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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근세 중국천주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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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15 ㅣ No.1540

근세 중국천주교회에서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의 부상

 

 

국문초록

 

천주교의 핵심교리에 해당하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적극적인 설파는 명말 중국천주교회에서도 중요한 과제였다. 명말 삼위일체론의 부상은 1615년 바뇨니의 『교요해략』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교요해략』은 중국 천주교사상 최초로 삼위일체론 교리를 전면적으로 드러낸 한문서학서다. 리치 시대까지는 중국에서 문인신자들에게 문서선교 형식의 체계적인 삼위일체론 제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리치의 『천주교요』는 중국교회에 최초로 삼위일체론을 제시한 Doctrina Christiana로서 의의가 있으나 교리의 전달 차원에서는 제한적이었다. 리치 시대 이후에야 삼위일체론이 교리서 체제에서 전면적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사실은 2세대 교회에 이르러 명말 중국교회가 성숙해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가 명말 중국천주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삼대지주인 서광계, 양정균, 이지조를 비롯한 명망있는 문인신자들의 입교가 확대된 이후 교회의 양적, 질적 성장이 두드러진 시점이라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치 사후 1610년대 중반 이후에야 본격화된 삼위일체론의 부상은 교회의 성장에 고무된 2세대 예수회 선교사들이 드러낸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해석된다.

 

 

Ⅰ. 서론

 

1605년 5월 10일, 북경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이어가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멀리 로마에 있었던 동료 코스타 신부에게 답신을 보냈다. 서한 속에서 리치는 자못 자랑스럽게 최근 입교한 중국인 엘리트 신자 서광계를 길게 소개하였다. 북경의 관료로서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서광계라는 진사가 3년 전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그는 황제에게 직접 상주문을 올릴 정도로 영향력이 큰데다 품행이 비범하고 조정에서도 명망이 높다 하였다. 리치는 흡사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한 교우와 같다며 서광계의 신심과 행동을 한껏 치켜세우면서, 그가 장차 중국교회를 견고하게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는 한 가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일화를 언급한다. 바로 서광계의 꿈 이야기이다.

 

“한번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는 예전에 남경에서 저를 만났을 때 ‘한 분이신 천주를 공경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와서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커다란 묘당을 하나 보았는데 거기에는 세 칸으로 된 소성당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칸에는 어떤 노인상이 하나 있었고 사람들이 말하길 천주 성부라 하였다 합니다. 두 번째 칸에도 상이 하나 있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길 천주 성자라 하였다 합니다. 세 번째 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첫 번째, 두 번째 칸에 있는 상에 예를 표하고 세 번째 칸에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훗날 그가 성교의 도리를 배우고 나서야 그 때 꿈속에서 본 것이 삼위일체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다만 그는 당시 교우들로부터 꿈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들었기에 알리지 않았다 합니다. 며칠 전 제가 그와 교리를 논할 때 ‘천주가 어떨 때는 꿈에 나타나 비밀을 보여주기도 한다’ 했더니, 그제야 제게 꿈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가히 천주께서 그를 택하시어 중국 성교의 견고한 기둥으로 쓰시려고 그에게 기적을 베풀어 가르침을 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1)

 

서광계의 이 꿈 이야기는 교회사 차원에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한 가지 사안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바로 명말의 초기 중국천주교회에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소개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또 설명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을 실증할 수 있을지 여부이다. 비록 서광계가 입교 전 이미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그리스도교 교의를 담은 복수의 한문서학서를 섭렵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시기 구체적인 교리지식의 습득에 대해서는 추적하기 쉽지 않다. 위 서한을 통해서 서광계가 입교를 결심한 직후부터 1605년 사이에 리치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대한 일종의 ‘강학’을 진행했다는 것도 확인된다. 서한 속에서 추론해 보면 서광계가 자신의 꿈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일종의 계시였음을 깨달았던 시기는 대략 1601년 회시에 낙방한 후부터 세례를 받은 1603년 사이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는 없을까. 한 가지 유효한 방법은 이 시기 유통됐던 현존하는 한문서학서 교리서류2)를 역추적하여 삼위일체론의 설명이 어떻게 시작되고 이루어져 왔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이어가고 싶은 이유는 당시 그리스도교의 교리교육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설명이 중국인 예비신자들에게 ‘지체 없이’ 전해져야만 하는 소위 핵심 교리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우선 삼위일체론은 같은 뿌리를 가진 유대교나 이슬람교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도교만의 가장 뚜렷하게 구별되는 독특한 교리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강조돼 왔다. 그만큼 그리스도교 성립 이래 오랜 기간 비평과 논쟁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기초적인 교리서에서부터 가장 고차원적인 신학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빠지지 않고 등장해 왔다.3)

