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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에세이13-30: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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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29 ㅣ No.711

교회사 에세이 (13)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1)

 

 

오늘부터 보게 될 것은 사회와 국가라는 공고하고 기존하는 ‘체계’와 만나게 되는 그리스도교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 개의 요소들은 서로 공존과 갈등, 그리고 경쟁의 관계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특히 어린 그리스도교에게 있어서 이들과의 공존은 큰 시련이었습니다. 왜냐면 사회, 정치적 영역과 지적인 영역에서 이들과 공개적으로 다투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등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자기를 돌아보고 세상의 체계와의 관계 안에서 ‘다름과 같음’을 골라내며 자신의 고유한 체계를 만들어 내는 산고의 시기를 겪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국가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교에 관한 정치, 종교적 평가가 변화하면서 교회와 국가는 상호적 긴밀성을 갖게 됩니다. 이런 긴밀함은 이질감과 경쟁의 관계를 넘어, 사회와 그리스도교간의 '동일화'라는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다름과 동일화’라는 두 개의 극단에서 그리스도교는 좌충우돌하는 상황을 맞이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이 장에서는 사회와 국가 그리스도교간의 갈등과 공존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코스탄티노 황제 이전의 시대(-312년까지)
그리스도교의 거리두기와 고립 :

국가, 사회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는 큰 갈등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신학적인 성찰에서 기인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어떤 미래도 없는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곧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상황, 국가와 사회라는 이런 현실 상황을 통한 어떤 건설적인 관심도 없는 다른 세상의 시민들이었던 것입니다(필립 3,20).

다른 한편, 좀 더 구체적 현실 상황에서는 사도행전 17장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교는 국가를 악마적 존재로 치부합니다. 다분히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시각에서 보는 이 세상에 대한 평가일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보편적인 태도는 바오로에게서 보인 것처럼, 국가는 그들에게 문제없이 받아들여졌고, 현실적인 권위로 여겨졌으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위한 기도를 일상화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처음 얼마 동안은 서로에게 큰 관심을 갖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이 작은 종교적 그룹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리스도교 또한 앞서 보았던 것처럼 국가는, 지금은 그 기능을 충만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곧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될 운명의 이 세상 국가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숫자가 백성들 사이에서 눈에 띠게 성장하면서 변하게 됩니다.

실제 그리스도교는 첫 3세기 동안 자신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과 태도에 있어서 국가와 사회와 어려운 관계를 갖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들 자신들의 특별함과 그들이 추구하는 ‘다른 길’의 특성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세상과의 거리두기는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큰 문제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다름과 거리두기’가 그리스도교와 국가와 사회 간에 문제를 야기 시켰고 어떻게 이들은 반응하며 갈등하고, 마침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015년 6월 28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14)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2)

 

 

이런 체계들 간의 만남은 수용과 반응의 일반적인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상대를 알아가면서 서로가 반응하게 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와의 만남 안에서 드러나는 첫 반응은 ‘색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이방인들의 눈에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이 ‘색다름’이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한 무신론자’일 것이라는 고발을 가져오는데, 선뜻 이해되기 어려운 이런 고발의 이유는 그리스도인교가 가진 종교적 실천의 ‘독특함’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이런 백성들 사이의 고발은 몇 가지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 옵니다:

먼저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사회와 시대의 신들을, 종교를 떠나게 하였고, 이런 거리를 둔 삶은 국가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안정성과 보호를 보증하는 제도에 대한 도전이며 위험요소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거리두기는 이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무신론자들이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런 고발의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이미지도, 성전도, 제단도 없는 이상한(?) 종교적 실천이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들 눈에 비친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실천의 다름과 무신론적 성격은 이방인들을 화나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고립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종교적인 관점에서의 다른 점들이 눈에 띠는데,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개념이 이방인들의 신에 대한 개념과 달랐습니다. 판테온, 다신을 섬기던 로마의 종교에서도 사실을 말하자면 ‘지극히 높은 신’의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들 중의 신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 신들은 국가적인 신들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보호할 의무가 있는 존재들로 이해되었습니다. 그 사회와 국가는 이런 정치, 종교적, 그리고 법률적 근거에 바탕을 둔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유일신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의 비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것은 제국의 근거가 되는 기초 원칙들에 대한 반대였던 것입니다.

이런 ‘의문의 제기’는 그들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종교성을 벗겨버리는 결과를, 그리고 그들의 체계에 대한 위협이자 도전으로 여겨졌기에 그리스도교는 그들의 하느님 신앙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했고,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 위험한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로마인들의 입장에서, 신들은 많은 국가들을 로마의 지배하에 두었고 이것은 신적인 섭리로서, 이 세상을 질서 짓기 위한 신적인 섭리이며, 모든 백성들은 의심없이 이것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인류와 백성들의 다가올 구원을 위한 보증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실천은 고립을 가져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정치적으로는 그러나 한편으로 종교적인 의미도 갖고 있는 이런 기초 위에 건설된 공적인 질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2015년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15)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3)

 

 

이런 신학적, 종교적 지형에 대한 거리와 정치적인 실천의 다름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을 삶의 많은 영역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대중적 축제들과 사회를 통합하는 오랜 전통의 다양한 관습들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특히 기원과 의미가 종교와 연결된 축제들의 경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에는 개인들이 종교적, 사회적으로 자유를 만끽하는 기회로써 큰 기능을 하던 극장의 공연(콜로세움에서의 공연)과 전차경주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중요한 부분과 사회적 관심의 영역에서 멀어져야 했고, 이런 모습은 이방인들의 눈에 스스로 자신들을 고립시키는 이상한 집단, 내지는 하나의 스캔들로 비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만의 모임을 계속했고, 때로는 밤에 거행되었기에 이런 모습은 이방인들의 비판 뿐 아니라 세상의 형식을 거부하는 이상한 원의를 가진 이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게 됩니다.

이런 오해들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드러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고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내부적으로는 이를 견디기 위한 어떤 조직을 갖게 했고, 관습과 종교적 축제들의 리듬에서 벗어난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하게 됩니다. 특히 세상에 대한 방어적 윤리를 발전시켜 나가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을 우월한 도덕성을 가진 이들로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주장, 즉 진리에 대한 독점적 소유와 자신들의 도덕률의 보편적 가치들에 대한 주장은, 이방인들에게 거부되고 오히려 더욱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공격적이 되게 합니다. 또한 ‘뽑힌 이’라는 자각으로 드러나는 개종자들의 열성은 그들에게 귀찮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선교는 성공을 거두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가치인, 부와 출세 그리고 시대의 문명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이방인들로부터 삶의 개선을 위한 어떤 임무도 받아들이지 않고 복과 영예를 추구한다는 고발이 더해지게 됩니다. 이런 관점은 군대의 의무라는 예민한 문제로 충돌하게 됩니다. 2세기 말경에 그리스도인들은 살인과 폭행이란 도덕적 이유와 희생과 충성의 맹세란 종교적 이유로, 군사적 임무를 거부하고 단죄하는데 이것은 사회의 주된 임무들 중의 하나였기에 사회의 격한 반응을 그리고 비난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익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 이라는 비난들에 대해, 불신앙과 오류에 빠져 살아가는 하느님의 적들에 대한 반대라는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향한 충실한 존경과 공적인 선에 대한 관심을 천명하기도 합니다. 유일한 참 하느님께 기도 안에서 인간의 행복과 제국에 대한 축복의 기도를 올립니다. 하지만 이것이 황제를 숭배하는 예식에 제의적인 참여를 의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런 갈등 관계는 후기 고대로 넘어오면 자연스럽게 긴밀한 관계로 변하는데, 특히 교회로 부터 행해진 이방인들에 대한 애덕의 실천은 갈등을 치유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는 ‘길을 벗어난 사람들’이란 그리스도교에 대한 평가를 넘어 그리스도교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 대한 임무를 사랑에 대한 계명의 차원에서 수행하고 있었고,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교는 부족한 종교라는 인식에서 긍정적인 평가로 전환을 가져오게 합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적대와 갈등은 계속됩니다. [2015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16)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4)

