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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베네딕도회 육징상 신부의 유교-그리스도교 융합사상 계승과 전파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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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19 ㅣ No.1542

베네딕도회 육징상(陸徵祥) 신부의 유교-그리스도교 융합사상 계승과 전파 노력

 

 

국문초록

 

육징상(陸徵祥, 1871~1949)은 중국의 외교총장을 역임하고 벨기에의 베네딕도회 성 안드레아(Abbey Saint-Andrew’s, Bruges) 수도회에 들어가 가톨릭 신부가 되었다. 그는 회고록(『回憶與隨想』, Dom PierreCélestin, translated by Michael Derrick. Ways of Confucius and of Christ)에서 자신은 중국의 전통 ‘유자(儒子)’로 출발하여 가톨릭 교회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는 유가 학설은 철학이고 종교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회고록에서 중국의 전통 경전과 성경 및 베네딕도회의 규칙을 결합해, 자신의 인생 역정과 중국-그리스도교 융합의 중요성,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를 서술하였다.

 

육징상은 유교적 가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적인 단절감 없이 어떻게 그리스도교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는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육징상은 56세에 수도원에 들어가 8년간의 수련기간을 거쳐 64세에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하는 신부로 서품되었다. 비록 그는 서양의 수도회에서 신부가 되었지만, 유학 사상으로 가톨릭의 장점을 취한 현대 중국의 서광계(徐光啟, 1562~1633)가 되고자 하였다. 육징상은 서양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본질을 탐구하였으며, 서광계와 마찬가지로 유교-그리스도교 융합사상을 주장하고 전파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육징상은 마테오 리치 적응주의 선교노선의 사상적 계보를 잇고 있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서양 그리스도교 사상과 동양 유교사상이 융통적으로 해석된 최초의 작업이었으며 유교적 전통의 동아시아 사회에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리치의 『천주실의』는 또한 유교의 효(孝)사상에 주목해 그리스도교의 효와 일맥상통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육징상도 유교의 효도사상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끌었다고 하였다.

 

본고는 유교 교육을 받은 육징상이 어떤 경유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중국의 가톨릭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그의 유교-그리스도교 융합사상은 명말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 시기 적응주의 선교사상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효를 중시한 육징상의 유교-그리스도교 융합사상은 어떻게 실천되었는지 알아보았다. 나아가 외교관 육징상은 왜 벨기에의 베네딕도 수도회에 들어가 수행하게 되었고 수도회에서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그리고 베네딕도 수도회의 문화를 중국에 전파하고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였는지 서술하였다.

 

본고에서 융합사상은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조화 그리고 공동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개념이며, 종교적 교의를 통합하는 혼합주의(싱크레티즘, syncretism)를 의미하지 않는다.

 

 

Ⅰ. 머리말

 

육징상(陸徵祥, 1871~1949)은 청말 중국의 외교관과 중화민국의 외교총장 ·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1935년 6월 벨기에의 베네딕도회 성 안드레아 수도원(Abbey Saint-Andrew’s, Bruges)에 들어가 8년간의 수련 시기를 거쳐 64세에 가톨릭 신부가 되었다.1) 그는 자신의 인생역정과 수도회 활동을 기록한 회고록(『回憶與隨想』)에서 자신은 중국의 전통 ‘유자(儒子)’로 출발하여 가톨릭 교회로 들어갔다고 하였다.2) 중국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의 경우 자신이 속해 있는 유교적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육징상은 유교적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실제적인 단절감 없이 어떻게 그리스도교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는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3) 당시 한국 가톨릭계도 중국에서 유교교육을 받고 공직자가 된 육징상이 벨기에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와 신부, 수도원장이 된 소식을 전하였다.4)

 

육징상은 서양의 수도회에서 신부가 되었지만, 유교 지식인이면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그 장점을 취하여 중국에 전파한 제2의 서광계(徐光啟, 1562~1633)가 되고자 하였다.5) 당시 로마 교황청 역시 육징상이 서광계를 잇는 중국 천주교도라고 여겼다.6) 육징상은 서광계가 그리스도교와 그 문명을 받아들이고 보유론(補儒論)7)의 입장에서 그 사상을 제창하였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서광계가 읽고 세례를 받게 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8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는 많은 유교 경전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데우스)과 유교의 상제(上帝)는 이름만 다를 뿐’이라는 보유론적 선교 논리를 펼쳤다.8) 리치는 그리스도교 복음이 중국의 전통문화를 완성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선행연구 역시 리치가 유교 경전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형을 발견하였으며,9) 『천주실의』는 ‘서양 그리스도교 사상과 동양 유교사상이 융통적으로 해석되었기에, 동서 사상의 접촉 융합이라는 세계사성을 가진 문헌으로 주목되어야 할 것’, ‘유교 문명권에서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천주교리를 선진(先秦) 유학에 기초하여 해설하는 문화 적응주의 선교 방법’,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과 구별되는 새로운 방식의 유교 해석’이었다고 평가받는다.10)

 

리치의 중국에서의 선교 노력은 그의 사망 후 명조에서 청조로 바뀐 후에도 중국과 유럽문화의 만남을 위한 하나의 틀로서 계속 활용되는 토대를 잘 다진 것이었지만, 오랜 전례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리치의 후계자들은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융합전략이 당시의 중국 상황에 받아들여지도록 확립하지 못하였다.11) 하지만 예수회 선교노선인 유교와 그리스도교 융합 노력이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중국과 유럽의 지식체계를 융합시키는 지적 전략으로서 문화융합 노력이 거부될 필요는 없다.12) 유교 전통문화 속에서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가 크게 성공하였던 점과 예수회의 좌절에 따라 유교 전통과의 이질성이 극대화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가톨릭은 유교 전통과의 조화 가능성을 확인함으로써 더욱 풍부해질 수 있었음이 주목되기도 하였다.13)

 

지금까지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의 보유론 및 전례논쟁 관련 선행연구는 많이 있지만,14) 전례논쟁 이전과 종결 이후에 걸쳐 그 사상이 계승된 육징상에 주목한 연구는 거의 없다.15) 본고는 중국에서 활동한 서양 가톨릭 선교사의 융합사상을 다룬 기존의 연구와 달리, 유교 지식인에서 가톨릭 성직자가 된 육징상의 사상과 활동을 통해, 유교 전통과 가톨릭의 융합 사상을 이어받고 전파한 사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본문에서는 먼저 유교 교육을 받은 외교관 육징상이 어떤 경유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개종 이후 중국의 천주교회에서 무슨 활동을 하였으며, 왜 벨기에의 베네딕도 수도회를 선택해 수련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그의 사상은 명말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 시기 유교-그리스도교 융합 선교노선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리고 그의 효의 실천에 나타난 융합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그는 왜 베네딕도회의 수련문화를 중국에 전파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Ⅱ. 육징상(陸徵祥)의 유교교육과 가톨릭 개종 후의 활동


1. 육징상(陸徵祥)의 유교 교육과 가톨릭 입교

 

육징상은 1871년 상하이시의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나16) 13세에 상해방광언관(上海方廣言館)에 입학하기 전까지 고전 국학의 사숙(私塾)교육을 통해 유교 공맹(孔孟) 학설을 배웠다. 상해방광언관은 외국어를 가르치는 신식학교였지만, 학교 내 공자상을 두고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 이른 아침에 교사들이 학생들을 인솔하여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향을 사르고 예를 행하도록 하였으며,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는 것은 불허했다.17) 육징상이 상해방광언관에서 공부할 때 유가 사상을 전면적이고 계통적으로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그의 유가 수양에 대한 공부는 깊었다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는 유가 윤리 도덕의 실천자였다.18)

 

나는 13세 상해(上海) 방광언관(方廣言館)에 들어가기 전 중국 고전 국학교육을 완전히 익히지 못하였으나, 일생 동안 유학의 지혜와 교의 - 상제에 대한 제사, 부모에 대한 효도와 선행하기 등을 부단히 익혔다.19)

 

그는 상해(上海) 방광언관(方廣言館)과 북경(北京) 동문관(同文館)을 졸업한 후, 1892년 중국 주 러시아공사관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주 러시아공사(出使大臣) 허경징(許景澄)은 육징상을 엄격히 훈련시켜 통역관에서 외교관으로 성장시켰고,20) 육징상은 스승 허경징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21) 허경징은 육징상을 외교관으로 훈육하면서 먼저 자신을 서구화해야 한다고 지도하였다. 그는 “유럽의 역량은 무기나 과학에만 있지 않고, 종교에 있다. 너의 외교 생애 중 그리스도교를 이해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많은 조직 중 가장 오래된 한 조직을 선택해 내부 생활을 체험하고 핵심 역량을 획득하여 그것을 중국에 갖고 오라”고 하였다.22) 허경징은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후 곧 전 지구적 정신조직이 출현한 것에 놀랐고, 이 기구를 관찰하기 위해 유럽 여행기간, 특히 로마에 머물면서 현지의 성탄절 축하 행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육징상에게 “교황청은 전 세계에 유일무이한 특별한 조직이다. 그것이 서구사회의 정신 역량이기에 중국인도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육징상이 로마 교황청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23)

 

또한 허경징은 육징상에게 같은 상해 출신인 천주교신자 서광계에 대해 알려주었다.24) 허경징의 “너는 상해인이니, 서가회(徐家匯)25)의 역사를 아느냐?”는 질문에 육징상이 모른다고 답하자 “서가회는 명나라 재상 서(徐) 바오로[서광계]가 남긴 유산이다. 17세기 서광계가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를 알게 되고 천주교에 귀의한 것은 아마 서방인이 중국을 전교하고 근대화시킨 가장 이른 기록일 듯하다. 하지만 오래 지속된 전례논쟁으로 당시 선교사들의 역량 아래 추진된 걸출한 성과가 훼손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였다.