 

또한 이 문제는 16세기 후반 문답식교리서의 정립이라는 특수한 맥락을 고려해 볼 때에도 규명이 시급한 사안으로 보인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는 16세기 전반기 동안 루터와 칼뱅의 주도로 프로테스탄트의 문답식 기초교리서가 대유행했다. 이에 자극받은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교리서 출판을 의결하였고, 1566년에는 마침내 『로마교리서』를 출판하였다.4) 이어서 예수회에 의해 주도된 문답식 교리서류가 카니시우스와 벨라르미노에 의해 차례로 저술되었는데, 이들 16세기 후반 예수회 신학자들의 교리서에서 확인되는 삼위일체에 대한 서술은 성호경과 사도신경의 기도문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과 개념, 어떻게 유일한 절대자가 세 개의 위격을 갖게 되는지 간략하지만 명확하게 적시하고 있다.5) 더불어 16세기 말까지 인도와 일본에서 유통된 교리서들 경우도 문답식 구성을 택하고 있었으며 그 체제와 내용에 삼위일체론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6) 따라서 당시 중국 예수회에 의해 편찬된 교리서에서 삼위일체론의 적시 여부를 규명하는 문제는 기존 주요 교리서들과의 영향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주요한 확인 사안으로 떠오른다.

 

근세 중국천주교회에서 저술된 교리서류를 다룬 기존 연구는 주로 개별 텍스트에 대한 고증을 진행하고 해당 텍스트의 교회사적, 동서교류사적 의의를 다루는 데에 집중해 왔다. 아직까지 명말 중국 천주교사를 다룬 기존 연구에서 삼위일체론과 같은 특정 교리의 등장과 계승 문제에 천착하여 복수의 텍스트에 걸친 실증적인 비교 분석을 진행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거의 유일한 예외가 최근 『천주실록(天主實錄)』의 역주본에 수록된 해제와 별도 연구논문 내에서 서원모와 최정연이 『천주실록』과 『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을 비교분석한 사례이다. 이 연구는 최초 『천주실록』에서 생략되었던 삼위일체론이 후대의 편집재출간본에서 전면적으로 등장한 것을 들어 중국교회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했다.7) 그러나 해당 연구성과 역시 루지에리의 『천주실록』과 후대의 재출간본 『천주성교실록』 두 텍스트 사이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데에 집중하였으며 논의의 범위를 확대하여 삼위일체론이 부상하게 되는 경과와 직접적인 계기에 대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생각건대, 아직까지 근세 중국천주교사의 서사에서 이러한 궁리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던 배경에는 두 가지 상반된 명제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삼위일체론과 같이 기초적인 교리에 해당하는 개념이 근세 중국천주교회의 교리교육에서 당연히 처음부터 소개됐을 것이라는 명제이다. 앞서 인용한 서한에서 나타난 서광계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얼핏 보면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을 차지하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소개가 중국천주교회 1세대 신자인 서광계에게도 이루어졌다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만큼 삼위일체론이 교회사적으로나 당시의 맥락에서나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핵심교리였기 때문이다. 입교를 준비했던 서광계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삼위일체 개념을 알고 있었던 사실 역시 이러한 명제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명말 중국천주교회에서 출간된 한문교리서를 살펴보면 삼위일체론은 의외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아예 언급이 없거나 구체적인 설명이 유보돼왔다. 후술하겠지만 한문서학서로서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요체를 전했던 가장 유명한 저서인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하여 초기 교리서류 범주에 들어가는 한문서학서 저작에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즉, 실증의 영역에서 살펴보면 이 첫 번째 명제에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마치 일정 기간 은폐돼왔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삼위일체론 교리의 구체적인 소개가 중국 천주교회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등장했고 또 이어졌는지 구체적인 규명이 필요한 것 아닐까.

