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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번수의의 신견록(身見錄) - 최초의 한문 유럽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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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16 ㅣ No.1541

번수의(樊守義)의 『신견록』(身見錄)

- 최초의 한문(漢文) 유럽여행기*

 

 

국문초록

 

오래전부터 중국 의례 논쟁에 관심을 가져온 필자는 중국 의례 논쟁을 신학과 전통의 100년 다툼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기존의 많은 부분의 자료들은 서양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의례 논쟁이거나 중국 내지에서 있었던 논쟁이 대부분이었다. 즉 신학에 대한 전통의 대응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주류였고, 대부분 자료 역시 서구 쪽의 시각으로 중국 의례 논쟁을 다루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중국 측 특히 강희제가 본 의례 논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관심의 촉발에서 특히 강희제의 중국 의례 논쟁 대한 관심과 해결 노력에 대해 살펴보던 중 『신견록』(身見錄)을 보게 되었다.

 

번수의가 작성한 이 『신견록』 의 가장 큰 의의는 아마도 중국 최초 중국인에 의해 한문으로 작성된 유럽 여행기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중국을 서양에 소개한 글은 있었으나, 중국인의 눈에 비친 서양을 한문으로 기록한 서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견록』 전체를 번역하여 그 내용을 살펴본 바로는 여행기로서는 나름대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중국 최초의 유럽 견문록인 이 『신견록』은 이홍장(李鴻章)이 청 황제의 특사로 유럽을 방문하고 돌아와 쓴 『이부상역빙구미기』(李傅相歷聘歐美記)보다도 200년이나 앞선 글이므로 학계에서 사료로서의 가치를 다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신견록』의 저자인 번수의에 대한 내용이다. 번수의의 고향인 강주에서 천주교 신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13.6%나 되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번수의가 강주의 선교사인 프로바나 신부의 복사를 담당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셋째로는 번수의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의의이다. 프로바나를 따라 북경에 들어와서는 천문생(天文生, 별자리를 관찰하는 요원, 청나라 때의 관직명)으로 근무했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넷째로는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해로를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견록』에서 번수의는 향신료의 산지인 서남아시아를 어떤 루트로 통과하여 지나갔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언급이 되어 있고, 특히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브라질의 바이아 즉 현재의 살바도르를 거쳐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해류와 바람 방향의 영향으로 희망봉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서부 해안을 따라 거슬러 올라갈 수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바이아의 중요성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다섯째로는 선진 유럽 문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당시 중국인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고,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로는 많은 연구자에게 도움을 주고자, 『신견록』 전문을 완역(전부 번역)하여 논문에 실었다.

 

이상으로 본 논문은 이전에 밝히지 못했던 부분을 밝히고 있다는데 그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앞으로 이를 바탕으로 좀 더 많은 부분의 사실을 밝혀내는데 좋은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Ⅰ. 들어가는 말

 

오래전부터 중국 의례 논쟁에 관심을 가져온 필자는 중국 의례 논쟁을 신학과 전통의 100년 다툼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기존의 많은 부분의 자료들은 서양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의례 논쟁이거나 중국 내지에서 있었던 논쟁이 대부분이었다. 즉 신학에 대한 전통의 대응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주류였고, 대부분 자료 역시 서구 쪽의 시각으로 중국 의례 논쟁을 다루는 것이었다.1) 그렇다면 중국 측 특히 강희제가 본 의례 논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관심의 촉발에서 특히 강희제의 중국 의례 논쟁 대한 관심과 해결 노력에 대해 살펴보던 중 『신견록』(身見錄)2)을 보게 되었다.

 

이 『신견록』이 저술되기까지의 과정은 의례논쟁 해결에 대한 강희제의 의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중의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 자료는 중국인에 의해 중문으로 작성된 최초의 유럽여행기라는데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먼저 『신견록』의 저자인 번수의(樊守義)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어떠한 곳인지, 어떠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다음으로 어떻게 서양 선교사와 접촉을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우선되어야겠고, 또 어떻게 의례논쟁 해결을 위해 강희제의 교황청 파견 특사로 임명이 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그러한 연후에 어떻게 해서 『신견록』이 저술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저술 경위에 대해 언급할 것이고, 아울러 『신견록』 원문 전체 내용도 번역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당시 어떤 경로로 중국에서 유럽을 갔는지, 또 어떠한 문제를 안고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을 밝히고자 한다.

 

강희제의 의례논쟁 해결을 위해 파견된 특사 일행의 중국인이 한문으로 작성한 최초의 유럽여행기인 『신견록』을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도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견록』 내용에 대한 몇 가지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이 『신견록』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도 밝히고자 시도했다. 이로써 의례논쟁을 다각도로 조망함으로써 의례논쟁의 본질을 더 명확히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Ⅱ. 『신견록』의 발견

 

『신견록』이란 예수회 선교사인 번수의가 강희제의 교황청 파견 특사의 일행으로 유럽을 가고 온 경위를 기록한 것으로 1707년부터 중국 광주로 돌아온 1719년까지 12년간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신견록』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36년 북해도서관(北海圖書館, 현재의 北京圖書館) 목록학자인 왕충민(王重民, 1903~1975)3)이 북평에서 『도서계간』(圖書季刊)을 출간할 때 「로마방서기」(羅馬訪書記)라는 글에서 『신견록』을 소개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1937년 스위스 프리브르(또는 프라이부르크, Freiburg)의 대학 교수였던 옌쭝린(閻宗臨)4)이 바티칸 교황청도서관에서 『명리탐』(名理探)5)이라는 책 뒤편에 꽃혀 있던 『신견록』 14쪽의 손으로 쓴 원고를 찾아내어 촬영한 것이 그 자료를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이 자료를 처음 보았을 때 수록되어 있던 탐방 지역의 묘사와 설명에 그 놀라움은 말할 수 없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촬영하여 1941년 『신견록교주』(身見錄校注)를 계림(桂林) 『소탕보』(掃蕩報)의 『문사지부간』(文史地副刊)에서 발표했다.6)

 

이후 팡하오(方豪) 신부는 바티칸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던 『명리탐』에 첨부되어 있던 『신견록』을 다시 확인하여, 자신의 저서인 『중서교통사』(中西交通史)에 수록했다.7) 본고는 팡하오 신부의 저서인 『중서교통사』안에 수록된 『신견록』의 내용을 저본으로 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겠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것과 관련된 논문은 발표된 바가 없다.

 

『신견록』이 저술된 때인 1720년에는 이미 1674년에는 페르비스트(南懷仁)에 의해 「곤여전도」(坤輿全圖)가 간행되어 중국에서도 세계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으나, 중국인이 직접 유럽을 방문해 유럽 각 나라의 문화와 생활상들을 친히 목도한 내용을 중국어로 작성한 『신견록』은 당시의 황제와 지식층에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본 논문을 쓰고 있을 때, 팡하오(方豪)의 『중서교통사』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8) 『신견록』 부분이 번역되어 있어, 필자의 번역 원문과 대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본 논문에 필요한 부분은 보충했고, 또 이미 번역된 역서의 일부 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신견록』을 보다 온전히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Ⅲ. 『신견록』 저술의 역사적 배경


1. 산서성 강주와 강주의 천주교

 

번수의(樊守義, Louis Fan, 1682. 6. 13~1753. 2. 28)는 1682년(강희 21) 산서성 평양현 강주(絳州)9)에서 태어났다.10) 번수의에 대한 자료는 대단히 한정되어 있고, 그러한 자료도 대부분은 2차 사료이다. 가장 확실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베이징의 선교사 묘지인 등공책란(滕公栅欗)에 있는 마테오 리치의 묘지 옆의 그의 묘비에 적힌 내용으로 가장 확실한 근거는 번수의의 이름은 수의(守義)이며, 그 스스로는 시의(洔義), 응오(應梧)라고도 했으며, 또 수리(守利) 혹은 수화(守和)라고도 불렸으며, 자는 이여(利如)11)로 산서성 평양(平陽) 강주(降州)에서 1682년 1월 13일에 태어났다는 것이다.12) 번수의가 태어난 강주라는 곳은 이미 천주교가 아주 성행했던 지역이었으므로 태어나면서부터 천주교를 접했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특히 번수의가 어린나이에 당시 강주지역의 선교를 담당하던 프로바나(Antonio Francesco Giuseppe Provana, 중국명 艾遜爵 또는 艾若瑟, 1662~1720)13) 신부의 집으로 들어와 생활하게 된 것은 당시 그 지역에 천주교가 성행하였다는 것을 볼 때, 자연스러운 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산서성과 강주 지역의 천주교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강주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620년(명 만력 48년) 이전 한림(韓霖, 토마스)14)과 단곤(段衮, 스테파노) 형제15) 그리고 집안 식구들이 함께 북경에 있을 때, 천주교를 믿었던 것에서부터 그 시작을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서광계(徐光啓) 문하에서 교육을 받으며, 북경에서 천주교를 믿게 되었고, 서광계식의 천주교 개교 방법16)을 답습하여 천주교 신부를 강주로 모셔옴으로써 강주(降州)가 개교되었다. 이때 이들 한림(韓霖, 토마스)과 단곤(段衮, 스테파노) 일행의 요청으로 동행한 선교사는 이탈리아 예수회 소속의 알레니(Giulio Aleni,중국명 艾儒略, 1582~1649)17) 신부로 1620년에 강주로 와서 전교를 시작한 것이 그 시초였다.

 

이후 1624년에는 벨기에의 트리고(Nicolas Trigault, 중국명 金尼閣, 1577~1628)18)가 이곳 강주로 왔으며, 이탈리아의 바뇨니(Alfonso Vagnone, 중국명 王豊肅 후에 高一志로 개명, 王一元으로도 불림, 1568~1640)19)는 1616년의 남경교난으로 중국에서 축출되었다가 중국 이름을 왕풍숙에서 고일지로 개명하고 1624년 12월에 강주로 들어왔다. 이후 바뇨니는 강주 성내에 산서성 최초의 천주당을 건립20)했으며, 이곳은 강희 초년에 서양 역법에 반대한 양광선(楊光先)의 탄압이 발생했을 때 천주교 선교사들이 은둔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항주의 양정균 집에서 선교사들이 대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 산서성 강주에서는 한림과 단곤이 박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이곳에 은둔할 수 있었다.

 

산서성 강주의 전교 역사는 대략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단곤과 한림 집안의 도움으로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1634년에는 산서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수천 명이 굶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바뇨니 신부는 빈민자와 기근자들을 구제하면서 병중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634년 한 해 동안 강주와 포주(蒲州, 현재의 永濟市) 두 곳에서 세례를 준 사람이 1,530명이었다고 한다. 바뇨니 신부는 산서에서 전교를 시작한 지 15년 만에 8,0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중 당시 명망 있는 사람이 2, 3백 명이나 되었으며, 교당 50여 곳을 건립했다.

 

또 강주가 중국천주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은 강주에서 천주교 교리 서적을 출판하였던 중요 장소21)의 한 곳이라는 것과 바뇨니의 분묘가 이곳에 조성되어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22) 1640년 4월 16일 트리고 신부가 바뇨니 신부의 장례식을 집전했는데, 장례식에 참석한 교우가 2,000명이나 되었던 것은 바뇨니 신부의 명망을 알 수 있는 자료일 것이다.23) 당시 산서성의 교우가 8,000여 명이었고, 그중에 이름 있던 사신(士紳) 계층의 관원들도 2백 명이 넘었다.24) 이러한 것을 통해서 강주에서의 천주교 위상과 그곳에서의 바뇨니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산서성의 교세 확장 시기에 번수의와 프로바나 신부가 등장하게 되었다. 번수의의 출생 시기에 강주는 어느 정도 천주교의 교세를 갖춘 지역이었는지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면 더 확실하게 그 교세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내용을 살피는 것은 어린 번수의를 외국 선교사에게 선뜻 의탁했다는 것은 부모의 믿음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주는 산서성에서도 가장 천주교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지역으로 1627년 중국 최초로 교우에 의해 교당이 세워졌으며, 1636년(숭정 9년)에는 그 신자 수가 8,000여 명에 이르렀고, 크고 작은 교당이 1640년(숭정9년)에도 102곳이나 있었다. 1664년(강희 3년) 강주 지역의 교우 수는 3,300명에 달하였다.25) 이것을 추산해보면 만력 연간 강주지역 인구가 45,000명이었으며, 청대에 들어서면서는 전란으로 인해 많은 수가 감소되었고, 1667년(강희 6년) 정수(丁數, 세금 납부 성인 남자의 수)가 19,000명으로 파악될 때26), 이전보다 상당수가 감소되었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개략적으로 계산해 보더라도 강주 인구의 13.6% 이상은 천주교 신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강주(絳州) 지역 천주교인의 인구 비율은 중국 각 주현(州縣)에서 가장 높은 곳 중의 한 곳이었다.27) 교우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중국 최초의 성당을 건축한 것과 교회서적을 출간할 수 있던 여력 그리고 인구비례 많은 신자가 존재했었다는 것과 신사 계층의 관원이 2백여 명이나 신자였다는 것을 볼 때, 당시의 강주에서의 천주교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번수의와 프로바나 신부

 

프로바나 신부는 1695년 10월 4일 마카오에 도착했고, 그해 바로 강주로 이동해, 1696년~1697년 사이 강주에서 그는 2천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28) 물론 번수의가 이 이전에 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며 이 시기에 프로바나 신부에 의해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추론된다. 당시 프로바나 신부는 14~15살 정도의 번수의에게 집안일과 미사 전례를 돕는 복사 일을 맡겼을 것으로 추측된다.29)

 

이후 프로바나 신부는 투르농(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 鐸羅, 1668~1710)30) 교황사절을 위한 통역 봉사와 흠천감에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705년 8월 산서를 떠나 북경으로 불러올림을 받았다.31) 수학에 조예가 깊은 프로바나가 자연스럽게 북경에 도착하여 흠천감의 일을 하면서 교황사절을 돕는 임무도 맡게 되었다. 이때 프로바나를 수행하며 북경에 도착한 번수의는 흠천감의 천문생(天文生)32)직을 맡게 되었다.33) 이것은 이미 번수의가 어느 정도의 교육수준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프로바나 신부가 흠천감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번수의가 흠천감에서 직책을 맡는 것은 보다 쉬울 수 있었을 것이다.34) 번수의는 프로바나 신부를 착실하게 수행했고, 프로바나 신부가 투르농 교황사절을 만났을 때, 프로바나 신부와 함께 했다. 이후 번수의는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와 청조 관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북경에서 봉직하던 프로바나는 강희제의 명령으로 1707년 10월 27일 북경을 떠나, 마카오에 도착했다.35) 이때 번수의도 동행했다. 이때 번수의는 프로바나 신부의 중문 비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36) 1708년 1월 14일 번수의는 프로바나 신부와 동행하여 마카오를 출발하여, 1709년 12월 5일에 로마에 도착했다. 다른 서적에는 1709년 1월 15일 로마에서 수도원에 입회37)하고, 1717년 로마에서 선교사로 임명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기가 아닌가 생각된다.38) 번수의는 1719년 1월 15일 로마에서 예수회 수도원에 입회하였으나, 그 해인 1719년 프로바나 신부와 함께 유럽을 출발했으므로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이 되며, 프로바나 신부가 1720년 사망하기 이전에 사제서품을 받았던 것으로 여러 가지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39)

 

번수의는 1720년 마카오에 도착한 후, 강희제의 명령으로 북경으로 불러올림을 받고, 황제에게 프로바나 관계에 대한 일을 소상히 고한 후에 1725년에는 북경 부근에서 전교하였고, 1726년에는 만주지역으로 또 하북(河北)으로 옮겨갔다. 옹정제 즉위 이후에는 유배형을 받게 된 종친인 소노(蘇努)40) 가족에 대한 전교 신부를 담당했다.41) 번수의는 옹정, 건륭제때의 천주교 탄압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노가족에 대한 전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42) 예수회 회원인 그는 신품을 받은 지약 10년만인 1730년 2월 2일 북경에서 종신서원을 했다. 그는 1753년 2월 28일 북경에서 사망했는데, 그는 마테오 리치가 묻혀있는 북경 등공책란에 함께 묻혀 있다.43) 그곳에 있는 묘비에는 번수의의 행적과 유럽에서 돌아온 후의 『신견록』 작성 경위와 강희제 사후의 행적도 기록하고 있다.44)

 

 

Ⅳ. 완역 『신견록』

 

본고는 『신견록』의 내용을 전문 번역하여 옮겨 놓고자 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같이 이미 팡하오의 『중서교통사』 원서 전체를 번역한 서적이 간행되어 있다. 전체 부분을 5책으로 번역해 낸 그들의 노고와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본고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제4권 에 수록된 『신견록』 전문을 번역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번역 과정에서 사용된 일부 용어에서 문제가 있고, 교회사적 요소가 간과되어 있는 점이 산견되고 있다. 여기에서 그 번역문이 원저자인 번수의의 의도와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그러한 부분을 보충함으로써 독자들이 당시 상황을 보다 정확히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번역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번역문은 기존 번역본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다시 한 번 『중서교통사』란 대작 번역을 담당한 기존 번역자들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그럼에도 여러 번역본을 접하는 것은 독자의 이해 폭을 더 넓힐 수 있다는 판단에서 『신견록』 전문을 다시 번역하여 싣는다.