 

허경징 선생은 나에게 “300년 전 서가회에서 발생한 일과 그 후 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중국과 그리스도교의 상호관계, 선교사와 관련된 문제를 잘 연구하라”고 하였다. 또 전례문제와 관련하여 로마 교황의 해답을 기대한다고 하였다.26)

 

육징상은 중국 공맹의 도를 믿었으나, 스승 허경징의 가르침을 받고 로마 가톨릭을 연구하였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관리제도, 교의와 계율의 일치성, 의식과 이념이 사회와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무궁한 정신의 보고라고 받아들였다.27) 스승 허경징의 사후에도 육징상은 자신을 외교관으로 이끌어주고 서양문명의 핵심 역량을 탐구하도록 일깨운 그의 가르침을 늘 잊지 않았다.28)

 

육징상은 스승 허경징과 더불어 아내 보비(Berthe Bovy)29)의 영향으로 가톨릭교회에 점점 가깝게 되었다.30) 육징상은 중국 국내에서 신해혁명이 진행되던 191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톨릭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았다.31)

 

2. 가톨릭 개종 후 외교관 육징상(陸徵祥)의 중국교회 활동

 

육징상은 신해혁명으로 국내외 정세가 긴박한 시기에 귀국하여 외교 총장직을 맡았다. 그가 신생 정부의 외교부를 맡은 이유는 스승 허경징의 정치 유언이자 중국외교에 시급한 근대적 외교체계 수립과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함이었다.32) 1912년 중화민국 성립 후 중국 헌법에 종교와 신앙 자유의 원칙이 확립됨으로써 정교 관계의 개선을 위한 좋은 환경이 제공되었다. 그는 신실한 믿음으로 매일 성당에 나가 기도하였고, 정부 관원이면서 가톨릭 신자 신분으로 천주교회에서 활동하였다. 중국 천주교회가 중국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하다고 여긴 육징상은 가능한 기회를 이용해 중국내 천주교인 인사들인 마상백(馬相伯)33), 영렴지(英斂之)34)와 북경 교구장 자를랭(Jarlin) 주교35) 등 서양 신부 등과도 교류하였다. 외교총장 육징상의 활동은 중화민국 초기 북경정부와 천주교회의 우호 관계에 도움이 되었다. 민국 초기 정부기관과 천주교회의 협조 관계는 전대미문의 일로 중국 정교 관계의 새로운 시기를 열었다.

 

육징상은 중국과 교황청의 수교를 추진하였다. 당시 중국 정부는 교황청과 직접 외교 통로가 없어서 자를랭 주교가 편지 전달을 중개하였다. 1914년 11월 30일, 새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자를랭을 통해 민국 대총통 원세개(袁世凱)에게 친필 서한을 보냈다. 육징상은 1917년 로마 교황청과 외교관계 건립을 제의하였고, 정부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신속히 교황청에 연락하여 동의를 얻었다. 교황청은 1918년에 중국과 외교 관계 수립을 결정하고 내부적으로 교황 공사에 대한 인선을 마쳤다. 육징상 등의 노력으로 1918년 7월 11일, 교황청 기관보인 『로마관찰보(L'Osservatore Romano)』는 교황이 이미 중국과 정식 외교관계 건립에 동의하였다고 발표하였다.36)

 

하지만 중국과 교황청의 사절 계획은 프랑스 정부 및 프랑스 국적 중국 대목주교의 반대에 직면하였다. 프랑스는 교황청에 프랑스의 주중 선교보호권37) 위배라고 항의하면서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끝내겠다고 위협하고, 중국외교부가 교황청 사절을 받지 않도록 중국에 압력을 넣었다. 당시 중국 천주교 인사들인 마상백 · 영렴지 · 뱅상 레브(Vincent Lebb) 신 부38) 등이 육징상에게 그가 영향력을 발휘하여 중국과 교황청이 정식 외교관계 건립을 조속히 이루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국제적 압력을 받고 8월 24일 교황청에 쌍방의 상호 사절 파견을 연기한다고 통지하였다. 육징상의 바티칸과 수교를 위한 노력은 선교보호권을 내세운 프랑스의 반대로 일단 실패하였다.39)

 

정부 내각(內閣)에 들어간 나는 국가를 위해 천주교 교회의 정신적 지지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1917년 나는 정부에 로마교황청과 외교관계 건립을 제의하였고, 이 제안이 정부에서 통과되자 바로 바티칸과 연계하여 신속한 동의를 얻었다. 그런데 유럽의 모 강국 정부가 거의 조건반사식 반대를 하고, ‘선교보호권’을 핑계로 간섭하고 저지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정상적인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40)

 

육징상은 프랑스의 간섭에도 교황청과 건교 계획 추진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상백과 레브 신부 등도 교황청에 계속 편지를 보내, 교황의 중국에 대한 ‘자애로운 아버지의 심정’으로 프랑스 정부의 정치적 방해를 막아달라고 요청하였다.41) 이에 더하여 1919년 5.4운동으로 중국 민족주의가 고양되자 교황은 천주교회 본토화 선교를 결정하였다. 1919년 11월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선교 회칙인 「막시뭄 일룻」(Maximun Illud, 온 세상에 전파된 가톨릭 신앙에 관하여)을 반포하여, 선교사들이 변화에 대응해 현지 사제를 양성하고 그들이 교회 사역을 담당하게 하도록 요구하였다. 선교사가 현지 문화에 적응해야 하고, 전교지 언어에 숙달해야 하며, 교회의 식민주의 경향을 반대한다고 한 이 회칙은 세계교회에 반포되었지만, 그 핵심은 주로 중국에 관한 것이었다.42) 이어 1922년 교황 비오 11세는 교황 사절 코스탄티니(Celso Costantini, 1876~1958)를 중국에 파견해 프랑스 선교보호권의 폐해를 없애는 본토화 선교를 추진하였다.43) 육징상은 코스탄티니가 교황의 뜻을 완성해 중국에 위대한 혁신의 길을 열었다고 높이 평가하였고,44) 중국문화를 존중한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와 중국교회의 본토화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였다.

 

 

Ⅲ. 육징상(陸徵祥)의 유교-그리스도교 융합사상 계승과 효의 실천


1. 육징상(陸徵祥)의 유교-그리스도교 융합사상 계승

 

육징상은 로마 가톨릭의 전통은 하나의 ‘살아있는 보물창고’이며, 이러한 보물창고가 대대손손 신도들에게 고대의 가치와 새로운 가치를 제공한다고 보았다.45)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정신 역량으로, 유학이 해결하지 못한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면서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읽으라고 권하였다.

 

나는 나의 동포들에게 말한다. 복음을 읽어라. 사도행전과 서간을 읽고, 교회 창립 초기 수백년간 겪은 박해와 순교자들의 사적, 교회의 역사를 읽어라. 그리스도 교도의 선량한 글에서 당신들은 상제(上帝)를 이해하고 지상 유일한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너희는 가서 그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복음 제6장 33절)는 말은 인류의 숭고한 길이자 유학의 이상인 ‘평천하’를 의미한다.46)

 

그는 자신이 유가 사상을 기반으로 그리스도교의 장점을 받아들인 것은 3세기 이전 명대(明代) 서광계와 같다고 하였다.47) 3백년 전 서광계가 천주교에 입교할 때, 놀란 동료들이 중국 전통 지혜로는 부족하냐고 묻자 “나는 유교도이지만 그것이 그리스도교인이 되는데 지장이 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교는 유교의 완성”이라고 답하였는데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48) 그는 마테오 리치 신부가 서광계를 천주교에 귀의하게 하였으며, 서광계는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에 뛰어난 반응을 보인 그리스도교의 걸출한 문인의 핵심이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이룩한 찬란한 기초가 계속될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깝다고 하였다.49)

 

육징상이 찬란한 기초라고 한 마테오 리치의 업적은 중국문화와 그리스도교의 접촉점을 유교에서 찾은 것이다. 그는 선진(先秦) 유학과 공자를 높이 평가하지만 공자를 철학가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유교 학파에 속하면서도 종교적으로는 천주교도가 될 수 있으며, 원시 유학의 가르침은 천주교 교리로써 보완, 완성되며 궁극적으로 천주교에 귀일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50) 유학자와 그리스도교 사제의 대화 형태로 작성된 『천주실의』는 선교사가 그리스도교 복음 전파를 위해 중국인들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점에서 쓰여졌다.51) 리치의 『천주실의』가 발간되었을 때 비판이 없지 않았고 그의 적응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전례논쟁이 오래 전개되기도 하였지만,52) 중국에서 다양한 유교 해석의 하나로 여겨져 널리 읽혀졌으며, 그의 이름이 『명사(明史)』에 기록될 정도로 존경되었다는 사실에서 리치의 저술과 활동은 중국에서 인정받고 성공적이었다.53)

 

리치와 예수회 선교사들의 성공 배경으로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친화성을 부각시켜 중국 지식인의 긍정을 얻은 점54)이 지적되듯이, 리치는 유교적 세계관에 타협적인 호교론을 펼침으로써 중국 지식인들의 일부를 그리스도교에 귀의시킬 수 있었다. 리치가 발간한 과학과 종교에 관한 저서들에 영향을 받은 관료들과 사대부 계층에서 많은 개종자가 생겼다. 당대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 지성인인 서광계와 이지조(李之藻)55) 등을 천주교로 개종시킨 사실은 리치의 사상과 신념의 크기가 동서문화 융합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을 만큼 대단히 큰 것이었음을 입증한다.56) 서광계는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그리스도교는 유교의 기본사상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적 도(道)를 확립하고 유교 전통을 어지럽혀왔던 명 말기 불교의 폐해를 없애주는데 일조하는 종교라고 보았다. 이와 관련 서광계의 신앙을 ‘유교의 도(道)와 서양의 학(學)이 결합한 형태’라고 보거나, ‘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이 아닌 유가와 가톨릭의 종교 융합을 수행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57)

 

서광계를 추앙한 육징상은 1930년 11월 상해에 서광계 기념비[紀功碑]가 세워질 때 추모의 글을 남겼고, 1933년 서광계 서거 3백주년 기념활동을 할 때, 하북성(河北省) 안국(安國)의 손덕정(孫德楨)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교황청에 서광계를 성인으로 조속히 책봉하라고 요청하도록 촉구하였다.58) 1934년에는 서광계가 ‘성인품’에 들도록 추진하기 위해 교황청에 ‘전(前)중국 국무총리 겸 외교총장, 현 베네딕도회 수사’ 신분으로 ‘중국의 위대한 그리스도교인 서광계의 생애와 업적’을 작성하여 교황청에 보냈다.59)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는 이를 통해 서광계과 마찬가지로 유교 배경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선교할 수 있음을 알리고자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육징상의 영향으로 서광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60) 육징상은 서광계와 마찬가지로 마테오 리치가 시작한 유교-그리스도교 융합사상을 계승하고 전파한 것이다.

