간직하고 싶었다. 포스터를 한 장 샀다. 베레모를 쓴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가로수길을 가고 있는데 그의 등 뒤에는 베레모를 쓴 꼬마가 바게트 두 개를 달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보고 어머니는 이 막대기는 어디다 쓰는 거냐고 물으셨다. 아마 재목으로 쓰는 막대기를 안고 가는 사람들 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다정스러워 보였던가 보다. 프랑스 바게트는 거죽이 매우 딱딱하다. 프랑스인들은 아예 얼마 안 되는 그 속살조차 떼어내고 먹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국인은 이 딱딱한 거죽을 거북해 한다. 삼덕당 수녀원에서는 바게트 만드는 방법으로 빵을 만들되, 바게트보다는 뚱뚱하고, 겉은 그만큼 단단하게 굽지 않는다. 현재 용평에서는 이렇게 한국화 된 바게트를 굽고 있다.



용평성당 동정녀의 역할을 읽어낸 델랑드 신부

영천, 신녕, 화산, 용평 중 가장 지명이 알려진 곳이 어딜까?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는 용평이 이 지역 천주교의 중심이었다. 흔히들 용평성당이 화산공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산공소는 명칭, 장소, 건물 등 용평성당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화산공소가 용평성당의 맥을 잇는다고 여겨왔다. 그러다보니 20여 년 전부터 이곳에서 옛날의 기억에서 힘을 얻으려는 바람이 일고 있다. 작고 아늑한 용평마을에는 경상남북도를 모두 합쳐 다섯 번째로 성당이 섰다. 용평보다 앞서서 세워진 성당으로는 대구계산동, 부산진, 가실, 김천항금동 성당뿐이었다. 이곳에 본당이 일찍 들어서게 된 데는 김태호의 공이 컷다. 박해를 피해 나온 사람들이 경주, 언양 등지에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1885년 이전 영천지역에는 석촌공소 등이 설립되었다. 석촌 출신 김태호가 용평동에 이주하여 자기 집을 공소집으로 내놓았다.

용평공소는 1907년 지역 출신 김승연 신부가 부임하면서 용평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김승연 신부가 성당건립을 추진하자 김태호는 공소로 사용하던 자신의 집을 성당부지로 기증했다. 건물은 청통면 은해사 위에 있던 안능사라는 절 건물을 매입하여 옮겨와 기와성당이 되었다. 한편, 용평공소는 1948년 영천성당 관할 공소가 되었고, 1965년 다시 신녕성당 관할 공소로 바뀌었다. 이때 성당건물은 안강지역에 있는 정씨 문중에 팔려서 재실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성당 유치원 건물은 안강성당 유치원 건물로 옮겨갔다. 용평공소는 1966년경 옛 화산초등학교 자리로 옮기면서 화산공소로 명칭도 변경되었다. 건물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던 마을은 차츰 과수원이 되어 갔다. 이명우 신부, 강찬형 신부가 영천본당 주임으로 있을 때였다.

한편, 용평성당은 초대주임 시절부터 성당 내에 서당을 개설하여 교리와 한문을 가르치는 등 교육도 수행했다. 1919년에 부임한 2대 주임 유흥모 신부는 성당을 증축하고 서당의 규모도 확대했으며, 청년회 등 여러 단체를 조직하여 평신도들이 교회활동에 적극 참여토록 했다. 이때 용평본당에는 장차 큰 나무로 자랄 씨앗이 뿌려졌다. 예수성심시녀회의 초석인 삼덕당 여섯 동정녀였다. 당시는 웬만한 성당에는 동정생활을 하며 교회 일을 돕겠다는 처녀들이 있었다. 대표적 사례로 계산성당에서는 이러한 여성들이 1921년에 이미 성모회 자선부에서 큰 역할을 시작했다.

