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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21세기의 사회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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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05 ㅣ No.1324

21세기의 사회교리

 

 

1. 시작하면서

 

인류가 살아내야 할 21세기의 시대정신과 삶의 양태가 어떤 모습일지는 열려있는 도전이다. 교회는 인류와 함께 살면서 지금까지 해 왔던 “인간 문제에 대한 전문가인 교회”(바오로 6세, 민족들의 발전, 13항)는 앞으로도 계속 인류의 조언자요 스승이고, 어머니이며 동반자로 그 삶과 운명을 함께 해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자신의 소명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을 인간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성 요한 바오로 2세, 인간의 구원자, 14항 참고).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제3천년기의 첫 세기이지만, 제2천년기의 마지막 두 세기와 더욱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계몽주의라는 거대한 전환점이 있었던 17세기 이후, 인류는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모든 반경에서 그 이전과 전혀 다른 면모를 띠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8세기부터 시작된 시민사회의 형성과 그에 따른 정치체제의 다양화, 자본중심 혹은 사회중심의 경제이론과 체제의 등장, 세계대전과 국지전의 빈번한 발발과 군비경쟁, 교통과 통신매체의 발전으로 인해 좁아진 세계의 거리, 지구를 넘어선 새로운 공간의 탐구, 삶의 모든 영역을 관장하는 기술문화가 가져온 효과와 도전들, 인류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가치와 윤리적 잣대들에 대한 재평가, 미래에 대한 이상의 다양성, 마지막으로 다양한 인간관의 상대화는 21세기를 시작하는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공감하여야 할 미래에 대한 비전이 이 엄청난 인류의 유산을 근거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유산을 일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물려받은 “시대적 원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21세기의 방향등으로 켜고 있는가? 어떤 설렘과 희망으로 시작하였는가? 그것은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대하여 가졌던 관심과 21세기를 살면서 언표한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 본 소고는 이 가르침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8회 동안의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2. 21세기를 위한 화두 한 가지 - 자유

 

21세기는 다원화가 계속될 것이다. 다원화는 가치의 상대화를 유발하고, 가치의 상대화는 그릇된 인간 개인의 존엄성 주장과 더불어 인류를 분열시키고 파괴할 수 있다. 삶의 길과 죽음의 길은 한 가지에 달려 있다.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쓰느냐이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갈라 5,13). [2016년 7월 3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수원주보 3면, 정연혁 베드로니오 신부(광남동본당 주임)]

 

 

3. 21세기를 위한 정치

 

현존하는 모든 국가는 자신들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고 표명한다. 민주주의라는 표현 속에는 국민 스스로가 주권자가 되어 모든 의사결정을 하고, 결정에 따라 합의된 행동을 한다는 전제가 함의로 존재한다. 민주주의는 천편일률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각 국가의 국민들이 자신들의 상황과 감수성을 고려하여 정하는 열려있는 공간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민주주의에 대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인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교회는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는데, 이 체제는 확실히 시민들에게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중요한 권한을 부여하며 …… 진정한 민주주의는 법치국가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올바른 인간관의 기초 위에 성립한다. 민주주의는 참된 이상에 대한 교육과 양성을 통한 개인의 향상을 위해서나 참여와 공동 책임 구조의 설립을 통한 사회주체성의 향상을 위해서도 필요조건들이 채워지기를 요구한다”(백주년, 46항).

