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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 70년 분단 70년5: 경향신문 폐간 · 복간과 4·19,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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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7-13 ㅣ No.713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5) 경향신문 폐간 · 복간과 4·19, 제2공화국


교회, 독재에 맞선 시민의 아픔을 함께하다



노기남 주교가 4ㆍ19민주혁명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경향신문 복간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출처=서울대교구 화보집 「노기남」(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4ㆍ19혁명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경향신문을 방문한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가 복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60년 4월 22일의 일이다. 당시 서울대목구에서 발행하던 일간 경향신문은 1959년 4월 30일 공보실에서 ‘신문 발간 허가 취소’ 통지서를 보내오면서 폐간된 상황이었다. 1959년 초부터 경향신문 기사를 문제 삼아 편집국장과 논설위원, 취재기자를 차례로 연행하고 있던 즈음에 터진 이 폐간 사건은 권력에 의한 언론 자유 탄압으로 비쳐 국민들을 경악시켰다. 특히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한 해 앞둔 시점이어서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로밖에 달리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의 교회 탄압이 시작돼고

경향신문 폐간과 복간 사건의 씨앗이 발아한 것은 이미 6ㆍ25전쟁 당시였다. 8ㆍ15해방 직후 조선정판사를 인수, 이듬해 10월 6일 노 주교를 초대 회장으로 창간한 뒤 정부 수립, 전쟁을 맞을 때까지만 해도 정부와는 마찰이 없었다. 오히려 좌ㆍ우익의 갈등으로 얼룩진 해방 공간에서 사실 보도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논조로 국민을 계몽하는 본연의 소명을 수행함으로써 독자들의 신뢰도도 높았고 정부와의 관계도 무난했다.

교회와 집권세력 간 관계가 틀어진 건 전쟁 발발 직후였다. 경향신문이 1950년 6∼9월 사이 벌어진 보도연맹 사건과 1951년 1ㆍ4후퇴 시기 국민방위군 사건, 1951년 2월 지리산에서 벌어진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과 관련한 이승만 정권의 도덕성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면서 교회와 정권 간 관계는 악화했다.

이승만 정권은 195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노 주교를 ‘정치 주교’ 혹은 ‘야당 주교’라고 비판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는 교황청을 통해 가톨릭 교회가 경향신문에서 손을 떼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1959년 3월 교황특사로 파견된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장관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에게 노 주교가 정부 비판과 교회의 정치 개입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민주주의를 사수하자”고 쓴 현수막을 들고 독재와 부정부패에 맞서 4ㆍ19민주혁명의 최선봉에 선 동성중ㆍ고 학생들. 이 사진은 그간 대광고 학생들로 잘못 알려져 왔으나 최근 동성중ㆍ고의 4ㆍ19혁명 백서가 나오면서 바로잡혔다. 출처=「4ㆍ19혁명의 최선봉-동성」(동성중ㆍ고등학교, 동성중ㆍ고 동창회 펴냄)


이어 그해 4월 30일 밤 미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해 지령 4325호를 끝으로 경향신문에 대한 전격 폐간을 통고했다. 경향신문 폐간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커다란 충격이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 다울링 대사도 그해 5월 1일 성명을 발표, 미군정법령 88호를 적용해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비난했다. 경향신문은 이후 폐간 처분 취소 행정소송에 들어갔고, 1년간의 지루한 대정부 법정 투쟁을 벌인다.


계속된 탄압에 시민들 거리로 나서

경향신문 폐간에 이어 국가보안법 개정,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형 등 독재와 억압의 정치는 계속됐고, 이는 결국 민중의 봉기와 저항을 불러왔다. 파국의 기폭제는 1960년 3ㆍ15 부정 선거였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된 뒤 그해 4월 10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사망한 채로 발견돼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1943∼1960)군 사체 발견을 계기로 4ㆍ19혁명이 일어났다. 장면(요한)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종용하는 뜻으로 당시 부통령직을 사임한다.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시위로 촉발된 4ㆍ19혁명은 학생들의 경무대 진출로까지 이어졌다. 특히 경찰의 실탄 발사로 맨 앞에 서서 시위를 하던 서울대 사대와 동국대생들이 흩어지면서 동성중ㆍ고 학생들이 혁명의 최선봉에 서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학생들을 호위하듯 따르던 전창기 교장과 교사들은 일제히 학생들을 엎드리게 해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었지만, 총상과 관통상 등을 입은 부상자는 12명이나 났다.