 

여기에서 두 번째 명제가 등장한다. 앞선 명제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명말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방침의 특징을 고려하면 삼위일체론 같은 교리교육이 유보되는 일이 자연스럽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어찌 보면 중국천주교사의 맥락에서 볼 때 ‘삼위일체론의 유예’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국에서 정착된 예수회 적응주의 선교방침 하에서 나타난 의식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중국인들의 언어와 문화, 관습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를 전하고자 했던 중국 예수회의 적응주의는 교리에서 이성적인 논리로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부분을 언급하는 일에 상당히 신중했다. 예를 들어 리치의 『천주실의』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십자가형을 통한 예수의 대속(代贖) 그리고 부활과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교리 역시 다루지 않았다. 이처럼 지극히 기초적이고 핵심이 되는 교리라 할지라도 일정부분 교리서류나 한문서학서에서 다루는 데 있어서 상당히 신중한 접근을 했다는 것이 오히려 중국식 적응주의의 전형으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명제는 마치 본고의 문제제기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이미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명제 역시 중요한 질문을 놓친 불충분한 해답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삼위일체론의 교리는 비록 이성적으로 난해한 개념일 수 있어도 동시에 너무나 기초적인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였기 때문에 실제 입교를 결심한 중국인 예비신자들에게 소개를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술하였듯이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이 참고했을 유럽이나 다른 선교지역에서 유통되던 교리서류 또한 삼위일체론 전달을 당위로 삼고 있었다. 말하자면 실제 삼위일체론의 소개에 있어서 중국 예수회는 지체 없이 전해야 할 핵심 교리의 설파를 유보해야 하는 일종의 당혹스러운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딜레마를 돌파하기 위한 당시 예수회의 전략이 무엇이었을지 천착할 필요가 있다. 설령 그리스도교에 호감을 갖고 예수회 선교사들과 교유한 사대부들, 혹은 중국인 예비 신자들 일반에게 일정 기간 구체적인 교리 강학이 실제로 일정 부분 유예됐다 하더라도 그 유예기간은 상당히 짧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주실의』 등에는 언급이 유보된 삼위일체론 교리가 비로소 중국 예수회의 교리서에서 전면 등장하게 되는 양상, 즉 구체적인 저술과 시기가 규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요컨대, 여전히 근세 중국천주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의 부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실증할 필요가 있다.

 

이에 본고는 위에 언급한 상반된 두 명제에 대해 일종의 ‘낯설게 보기’를 시도하려고 한다. 근세 중국천주교회에서 삼위일체론 교리가 최초 어떤 방식으로 소개되었는지 살펴보는 과정, 구체적으로 명말 중국천주교회에서 유통되었던 현존하는 교리서류, 즉 미켈레 루지에리의 『천주실록』과 후대의 편집본인 『천주성교실록』, 리치의 『천주실의』와 『천주교요(天主敎要)』, 그리고 알폰소 바뇨니의 『교요해략(敎要解略)』 등을 중심으로 각각 삼위일체론 서술을 어떻게 시작하고 이어갔는지 상호 영향관계를 추적하고자 한다. 작게는 중국천주교회 성립기에 삼위일체론 교리가 어떻게 정착되어 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크게는 중국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방침 하에서 한문서학서 교리서류가 어떠한 양상으로 계승 발전되어 가는지를 이해하는 한 방편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Ⅱ. 삼위일체론의 한시적 유예(1583~1610)


1. 루지에리의 『천주실록(天主實錄)』8)

 

미켈레 루지에리와 마테오 리치가 선교를 주도했던 중국선교 초기, 구체적으로 리치 일행이 광동성 조경에서 선교활동을 본격화한 1583년부터 리치가 사망한 1610년까지 1세대 중국 예수회 활동기는 삼위일체론 소개의 측면에서 볼 때 일종의 ‘한시적 유예기’였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텍스트는 미켈레 루지에리의 1584년 저술인 『천주실록』이다.

 