소견으로 20세기의 국제공동체의 관계를 포함한 정치현상을 두 가지로 특징짓고자 한다. 그것은 갈등의 해결을 위해 했던 기능과 경제에 우선권을 내어준 주도권의 상실이다. 갈등과 해결 시도의 대표적인 예는 ‘두 번의 세계전쟁, 동서의 대립과 국지전, 제3세계의 독립운동, 시민계급의 형성과 정에서 따라 자연적으로 생겨난 내전, 국내의 정치적 갈등과 폭력, 특히 독재체제에 대한 항거, 종교적 이념에 따른 극단적 테러, 소수 민족의 존립을 위한 투쟁, 빈국의 국민들이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 벌이는 다양한 폭력사태, 이주민들을 둘러싼 국제적 갈등’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에 우선권을 내어준 현상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계화’이다. 세계화는 국경을 무색하게 만드는 경제적 논리에 따라 생산과 소비가 특정 지역에 국한되는 것을 넘어서며, 소위 말하는 제3의 길(기존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혹은 자유주의와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사이의 새로운 정치 경제 체제)을 모색한다. 다원주의와 다문화주의를 표방하고, 국가 상호간의 의존관계와 협력관계를 강조하는 이 세계화는 그 근저에 어떠한 이상을 공유한 정치공동체의 합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 이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이미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선구자적인 지적에 이어, 현 교황께서도 이 부분을 정확히 간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가 인류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가 되는 방식을 찾도록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2014년 다보스 포럼에서).

21세기의 정치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그 시도의 근간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인가? 당연히 ‘가치’이다. 그 가치를 “모든 인간의 존엄, 인권존중, 공동선에 대한 투신”(간추린 사회교리, 406항)이라고 교회는 가르친다. [2016년 7월 10일 연중 제15주일 수원주보 3면, 정연혁 베드로니오 신부(광남동본당 주임)]

 

 

21세기가 시작된 최근 10여 년 동안 교도권은 정치의 반경에서 두 가지 성찰 주제를 던지고 있다. 그것은 “진리”와 “자유”이다. 이미 1991년에 발표된 회칙 “백주년”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정치가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되는 근저에는 인간에 대한 인식의 오류가 있으며, 이런 경우 자유라는 이름으로 주장하는 개인과 공동체(가정, 사회, 국가 등)의 권리의 사용이 무분별할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13항 참조). 자유가 참된 의미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려면 반드시 “인간에 대한 진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모든 종교가 근대이전까지 했던 국가의 정치를 이끌어 나갔던 인간에 대한 사고와 성찰은 사실 지난 세기부터는 산업화와 근대화 그리고 다양한 이념체계의 출현으로 정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사회라고 볼 수 있던 유럽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아시아 대륙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불교와 유교의 전통적인 인간관과 그리고 18세기에 우리 사회에 새로운 빛으로 등장한 천주교의 인간관이 정치권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의 자연적인 양심 안에서 적어도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하여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며 영원한 진리”라고 여겨지던, 비록 모호하고 애매하여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지만 우리의 심성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이상적인 확신들은 유물론적 시장 자본주의에 의해 상대적 가치로 여겨진 지 오래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두 가지 단락을 발견한다. 첫째는 “나는 진리이다.”(14,6)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자기 인식이다. 모든 진리의 원천이시고, 진리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척도이시며,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수렴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기 계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진리는 오로지 예수님 한 분이시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을 재판할 때 빌라도의 태도이다.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의 답변에 견디지 못한 그는 내뱉듯이 한마디를 하고 그 자리를 모면한다. 길고 지루한 진리에 대한 논쟁 끝에 그는 “진리가 무엇인가?”(18,38-40)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에피소드는 정치가 인간에 대한 진리를 보장하고 담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인간관을 가지고 행하는 정치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존엄성의 표현인 자유를 지향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이런 인식 속에서 21세기에는 “새로운 인본주의의 종합을 위한 노력이 필요”(진리 안의 사랑, 21항)하다고 지적하시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정치 분야에서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 우리의 인간적 양심에 대한 진리도 우리에게 먼저 주어진 것”(34항), 이를 근거로 하여 “경제, 사회, 정치적 발전이 참으로 인간다운 것이 되려면 형제애의 표현으로서 무상성의 원칙”(같은 항)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신다. 즉, 정치의 의무는 세계화라는 경제우선의 세계 질서를 인본주의와 형제애라는 가치로 재편성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직을 맡으신 직후부터 일관되게 21세기의 시대상의 단면을 “낭비의 문화, culture of waste”라고 지적하시면서(참고 2013년 6월 5일 일반 알현, 2016년 1월 11일 외교사절과의 만남), 약한 이가 강한 이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맞고 있는 도전은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형제애로 극복해 나가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정치는 사랑과 애덕의 최고 표현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정치는 경제가 가장 우선이 되어 있는 유물론적 논리를 극복하고, 인간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고, 그 영원한 진리에 수긍함으로 양심과 영이 자유로워지는 가운데, 숭고한 형제애를 나눌 수 있도록 국민과 세계인을 이끌어 가는 영역으로 거듭나야 한다. 유일하고 존엄한 인간과 인간 공동체에 대한 봉사를 목적으로 하면서. [2016년 7월 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수원주보 3면, 정연혁 베드로니오 신부(광남동본당 주임)]