 

『중서교통사의』 원저자인 팡하오 역시 『신견록』에 대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한 언급 후에 『신견록』 본문을 기술하고 있다. 『신견록』은 유럽을 다녀온 후, 1721년 강희제에게 보고를 위해 작성한 것으로, 본고도 팡하오의 방식을 수렴하여 먼저 팡하오가 언급한 내용을 번역하여 덧붙인 후에 『신견록』의 번역 원문을 게재하고자 한다.

 

번수의(樊守義, 1682~1753)는 수리(守利) 혹은 수화(守和)라고도 불리며, 자는 리여(利如)로 산서성 평양(平陽) 강주(降州) 사람으로 1682년(강희 21)에 태어났다. 1707년(강희 46년) 번수의는 프로바나 신부와 함께 유럽으로 갔고, 1720년(강희 59년) 홀로 귀국했다. 국외에 머물렀던 기간이 14년이었다. 귀국 후, 그는 성조(聖祖) 강희제의 부름으로 입관하여 황제를 알현하고 모든 것을 소상하게 보고한 후, 그 내용인 『신견록』(身見錄)을 작성하여 황제께 올렸다. 그 여정은 마카오에서 출발하여, 남양(南洋)을 거쳐 브라질로 갔고, 1708년(강희 47년) 8월 초에 포르투갈에 도착하여, 포르투갈 국왕을 알현했다. 이후 4개월여를 머물렀고, 1709년(강희 48년)에는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갔으며, 이탈리아에서 교황을 알현했다. 또 이탈리아에서는 예수회에 입회하여 학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718년(강희 57년)에는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 포르투갈 국왕을 알현하자, 포르투갈 국왕이 금 1백 근(60kg)을 하사했다. 1719년(강희 58년) 3월 초에 귀국 길에 올랐다. 1720년(강희 59년) 6월 13일에 중국 광주에 도착했고, 북상하여 9월 11일에 열하(熱河)에서 강희제를 알현했다. 이후 북경 부근에서 전교하며, 동북 및 산동지역까지도 전교에 나섰다. 번수의는 1753년(건륭 18년) 2월 28일 사망했다. 이 책 『신견록』은 중국인이 편찬한 최초의 유럽여행기이며, 실로 귀중한 것이며, 현재에는 로마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명리탐」(名理探)의 뒷부분에 그 나머지 부분이 수록되어 있다. 중국인이 이 내용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에 이곳에 게재하여 독자들에게 음미하게 한다.45)

 

아래의 내용은 『신견록』의 내용으로 자서(自序) 부분이다. 이 내용은 어떤 이유로 유럽으로 가게 되었는지와 어떤 이유로 작성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自序‥「나의 성은 번(樊) 씨요, 이름은 수의(守義)이다. 산서성 평양현(平陽縣) 강주(降州)에서 성장했으며, 천주를 독실하게 공경하고, 나보다 더 주를 사랑하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서 강희 정해(丁亥, 1707년)년 겨울 멀리 서양에서 온 선교사 프로바나(艾) 선생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태서(泰西)로 갈 때, 나와 동행하여 산천과 도읍을 지나, 갖은 풍파를 겪고,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귀로는 들었으나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은 언급하지 않고, 내가 친히 본 것만을 기록하겠다. 나는 경자(庚子, 1719년)년 6월에 나 홀로 중국으로 돌아왔고, 이때 독무(督撫)가 나를 북경으로 올려 보내 황제를 뵙게 되어 총애를 받았으며, 신축(辛丑, 1721년)년 무더위 때, 황제와 고관대작이 서양에 대한 정보를 묻기에 나의 10여 년의 흔적을 일일이 생각하여, 어제의 일처럼 생각해 낸 후, 가고 돌아온 처음부터 끝까지를 간략하게 기록했다.」46)

 

아래는 『신견록』 전문의 번역 내용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번역의 상이함이 있고 원문에 대한 부분적인 내용 보충의 필요에 의해 전문 번역 내용을 싣는다. 내용상의 보충부분은 각주로 처리했다.

 

「마카오에서 양식을 준비하여 큰 배에 올랐고, 망망대해로 나아가자 아무런 막힘이 없었다. 서남쪽을 향해 주야로 나아갔다. 떠난 지 2달이 되어 가는데, 거처 지나간 나라는 다음과 같다. 팔라완(Palawan, 巴辣哥亞), 보르네오(Borneo, 莫爾乃阿), 말라카(Malacca, 瑪辣加), 방카(Bangka, 盤噶), 수마트라(Sumatra, 蘇瑪爾辣)를 지났고, 많은 섬을 지났으며, 열기로 매우 더웠으나 토산물은 아주 풍부했으며,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조밀하게 생활하였고, 정향나무, 후추, 계피, 소목(蘇木; 콩과 식물의 약재), 단향(檀香, 약재로 사용)과 맛있는 과일이 일년 내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은 자색(紫色)이었고, 성정(性情)은 평화로왔으며, 대개는 이와 같았다. 자바국(Java, 內瑪辣加國)에는 바타비아[Batavia, 현재의 자카르타(Jakarta)]라는 이름의 큰 도읍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홀란드(河濫打, 네덜란드) 상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었으며, 서양 선박이 2백 척이나 항구에 정박해 있었고, 군마를 갖춘 병사가 주야로 성문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그 성안의 거리 가운데로는 하나의 강이 경계로 있었고, 도로 옆으로는 나무들이 강을 따라 심겨 있었다. 서양과 중국의 크고 작은 물건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사치스럽기 그지 없었다. 관리와 유력가들의 집에는 정원을 갖추고 있었는데, 성 밖에 있었다. 나는 도읍에 배를 정박한 후, 바람 방향을 살핀 후, 15일 후에 길을 떠났다. 항행한 지 3, 4개월째가 되었을 때, 희망봉[Capetown, 大狼山]을 처음 보았다. 배에 물이 부족해서, (남)아메리카 대륙의 바이아(Bahia) 도읍지47)로 들어갔고, 도읍지의 앞에는 평수위의 만이 형성되어 있어 대형 선박 백여 척이 있었고, 더욱 견고하고 큰 거대한 군함이 있었으며, 위에는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이곳은 모든 것이 풍부하고 기후가 좋았으며, 사시사철 춥지 않았고, 퍼퓸 즉 향료, 상처 난 곳에 바르는 연고, 코담배, 계피, 설탕, 쌀이 생산되고, 소와 양을 기르고, 금과 은이 많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곳은 포르투갈의 땅이었으며, 해변을 끼고 있었으며, 도읍 내에는 천주당, 성인당, 수도원 등이 모두 숭엄한 외양을 갖춘 채 세워져 있었고, 여러 종의 기구들은 모두 도금(鍍金)되어 있었다. 대학과 중학교가 설립되어 있어, 여러 방면의 우수한 인재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이들은 인품이 부드러우며 총명하고 똑똑했고, 업무를 총괄하는 사람 아래에는 중국의 순무(巡撫)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 문무(文武) 두 방면의 일을 처리했다. 한 예수회 수도원은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수도자가 백여 명이었다. 지식인들이 필요한 물건은 기계로 만들었는데, 한 사람이 그 안을 다닐 수 있었고, 늦은 시간까지 일해서 만들어내는데 물건은 정교하였다.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돌로 성당을 장식했는데, 이러한 돌은 서양에서 먼저 석재로 만들어 이곳으로 옮겨와서 건축했다. 한 방은 매우 넓었는데, 그 칸에는 진귀한 물건이 보관되어 있었고, 위층은 서고로 책꽂이가 5, 60개가 있었고, 책은 수십 만권이 있었으며, 이러한 것은 바이아(Bahia) 시(市)의 위상을 설명한 것이다.

 

그해 8월 초, 비로소 대서양의 포르투갈(波爾多嘞爾國)에 도착했고, 항구로 들어가자, 많은 방어 포대가 축조되어 있었고, 모든 서양 물건들이 이곳으로 왔다. 호포(號砲)를 쏘아 조사가 끝난 것을 관아(司)에 알렸고, 그런 후에 통행이 가능했다. 5리(2.5km)를 가니 수도[리스본(Lisbon)]가 보였고, 수도에는 큰 강48)이 흘렀고, 내지로부터 흘러서 바다로 갔으며, 정박해 있는 서양 선박이 3, 4백 척이나 되었다. 이날 나는 육지로 올라와 예수회 수도원에 머물렀으며, 수사를 만났는데, 그들은 오랜 친구와 같이 대했으며, 바로 식사를 제공했는데, 그릇이 전부 은그릇이었다. 시내의 풍경은 장엄하고 아름다웠으며, 없는 것이 없었으므로 부국이라 할 만하였다. 땅은 넓고 샘은 많았으며, 그 건물은 3, 4층으로 하나같지는 않았으나, 공작과 후작 그리고 왕족의 저택은 더 숭엄하고 아름다웠으며, 천주당, 성모당, 성인당은 모두 돌로 만들어졌고, 독특하고 기이하게 만들어졌으며, 사용되는 그릇은 모두 조각이 되었는데, 금은으로 입혀져 있었다. 수도원은 상당히 많았는데, 각 수도원에는 수도자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아울러 그곳에는 학교가 설립되어 있었는데, 소학교는 4품, 중학은 2품, 대학은 3품으로 나뉘어져 있었다.49) 뿐만 아니라 양로원도 여러 곳 있었는데 매우 컸으며, 식물원과 동물원을 갖추고 있었다.

 

3일째 되는 날에 포르투갈 국왕50)을 알현했는데, 그 궁전은 숭엄하고 장관이어서 예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밖에는 호위병이 서 있었고, 안에는 신하들이 시중들고 있었으며, 왕의 오른쪽에는 동생 3명이 서 있었고, 왕은 20세 정도 되어 보였고, 겸허하고 온화하며 친근해 보였다. 다른 날 다시 왕을 알현했을 때, 궁궐내부를 둘러보도록 허락했는데, 조정내의 벽이 빨간 장막으로 덮여 있었고, 장막에는 비단 자수가 그려져 있었었는데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여름에는 자기(磁器)로 아랫부분을 가렸고, 유리창과 무늬 있는 양탄자, 금박 의자, 수정으로 만든 탁자 등이 눈을 어지럽게 했다. 궁정 내에도 천주당이 있어, 왕은 수시로 미사 참례를 했으며, 국왕을 알현하는 신하들의 화려한 복장에는 차등이 있었다. 그 다음날 왕과 왕비가 대성당으로 가서 하느님께 감사를 올렸고, 그 수레와 복장의 화려함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국왕의 생일날에 가서 축하 예식을 보았는데, 국왕이 위에 서 있으면, 그 둘레의 신하들이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여 하는 인사[鞠躬]를 3번 한 후, 몸소 왕 앞으로 다가가서 친히 왕의 손에 입 맞추고, 물음에 답한 후 자기자리로 물러나는 것으로 요약해서 말하면 대체로 이렇다. 때는 1709년(강희 48년) 정월이었다.

 

그 나라에 거처한 것도 이미 4개월51)이나 되어 작별을 고하자, 수륙통행증 각 1장과 여비를 주었고, 왕족과 귀족들 모두 각자의 선물로 예를 표시했다. 주도면밀한 준비를 한 후 동쪽으로 길을 떠났고, 이탈리아 지중해(依大利亞國 地中海)52)를 지나면서 남쪽으로는 아프리카가 보였고, 북쪽으로는 유럽 대륙이 보였다. 1개월여의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스페인53)에 도착하였는데, 도시는 포르투갈과 같았는데 그 이름은 잊어버렸다. 또 한 곳의 사람들 모두는 본분에 만족하고 부귀를 자랑하지 않았으며, 청아함을 좋아하며 정자와 정원을 좋아했다. 두 달 후에는 이탈리아의 국경에 도착해서 어떤 나라에 입국하게 되었는데, 궁성과 궁실은 모두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천주당이 많았으며, 올리브 열매54)와 개암[榛子樹]이 많이 생산되었고, 풍토는 온화하고 모든 것이 풍부했다. 그곳에는 예수회 수도원이 있었는데, 규모는 말할 것도 없고, 외견이 장중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였다. 나는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렀는데, 왜냐하면 큰 배가 들어가기 어려워 작은 배로 갈아타고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2월 하순에서야 제노바(蛇奴劃, Genova,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지중해의 항구 도시)국(國)에 도착했고, 그 속국인 코르시카(格爾西加, Corsica, 1768년에는 프랑스에 판매함)는 풍토는 풍족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여기서도 올리브 열매가 생산되었으며, 그것으로 기름을 짰다. 성곽이 많았고, 인정은 앞의 나라들과 다름이 없었으나, 사람들은 밖에 나가 일을 도모하는 것을 기뻐했으며, 왕족과 귀족들 집의 문루(門樓)가 높고 컸으며, 금은과 진귀한 보화들로 사람들이 치장한 것은 서양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가히 으뜸이라고 할 만하다. 건축의 정교함과 궁전의 아름다움, 인재가 많았고, 세가(世家)들의 부유함은 이루 다 서술하기가 어려웠다. 성 밖은 바다와 가까이 있어 크고 작은 서양 선박이 백 여 척이 있었고, 항구에는 등대 탑이 세워져 있어, 매일 밤 멀리서 들어오는 타지에서 오는 배들의 항로를 밝혀주었다.