 

 

오늘은 이들의 만남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은 왜 그리스도교를 거부하고, 또 어떻게 공격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방인들의 적대적인 태도는 그리스도교의 초기부터 4세기경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계층을 통틀어 이 새로운 종교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합니다. 수많은 대중들의 공격과 단죄가 있었고, 2세기경이 되면 상위층에서 철학적 논쟁이 시작됩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2세기 말 경의 첼소(Celso), 뽀르피리오(Porfirio, 234-304)와 황제 쥴리아노(Giuliano, 331-363)를 들 수 있습니다. 철학적 교육을 받은 이들은, 오랜 전통에 기원을 둔 문화와 종교적 예식을 통한 사회의 안정성에 그리스도교가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리스도교를 미신적인 종교라고 비난하였고, 격한 어조로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새로운 위험이며 파괴적인 유혹이라고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의 비난과 공격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는 여러 이유로 논쟁할 가치가 없는 종교라고 판단합니다. 맨 먼저 ‘진리’란 것이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듯 ‘마지막 시대’의 것이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오래된 숭고한 전통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이를 구원의 진리가 왜 이렇게 늦게야 계시 되었느냐?’ 그리고 이 의심스런 진리가 배운 것 없는 예수라는 인물을 통해서 왔다는 점, 그의 제자들, 또한 스승보다 더 현명하지 못한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주로 사회의 낮은 계층과 무지한 이들에게 선교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가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계시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독창적인 것도 아닌 히브리즘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도 공격을 가하는데, ‘그들의 거룩한 책들의 수준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거부합니다. 성경은 예수에 의해서 행해진 기적에 중요성을 두는데 이것은 야만적이고 하층 노동계층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하느님께서 죽어야 할 인간의 육체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예로 들며 신이 변형 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논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에서 그 분의 굴욕과 실패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의 십자가는 더욱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부활에 관해서도 비판하는데 부활은 기대하지 않았던 무엇을 믿는 것, 즉 육체를 지니러 오신 분이 오히려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다른 비전을 보고 믿게 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세상의 중심이고 귀한 존재이며, 모든 세상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극히 의심스런 생각이란 것입니다.

이런 비난과 비판을 통해서 그들은 그리스도교는 믿을 수 없는 종교라는 목적지에 이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을 가진 그리스 철학적 사상의 틀에서 그리스도교를 바라본 것들입니다. 종교적 관점에서의 다른 점들은 이미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방인들 비난의 기저에는 백성들이 이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갖고 전염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로 빠져들었다가 다시 그들의 고대 종교에로 되돌아왔다고 그들에게 선전하고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2015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17)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5)

 

 

제국 시대의 박해들은 앞서 언급된 논쟁과 다툼들의 결과물이 빚어낸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박해는 히브리인들에 의해서 행해졌고, 그들의 입장에서 박해의 명분은 분명했습니다. 유대 회당은 초기 교회를 향해서 반대의 강령을 반포하는데, 그것은 이단과 신성 모독이란 고발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행동과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순전히 신학적인 사색의 결과만은 아니었고, 그 안에는 유대라는 체계와의 갈등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인들에 대항하여 벌어진 ‘유다 항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때에 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교인들은 피 흘리는 박해를 당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봉기한 이들을 지원하지 않고 오히려 로마인들에게 협력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인들은 스승 예수님을 따라 비폭력과 평화를 추구하여 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나가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신학적 반성 뿐 아니라, 이런 국가체계에 대한 비협조가 그런 폭력적인 박해를 낳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박해는 로마인들에 의해서 자행되는데 이것은 교회에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런 박해는 그리스도교의 시작에서부터역사와 세상에 대한 인식과 그리스도교의 영성적, 신학적인 관점에 크고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순교자들의 열전과 신학적 저술이 시작되고 신심의 역사가 기록되는데 이것은 이런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위한 교회의 열성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에 관한 구체적인 날짜와 진행 상황 등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박해란 것이 국가의 중심 권력에 의해서 준비되고 의도된 박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부분, 백성들에 의해서 행해진 즉흥적인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 위중하고 끔찍했던 것은 백성들(pogrom)에 의해서 자행된 것이었습니다. 반면 국가에 의한 공식적인 박해는 2세기 중반에 본격화되고 4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제 로마인들에 의해서 자행된 여러 공식적인 박해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교 인들을 향하여 물리적인 힘을 사용한 것은 네로 황제(Nerone,54-68)였습니다. 이런 결정과 진전이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박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네로는, 그의 기획으로 인한 로마의 화재 때문에 생겨난 백성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그 어누 누구도 동정하지 않을 희생양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인들이었습니다. 이런 네로의 극단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태도는 백성들의 박수를 받게 됩니다. 아마도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순교가 이즈음 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도미찌아노 황제(Domiziano, 81-96) 시대가 되면 '황제 숭배 예식'(황제 신성화로 제국의 일치를 통한 통치 목적)을 의무로 선포하고 거기에 불응하는 이들에 대한 정치적인 색출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인들을 또한 죽음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 경우는 외적인 종교 예식에 대한 비판에 의미를 두지만 여기에 대한 확실한 자료들을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2-3세기 동안 많은 곳에서 지역적인 박해들이 자행되는데 이것들은 주로 낮은 계층에 의해서 촉발된 것들이었고, 권력자들은 경우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로마는 아직 법률적인 근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 인들의 범죄에 대한 불법성의 근거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의 처벌에 관한 법률적인 접근이 시작됩니다. [2015년 7월 26일 연중 제17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18)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6)

 

 

지난 호에 이어서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로마의 공식적인 박해들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박해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지 않았던 로마 제국이, 이제 그리스도교 인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준비하는 지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비티니아(Bitinia)의 행정관 플리니오(Plinio)와 황제 트라이아노(Traiano) 간에 주고 받은 공적인 편지에서 법률적인 부문에서의 진전을 처음으로 보게 됩니다. 플리니오는 청하기를, 황제 숭배 예식에 참여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떠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도 개인적인 고발이 있을때면, 법률적인 집행을 강제하도록 청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자체로 범죄의 사실이 확인 됨을 의미하며, 비록 그가 그리스도교에 충실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권위에 저항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것이 바로 범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인들은 제국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공적인 적대감을 일으키는 범법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아노(Adriano,117-138) 황제는 허위 고발과 이름없는 고발에 대한 피고인의 법률적 보호를 보장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은 심각한 위험에 처합니다. 즉 제국 내의 많은 지역에서, 백성들의 단편적인 증거들에 기초한 처형들이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지역적인 박해들은 즉흥적이었고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띠게 됩니다.