 

 

4. 21세기의 가정과 결혼을 위하여

 

천주교 사회교리는 전통적으로 결혼 · 가정 · 출산 · 생명 · 자녀 - 노인 문제를 하나의 연계선상에서 이해해왔다. 사실 이런 이해 방식은 당연히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주제들 가운데 어디에다 강조점을 두는지에 따라 가르침의 색채가 조금 달랐다.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의 사안에 대한 인식의 변화 그리고 상황이 요구하는 새로운 제안들을 이해하고 수렴하면서 그 시대에 필요한 가르침을 교회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복자 바오로 6세 교황께서 발표하신 마지막 회칙 “인간 생명 Humanae vitae”(1968년 7월 25일)은 출산의 문제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정의한 “결혼” 문제의 본질로 이해하고 있다. 이 문헌은 가정은 거룩한 결혼 소명을 통해 부부의 결합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인식하면서 부부의 가장 숭고한 권리이며 의무인 출산문제를 통해서 생명의 문제, 가정의 문제를 보고 있다. 부부의 사랑은 두 사람만의 유일하고, 출산을 위한 것으로, 출산을 사랑의 결과로 가르친다. 그러기에 사랑을 전제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와 출산을 방해하는 모든 요인을 거부한다. 당연히 이 회칙은 교회 내외로 엄청난 찬성과 반대의 논의를 일으켰지만, 이에 대한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변화가 없다. 대신 복자 교황께서는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이고 내면적이며 양심적인 판단들에 대한 연구를 연구하도록 명하셨다. 이 문헌은 복음이 직접 언급한 사안이 아니라 자연법과 자연적 이성이라는 인간들이 공유한 문제이며, 사회적이고 지극히 사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출산에 관한 논의를 교회의 반경에서 하도록 초대한 예언자적 문헌인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1995년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생명과 관련된 문제들을 통합적이고 세부적으로 언급하신 새 회칙 “생명의 복음 Evangelium vitae”를 발표하셨다. 이 문헌은 복자 바오로 6세 교황의 “인간 생명”에서 시작하였던 생명과 부부, 가정과 출산 그리고 자녀에 대한 문제를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심화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과 사랑을 거부하는 “문화의 위기”가 세상에 팽배하고 있는데, 그 근본에는 영적이고 이성적이며 양심적인 지식과 윤리 자체에 대한 회의주의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사회적 삶이 빈곤, 폭력,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식별한다(11항). 그리고 이런 도덕적 불확신이 가져온 생명에 대한 도전들, “생명에 대한 음모들”을 열거한다. 피임과 낙태(12-13항), 인공생식기술과 태아 실험(14항), 불치병과 난치병 환자에 대한 안락사(15항) 등 생명에 대한 위협과 공격이 상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사형에 대한 유혹도 언급하고 있다.