용평성당에서는 정 예노파(정계련, 1912-1989)가 그 초석을 깔았다. 그는 구교우 집안의 외동딸로 엄한 종교교육을 받고 자랐다. 예노파는 친척 언니들이 수녀원에 입회하는 것을 보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길은 수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7세 되던 해 대구에 있는 바오로회에 입회하고자 했으나 당시 본당 주임 유 신부는 아직 어리다고 만류했다. 부친은 예노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맞선자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그는 수녀원에 들어갈 나이가 찰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동정녀로 사는 것도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길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본당에는 뜻을 같이 하는 처녀들이 있었다. 1932년 정 예노파는 자신보다 두 살 어린 이질녀 김 로사리아(김옥이, 1915-1940)와 또래의 친구들인 김 골롬바(1907-1974), 이 율리아(이분탁, 1913-1995), 김 우슬라(1915-), 홍 도미틸라(1915-1983)와 함께 대축일 잔치를 열고 동정을 지킨다고 공표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거두고 은비녀를 지르고, 은반지를 끼었다. 그러나 동정녀들은 생활을 각자가 해결해야 했다. 예노파는 집을 나와 대모집에서 살다가, 대구에 있는 동정녀들의 집으로 들어갔다. 식구들은 수소문 끝에 그의 거처를 찾아내어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인연을 끊겠다고 했다. 나중에 부친은 예노파의 삶을 인정하고 성당 옆에 집을 한 채 지어 주었다.

한편, 모친이 영세할 때 모친을 따라 영세하게 된 이 율리아는 수녀원에 입회하는 사람들을 보고 동정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강제로 혼인시키려고 하여 집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녕에 있는 교우집에 있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골롬바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골롬바는 평생 어머니를 모시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마지못해 딸의 뜻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본당주임 유흥모 신부는 처녀들이 혼자 사는 것을 염려했다. 동정녀들이 고해성사를 보러 갈 때마다 끝까지 동정을 지키지 못하면 망신스럽다며 이들을 꾸짖었다. 그러다가 1934년 남대영(루이 델랑드) 신부가 제3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남 신부는 자신의 사목을 위해 본당에 동정녀들이 있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주저 없이 도움을 요청했다. 남 신부는 부임해서 “성체회” 등 많은 신심단체들을 조직하여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격려했다. 이때 용평본당의 신자수가 370명으로, 마을주민 대부분이 신자가 되었는데, 이 동정녀들의 도움이 한몫을 했다.

초기 남 신부는 동정녀들에게 눈앞에 떨어진 일을 부탁했다. 성당 옆에 살고 있던 에노파에게 본당일이 많이 주어졌다. 그때 예노파는 친정 밭에서 일을 해야 먹을 것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신부의 일을 돕다가 끼니를 놓쳐 굶기도 자주 했다. 이후 신부는 밭 열다섯 마지기를 성당소유로 마련했고, 동정녀들은 거기서 농사를 지어 양식을 얻었다. 이 무렵 대구에서는 시약소를 운영했다. 남 신부는 예노파와 도미틸라를 대구에 있는 동정녀 집에 머물면서 석 달 간 시약소에서 실습을 하도록 했다. 그들은 돌아와 용평본당의 무료진료소에서 남 신부를 도왔다. 한편, 남 신부는 1935년 영천읍 과전동에 공소를 열었는데, 그는 여기에 노 가밀로 회장과 동정녀 이 율리아를 전교사로 파견했다. 전교경험이 없던 율리아는 노 회장이 아랫방에서 남자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 그 내용을 문밖에서 듣고 윗방에 있는 부인들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초기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사회문제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남 신부는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식민지가 되어 있던 선교지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 선교사 중에서는 드물 만큼 사회에서의 약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그는 당시 사회에서 필요한 일을 주님의 일로 깨달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들을 도왔다. 이때 동정녀들은 주님이 그의 눈앞에 예비한 ‘도구’였다.


여섯 정녀, ‘삼덕당’에서 공동생활

남 신부는 동정녀들에게 공동생활을 하도록 제안했다. 그들은 9일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1935년 12월 8일 원죄 없으신 성모잉태축일에, 예수성심과 신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동정 공동생활을 약속하고 남신부의 인도로 ‘정녀’로 공동체에 들었다. 그들은 수도생활의 규칙에 대한 개념도 갖고 있지 못했고, 당장 끼니조차 때울 수 없는 집에서 그날 저녁을 보냈다. 이튿날 그들은 서로 의논하여 친정에 가서 약간의 양식을 구해 와서 끼니를 이으며 신부의 지시대로 침묵과 기도, 그리고 공부로 봉헌된 생활을 익혀갔다. 남 신부는 그들에게 적합한 일과표를 마련하여 엄격한 규칙에 의한 철저한 공동생활을 하게 했다. 특히 정녀들의 생활에서 기도는 그들 삶의 근원이었다. 그들이 공동 일을 하면서 드리는 묵주기도는 마을사람들에게 평화를 느끼게 해 주었고 외교인들도 그 기도소리를 신비롭게 느꼈다고 한다.