 

2. 육징상(陸徵祥)의 유교-그리스도교 융합 효사상과 실천

 

마테오 리치는 유교 관념 중 천주교와 친화적인 요소를 찾아 이를 비교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중국적 해석’의 실마리를 마련하려고 애썼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효(孝)였다.61)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그리스도의 효와 유교의 효 사상이 일맥상통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육징상은 일찍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으며, 허경징 은사의 유훈을 준수하여 효도를 특히 중시하였다. 허경징은 ‘효’는 기본적 인륜 도덕 규범일 뿐 아니라 유가의 본성을 효도라 하였다.62)

 

효는 유교의 대강(大綱)이며 유교 경전들은 다소의 차이일 뿐 모두 효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오경(五經)이나 선진(先秦) 유가들의 저술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63) 효 개념은 중국에서 유교가 확립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던 것으로, 『시경(詩經)』에는 살아있는 군주(君主)는 효자를 두었다고 칭송되고, 사후에는 자손들이 그에게 효로써 드리는 제사를 노래하는 시가 많이 나온다. 공자(孔子)는 효를 ‘인(仁)을 이루는 발단이요 모든 인간관계의 모델’로 수용하였으며, 맹자(孟子)는 효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인간성의 최고의 표현’으로 보았다.64) 『논어(論語)』의 ‘효야말로 인을 실천하는 근본(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이라는 뜻은 인의 구체적인 실천 덕목이 효라는 의미이다. 『효경(孝經)』은 “사람의 행위는 효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효는 아버지를 존엄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아버지를 존엄하게 하는 것은 하늘에 짝함보다 더 큰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65)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만약 부모는 섬기되 천주를 섬기지 않는 것은 동물적 본능에 불과하며, 어버이도 임금도 모르는[無父無君] 불효요 불충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천주께 대한 효와 신앙을 절대화하고, 부모에 대한 효와 윤리를 상대화하였다.66) 반면 1615년 남경(南京) 예부시랑 심최(沈漼)가 천주 숭배가 효도 윤리에 어긋난다고 선교사들을 비판하고 이들을 박해하였다. 그는 1616년 만력제(萬曆帝)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중국 각지에서 선교사들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여 교우들이 불효를 범하고 있으며 풍속을 해롭게 하고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모략하였다.67) 이에 서광계는 서양 선교사들은 충효와 자애를 위해 힘을 다하고 있다고 옹호하고 변론한 「변학장소(辨學章疏)」를 황제에게 올렸다.68)

 

서광계가 중국 천주교도들의 효도관이 올바르다고 옹호하였듯이, 육징상의 효도관도 전통 유가의 효도관과 그리스도교 기본 교의가 결합된 것이다. 육징상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효도의 모범이었다. 그는 “성부를 사랑하고, 성부의 명령을 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속(救贖)한 근원은 우리를 위하여 효도(孝道)의 계명을 지킨 것”69)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인간의 효에서 하느님의 효로 인도하였고, 그리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연합시켰다고 하였다.70) 그리스도교 교의의 핵심을 예수의 효도 선양이라고 본 그는 스승 허경징의 가르침인 본성 효도를 예수의 초월성 효도로 발전시켰다.71) 그는 『성경』의 가르침과 유가 윤리는 효도 방면에서 일치하며, 그리스도교가 유교와 중국 사회의 주된 효도의 가치를 완성한다72)고 인식한 위에, 유교-그리스도교 융합 효사상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였다.

 

육징상은 1920년 말 오래 준비한 효도를 하기 위해 북경 성문 부근의 책란(柵欄)73) 천주교 묘지와 마주보고 있는 땅을 샀다. 1920년 11월 14일 그는 상해에서 조모와 부모님 유골을 이곳에 만든 능원(陵園)으로 이장하고 엄숙한 이장의식을 가졌다. 그는 이 땅의 다른 반쪽에 작은 별장을 지어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모려(慕廬, 敬仰之室)라 이름짓고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아내와 여생을 보내려 계획하였다.

 

나는 땅 대부분을 화원으로 조성하였고, 화원 가운데 작은 경당을 지었다. 경당 지하 묘혈(墓穴)에 나의 조모와 부모님 유골을 안장하였다. 화원 한쪽의 작은 지하실에 나와 아내의 안식처를 마련하였다. 화원의 정면은 책란(柵欄) 묘지이고 그곳에 마테오 리치, 아담 샬과 페르비스트 신부가 묻혀있다.74)

 

육징상은 책란 천주교 묘지와 마주 보는 땅에 서양식 능원을 조성하고, 러시아 황실 화가에게 아버지 초상을 그리게 하는 등 서양의 예술을 취하여 부모에 대한 효도를 행하였다.75) 또 서양식 부모 묘지 앞에 무릎 꿇고 우는 자신의 동상을 세운 것은, 그가 유교-그리스도교의 효 사상을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76)

 

 

Ⅳ. 육징상(陸徵祥)의 수도회 활동과 베네딕도 수도회의 중국전파 노력


1. 베네딕도회 수도회 수련과 활동

 

육징상은 1920년 12월 외교총장직을 사퇴하고 1922년 중병을 얻은 아내와 함께 스위스로 가서 요양하면서 종교 생활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77) 1926년 4월 아내가 사망하자 그는 허경징 공사가 30년 전 ‘아내가 주님 곁으로 떠나면 유럽의 종교 기구에 들어가라’78)고 당부한 대로, 모든 공직 활동을 끝내고 가톨릭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는 스승 허경징이 가장 오래된 수도회에 들어가라고 말한 대로, 여러 수도회 중에서도 성베네딕도가 6세기에 설립한 베네딕도회 수도원, 그 중에서도 벨기에 브뤼헤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을 선택하였다. 육징상은 스승 허경징의 가르침, 벨기에가 아내의 조국이자 열강이 아닌 점, 수도원의 중국에 대한 우호 분위기 등을 배경으로 이 수도원을 선택하였고 스승과 아내와의 약속을 실천하였다.79) 또한 그는 부친이 살아생전 당부한 ‘하느님을 의지하라’는 유훈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는 부모와 은사, 아내가 이미 떠났으므로 오로지 일심으로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였으며, 하느님이 자신을 이끌어 수도회 생활로 나아가게 하였다고 하였다.80)

 

나는 56세에 일종의 완전 새로운 생명의 역량을 획득하였다. 이 새로움은 천주교 수사(修士) 생활이다. 아내가 사망한 후 나는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고 다행히 주변의 각종 지지를 얻었다. 베네딕도 수도원 생활을 한 기간에 나의 내면이 발전하고 변화하였다.81)

 

수도원은 서구 중세기 문화의 골간(骨幹)이며, 베네딕토회는 ‘기도와 노동’ · 학습과 교육 중시, 인재 배양, 도서관 건립, 고전 그리스 지식의 보존 등을 통해, 유럽문화 발전과 사회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수도원에서 육징상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이해는 깊어졌다. 그는 고대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헌을 읽고 깨닫게 되었고, 당시 중국인에게 쉽지 않았던 이러한 ‘성소(聖召)’가 조국의 다른 이들에게도 주어지기를 희망하였다.82) 또한 그는 가톨릭 종교 생활의 중심을 전례에서 발견하였다. 그는 가톨릭 전례 안에서 하느님의 임재를 찾는 것이 가톨릭 영성 생활에 불가결한 기초라고 하였다.83)

 

나는 수도원에 들어간 후 천주 교의에 가까이 갔고 특히 기도와 미사 의식 및 각종 성사는 나로 하여금 하느님의 정신을 부여받아 불가사의하게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아버지 사랑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 칭할 수 있게 되었다.84)

 

육징상은 벨기에 수도원에서 오랜 기간 수련하면서도 계속 동양 유학의 학식을 구하고 성현의 도를 실행하였으며, 벨기에 루벵 대학에 중국의 많은 경사자집(經史子集) 책을 기증하였다.85) 육징상은 중국은 유럽 고전문화를 학습하고, 유럽은 중국의 전통을 이해하는 상호 호혜적인 인식에 기초하여 ‘일치하는 그리스도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하였다.86)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조국 중국에 평화와 정의를 증대시키는 방법을 찾았다. 이를 위해 그는 서양의 선교사와 일반인들이 유교 사상을 이해해서, 중국 전통문화가 국제사회에서 서양 그리스도교 문화와 같은 지위를 쟁취하도록 노력하였다.87) 그는 유교를 숭상했고, 그것이 그리스도교 믿음에 의해 완성된다면 근대 중국 사회를 위한 가장 좋은 기반을 이룰 것이라고 확신하였다.88)