 

성인 교황께서는 이러한 유혹의 근저에는 개인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생명에 대한 인식과 함께 강자가 자신의 자유를 지키려고 하는 인권비보호와 연대성의 거부가 있음을 경고한다. 이런 비참한 상황을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 사이의 투쟁”(21항)이라고 정의하면서, 이 상황에서 결혼과 가정이 우선적 보호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오늘날 생명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들을 수립하는 데에 중요한 한 부문은 인구성장문제입니다. 국민의 인구 조절 방향을 주도하는 것이 공권력의 의무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은 언제나 부부와 가정의 우선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의무를 고려하고 존중하여야 합니다.”(90항) 개인과 가정과 생명은 세상의 그 어떠한 공동체적 인격체, 예를 들어 사회와 국가와 같은 것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20세기의 교도권은 성경과 자연법, 인간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여 가정과 결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 [2016년 7월 24일 연중 제17주일 수원주보 3면, 정연혁 베드로니오 신부(광남동본당 주임)]

 

 

개인적으로 가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인간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20세기 사회교리는 인간을 “통합적인 존재”(intergral existence)라고 정의하는데, 이에 대해 별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도록 분명한 전통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선출된 두 번째 교황님이 말씀하시고 행보하시는 것을 듣고 보면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과 자비로운 이해가 지극히 예리하셔서, 하느님 백성을 대하시는 외적활동이 가끔 파격적이지만 그분께는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기에 그분이 가진 인간에 대한 관점과 확신은 늘 묵상과 성찰거리가 된다. 사람을 사랑하는데 있어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는 점은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로망일 것이다.

 

유럽에서는 아버지의 날로 지내는 성 요셉 대축일에 교황님께서 시노드의 후속 문헌이며 자비의 특별 희년의 선물로 세상에 내놓으신 사도적 권고인 “사랑의 기쁨 Amoris laetitia”(2016년 3월 19일)는 결혼에 대한 교황님의 연민의 가르침이며 사목적 수상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단죄와 판단이 아니라 받아들임과 동반함 그리고 참여와 함께함의 색채가 확연하다. 이 문헌을 통해 교황님께서는 21세기에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인류가 사랑이라는 놀라운 힘을 통해, 결혼문제만이 아니라 가정, 생명에 대한 영감을 받기를 바라신다. 또한, 인간 삶의 개인적 영역만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영역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이 되기를 바라신다.

 

제임스 마틴 신부가 요약한 이 문헌의 열 가지 핵심적 가르침을 소개한다. 1) 개인과 가정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전체성으로 이해할 것이지 획일화된 논리적 척도나 도덕적 규율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 것; 2) 양심은 도덕적 결정을 위한 기반이며, 이 양심은 요즘 시대가 주장하듯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라 늘 가르침과 성찰을 통해 영원한 도덕률로 나아가야 함; 3) 이혼자와 재혼자들이 교회 안에서 보다 더 활동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사목자들과 이들과의 내적인 대화와 관계가 중요하며, 이들이 교회의 일부임을 느끼도록 해야 함; 4)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늘 격려를 받아야 하며, 특히 사랑의 생활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도록 하며, 이 역동적인 사랑의 행보가 결혼이어야 함; 5) 사람들이 “죄” 속에 살고 있다는 차원으로만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 속에 살고 있다는 표현을 통해서 단죄가 아니라 가능성을 놓고, 즉 희망을 놓고 사람을 바라볼 것; 6) 모든 국가와 지역은 고유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토속적인 필요성을 존중하면서 발전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부유하고 강한 한 지역이나 국가가 다른 약한 지역이나 국가에 자신의 것을 강요하여 대체해서는 안 됨; 7) 결혼에 대한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히 변화가 없지만, 비정상적인 상황에 사는 이들에게 실천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것보다 끊임없이 초대하는 자비가 중요; 8) 자녀교육은 각 성(性)에 맞게 성성(性性)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교육과 문화가 건강해야 함; 9) 동성애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부당한 차별이나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됨; 10) 교회는 모든 이를 환대해야 하며, 모든 이가 다 불완전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늘 격려하여 “사랑의 기쁨”을 체험하도록 해야 함.

