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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인물과 영성 이야기27-29: 프라 안젤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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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11 ㅣ No.818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7) 프라 안젤리코 (상)


기도하지 않고는 붓을 들지 않았던 수도자

 

 

- 루카 시뇨렐리 작품 ‘프라 안젤리코’.

 

 

아름다움과 거룩함

 

오늘날 영성에 대한 많은 갈망이 있습니다. 영성은 참된 종교적 체험의 결실이자, 식별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거룩함과의 내밀한 만남이 존재할 때만이 이런 말들이 의미를 가지겠지요. 각 개인의 실재적 영성 체험에 있어서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힘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현대의 중요한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같은 사람이 이러한 사유를 탁월하게 전개하기도 했지요.

 

아름다움과 종교적 영성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요? 역사 속에서 많은 신비가들이 영성적 체험 속에서,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르는’ 증언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영성적 통찰은 참되고 올바를 뿐 아니라 지극히 아름다운 실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영성은 존재의 참된 아름다움을 그리워하고 알아가는 인간의 깊은 정신적 갈망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참된 존재의 실현을 아름다움으로 체험하는 것은 사실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영역에서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지성이 추구하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지혜’의, 관점에서도 역시 그러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사유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일찍이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고귀한 가치들을 ‘칼론’(kalon)이라고 표현하며 규범적 성격을 부여하였습니다. 삶의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은 궁극적으로는 이 ‘칼론’에 비추어 평가되고 상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칼론’의 본래 의미가 다름 아닌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고귀한 가치는 유용성이나 당위성을 떠나는 그 자체로 빛나는 광채처럼 아름다운 것이고, 그러기에 가장 추구할 만한 것이라는 통찰이 숨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그저 눈을 즐겁게 해주는 차원을 ‘초월’하는 것이었지요. 또 초월자의 빛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완전성의 반영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 역시 존재를 탐구하면서 그저 겉으로만 드러나는 현상과 피상성을 넘어서는 존재의 초월성의 기본적인 범주로서 참됨과 선성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생각했습니다. ‘미학’이란 그래서 본디 존재를 ‘감지’(아에스테시스)하는 능력에 대한 앎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름다움은 그 존재론적이고 영성적 뿌리와 분리된 채 추구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시각적 욕망의 대상과 동일시 돼버렸다 할까요.

 

오늘날 세상에 온갖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정말 우리는 ‘존재적’ 차원에서 아름다움을 얼마나 자주, 또 깊이 체험하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 내면의 선성을 피어나게 하고, 우리의 정신과 육신을 영성적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아름다움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얼마나 자주 체험됩니까? 아름다움과 거룩함의 내밀한 관계를 현대인의 일상에서 체험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피상적인 아름다움에 만족하고, 정화되지 않은 시각적 욕망을 충족시킬 대상만을 좇는 가운데, 현대인들은 아름다움이 사실은 자신들 내면의 영적 갈망과 본성을 충만히 실현시킬 길임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위대한 소설 「백치」에서 주인공 므이슈킨 공작의 입을 빌려 ‘아름다움만이 세상을 구원할 것’임을 장엄하게 선언하였습니다. 우리 시대에 더 어울리고 절박하게 들리는 이 말은 희망이자 동시에 역설로 여겨집니다.

 

 

프라 안젤리코의 예술세계

 

- 프라 안젤리코 작품 ‘천국의 궁정에서 영광을 받는 그리스도’.