 

하지만 그가 보기에 중국내 외국인 선교사들이 갖고 있는 문화우월 의식은 선교사업에 불리하며 중국의 지식인, 성직자, 신도들에게 해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외국 선교사는 중국어를 숙지하고 중국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해야 하며, 마테오 리치의 성공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였다. 나아가 중국과 관계를 발전시키고 신자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각국의 수도인 파리·런던·베를린에 중국어 등 선교지 현지 언어 과정을 개설해야 하며, 벨기에 루벵 대학이 솔선하여 중국어 과목을 창설하고 로마에도 동아시아 학원을 설립시켜야 한다고 하였다.89)

 

교황 비오 11세는 유럽의 가톨릭 대학이 미래의 선교사 교육을 통해 이들이 동서양 사상과 문명, 그리스도교와 다른 집단 간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육징상의 의견에 동의하고 감사를 표시하였다.90) 육징상은 중국교회와 교황청간의 교량 역할을 하였으며 비오 12세 교황에게도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자신의 수도회 입회 연유 등을 설명하고, 중국 교회의 발전과 유교 사상과 그리스도교 교의의 융합 및 세계평화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였다.91) 비오 12세는 1939년 중국의 유교의례 금지령을 해제하여 교황청과 중국간 오랜 전례문제를 해결하였다. 교황청은 중국에 교황 전권공사를 파견해 국서를 교환하였다. 1943년 중국과 교황청의 외교관계 수립이 성공을 거둔 데에는 육징상 신부가 중국정부와 교황청 간의 외교갈등을 원만히 봉합한 역할이 중요하였다.92)

 

육징상은 성직자로서 수도원에서 수련하면서 조국의 동포들을 위해 베네딕도회 영성에 대한 팜플렛을 썼고, 주 로마교황청 공사 오경웅(吳經熊)이 번역한 중국어 성경이 출판되도록 감수함으로써,93) 중국인의 삶 안에 한자로 표현된 성경 말씀이 실천되도록 도왔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수도원을 점령한 나치를 비판하였고, 조국의 항전을 돕는 활동을 하였다.94) 전쟁의 위기와 난국 극복을 위해 그는 교황청과 가톨릭 유력 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베네딕도회 분원을 중국에 건립하는 일에도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95) 자신의 유교-그리스도교 융합 사상을 전파하였다.

 

2. 중국에 베네딕도 수도회 전파를 위한 노력과 실천

 

육징상은 수도생활(monachism)이 일종의 문화 역량이라고 하였다. 그는 불교의 수도생활(운동)이 중국에서 불교가 전파되는 데 좋은 도구였듯이, 베네딕도의 수도생활 역시 가톨릭이 중국에 전파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96) 그는 현장(玄奘, 602-664) 법사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서방’의 수도생활 문화를 흡수해, 그것을 중국문화에 전파하기를 희망하였다.

 

나는 베네딕도회의 현장(玄奘)이 될 자격이 없지만 만일 천주께서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중국인 중에 늙은 나를 불러주신다면, 베네딕도회를 중국으로 갖고 가겠다.97)

 

그는 베네딕도회 수도사들에게 중국 선교를 당부하면서,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북경에서 광주(廣州), 태평양 연안에서 중앙아시아 고원의 각지에 자선 사업을 추진하고 베네딕도회 정신을 두루 전파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그는 베네딕도 정신을 중국의 우수한 사상에 깊게 뿌리내리는 것이 베네딕도회의 사명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베네딕도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베네딕도 수도원은 전혀 은수(隱修)의 땅도 아니고, 하느님의 대가정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기구의 하나이다. 이러한 베네딕도회는 중국 각 교구와 성직자들, 중국 사회를 위해 가정적인 종교, 형제애의 공동체 전통을 적극적으로 제공할 자격이 있다. 베네딕도 정신을 중국의 우수한 사상에 깊게 뿌리내는 것이 베네딕도회의 사명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이다.98)

 

그는 그리스도교의 영적 가치를 중국의 유교 전통문화에 접목하여 국가 부흥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며, 주님에 대한 충실한 믿음만이 중국인과 그들의 문명을 위기의 시기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하였다.99) 그는 “가톨릭 교회와 중국의 융합과 화해는 중국 사회는 물론 가정과 개인 모두에게 매우 유익하다. 우리 국민도 나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광명과 행복을 얻기를 기대한다”며 동포들에게 자신의 열정과 경험을 믿어달라고 호소하였다.100) 그는 동포들에게 『베네딕도 규칙서』101)를 읽어보고, 수도원에 와서 기도와 노동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조직되는지 관찰하고, 중국인의 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라고 요청하였다.102)

 

육징상은 『베네딕토회 규칙서』 · 『베네딕도회 연혁사』 · 『서광계사략(徐光啟史略)』 등의 서적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총통 장개석(蔣介石) · 송미령(宋美齡) 부부 등 중국의 지도자와 지인들에게 보냈고, 그들이 베네딕도회의 기본정신과 그리스도교의 영성 생활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다.103) 특히 정계 요인들에게 베네딕도회의 중국 선교사업을 소개하면서, 가톨릭의 박애정신이 국민의 도덕과 애국정신 제고에 적극적으로 작용한다는 애국론을 펼쳤다.104) 중국의 지도자들은 육징상의 동서융합 사상과 베네딕도회 전파 노력에 경의를 표하였다.

 

내가 보낸 책을 받은 이들은 관심을 표명하고 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 및 성베네딕도회에 경의를 보냈다. 그들은 “육징상 선생은 중국인의 정신에 익숙한데 지금 서방의 한 신부가 되었다. 서방 세계에서 중요한 것을 흡수하여, 동서양 두 문화의 공통의 것을 열심히 찾고 상호 보완하고자 한다. 그의 몸에서 동서양 정신의 융합을 이루었다”고 칭찬하였다.105)

 

육징상은 가톨릭의 학술·문화·교육 사업을 통해 교회가 중국 지식 계층에 영향을 확대하기를 희망하였다.106) 그는 베네딕도회의 학술문화 전통과 중국문화의 융합, 학술 선교를 위한 방법으로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중국 분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는 네브(Théodore Nève) 수도원장에게 중국 각성에 분원을 설립할 것을 건의하였고107), 1934년 수도원장이 직접 중국을 방문해 고찰하면서 베네딕도회 선교사업 확대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태도를 확인하였다. 육징상은 중국 정부 요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에서 베네딕도회의 교육과 자선, 문화사업 발전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베네딕도회가 중국인 인재를 배양하여 선교권을 중국인이 회수하면 선교문제로 야기되는 국제분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면서, 중국인이 직접 교회 사무를 맡는 ‘포교 주권’을 주장하였다. 네브 원장을 접견한 장개석 위원장도 중국에 베네딕도 수도원 건립에 동의하였다.108)

 

1939년 말 교황은 중국의 유교전례 금지령을 해제하고, 중국의 그리스도교인들이 공자를 기리는 의식에 참여하여 조상에 대한 의식을 준수하도록 허가하였다.109) 육징상은 베네딕도회가 영국 · 프랑스 · 이탈리아 · 벨기에 등에서 역대 성인과 선현의 사묘를 관리한 사례를 들어, 중국정부도 베네딕도회에 도굴이나 훼손을 방지하는 수묘(守墓)직을 맡김으로써 성묘를 폐절(廢絶)하는 문제가 없도록 하라고 건의하였다. 이에 대해 국민정부 요인들은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110) 그는 베네딕도회의 업무에 중국의 황릉(皇陵) 수묘직이 가장 잘 맞는다고 하였다. 베네딕도회 수사들이 손중산(孫中山, 손문) 총리릉, 역대 황실묘와 문묘를 모두 관리할 수 있으며, 이들이 각 명승 지역 묘의 연혁사를 발간하여 나라의 국수(國粹)를 보존하고 역대 제왕(帝王)의 사적을 드러내는 일을 한다면, 국내외 학자들의 중국문화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중국에서 베네딕도회의 발전을 기대하였다.111)

 

그는 사천성 성도(成都)의 베네딕도수도원 분원이 조국 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1946년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귀국 요청을 받은 육징상은 스승의 유훈이기도 한, 유럽 종교문화의 정수를 중국에 이식시키는 오랜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성도의 베네딕도회 분원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1947년 중국의 혼란한 내전 상황과 그의 건강 악화로 실현되지 못하였다.112) 그러나 그의 염원은 그대로 전달되었으며, 성도 분원이 세운 중서문화연구소(中西文化硏究所)는 성도 대목구 주교와 국민정부 교육부 및 사법부의 지원을 받아 『철학과종교(哲學與宗敎)』 등의 서적을 발행하였다. 베네딕도회의 중국 선교사업이 육징상이 기대한 문화영역으로 확대된 것은 귀국하지 못한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113)

 

 

Ⅴ. 맺음말

 

중국에서 근대 천주교의 전파와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한 인식은 서양 제국주의의 문화적 식민지 지배의 합리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중국에 왔던 마테오 리치와 대부분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 입장은, 일단 이것들과는 구분된다. 이들이 중국의 문화 풍토에 적응을 통한 기독교 교리의 설명과 대화의 노력과 정신은 ’기독교 신앙을 지구상의 다양한 문화에 적합하게 표현하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의 정신과 목적에 잘 부합하는 것‘이다.114)

 