 

21세기의 가정과 결혼… 당사자만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에 늘 희망이고 기쁨이면서 두려움이고 복잡함이지만, 복음적이고 건강한 사랑이 있다면 늘 하느님의 선물일 것이다. [2016년 7월 24일 연중 제17주일 수원주보 3면, 정연혁 베드로니오 신부(광남동본당 주임)]

 

 

5. 환경

 

2007년 4월에 “환경 변화와 발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교황청 정의 평화 위원회에서 주재하는 국제 세미나가 있었다. 이 세미나에는 80여 나라에서 온 정치가와 학자들 그리고 글로벌 기업의 관계자들이 모였는데, 여기서 논의된 문제들은 우리가 사는 시대의 환경문제를 전부 열거한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지구의 온난화, 이산화탄소의 무분별한 방출, 온실효과, 숲의 열대화, 에너지의 남용과 무분별한 생산, 정치가들의 책임 등이 주제였다. 이 세미나를 주재하기 위해 UN, 유럽연합과 힘겹게 협상을 한 교황청은, 한순간에 환경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의 전통 안에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때임을 양심적으로 인식한 것이라고 하겠다. 교회의 예언직은 이처럼 교회 안의 신자들만이 아니라 지구촌에 산재한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환경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산업화의 뒷자리에 남아 있는 우리의 어두움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결과도 잘 알고 있다. 크게 보아 생태계와 인류에 대한 것인데, 1)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함으로 삶의 자리들이 스스로 자정 능력을 상실하고, 천재지변에 쉽게 노출되며, 환경의 불확실성에 의해 늘 불안하게 살아가야 하는 문제와, 2) 사회 안에서의 인류의 삶의 형태의 변화인 도시화, 비정상적 형태로서의 인구 증가, 무분별한 소비 등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공해”이다. 공해는 우리가 사는 생태계의 세 가지 영역, 곧 공기와 물 그리고 대지 오염을 가져온다. 공해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

21세기에 인류가 마주대해야 할 환경문제를 조금 더 생각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원자력 에너지의 문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의 사용 문제, 하느님의 영역에 대한 위험한 도전이며 유혹인 생명공학기술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드’로 대변되는 무책임한 무기개발이라고 본다. 한 가지만 더 부언한다. 현재 우리나라 산과 강과 바다에 기반시설(infrastructure)을 구축하는 과정이 얼마나 환경에 폭력을 자행하는 행태인지를 꼭 기억했으면 한다. 특히 수원교구 안에서 이 현상이 지속해서 몇 십년간 이루어져 왔음을 기억하자.

교회는 세상의 “살”인 “땅”에 대해 이미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참고, 비오 12세, 1951년 7월 2일 농촌 생활에 대한 강론).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공업화로 치유해 가던 세계가 농촌과 대지를 어떻게 홀대하는지에 대한 지적이었다. 그 이후 교황님들께서는 땅을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셨다. 예를 들어 복자 바오로 6세 교황의 17회에 걸친 국제식량기구(FAO)에서의 연설이나 담화가 그것이다. 복자 교황께서는 “거대한 의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들의 환경의 균형능력”을 보장하도록 호소하셨다. 1971년에 발표하신 회칙 “80주년, Octogesima Adveniens”에서도 환경에 대한 폭행을 경고하셨다(21항).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업적 가운데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환경에 대한 노력이다. 이미 1979년 즉위 초기부터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환경보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신 것으로 시작한다. 성인 교황께서는 세계의 숲과 강이 사라지고 오염되는 순간마다 발언을 하셨고, 1985년부터 조금씩 성숙되기 시작한 발전의 목표 개념을 1998년에는 드디어 “통합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이라고 정식화하셨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이신 바르톨로메오 1세와 함께 발표하신 2002년의 “베네치아 선언”을 통해 교회의 21세기 선교 사명 가운데 하나가 환경보호임을 확고히 하셨다. 왜냐하면 “환경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인 태도는 하느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창조물에 대한 관계라는 삼중의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2016년 8월 7일 연중 제19주일 수원주보 3면, 정연혁 베드로니오 신부(광남동본당 주임)]