삼덕당의 생활규칙은 엄했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만일 규칙을 어기면, 그날 저녁 공동체 앞에서 신부께 고백해야 했다. 친정집에 가까이 살았던 예노파는 농사를 짓다가 농기구가 필요하면 집에 가서 농기구를 가져 왔다. 그가 입회한 지 2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병이 깊어 자리에 누웠다. 예노파는 농기구를 가지러 집 마당까지 갔는데도 집을 멀리 하라는 규칙 때문에 아버지를 찾아뵙지 못하고 돌아왔다.

한편, 공동체 회장으로 지명 받아 일하던 골롬바는 이 규칙을 어겨 나가게 되었다. 골롬바가 삼덕당에 들어온 후, 홀어머니가 중병으로 누웠다. 골롬바는 남 신부께 친정에 돌아가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만 있다 오겠다고 허락을 청했다. 그러나 신부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골롬바는 몰래 가서 어머니께 식사도 준비해 드리고 간호도 해 드렸다. 그러다 결국 신부가 이를 알게 되었다.

정녀들이 입주한 집은 성당 울타리 안에 있었다. 조그만 방이 두 개 딸린 초가집이었다. 그런데 이 집은 협소한 데다가 곧 동정녀들이 보살피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더욱 비좁아졌다. 신부는 이듬해 사재 5,000 프랑을 들여 한국식과 유럽식을 겸한 건물을 지었다. 새 집은 함석지붕과 블럭으로 이루어졌는데, 길이가 22m이고 폭이 5m였다. 그곳에는 한국식으로 된 의무실, 부엌 및 식당과 유럽식으로 된 응접실, 공동작업실과 공동침실이 있었다. 남 신부는 스스로 건축, 미장, 칠 등의 일들을 했고, 건물이 완성되자 이를 “삼덕당”이라 칭했다. 삼덕당은 신, 망, 애 삼덕을 뜻하는데, <회헌>에는 정결, 청빈, 순명의 복음 삼덕이라 한다.

물론 동정생활은 교회의 허락이 필요했다. 드망즈 주교는 남 신부가 동정녀들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승인했고 정녀들의 입주 후 이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주교는 삼덕당의 활동범위는 본당 차원이며, 수련과 공동생활을 겸하기를 기대했다. 정녀들은 수련기간이 끝나면 남 신부의 추천으로 1년간의 서원을 하고 주교로부터 정식 수도생활을 상징하는 십자고상을 받았다. 드망즈 주교는 회칙을 정하고, 사본을 남 신부 및 정녀들과 당시 교구청 당가 무세 신부에게 각각 주었다. 이리하여 정녀들은 남 신부가 활동하고 있는 본당에서 그를 도왔다. 그런데 남 신부의 활동은 사목뿐만이 아니고 사회복지 쪽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삼덕당 정녀들은 노인·장애인·고아 등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1936년 날씨가 몹시 춥던 날, 정녀들은 무연고 할머니가 거리에서 동사 직전이라는 연락을 받고 가서 그분을 모셔왔다. 이를 계기로 양로원이 시작되었다. 그 후에 여자 정신병자와 농아, 그리고 불구인 외국인 여아를 받아들임으로써 장애인을 위한 봉사도 시작했다. 고아로 지내던 자매가 이웃의 도움으로 정녀들에게 온 것을 계기로 보육원도 시작되었다. 정녀들은 그들을 가족으로 맞이했다. 그리하여 초기 통계 어디서든 이들이 전부 식구로 계산되어 있다. 삼덕당에서는 불우한 이들을 돌본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 아기를 업고 성체조배를 하는 처녀들이 낯설지 않은 생활이었다. 그러자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가난한 이웃이 계속 밀려오고 동정녀 지원자가 지속적으로 있었던 것이 삼덕당의 에너지였다. 또 장애인들이 모여도 귀찮아 하지 않은 용평마을은 그 에너지의 터전이었다. 남 신부는 이에 ‘성모자애원’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월간빛, 2014년 10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시대를 읽은 선교사, 그의 손이 된 동정녀 - 용평본당 삼덕당 여섯 정녀들 (2)