 

 

영성이 부재한 인위적이고 피상적인 아름다움에 포위된 세상에서 한없는 피로감과 허무함을 느낄 때마다 사람을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역사 안에 존재하였던, 아름다움을 통해 종교적 신비를 투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던 위대한 영성가이자 예술가였던 인물들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생겨납니다. 그때 누구보다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수도자이자 화가였던 프라 안젤리코(1395~1445)입니다. 프라 안젤리코란 ‘천사와 같은’ 수사님이라는 뜻으로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의 사후 십여 년이 되었을 때 이미 사람들은 그를 이러한 이름으로 부르며 기억하였고 성인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시복된 것은 198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때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또한 그를 ‘모든 예술가의 주보’로 선포하였습니다. 현대 문화와 예술의 위기를 잘 통찰하고 있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아마도 이를 통해 존재의 빛 속에서 구원과 거룩한 진리를 반영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 우리 시대에도 꽃피기를 희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프라 안젤리코의 본명은 귀도 디 피에트르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이미 예술가로서 유망한 미래가 열려 있음에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그 후로 프라 지오반니 다 피에솔레(피에솔레의 요한 수사)로 불렸습니다. 수도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지만, 예술가로서도 당대에 이미 드높은 명성을 얻었고 당시 니콜라스 5세 교황이 직접 교황청으로 불러 그림을 그릴 것을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성에 초연할 수 있는 진정한 수도자적 겸손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피렌체의 대주교직에 오르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간곡히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프라 안젤리코는 도미니코회 수도자로서 수도자적 수행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깊이 체험하고 살았던 동시에 예술적 탁월함을 겸비한 드문 예였습니다. 프라 안젤리코는 르네상스의 전성기에 살았고, 그 시대에 꽃핀 새로운 탁월한 예술적 기법들을 잘 습득하였지만, 그의 예술세계의 중심에는 중세 시대에 정점에 이른 조용하고 부드러운 관상적 신비가 있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결코 붓질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할만큼 진실하고 겸허한 수도자였던 그의 삶과 영성은 그의 그림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유명한 문화사가 윌 듀란트는 그의 「문명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프라 안젤리코의 예술세계를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엘 그레코를 제외하고 어떤 화가도 프라 안젤리코처럼 그렇게 독특한 자기만의 양식을 만들어 낸 사람은 없다. 풋내기라도 그의 손길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선과 형태의 단순함은 죠토로 되돌아간다. 폭이 좁지만 가벼운 색채 조합(금색, 주홍, 진홍, 파랑, 초록)은 밝은 영혼과 행복한 신앙을 반영한다. 인물들은… 거의 낙원의 꽃들과 같은 모습이다. 이 모든 모습은 온화한 헌신, 기분과 생각의 순수함을 가진 이상적인 정신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이러한 이상적 정신은 중세의 가장 섬세한 순간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르네상스에 의해서는 두 번 다시 포착되지 않았다. 이것은 미술에 나타난 중세정신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10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8) 프라 안젤리코 (중)

 

경쾌함과 거룩함으로 결합된 예술작품들

 

 

- 프라 안젤리코.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와 프라 안젤리코의 재발견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들이 한동안 미술사에서 과소평가된 시기가 있었습니다. 프라 안젤리코 이후 서양 미술사를 휩쓴 격정적이고 드라마가 가득 찬 후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근대의 회화들과 비교했을 때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들은 너무 평화롭고 관상적이라고 생각된 것이지요. 그러나 차차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들에 담긴 예술적, 영성적 가치가 재발견됩니다. 그러면서 프라 안젤리코의 생애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는데요, 많은 이들에게 그의 예술세계뿐만이 아니라 생애와 덕성도 널리 알리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은 다름 아닌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이자 건축가이며 무엇보다도 미술사가로 이름이 높았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라 안젤리코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에 태어나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이탈리아 예술과 문예 부흥에 큰 역할을 한 코지모 1세의 후원을 받아 작품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코지모 1세는 프라 안젤리코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에 속하는 도미니코 성당의 벽화(프레스코)를 남기도록 아낌없이 지원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화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특별한 독창성을 담지는 못해서 오늘날 대부분 잊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몇 가지 건축물은 오늘날도 피렌체의 관광명소로 남아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우피치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우피치 궁, 베키오 궁과 피티 궁을 잇는 복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사리의 이름을 역사에 남게 한 것은 미술사 연구에 있어 불멸의 작품인 그의 「미술가 열전」입니다. 원제는 「위대한 건축가, 화가, 조각가의 생애」이고 보통 줄여서 「열전」(Le vite)이라고 불리는 이 방대한 저작에서 바사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200여 명의 삶과 예술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열전」은 서양 미술의 가장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 시대 미술 연구에 있어 오늘날까지도 가장 기본적인 사료일뿐더러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읽는 재미와 함께 안목과 지식을 키워주는 살아있는 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사리 자신이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당대의 대표적인 미술가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미술사가이자 미술의 흐름과 기법에 대한 이론가로서의 상당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업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사에서 ‘르네상스’라는 시대의 중요성을 확고히 자리 잡게 했다고 일컬어지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의 저자 스위스 출신으로 근대시대에 활약했던 위대한 문화사학자 야곱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 조차도 바사리의 이 저술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감탄합니다. “바사리와 그의 너무나도 중요한 저서가 없었던들, 북부 유럽, 더 나아가서 유럽 전체는 아직도 미술사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르조 바사리. 출처 위키피디아.

