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일)
(백)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화ㅣ우화

[나눔] 사랑의 보금자리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1 ㅣ No.487

'사랑의 보금자리' 이정재 이사장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움막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서울 은평구 구산동 산61.

 

바로 아래 있는 시립 서대문병원에서 퇴원한 무의탁 결핵환자들이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아예 눌러앉아 이룬 결핵환자촌이다.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판자때기와 덕지덕지 발라놓은 비닐조각은 영락없이 1950년대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움막촌은 엄연히 2001년 서울의 그늘진 구석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이정재(李正宰, 65) ㈜영성 회장은 깨진 그릇을 테이프로 붙여놓은 것처럼 위태롭게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을 32년 동안이나 어루만져왔다. 

 

그는 건물임대업 등을 해서 모은 수입 가운데 매달 2천만원 가량을 3백여 결핵환자들에게 5만~30만원씩 나눠줬고, 닭과 개를 잡아 영양을 보충해 주기도 했다. 지금까지 도움을 받은 사람은 5만명이 넘는다.

 

무엇보다 피붙이에게까지 버림받은 그들의 형제가 돼주었다. '죽음의 골짜기'로 불리던 마을을 '희망의 동산'으로 바꿔놓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李회장은 소외된 이들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았다. 평생 모은 5백 50억여원으로 최근 사회복지법인인 '사랑의 보금자리' 복지재단을 출범시킨 것이다. 

 

서울 종로 서울YMCA 부근의 금싸라기 땅 5백평(시가 5백억원) 과 인천시 내오리 산28 1만 8천 9백평(시가 30억원), 현금 26억원 등을 출연했다. 

 

'사랑의 보금자리'는 앞으로 결핵환자뿐 아니라 가난한 환자들에게 수술비, 입원비를 대주고 병든 이들을 위한 자활촌을 만들 계획이다. 어려운 형편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소년소녀 가장에겐 생계비를, 결식아동에겐 먹을 것을 주는 일도 할 생각이다. 

 

"재산을 내던진 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까워서냐구요□ 천만에요. '내가 끝내 이런 결심을 할 수 있게 됐구나'라는 감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왜 남들이 피하는 일을 나서서 해왔을까. 또 무엇 때문에 그 일에 남은 인생까지 걸고자 하는 것일까. 해답은 그의 기구한 인생역정 속에 있다. 

 

전남 장흥의 농가에서 5남 4녀 중 여덟째로 태어난 그는 목포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열여섯살 때 무작정 상경했다. 그때부터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됐다. 식사는 꽁보리밥으로 두끼만 때워도 다행이었고, 잠은 남산에 있는 토굴에서 담요 몇장을 깔고 해결했다. 이런 생활이 수년간 계속됐다. 

 

어려움 속에서도 고학으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다시 일년간 돈을 벌여 공부해 서울대 농화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는 의약품 원료를 수입해 제약회사에 공급하는 일을 시작했다. 

 

의외로 사업이 번창해 졸업 후 식품 제조에 필요한 사카린 등 인공 감미료를 만드는 일에 손을 댔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오랜 과로와 영양실조로 혹사된 몸은 끝내 '망가지고' 말았다.

 

가끔 기침이 나오다 그칠 줄 모르더니 35세 때인 70년 겨울 심하게 각혈을 했다. 당시만 해도 치명적인 질병, 결핵이었다. 적십자병원 등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으나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 고 했다. 마지막으로 시립 서대문병원을 찾았다. 곁에 있던 환자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는 통곡을 했고, 신을 찾았다. 

 

"그동안 멋대로 살아 온 것을 뉘우칩니다. 살려만 주시면 평생 나와 같은 결핵환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맹세 덕분인지 기적처럼 병이 나았다. 병원문을 나서면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신이 덤으로 주신 것'으로 받아들였고, 지금까지 그때의 약속을 굳게 지켜왔다. 

 

그에겐 요즘 간절한 소망이 하나 있다. 자신과 뜻을 같이할 사람을 찾는 것이다. 소외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은 아무래도 혼자 만으론 벅차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재산을 다 내놓고 세상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돈의 위력이 병원만큼 강하게 나타나는 곳도 없어요."

 

그는 "작은 돈으로도 사람 하나 살릴 수 있는데 돈 몇 푼 때문에 생명이 꺼져서야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중앙일보, 2001년 3월 15일, 강민석 기자]



3,51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