 

 

용평성당 여섯 정녀는 선교사 남대영(루이 델랑드) 신부의 지도로 1935년 ‘예수성심배종회’라는 명칭으로 삼덕당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식민지 시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밀려 들어왔다. 식구는 많아졌지만 식민통치 말기여서 당시 식량사정은 안 좋았다. 정녀들은 자신들도 하루를 이어갈 양식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새 식구들을 기쁘게 모셨다. 정녀들은 남 신부가 본당 소유로 샀던 토지를 경작하면서 각각 다른 소임을 가졌다. 또 그들은 염소 두 마리를 길러 그 젖으로 아기들을 키웠다. 수확물의 대부분은 강제로 공출당하고, 대신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수수, 밀, 보리쌀, 깻묵 등을 조금씩 배급받아 어렵게 끼니를 이었다. 흉년에는 산과 들에 가서 나물을 채취했다. 남 신부와 정녀들은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용한 우표를 모으고 나비나 곤충을 채집하여 프랑스에 보내 팔았다. 그리고 프랑스와 미국의 은인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경비로 충당했다.



한 사람만이 수녀원을 발족할 때까지 남아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지도 모른다. 정녀 여섯 명 중 한명 만이 17년 후 수녀원이 생길 때까지 남아 수녀로 생을 마쳤다. 그만큼 초기 멤버들의 행적은 이 공동체 생활이 얼마나 힘겨웠는가를 보여준다. 우선 김 로사리아는 남 신부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다. 남 신부는 용평본당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신장병에 시달렸다. 그는 치료차 홍콩까지 가서 신장 하나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무세 주교 착좌식에 참석하고자 수술을 미루고 돌아왔다. 로사리아는 몸이 약하고 말이 적어 항상 숨은 듯 생활했다. 그런데 로사리아는 남 신부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던 중에 그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는 고해성사를 보면서 자신의 소망을 남 신부에게 고백했다. 남 신부는 그의 마음에 감동하여 그의 열망을 허락했다. 남 신부의 허락을 받은 로사리아는 기도하면서 하느님 앞에 자신의 생명을 봉헌했는데, 그 후 며칠 되지 않아 그는 자리에 눕게 되었고 남 신부의 병은 회복되기 시작했다. 로사리아는 약 일 년 간 앓다가 1940년에 선종했다. 그리고 남 신부는 건강을 회복했다.

김 우슬라는 일본의 핍박으로 공동체를 떠나야 했다. 남 신부는 1939년 우슬라와 홍 도미틸라를 일본에 있는 부꼬까방 문화수녀원에 보내 다른 수녀원의 수도생활과 사도직을 배우도록 했다. 그들은 거기서 수도생활과 간호일을 배웠다. 그러다가 도미틸라가 그곳에서 결혼을 하자 남 신부는 다시 김 막달레나를 일본에 파견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우슬라와 막달레나는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의 경찰들에게 프랑스인의 염탐꾼이라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강제 귀국당했다. 정녀들은 수녀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닌 특이한 삶의 형태때문에 일본 경찰들로부터 더욱 큰 주목을 끌게 되었는지 모른다.

일본경찰은 1941년 영천과 용평에 있던 다른 정녀들까지 체포해 영천경찰서에 구금했다. 이들은 정녀들을 유치장에 가두고 고문하면서 삼덕당을 떠나겠다고 약속하면 풀어 주겠다고 회유했다. 우슬라는 정신적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들의 뜻대로 하겠다 하고 풀려났지만 계속 공동체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정녀 모두에게 화가 미치게 되자 그는 결국 공동체를 떠나야 했다. 이 율리아는 영천본당에서 전교하고 있었는데, 신부가 함께 일하던 막달레나를 도미틸라 대신 일본에 파견하자 영천본당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남 신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생활을 포기했다. 초기 공동체 회장을 맡았던 김 골롬바는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나 아버지로부터 한문과 일본어 등을 배워 삼덕당 여섯 정녀들 중에는 배움이나 나이에서 가장 앞섰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 병구완을 위해 탈회했다. 1939년 일본으로 파견되었다가 그곳에서 결혼하여 탈회했던 도미틸라는 해방 이후 귀국하여 온 가족이 화산면으로 돌아왔다.