 

 

“공동운명의 책임”(복자 바오로 6세 교황, 80주년 21항)인 환경보호는 21세기의 교황님들에게서 더욱 절실하게 예언자적 호소로 표현되고 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의 노력에 대해 한 가지만 소개하면, 2010년 평화의 날 주제를 “평화를 성장시키려면 피조물을 보호하라.”라고 정하신 것이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환경보호에는 “피조물, 선물, 부르심”이라는 세 단어가 항상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환경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나온 회칙이 바로 현 교황님의 “찬미받으소서, Laudato Si”(2015년 5월 24일)이다. 모두 6장으로 이루어진 이 회칙은 이미 전 세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으며, 양심적인 정치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일전에 필리핀 환경부 장관이 이 회칙에 따라 정책을 펴겠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목차만 보아도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이 회칙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쓰였다. 지구촌을 “공동의 집”이라고 부르며 시작된 이 회칙에서 교황님은 ‘오염과 기후의 문제, 물의 문제, 생명 다양성의 감소 문제, 삶의 질의 저하와 사회 붕괴문제, 세계적 불평등의 문제, 환경에 대한 불감증의 문제들을 식별해 낸 뒤(이상 1장),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가 바라보는 환경과 재화 그리고 땅의 존엄성과 귀중함(2장), 환경 문제를 야기한 근본적인 악인 기술문화와 기술 관료주의, 세계화, 인간이 상실되고 그 자리를 차지한 상대주의와 유물론적 요소들(3장), 환경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새로운 해석학(4장), 환경 보호를 위해 개인과 공동체적으로 함께 해야 할 노력(5장) 그리고 그리스도교 생태 영성(6장)’을 가르치신다. 이 회칙은 우리에게 무수한 영감을 주는 것이니만큼 짧은 글로는 무엇을 써도 모자를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 이야기한다면 이 회칙은 “새로운 인류”를 형성하기 위한 회칙이라고 생각한다. 그 인류는 회칙의 맨 마지막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인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에 표현된, “성령에 의해 선으로 이끌려지고,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보며, 이 땅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공동선에 이바지 하는” 인류이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인류로 거듭나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회개”이다.

마지막으로 환경을 위한 교회의 노력을 한 가지만 더 소개한다. 2015년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유엔 기후 변화 회의”에 교회가 제의한 환경문제를 위한 10가지 제안이다. 이 제안문은 “찬미받으소서”를 근거로 제출되었다. 그 내용은 ‘1) 기후 변화에 대해 윤리 도덕적 차원을 늘 염두에 둘 것; 2) 기후와 대기는 모든 이의 공동 운명임을 받아들일 것; 3) 참다운 변화를 위해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법적 효력이 있는 협정을 체결할 것; 4) 금세기의 중반까지 화석 연료를 통제함으로 지구의 온도 상승을 막을 분명한 목표를 세울 것, 그러기 위해 국제법적인 협정을 통해 각국의 정부가 형평성과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미래 세대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도록 할 것; 5) 발전과 삶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스타일을 발견하여 환경과 가난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할 것, 특히 화석 연료 사용을 줄이고 건강한 에너지를 사용하여 군대나 대기나 바다의 쓰레기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줄일 것; 6) 이윤보다 사람이 우선이 되도록 하여 누구나 물과 대지에서 지속가능한 양식을 얻을 시스템을 만들 것; 7) 모든 결정과정에 환경오염의 피해자인 가난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할 것; 8)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올해의 협정이 즉시 시행되도록 보장할 것; 9) 환경오염의 책임자들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책임감을 느끼며, 환경 보호를 위해 필요한 새로운 기술의 노하우를 나눌 것; 10) 예산 편성에 환경 보호를 위한 로드맵을 설정할 것’이다. 이런 제안사항을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자. [2016년 8월 14일 연중 제20주일 수원주보 3면, 정연혁 베드로니오 신부(광남동본당 주임)]

 

 

6. 미래를 위한 약속

한반도에는 수많은 나라가 흥망성쇠 하였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앞으로 하느님의 섭리가 허락하는 시간 동안 이 땅의 사람들의 보호막이 될 것이다. 그러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며 이 고귀한 땅에 사는 숭고한 하느님의 백성의 미래를 위해 사회교리의 시각으로 몇 가지를 질문한다.