 

 

바사리의 이 작품이 미술사에서 지니는 가치가 가시지 않았다는 것은, 최근 독일에서 이 「열전」에 대해 45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주석과 설명을 달아 새로운 번역을 펴낸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베를린 소재의 바겐바흐 출판사에서 2015년 완간). 우리나라에서는 1986년에 세 권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이근배 역, 탐구당)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고, 이후 두 번에 걸쳐 축약본 내지 발췌본이 출판되었습니다(조르조 바사리, 「르네상스 미술의 명장들」(박일우 역, 계명대학교 출판부, 2008년), 조르조 바사리,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이근배 역, 한명출판사, 2000년)). 그러나 현재는 모두 절판 상태이고 1980년대 나온 완역본은 중고 시장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워서 도서관에서 읽어봐야 합니다. 언젠가 새로운 번역으로 완역되고, 언급되는 작품들도 수록된 새 우리말 판이 출판되기를 손꼽아 기대합니다.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세계

 

조르조 바사리는 「열전」의 한 부분을 프라 안젤리코의 생애와 예술을 기술하는데 바칩니다. 바사리의 이 저서는 시대와 함께 명성을 더해갔고 당연히 그가 극찬한 프라 안젤리코의 예술 세계도 이 책의 독자들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끌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바사리는 후대 사람들에게 프라 안젤리코가 더 널리 알려지고 정당한 평가를 받는데 큰 기여를 한 셈이지요.

 

바사리가 프라 안젤리코를 묘사한 내용들을 읽어보면 그가 참으로 이 ‘천사와 같은 수도자’의 인품과 성성에 대해 깊이 존경하고, 그의 작품들에 경탄하고 그로부터 진심으로 감동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존경과 경탄이 뛰어난 감식안과 동시대인만이 가능한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와 결부되어 그의 프라 안젤리코의 생애에 대한 기술은 그 자체로서 생애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와 주요 작품에 대한 세밀한 해설, 열정적인 예찬이 어우러진 뛰어난 입문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열전」의 첫 단락을 소개해봅니다.

 

“피에솔레에서 온 죠반니 안젤리코 수사, 즉 세속명으로는 귀도라고 불렸던 그는 훌륭한 수도자이자 뛰어난 화가였다. 그는 다른 위대한 예술가로서, 또한 훌륭한 수도자로서 찬양받고 기억될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만일 세속에서 시민으로서 살아가려 했다면, 그가 이미 어린 시절 익힌 뛰어난 예술적 기능으로 하여, 부유해졌겠지만, 그는 이러한 부와 명예에 관심을 갖지 않고, 대신에 깊이 숙고하고 선량한 마음으로 결심하기를, 그의 깊은 본성에 귀 기울여, 평화를 얻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하였다.”