여섯 정녀 중 17년을 기다려 예수성심시녀회가 수녀원으로 발족할 때까지 남은 사람은 정 예노파 한 명뿐이었다. 그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할 때 부회장 겸 당가를 맡았고, 회장이었던 골롬바가 나가자 회장이 되었다. 그는 남 신부가 맏딸이라고 할 만큼 공동체의 기둥이었다, 예노파는 초기부터 있었기 때문에 농사, 전교, 무료진료, 건축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수녀회가 발족하자 ‘성심의 마리아’란 수도명을 받고 착복했다. 마리아 수녀는 수도회의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하다가 1989년 선종했다. 한편 이 여섯 정녀 중에 단 한 명만 수녀가 되었다 하더라도, 결혼한 도미틸라를 제외하고 다른 정녀들은 비록 공동체를 떠난 다음에도 평생 동정을 지키며 교회 일을 돕고 살았음이 주목된다. 골롬바는 병구완하던 모친이 몇 년 후 돌아가시자, 자신은 화산에서 혼자 생활하며 그 지역의 복음전파에 노력했다. 율리아와 우슬라도 평생 동안 신녕 부근 지역의 공소들을 순회하면서 전교에 투신했다. <삼덕당일지>를 보면 수많은 처녀들이 공동체를 드나들었다. 며칠 혹은 몇 달만 살고 나간 이들도 다수였다. 그러나 이들도 율리아나 우슬라처럼 삼덕당 외곽에서 여섯 정녀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공동체의 성장에 큰 몫을 해 냈으리라 여겨진다.


삼덕당의 이동과 재건

삼덕당 공동체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40년 남 신부가 영천본당 주임으로 발령이 난 다음이다. 남신부는 영천본당에 성모자애원을 설립해서 동정녀들에게 맡겼고, 1949년까지 본당신부로 있었다. 이때 정녀를 포함한 용평식구 30여 명이 영천본당으로 가고 일부는 계속해서 용평에 남았다. 이리하여 본래는 용평본당 내에 조직되었던 공동체가 영천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정녀들이 용평본당을 돌보며 지은 농사 덕분에 영천에 살고 있던 정녀들과 그들에게 의탁하고 있던 모든 가족들이 생활해 나갈 수 있었다. 용평본당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루도비코 루카스 신부가 부임해 왔지만 얼마 안 되어 공소로 변경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사회는 급변했다. 1948년 대전교구가 생기자, 경상도에서 선교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남 신부는 대구교구에 계속 남아서 수도회를 정식으로 설립하기 위한 준비와 지도 및 자선사업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때마침 정부의 농지개혁으로 정녀들은 영천의 농토와 용평마을의 삼덕당 터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1950년 성모자애원이 포항 송정리로 가면서 용평과 영천에 있던 두 공동체의 살림이 합쳐졌다. 후일 송정리는 포항제철회사의 설립부지로 확정되었고, 수녀원은 이곳을 떠나 1968년부터 포항 대잠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공동체는 발전을 거듭하여 정식 수도단체로 승격되었다. 1952년 최덕홍 주교는 이를 “포항예수성심시녀회”라는 정식 수도회명으로 대구교구 소속 수도회로 인준했다. 1954년 삼덕당 1기부터 3기까지 합하여 7명이 첫 서원식을 했다. 정식 수녀가 된다는 일이 생애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삼덕당 생활을 거친 첫 서원자 황남수 수녀(94세)는 기억한다.

아마도 용평의 동정녀들은 어쩌면 자신을 주님의 일에 바치겠다고만 결심했을 것이다. 그들은 수녀든 정녀든 자신의 신분에 특별히 개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생활을 나누었을 뿐이었다. 가진 게 많아서 가난한 이들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거나 호화롭게 베푼 것도 아니었다. 단지 불편을 함께 견뎠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도움을 청하는 자도 물밀 듯이 밀려오고, 함께 일하겠다는 이도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해방을 겪고 대전교구가 설립되어 선교사들은 대구교구를 떠나야 했지만, 남 신부와 정녀들의 사업은 보호되었다. 이는 사회에서 해야 할 일을 먼저 파악하고 그것을 찾아 실천한 사람들에 대한 대우였다. 예를 들면, 일제가 삼덕당 정녀들을 체포해서 가두고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했을 때도 삼덕당에는 몇몇 정녀들이 끝까지 버티어냈다. 그것은 순전히 이들을 모두 체포하면 고아, 병자, 노인들을 다 경찰서로 데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삼덕당 정녀들이 하는 일이 삼덕당의 정녀들의 단체를 존속시켜 주었던 것이다. 예수성심시녀회가 내세우는 ‘주님 손 안의 연장’이라는 말은 바로 주님이 ‘현재’ 원하는 사람이 되자는 표현일지 모른다.