『천주실록』은 최초의 한문서학서이자 최초의 한문교리서로 일컬어진다. 원제는 『신편서축국천주실록』이다. 루지에리는 라틴어로 『천주실록』의 원저본이라 할 수 있는 『신성한 일들에 대한 진실되고 간략한 설명(Vera et Brevis Divinarum Rerum Expositio)』을 먼저 저술한 후, 이를 다시 중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부 체제와 내용면에서 편집과 생략을 거쳐 『천주실록』을 저술하였다. 기존 연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천주실록』의 언어는 불교적 색채를 상당히 강하게 띠고 있었다. 원제에서도 인도를 의미하는 ‘서축국(西竺國)’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저자 자신을 서축국승(西竺國僧), 즉 ‘인도에서 온 승려’로 소개하였으며, 본문 속에서도 ‘출가(出家)’ ‘사(寺)’등 불교적인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 기존 연구에서 강조돼 왔다.9) 중국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방침의 정착 과정을 생각하면 『천주실록』의 불교적인 색채는 일종의 시행착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루지에리를 중심으로 한 중국 예수회는 일본 사회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중국 사상계를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중국 사회에 그리스도교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불교용어를 적극 수용한 것이었다. 요컨대, 루지에리의 『천주실록』 저술은 중국천주교회에서 예수회가 수행했던 첫 번째 적응주의 선교의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전달 차원에서 『천주실록』의 내용을 짚어보면 대략 유일신 증명, 천주의 성품, 천지창조,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 영혼불멸, 십계명, 마지막으로 세례성사에 대한 개념이 소개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참고로 라틴어 원저본의 경우 최후심판과 영혼의 처소에 대한 서술로 마무리되는 구성을 취하였지만 루지에리는 이를 『천주실록』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목차 순서에 변화를 주는 선택을 했는데, 이로써 결과적으로 마지막 장에서 세례성사를 설명하면서 끝맺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즉, 『천주실록』의 내용 구성은 세례성사를 준비하기 위한 예비입교자들에게 반드시 전해야 할 그리스도교의 교리 개념들이 정리된 것으로 읽힌다.10)

 

그렇다면 본고의 주요 관심사안인 삼위일체론의 경우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천주실록』에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일체 설명이 빠져있다. 이는 루지에리가 선교를 주도하던 시기 중국 예수회에서 그리스도교 교의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고자 고민했던 적응주의 선교방침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당시 교리서에서 삼위일체론을 생략한다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서술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상당히 파격적인 선택에 가까웠다. 저술 유통되었던 유럽의 교리서, 그리고 일본에서 저술된 교리서에는 삼위일체론이 적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루지에리는 당시 필수적으로 여겨졌던 교리서에서의 삼위일체론의 소개를 유보하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루지에리의 『천주실록』 라틴어 저본에는 소략하게나마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이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곧 “현인들이 인격적인 고유성이라고 부르는 세 가지 다른 사물” 즉 “신성한 실체가 세 인격 안에 실존하며 그 중 하나는 아버지, 하나는 아들, 하나는 성령이라 불린다”는 것이다.11) 그런데 실제 『천주실록』을 저술하는 단계에서 루지에리는 아예 이러한 서술마저도 생략해버렸다.12) 그러한 선택을 한 배경은 라틴어 원저본에 나타난 이후의 서술에서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하다. 루지에리는 삼위일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긴 시간과 더 많은 탐구를 요구하기 때문에 일부러 그 자세한 설명을 생략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아마도 같은 이유로 『천주실록』에서는 삼위일체라는 개념에 대한 언급 자체를 생략했던 것 같다.13) 결과적으로 해당 서술이 실제 『천주실록』 번역 과정에서 빠짐으로 인해 최초로 삼위일체의 한문 표기가 이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삼위일체에 대한 최초 한문 서술은 훗날 리치의 교리서 저술을 기다려야 했다.

 

2.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천주교요(天主敎要)』

 

리치가 중국 선교를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중국 예수회의 선교방침에도 중대한 변화가 찾아왔다. 선교사들의 자기규정을 승려와 같은 정체성으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학자의 그것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리치가 승려의 복장을 버리고 유학자의 의복으로 전환할 필요를 느낀 배경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목적, 둘째, 불교와의 거리두기를 위한 목적, 끝으로 유가사상과의 친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 그것이다. 1595년 11월 4일자 서한을 보면 이러한 배경이 잘 드러나는데, 우선 리치는 중국에서 선교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위엄 있는 복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반대로 불교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승려의 복장으로는 존중받을 수 없고, 따라서 선교활동에도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14)

 

승려에서 유학자로의 정체성 전환은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일어났다. 우선 1589년 리치와 교유하던 유학자 구태소가 예수회 일행에게 승려의 복장을 버리고 유학자의 복장을 취하도록 권고했던 일이 있었다. 리치는 아마도 이때 처음 전면적인 선교전략의 수정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594년, 리치는 마침내 의복의 전환 건에 대한 동방순찰사 발리냐노의 재가를 얻게 된다. 리치가 공식적으로 중국예수회의 복장을 유학자의 복장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1595년이었는데, 교회의 명칭에 불교 사찰을 떠올리는 ‘사(寺)’ 자를 버리고 ‘당(堂)’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1597년에는 중국선교구가 세워지고 리치가 초대 선교구장의 직임을 맡게 되는데, 이로써 불교적 색채를 제거하는 리치식 적응주의 선교방침이 중국교회에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15)