그리스도교를 제국에서 제거하기 위한, 제국의 권력을 통한 조직적인 압력은 3세기에 시작됩니다. 하지만 충분히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제국이 조직적인 개입을 하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특기할 만한 것은 다음의 것들입니다.

이 세기에는 여러 큰 위협이 제국을 강타하는데, 경제적 위기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과 정복지역에서의 군사적인 저항들로 인한 제국 권력에 대한 상처와 전염병의 창궐로 인한 사회적 불안 등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들이었습니다. 국가는 초래된 위협들로부터 통치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그 하나가 정치 종교적인 재건입니다. 이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황제에 대한 신적인 예식을 통해 신적인 도움을 보장받고 제국 통치의 정당성과 일치를 이루려는 시도였고 여기에 반하는 그리스도교는 반 제국 세력이고 제거되어야 할 존재였던 것입니다.

250년경 황제 데치오(Decio, 249-251)는 이런 황제 예식의 참여를 일반적 의무로 부과하였고, 이에 참여하지 않는 이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은 제국의 모든 백성에게 적용되는 것이었고, 이 명령이 짧은 시간에 숫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을 겨냥하고 있음을 누구가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목표점은 아직 뿌리 뽑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제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 예식의 현실적인 참여를 통해 제국의 전통 종교에로 되돌아 와야 했고, 명령에 대한 거부는 피할수 없는 처벌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큰 손실을 입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고 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계속해서 발레리아노(Valeriano,253-260)황제와 갈리에노(Galieno, 253-268) 황제는 정치적인 박해의 법령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260년 경에 갈리에노 황제는 일시적으로 이런 박해 정책의 마침을 선포하고, 관용의 칙령을 선포하기도 하였습니다. [2015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19)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7)

 

 

3세기의 황제들은 이 제국내의 작은 그룹의 성장에 대해 정치적인 고민을 계속하게 됩니다. 이것은 앞서도 조금 언급했듯이 경제적, 정치적인 위협들에 기인하였고, 이런 위협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에 대한 약화를 가져왔고, 신들의 호의를 통한 통치권의 정당성 확보라는 측면에 위기를 가져옵니다. 이런 상황은 개선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정치적인 고민이 이제 그리스도교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디오클레찌아노(Diocleziano, 284-305) 황제의 통치하에 그리스도교는 재앙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황제는 303년부터 그리스도교를 쓸어버리기 위한 조직적인 개입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방위적인 박해로써 먼저 그 화살은 성직자에게로 향합니다. 공동체의 지도층에 타격을 가함으로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이어서 그 대상을 평신도에게로 확대하는 조직적인 박해였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숫적인 감소를 초래하는 대대적인 박해였던 것입니다. 디오클레찌아노 황제와 후계자들의 목적은 이런 박해를 통해서 정치적 재건과 개혁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고 갈레리오(Galerio, 305-311)황제가 통치하던 때가 되면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도를 공적으로 제국의 적이라고 천명하고 그들의 박해자를 자처하던 황제가, 311년 4월 30일,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자기의 정책이 실패로 끝났음을 천명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의 칙령을 반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칙령 안에서 자신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적고 있었으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께 황제들의 건강과 구원을 위해, 또 로마제국과 그들 백성을 위해 기도를 청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방 황제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의 도움과 권위를 인정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정치적으로 그리스도교에 긍정적인 공헌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갈레리오의 칙령에 의해 관용을 허락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종교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국가의 정책에 반하는 어떤 것을 하지 않음에 한하는 자유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인들이 종교적 영역에서 그것들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갈레리오 칙령 이후, 313년 코스탄티노(Costantino)와 리치니오(Licinio)에 의해서 밀라노 칙령(Editto di Milano,313)이 반포되었지만, 동방 즉 코스탄티노의 경쟁자 리치니오(Massimino Daia Licinio)가 다스리던 동방에서의 박해는 324년까지 지속됩니다. 이 박해는 숙적 코스탄티노의 힘있는 지지자들이라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해진 박해였고, 이 박해들은 그렇게 조직적이지 못했고 그에 상응하는 효과를 얻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서방에서의 박해는 덜 조직적 이었고 동방보다 강력하지 않았습니다. 311년 갈레리오 황제가 관용의 칙령을 발표한 이후 서방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라는 공적인 언명과 실천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랜 기간 동안 박해 없는 기간이 계속되었고, 아주 가끔씩 위협적인 공격이 있었습니다.

박해의 내용을 살펴보면, 박해는 주로 교회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체포와 건물과 묘지들의 파괴 그리고 성경과 중요한 교회 서적, 그리고 성물 등에 대한 몰수였습니다. 또한 개인들에 행해진 벌들은 체포와 다양한 제제였습니다. 재산의 몰수와 법률적인 제한, 유배 그리고 강제 노역과 고문에서 사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가해진 위협은 이렇게 국가에 의해서 처해지는 형벌 뿐 아니라 백성들에 의해서 자행되는 통제되지 않는 행위들이 더 많았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순교의 시대에 교회는 열정적으로 자신들을 방어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위기는 교회가 하나의 엄격한 조직을 건설해 나가는 계기를 주었고, 결국 박해는 교회의 저항에 승리를 거두지 못합니다. [2015년 8월 9일 연중 제19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20)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8)

 

 

지금까지 로마 제국에 있어서 국가에 의해서 행해진 박해에 대한 경과를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이런 박해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을 살펴볼까 합니다. 이것은 박해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인 성찰로서 박해를 이해함에 있어서 더 넓은 지평을 열어 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박해의 이유는 이 두 부문, 즉 교회와 국가의 입장에서 가기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먼저 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교회는 이 박해를 박해자들의 도덕적인 타락에 의해 저질러진 악행이 원인이었거나, 참된 하느님의 봉사자들에게 자행되는 악한 이들에 의한 죄악으로 이해했으며, 교회 구성원들의 악한 조건들에, 즉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박해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순수하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박해를 바라보는 관점이었습니다.

사회와 국가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이성적이고 감정적인 경계를 둘러치는 것으로서 교회와 환경에 대한 경계짓기였고, 이것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계짓기는 세상의 정치 종교적 개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의 조화로운 병존과 관계된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들의 판단과 결정들은 항상 이상한 종교(?)에 대항한 정치적인 내, 외적인 상황을 고려한 결정이었으며 그것은 사회와 국가에 대한 존경과 안정, 그리고 평화를 위한 결정들이었습니다. 이방 종교에 대한 로마인들의 태도는 자주 변하였고, 정치적 상황에 따라 급변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종교를 대하는 로마인들의 이런 태도는 여러 다른 모습을 취합니다. 먼저 로마인들은 다른 이방의 종교들을 향하여도 어떤 의무를 부과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세상의 정복자들로 갖는 권위 같은 것이 작동하고 있었던 반면, 이방인들의 관습과 그들의 종교 예식에 관대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정치적 위대함과 관용을 드러내고자 함에 기인하였습니다.