삼덕당 여섯 정녀는 주님이 사회에서 행하시고 싶은 일들을 찾아냈다. 그 바른 소망은 오늘의 예수성심시녀회를 꽃피운 씨앗이 되었다. 더러는 덜 피고, 더러는 일찍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흘린 피와 땀, 열정과 갈등 등은 아름다움 열매를 맺는 두터운 퇴비가 되었다. 그들 모두는 현재와 미래의 꽃과 열음을 위한 거름이었다. 예수성심시녀회는 현 회원만도 약 630명, 149개 분원이 있으며 대구, 부산, 서울 관구를 이루었다.

삼덕당은 동정녀 공동체의 조직, 생활, 활동 등을 전해주는 귀중한 역사 현장이다. 당대 교회는 성당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동정녀들의 모임을 필요로 했고 또 요청했던 특수제도였다. 그래서 신앙의 자유가 온 이후 이러한 동정녀들의 모임은 계산성당과 같은 큰 성당은 물론 언양공소와 같은 작은 공소들까지 많게는 몇 십 명 적게는 한두 명씩 존재했다. 동정녀들은 전교나 교회일을 헌신적으로 했고 신자들은 그들을 존경으로 대했다. 1970년대까지는 이렇게 동정녀로 살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정식 수도단체로 성장하지 못했지만, 삼덕당의 동정녀들은 예수성심시녀회라는 큰 수녀회를 일구어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기회가 작용했다. 동정녀들이 남 신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역사적 만남이라 하겠다. 남 신부의 열정과 소명이 동정녀들의 선한 소망과 합쳐져 서로에게 새로운 세계를 여는 힘을 이루었다. 당대 동정녀들은 일반적으로 본당을 근거지로 삼아 교회에 봉사했다. 그러나 용평본당에서 시작된 정녀 공동체는 남 신부가 용평본당에서 세운 영천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고 또 그곳 주임으로 파견되는 과정에서 남 신부를 지도자로 모시고 본당을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점은 향후 이 공동체가 남 신부의 지도하에 연속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무엇보다도 정녀들, 남 신부, 파리외방전교회가 당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행했기 때문에 거대한 나무로 자랄 수 있었음은 말할 나위없다. 더욱이 그들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던 삶의 자세는 그 변하지 않는 생명력이었다.

최근 예수성심시녀회는 삼덕당에서 또다른 에너지를 찾고자 시도하고 있다. 1993년 수녀회가 용평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이곳은 과수원으로 변해 있었다. 수녀원에서는 이듬해 이곳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삼덕당 시절에 입회한 황남수 수녀가 거주하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녀들도 자신의 뿌리를 이곳에서 체험한다. 그러다가 2005~2006년 수녀원에서는 이곳에 수녀원 건물을 새로 짓고, 빵 굽는 작업실도 마련했다. 수녀원에서 굽는 빵은 송정에 있을 때 김 젬마 수녀가 무세 주교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무세 주교는 주교직을 사임한 후,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지부장이 되어 서울로 떠날 때까지 남 신부와 함께 지냈다. 김 젬마는 이때 주교를 모시던 수녀였다. 지금은 박 마두 수녀 중심으로 빵을 굽고 있다. 일일이 손으로 만든 빵은 은인들에게만 선물했는데 작업실이 마련된 이후로는 좀더 많이 만들려고 하고 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의 절묘한 만남을 담은 빵은 어쩌면 현대인에게는 건전한 먹거리가 필요하다는 또 다른 소명을 확인시켜 줄지 모른다. 씨가 뿌려진 이곳은 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소명을 새로이 읽어내는 샘이 될 것이다.(도움 : 예수성심시녀회, 모원, 총원, 삼덕당수녀원) [월간빛, 2014년 11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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