 

토스카나(都司格納 Toscana) 제후국인 리보르노(里務爾諾, Livorno, 메디치가에서 통치) 시(市)에 이르렀는데, 성(城)은 비록 크지 않았으나, 잘 정돈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으며, 환경은 풍요로웠고 인정은 두터웠다. 나는 이곳에서부터 육로 여행을 시작해 옛 도시인 피사(比撒, Pisa) 시(市)까지 갔다. 이곳은 예전 궁전과 보탑(기울어진 탑인 피사의 사탑을 말함)과 공동묘지였으며, 성 둘레 주변은 강물55)로 둘러싸여 있었다. 또 시에나(西捺 혹은 西合捺, Siena, 이탈리아 중부 도시) 시(市)에 도착했고, 대학[總學] 즉 총원(總院)이 있었고, 사방의 자제들을 모집해 격물궁리를 학습하게 하였다. 예수회원이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며칠 머문 후, 교황[교화왕(敎化王)으로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번역문에서는 교황으로 표시했다. 당시 교황은 클레멘스 11세(Clement Ⅺ, 1700~1721)였다.]이 있던 당시의 수도인 로마 시(市)로 불리는 곳으로 갔다. 그곳은 예로부터 총부라고 불리는 곳으로, 그곳 성의 둘레는 백 리 정도였고, 교황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성문은 늦은 밤에도 닫히지 않았고, 나는 이곳에서 이틀째 되던 날 교황을 알현하고, 후한 대접을 받은 후에 궁전 안팎의 방들을 둘러보도록 명받았다. 방은 수만 개가 되었고, 높고 크고 기이한 모습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많은 식물원과 동물원이 있고, 큰 서고(書庫)가 있었는데, 큰 식당의 음식처럼 진열되어 있었고, 많은 책이 보관되었는데 성경이 가장 많았으며, 책장과 책 상자가 너무 많아서 그 수를 셀 수가 없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하만국의 역사 서적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교황은 성교(聖敎)의 업무를 두루 처리하고, 그 아래에는 72명의 추기경 및 주교 사제들이 있어, 그 나라의 모든 문무에 관한 일을 돕고 있었다. 궁 밖의 병졸들은 몇 차례 교대로 근무했고, 형벌로는 교수형, 참수형, 유배의 형벌이 있었으나 범죄자는 적었다. 궁전은 2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베드로성인 성당 좌측에 있는 것으로 평상시에 교황이 거주했고, 다른 하나는 카스텔 간돌포56)로 교황이 여름에 거주하는 곳이다. 귀족들의 집은 비단 등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금빛 꽃이 새겨진 의자,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진기한 그릇이 침대의 휘장 옆에 수도 없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가격이 만억(萬億) 즉 조(兆)가 넘었다. 그곳을 출입하는 말의 안장과 수레의 휘장은 화려하기가 비할 데 없었고, 종들과 병사들은 각기 모자와 의복이 달라 그들의 직책을 알 수 있었다. 성 안팎의 화원은 여러 경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매년 수리를 하여 봄과 여름에는 달콤한 휴식을 주었고, 진귀한 골동품이 잘 진열했다. 또 각국의 사신들은 매우 화려한 외모에 힘써 자기 군주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다. 이웃 나라의 화물이 모두 잘 갖추어져 없는 것이 없었고, 이웃나라의 출중한 인물들이 성내에 무리지어 모여 있었다. 사람이 만든 높은 다리57)는 길이가 90여 리(약 40km)였고, 높은 산 큰 샘의 물을 이곳으로 끌어와 물이 성내로 흘러들게 하여, 구멍을 파서 샘을 얻었고, 사거리에는 돌을 쌓아놓은 산이 있고, 사람 모양의 돌 석상이 있었는데, 사방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게 했다. 거리의 도로는 돌을 깔아 놓았고, 집집마다 모두 분수[水法]가 갖추어져 있었다. 물건이 도시를 이루었고, 없는 물건이 없었다. 수도자들은 매 회(會)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그 아름다움은 천주당, 성인성모당 안팎은 물론이거니와 제대 하나도 제대로 다 감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부분은 돌로 이루어졌고, 제대는 더욱 특별한 보물같은 돌로 되어 있다. 제기는 금은이 아닌 것이 없었다. 예수회는 10개의 수도원과 또 3개의 성당을 갖추고 있었고, 성당 안에서 미사 때 사용되는 제기58)인 성작 등과 제의(祭衣)59)에는 황금과 구슬과 옥 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또 한 성당은 한 노부부60)에 의해 건립된 성당으로 노부부가 연로하여 후사가 없자 가산을 모두 성모께 헌납하기를 원하였는데, 홀연히 부부 앞에 성모가 나타나 성당을 지을 곳을 지정해 주었는데, 그 지정해 준 곳은 눈이 쌓여있는 곳이라는 계시를 보았다. 당시는 더운 때였는데도 과연 눈이 내려 쌓여 있는 곳을 볼 수 있었다. 이에 교황에게 살펴볼 것을 건의했고, 교황이 확인한 후, 성모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곳을 성모설당(聖母雪堂) 즉 성모설지전(聖母雪之殿)61)이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또 성 요한 성당62)이 있는데, 이곳은 옛 교황 궁전[라트라노(Latrano) 궁전]옆에 있었는데, 성당 안이 아주 깊고 컸으며, 12사도가 대리석상으로 조각되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성물창고가 있었으며, 사면이 철문으로 되어 있었고, 하나의 돌로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둥근 기둥[圓柱]63)이 있었는데,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또 한 곳은 궁(宮)도 아니고 전(殿)도 아닌 곳으로 그 방은 마치 탑 같았으며, 원형으로 상하 5층으로 되어 있고, 연속해서 만여 칸(間)의 방으로 되어 있었으며, 주위의 창문은 층층이 나있어 관람하기 편했으며, 밖을 볼 수 있었고, 예전에는 사자를 키웠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훼손되어 그 반만이 모습을 남겨놓고 있다.64) 큰 다리가 하나 있는데, 이름은 산탄젤로의 다리 즉 천사 다리65)로, 다리 양편에는 많은 천사 석상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손에는 모두 예수 수난과 관련된 물건들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66) 하나의 포대67)와 철책이 둘러싸여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성당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이 큰 성당의 이름은 성 베드로 성당으로 성당문 밖에는 석탑이 있었는데, 아래에는 4마리의 돌사자가 받치고 있었는데,67)이집트(厄日多國)에서 보내온 것으로, 위에는 글자가 쓰여 있는데 이집트 문자였다. 성당 문밖 양편에는 돌로 회랑을 만들었는데, 안은 넓고 위는 평평했으며, 높이가 3장(丈, 9m)에 달했고, 248개의 돌기둥과 전후좌우 흰 대리석 성상(聖像)이 2백 여 개가 있었으며, 분수가 있었는데, 넓이가 약 2척(60cm)으로 물이 위로 뿜어져 나왔으며, 성당의 전면에는 큰 문이 7곳이 있었고, 윗면에는 크고 높은 돌로 문루(門樓)가 몇 층으로 쌓여져 있었으며, 그 전당(殿堂)은 상당히 넓었으며 하나가 아니었다. 기둥의 둘레는 6포68)로 기둥은 상당히 방대했으며, 진귀한 기둥은 10장(30m)이나 되었으며, 창문은 수천 개였고, 가장 꼭대기의 빈 공간에는 2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100리(약 50km)를 내다 볼 수 있었다. 그 양 옆으로는 돔으로 된 2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바닥은 무늬가 있는 돌판[花石板]이 깔려 있었고, 기둥은 색을 입혀 석벽으로 사용하여 성상들이 입체적으로 부조되어 있었다. 또 성인 베드로 성상의 성당이 있는데, 안에는 베드로 성인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었다. 총괄해서 말하면 이 성전에서 보면 사람이 마치 아이처럼 보였다. 또 예수 수난상이 구리 기둥의 정자 형태 안에 모셔져 있었는데, 성 그레고리오, 성 암브로시오,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4명의 성인상이 바치고 있었다.69) 돌기둥 옆 빈 공간에는 돌 성인상이 더 많이 있었다. 성당 문밖 왼쪽에는 1리 반 정도의 거리에 완전한 석환동(石環洞, 돌 동굴 형태)으로 된 곳은 교황이 거처하는 내정(內廷)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기록에 의하면 이 베드로 성인 성당은 오로지 돌로만 지어졌고, 나무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관한 내용은 앞에서 약간 언급했다.

 

로마 시 성내의 학교[學宮]은 하나는 게르마니아70)국의 귀족 자제들의 학교이다. 또 하나는 갈리아71)국의 귀족 자제의 학궁이 있다. 그리고 각국 귀족 자제들의 통학궁(統學宮)이 있었다. 또 하나는 이곳 로마부의 대학[總學]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았으며, 각 분야별 스승이 있었다. 그러나 각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 거주하는 것만도 아니고, 모두 예수회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므로, 다른 수도원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 배우는 것은 모두 격물궁리(格物窮理, 사물의 이치를 파헤치고 깊이 연구하다)학이었다. 로마 성 안에는 많은 요양원이 있었는데, 군인요양원, 여행자요양원, 빈민 및 만성질환자요양원 등이 있어 모두 혜택을 받았다. 그곳은 부귀한 집안들이 도와주어 국내외의 의사를 초빙하고, 약실에는 전문 담당자를 두었다. 그 병자들의 침대는 깨끗하고 귀여웠으며, 대략 천 칸 정도였고, 그릇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깨끗했다. 또 고아원이 있었는데,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성 베드로가 옥중에서 사람을 감화시킬 때, 땅에 십자를 그리자 바로 물이 솟아나와 이 물로 세례를 주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곳이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첨례일(즉 주일)에 각 성당의 음악이 크게 울려 퍼질 때에는 의기가 충만하여 마치 천국에 온 듯한 느낌과 기분은 말로서는 형용할 수 없었다. 미사 때 축복을 내리는 교황의 위엄 있는 모습 역시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성 밖 20리(10km)지역에는 가톨릭을 국교로 받든 콘스탄티누스[라)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4~337년] 국왕(재위 306~337년)이 이곳에 성 바오로 성당[이)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을 건립했고, 성 바오로 샘도 있었다. 바오로는 순교했는데, 그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면서 세 번 튀었고, 그 튄 곳은 모두 샘물이 솟아났다고 했다.72) 나는 이 샘의 물을 마셨다. 왕실 귀족의 집은 성 밖 30리(15km) 지역에 정원을 만들었다. 또 어떤 성은 프라스카티73)라 불렸는데, 정원, 분수, 분수 음악[水琹水風] 등 여러 가지 신기한 것이 있었다. 또 어떤 성은 티볼리74)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로마에서 그 성까지는 약 30리 정도 떨어져 있었고, 대개 비슷했으나 서양에서도 유명하다는 정원이 많았다. 로마에서 5개월을 머문 후, 게르마니아국 즉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는 나폴리(Napoli)국으로 갔다. 도중 여러 곳을 지나갔으나, 모든 것이 비할 바 없이 풍족했다. 카푸아(Capua) 시(市)에 들어가니, 예수회 수도원이 있었다. 이어서 나폴리국의 도성으로 들어오니, 땅은 비옥하고 아름다웠으며, 사람들 성품이 화목하고 즐거웠으며, 성 밖은 바다에 접해 있었으며, 각 나라의 선박이 모여 있었다. 산에서는 불꽃 연기를 내뿜었고75), 성안 궁전에는 유적지가 있었으며, 성인들의 자취가 아래와 같이 남겨져 있었다. 하나는 성 야누아리오 성인의 피76)가 성당 가운데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성인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굳어 있던 피였는데, 매년 성인의 첨례 미사 중 성경을 읽을 때에는 그 피가 다시 액화된 신선한 피가 되었고, 미사가 끝나면 다시 말라버렸다. 또 하나는 요한77) 성인의 피다. 그가 치명 당한 날 제자들이 성인을 장사지내면서 성인 자체의 피를 취하여 보존하여, 성인의 공덕을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성 요한 세례자가 순교한 지 이미 1700여 년이 지났다. 그런데 성인의 피는 성당 중앙에 보존되어 있어 홀로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년 요한 축일 미사 때의 요한 관련 성경78)을 봉독할 때, 성인의 피가 신선하게 변화되어 양도 많아졌다가, 미사가 끝나면 바로 마르고 작게 변했다. 이러한 성스러운 기적은 날짜와 관계없이 오직 성 요한 축일 미사 성경을 봉독할 때면 약속한 것처럼 나타났는데, 나도 정말 직접 눈으로 보았다.

 

다시 로마 시(市)로 돌아와서 교황을 알현했고, 강복으로 대사(大赦)79)를 받고, 성물을 많이 받았다. 로마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시 토스카나(Toscana, 都斯噶納)국의 도성으로 돌아갔는데, 도성의 이름은 플로렌스(Florence, 福樂冷濟亞 즉 피렌체 Firenze를 말한다) 시(市)로 궁전에는 발코니가 있었고, 성전, 대학[學宮], 수도원이 있었으며, 대체로 로마부와 비슷했다. 한 성당은 이미 착공한지 200여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완성을 보지 못했고, 그 견고하고 정교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국왕(대공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을 알현하러 갔는데, 성스럽고, 덕이 있고, 어진 왕이 우리를 접견했고,80) 자리를 내어주었고, 신표가 되는 모자를 내렸고[命冠], 질문을 하고 음식을 내려주었으며, 사람을 파견하여 숙소까지 데려다 주었다. 또 궁전을 둘러보게 허락하여, 소장하고 있는 보물과 화원(花園)을 둘러보았다. 또 한 공원 안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같은 짐승과 이상한 동물들을 기르고 있었다. 또 보약과 기이한 물건 두 상자를 하사했고, 또 수레와 마차를 하사하여 영토의 경계에까지 보내주었다. 또 대도시 보로냐(Bologna, 波羅尼亞)81)는 한때 도읍지로 땅이 매우 비옥했고, 사람들은 부유하고 인구가 많았으며, 전통적 귀족가문이 많았으며, 도시의 궁실(宮室)들은 아주 화려했고, 도시의 사람들은 똑똑하고 멋있었으며 배우기를 좋아했다. 후에 모데나(Modena, 莫得納)82) 시(市)의 도성에 도착했고, 또 파르마(Parma, 巴爾瑪)83) 대도시라는 제후의 도성에 도착했다. 이 도성에 있는 궁실과 사람들의 아름다움은 서술하여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곳의 제후들이 접견해주었다. 또 파비아(Pavia, 巴未亞)84) 등 시(市)를 지나갔는데, 기술하기가 어렵다. 또 밀라노(Milano, 彌辣諾)85) 대도시에 도착했는데, 옛날에는 롬바르디아(Lombardia, 龍巴爾的亞)국86)의 땅이었으며, 토산물이 매우 풍부했고, 사람들의 성품은 평화로우며, 시(市)내의 사람들은 부유하고 풍요로웠으며, 발코니를 갖춘 궁전의 그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전통적 귀족가문이 많으며, 하느님의 집인 성당87)이 백여 곳에 이른다. 또 한곳의 대성당88)은 현재까지 건축되고 있는데, 수백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고, 양 측의 담장 역시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으며, 한쪽의 기둥과 벽은 고풍스러웠으며, 다른 한쪽은 아직 쌓지 못한 상태였다. 큰 대학[學宮]이 있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요양원이 많이 있었는데, 모두 재상인 성 가롤로89)가 건축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 또 수도원이 매우 많았으며, 금은보화로 장식된 정원 역시 적지 않았다. 예전에 교황궁전[宗王宮殿]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때 삭소니아(Saxonia, 撒索尼亞, 독일 북부) 및 보로니아(Boronia, 波祿尼亞)90) 두 나라의 세자(世子)가 이곳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자 하여 내가 갔을 때, 자리를 내어주고 대중들 앞에서 음악이 있는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하직한 후에는 노바라(Novara, 諾瓦辣)91) 시(市)의 많은 도시를 지나갔으며,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베르첼리(Vercelli, 物爾車利)92) 시(市)에 도착해서는 시칠리아 국왕의 장자가 나를 보시겠다 하여, 나는 바로 돌아가 만났다. 후에 또 토리노(Torino, 都利諾)93) 도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이곳에서 피에몬테(Piemonte, 伯孟得) 시(市)의 제후를 만났다. 이 지역의 생산물은 풍부했으며, 사람들은 강건하고 용기가 있었고, 사교성이 좋았다. 또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많은 전통적 귀족가문의 공후세가(公侯世家)가 있었고, 관리와 백성이 모두 충성스러웠다. 안쪽 궁실과 건물들은 하나같이 평평하고 빈부 차이가 없고, 높이와 크기가 다른 2가지 형태만을 보였으므로, 가난한 자와 큰 부자들의 집은 비교적 비슷했다. 또 한 성당은 국왕 궁전의 안에 있었다. 성당의 중간에는 제대가 있고, 제대 위에는 진귀한 보물 상궤가 있었는데, 외장은 금박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 상자 안에는 천주 예수가 고난을 받고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남긴 매우 귀중한 보물이 들어있어 현재까지 만세에 그 자취를 드러내고 있었다.94) 다음에 국왕을 보러갔는데, 국왕은 접견을 허락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공손하게 대해주었다. 또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보기 드문 희귀한 물건이 두 가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커다란 수반(水盤) 위에 거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 작은 바퀴 여러 개를 설치하여, 사람의 힘을 쓰지 않고 그 바퀴가 스스로 가장자리 선을 따라 돌아가니, 옆에 있는 두 사람이 하는 일은 거의 5, 6백 명이 해야 되는 일과 비슷했다. 거목 하나를 판으로 만들려면, 인력을 쓰지 않고 물속에 둔 채 톱이 자동으로 그 나무를 밀고 당기고, 또 줄 하나가 자동으로 늘어나고 줄어들면서, 서로 맞추면 바로 판이 만들어졌다.