 

바사리는 프라 안젤리코에 대한 책에서 그의 생애에 있었던 성덕을 보여주는 데 있어 여러 에피소드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그가 당시 교황이 제안한 피렌체의 대주교직을 거절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를 바사리는 그의 겸손과 현명함, 수도자로서뿐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소명의식의 표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프라 안젤리코는 당대에 가장 인기 있고 높이 평가받는 화가로 알려져서 수많은 의뢰를 받았었고, 피렌체만이 아니라 오르비에토나 토리노, 피사, 그리고 로마에서도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여러 조수들을 이끌고 긴 시간 타지로 여행하고 머물러야 했는데, 이는 당연히 수도자로서는 삶이 흐트러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겸손함과 현명함의 품성과 성덕은 이러한 조건에서도 그로 하여금 훌륭한 수도자로 사는 것이 가능하게 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사리 역시 프라 안젤리코의 성덕과 경건함은 수도 규칙에 대한 충실한 순명에서 왔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사리의 글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그가 프라 안젤리코의 개별작품을 설명할 뿐 아니라 그의 예술적 위대함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대목입니다. 그는 먼저 프라 안젤리코가 보는 이에게 흠 없는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즐거움은 그의 성품과 성성과 마찬가지로 ‘경쾌함’과 ‘거룩함’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기에 그렇다는 사실을 짚어냅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17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9) 프라 안젤리코 (하)

 

겸손함과 순수함의 힘, 천사들은 새처럼 날아오르고

 

 

- 프라 안젤리코 작품 ‘십자가에서 내림’.

 

 

가벼움과 경쾌함의 영성

 

프라 안젤리코의 생애에 대해 알게 되고, 그의 작품들을 즐기고 감상하면서 우리는 깊은 영성과 가식 없는 거룩함은 오히려 가벼움과 경쾌함과 부드러움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미술사가 바사리가 잘 통찰한 점이기도 하지요. 사실 영성을 말하면서 심각함과 엄숙함만을 과시하고 다른 이들을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지배하고 지시하려는 태도를 자주 보인다면 그것은 어쩌면 숨겨진 우월감이나 열등감, 공격성, 권력욕 같은 왜곡된 마음의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교회 역사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라 안젤리코 그림으로 만나게 되는 순수하고 부드러우며 ‘가벼이 날아오르는’ 듯한 인물과 정경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할 뿐 아니라,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라 안젤리코의 성화를 감상하며,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글이 있습니다. 추리소설 「브라운 신부」로 너무나 유명한, 20세기 초엽에 활동한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이고 가톨릭 신앙의 뛰어난 변론자였던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G.K. Chesterton, 1874~1936)의 대표작인 「정통(오소독시)」에 나오는 한 대목인데요, 여기서 체스터턴은 독자들에게 프라 안젤리코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영성의 본질이 부드러움과 가벼움과 경쾌함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가 이 글을 쓰던 시기가 근대의 산업적, 경제적 발전에 따라서 사람들이 효율성과 기술적 진보로 대표되는 외적인 힘에 도취되었던 시기였으며, 사회 안에 허위의식이나 자기중심적인 태도들이 팽배해 있던 시대였음을 생각하면, 체스터턴의 문제의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통찰이며, 자주 언급되는 명문이기에 좀 길긴 하지만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재빠른 것이 가장 부드러운 것이다. 새가 활동적인 이유는 부드럽기 때문이다. 돌이 무력한 것은 딱딱하기 때문이다. 돌이 본질상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딱딱함은 곧 연약함이기 때문이다. 새가 본성상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은, 허약함이 곧 힘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힘 안에는 일종의 가벼움, 스스로 공중에 있을 수 있는 경쾌함이 있다. 기적의 역사를 연구하는 탐구자들은 위대한 성자들의 특징이 ‘공중부양’의 능력에 있는 것으로 엄숙하게 인정했다. 사실은 한 걸음 더 나갈 수도 있다. 위대한 성자들 특징은 가벼워질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이다. 천사들이 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을 가볍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언제나 그리스도교 세계의 직관이었고, 그중에서도 그리스도교 미술의 본질이었다. 프라 안젤리코가 모든 천사를 새로 그렸을 뿐 아니라 거의 나비로 그리다시피 한 것을 기억하라. 가장 진지한 중세 미술이 온통 가볍게 펄럭이는 휘장들로, 재빠르게 돌아다니는 발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전 라파엘풍의 화가들이 진정한 라파엘 이전의 화가들을 닮을 수 없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번 존스는 결코 중세의 심오한 가벼움을 되살릴 수 없었다. 옛 그리스도교 그림들에서 모든 인물 위에 등장하는 하늘은 푸른색 내지는 황금색의 낙하산과 같다. 모든 인물은 위로 날아가서 하늘을 둥둥 떠다닐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거지의 누덕누덕한 외투는 천사의 번뜩이는 깃털처럼 그를 위로 끌어올릴 것이다. 반면에 무거운 금으로 장식한 왕들과 보라색 예복을 입은 거만한 자들은 그 본성상 아래로 내려앉을 것이다. 거만함은 가벼움이나 공중부양으로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만심은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내려 장중함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그는 자기를 중시하는 쪽으로 ‘가라앉게’ 된다. 하지만 자기를 잊어버리는 쾌활한 쪽으로 올라와야 한다. 사람은 공상 속으로 ‘떨어지고’ 푸른 하늘로 올라온다. 자기를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상 쉽지만 잘못된 성행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다. 좋은 농담을 쓰는 일보다 좋은 논설을 쓰는 일이 더 쉬운 법이다. 엄숙함은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웃음은 일종의 도약이기 때문이다. 무거워지는 것은 쉽고 가벼워지는 것은 어렵다. 사탄은 중력에 의해 떨어졌다.”(G.K. 체스터턴, 「정통」(홍병룡 역, 상상북스, 2010), 240~241쪽)