육징상은 베네딕도회에서 8년간의 수련을 거쳐 신부가 되었지만, 동시에 유가로서 그리스도교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이를 전파한 현대 중국의 서광계가 되고자 하였다. 그는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의 유교-그리스도교 융합사상을 계승하고 전파하였다. 그는 가톨릭 수도회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종교의 근원에 가까운 베네딕도 수도회의 문화와 영성, 공동체 정신을 중국에 전파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국민의 도덕과 애국정신 제고에 적극적으로 작용한다는 애국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6년 8월 동서양의 융화를 위하여 일생을 바친 육징상 신부를 벨기에 겐트(Ghent)에 있는 성베드로 수도원의 ‘명의 수도원장’(Abbé titulaire de Saint-Pierre)으로 임명하였다.115) 이는 교황이 그의 독실한 신앙심과 불굴의 정신에 더하여, 유교-그리스도교 동서융합 사상의 전파를 위한 노력을 인정하고 지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청말 외교관 시절부터 근대 개혁파들이 서구 모델에 따라 중국 전통에 비판적인 것과 달리 유교의 인문 가치를 옹호하였으며, 자신을 유가(儒家)이자 동시에 그리스도교인, 중국의 애국자이면서 유럽 문화애호가로 간주하였다.116) 그는 말년의 저작 『인간성의 회복과 복음의 발견』(Dom Pierre-Célestine Lou Tseng-Tsiang, La recontre des humanités et la découverte de l’évangile, Bruges:Desclée De Brouwer, 1949)에서 종교를 넘어 인문 기초를 통한 서로 다른 문화간 대화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117)

 

육징상은 베네딕도회가 종교를 넘어 서방과 중국 문명교류의 교량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는 1949년 임종하기 전에 “서방 동방의 선교사업은 총괄해서 말하면, 단 하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 바오로 사도를 본받는 것이다. 나는 중국에 대해서는 서광계 바오로를 생각한다”고 말하였다.118) 여기에 육징상의 유교-그리스도교 융합사상의 실천과 전파를 위한 노력을 볼 수 있다.

 

육징상은 1949년 22년간 수련하고 활동한 벨기에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그의 묘지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 내에 있다.119) 수도원 내 그가 거주하던 방은 그가 수집한 중국과 유럽의 신문 · 편지 · 사진 · 서적들을 보관한 ‘육징상자료관’이 되었다. 이 자료관의 다른 이름은 모려(慕廬)로써, 그가 北京에 조성하였던 가족묘지의 이름으로, 리치와 서광계 이래의 유교와 그리스도교 융합 효사상을 실천하고자 한 그의 뜻이 깃들어 있다. 리치와 선교사들이 설명한 그리스도교 효의 논리는 초기 한국 천주교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리치와 서광계 · 육징상 · 조선의 실학자들이 시도한 유교-그리스도교 융합사상과 전파는 비록 그 시대 속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동아시아 유교 사회에서 동서문화 화합을 구하는 데에 시사점을 준다.120)

 

본고에서 융합사상은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조화 그리고 공동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개념이며, 종교적 교의를 통합하는 혼합주의(싱크레티즘, syncretism)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육징상과 같이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지식인의 ‘유교-그리스도교 융합 사상’과 실천이 종교적 혼합주의와 다른 화합과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융합’ · ‘혼종’ · ‘변용’ · ‘적응주의’ · ‘보유론’등 개별 개념들에 대한 적확한 이해와 검토가 필요하며, 이에 대해서는 새로운 연구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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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징상(陸徵祥, 1871-1949)은 청(淸)말 외교관에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후, 벨기에 브뤼헤 소재 베네딕도회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을 하고 수사가 되었고,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고 1935년 신부가 되었다. 1946년 벨기에 성베드로 수도원 명의원장에 임명되었다. 陆徵祥 著·王眉译, 『回忆与随想: 从民国外交总长到比利时修道院修士』, 上海遠東出版社, 2016.(이하 陸徵祥, 『回憶與隨想』) 4쪽.

 

2) 陸徵祥, 『回憶與隨想』, 81쪽; 그의 회고록 영어 제목 『공자와 그리스도를 통한 길』(Dom Pierre-Célestin(Dom Tseng-Tsiang LOU), translated by Michael Derrick. Ways of Confucius and of Christ, January 1, 1948)은 그에게 유교와 그리스도교가 함께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包兆会, 「陆征祥」, 南京大学文学院, 『天风』, 2015-7, 54쪽.

 

3) 육징상은 가톨릭의 수도 생활(monasticism)에 대한 ‘소명’을 말하면서 유교적 과거를 파기할 필요도 없고, 유교적 신념도 저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줄리아 칭 지음·변선환 옮김, 『유교와 기독교』, 분도출판사, 1994, 269쪽.

 

4) 「육징상수사의 종식허원」(『경향잡지』, 1932.2); 「분도회수사 육징상탁덕승품」(『경향잡지』, 1932.7); 「육징상씨 승품속보」(『경향잡지』 1935.8); 「前國民正府外交總長 陸徵祥氏敍品-和蘭베네딕트 修道院聖堂에서」(『가톨릭청년』, 1935.8); 로베트·앤나르, 「中國의 總理를 지내고 修道院長이 된 陸徵相氏」(『가톨릭청년』, 1949.9) 등.

 

5) 陸徵祥, 『回憶與隨想』, 66쪽; 焦玉海, 「天地明鉴的爱主爱国情怀—读陆征祥的《回忆与随想》」, 『信德报』 714(2017.3.12.); 서광계는 공자를 신봉하면서 동시에 천주교도였으며, 서양 학술에 정통했던 인물로 1603년 남경에서 로차(Juan de Rocha, 1566~1623) 신부로부터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구하여 읽어 본 후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선교사들과 서양의 여러 학술 서적을 번역하였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서양의 학술을 배우고 천주교를 믿도록 장려하였다. 서광계 지음·최형섭 옮김, 『서광계문집(徐光啟文集)』,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4. 17-18쪽.

 

6) 陈志雄, 「陸征祥与民国天主教会」, 中山大博士學位 論文, 2009. 84쪽.

 

7) 보유(補儒)라는 용어는 서광계가 처음 사용하였으며, 당시 서양 신부들이 전교한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을 ‘보유역불(補儒易佛)’로 설명하였다. 崔基福, 「明末淸初 예수會 宣敎師들의 補儒論과 性理學批判」, 『교회사연구』 6, 1988. 52쪽; 이 보유론은 『천주실의』의 주요 내용일 뿐 아니라, 이후 예수회 신부들과 동아시아 유학자들이 저술한 한문 서학서의 기본 저술 방향이었다. 신의연, 「『천주실의』와 『성교요지』의 補儒論 비교 연구」, 『중국인문과학』 46, 2010. 448쪽.

 

8) 마테오 리치, 송영배 외 역, 『천주실의』,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103쪽.

 

9) 유교와 그리스도교 연구자 줄리아 칭은 예수회 선교사였던 리치와 그 후계자들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공자 이전 원시 유교의 형태가 그리스도교와 실제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줄리아 칭 지음·변선환 옮김, 위의 책, 228-229쪽.

 

10) 이원순, 『한국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40-41쪽; 조광, 「좋은 땅에 뿌려진 하느님 신앙- 『천주실의』」, 『경향잡지』, 1992.7, 87쪽; 安大玉, 「마테오 리치(利瑪竇)와 補儒論」, 『동양사학연구』 106, 2009, 152쪽; 정태식, 「마테오 리치의 예수회적 유교 해석에 대한 일고찰 : 『천주실의』를 중심으로」, 『哲學硏究』 95, 2005. 371쪽.

 

11) 리치가 명 말에 중국에서 닦아놓은 천주교 선교의 방법은 17세기 독일의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 1591-1666)과 벨기에의 베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3-1688) 신부에 의해 계승되어 신자 30만 명을 상회하는 교세 확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청정부가 서양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금지 조치를 내리자 교인수가 20만으로 감소하였다. 이상옥, 「근세 중국 천주교 전래의 문화 모델-마테오 리치를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45, 2013. 380쪽.

 

12) 데이비드 E 먼젤로·이향만 외 옮김, 『진기한 나라, 중국-예수회 적응주의와 중국학의 기원』, 나남, 2009. 109, 570쪽.

 

13) 금장태, 「유교의 종교성과 유교-천주교의 교류」, 『종교와문화』 9, 2003. 34-35, 37쪽.

 

14) 김병태,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한국기독교와 역사』 28, 2008; 김상근, 「서광계의 기독교 신앙과 上帝에 대한 제한적 이해」, 『한국기독교와 역사』 21, 2004; 김혜경,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역사와 의미』, 서강대학교출판부, 2012; 데이비드 E 먼젤로·이향만 외 옮김, 위의 책; 마테오 리치 지음, 신진호, 전미경 옮김, 『마테오리치의 중국견문록』, 문사철, 2011; 安大玉, 위의 논문; 崔基福, 위의 논문; 이규성,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적응주의 도입과 그 발전 과정에 대한 신학적 고찰」, 『가톨릭신학』 21, 2012; 崔韶子, 『東西文化交流史硏究-明·淸時代 西學受容』, 서울:三英社, 1987; 黃宗烈,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의 신학적 의의와 한계」, 『교회사연구』 20, 2005; 히라카와 스케히로(平川祐弘) 저, 노영희 역, 『마테오 리치: 동서문명교류의 인문학 서사시』, 동아시아, 2002; D.E.Mungello edited, The Chinese Rites Controversy It’s History and Meaning, Nettetal: Steyler Verlag, 1994.; Liam Matthew Brockey, Journey to the East : the Jesuit mission to China, 1579-1724, Cambridge, Mass.: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柏理安. 柏理安著, 毛瑞方譯, 『東方之旅: 1579-1724 耶蘇會傳敎團在中國』, 江蘇人民出版社,2017) 등 보유론과 적응주의 선교 관련 연구는 다수 있다.