이외에도 법률적인 관점이 존재했습니다. 법률 문제의 근본은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과 적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앞서도 간단히 살펴본 것처럼, 로마 제국에는 이방인들의 종교예식에 반하는 일반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방 종교에 귀의 하는 것이 로마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신적인 예식들과 조상들에 대한 관습 그리고 국가 권위에 대한 예식의 가치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초들 외에 어떤 또 다른 법률들이 필요치는 않았던 것입니다.

국가는 3세기와 4세기 초가 되면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법률을 공포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까지는 권위가 내리는 일반적 법률의 권한과 공적인 명령을 통해서 충분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정한 법률의 부재는 새로운 종교들이 자리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교 인들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에 기인한 처형은 물론, 데치오 황제 때부터는 그리스도교에 귀의 하는 자들에 대한 처벌이 규정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대하여 이방인들이 어떤 평가를 하였는지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취해진 살아남기 위한, 또 적응을 위한 반응과, 반작용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순간에 일반적인 충실의 덕과 죽음을 경멸하는 덕에만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이 시련을 극복하도록 각자에게 능력을 주었고 이런 상황에 대한 위로를 찾게 했고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도록 인도했습니다. 이제 박해가 빚어낸 그리스도교 내부의 문제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015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21)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9)

 

 

이제는 교회와 외부 체계와의 관계에서 특히 교회 내부에서 솟아나는 문제들과 대응을 살펴볼까 합니다. 외부적인 탄압은 기본적으로 교회 공동체 간에 서로 일치하려는 노력을 하게 했고, 공고한 조직의 발전을 가속하게 했으며, 또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한 시노드는 교회 소통의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박해는 교회에 신학적, 영성적, 그리고 공동체 내부의 조화에 관한 신중한 성찰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초기 교회에게 배교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아픔이지만, 이런 아픔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하여금 신심훈련의 강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강한 믿음과 때로는 염세적인 태도들은 개개인을 유혹의 순간에, 두려움의 순간에 대비하도록 했으며, 이런 어려운 상황은 주교직의 임무, 즉 영적인 지도와 불확실성의 정점에 있는 그들에게 공동체를 감독할 권한을 필요로 했고, 이는 고대 교회에서 주교직의 중요성과 강화를 동시에 가져오는 결과를 냅니다.

데치오 황제의 시절에 많은 그리스도인들 배교를 하게 되는데, 이는 교회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고자 하는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문제를 동시에 안겼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이런 배교자들(Lapsi)이 고백 성사의 은혜를 통해 교회에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런 견해는 로마 교회와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Cipriano)에 의해서 설교된 생각들이었습니다. 치프리아노의 행동과 신학은 서방에서 주교직의 임무와 발전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북쪽을 중심으로 다양한 실천들이 생겨나는데, 배교자들은 교회의 품으로 되돌아 올 때는 아주 엄격한 규정을 통한 속죄의 과정을 통해서 되돌아 오게 되고, 이런 속죄 과정의 규정은 오로지 하느님으로 부터 받은 주교직의 권한과 관계지어 주교의 고유한 임무가 됩니다.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 또한 강력하였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순수한 이들’로 칭하며(puri, katharoi) 교회는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스스로 제외시킨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는 로마의 사제인 노바찌아노(Novaziano)였습니다. 이것은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는데, 이 노바찌아노의 교회는 제국의 전역에서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의 분열은 박해의 하나의 결과였습니다. 또 다른 분열이 307년 북 아프리카에서 발생하게 되는데, 이 또한 아프리카 교회의 엄격함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몇몇의 주교들과 도나토(Donato)를 중심으로, 카르타고에서 행해진 체칠리아노(Ceciliano) 주교의 서품을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생긴 분열입니다. 그 이유는 그를 서품한 주교들 가운데 소위 말하는 ‘주요서적을 넘겨준’(traditorcodicum) 이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인데, 서품식에 참석한 한 주교가 박해에 유약한 모습을 보였고 그리하여 ‘교회의 성경을 비롯한 중요 서적들과 제구들을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해진 성사의 효과가 행위자의 도덕성에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신학적인 문제인 것이었습니다. 이 논쟁으로 교회는 분열되고 이 분열은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시대까지 계속됩니다.

이런 교회의 신학과 실천에 관한 이 두 개의 반대, 즉 노바씨아노와 도나토의 질문은 교회가 그에 대한 영구적인 해결책을 찾게 해주는데, 엄격한 노바찌아노의 교회에 반해서 교회는 주교의 속죄에 대한 권한을 인정하고 공동체는 자비로운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배교의 죄를 폄하할 위험을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도나티스티들을 대항하여서는 성사 거행자의 도덕적 질에서 성사의 독립성을 확인하는데 이것은 성사를 받는 이들을 불확실성으로부터 보호하게 되는 결론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 분열들은 교회가 많은 힘을 낭비하게 하고 교회의 신뢰성을 잃게 하는 결과도 가져옵니다. [2015년 8월 23일 연중 제21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22)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10)

 

 

차가운 겨울, 계곡의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흐르고 마침내 봄이 오듯 그리스도교는 이제 결정적 전환점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추위에 온전히 얼어붙지 않고 그 흐름을 멈추지 않은 공이 잊혀져서는 안되지만, 이 전환은 봄의 태양과 소나기보다도 어쩌면 더 강력하고 격렬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교회가 박해시기에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보다도 더 큰 도전이 되는 상황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오늘부터는 그 전환을 이룬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코스탄티노 황제와 그의 시대를 중심으로 교회의 극적인 변화, 그리스도교가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고, 국가 교회로의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는 시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에서 온전히 제거하고자 했던 황제들의 계속된 정책들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이미 살펴 본 것처럼 311년이 되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의 칙령이 반포되는데 이것은 당시 로마를 분할 통치하던 4명 황제의(Galerio, Massimino Daia, Costantino e Licinio) 동의 하에 갈레리오의 이름으로 선포된 것이었고, 이것은 몇 년 후 근본적 정치적 전환을 만들어 내게 합니다. 갈레리오 황제에 의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공식적 관용의 선포는 이제 코스탄티노(Costantino, 306-337)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가 제국에서 하나의 종교로 인정받게 되고 다른 종교와 같은 권한을 허락받게 됩니다.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교에 특혜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4세기 말이 되면 그리스도교는 놀랍게도 종교들 중에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는 국가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특히 테오도시오 황제와 주스티니아노 황제의 시대를 거치며) 주목할 점은 이런 과정이 교회가 이뤄 냈다기보다는 국가에 의해서 지휘되었고, 정치적, 종교적인 법률들을 통해서 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교회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306년부터 코스탄티노는 로마 서쪽 지역의(Gallia e Britannia) 황제였습니다. 312년에 그의 일생의 라이벌인 마센지오(Massenzio)에 승리하면서, 소위 말하는 로마 부근의 밀비오(MiIvio)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그는 명실상부 로마를 포함한 서로마의 통치자가 되는데, 코스탄티노는 이 사건을 자기 일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이해합니다.