1. 우리는 한 민족이라고 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연대감이 지나치게 끈끈하여, 원격적 민족주의 정신도 팽배하다. 원격적 민족주의는 외국에 살고 심지어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할 때도 우리 민족, 우리 국민이라고 한다. 헌법 전문에는 “민족”이라는 단어와 “동포애”라는 단어가 버젓이 존재한다. 두 가지를 묻는다. “우리는 언제부터 한 민족이고 한 국가의 국민이었던가? 우리가 하나라는 인식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가?” 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그 한 가지이다. 그리고 “민족이 아닌 다른 핏줄의 국민은 헌법의 정신에 비추어 보아 외국인일 따름인데 그들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시각 즉 민족주의 시각은 사라지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외국인의 존재는 선물이다.

2. 교육은 내일을 위한 가장 큰 투자이고 희망이다. OECD 국가의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학력 테스트인 PISA 결과를 보면 대한민국은 최상위권에 속한다. 2015년의 경우 종합 3위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 테스트에서 가장 중요시할 점은 창의력에 관한 중급 수준 학생들의 분포 비율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최상위권 학생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아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중급이 없다. 더 나아가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창의력 테스트에서 우리는 OECD의 평균점을 받았다. 즉, 우리나라 학생들이 똑똑하고 공부 잘 한다고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어른이 되면 내세울 것이 없는 나라로 전락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은 1%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희망의 본질은 무엇일까? 입신양명을 위한 진흙탕 싸움인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미래에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겁 없이 공공의 봉사직인 고위공직자가 되려고 덤비는 학생들과 부모를 보면서 어디에서 희망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

3. 대한민국은 IT 강국이다. 모든 사람이 이 놀라운 기술을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특혜를 이 놀라운 기술을 통해 받고 있다. 그러나 그 특혜를 지나치게 받은 결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인격적 사회성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성을 혼자 구축하는 익명적 개인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다른 이들과의 대화보다는 기계가 가져다주는 소식과 정보가 더욱 빠르고 간편하다. 그러면서 대중매체가 가지고 있는 기만성에 아무 저항력 없이 노출되어 있다. 신종 “보도지침”과 다름이 없는 여론몰이에도 면역력이 없다. 왜냐하면, 주어지는 정보에 너무나 쉽게 자신의 사고와 판단력을 동화시켜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민화 현상도 아주 쉽게 일어나고, 이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쉽게 성공할 것이다. 정보 기술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 소외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들….

4. 대한민국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회단체가 있다면 어디일까? 70~80년대에 천주교회가 신뢰도 1위를 차지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그럴까? NGO의 부상은 21세기를 위한 좋은 도전이 될 것이다. 특히 이익과 관계없이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목숨까지 내놓는 NGO의 존재는 희망을 위한 위대한 표징이다.

5. 한국 가톨릭교회... 순교자들의 피로 축성된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 땅을 위해 분명한 소명을 받았다. “희망을 거스르는 희망”(로마 4,18)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 희망이 가리키고 있는 목적점은 하나이다. 바로 인간이다.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현실에 사는 인간과 그의 존엄성이다. 인간이 존재하지만 인간다운 존중을 받지 못하는 사회 현실에 대해 우리는 인간이 희망이라고 말할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이 21세기를 위한 교회의 소명이라고 믿는다. 인간이 되신 성자와 같은 존재인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길이고, 교회의 길이다. [2016년 8월 21일 연중 제21주일 수원주보 3면, 정연혁 베드로니오 신부(광남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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