 

또 다시 토리노(Torino, 都林)95)에 도착했다. 성 밖에는 관상(觀想)수도원96)이 한 곳 있었는데, 매년 왕과 제후(王侯), 관리(縉紳), 세력가들이 모두 이 수도원으로 가서, 평소의 악함과 무례함을 반성하며 8일을 보낸 후 떠나면 다른 이들이 다시 들어왔다.97)

 

수도원 안은 층집 궁전으로 되어 있으며, 우아하고 깨끗했다. 후에는 또 러시아98)의 두 제후 아들이 그 수도원에 도착했는데, 출발할 때 로레토(Loreto, 羅勒多)99)에 있는 성가(聖家, Santa Casa)에 조배를 갔으며, 그 성가는 대성당 안에 있었으며, 성당의 오른쪽에는 커다란 보물창고가 있었고, 그 옆에는 매우 견고하고 거대한 교황의 행궁이 있었다. 성가(聖家)는 ‘성모의 집’으로 천사가 성모 마리아에게 하느님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위해 구세주 예수100)가 잉태되었음을 알린101) 곳으로 성모 마리아가 거처했던 곳이다. 이곳은 예전에는 유대[如德亞] 나라의 나자렛(Nazareth, 納撒肋)부에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곳 사람들이 성실하지 않자, 하느님이 벌을 내려 많은 도둑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서 그들을 해치게 했다. 성모는 미리 천사에게 성가(聖家)를 뽑아 빼어내어 바다 건너 달마티아102)라는 나라로 옮겨두게 했고, 그곳은 성모가 처음으로 옮겨간 나라였다. 이후 4년이 지나 그 나라 사람들 역시 성실하지 않게 되자, 성모는 성가를 다시 이탈리아로 옮겨갔다. 이곳에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성가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익이 나날이 늘어나자, 서로 싸우고 해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성모는 또 그곳을 버리고, 성가를 이곳 로레토103)로 옮겨온 지가 이미 수백 년이 되었다. 이곳으로 온 후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았으며, 이로써 이곳이 로레토의 중심이 되었다. 성모가 성가를 여러 차례 옮긴 후, 사방에 소식이 전해져서 많은 사람이 조배를 하러 왔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 온갖 질병에 걸린 사람, 고난과 재난을 당한 사람이 일단 이 성가에 들어서면 그 병은 씻은 듯이 사라졌으므로, 왕후와 귀족들이 많은 금은을 헌납했고, 세상의 진귀한 보물들이 성가 안에 모이게 되었다. 예전에 도둑이 성가 안에 보물이 가득하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훔치려는 마음을 먹고 성전의 꼭대기를 바라보자 번개가 쳤고, 이에 그는 두려움으로 발을 뗄 수 없을 정도였으나, 간신히 도망쳐 돌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이리하여 성교회의 교황이 공사를 크게 일으켜 보석과 멋진 나무로 외관을 거대하게 지어 성가를 감싸고, 다시 또 무늬가 있는 진귀한 비단으로 보물을 치장했다. 그리고 좌측으로 6곳의 원(院)을 두어, 두루 학식이 높고 덕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하여 사용하기도 하고, 주교가 미사를 지낼 때 혹은 빈곤한 백성을 구제할 때 사용하기도 하며, 이로써 하느님을 받들었다. 아울러 높고 낮은 관직(官職)의 관원들이 성가의 성스러운 위엄과 영험함을 잘 알고 감사해하였으며, 노약자와 가난하고 병든 사람, 사민(士民) 모두가 그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나는 성가 성지에서 미사를 참례한 후 바로 돌아왔다.

 

강희 57년(1718년) 2월 하순에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서 국왕을 알현하자, 국왕은 온화한 말로 오랜 시간 안부를 물었고, 또 황금 1백을 하사했다. 강희 58년(1719년) 3월 초순에 서양의 포르투갈에서 중국으로 출발을 하여, 강희 59년(1720년) 6월 13일에 광동성 광주부(廣州府)에 도착했다. 같은 해 8월 28일 북경에 도착했고, 9월 5일에 열하(熱河)104)에 도착했으며, 9월 11일에 파라호(波羅湖, 중국 長春市 農安縣) 북쪽 30리에서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께서는 접견하시어 오랜 시간을 물으셨다. 이것은 내가 서양을 갔던 내용을 간략하게 적은 것이다.」 

 

 

Ⅴ. 나오는 말

 

『신견록』 의 가장 큰 의의는 아마도 중국 최초 중국인에 의해 한문으로 작성된 유럽 여행기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중국을 서양에 소개한 글은 있었으나, 중국인의 눈에 비친 서양을 한문으로 기록한 서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견록』 전체를 번역하여 그 내용을 살펴본 바로는 여행기로서는 나름대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당시 유럽 특히 이탈리아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지역적 특징을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그 지역을 둘러보고 한 참이 지난 후에 기록한 것으로도 기억을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번수의가 중국으로 돌아온 것은 1720년 6월 13일에 중국 광주에 도착했고, 바로 북상하여 그해 9월 11일에 열하에서 강희제를 알현했다고 했으며, 이후 신축년 음력 4월 즉 1721년 음력 4월에 왕공대인들의 질문을 받고 지난 세월의 흔적을 하나하나 기억해보니 마치 어제 일처럼 분명했다. 이에 기록한다고 하고 있으므로, 『신견록』 저술이 완성된 것은 1721년 음력 4월 이후의 일일 것이며, 번수의가 강희제를 알현한 것은 최소 2번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저술로 인해 당시의 왕공대인들의 세계관은 크게 확대되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으나, 그 이후의 후속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이는 지면관계상 별도의 논문에서 언급할 것이다. 중국 최초의 유럽 견문록인 이 『신견록』은 이홍장(李鴻章)이 청 황제의 특사로 유럽을 방문하고 돌아와 쓴 『이부상역빙구미기』(李傅相歷聘歐美記)105) 보다도 200년이나 앞선 글이므로 학계에서 사료로서의 가치를 다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번수의의 고향인 강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강주의 천주교의 전교 상황으로 당시 강주 전체 인구 대비 천주교인의 숫자가 13.6%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인구 비율은 중국 전역에서 가장 높았던 지역이 아닐까 생각된다. 바뇨니에 대한 존경이 남아 있고, 종교관련 출판물이 많이 출판되며, 신자비율이 아마도 전국 최고를 자랑하던 지역에서 번수의의 나이의 어린아이가 서양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며 미사집전을 돕는 복사를 한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일이다.

 

셋째로는 번수의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의의이다. 프로바나를 따라 북경에 들어와서는 천문생으로 근무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지위와 경력은 이후 중국 사회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넷째로는 『신견록』의 의의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해로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선교사들이 왔다는 루트는 선교 거점을 지나온 것을 주로 표시하였기 때문에 대개는 포르투갈의 리스본 출발→아프리카의 희망봉→인도의 고아→중국의 마카오 등으로 표기되어 왔으며, 구체적인 루트가 언급되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이 『신견록』에서 번수의는 향신료의 산지인 서남아시아를 어떤 루트로 통과하여 지나갔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언급이 되어 있고, 특히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브라질의 바이아 즉 현재의 살바도르를 거쳐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해류와 바람 방향의 영향으로 희망봉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서부 해안을 따라 거슬러 올라갈 수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바이아의 중요성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신견록』을 살펴보면서 갖게 된 의문점을 작성해 본다. 이러한 의문점을 언급하는 이유는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게됨으로써 보다 명확한 사실관계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 첫째로 강희제의 특사로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중국을 출발했던 프로바나 일행이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왜 4개월의 시간을 머물렀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강희제의 교황청 특사로 파견된 프로바나 일행이 먼저 포르투갈을 방문한 것은 의미 있게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교황청 특사로 파견된 프로바나 일행이 포르투갈을 먼저 방문하여, 4개월의 시간을 보낸 것이 설명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포르투갈 국왕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비교적 자세하고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 그곳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갈 길이 바쁜 특사 일행이 왜 이곳에서 4개월이나 머물렀었는지는 해소되지 않는 의문점이다. 이곳에서의 4개월의 체류는 이후 이 특사에 대한 여러 의문이 제기되는 문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했던 프로바나 신부와 번수의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신견록』에는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프로바나와 번수의는 로마 교황의 명에 의해 로마를 벗어날 수 없었던 프로바나와 달리 번수의에게는 어떠한 문제가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번수의가 사제서품을 이탈리아에서 받았다는 것도, 또 사제서품을 돌아오는 배에서 받았다는 것 등도 의문시 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이탈리아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것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번수의는 신견록을 저술하면서 자서(自序) 부분에서 딱 한번 프로바나를 언급106)한 이후에 프로바나 신부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이 또한 이해하지 못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로바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을 탐방하였다면 『신견록』에서 번수의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내용에 대해서 프로바나가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한 것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번수의가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을 탐방할 때에 프로바나는 함께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고, 그렇다면 프로바나 신부와 번수의는 왜 함께하지 못했는지 또 언제 함께 만나 함께 중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승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된 사료를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프로바나의 행적에 대한 내용에 더 궁금증이 더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끝으로는 물론 『신견록』에서는 귀국 후의 일에 대해 언급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후 번수의의 활동 영역에서 황제, 북경, 유럽 등의 단어와는 관계가 먼 지역에서 활동을 벌인 것은 번수의가 의도적으로 이러한 곳과 거리를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720년 10월 12일 메짜바르바 일행이 광주에 도착했다.107) 왜냐하면 교황특사인 메짜바르바가 북경에 도착했을 때, 중국어와 외국어에 능통했던 번수의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교황청에서 번수의를 배제시켰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108) 왜냐하면 당시 중국인으로서 번수의보다 더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번수의 역시 당시에는 북경 주변에서 전교를 담당하고 있었을 시기였다는 것을 고려할 때는 더욱 많은 의문을 갖게 된다.

 

말미에서 의문점을 언급한 이유는 많은 연구자들이 이 분야에 대해 더 많은 연구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사실은 필자 자신에게 내는 숙제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이 좀 더 많은 부분의 사실을 밝혀내는데 좋은 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부록]

 

번수의(樊守義)의 『身見錄』(신견록) 원문 텍스트**

 

身見錄 自序

余姓樊氏, 名守義, 生長山右之平陽, 虔事眞主, 惟期無歉于己而已。 憶自康熙丁亥季冬之月, 遠西修士艾先生諱□者奉命遣往泰西, 偕余同遊, 凡所過山川都邑, 及夫艱險風波, 難更僕數, 其或耳聞之而目有未覩者, 我姑弗道, 即所親歷, 亦竟未嘗筆載一端也。 乃於庚子之六月, 余獨回歸中土, 時督撫題明, 遵旨赴京, 獲覲天顏, 仰荷寵賚, 至辛丑孟夏蒙王公大人殷殷垂顧, 詢以大西洋人物風土, 余始以十餘年之浪跡, 一一追思, 恍如昨見, 爰 舉往返巓末, 爲記其略云。

 

起自嶴門, 登巨艦, 備資糧, 浩浩洋洋, 洪無際涯, 向西南而畫夜行焉。 行二月, 經過之國。 巴辣哥亞也、莫爾乃阿也、瑪辣加也、盤噶也, 穌瑪爾辣也及多海島, 地氣至熱, 物土豐厚, 人煙稠密, 產丁香、胡椒、桂皮、穌木、檀香、佳果, 終歲不絶。 人之容顏, 帶有紫色, 情性和平, 大槪如是。 內瑪辣加國, 有大府名巴打斐亞者, 乃河濫打國商客集居之地, 有洋船二百餘艘, 停泊海口, 兵馬獲守城門, 晝夜不懈。 其城內街市, 中界一河, 道旁樹木遍値河沿。凡大小西洋與夫中國種種貨殖, 靡不畢具, 縉紳之家, 搆園囿於城外。 余於是府停舟候風十五日而後行。 約行三四月, 始見大狼山, 因舟中乏水, 遂至亞墨里加州巴以亞府, 府之前乃平水灣, 有大船百餘艘, 更有極高大而甚堅厚者爲戰船, 上置大炮。 此地富厚, 地氣淸爽, 天時無寒。產巴爾撒木香、刀傷油、鼻煙、桂皮、白糖、長米糧、畜牛羊, 而金若銀, 多且易取。 波爾都爾國此處有地, 靠海邊, 府內建立天主堂、聖人堂、修道會院, 咸極崇固, 諸種器具, 悉用雕金。 置大學中學, 各方俊秀, 多會於此, 人品聰穎淸和, 總理其間者若巡撫然, 而以下文武共襄其事。 有一耶穌會院, 在山之

顛, 修道者百餘。 士人凡所需之物, 則製機輪, 用一人在內行走, 即時挽上, 其巧妙如此。然其地不產石, 所蓋大堂, 乃先於大西洋製就石料, 移此湊成。 有屋一所, 甚寬, 其間多藏珍重, 上層爲書庫, 藏書五六十架, 不啻數十萬卷, 乃是巴以亞府實績也。 是年八月初, 始抵大西洋波爾多嘞爾國, 進海口, 多有築防守炮台, 凡洋物至此, 則發號炮查明報知有司, 方許入。 行五里, 即見京城, 城外有大河一道, 從內地出流于海, 停泊洋船三四百。 是日也, 余登岸, 居 耶穌會院, 修士乍見, 殷勤如故, 即送安頓, 銀器俱全。 視風景, 壯麗可觀, 允稱富國, 無物不備。 地多泉穴, 其房俱三四層不一, 而公侯王府, 更極崇美, 若天主堂、聖母堂、聖人堂, 純用石造, 奇峻特異, 雕飾供器, 悉以金銀。修道院頗多, 而每院修道者凡數百, 並設學校, 分小學四品、中學二品、大學三品。 且有養濟院數處, 甚廣大, 更多富貴園囿。 第三日國王召見, 其宮殿之崇美, 目所睹者也。 外設兵衛, 內侍群僚, 王之右有弟三人, 王年近二旬, 容顏溫勵謙和。 異日復見王, 命朝內遊, 見紅帳復牆, 或錦或繡, 若繪畫然。夏以磁器掩下截, 玻璃窗, 花氈墊, 金鑲櫈, 水晶桌, 炫耀人目也。 而朝內亦有天主堂, 王之便於瞻禮者, 往謁大臣者, 華差減耳。 又翌日, 王與后往宗堂謝主, 其輿服華麗, 則又不可勝述矣。 國王之誕, 余往祝其禮, 國王上立, 旁群臣, 仰上鞠躬凡三, 躬近王前, 親王手, 或問答, 或退班, 約略如是。時康熙四十八年正月也。 居其國已四月矣。 及辭行, 給水陸照各一紙, 贈程儀, 王公大人各有所饋。 爰起程往東行, 過依大利亞國、地中海, 南望亞非利加, 北眺大西洋。 程途一月, 風阻巴斯尼亞國, 有城如波爾多嘞爾亞國者, 忘其名矣。 又一地, 人皆安分, 不炫富貴, 愛淸雅, 惟喜亭囿, 大率如是。兩月後, 乃至意大里亞國界, 曾入一國, 宮城宮室, 悉以石造, 多天主堂, 產阿里伐果、榛子樹。 風土溫和, 最爲豐厚。 有耶