당시 로마적 종교적 개념에 따라 생각할 때 당연한 것이기도 한 정치적 선전(propaganda) 방법 중에 하나가, 이런 정치 군사적 성공이 세상을 다스릴 통치자로 자기를 선택한 신적인 존재의 개입이라는 선전이었습니다. 반면에 고대 종교적 개념에 살던 백성들 편에서도 자신의 통치자에게 그런 표징을 원하였던 것입니다. 코스탄티노가 이 밀비오 전투 이전에 보게 된 환시는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었고, 이것이 그가 그리스도교에 결정적 호의를 갖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코스탄티노에게 중요했던 밀비오 전투는 전쟁의 초기만 해도 그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는데, 황제는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심볼인 태양과 십자가를 새기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그는 그리스도교에 정치적 호의의 길을 열어젖히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정치 종교적 전환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었지만, 코스탄티노는 디오클레찌아노 황제의 정치와 종교에 관한 생각들을 확대해 왔고 그것을 이제 공식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앞선 황제들이 했던 것처럼 정권을 오르는데 이런 신적인 개입의 후광을 입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역사가 마센지오와의 전투을 앞두고 본 환시의 결과라는 것을 소개하는데 지치지 않았습니다. [2015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23)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11)

 

 

오늘은 코스탄티노가 이런 정치 종교적 전환을 가져오게 된 좀 더 근본적인 이유들을 살펴볼까 합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서 언급되긴 하였지만 좀 더 여러 측면에서 이런 전환을 들여다 봅니다. 


코스탄티노란 인물은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그의 드라마틱한 승리의 에피소드는 그의 성공의 시작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편에서 이 모든 전환은 코스탄티노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상들의 틈에 끼여 살던 이방 황제가 신적인 것을 염원하여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께로 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리스도교에 반하는 모든 탄압들을 끝맺고, 스스로를 역사와 세상을 위한 복음을 전할, 진리의 도구로 받아들였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조금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역사적으로 코스탄티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표징들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새로운 신에게 귀의하였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어의 유희처럼 보이지만 작은 차이가 있습니다. 코스탄티노는 그가 그리스도교에 호의를 베풀기로 결정하기 오래전부터 유일신 신앙에로 향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는 것,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신은 ‘승리의 태양의 신’(SolInvictus)였다는 추론으로 왜냐면 그는 그 신을 화폐에 그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환시의 사건 이후, 에우세비오에 따르면(코스탄티노의 생애 1장 28) 이 태양의 신의 환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합되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코스탄티노는 쉽게 말하면 자기의 신 개념을 버리지 않고, ‘그가 실천하던 로마의 종교 예식 안에 그리스도교를 이식하고자 했다’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그리스도교인들의 하느님이 그가 숭배하는 신성과 합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코스탄티노의 비젼 안에서 국가는 하나의 종교를 필요 했는데, 그것은 하나의 군주를 지지하는 그래서 황제 절대주의적 정치 체제를 재 생산할 수 있는 그런 종교를 원하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정치 종교적, 보편주의의 질서의 개념 안에서 유일한 하느님은 하나의 통치자를 갖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의 황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코스탄티노의 비판적 생각에 따라 그는 그리스도교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코스탄티노가 순수히 정치적 계산으로 아니면 종교적 확신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오늘날 까지 딜레마입니다. 그와 로마의 종교적 개념과 국가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13년 코스탄티노는 리치니오(Licinio)와 밀라노에서 칙령을 반포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제 로마 전역에 알려지게 되고, 내용은 ‘그리스도교가 이제 다른 종교들과 꼭 같은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마지막 라이벌 리치니오를 무찌르고 324년 드디어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의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런 정치 종교적 전환은 로마 전역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렇다고, 정치 종교적 관용이 그리스도에게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니었고, 고대의 모든 종교, 유대 종교에게도 적용되는 관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속된 그리스도교화의 충동은 법률과 포교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신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고대의 정치적인 신심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는 일찌기 세례에 이르지 못하고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세례를 받게 되는 점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제 그리스도교가 다른 이방인과 같은 대우를 획득했지만, 로마 황제들이 의미하는 로마 종교 예식은 오직 그리스도교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제 국가의 박해를 받는 종교에서 보호를 받는 종교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체사레아의 주교 에우세비오(Eusebio di Cesarea)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역사적 인도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2015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24)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12) 국가 교회로의 성장

 

 

앞서도 살폈듯이 코스탄티노 황제에 의해서 베풀어진 호의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방인들과 정치적으로 동등한 권한이 주어졌음을 의미하였다면, 그의 뒤를 잇는 황제들은 좀 더 결정적인 방법으로 교회에 호의를 베풀게 됩니다. 그의 후계자들은 이제 그리스도교에게 다른 종교 예식보다 우월한 지위를 허락하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가 호의로 얻게 된 자유만큼 그리스도교가 황제들의 권한 아래 놓이게 됨을 의미하였고, 황제들의 관심에 따라서는 더 큰 통제를 받게 될 운명을, 즉 ‘통치의 도구’가 됨을 의미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교에 대한 호의는 코스탄티노의 아들, 코스탄죠 2세(Costanzo II)와 이후 4세기의 황제들에 의해서 정치적인 방법과 법적인 강제, 즉 타종교에 관한 비관용의 방향으로 진행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은 이방 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겐, 그들의 종교적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이 됨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리스도교에게는 국가 체계 안에서 국가 교회로의 성장이 완성되어 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성장의 그늘은 바로 그리스도교가 국가라는 체계 앞에서 자유와 자율을 잃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이해하기엔 생소하지만, 국가는 이제 종교적 이단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정치 종교적 통치 차원’에서 체제에 혼란을 일으키는 행위로 엄하게 다스리게 됩니다.

4세기 그리스도교에 대한 호의의 절정은 바로 테오도시오 황제(Teodosio I, 379-395) 시대입니다. 테오도시오 황제 치하에서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국가 교회’의 지위를 부여받습니다. 황제는 380년 2월 28일 칙령을 통해서, 제국의 모든 백성들은 그리스도교로 귀의할 것을 명령합니다(이제 이방 종교는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칙령은 아주 세부적으로 로마의 다마소 주교(Damaso di Roma)와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 주교(Pietro di Alessandria)의 신앙에로, 즉 ‘니체아 신경’에로 귀의 할 것을 명령합니다(테오도시오 칙령 5장 8.3).

