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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광복 70년 분단 70년7: 한국의 교계제도 설정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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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17 ㅣ No.720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7) 한국의 교계제도 설정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년, 한국 교회의 눈부신 성장 신화 시작되다

 

 

1962년 6월 29일 명동성당 들머리에 설치된 교계제도 설정 경축 현판 사이로 드나드는 신자들의 얼굴은 기쁜 기색이 역력하다. 출처=「노기남」(한국교회사연구소 펴냄)


1962년 6월 29일. 서울 명동대성당 입구에 경축 현판이 설치됐다. 이날 오후 4시 명동대성당에서 ‘한국 천주교회 교계제도 설정 공포식’을 거행한다는 내용이었다.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지 131년 만에 정식 교구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는 경축 현판 사이로 드나드는 신자들의 얼굴엔 기쁨이 넘쳐났다.

이날 전례는 석 달 전인 3월 10일 자로 교황 요한 23세가 ‘한국에 교계제도를 설정한다’는 내용을 담은 교서 「복음의 비옥한 씨」(Fertile Evangelii semen)를 반포한 데 따른 교황교서 시행 예식이었다.

공포식에선 서울ㆍ대구ㆍ광주대목구가 대교구로 승격돼 서울 노기남 대주교와 대구 서정길 대주교, 광주 현 하롤드 대주교가 주한 교황사절 직무대리 찰스 버튼 무튼 몬시뇰에게 서칙서와 팔리움(Pallium)을 받았다. 이어 노 대주교의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됐다. 무튼 몬시뇰은 제대 왼쪽에서 목장을 쥔 노 대주교의 손을 잡고 대주교좌로 이끌었다. 이는 교계제도 설정 공포식이 거행된 직후에 처음으로 노 대주교가 대주교좌에 착좌하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팔리움 수여와 함께 이날 전례의 절정이었다.

팔리움을 받은 세 대주교. 왼쪽부터 광주 현 하롤드 대주교, 서울 노기남 대주교, 대구 서정길 대주교. 출처=「노기남」(한국교회사연구소 펴냄)


이날 교계제도 설정으로 한국 교회는 11개 대목구(북한 평양ㆍ함흥 대목구 포함)가 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서울ㆍ대구ㆍ광주 등 3개 관구가 설정됐다. 이후로 7개 교구가 새로 설정되지만, 3개 관구에 18개 교구(평양ㆍ함흥교구 포함), 1개 자치수도원구(덕원자치수도원구) 체제로 이루어진 한국 교회의 대체적인 틀은 이때 갖춰졌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그간 교황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선교지 교회’에서 벗어나 보편 교회 안에서 개별 교회로서의 온전한 면모를 갖추게 됐다. 교회법적 측면에서 보면, 교계제도 설정은 한국 교회의 교구들이 온전한 개별 교회의 형태를 갖추게 됐을 뿐 아니라 개별 교회의 연합체인 관구를 형성해 교구 간 상호 협력과 공동 사목을 증진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 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던 1962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막한 역사적인 해이기도 하다. 그해 10월 11일 개막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한국 교회에서는 노기남 대주교를 포함해 9명의 주교가 참석했다. 1965년 12월 8일까지 만 3년 이상 이어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의 진리들을 현대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으로 선포했다. ‘아조르나멘토’라는 표현으로 쇄신과 개혁을 통해 시대에 적응할 것을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특히 각 민족의 언어로 전례를 거행하는 쇄신과 종교 간 대화, 세상을 향한 교회의 개방, 평신도의 사도직 활동 권고 등을 통해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신앙을 구현하고자 했다. 한국 교회와 사회를 포함한 한국의 현대사는 지난 50여 년간 공의회의 직ㆍ간접적 영향권 안에서 있었던 셈이다.

1962년 11월 9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로 참석한 한국 주교단이 교황 요한 23세를 특별알현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출처=노기남(한국교회사연구소 펴냄)


공의회가 일으킨 ‘쇄신과 적응’의 바람은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 교회에 불어왔다. 공의회가 남긴 4개 헌장과 9개 교령, 3개 선언문 등 총 16개 문헌은 전례나 신앙생활의 변화뿐 아니라 교회의 울타리에 안주해 있던 하느님 백성에게 세상으로 나갈 것을 독려했다. 특히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신앙은 가톨릭 교회의 사회참여 활동의 바탕을 이뤄 공의회 이후 한국 교회엔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가 두드러졌고, 한국 교회의 성장을 이끌었다.