 

15) 陸徵祥 관련 해외 연구는 羅光, 『陸徵祥傳』, 臺北:商務印書館, 1967; 刘肃勇, 「陆征祥: 从外交官到比利时大主教的传奇人生」, 『侨园』, 2012-3; 石建國, 『陸徵祥傳』, 石家庄:河北人民出版社, 1999; 颜坤琰, 「陆徵祥:在比利时出家的中华民国总理」, 『名人傳記』, 2014-1; 杨智友, 「陸徵祥的救贖」, 『看歷史』, 2012-2; 陈志雄, 위의 논문; Anne Vansteeland, Lu Zhengxiang: a Benedictine Monk of the Abbey of Saint-Andris, Jeroom Heyndrickx ed., Histography of the Chinese Catholic Church :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Ferdinand Verbiest Foundation, Katholiekie Universiteit Leuven, 1994.; Claire Shu-chin Chang, When Confucius Meets Benedictus: The Destiny of a Chinese Politician Lou Tseng-tsiang (1871-1949), Katholieke Universiteit Leuven Ph.D. Dissertation, 1994.; Nicholas M. Keegan, From Chancery to Cloister: The Chinese diplomat who became a Benedictine Monk, Diplonmat & Statecraft, Vol. 10, Issue 1, March 1999; Luke Dysinger, Abbot Peter Celestine Lou Tseng-tsiang, O.S.B.: Chinese Diplomat and Benedictne Monk, Valyermo Chronicle Benedictine, 1,4, Winter 1990. 등 그의 외교관 시절과 수도원에 들어간 특이한 인생역정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이다. 국내 선행연구 김정현, 「외교총장 陸徵祥의 베네딕도 수도회 수행과 구국 활동-陸徵祥 회고록 『回憶與隨想』을 중심으로」(『중국사연구』 136, 2022)도 육징상의 생애와 종교활동을 서술하였고, 유교-그리스도교 융합 사상 계승은 분석하지 않았다.

 

16) 아버지 육운봉(陸雲峰)은 런던전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의 개신교도로 매일 아침 전단을 돌리고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육징상도 런던전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곳에서 처음 기독교의 자애와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陸徵祥, 『回憶與隨想』, 7쪽.

 

17) 이는 외국어를 배우는 신식 학당 학생들이 서양의 풍속에 쉽게 물들 것을 우려한 규정으로, 북경의 동문관(同文館)과 다른 이 학당의 특색이었다. 장의식, 「上海廣方言館과 중국 근대교육」, 『대구사학』 76, 2004, 232쪽. 

 

18) 玉鵬, 「儒者陆征祥」, 『信德 Faith Weekly』 2006.11.10.(https://www.xinde.org/show/5842)

 

19) 陸徵祥, 『回憶與隨想』, 64쪽.

 

20) 허경징(許景澄, 1845~1900)은 절강(浙江) 가흥인(嘉興人)으로 청조(淸朝) 진사(進士) 출신 외교관이다. 1892년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네덜란드 4국 공사(公使)에 임명되었다. 육징상은 러시아에서 10여 년간 근무하면서 1895년 3급과 2급 통역관으로, 1902년 3급 외교관인 참찬(參贊)으로 승진하였다. 刘肃勇, 위의 글, 56쪽.

 

21) 허경징이 흠사(欽使) 신분으로 부하직원을 이렇게 세심하게 지도하고 육징상도 스승으로 허경징을 경애(敬愛)하는 것은 유교 전통 중에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羅光, 『陸徵祥傳』, 30-31쪽.

 

22) 陸徵祥, 『回憶與隨想』, 17-18쪽.

 

23) 陸徵祥, 『回憶與隨想』, 63쪽.

 

24) 서광계가 상해 출생으로 재상에 오르고 장년에 가톨릭에 입교하였듯이, 육징상도 상해 출생으로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가톨릭에 입교한 공통점이 있다. 羅光, 『陸徵祥傳』, 197쪽.

 

25) 서가회(徐家匯)는 서광계가 태어나고 묻힌 곳이다. 서광계의 묘를 중심으로 그의 후손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서가회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서가회가 천주교 전파의 중심지가 된 것은 17세기 서광계와 예수회 신부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서로의 문명에 대해 존중과 수용의 태도를 견지하였고, 선교사들이 소개한 서양의 지식은 명말청초 중국의 과학과 실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崔洛民, 「徐家匯와 近代上海 -천주교 예수회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동북아문화연구』 7, 2004, 118쪽, 138쪽.

 

26) 육징상은 유럽과 중국의 전통 의례와 기독교 교의가 서로 어긋남으로 인해 발생한 이 오래된 전례 논쟁은 교황 베네딕도 15세와 비오 11세의 노력에 더하여 비오 12세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해소되었다고 하였다. 陸徵祥, 『回憶與隨想』, 18-19, 100쪽.

 

27) 羅光, 『陸徵祥傳』, 71-72쪽.

 

28) 육징상은 허경징이 거의 매일 자신을 지도하였고 그가 없었으면 자신은 절대 외교관이 될 수 없었으며, 수도회 수사와 신부도 될 수 없었다고 하였다. 1906년 네덜란드 중국공사단 책임자가 된 그는 허경징에 대한 감사 표시로 한 달 월급을 들여 선생의 기념 은화를 만들고 이를 네덜란드 여왕·오스트리아 헝가리 황제· 러시아 짜르와 중국의 여러 동료들에게 증정하였다. 陸徵祥, 『回憶與隨想』, 13, 32쪽.

 

29)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정 연회에서 유창한 프랑스어 능력으로 활약한 육징상은 연회장에서 만난 벨기에 공사의 친척인 가톨릭 신자 보비 여사와 결혼하였다. 그는 당시 개신교도였으나 결혼식은 1899년 2월 성카트린나 대성당에서 가톨릭 전례로 올렸다. 陸徵祥, 『回憶與隨想』, 25쪽.

 

30)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을 부추기지 않고 매일 묵묵히 책임을 이행하는 아내의 신중함이 자신을 가톨릭교회로 인도하였다고 하였다. 陸徵祥, 『回憶與隨想』, 35-37쪽.

 

31) 육징상은 1911년 10월 23일 세례를 받고 1912년 4월 5일 견진을 받았다. 羅光, 『陸徵祥傳』, 73쪽.

 

32) 20년간 유럽에서 외교관을 지낸 육징상은 1912년 5월 귀국하여, 새 정부의 외교부 개혁을 추진하였다. 陸徵祥, 『回憶與隨想』, 39-43쪽; 중화민국이 건국된 후 1912년 당소의(唐紹儀) 내각은 초대 외교총장으로 육징상을 임명하였고, 육징상은 이후 1920년까지 외교총장을 9번 역임하였다. 石源華 主編, 『中華民國外交史辭典』, 上海古籍出版社, 1996, 756-757쪽.

 

33) 마상백(馬相伯, 1840-1939)은 예수회 신부였다가 예수회를 탈퇴한 이후 정치 활동을 하였으나, 천주교와 중국 문화의 화합을 도모하는데 힘썼고, 중국 천주교 토착화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최병욱, 「충돌과 화합-마샹보(마상백)의 중국 천주교 토착화」, 『교회사연구』 48, 2016. 65-66쪽.

 

34) 신문출판인 영렴지(英斂之, 1867-1926)는 중국 최초의 가톨릭 주간지 『광익록(廣益錄)』을 발간하였고 뱅상 레브(Vincent Lebb, 1877-1940) 신부와 함께 가톨릭 운동을 진행하면서 『광의보(廣義報)』와 『익세보(益世報)』를 발간하였다.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 北京 : 宗敎文化出版社, 2007. 672-673쪽.

 

35) 자를랭(Stanislas Francois Jarlin, 1856~1933) 주교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1884년 빈첸시오회에 가입했고, 1886년에 중국으로 가 북경에서 1889년 사제 서품을 받고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1905년 직예북경대목구(直隸北境代牧區, 1924년 北京代牧區로 명칭변경) 주교가 되었다. (法)荣振华 等著 耿昇 譯, 『16-20世纪入华天主教传教士列传』, 桂林: 广西师范大学出版社, 2010. 619쪽.

 

36) 중국 정부는 즉각 로마에 교황청 특명 전권공사를 발표하고 동시에 교황이 중국에 교황대사기관을 설립하기를 희망하였다. 陈志雄, 「陸征祥与民国天主教会」, 31-32쪽.

 

37) 선교보호권(patronatus)은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보호, 교민과 관련된 교섭 등 프랑스가 청조와 체결한 조약에서 법률적으로 보장받은 천주교 보호에 대한 권리를 말한다. 최병욱, 「淸朝 敎皇廳의 외교관계 수립 교섭(1885-1886)과 프랑스 ‘保敎權’문제」, 『동양사학연구』 100, 2007. 148쪽.

 

38) 육징상은 ‘레브 신부는 중국에 와서 선교하면서 복종 겸손 고행의 미덕을 실천하였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선교사명을 굳게 밀고 나갔다. 그는 마테오 리치, 아담 샬, 베르비스트를 이어, 중국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복음을 전파하였고 심지어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중국의 선교보호권 문제를 알린 편지를 교황청에 보냈고, 대주교들을 움직여 선교 국면을 바꾸게 하였다’며 레브 신부를 중국 천주교 선교 혁신운동의 영웅적 선구자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陸徵祥, 『回憶與隨想』, 104-105쪽.