이런 규정은 교회적 정치에 있어서, 황제 교황주의(Cesaropapismo)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황제가 종교적인 영역의 법령 선포에 있어서, 주교와 시노드의 동의 없이 법령을 선포함을 의미합니다. 국가와 황제는 그리스도교가 제국 내에서 항상 준수되는 종교로서, 국가의 신적 예식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회 통합의 제공자로서 기능하도록 노력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황제가 이제 종교적 부문에서도 독점적으로(교의적으로 혼란스런 시대에) 중대한 신앙 고백을 결정하고 그에 반하는 이들을 국가의 권한으로 이단으로 규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교회가 국가 종교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인 새로운 환경의 결과였고, 국가와 교회간에 다투어야 할 부분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부분에서 동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유스티니아노(Giustiniano I, 527-565) 황제 재위시절에, 이런 개념들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법령으로 선포됩니다. 황제에게 있어서 정치와 행정, 그리고 신학이 다른 영역이 아니었고, 이런 연유로 그는 제국의 건설을 위해 전쟁을 지원했고, 차지한 곳의 주민들을 흩어버리고, 그들의 이방 종교들을 이단으로 박해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아테네에 있었던 이교의 대학이 529년 문을 닫게 되었고, 그는 교의적인 문서들을 작성하고, 공의회를 소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황제는 법령 안에서 절대적인 법률적 권한을 가진 존재로서,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예식과 성직자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여러 상황에 대해서도 절대적 권한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자유를 획득하고,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는 호의를 통해 성장하게 되었지만, 로마 제국이란 체계 속의 한 부분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의 구조와 공적인 서열에서 황제의 법률에 속하게 되었고, 황제는 법적인 권한으로 교회에 경제적 지원과 후원을 하는 구조를 완성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2015년 9월 27일 한가위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25)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13) 그리스도교 황제와 이방인

 

 

코스탄티노 황제 치하의 교회를 생각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교인이 수적(數的)으로 열세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후계자들이 그리스도교를 통하여 제국의 단일화를 이루고자 시도했고, 그러므로 이런 정치적 의도와 제안은 쉽게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그들의 전통과 종교에 충실한 이들이 공고한 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어떤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들이었고 고대 로마의 전통에 충실하게 남아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옛 종교적 관념으로 그리스도교를 완고하게 비판하였으며, 그들의 이런 ‘입장 고수’는 코스탄티노 황제에 의한 대 전환에서 정치적 재앙으로 되돌려지고 말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쥴리아노(Giuliano 361-363) 황제의 개인적인 보수적 반동으로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였지만, 이방인들이 정치적 권력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황제 쥴리아노는 여러 의도가 있었겠지만, 특히 자기 힘의 과시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고 이방 종교성에 생명을 되찾아 주고자 하였습니다.

이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에 이방인들은 흥분 하였고, 이 상황에 대한 방해와 반작용도 거세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일화가 유명한 ‘승리의 제단’(altare della vittoria)을 두고 벌어진 분쟁입니다. 이 제단은 로마의 원로원 통치에 대한 오랜 믿음을 둔 제단이었는데, 382년 그라찌아노(Graziano, 367-383) 황제가 원로원의 방에 위치했던 이 제단을 ‘승리의 여신’ 동상 앞으로 옮겨, 모든 회의에 앞서 희생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이 제단은 그처럼 종교적 심볼이었으나, 코스탄죠 2세(Costanzo II)가 이것을 제거하게 됩니다. 황제 쥴리아노는 이방 전통으로 회귀를 위해, 이 제단을 다시 원래대로 복귀 시킬 것을 계획합니다. 황제는 382년과 384년, 기민하게 원로원의 도움으로 이것을 재 건립 하고자했으나, 로마의 주교 다마소와 당시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Ambrosio di Milano)가 황제에게 참된 종교에 대한 통치자의 의무를 주장하며, 이 제단 건설을 막아섭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더욱 이 새로운 종교에 대한 비관용적 태도를 갖게 됩니다.

코스탄티노의 후계자들은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법적인 지원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비 그리스도교인에게는 탄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희생 제사와 성화 예절이 금지되고, 이방 신전들이 폐쇄되었고, 이방 종교의 성직자들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이 중지 되었으며,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해지던 억압들이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앞서 쥴리아노의 경우에서 보듯이 모든 황제들이 같은 정치적 입장을 실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 황제들의 정치적 계산이 억압의 길과 관용의 길을 결정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제국의 법률 들은 그것들의 효과 즉 종교적 적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통제의 효과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의해야 할 것은, 제국 정치의 비관용이, 마치 그리스도교가 이런 비관용적인 국가를 지지하는 것처럼 비춰지게 되었는데,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 본질과는 무관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황제들의 이런 정치적 선택은 이방 종교인들편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공격적이게 했으며, 이것은 후기 고대 사회에 그리스도교가 비관용적 종교라는 이미지를 갖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2015년 10월 4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26)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14) 그리스도인 황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인 황제들의 교회를 통한 제국의 단일화라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제국 교회화 하는 여정에서 교회와 국가는 이제껏 경험 해보지 못한 새로운 문제들에 봉착하게 됩니다. 실상 황제들은 고대 로마 전통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교도를 이해했기에, 그들의 정책들은 그리스도교적 개념과는 이질적인 결과들을 만들어 냈고, 이것이 양자 갈등의 근본 원인이 되었습니다.


황제는 교회 내의 분쟁으로 제국이 분열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개입해야 했고, 교회는 국가라는 절대권력 앞에서 자신들의 독립성을 지켜내야 하는 갈등이 연출 되었던 것입니다. 실상 갈등은 서로의 관심과 관점의 차에 기인합니다. 이 분열에 있어서, 교회는 교회들 간의 ‘교의적 일치’가 중요했던 반면, 국가는 정치 종교적 ‘단일성’만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입장차를 극복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황제란 존재가 교황도 주교도 아니었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 주교의 권위를 뛰어넘는 권한을 가진 자로 여기기도 했고, 또 황제의 독립적 권한이 교회 내부의 결정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영향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과 형식을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실제 교회 내부의 문제에 있어서 황제와 주교의 법적인 권한에 대한 갈등의 계기가 마련되는데 그 도화선이 된 것이 도나토(Donato)에 의한 교회 분열이었습니다. 황제에게 도나토의 사건은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사건이었고, 그리스도교가 그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황제는 국가적 단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도나티스트들(Donatisti : 도나토를 추종하는 자들)과의 분쟁에 개입해야 했고, 교회 당국자들은 이 분쟁을 교회의 규율과 종교적 거룩함에 관한 ‘교회 고유의 분쟁’이라 여겼기에 갈등이 불가피 했던 것이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카르타고에서 ‘체칠리아노’(Ceciliano) 주교 서품식이(311 혹은 312년) 거행 되었고 대부분 지역 교회에서는 그의 서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나토와 엄격 주의자들에 따르면, 이 서품이 앞퉁가의 주교 ‘펠리체’(Felice di Aptunga)에 의해서 거행 되었는데, 그 주교가 박해에 못이겨 성경과 교회의 서적을 박해자들에게 넘겨준(Traditor) 유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서품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들 주장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분쟁은 북부 아프리카에서 특히 격렬 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이 정치, 사회, 종교적 그리고 종족적으로 혼합된 지역이었기에 더욱 그러했고, 결과 교회는 크게 두 개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코스탄티노는 애초부터 체칠리아노 주교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교회에 합의한 특권을 유보했습니다. 도나티스트들도 처음엔 일치와 화해를 위한 노력에 동참하였습니다. 황제는 로마의 밀지아데 주교(Milziade di Roma)의 주재 하에 갈리아의 3명의 주교에게 중재를 맡겼는데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도나티스트들은 결정에 불복합니다. 그러자 코스탄티노는 더 방대한 법정을 열게 되는데, 그것이 314년의 아를르(Arles) 시노드 입니다. 이 시노드는 모든 서방 교회의 대표들이 재판관의 자격으로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평화적으로 재건 하겠다’는 황제의 희망은 이뤄지지 못하였습니다.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결과에 도나티스트들은 저항하였고, 황제는 이제 이런 ‘분열의 극복’이 자신의 정치적 임무라고 생각하고, 물리력을 행사하여 도나티스트들의 교회를 탄압하게 됩니다. 그러자 도나티스트들은 자신들은 시대의 순교자들이요, 순교자들에게 충실한 교회이며, 참된 진리의 교회라고 천명하며, 자신들의 교회가 순교자들의 거룩함을 간직한 이유로 황제로부터 박해 당하고 있다고 선전하게 됩니다. 이제 주교 서품을 둘러싼 교회의 분열이 제국의 분열이라는 상황으로 변해버리게 된 것입니다. [2015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27)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15)