穌會院, 無論內之規模, 見其外貌莊重, 已令人景羨矣。 余於此留住一日, 因大舟難進, 易小舟行。 二月下旬, 至蛇奴劃國, 其屬國名格爾西加者, 風土無非富足, 亦產格里伐果, 可造油。 多城郭, 人情與前各國無異, 惟喜出外謀爲, 王公大族, 門樓峻大, 金銀珍寶, 容人覘玩, 在西洋郡稱是國爲冠也。 所蓋之精, 宮室之美, 人才之盛, 世家之富, 難以盡述。 城外則近海, 有大小洋船百餘, 建塔於海口, 每夜有以燈照遠客船。 至都司格納諸侯之國里務爾諾府, 城雖不大, 然堅固齊整可觀, 風土人情豐厚。 余於此始行陸程, 至此撒府, 乃古府也。 猶有古時宮殿寶塔遺址, 周城水繞。 又至西捺府, 有總學, 招四方弟子學習格物窮理。 有耶穌會院。 余居數日而後行, 往敎化王之國, 其京都名羅瑪府, 乃古來總都, 城圍百里, 敎王居焉。 城門暮夜不閉, 余至此二日, 見敎王, 承優待, 命閱宮殿內外房宇。 幾萬所, 高大奇異, 尤難擬議。 多園囿, 有大書庫, 庫列大廚, 無論其所藏經書之多, 即書櫃書箱, 總難屈指開闢。迄今天下萬國史籍, 無不全備。 敎王普理聖敎事, 下有七十二宰相及主敎司鐸, 本國文武, 共襄王事。 朝外兵卒, 日數更替, 法雖有絞斬流, 而犯者卒少。 有宮殿二所, 一在伯多祿聖人堂左, 爲常居, 一在石馬山, 爲敎王夏月居焉。 公侯家繡緞飾牆, 金花鑲櫈, 寶器無價, 擺設床帳, 不啻萬億。 其出入車馬鞍幃, 華美難比, 使役僕卒, 各以衣帽分職。 城內外花園有多景, 緻每年修理, 春夏憩息, 擺列珍玩。 又凡各國使臣, 務極浮華, 爲國君光彩。鄰邦貨物, 靡不悉具, 鄰幫英俊, 群集城內。 人造一高樑, 長九十餘里, 引遠高山大泉之水, 流入城內, 挖洞得泉, 十字街堆石山, 鑿石人, 四傍冒水。 街道鋪石, 各家俱有水法。 貨物成市, 必有其類。 修道者每會不計其數。 天主堂、聖人聖母堂, 無論內外之美, 即一祭台, 令人看玩不盡。 大槪以石爲之, 而祭台則更以珍貴之石爲也。 供器無非金銀。 耶穌會有十院, 又有三堂, 堂中所用器皿祭衣, 鑲珠玉金寶。 又一堂係一夫婦年老者所建立, 因夫婦年老乏嗣, 願獻家產於聖母, 而未經創製, 忽夫婦同兆, 見聖母指示蓋堂之處, 有雪者是也。 時乃炎天, 果見有雪處, 隨奏敎王查閱, 建一聖母堂, 因名聖母雪堂。有一聖若望堂者, 傍有古敎王宮殿, 堂內深大, 雕成十二宗徒白石像, 中有聖物庫, 四面鐵門, 有一完石空塔, 可容千人。 有一所, 非宮非殿, 其房如塔, 形圓, 上下五層相連, 有萬餘間, 周圍窗戶, 層層便看, 乃古時養獅處, 今已坍毀其半矣。 有一大橋, 名天神橋, 兩傍多造天神石像, 各執耶穌受難之具。 有一大爆台鐵柵, 乃護守宗堂之要。 有一大堂, 名聖伯多祿堂, 堂門外有一石塔, 座下四石獅, 從厄日多國送來, 上有字跡, 乃厄日多國文字。堂門外兩傍, 乃石圍廊, 內廣上平, 高可三丈, 二百四十八石柱, 前後左右, 白石聖像二百位左右, 有水泉, 寬二尺, 水上湧, 堂前面有大門七所, 上面有大高石造成門樓數層, 其殿宇閎闊, 不一而足。 柱圍六抱, 柱墩尤大, 寳蓋高十餘丈, 門窗數千, 頂上空球內, 可容二十人, 遠望百里。 傍寳蓋二座, 地鋪花石板, 柱用彩石牆, 露造聖像。 又有聖人伯多祿聖像, 堂內葬伯多祿聖身。 總言之, 則殿處看人若孩。 又耶穌受難像, 在銅柱亭內, 有聖額我略、聖盎伯洛削、聖熱樂尼莫、聖奧斯定四位聖人之像在焉。 凡石柱傍空處, 則更有石聖像。 堂門外左向, 約行里半程, 繩用石環洞相連, 至敎王內庭之路, 統計伯多祿聖人堂, 悉用石造, 並無寸木, 以前略言其槪。 羅瑪府城內學宮, 一乃熱爾瑪尼亞國公侯子弟之學宮。 一乃厄肋西亞國世家子弟之學宮。 一乃各國世家子弟統學宮。 一乃本府總學, 無分貴賤, 各有分師。 但不若各國者在內居住, 俱屬耶穌會管理, 別院不知其詳。 然所學之事, 皆格物窮理之學。 城內多養濟院, 有兵役養濟院、過客養濟院、窮民及痼病養濟院, 皆受益焉。 富貴家蠲助, 延內外醫生, 藥室各有專司。 其病人之床, 潔净可愛, 大約千間, 器皿全具, 而且潔凈也。 又有孤子院, 衣食俱備。 聖伯多祿曾於獄中化人時, 畫十字於地, 即得水泉, 以便領洗, 至今尙在。 瞻禮日各堂音樂大成時, 洋洋充滿, 恍若天國, 難以言語形容。 敎王視朝與夫賜宴, 威儀情狀, 亦復難比。 城外二十里, 有國君奉敎名各斯當底, 囊者建聖保祿堂, 有聖保祿泉, 當時保祿爲道致命, 聖首下地, 三擲即成三泉。 余曾飲是泉水。 王公家築園於城外三十里。 有城名夫辣斯加的, 如園囿、水法、水琴、水風, 種種奇異。 又有城名底伏利, 亦去府城三十里, 類如此, 雖西洋亦屬著名園者也。 居羅馬五月, 乃至熱爾瑪尼亞之屬國挪波里國中, 路經各所, 富足無比。 入加蒲亞府, 有耶穌會院。 因入挪波里國都城, 土地華美富厚, 塔, 形圓, 上下五層相連, 有萬餘間, 周圍窗戶, 層層便看, 乃古時養獅處, 今已坍毀其半矣。 有一大橋, 名天神橋, 兩傍多造天神石像, 各執耶穌受難之具。 有一大爆台鐵柵, 乃護守宗堂之要。 有一大堂, 名聖伯多祿堂, 堂門外有一石塔, 座下四石獅, 從厄日多國送來, 上有字跡, 乃厄日多國文字。堂門外兩傍, 乃石圍廊, 內廣上平, 高可三丈, 二百四十八石柱, 前後左右, 白石聖像二百位左右, 有水泉, 寬二尺, 水上湧, 堂前面有大門七所, 上面有大高石造成門樓數層, 其殿宇閎闊, 不一而足。 柱圍六抱, 柱墩尤大, 寳蓋高十餘丈, 門窗數千, 頂上空球內, 可容二十人, 遠望百里。 傍寳蓋二座, 地鋪花石板, 柱用彩石牆, 露造聖像。 又有聖人伯多祿聖像, 堂內葬伯多祿聖身。 總言之, 則殿處看人若孩。 又耶穌受難像, 在銅柱亭內, 有聖額我略、聖盎伯洛削、聖熱樂尼莫、聖奧斯定四位聖人之像在焉。 凡石柱傍空處, 則更有石聖像。 堂門外左向, 約行里半程, 繩用石環洞相連, 至敎王內庭之路, 統計伯多祿聖人堂, 悉用石造, 並無寸木, 以前略言其槪。 羅瑪府城內學宮, 一乃熱爾瑪尼亞國公侯子弟之學宮。 一乃厄肋西亞國世家子弟之學宮。 一乃各國世家子弟統學宮。 一乃本府總學, 無分貴賤, 各有分師。 但不若各國者在內居住, 俱屬耶穌會管理, 別院不知其詳。 然所學之事, 皆格物窮理之學。 城內多養濟院, 有兵役養濟院、過客養濟院、窮民及痼病養濟院, 皆受益焉。 富貴家蠲助, 延內外醫生, 藥室各有專司。 其病人之床, 潔净可愛, 大約千間, 器皿全具, 而且潔凈也。 又有孤子院, 衣食俱備。 聖伯多祿曾於獄中化人時, 畫十字於地, 即得水泉, 以便領洗, 至今尙在。 瞻禮日各堂音樂大成時, 洋洋充滿, 恍若天國, 難以言語形容。 敎王視朝與夫賜宴, 威儀情狀, 亦復難比。 城外二十里, 有國君奉敎名各斯當底, 囊者建聖保祿堂, 有聖保祿泉, 當時保祿爲道致命, 聖首下地, 三擲即成三泉。 余曾飲是泉水。 王公家築園於城外三十里。 有城名夫辣斯加的, 如園囿、水法、水琴、水風, 種種奇異。 又有城名底伏利, 亦去府城三十里, 類如此, 雖西洋亦屬著名園者也。 居羅馬五月, 乃至熱爾瑪尼亞之屬國挪波里國中, 路經各所, 富足無比。 入加蒲亞府, 有耶穌會院。 因入挪波里國都城, 土地華美富厚, 一宗堂, 在國王宮殿之內。 堂中間有祭台, 其台上有珍寶箱, 櫃外金寶鑲嵌, 內藏天主耶穌受難去世至寶之物, 遺留與門人, 至今顯跡於萬世焉。 於次見國王, 而國王賜見, 亦謙恭待人。 又罕見希奇之物有二不知何人巧作, 用一大架, 水盤上用一巨木爲柱, 柱上又小轉輪數個, 不用人力, 其輪自轉作就絲線, 旁着二人可抵五六百人之工。 其一有巨木欲爲板者, 不用人力, 乃製之水中, 其鋸自能推收其木, 又用一繩, 自能伸縮相湊, 便成爲板矣。 又至都林府。 有默想會院一所, 在於城外, 每年有王侯縉紳皆往此院, 修省平日, 善惡無虧, 以八日爲度, 去而復更。 院內樓房宮殿, 淸雅潔凈。 後又至鄂洛穌國二諸侯之子, 起身時往羅肋多府拜聖室, 其聖室在一大堂內。 堂右有一大寶藏, 右傍有敎王行宮一所, 甚堅固高大。 聖室即聖母之室, 乃天神朝報天主降孕之處。 先載如德亞國納撒肋府, 後因年久, 人民不誠, 天主降罰, 許寇賊入境戕害之。 聖母預令天神, 拔舉聖室渡海, 而置之瑪祭亞國中, 乃聖母初遷是國也。 越四載, 國民亦復如是, 聖母又徙至意大利亞國。有兄弟二人, 因往者多, 利益日繁, 致相虐害, 聖母又棄之, 徙其室於羅肋室, 今數百年矣。 不復移動, 竟成羅肋多府矣。 蓋聖母屢遷之後, 遐邇流傳, 朝禮者甚衆。 所遇困難, 萬種疾病, 苦難災侵, 一入聖室, 其病立癒消除。 所以王侯公卿所贈金銀極多, 四海之內, 奇珍異寶, 槪聚其室之中。 曾有盜賊, 聞聖室厚積, 頓起謀心, 望見聖殿之頂, 即若雷擊, 驚慄失措, 不能移步, 遂逃歸焉。 於是聖敎宗主, 大興營造, 寶石名木, 外立巨殿, 包圍聖室, 又以文錦奇珍彰之。 置左六院所, 聚博學成德之士, 供之使之, 或主敎或祭祀, 或拯濟窮民之匱乏, 至於奉敎主。並大小官職, 悉感聖室之聖威靈驗, 所以老弱貧病士民人等, 無不得其養者。 余拜聖室之後即往返焉。 至康熙五十七年二月, 復回波爾多噶利亞國, 復見國王, 即賜見, 溫厚賜問良久, 又賜黃金一百。 於五十八年三月初旬, 至大西洋波爾多噶利亞國起身回中國, 於康熙五十九年六月十三日到廣東廣州府。 於是年八月二十八日至京, 於九月初五日到熱河, 九月十一日在于波羅湖同北三十里, 叩見皇上。 賜見賜問良久, 此乃余往大西洋之略誌也。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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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례논쟁에 대한 주요 참고자료로는 中國第一歷史檔案館編, 『淸中前期西洋天主敎在華活動欓案史料』 第一冊, 中華書局, 2003年; 方豪의 『中西交通史』 (下冊), 第7章 地理學(下) 第二節樊守義著中文第一部歐洲遊記, 2008年; Donald F. St. Sure, S.J., 100 ROMAN DOCUMENTS CONCERNING THE CHINESE RITES CONTROVERSY(16451941), The Ricci Institute for Chinese-Western Cultural History, 1992; D. E. Mungello, The Chinese Rites Controversy Its History and Meaning, Institut Monumenta Serica and The Ricci Institute for ChineseWestern Cultural History, San Francisco, 1994; 黃一農, 『兩頭蛇』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8年; 李天綱, 『中國儀禮之爭:歷史,文獻和意義』,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19年; 陳方中, 江國雄, 『中梵外交關係史』 臺灣商務印書館, 2003年; 강원묵, 「儀禮論爭과 大淸帝國敎皇 特使 중국 방문(1705)에 대한 康熙帝의 대처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15, 2021, 275~359쪽; 方豪, 『中國天主敎人物傳』 臺灣: 宗敎文化出版社, 2007年, 501~502쪽 등을 들 수 있다.