훗날 이들 동성고 시위학생 중 학생회장이던 김어상(토마스 아퀴나스) 서강대 명예교수 등 9명이 이 공로로 4ㆍ19혁명 공로건국포장을 받기도 했다. 또 혁명 당시 가톨릭학생회 담당이던 나상조 신부 등 사제들은 학생들이 집회와 시위 중에 변사할까 우려해 총탄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학생들을 돌봤다.


4·19혁명, 사회사목 활성화 이어져

서울대목구 혜화동본당 회장단은 인근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 등을 돌며 시위 중에 부상당한 학생들을 위문했다. 또한, 동국대 법정대 3학년이던 노두희(시몬)군이 시위 중에 희생당하자 노 주교는 4월 23일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직접 주례하고 고인이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원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 경향신문 발간과 반독재 투쟁, 4ㆍ19혁명과 관련된 한국 천주교회의 활동은 1960년대 이후 교회의 사회사목 활성화를 촉진했고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증대시켰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복음화에 사회 정의를 위한 투신의 비전을 통합, 한국 교회 안에서 ‘사회사목’ 활성화로 구체화했다. 이후 한국 교회가 전개한 인권과 정의 구현, 민주화 운동은 1950년대 한국 교회의 반독재 투쟁과 연결 선상에 있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12일, 오세택 기자]



민주주의 사수 현수막 들고 총탄에 맞서


4·19혁명 당시 동성고 3학년이었던 안건혁씨



- “동성 4ㆍ19 참여 세대의 고령화와 자료분실 우려에 최근 백서를 내게 됐다”며 “동성 4ㆍ19 민주혁명 기념사업회가 하루빨리 발족돼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하는 안건혁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오세택 기자


“동성 4ㆍ19의 주도자는 학생 모두였습니다.”

4ㆍ19 민주혁명 때 동성고 3학년이던 안건혁(프란치스코, 73, 의정부교구 마두동본당)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600여 명의 동성중ㆍ고 학생들과 함께 경무대, 지금의 청와대 앞에 있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에서 민주주의를 ‘사수’하고자 총탄에 맞서 민주 혁명의 최선봉에 섰던 것이다.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4ㆍ19혁명 공로건국포장을 받은 안 전 논설위원은 그러나 당시 시위에 나갔던 학생 모두가 주도자였고 모두가 수훈자라고 전했다.

“‘민주주의를 사수하자’ ‘무저항주의 데모’ 등 당시 동성중ㆍ고 학생들이 들고 있던 현수막 3개는 학교 서무실 커튼을 뜯어 만들었어요. 서울대 사대나 동국대, 인근 대광고 학생들은 현수막이 없었어요. 제 기억에 학교 이름을 쓴 현수막은 있었던 듯합니다. 아무튼 동성에서 ‘민주주의를 사수하자’는 현수막을 든 바람에 그 사진이 4ㆍ19 기념우표에도 등장했고, 훗날 4ㆍ19하면 등장하는 대표적 사진이 됐습니다. 오랫동안 이 사진은 많은 인쇄물에서 대광고 학생들로 잘못 알려져 왔는데, 최근 동성고 학생들로 확인됐습니다.”

혁명 때 동성고 학생회 학예부장 겸 신문반장을 지낸 안 전 논설위원은 그래서 2011년 동성중ㆍ고 4ㆍ19 민주혁명기념사업회를 결성, 혁명 때 집회와 시위에 참가한 동성중ㆍ고 35ㆍ36ㆍ37회들의 백서를 편찬하고 최근 「4ㆍ19 혁명의 최선봉-동성」을 발간했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960년 4월 9일에 창간호를 낸 타블로이드판 교내신문 「동성춘추」가 백서를 편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 고교에선 유일하게 발행한 월간 「동성춘추」는 지령 총 20호가 발행됐는데, 혁명 전야의 폭발할 듯한 학내 분위기부터 4월 19일 학교 교문을 박차고 나선 학생들의 항쟁 등이 상세히 기록됐다. 또 같은 해 발행된 잡지 형태의 연간지 「동성」에는 4ㆍ19에 참여한 학생과 교사들의 체험기, 비평 등이 수록돼 백서를 펴내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전했다.

안 전 논설위원은 “교내 동아리와 친한 친구끼리 미리 거사 계획을 세우고 3개의 현수막과 선언문, 수백 장의 격문 등을 준비한 덕에 4ㆍ19 당일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교문 밖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며 “모두가 영웅이었다”고 고백했다. 또 “당시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실탄을 쏠 때 시위하는 학생들을 마치 ‘호위하듯’ 함께하신 선생님들께서 ‘엎드려’ 하시는 바람에 동성 학생 중 사망자가 한 사람도 나지 않았던 게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12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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