 

39) Ernest P. Young, Ecclesiastical Colony: China's Catholic Church and the French Religious Protectorate,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pp.193-194.

 

40) 陸徵祥, 『回憶與隨想』, 101쪽.

 

41) 陈志雄, 「陸征祥与民国天主教会」, 31-35쪽.

 

42) 최병욱, 「교황 사절 코스탄티니의 중국 파견과 동서 문화의 소통」, 『교회사연구』 40, 2012. 252쪽.

 

43) 첼소 코스탄티니는 1922년 교황 비오 11세가 임명한 중국의 초대 교황 사절로 1933년까지 중국에 주재하였다. 1926년 최초로 6명의 중국인 주교가 교황에 의해 축성되는데 일조하였고, 중국인 신학생들을 로마에 유학 보냈으며,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와 중국과 바티칸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최병욱, 「20세기 중국과 바티칸 외교 관계의 재조명」, 『교회사연구』 50, 2017, 133쪽.

 

44) 陸徵祥, 『回憶與隨想』, 106쪽. 

 

45) 陸徵祥, 『回憶與隨想』, 66쪽.

 

46) 陸徵祥, 『回憶與隨想』, 68-69쪽.

 

47) 陸徵祥, 『回憶與隨想』, 65-66쪽.

 

48) 육징상은 2천 5백년 전 공자는 자연법을 중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해 주었으나, 그리스도는 만인을 위해 이 자연법에 그 진정한 뜻을 불어 넣어주었다고 하였다. 로베트·앤나르, 위의 글, 27쪽.

 

49) 陸徵祥, 『回憶與隨想』, 99-100쪽.

 

50) 보유론은 복장이나 생활 양식에서 중국화를 시도하고 조상제사와 공자숭배 등 전통 풍습도 그리스도교와 배치되지 않는 한 허용하였으나, 천주교와 상통적인 원시 유학에 국한되었으며 성리학에 대해서는 도교나 불교와 같이 배척하였다. 崔基福, 위의 논문, 113-114쪽.

 

51)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는 이냐시오의 영성에 상응하는 것이었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발리냐노의 선교 방법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다. 이규성, 위의 논문, 15-18쪽.

 

52) 전례논쟁 관련 선행연구는 리치의 후임으로 중국선교의 책임자가 된 롱고바르디(Nicholas Longobardi,1559-1654)가 상제(上帝)라는 호칭 사용을 반대하고 중국의 조상 제사와 공자숭배 의례 역시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배척하였으나, 대부분의 예수회원들은 리치의 노선을 따랐고 이 노선이 후일 중국 전례논쟁시 예수회의 논리였다(최기복, 「明末淸初 예수회 宣敎師들의 補儒論과 性理學批判」, 『교회사연구』 6, 1988, 55쪽)는 평가였다. 그런데 최근 이와 상반된 평가를 보여주는 사료가 발간되었다(니콜로 롱고바르도 지음, 김미선 요안나 옮김, 『롱고바르도 신부의 중국 선교 보고서』, 한국교회사연구소, 2021). 이 책은 전례논쟁이 예수회와 여타 수도회의 의견 차이가 아니었으며, 예수회 선교사들 내부에서도 치열한 논의를 거치며 예수회원 절반 이상이 롱고바르도의 견해에 동의했음을 공증한다. 이는 중국 현지 전통을 존중하는 선교 원칙이 리치는 물론 롱고바르도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음을 의미하며, 리치와 롱고바르도의 관계는 이념이나 선교지에 대한 대립·상충이 아니라 최적화된 복음화를 위한 상호 보완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53) 정태식, 위의 글, 373쪽, 378쪽.

 

54) 이상옥, 위의 논문, 401-402쪽.

 

55) 이지조(李之藻, 1565~1630)는 서광계·양정균(楊廷筠, 1562~1626)과 함께 중국 그리스도교 초기의 선교를 개척한 ‘3대 대들보’라 불린다.

 

56)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와서 활동하다 죽기까지 28년 동안 그는 사전 편찬과 『사서(四書)』 번역을 비롯해 종교와 천문, 지리와 수학 등 전교에 도움이 될 만한 저술들을 한문으로 이십여 권이나 저술하였다. 송영배, 「마테오 리치의 전교 활동의 개략과 그의 유교관」, 마테오 리치(利瑪竇) 저·송영배 역주, 『교우론(交友論) 스물다섯 마디 잠언(二十五言), 기인십편(畸人十篇)-연구와 번역』,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0. 

 

57) 칼슨 장은 서광계의 개종을 유교적 道와 서양의 學을 조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김상근, 위의 글, 228쪽; 유교적 천주교인이 아닌 ‘종교 융합’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초기 천주교인들이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긴 유산을 수용하였을 뿐아니라, 선교사의 통제와 의도를 일정부분 넘어서는 주체적 변용을 이루어 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주현, 「'改宗'에서 '融合'으로: 近世 동아시아에서 초기 天主敎 수용 문제의 사상사적 자리매김을 위한 개념적 준거틀」, 『동양사학연구』 144, 2018. 239쪽.

 

58) 육징상은 「陸徵祥爲徐文定列品事上安國孫主敎書」를 발표하였다. 顧衛民, 『中國天主敎編年史』, 上海書店出版社, 2003, 493-494쪽.

 

59) 「偉大的中國基督徒保祿徐光啟的生平與志業」를 써서 교황청에 보냈다. 陈志雄, 「陆征祥与民国天主教会」, 171쪽.

 

60) 羅光, 『陸徵祥傳』, 200쪽.

 

61)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389쪽.

 

62) 羅光, 『陸徵祥傳』, 165쪽.

 

63) 『논어』에 효에 관한 언급은 14곳이며, 그중 네 곳은 공자가 제자들의 효에 대한 물음에 답한 내용, 다섯 곳은 공자 직접 서술, 두군 데는 간접 말한 곳, 나머지 세 곳은 증자가 공자에게서 들은 말이다. 최기섭, 위의 논문, 37쪽.

 

64) 金勝惠, 「中國宗敎傳統의 基本構造와 特性」, 『종교연구』 21, 1986, 50쪽; 공자는 효가 인을 이루는 첫 단계의 시작으로 중시했지만 중심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는데, 맹자에 와서 그 개념이 확대되고 최고의 덕으로까지 고양되었다. 맹자가 효를 강조하는 이유는 겸애를 주장하던 묵가(墨家)의 도전에 응전하기 위하여 유교 윤리의 시작인 효의 중요성을 확인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승혜, 『유교의 뿌리를 찾아서-『논어』, 『맹자』, 『순자』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 지식의 풍경, 2001. 208~209쪽.

 

65) 도올 김용옥, 『효경 한글역주』, 통나무, 2009, 56쪽.

 

66) 崔基福, 위의 논문, 115쪽; 리치와 선교사들이 설명한 그리스도교 효의 논리는 초기 한국 천주교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초기 한인 천주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씌어진 무군무부(無君無父)라는 죄목에 대해 대군대부(大君大父) 또는 대충대효라는 이념으로 항거했고, 급기야는 자신들이 유교에서 배웠던 효의 정신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끝까지 섬기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최기섭, 「유교의 효(孝) 사상과 그리스도교 신앙」, 『신학과사상 Catholic Theology and Thought』 34, 2000, 41-44쪽.

 

67) 1616년 불교도였던 남경 예부시랑 심최(沈漼)가 서양 선교사와 교우들을 체포하는 명령을 내려, 세메도(Alvaro Semedo, 1585-1658)와 중국인 종명인(鍾鳴仁, 세바스티안, 1562-1621) 수사와 교우가 체포되었다. 그는 천주교를 배척하는 『파사집(破邪集)』을 저술하였는데 그 속에 7명의 불교 승려들의 글이 14편이나 들어 있다. 崔韶子, 『東西文化交流史硏究明·淸時代 西學受容』, 서울:三英社, 1987, 105쪽.

 

68) 서광계는 1616년 천주교를 박해한 남경교난이 발생했을 때, 황제에게 상소문 「변학장소(辨學章疏)」를 올리고 아는 관리들에게 편지를 보내 서양 선교사들의 무고함을 적극적으로 변론하였다. 서광계 지음·최형섭 옮김, 『서광계문집(徐光啟文集)』,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4. 131-152쪽.

 

69) 玉鵬, 「儒者陆征祥」, 『信德 (Faith Weekly)』 2006.11.10.(https://www.xinde.org/show/5842)

 

70) Taiwan Review: Lou Tseng-tsiang: A Devout Chinese Christian, Taiwan Today, June 01, 1952.

 

71) 羅光, 『陸徵祥傳』, 167쪽.

 

72) Anne Vansteeland, Ibid., p.228.

 

73) 책란(柵欄)은 예수회의 첫 공식 묘지이며, 리치 신부의 후임 선교구장(1610-1622)인 롱고바르도 신부가 묘지 설계를 지도하였고, 리치 신부의 장례미사를 집전하였다. 니콜로 롱고바르도 지음, 김미선 요안나 옮김, 위의 책, 30쪽; 예수회 선교사들이 1611년 명 만력제(萬曆帝, 재위 1572~1620)의 공식 허가를 받아 리치의 유골을 묻은 북경 부성문(阜成門) 밖 책란묘원은 중국의 전통 묘지와 서양의 묘지 형식이 결합되어 있다. 서정일, 「마테오 리치의 무덤: 예수회 초기 중국선교 과정에서 건축사업의 의의」, 『인간·환경·미래』 8호, 2012, 132-138쪽.

 

74) 陸徵祥, 『回憶與隨想』, 82쪽.

 

75) 羅光, 『陸徵祥傳』, 124쪽.