 

 

지난 호에 살펴본 것처럼, 카르타고의 주교 서품으로 시작된 교회의 분열이 로마 제국의 단일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자 황제는 서둘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교 내부의 ‘순수 종교적 문제’가 황제에게는 중대한 ‘정치적 사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분열의 봉합을 위한 과정에서 두 가지를 눈여겨 살펴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황제가 물리력을 통한 개입으로 도나티스트들이 법적이고 현실적인 억압을 당해야 했는데, 이것은 ‘교회적 분란’에 ‘국가의 개입’이라는 비호의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도나티스트들이 저항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저항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과연 “황제가 교회에 대하여 어떤 권한을 갖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이 비극적 상황의 원인 제공자가 황제라는 지적이었으며, 실제 이런 일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자주 되풀이될 운명이었습니다.

실상 정치로부터 이득을 끌어내는 이들의 편에서 보면, 국가의 개입은 정당하거나 혹은 견딜만한 것인 반면, 불이익을 당하는 이들 편에서 보면, ‘교회 내부적 문제’에 대한 ‘황제 개입’은 그 적법성에 의문을 갖게 하였습니다. 분명한 점은 이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을 황제도, 교회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고, 이 점은 계속해서 갈등과 조정의 여지를 두게 됨을 의미하였습니다.

둘째는 도나티스들의 주장과는 달리 황제와 그리스도교의 주교들이 이런 상황을 수긍했다는 점입니다. 코스탄티노의 입장에선 북아프리카가 도나티스트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동요된 상황이 공공질서 유지라는 측면에서. 종교의 영역에서 단일성을 잃는 것처럼 판단되었기에 개입은 그에게 하나의 의무였던 것입니다. 코스탄티노의 입장에서 볼 때, 교회는 제국의 종교라는 점에서 적어도 시대의 성공을 보장하고 공헌해야 했는데, 오히려 교회가 제국의 평화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의 중재는 법적인 권한과 로마 정치 제도의 틀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종교적 규정에 따라, 로마 법이 제공하는 황제적 역할과 임무가 코스탄티노를 통해 실현됨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합의와 동의는 그들에게 이득을 주거나 혹은 호의를 줄 때 까지만 지속되었다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도나토에 의해서 촉발된 초유의 교회 분열이라는 상황은 교회와 황제 모두에게 자신들의 권한과 임무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와 황제의 관계는 이 사태를 거치면서도 완벽하게 구별 되지도, 정리 되지도, 못하였습니다. 코스탄티노 황제도 실제로는 이 문제를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면서 마침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분열은 예기치 않은 5세기에 이뤄진 반달족의 침입으로, 북 아프리카의 교회가 파괴 되면서,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 지역에서 쫓겨나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리스도교 황제들의 태도는 관용과 억압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코스탄티노 시대의 교회적 정치는 “아리아니즘에 대한 분쟁”으로 또 한 번 제국의 단일성의 기초로 선택한 종교인 그리스도교로 부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이 아리아니즘 분쟁은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교의적 논쟁이었으며, 특히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다시 말하면 삼위의 문제를 다루는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2015년 10월 18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28)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16)

 

 

오늘도 계속해서 코스탄티노 황제 이후 국가와 교회의 갈등을 살펴보는데, 이번 호에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Alessandro di Alessandria)와 바우칼리스의 사제 아리오(Ario, prete di Baukalis) 사이에 발생한 논쟁과 여기에 개입하는 황제의 이야기입니다. 이 논쟁의 신학적 문제는 다음에 다시 다루게 될 것이기에, 간단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논쟁이라고만 언급하겠습니다. 318년에 발생한 이 논쟁은 빠르게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그리스도교 백성들을 깊은 곳에서부터 갈라놓았고, 로마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코스탄티노의 입장에서는 방금 통일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그 제국이 갈라지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황제의 관심은 오로지 논쟁이 가져올 비극적인 결과인 제국의 분열이었기에, 논쟁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간과한 채로 성급하게 일치를 이루려고 합니다. 하지만 섣부른 개입과 교의적인 단일화의 강요는 오히려 교회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사실 교회나 황제 모두 하나(단일화)가 되기를 원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와 내용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갖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황제에게 있어서는 로마제국의 종교적 단일성의 보존과 유지가 ‘교의적인 명료화’보다 더 중요한 문제인 반면, 이 논쟁에 열중한 그리스도교와 신학자들은 올바른 ‘신앙 고백’을 정립하여 이단을 제외하면서 교회의 단일화를 다시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황제는 이 분쟁에 서둘러 개입하지만 반대 집단의 축출을 압박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제국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는 다른 길, 즉 주교들의 시노드를 선택하게 됩니다. 황제는 325년, 이 시노드를 자신의 거주지에서 가까운 니체아(Nicea)에서 개최합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동등하게 참여하지 못하였고, 서방에서는 5명의 대표만이 참석하게 됩니다. 황제의 일치를 위한 굳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시노드는 한 분파의 다른 분파에 대한 승리로 귀결되어 하나의 정식(신앙고백)만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황제는 이 ‘니체아 신경’의 고백을 유효화합니다.

코스탄티노 황제는 또한 자기 권좌의 희년을 경축하기 위한 만찬 자리에 주교들을 초대합니다. 황제는 주교들과 함께 식사했고, 이 특별한 자리에 초대된 주교들은 황제의 의도와 청원에 동의합니다. 참석한 모든 주교들이 황제의 원의에 따라 일치를 이룰 것을 다짐하였고, 이로써 제국내의 종교적 불협화음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이 동의는 하느님의 종인 주교들이, 모든 신도를 ‘하나의 백성’으로 묶어 제국의 평화 건설에 이바지하는 황제의 협조자로 자신들을 자리매김 하였던 것입니다. 황제와 교회 모두 이제 정치적 행위의 주체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봉합으로 일치와 평화를 이루려던 황제의 생각은 하나의 꿈이었습니다. 니체아 공의회는 교회 내부에서 ‘믿음의 고백’을 하나로 하기 위한 싸움의 끝이 아니었고, 결국 제국의 평화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아리아니즘(Arianesimo)과 도나티스티(Donatisti)들과의 논쟁을 통해 새로운 점을 발견하는데, 바로 교회의 내부의 문제들, 교회의 규율, 교의 그리고 일치에 관계된 것들이 ‘공적 정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로인해 교회는 내부의 문제 해결에 있어서 자율권을 갖지 못하고 소외됩니다. 반면에 국가와 사회는 강하게 이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고, 황제는 아주 능동적인 주체로 참여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제 자율권을 잃고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영향들에 예속되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가 이 상황을 자각하게 되면서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는 다시 한 번 격랑 속으로 휩쓸려 가게 됩니다. [2015년 10월 25일 연중 제30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29)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17)