 

2) 본고가 참고한 『身見錄』은 方豪의 『中西交通史』 (下冊), 第7章 地理學(下) 第二節 樊守義著中文第一部歐洲遊記부분으로 中國文化大學出版部, 2008年, 854~862쪽을 참고했음을 밝혀 둔다; 魯利, 「路易·範守易和澳門」 『1594―1994澳門聖保祿學院四百周年論文特輯』, 1994年의 각주 1에서는 번수의의 원고를 『審鑒錄』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王仲明(王重民의 오기로 보인다)이 발견한 것으로 方豪의 『中西交通史』(1977년 臺北版)제4책의 186~195쪽에 발표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현재는 파리국가도서관 내에 보존되어 있으며, 安東尼奧·西斯托·羅索의 「關於18世紀羅馬敎皇向中國派遣使節的情況」(南帊薩迪納, 1948, 第20號 文件, 332~334쪽) 논문에도 게재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3) 왕충민(王重民, 1903~1975): 1921년 보정(保定) 직예 제6중학에서 학습하고, 1924년 북경 고등사범학교 중문과에 입학하여 까오부잉(高步瀛), 양수다(杨树达), 천위안(陈垣) 등으로부터 문학과 역사를 전공했다. 1928년 졸업 후, 보정(保定) 하북대학(河北大学) 중문과 주임과 북경 보인대학(辅仁大学) 강사를 역임했고, 당시 주된 업무는 북해도서관(北海图书馆. 현재의 北京图书馆)에서 고적 정리와 서목(書目), 색인(索引) 작업에 집중하였다. 그 이후 문화대혁명 당시 우파로 몰려, 많은 고초를 겪다가 자진(自盡)했다.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9%87%8D%E6%B0%91

 

4) 옌쭝린(閻宗臨, 1904~1978): 중국 역사학자로 1927년 노동유학생[勤儉工學]으로 프랑스 파리와 리옹에서 일했다. 1929년 스위스 프리브르 대학에서 유럽고대사, 유럽중세사와 라틴어를 공부했다. 1933년 스위스 국가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대학에 남아 중국근대사를 강의하면서, 교감(校勘)연구에 심취했다. 1936년 스위스 국가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山西大學, 廣西大學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48년에는 中山大學 역사과 주임과 역사연구소 소장을 겸임했고, 1949년 이후에는 山西大學에 재직했다. 그는 프랑스어, 라틴어, 영어 등 여러 종류의 언어에 통달했고, 세계사, 중서교통사, 산서지방사 등을 연구했다. 그는 루쉰(魯迅), 량수밍(梁漱溟), 왕충민(王重民), 샹다(向達) 등과 교류하며, 서로 토론을 벌였다. 『世界古代中世紀史』는 그의 강의 자료와 논문을 모은 자료집으로 그의 아들인 얜셔우청(閻守誠)이 편집해서 출간했다. https://baike.baidu.com/item/%E9%98%8E%E5%AE%97%E4%B8%B4

 

5) 『名理探』은 명말 과학자인 이지조(李之藻)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 개론』을 중국어로 번역한 책 이름이다.

 

6) 이후 이 내용은 1959년 산서사범대학 학보가 이 글을 다시 발간했다. 2003년 옌쭝린(廉宗臨)의 아들 옌서우청(廉守成)이 이 글을 『선교사 및 프랑스 초기 한학』(传教士与法国早期汉学)에 수록했다. https://zh.wikipedia.org/wiki/%E8%BA%AB%E8%A7%81%E5%BD%95

 

7) 方豪, 『中西交通史』 (下冊), 854~862쪽 참고.

 

8) 방호(方豪)저, 손준식, 유진희 역주, 『중서교통사』 4권 學古房, 2021년판의 315~331쪽의 내용은 方豪著, 『中西交通史』 上下 臺灣: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3年의 책을 저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필자 역시 참고한 서적은 方豪著, 『中西交通史』 上下 臺灣: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3年 간행한 책을 저본으로 삼고 있음을 밝혀둔다.

 

9) 강주(絳州)는 역사적으로 중요지역으로 그 명칭이 자주 바뀌었다. 청대에는 행정구역의 주(州)나 청(廳)을 직예주(直隷州), 직예청((直隷廳)으로도 불렀다. 그중 직예라는 명칭이 붙은 주(州))는 통치인구가 많고 군사적 사무가 번잡한 곳을 지칭했다. 편제상 직예주와 부(府)의 등급은 서로 같았으며, 지주(知州), 주동(州同), 주판(州判) 등 관원은 부품(府品)의 편제 등급과 같았다. 청 1724년(옹정2년)에는 강주(绛州)를 직예주(直隷州)로 승격시켰으며, 직산(稷山), 하진(河津), 문희(闻喜), 원곡(垣曲), 강주(絳州)등 5개 현을 관할하게 했다. 1910년대 청조의 멸망 후, 이 기구는 폐지되었고, 1912년(민국 원년) 2월에 주(州)가 폐지되어 현(縣)이 되어, 이웃한 강현(绛县)과 구별하였는데, 강주(绛州)를 폐지하고 신강현(新绛县)으로 불렀고, 하동도(河东道)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는 산서 신강현(新绛县)으로 불린다.

강주에 천주교가 개교된 것은 서광계의 제자였던 단곤(段袞)과 한림(韓霖)의 두 집안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서광계에게 사숙하면서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학업을 마치고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올 때, 알레니 신부가 동행하여 강주(降州)는 1620년부터 전교가 시작되었고, 1625년부터 선교사들의 전교 거점지가 되었고, 1631년 전후로는 30여 곳의 성당이 건립되었다. 강현(絳縣; 絳州의 남부)에는 1638년부터 전교가 시작되었다. [프]榮振華 等著, 耿昇譯, 『16―20世紀入華天主敎傳敎士列傳』, 桂林: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10年, 429쪽.

 

10) 方豪, 『中國天主敎人物傳』, 501~502쪽.

 

11) 방호저, 손준식, 유진희 역주, 『중서교통사』4, 學古房, 2021년(이하 손준식, 유진희 역주, 『중서교통사』4로 표기함), 315쪽에서는 이여(利如)로 되어 있으나, 오류가 분명하여 이화(利和)로 바로잡겠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전거가 없어 확인대조해 볼 길이 없다. 본고는 번수의의 묘비명에서 이여(利如)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을 토대로 하여 이여(利如)를 그대로 사용한다.

 

12) RÉPERTOIRE DES JÉSUITES DE CHINE DE 1552 Ã 1800, p.86의 Fan, Louis 항목에서는 출생일을 1682년 6월 13일 또는 18일을 언급하면서, 1682년 1월 13일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方豪의 『中國天主敎人物傳』에는 1682년 6월 13일로 언급하고 있다.

 

13) 프로바나(Antonio Francesco Giuseppe Provana, 중국명 艾若瑟 또는 艾遜爵, 1662~1720): 프로바나는 1662년 10월 23일 니스(당시는 이탈리아에 속해 있었음)에서 태어났다. 1678년 예수회에 입회, 1693년에 중국으로 왔고, 1695년에 중국 마카오에 도착해 전교를 했고, 바로 산서성 강주(絳州)로 이동하여 전교했으며, 1699년에서 1701년에는 河南 開封, 山西 太原의 교무도 함께 담당하면서, 平遙, 吉縣, 襄陵, 汾州 등지에서 전교했다. 1702년에는 수도회의 명령으로 북경으로 갔고, 5년을 거주하면서 황제의 환심을 샀다. 1707년 강희제가 중국의례에 대한 논쟁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 프로바나를 특별 사절로 로마 교황청에 파견했고, 번수의가 수행했다.

http://www.gerenjianli.com/Mingren/54/6694e264gp.html;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프로바나는 교황 클레멘스 11세를 알현하나, 프로바나가 가지고 간 강희제의 조서는 부본(副本)이었으므로, 강희제의 인장이 빠져 있었던 것으로 인해 교황은 프로바나가 강희제의 특사임을 불신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프로바나와 번수의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허락을 하지 않았고, 프로바나의 고향인 리스로 돌아가는 것도 금지시켰다. 또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프로바나를 프랑스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바나의 로마에서의 상황을 여러 근거를 가지고 언급하고 있다. 方豪, 『中國天主敎人物傳』, 497~500쪽.

 

14) 한 씨 형제는 한운(韓雲, 세례명 Etienne, 즉 스테파노), 한림(韓霖, 세례명 Thomas), 한하(韓霞) 3형제이다. 이들 중 한운은 북경에 있을 때,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으로 형제중 가장 먼저 세례를 받았으며, 한림은 1620년에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黃一農, 『兩頭蛇』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8年, 239~240쪽; 方豪, 『中國天主敎人物傳』, 177~180쪽.

 

15) 단 씨 형제는 단곤(段衮), 단습(段襲), 단의(段扆) 3형제이었다. 단곤의 세례명은 스테파노(斯德望)이고, 그의 집안이 거주한 단가장(段家庄)에서는 교회 건립을 위한 토지를 제공하여 성당을 건립했다. 이 성당이 강주에서 뿐만 아니라 산서성 천주교 역사상 중국식 건축 풍격의 최초의 교당이었고, 중국 최초로 교우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하여 건립된 성당이다. 黃一農, 앞의 책, 242쪽. 단가장(段家庄)은 현재 新絳縣에서 서쪽 2.5km 떨어진 지역으로 서관(西關)과 삼림진(三林鎭) 사이의 지역으로 이 지역 남쪽으로는 분하(汾河)가 흐르고, 지역의 북쪽에는 구원산(九原山)이 있다; 方豪, 『中國天主敎人物傳』, 190~191쪽.

 

16) 서광계는 천주교 선교사를 자신의 고향으로 모셔와 천주교를 개교시켰으며, 그의 제자들 역시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의 고향을 천주교로 개교시킬 때 활용했던 관계로 필자는 이러한 개교방식을 ‘서광계식 개교 방법’이라 명명했다. 신의식, 「한중 천주교의 선구적 대표자인 정약종(丁若鍾)과 서광계(徐光啓) 신앙 실천 비교 연구」 『교회사연구』 56, 2020, 34쪽, 48쪽.

 

17) 알레니(Alleni, 艾儒略, 1582~1649):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로 1610년(만력 38년) 중국으로 왔고, 마카오 신학교에서 수학 등을 가르쳤다. 1613년에는 복건에 도착해 전교했고, 1619년 천주(泉州)에서 경교비를 발견했다. 1623년에는 『직방외기』(職方外紀)를 저술하여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후의 세계지리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알레니는 천문, 역학 등에 모두 박학하였으며, 문학에도 능통하여, “서방에서 온 공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1649년 복주에서 사망했다. 알레니가 강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1620년인 태창 원년(泰昌 元年) 연말, 한운(韓雲)의 초청으로 강주에 도착했고, 한운의 모친과 두 아들과 두 딸이 세례를 받았다. 동생인 한림(韓霖)은 이때 알레니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토마스(Thomas)이며, 세례를 받기 위해 첩을 두는 것을 그쳤다. 1624년(天啓 4년) 트리고 신부가 강주에 와서 한 씨 집안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黃一農, 앞의 책, 240쪽.

 

18) 트리고(Trigault, 金尼閣, 1577~1628): 1577년 출생, 1594년 예수회에 입회, 1610년에 중국에 와서 다음해에 남경도착, 카타네오, 바뇨니 신부와 중국어 학습. 카타네오 신부와 항주로 가서 전교 교무 보고를 위해 로마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1613년 초 마카오에서 승선하여 1614년 겨울 로마 도착했고, 1615년 3월 20일 교황 바오로 5세로부터 중국어 미사 집전과 성무일도의 중국어 기도를 허락받았고, 현지인의 성직 임용, 성경 번역 등도 허락받았으며, 미사 때 남성 신도들의 모자 착용을 허락받아서 중국교회는 청대까지 별도의 제건(祭巾)을 사용했다. 1618년 예수회 로마본부에서는 22명의 선교사를 중국체 파견하기로 결정했던 바, 트리고는 1620년 7월 22일 그중 제1진으로 5명의 선교사와 함께 7,000여 권의 서양 도서를 가지고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중에는 슈렉(Schreck, 鄧玉函), 로(Rho, 羅雅谷),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이 포함되어 있었다. 方豪, 『中國天主敎人物傳』, 126~129쪽.

 

19) [法]榮振華著, 耿昇譯, 『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冊, 88~97쪽 참고; 方豪, 『中國天主敎人物傳』, 105~110쪽. 

 

20) 서광계가 말하기를, 당시 북경 선무문 부근에 천주당(南堂을 지칭함)이 있는데, 그곳은 황제로부터 부지를 하사받은 곳이었으나, 중국 교우들이 지방에서 자발적인 헌금을 내서 건립한 교당은 강주(絳州)의 천주당이 최초이다. 黃一農, 앞의 책, 240쪽; 한림과 단곤은 모두 바뇨니(Vagnone, 중국명 高一志) 신부를 스승으로 모셨다. 黃一農, 앞의 책, 242쪽.

 

21) 한 씨 집안과 단 씨 집안의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으로 많은 서적을 출판하였고, 아울러 이 두 집안은 서적 간행에 있어 서발(序跋), 교각(校刻), 중각(重刻), 수윤(修潤) 등에 참여하였는데, 그러한 서적은 알레니(艾儒略)의 『三産論學紀』, 트리고(金尼閣)의 『西儒耳目資』, 로(Giacomo Rho, 羅雅谷, 1593~1638)의 『天主經解』, 『齋克』 및 바뇨니(高一志)의 『童幼敎育』, 『西學齊家』, 『修身西學』, 『聖母行實』, 『譬式警語』, 『空際格致』, 『神鬼正紀』, 『譬學』, 『天主聖敎四末論』, 『達道紀言』, 『寰宇始末』 등의 책이 있다. 이외에 마테오 리치(利瑪竇)의 『西國記法』의 서(序)를 쓴 朱鼎澣(숭정14년 鄕貢), 바뇨니(高一志)의 『斐錄答滙』를 다시 출판한 楊文章 및 『十二位宗徒像贊』을 다시 쓴 馮文昌 등도 모두 강주 사람이며, 그들은 모두 천주교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로는 朱鼎澣은 서(序)를 쓴 곳이 경교당(景敎堂)이라고 했고, 馮文昌 역시 스스로 강주 천주당에서 썼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서구의 선진문명이 명말 혼란한 시기와 서양선교사의 역산, 화포, 철학과 종교사상은 지식인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하였고, 많은 사대부가 이러한 서학과 서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당시 유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강주에서 천주교가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도움을 준 사람이 한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黃一農, 앞의 책, 242~243쪽 참조. 또 바뇨니가 쓴 『四末論』의 제2권 심판 부분에서도 예수회 선교사 바뇨니가 술(述)하고 하동(河東) 우암거사(寓菴居士) 한림(韓霖), 화승거사(火乘居士) 단곤(段袞)이 열(閱)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 등을 볼 때 그들의 역할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22) 바뇨니의 무덤은 단 씨 형제가 山西省绛州城에서 서쪽으로 2.5km 떨어진 단씨들의 집성촌인 단가장(段家庄)의 토지 5무(五亩)를 희사해서 그곳에 무덤[高崖坟]을 쓰고 장사를 지냈다. 바뇨니의 분묘가 있는 곳은 이후 강주교구의 교회 묘지가 되었는데, 현재 단가장(段家庄) 교회 묘지로 불리며,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묘지가 되었다.

 

23) 黃一農, 앞의 책, 281쪽.

 

24) [法]榮振華著, 耿昇譯,『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92쪽.

 

25) Margiotti, Il catholicismo nello Shansi dalle origini al 1738, p. 107; Dehergne, Répertoire des Jésuites de Chine de 1552 á 1800, p.356; 王治心, 『中國基督敎史綱』, 131쪽 등의 내용은 黃一農, 앞의 책, 288쪽의 각주4) 재인용.

 

26) 黃一農, 앞의 책, 288~289쪽.

 

27) 黃一農, 앞의 책, 289쪽.

 

28) 文德泉, 「作爲皇家使者的一名耶穌會士墓葬」 『1594―1994澳門聖保祿學院四百周年論文特輯』, 1994年, 234쪽.

 

29) [法]榮振華等著, 耿昇譯,『16―20世紀入華天主敎傳敎士列傳』, 209쪽; [法]榮振華著, 耿昇譯, 『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補編』 (下冊), 140쪽.