 

76)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 北京:宗敎文化出版社, 2007. 680쪽.

 

77) 육징상은 외교총장 시절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인 21개조에 서명하여 큰 비난을 받은 일과 파리 평화회담의 결과 등 정의롭지 못한 열강에 대한 실망, 국내의 정쟁에 대한 혐오감이 가중되면서 1920년 12월 외교총장직을 사퇴하였다. 그는 정계를 은퇴하고 아내의 병요양을 위해 스위스로 갔고, 중국 정부의 요청으로 스위스 공사직을 맡았다. 羅光, 『陸徵祥傳』, 116-117쪽.

 

78) 陸徵祥, 『回憶與隨想』, 84-85쪽.

 

79) 이 수도원은 1926년 로마에서 중국인 신부 6명이 주교로 축성된 후 뱅상 레브 신부와 함께 방문하는 등 친중 우호 분위기가 있었다. 陈志雄, 「陸征祥与民国天主教会」, 70-73쪽.

 

80) 陸徵祥, 『回憶與隨想』, 90쪽.

 

81) 陸徵祥, 『回憶與隨想』, 74쪽.

 

82) 雷立柏(Leopold Leeb), 『論基督之大與小: 1900~1950年華人知識分子眼中的基督敎』,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0. 224-225쪽.

 

83) 陸徵祥, 『回憶與隨想』, 110쪽; 雷立柏(Leopold Leeb), 위의 책, 223쪽.

 

84) 陸徵祥, 『回憶與隨想』, 73쪽.

 

85) 羅光, 『陸徵祥傳』, 24쪽.

 

86) 陸徵祥, 『回憶與隨想』, 112쪽.

 

87) 张新鹰, 「"入穴探虎扬名显亲"-从致刘符诚书信中所见之晚年陆徵祥(下)」, 『世界宗敎文化』 2005-4, 178쪽.

 

88) Anne Vansteeland, Ibid, p.224.

 

89) 「陸徵祥論中國公敎問題 - 在國際傳敎會議之演說」(4), 何燮 역, 천진 『益世報』 1929년 10월 9일, 陳志雄, 「陆征祥与民国天主教会」, 149-150쪽에서 재인용.

 

90) 교황 비오 11세는 『傳敎雜志』에 실린 陸徵祥의 연설문을 읽고 그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陳志雄, 「陆征祥与民国天主教会」, 151쪽; 陸徵祥은 교황 비오 11세가 수도원에 들어간 그에 게 여러 번 아버지같은 사랑을 주셨다고 하였다. 陸徵祥, 『回憶與隨想』, 76쪽; 비오 11세 교황은 1926년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첫 중국인 주교 서품식을 갖고 직접 축성함으로써 중국인 주교와 중국 가톨릭교회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서양자, 『중국천주교회사』, 가톨릭신문사, 2001. 457쪽.

 

91) 陳志雄, 「陆征祥与民国天主教会」, 134쪽.

 

92) 陸徵祥, 『回憶與隨想』, 106쪽; 클로드 쇠텐스, 김정옥 옮김, 『20세기 중국 가톨릭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8. 201쪽; 方豪, 「陸徵祥」, 위의 책, 680쪽.

 

93) 오경웅(吳經熊)은 장개석(蔣介石)과 송미령(宋美齡)의 요청으로 1946년 『신약성경』을 번역하였다. 우빈(于斌) 주교는 교황청으로부터 중국어 번역의 책임 감수를 명받고 이를 육징상 신부에게 위탁하였다. 1948년 10월 3일 육징상은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서 오경웅이 번역한 『신약성경』이 교회의 신앙 도리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서명하였다. 羅光, 『陸徵祥傳』, 254쪽.

 

94) 그는 벨기에와 중국의 신문·잡지에 일본의 중국 점령, 중국과 교황청 관계 등에 대한 글을 게재하고, 이를 중국에 보내는 등 난국 극복을 위한 구국 활동을 하였다. 陈志雄, 「陆征祥晚年的爱国情怀」, 『学术研究』. 2006-4. 111쪽.

 

95) 육징상은 많은 유력 인사들과 연락하고 있었고, 중국의 외교 기능을 실행하는 곳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있는 한 그는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베네딕도 수도회 건립에도 영향력이 있었다. Anne Vansteeland, Ibid., p.225.

 

96) 雷立柏(Leopold Leeb), 위의 책, 223-224쪽. 단 육징상은 마테오 리치와 예수회 선교사, 서광계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믿을 수 없는 미신이라고 반대하였다. 陸徵祥, 『回憶與隨想』, 228쪽.

 

97) 陸徵祥, 『回憶與隨想』, 123쪽.

 

98) 陸徵祥, 『回憶與隨想』, 116쪽.

 

99) Anne Vansteeland, Ibid, p.229.

 

100) 陸徵祥, 『回憶與隨想』, 137-138쪽.

 

101) 『베네딕도 규칙서』는 수도승들을 위해 쓰여진 규칙서이나 수도승이 아니어도 누구든지 시공을 초월하여 베네딕도회 영성과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공유할 수 있다. 베네딕도 영성은 공동체 영성이다. 『베네딕도 규칙서』는 함께 사는 공동생활을 규정하고 있다. 베네딕도의 영적 가르침은 모자람도 지나침도 없는 중용의 영성이며, 엄격함과 유연함,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이루고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허성석, 「베네딕도회 영성에 대한 고찰」, 『신학과사상(Catholic Theology and Thought)』 43, 2003. 38-41쪽.

 

102) 뱅상 레부 신부가 1928-29년 베네딕도 수도회의 검소·가난하고 엄격한 훈련 규정을 따라 하북성(河北省)에 중국본토 수도회와 수녀회인 요한작은형제회(Little Brothers of Saint John the Baptist)와 데레사작은수녀회(Little Sisters of Saint Theresa)를 조직한 바 있다. 그는 성무일도 성가를 중국어로 부르는 등 본토화 선교를 전개하였다. Ernest P. Young, Ibid., p.243.

 

103) 송미령은 1939년 9월 4일 육징상이 보낸 영문판 『베네딕도 규칙서』를 보고 “깊은 존경의 마음으로 성베네딕도 규칙을 읽었고, 이 고상하고 감동을 주는 규칙이 장차 중국에서 실천되기를 바란다”는 답신을 보냈고, 채원배(蔡元培) 등 비신자 지식인들도 감사를 표하였다. 陸徵祥, 『回憶與隨想』, 119쪽.

 

104) 陈志雄, 「陸征祥与民国天主教会」, 144-145쪽.

 

105) 陸徵祥, 『回憶與隨想』, 116-117쪽.

 

106) 陸徵祥, 「陸徵祥致劉符誠函(1938.2.24.)」, 『文史資料選編』 33輯, 140-141쪽.

 

107) 네브(Théodore Nève, O.S.B.) 수도원장은 육징상이 수도 생활을 시작한 후, 그가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고 수사에서 신부까지 되기를 격려하였다. 중국 분원의 설립은 그보다 먼저 1913년 중국에서 활동하던 벨기에 출신 뱅상 레브 신부가 네브 원장을 방문하여 요청한 바 있다. 陸徵祥, 『回憶與隨想』, 77쪽.

 

108) 陈志雄, 「陸征祥与民国天主教会」, 154-155쪽.

 

109) 이로써 중국의 유교 의례를 인정한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노선은 무죄가 입증되었다. John Dragon Young, “Chinese Views of Rites and the Rites Controversary, 18th-20th Centyries”, D.E.Mungello edited, Ibid., p.106.

 

110) 陳志雄, 「陸征祥与民国天主教会」, 155-156쪽.

 

111) 「陸徵祥記事本(1945.9.27)」, 『陸徵祥檔案』 卷宗 57, 陳志雄, 「陸征祥与民国天主教会」, 158쪽에서 재인용.

 

112) 육징상은 장개석 총통이 중국 유교 전통과 융합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중국을 이끌어 갈 것으로 기대하다. 그러나 남경 국민정부가 부패하여 공산당에 의해 무너진 것은 그에게 큰 타격이었다. 로베트·앤나르, 위의 글, 28쪽.

 

113) 성도의 베네딕도 수도회는 설립한 중서문화연구소는 1949년 말 중국 공산당이 성도를 점령하여 해산되었다. 수도사들은 1952년 중국에서 추방된 후 1954년 미국 캘리포니아 발레르모(Valyemo)에 성 안드레아 수도원(St. Andrew's Priory)을 중건하여 기도와 노동, 교육하는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https://saintandrewsabbey.com/collections/history-of-the-abbey

 

114) 송영배, 「천주실의와 토착화의 의미」, 마테오 리치(利瑪竇), 송영배 역주, 위의 책, 503-504쪽.

 

115) 1946년 5월 16일 교황이 육징상에게 성 뻬레르드 강 수도원장 지위를 주었다. 로베트·앤나르, 위의 글, 26쪽.

 

116) Nicholas M. Keegan, Ibid., pp.172-173, p.175.

 

117) 그는 외교와 국제적 조직이 정의와 평화를 조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고, 그보다는 상호이해와 사람들간의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Julian Theseira, “When we spoke at Versailles”: Lou Tseng-Tsiang and the Chinese Delegation at the 1919 Paris Peace Conference, A Frustrated Quest for Justice, Global Histories, Vol. 1, No. 1 (Dec. 2015) p.42.

 

118) 陳志雄, 「陸征祥与民国天主教会」, 173쪽.

 

119) 陆徵祥, 『回忆与随想』, 1쪽.

 

120) 금장태, 위의 글, 34쪽.

 

[학술지 교회사학 제21호, 2022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정현(가천대학교 강사)]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418686&Page=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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