 

 

마치 음악 기호의 도돌이표처럼 지루하게 반복되는 국가 권력과 교회와의 갈등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준비란? 그 동안 황제권 아래 ‘협조자’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던 주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새로운 상황으로의 변화였습니다. 코스탄티노 황제 이후에도 황제들의 종교 문제에 대한 정치적 개입은 계속 되었고, 그 후임자들의 정치적 의도 또한 코스탄티노에게서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동방에서 코스탄티노의 아들인 코스탄죠 2세(Costanzo II, 337-361)는 당시에 더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아리오(Ario) 신학에 호의를 갖고 삼위일체 신앙을 둘러싼 논쟁에 개입하게 되고, 그는 공적으로 아리오를 지지하였습니다. 이것은 니체아 공의회를 거스르는 결정이었으며, 니체아 공의회의 신앙 고백에 충실하게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급기야 니체아 공의회를 따르던 서방의 주교들이 이 혼란을 수습하고자 사르디카(Sardica)에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공의회의 기획자들은 교회의 단일화를 진전시키고자 동방의 주교들도 초청하였습니다. 이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이 황제에게 짧은 서신을 준비하는데 그것은 달라진 교회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서신에서 주교들은 “교회의 내부적 삶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황제의 권위를 통한 신하들의 개입을 중단”하기를 청하였고, 나아가 “황제의 관리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임무에 대해서만 충실하여, 교회와 국가의 공적 영역이 분리되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공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청하는 몇 가지 중에 하나였는데, 이것은 국가와 종교의 온전한 분리의 의미라기보다는 황제가 정통성을 갖지 못한 아리오에 호의적인데 대하여, 국가가 확고하게 다른 편을 지지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써 국가의 비 공정성이 자제되기를 기대하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코스탄죠 2세는 353년 경 부터 절대 군주로 등극하자 믿음의 신조를 하나로 통일하고 제국의 단일화를 꾀하고자 손쉽게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아리오를 선택합니다. 그는 제국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의 심볼로 아리오를 선택하고 몇몇 시노드들, 353년의 아를르(Arles)와 355년의 밀라노(Milano), 들을 통해서 니체아와 아타나시오(Atanasio - 아리오 반대편 신학적 대표자)에 충실하게 남아있던 서방 주교들의 서명 용지를 찢어버리고 맙니다. 아주 비정상적이고 괴팍한 권력의 남용 이었으며 이 결정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주교들은 귀양에 처해지고, 자신에게 충실한 이들이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코스탄죠는 교회가 바랐던 권력의 전통적인 개념을 실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 황제에 의한 부정적인 경험들은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교회 안에서 황제의 권한과 임무에 대한 제한과 규정에 대한 논의를 싹트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는 황제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에 놓인 동방 교회와 멀리 떨어진 서방 교회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동방 지역의 주교들은 간단히 말하면 국가의 정치 교회적 방향에 더욱 순응하는 길을, 황제가 가진 권위의 개념을 받아들이기는 길로 나아갔고, 아타나시오와 바실리오로 대표되는 서방 교회는 더욱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2015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30) 사회, 국가, 그리스도교 (18)

 

 

지루한 다툼과 갈등도 이제 서서히 종착지를 향해 달려갑니다. 서방은, 서방 가톨릭적인 특성을 완성해 나아가고, 동방은 이미 지녀온 모습을 체화하는 시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오늘은 서방 교회 안에서 싹텄던, 교회 내부 문제에 있어서 ‘황제의 권한과 한계’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현실화 되어가는지를 사건과 인물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주요 인물을 꼽으라면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Ambrogio di Milano.374-397)와 아우구스티노(Agostino di Ippona, 354-430)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발렌티노 2세 황제가(Valentino II, 383-392) 밀라노를 포함한 모든 도시의 가톨릭 교회를 아리오 신도들에게 되돌리려고 시도합니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이에 반하여 “신앙에 대한 것들은 황제가 아니라 주교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고 항의하는 편지를 썼고(편지 21) 이어서 386년 황제의 군대가 그의 성당을 포위하였을 때는 격정적인 연설을 통해 “황제는 교회 안에 있지 교회 위에 있지 않다”고 외칩니다. 이것이 암브로시오 주교가 생각했던 교회와 황제와의 관계 정립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388년 테오도시오 1세가(Teodosio I, 379-395) 칼리니콘(kallinikon sul Eufrate) 지역의 주교에게 그 지역의 유태인 시나고가가 화재로 소실된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므로 그 주교에게 보상을 책임 지웠습니다. 그러자 암브로시오 주교는 그 결정은 자체로 잘못되었으며, 종교 간의 다툼은 진실과 오류를 동시에 갖기에 이런 경우 교회가 임무와 자격을 갖고 결정해야 한다면서 황제가 명령을 철회하기를 압박합니다.

나아가 390년 테살로니카의 한 행정관이 피살되었을 때 황제가 군대를 보내 많은 사람을 처형시키자, 주교는 황제에게 항의하며 ‘황제의 죄에 대한 보속’을 명령하며 “교회 안에서 황제는 평신도 외에 아무것도 아니므로 황제는 교회의 규율에 따라, 다른 그리스도인처럼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황제는 결국 암브로시오의 명령에 순종하여 보속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본, 암브로시오 주교의 생각은, 교회가 황제와의 관계 안에서 독립적인 영역을 갖기를 원하였던 것이고, 이것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면 사제권과(Sacerdotium) 황제권(Imperium)의 엄격한 분리를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방 교회의 특징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이런 서방 교회적 특성은 아우구스티노 주교에 이르면 중세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노에게 있어서 정치적 명령은 임시적 혹은 일회적인 것들에 불과하였습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선포하고 승리하게 하도록 직접적으로 불리운 것이 아니라, 국가의 첫째 임무는 세속 삶에서의 안전과 제도 등을 살피는 것이며, 교회에 관한 공적인 도움은 교회에 의해서 동의되어야지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에 이르면, 황제의 권위에 대한 생각은 이제 ‘세속화’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는 지상적이며 시간적 현실일 뿐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세상과 역사는 하느님의 나라(Civitas Dei)와 지상의 나라(Terrena Civitas o civitas diaboli)로 나누어지고, 이것이 반드시 국가와 교회라는 개념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영역은 세상의 끝나기 전까지 실상 온전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교회와 국가는 권력과 거룩함의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묘사되기에 이릅니다.

또 황제 젤라시오(Gelasio, 492-496)에 이르면 이런 분리가 법적인 영역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렇게 서방은 독립적인 경향이 강화되어갔고, 동방은 황제가 그리스도교 제국의 최고 권위자라는 자격으로 교회가 황제 밑에 충실하게 남게 됩니다. [2015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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