 

 

소박한 일상과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초월의 문턱

 

체스터턴은 프라 안젤리코가 상징하는 가벼움과 경쾌함과 부드러움의 영성과 미학이 동시대를 지배하던 병적인 정서와 생각들을 치유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해당될 것 같습니다. 사회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좀 더 건강하고 바람직한 영성과 신앙의 공기가 순환하게 하는데 있어 프라 안젤리코의 성화를 묵상하는 것은 적지 않은 영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은 순수한 마음과 정화된 의지를 가지고 소박한 삶을 살았던 그의 생애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뛰어난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Antonio Tabucchi, 1943~2012)는 언젠가 프라 안젤리코에게 찬사를 보내는 짧지만 매혹적인 이야기를 썼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타부키는 프라 안젤리코의 소박한 성정을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로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자신을 수도원 입회시에 세속에 놓고 온 이름인 구이돌리노로 여기고 있던, 피에솔레의 지오반니 수사는 그날도 채소가 있는 정원에서 양파를 캐고 있었다. 정원 일은 그의 일이었고, 그가 세속을 떠나 수도원에 온 다음에도 그는 결코 자신의 아버지 피에트로의 소명이기도 했던 이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했다. 지오반니 수사는 토마토와 호박과 양파를 성 마르코 수도원에서 정성껏 길렀다.”(Antonio Tabucchi, I volatili del Beato Angelico, 1987/영어번역 The Flying Cratures of Fra Angelico, 1991)

 

성 마르코 수도원은 다름 아니라 프라 안젤리코가 당대 최고의 부와 명성, 권력을 지녔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 코지모 1세 후원으로 재건하고 그가 수많은 걸작들을 프레스코 벽화로 남겨놓은 곳입니다. 그렇지만 타부키가 잘 이해했듯 이러한 위대한 작품들을 프라 안젤리코는 소박한 일상과 평범하고 충실한 수도사의 본분 속에서 일궈놓았습니다. 수도원 형제들을 위한 애덕으로 그가 수도사의 작은 개인방에 그려놓은 소박한 묵상을 위한 그림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큰 감동을 받습니다. 흔히 프라 안젤리코는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초월의 문턱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화가로 칭송받습니다만, 그의 삶을 생각해보면, 초월의 문턱은 언제나 소박한 일상과 온유하며 순수한 마음 앞에 나타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24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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