 

30) 트루농(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 鐸羅, 1668~1710): 이탈리아 토리노 사람으로 로마 교황청의 교황사절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의례논쟁의 논쟁 중심에 서게 되었다. 1705년 북경에 도착했고, 1705년 12월 31일에 트루농은 강희제를 처음으로 알현했고, 비공식적으로는 강희제와 창춘원에서 사냥 등을 하였지만, 공식적으로 1706년 6월 29일 두 번째로 강희제를 알현했다. 이후 1707년 트루농은 건강의 핑계로 강희제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사절은 남경으로 갔고, 예수회 천주교 선교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경 선언’을 발표하여 중국천주교도의 조상제사를 금지시켰고, 이로써 강희제가 명령을 내려 중국 밖으로 쫓아냈으며, 마카오에서 감금되었다. 트루농은 이미 1707년 8월 1일 교황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되었으나, 포교성성에서 파견 선교사 6명이 마카오에 도착해서 추기경의 붉은 비레타(사제 각모)를 전달받은 다음 추기경 서임 예식을 거행했다. 1710년 1월이었다. 당시 마카오의 포르투갈 사람들은 트루농이 마카오에서 스페인의 배를 타고 마카오를 떠날 것이라는 의심을 갖고 있었으며, 강희제는 또 명령을 내려, 유럽으로 보내진 중국 사신들이 중국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트루농을 마카오를 떠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다. 트루농은 중국에서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된 사람이었다. 그는 같은 해인 1710년 6월 8일 마카오에서 사망했다.

https://zh.wikipedia.org/wiki/%E9%93%8E%E7%BD%97 이후 교황청의 두 번째 특사인 메짜바르바가 강희 황제를 알현하고 유럽으로 돌아갈 때, 마카오에 들러 투르농의 유해를 수습해서 유럽으로 돌아갔다.

 

31) [法]榮振華等著, 耿昇譯, 『16―20世紀入華天主敎傳敎士列傳』, 282쪽의 665. 艾遜爵(Provana, Antonio Francesco Giuseppe)司鐸, 義大利人 참조.

 

32) 명대 흠천감(欽天監)의 천문과(天文科)에 속해 있으며, 별자리들을 관찰하고, 시일(時日)을 헤아렸던 종9품직이다. 叢書集成初編, 『歷代職官表』 10冊, 卷三十五, 中華書局, 1985年, 937~938쪽; 천문생(天文生)은 만주인 2명, 한인 31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九品 관대(冠帶)를 했으며, 9품의 급여를 받았다.

https://baike.baidu.com/item/%E5%A4%A9%E6%96%87%E7%A7%91/13787810

 

33) 1720년 7월 18일 예수회 순시원인 라우레아티(Giovanni Laureati, 중국명 利国安) 신부가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 『耶穌會欓案, 羅馬』에서 번수의는 천문생(天文生)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문생은 천문국(天文局)내의 하급 관리로 해석되기도 하나, 이 칭호는 최소한 18세기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고, 중국의 신부들은 이 칭호를 취득하여 중상계층의 지위를 얻었고, 아울러 법률적인 보호를 받았다. 번수의는 형식상 천문생의 직책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魯利, 「路易·範守易和澳門」 『1594―1994澳門聖保祿學院四百周年論文特輯』, 1994年, 230쪽의 각주 3) 재인용; 역시 번수의의 북경에서 한 일을 볼 때, 주야로 교대하는 천문생의 역할을 수행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되나, 천문생이라는 직책을 얻고 있었다는 것은 사회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는 방편으로 택했던 것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고 할 수 있다. 단 魯利의 이 논문자료에서는 範守義를 유일하게 範守易라고 언급하고 있다.

 

34) 당시 흠천감 감정으로는 클레멘스11세 교황의 중국의례 금지에 반대하던 페레이라(Thomas Pereira, 중국명 徐日昇, 1645~1708)가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이었다.

 

35) 方豪, 『中國天主敎人物傳』, 498쪽.

 

36) 魯利, 앞의 논문, 230쪽의 각주 4) 재인용.

 

37) 方豪, 『中國天主敎人物傳』, 501쪽에서는 피스터의 『在華耶穌會士列傳』 프랑스 원본 310쪽에 의하면 그의 묘비에 1709년에 강주에서 태어났고, 1709년에 로마 예수회에 입회했다고 하며, 신학을 마친 후 신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38) 이 부분은 文德泉, 「作爲皇家使者的一名耶穌會士墓葬」 『1594―1994 澳門聖保祿學院四百周年論文特輯』, 1994년, 236쪽에서는 오기라고 말하고 있다.

 

39) [法]榮振華等著, 耿昇譯,『16―20世紀入華天主敎傳敎士列傳』, 282쪽.

 

40) 소노와 그의 자식들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方豪, 『中國天主敎人物傳』, 501~515쪽.

 

41) 강희제 사후 옹정제의 천주교 탄압에서 천주교를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황족에 대한 전교를 통해 박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에서 전교에 대한 탄압과 외국인 선교사들의 축출 등이 일어났으나, 번수의는 이러한 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으므로 소노에 대한 전교 신부를 자원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42) 1735년(옹정13년) 예수회 중국지역 부회장의 보고에 의하면 번수의는 1년 전에 성인 298명, 아동 315명에게 세례를 주어고, 1260번의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1246명에게 성체를 분배했다고 보고하며, 가장 우수한 선교사라고 칭찬하고 있다. 1743년 정정부(正定府)에서는 실명한 이름 있는 유학자에게 세례를 주고 나서 그 유학자의 눈이 바로 시력을 되찾게 되자, 백 여 명이 세례를 받으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方豪, 『中國天主敎人物傳』, 502쪽.

 

43) [法]榮振華著, 耿昇譯,『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下冊, 中華書局, 1995年, 680~683쪽.

 

44) [法]榮振華著, 耿昇譯,『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冊, 中華書局, 1995年, 208~209쪽; 자세한 내용은 본 논문 『신견록』 번역에서 언급하고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方豪, 『中西交通史』 下冊, 854쪽 참조.

 

45) 方豪, 『中西交通史』(下冊), 855쪽. 

 

46) 方豪, 『中西交通史』(下冊), 855~856쪽. 

 

47) 바이아(Bahia)주의 도읍지: 바이아(Bahia)주의 크기는 프랑스 본토와 면적이 비슷하다. 바이아란 포르투갈어로 ‘만’을 뜻하는 단어로 주도인 사우바도르가 위치한 만인 ‘모든 성인의 만 (Bahia de Todos os Santos)’이다. 브라질을 발견한 후 일대를 탐사하던 포르투갈 함대가 이 만을 발견한 날이 11월 1일로 가톨릭의 ‘모든 성인 대축일’이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현재는 브라질 동북부 바이아주의 주도인 사우바도르(Salvador)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곳은 1549~1763년까지 포르투갈령 브라질의 행정중심지였다.

 

48) 리스본의 타구스(Tagus)강을 지칭한다.

 

49) 여기에서 품(品)을 년으로 해석하여, 소학은 4년, 중학은 2년, 대학은 3년의 기한으로 학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50) 당시 포르투갈 국왕은 주앙5세(1689~1750)로 1706년부터 1750년까지 재위에 올랐던 왕이다. 1709년에 왕을 알현하였으므로, 이때 주앙 5세의 나이는 20세였다.

 

51) 이 부분은 이들이 강희제의 특사라는 점에서 의문점을 갖게 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황제의 특사로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목적지인 교황이 있는 곳으로 하루빨리 가는 것이 급선무였음에도 불구하고 4개월여를 포르투갈에 있었다는 것은 교황과 교황청에서 볼 때는 다른 의심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로서는 포교성성을 건립하고 포르투갈의 선교관할권(padroado)에 대해 교황권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던 시기였음을 볼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고 판단된다.

 

52) 이탈리아 지중해(依大利亞國 地中海): 이곳에서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하여 스페인의 안달루시아로 지나는 지중해를 말한다.

 

53) 원문에는 巴斯尼亞國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斯巴尼亞國의 오기로 스페인을 말한다.

 

54) 원문에서는 格里伐果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라틴어 Oliva의 음역으로 올리브 열매를 말한다.

 

55) 이 강은 아르노(Arno)강으로 팔테로나산에서 발원하여 토스카나주를 거쳐 지중해로 흘러들어 간다.

 

56) 카스텔 간돌포: 중국어로는 석마산(石馬山)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Castore와 Pohuce의 조각상으로 유명한 곳으로 현재에는 Castel Gandolfo라고 한다. 이 카스텔 간돌포는 교황의 여름 별장이 있는 소도시이다. 카스텔 간돌포 중심길 끝에 교황의 여름 별장인 교황궁(Palazzo Apostolico, Palazzo Pontificio)가 있다.]

 

57) 이것은 아쿠아 클라우디아(Aqua Claudia)를 말하는 것으로 로마의 수도교로 칼리굴라(서기 12~41년) 황제가 즉위했던 서기 38년에 공사를 시작했으며, 칼리굴라 황제의 사망이후 미완으로 끝난 공사를 클라우디우스(서기 10~54년) 황제가 이어받아 진행하면서 서기 52년에 완공된 것이다. 아쿠와 아니오 베투스, 아쿠아 아니오 노부스, 아쿠아 마르키아 등의 여타 수도교와 묶어 ‘로마의 4대 수도교(水道橋)’중의 하나로 불렸고, 로마의 수도교 책임자로서 수도교에 대한 책 『수도교에서』(De Acquaeductu)를 쓴 프론티누스는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움 수도교”라고 칭한 바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BF%A0%EC%95%84_%ED%81%B4%EB%9D%BC%EC%9A%B0%EB%94%94%EC%95%84

 

58) 가톨릭에서 미사 때 성체와 관련되어 사용하는 제기를 성작(聖爵), 성반(聖盤), 성합(聖盒)이라고 말한다.

 

59) 제의(祭衣): 미사때 사제가 착용하는 옷으로 전례에 따라 제의 색깔에 차이가 있다. 대표적으로 7가지 색의 제의가 있다. 흰색은 영광과 결백, 기쁨을 상징하고, 빨강색은 뜨거운 사랑과 승리의 피를 의미한다. 녹색은 생명의 희열과 희망을 상징하며, 보라색은 참회와 보속을 상징한다. 검정색은 슬픔과 죽음을 상징한다. 장미색은 참회와 보속을, 황금색은 환희와 성대함을 표상하는 색이다. 『로마 미사경본 총지침』 85~86쪽의 346항 참조.

https://missale.cbck.or.kr/Ebook.

 

60) 로마의 귀족 조반니 부부를 지칭한다.

 

61)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을 성모설지전(聖母雪之殿)이라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62)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Basilica of St. John Lateran)이다. 가톨릭에서는 말하는 바실리카는 교황에 의한 특권을 받는 가장 급이 높은 성당을 가리키는데, 로마의 4대 바실리카는 앞에서 말한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으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바실리카를 비롯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바실리카(성모 마리아 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바실리카(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바실리카(성 베도로 대성당)이다.

 

63) [라)Columna Centenaria Divorum Marci et Faustinae, 이)Colonna di Marco Aurelio]로 이탈리아 로마 콜론나 광장에 있는 고대 로마의 전승 기념탑이다. 나선형의 부조가 들어간 도리아 양식의 기념탑이며, 로마 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기념해 세워졌고, 트라야누스 원주의 모델이 되었다. 원문에서는 중국어로 ‘石空塔’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안이 비어 있어서 석공탑으로 말하고 있으며, 기둥내부 중앙에는 190개의 계단이 있어, 기둥 꼭대기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으므로, 로마 풍경을 볼 수는 없다. 꼭대기에는 원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조각상이 서 있었으나, 1589년 식스투스 5세(Sixtus Ⅴ) 교황의 명령으로 1589년에 바오로 성인의 청동상으로 대체되었다. 참고로 로마에는 3개의 유명한 둥근 기둥 즉 원주(圓柱)가 있는데, 이것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개는 트라이아나 원주(La Colonna Traiana)와 성모 무염시태 원주(La Colonna dell’lmmacolata)이다. 트라이아나 원주는 대략 40미터의 높이로 되어 있는 기둥에 2,600개가 넘는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고 하며, 기둥내부에는 기둥꼭대기로 이어지는 185개의 나선형 계단이 있다. 1588년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Ⅴ) 교황에 의해 성 베드로의 청동상이 기둥 꼭대기에 설치되었다. 교황 비오 9세(Pius Ⅸ)에 의해 1854년 12월 8일 성모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가 가톨릭 교의로 공식 선포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스페인 광장에 높이 30m 성모 무염시태기념비[Mariae Virginia Genitrici Dei]가 세워졌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5%B4%EC%BF%A0%EC%8A%A4_%EC%95%84%EC%9A%B0%EB%A0%90%EB%A6%AC%EC%9A%B0%EC%8A%A4_%EC%9B%90%EC%A3%BC;

http://www.360doc.com/content/18/1209/11/36158596_800398037.shtml; 손준식 등 역., 앞의 책, p.324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둥(Column of Marcus Aurelius, 完石空塔)이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完은 양사로 보아 石空塔으로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견해이다.

 

64) 이것은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Collosseum)을 설명한 것이다.

 

65) 천사의 다리[이)Ponte Sant'Angelo]로 중국어로는 天神橋라 하는데, 하드리아누스의 다리라고도 불리기도 하고, 과거 순례자들이 이 다리를 통해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갔으므로, ‘성 베드로의 다리’라고도 하며,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 천사의 성으로 불리는 하드리아누스의 영묘이다. 후일에는 요새와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으로 가기 위해 134년에서 139년 사이에 테베 강 위에 건립되어 있는데, 로마 지역 중심부를 리오네라는 명칭으로 행정구획하고 있는데, 리오네 폰테(현재는 제5리오네)와 리오네 보르고(현재는 제 14리오네)를 이어주고 있다. 이 다리에는 10개의 천사상이 조각되어 있다.

 

66)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은 그리스도의 수난 당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 도구들을 손에 든 천사상 10점의 작품을 만들어 천사의 다리에 설치했는데, 이는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대작 가운데 하나로 취급받는다. 특히 “I.N.R.I.”(“나자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라틴어 이니셜)라는 글자가 새겨진 두루마리를 지닌 천사상과 가시 면류관을 지닌 천사상 등 두 점의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베르니니 자신의 힘으로만 완성했다. 그러나 이 천사상들은 클레멘스 9세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감상하기 위해 가져가 버렸으나, 오늘날에는 로마에 있는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에서 보관하고 있다. 10개의 천사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기둥을 든 천사, 채찍을 든 천사, 가시 면류관을 든 천사, 손수건을 든 천사, 긴 웃옷과 주사위를 든 천사, 못을 든 천사, 십자가를 든 천사, 두루마리를 든 천사, 스펀지와 초를 든 천사, 창을 든 천사이다. 베르니니가 다리 위의 조각상들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기에 앞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두 사도의 조각상들만을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67) 원본의 爆臺는 炮臺의 오자로 보인다.

 

68) 포(抱)는 1포는 양팔로 감싼 정도의 너비. 한 아름으로 말하기도 한다.

 

69) 번수의의 착각으로 쓰여 진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성 베드로 성당에는 예수의 수난상이 없으며, 4명의 성인 청동상이란 베드로의 의자(Cathedra Petri) 앞쪽 두 다리를 잡고 있는 서방교회의 교부인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뒤쪽 두 다리를 잡고 있는 동방교회의 교부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성 아타나시오를 말한다고 하고 있다. 손준식 등 역, 앞의 책, pp.325~6 참조. 내용에서 성인들의 이름은 가톨릭에서 쓰는 이름으로 고쳐 기록했다.