교계제도 설정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따라 한국 교회는 특히 질적, 양적 측면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룬다. 전국 교구장들은 1962년 9월 사단법인체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를 설립했으며, 교계제도 설정 이후로 7개 교구가 새로이 분할 설정됐다. 1969년엔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가 한국 교회의 첫 추기경으로 임명된 이후 1970∼1980년대 들어 한국 교회의 제도적 발전과 성장은 확연히 탄력을 받는다.

교세 성장도 그 영향권에 놓여 있었다. 교계제도가 설정된 1962년에 53만여 명에 그쳤던 신자 수는 53년 만인 2014년 말 현재 556만 971명으로 10배 이상 늘어났다. 또한, 1965년 1월부터는 ‘우리말 미사’가 봉헌됐으며, 1966년 「미사통상문」을 펴낸 것을 시작으로, 1968년엔 박해 시대 기도서 「천주 성교 공과」를 현대화해 「가톨릭 기도서」를 발간했고, 1977년 「공동번역 성서」를, 2005년엔 한국 천주교회만의 신ㆍ구약 합본 「성경」을 완역하는 등 토착화의 진전과 함께 교회 또한 급속한 발전을 이뤘다. 또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계기로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전환, 성숙 단계에 접어든다. 2002년 6월엔 한국 지역 교회법을 승인받아 교계제도 설정 40년 만에 완전한 형태의 지역 교회법을 갖췄다. 이 같은 한국 교회의 발전은 교계제도의 설정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의 실천에 따른 결실이었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16일, 오세택 기자]



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정하권 몬시뇰


“교회 쇄신과 복음화 깊이 고민해야”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을 구령으로 인도하는 게 다 교계제도 안에서 이뤄지기에 박해시대 교회도 준개별교회지만, 교계제도의 설정으로 온전한 개별교회가 된 것”이라고 말하는 정하권 몬시뇰. 오세택 기자


“교계제도 설정은 교회법적 측면만이 아니라 교리와 성사적인 측면까지 함축합니다. 법률적이면서 교리적인 것이고 동시에 성사적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정하권 몬시뇰은 1962년 교계제도 설정 당시 스위스 프리부르그대학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프랑스 소르본대학(파리7대학)에서 막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교의 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참이었다.

정 몬시뇰은 그래서 “우리나라에 교계제도가 설정됐다는 데 대해 특별한 감회는 없었다”면서도 “다만 전쟁 중이던 1951년 9월 15일에 대구대목구에서 사제품을 받았는데, 유학 전에 사목했던 창녕본당이 대구대목구에서 부산대목구로 소속이 바뀌면서 부산대목구 사제가 됐고, 유학이 끝날 때쯤 마산교구가 생기면서 나도 마산교구로 적이 바뀐 게 더 기억에 많이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더군다나 같은 날 함께 사제품을 받은 김수환 추기경께서 초대 마산교구장 주교로 오시게 되면서 오늘부터 나하고 일하자는 서한을 보내셨는데, 인연도 그런 인연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정 몬시뇰은 “교계제도 설정은 선교 지역의 고유한 목자인 교황을 대리해 대목구장이 통치권(재치권)을 갖는 준개별 교회에서 ‘온전한 개별 교회’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온전한 개별 교회란 교회의 본질적 요소인 그리스도의 말씀과 구원의 성사가 온전히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에 교계제도 설정은 교리와 성사, 교회법이라는 세 요소를 포괄한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정 몬시뇰은 이어 “정식 교계제도의 설정은 한국의 근ㆍ현대사 안에서 한국 교회의 외적 성장과 발전의 한 단면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이제 교회는 교회의 제도적 틀이 지향하는 성령의 은사를 어떻게 실현하며 교회의 쇄신과 복음화를 이뤄나갈 것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정 몬시뇰은 그러면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은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강조해온 ‘제도로서의 교회’론을 넘어서는 것”이라며 “공의회는 하느님 백성을 교계적 위계 제도에 우선시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유학 뒤 마산교구 남성동본당에서 사목한 것을 제외하고는 30여 년간 줄곧 광주가톨릭대와 대구가톨릭대에서 후학을 길러낸 정 몬시뇰은 1994년 사목 일선에서 은퇴한 뒤 강연과 집필로 노후를 보내고 있다. 현재 그는 1976년에 펴낸 「교회의 쇄신」을 최근 용어로 다듬고 윤문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16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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