 

70) 게르마니아(Germania, 熱爾瑪尼亞)는 신성로마제국을 말하고 현재의 독일이다.

 

71) 갈리아(Gallia, 厄勒西亞)는 현재의 프랑스이다. 

 

72) 세 분수(트레 폰타네)를 설명한 것으로 현재는 사도 바오로 순교터 세 분수 성당(Chiesa di Tre Fontane)의 제대가 위치해 있다. 지금의 사도 바오로 순교 기념성당은 1221년에 축성된 것으로 사도 바오로의 머리가 튀어 오른 곳은 제단으로 바뀌었다. 불이 켜져 있는 첫 제대에서 14걸음 옆으로 두 번째 제대, 그 14걸음 옆에 다시 세 번째 제대가 있다. 부활절을 앞둔 성금요일이 되면 교황은 이곳에서 십자가의 길 14처를 시작한다. 1867년 이래 지금까지 트라피스트 수도회가 이 성지를 관리하고 있다. 이곳 성당과 성 바오로 성당과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73) Frascati로 로마에서 24km 떨어져 있으며 경관이 아름다워 별장이 많은 지역이다.

 

74) Tivolli로 로마에서 약 40km 떨어져 있고, 폭포가 많은 피서지이다. 가장 아름다운 곳은 Villa d’Este이다. 이곳은 1550년 건축되었다고 한다.

 

75) Vesuvio 화산을 말하는 것이다.

 

76) 성 야누아리오[라틴어)Sanctus Ianuarius, 중국명 挐祿]의 피: 성 야누아리오의 피는 에우세비아라는 이름의 여성이 성 야누아리오가 참수당하면서 흘린 피를 유리병에 담아 정성스럽게 보관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나폴리 대성당에서는 성 야누아리오를 기념하여 1년에 세 차례 축제를 지낸다. 성 야누아리오의 축일인 9월 19일, 성 야누아리오가 나폴리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된 12월 16일 그리고 성 야누아리오의 머리와 몸통이 다시 재결합한 날인 5월의 첫 번째 토요일이다. 이날마다 사제가 성 야누아리오의 혈액이 들어간 앰풀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데, 때에 따라서 딱딱하게 응고되었던 혈액이 액체 상태로 변한다. 그러면 사제는 테 데움(Te Deum; ‘우리는 당신을 주님으로 찬미하고 받들겠노라’는 라틴어 찬송가)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이러한 피의 기적으로 인하여 나폴리는 ‘피의 도시(urbs sanguinum)’라는 명칭으로도 불리고 있으나, 이 피의 기적은 성 야누아리오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성녀 파트리치아와 산 그레고리오 알메노 수도원에 있는 성 요한 세례자 그리고 라벨로에 있는 성 판텔레온((St. Pantaleon; 의사들의 수호성인, 7월 27일 축일)의 피 역시 성 야누아리오의 피와 마찬가지고 평상시에는 응고되어 있다가 일정한 시기가 되면 액화되는 기이한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77) 여기서 ‘若翰’은 성 요한 세례자(St. Joannes Baptistae)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반 성인인 경우 성인이 사망한 날을 기념으로 축일을 정하는데, 요한 세례자는 두 번의 축일이 있다. 하나는 그의 탄생 축일이고, 다른 하나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청에 의해 헤로데가 감금되어 있던 요한 세례자의 목이 자른 날을 축일로 삼고 있다. 탄생 축일은 번수의가 말할 당시는 6월 24일이고, 8월 29일이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기념일로 축일이었다. 참고로 요한 사도는 한자로 若望으로 표기한다.

 

78) 원문에서는 ‘若翰經’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손준식 등(앞의 책, p.327 각주 35))은 “원문에는 ‘若翰經’이라고만 되어 있어 요한이 지은 요한복음, 요한1서, 2서, 3서, 요한계시록 가운데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부분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 요한 축일 미사 때에 봉독되는 성경 내용에 대한 부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若翰”은 요한 세례자를 지칭하는 말이고, “若望”은 요한 사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若翰經’은 ‘세례자 요한 성경’이라는 말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 언급되는 성경 구절’이라고 해석해야 하므로 이렇게 보는 것이 합당하다. 성 요한 축일 미사 때의 제2독서는 사도행전 13:22-26, 복음은 루카 1:57~66.80에서 모두 요한에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매년 성 요한 축일에 요한복음이나, 요한1, 2, 3서와 요한계시록에 대한 내용은 낭독하지 않으므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독서와 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현재도 가톨릭에서는 미사 중의 독서와 복음을 가, 나, 다 해로 3년을 주기로 돌아가면서 독서와 복음을 나누어 봉독하고 있지만, 같은 복음을 봉독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더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79) 대사(大赦, Indulgentia): 면벌(免罰) 또는 대사부(大赦符)라고도 하는 말로 라틴어로는 ‘은혜’ 또는 ‘관대한 용서’라는 뜻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다가 회개하고 고백(고해성사)하여 그 죄와 당연히 받을 지옥 형벌을 면하게 된 다음, 그 죄에 대한 잠벌[연옥]의 전부나 일부를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로 면제하여 주는 은사이다.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대사는 벌을 사면해 주지만 죄 자체를 소멸시킬 효력은 없다. 죄를 용서받은 유일한 통상적 방식은 고해성사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80) 원문에는 “於此往見國王, 卽聖德賢, 王賜見”에서 卽聖德賢을 모두 풀어서 번역했다. 그리고 이때의 토스카나는 왕이 아니라 대공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때의 대공은 코시모 3세(Cosimo III de' Medici (1642~1723년)으로 그는 1670년부터 1723년 사망할 때까지 토스카나의 대공이었으므로, 번수의가 방문하였을 때에는 코시모 3세를 접견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聖德賢”을 토스카나 국왕(대공)인 코시모 3세를 지칭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손준식 등 역, 앞의 책, 328쪽 참조.

 

81) 볼로냐((Bologna, 波羅尼亞): 이탈리아 북부 내륙에 있는 대학도시이다. 볼로냐 대학교(Università di Bologna)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1088년에 설립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1158년 이 대학을 공인했다. 최초 이 대학의 설립당시에는 교회법(Canon)과 민법을 강의했다.

 

82) 모데나(Modena, 莫得納):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도시.

 

83) 파르마(Parma, 巴爾瑪):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도시.

 

84) 파비야(Pavia, 巴未亞):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도시.

 

85) 밀라노(Milano, 彌辣諾): 이탈리아 북부의 최대 도시.

 

86) 스칸디나비아에서 남하한 게르만계 랑고바르디(Longobardi)족은 560년대 중후반에 북부 이탈리아의 중심 도시였던 파비아를 정복하고 그곳을 수도로 삼고 572년 공식적으로 랑고바르드 왕국을 건국했다. 이후 749년에 즉위한 리우프란트(Liutprand)는 751년 라벤나를 함락, 라벤나 총독부를 멸망시키고, 교황령인 로마까지 공격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이러한 공격에 하드리아노 1세(Hadriano I) 교황은 프랑크 왕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가롤루스(Karolus Magnus, 프랑크어 Karl)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카롤루스가 773년 랑고바르드 왕국의 수도인 파비아를 점령하고 왕인 데시데리우스(Desiderius)를 사로잡으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은 774년 멸망했다.

https://namu.wiki/w/%EB%9E%91%EA%B3%A0%EB%B0%94%EB%A5%B4%EB%93%9C%20%EC%99%95%EA%B5%AD

 

87) 번수의는 원문에서 “造物主之聖堂”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두오모(Duomo)라는 말을 이렇게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두오모는 이탈리아의 도시를 대표하는 성당을 의미하며, 대부분 대성당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집을 의미하는 라틴어 Domus가 어원으로 하느님의 집을 의미한다. 대성당은 또 카테드랄레(Cattedrale)라고도 표기한다. 또 두오모는 돔(Dome)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88) 이 성당은 밀라노 대성당(Duomo du Milano)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성당은 1386년부터 건설을 시작하였는데, 번수의가 방문했을 때에는 현재의 밀라노 대성당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의 건축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아울러 현재 밀라노 대성당의 주요 부분인 108.5m의 마돈니나(Madonnina)의 첨탑은 1762년에 세워졌으므로 당시에는 없었다. 대성당의 마지막 세부장식은 1965년 1월 6일 마지막 출입구가 열린 것을 완공일로 보고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0%80%EB%9D%BC%EB%85%B8_%EB%8C%80%EC%84%B1%EB%8B%B9

 

89) 원문의 내용은 “有大學宮, 甚多大養濟院, 具係宰相聖家祿蓋造”이라고 되어 있는데, 본고는 “학궁, 양제원, 재상과 성가락(聖家祿)” 등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재상 성 가롤로 보로메오(St. Charles Borromeo, 중국명 家祿 또는 加洛, 1538~1584)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는 밀라노 대교구장 주교에 임명되어 있었다는 것, 둘째로는 로마 교황청의 특무성성장관 즉 재상과 같은 임무를 역임한 사람이었다는 것, 셋째는 중국어 발음의 家祿은 加祿이라는 동음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이유를 덧붙인다면 훌륭한 사제 양성을 급선무임을 깨닫고 성직자들의 교육을 위한 신학교 설립 및 교구 수도단체를 활성화시켰다는 것과 1576년 밀라노에 흑사병이 창궐하자 끝까지 밀라노에 남아 병자들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식량을 나누어 주었으며, 예방법을 주지시키는 활약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보이던 그는 1584년 11월 3일 밀라노에서 46세로 사망했다. 유해는 밀라노 대성당에 안치되었으며, 1610년 11월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90) 원문에서 “波祿尼亞”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북부도시 볼로냐(Bologna)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각주 59)를 참조하면 볼로냐의 중국어음은 波羅尼亞로 말하고 있는데, 중국어에서 “羅, 祿, 洛”음은 은 혼용되어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국포털사이트 바이두(www.baidu.com)에 의하면 볼로냐를 “博洛尼亞”의 발음 형태로 표기하기 때문에 더 신빙성이 있다.

 

91) 노바라(Novara, 諾瓦辣):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주에 위치해 있는 도시이다.

 

92) 베르첼리(Vercelli, 物爾車利):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주에 위치한 도시이다.

 

93) 토리노(Torino, 都利諾):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주에 있는 도시로 주도가 위치해 있다.

 

94) 이것은 감실(龕室)를 묘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감실[龕室, 라)Tabernaculum]은 천주교 성당 내부에 고정되어 있는 상자형태의 용기로 그 안에 성찬례를 위해 축성한 제병인 성체를 넣어 모셔둔다. 감실에 성체를 보관하는 이유는 세 가지인데, 첫째는 미사 후 남은 성체를 보관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병자들에게 봉성체를 주기 위함과 임종 위험에 처한 신자가 성체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셋째로는 감실에 모셔둔 성체를 바라보며 신자들이 성체 조배를 드릴 수 있게 함으로써 성체에 대한 신심을 장려하기 위함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모든 성당에는 감실이 존재하고 있으며, 대개의 경우 감실의 앞, 옆, 위, 아래의 한 부분에 붉은 등이 켜져 있는데, 이는 감실 안에 성체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95) 토리노(Torino)를 언급하는 말로서 앞의 각주83)에서는 都利諾로 썼고, 이곳에서는 都林으로 썼고, 2006년 Torino 동계올림픽 때에는 중국어로 2006年都灵冬季奧運會라 하여, 都靈(都灵)으로 표기했다. 모두 토리노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96) 원문에서는 묵상(默想)수도원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관상수도회(觀想修道會, Ordo Contemplativus)라고 한다. 관상수도회란 영적 생활의 최고경지라 할 수 있는 관상(觀想)을 목적으로 고독과 침묵 속에서 기도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수도회를 말한다.

 

97) 이러한 것을 현재 가톨릭에서는 피정(避靜)이라고 말한다. 피정이란 성당·수도원 등에서 일정 기간 동안의 수련생활을 지칭하는 용어로 성직자·수도자·신자들이 자신들의 영신 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하여 어느 기간 동안 일상적인 생활의 모든 업무에서 벗어나, 묵상·성찰·기도 등 종교적 수련을 할 수 있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남을 뜻하며, 이러한 피정 장소로는 성당, 수도원, 피정의 집 등이 이용된다.

 

98) 원문에는 “鄂洛穌”로 되어 있다.

 

99) 로레토(Loreto, 羅勒多):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Marche)주의 주도인 안코나(Ancona)에서 22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산타 카사(Santa Casa; 성스러운 집이란 뜻으로 본문에서는 聖室로 언급하고 있으나, 다른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聖家라고 말하고도 있다.)의 성당으로 유명하다. 이 성당의 모습은 이후 세워진 중국 남당 성당의 건축 모습에서 그 유사함을 찾아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성모마리아와 그의 가족들이 살던 집이 나사렛에서 달마티아로 옮겨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때 성모마리아 집 안으로 들어간 마을 사람들이 왕관을 쓴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조각상을 발견했고 천사들이 다시 이탈리아로 집을 옮겼다고 한다. 바실리카는 후기 고딕 건축 양식과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혼합된 것이 특징이다. 1468년부터 1587년까지 걸린 공사에 줄리아노 다 마이아노(Giuliano da Maiano), 줄리아노 다 산갈로(Giuliano da Sangallo),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등의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100) 원문에는 ‘天主’로 되어 있다.

 

101) 가톨릭에서는 천사가 기쁜 소식을 알린 것[라)Annuntiatio Domini, 영)Annunciation]으로, 천사가 나타나 성모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여 장차 구세주 예수를 낳을 것임을 알려준 사건을 말한다.[신약 루가복음 1:26~38]. 이것을 “천사보희(天使報喜)”, “수태고지(受胎告知)”, “성모영보(聖母領報)”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이 사건은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6개월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102) 원문에는 ‘瑪際亞’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곳은 Dalmatia이다. 이곳은 아드리아 해를 사이로 이탈리아와 마주보고 있는 지역으로 현재는 크로아티아 지역이다. 달마티안이란 견종(犬種)의 기원이 되는 지방이기도 하다.

 

103) 원문에서는 ‘羅肋室’은 羅肋多室의 오타로 보인다.

 

104) 현재는 승덕(承德)으로 불리며,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었던 곳이다. 우리나라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이곳을 다녀온 후에 쓴 책이다. 

 

105) 『李傅相歷聘歐美記』: 李鴻章이 1896년 4월 27일부터 1896년 10월 1일 천진 도착까지 5개월 4일 동안 러시아,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를 방문하고 귀국한 후 쓴 기록이다.

 

106) “遠西修士艾先生諱□者奉命遣往泰西, 偕余同遊” 方豪, 『中西交通史』(下冊), 856쪽.

 

107) 陳方中, 『中梵外交關係史』, 78쪽.

 

108) 당시 번수의는 메짜바르바가 도착하기 이전인 1720년(강희 59년) 6월 13일에 이미 중국 광주에 도착해 있었고, 북상하여 9월 11일에 熱河에서 강희제를 알현했으므로, 강희제는 번수의를 잘 알고 있었을 때이었기 때문이다. 본 논문 9쪽 번수의 내용 참조.

 

* 중국인 이름은 1911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중국인 이름은 한자 독음으로, 그 이후의 중국인은 중국어 발음의 한글 표기법으로 표기하며, 지명의 경우는 한자 독음으로 표기함을 원칙으로 한다. 중국 인 이외의 인명은 원어 발음으로 기록하되, 괄호 안에 원문 이름과 중국 이름, 생몰연대를 기록한다.

 

** 方豪, 「樊守義著中文第一部歐洲遊記」, 『中西交通史』 下,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3, 855~862쪽.

 

[학술지 교회사학 제21호, 2022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신의식(충북보건과학대학교 교무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418685&Page=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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