 

리치 시대 이러한 선교방침의 전환에 발맞추어 루지에리의 『천주실록』을 대체할 교리서의 저술도 함께 모색되었다. 바로 『천주실의』가 저술되었다. 『천주실의』의 정식 출간은 1603년 이루어졌지만, 필사본 형태의 저서가 1590년대 중반부터 이미 유통되기 시작했다. 즉, 리치가 유학자의 복장을 채택함으로써 중국 예수회 선교사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던 시기와 거의 동시에 이미 교리서 차원에서도 『천주실록』에 나타난 불교적 색채를 소거하고 새롭게 유가사상과의 친연성을 강조하는 교리서의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천주실의』에서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주요 개념은 천주존재 증명, 영혼론, 불교비판론, 상선벌악 등이다.16) 루지에리의 『천주실록』과 마찬가지로 『천주실의』에서도 삼위일체에 관한 서술은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천주실의』에서 리치는 루지에리의 『천주실록』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학적 철학적인 차원에서는 한층 세련된 논의를 보태면서도 정작 그리스도교 교리개념을 설명하는 범위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축소하는 선택을 하였다. 전술하였듯이 『천주실의』에는 삼위일체론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관한 설명과 같은 기초적인 교리개념도 포함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앞선 교리서인 루지에리의 『천주실록』에서는 애써 포함시켰던 교리이다. 『천주실의』에 한정해서 평하자면 리치는 『천주실록』보다도 이성적 담론을 강화하고 비이성적인 교리개념에 대해서는 한층 더 유보적인 노선을 채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교리교육의 차원에서 볼 때 리치가 루지에리보다 오히려 ‘퇴보’했다고 평하는 것이 맞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았다. 리치는 『천주실의』를 통해 한편으로 루지에리가 『천주실록』을 저술하며 추구했던 중국식 적응주의의 선교노선을 심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1605년 『천주교요』라는 별도의 교리서의 집필을 통해 구체적인 교리개념 설명에 있어서도 『천주실록』보다 더욱 충실히 하는 선택을 하였다. 말하자면 루지에리의 『천주실록』 교리서 체제에서 진일보하여 『천주실의』와 『천주교요』의 이원화된 단계별 선교방침을 세웠던 것이다.17)

 

바로 이 리치의 1605년 작 『천주교요』가 현존하는 텍스트 중에서 중국천주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이 최초로 등장한 저술이 된다.18) 먼저 『천주교요』의 목차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天主經

2. 天神朝天主聖母經

3. 天主十誡

4. 十二亞玻斯多羅性薄錄

5. 聖號經

6. 形神哀矜之行十四端

7. 眞福八端

8. 罪宗七端

9. 克罪七端有七德

10. 向天主有三德

11. 身有五司

12. 神有三司

13. 阨格勒西亞撒格辣孟多有七

 

목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천주교요』는 주의기도[天主經], 성모송[天神朝天主聖母經], 사도신경[十二亞玻斯多羅性薄錄] 등의 기도문과 십계명, 칠죄종 등의 주요 교리를 망라하고 있다. 본고에서 주목하는 삼위일체 교리 부분은 그중 네 번째 장인 사도신경을 다룬 본문의 주석에서 처음 등장한다. 사도신경 기도문의 전반부에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의 개념이 모두 등장하기 때문에 주석을 붙여 세 위격을 간략하게 제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해당 부분을 인용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사도신경 기도문 첫머리에 등장하는 성부를 ‘파덕륵(罷德肋)’으로 표기하면서 “번역하면 아버지이다. 천주 삼위의 제1위이다(譯言父也. 乃天主三位之第一位也)”라고 적고, 이어서 성자를 ‘비략(費略)’으로 표기하면서 “번역하면 아들이다. 천주 제2위의 호칭이다(譯言子也. 天主第二位之稱)”라고 적었으며, 끝으로 성령을 ‘사피리다삼다(斯彼利多三多)’로 표기하면서 “번역하면 무형영성이며 천주 제3위의 호칭이다(譯言無形靈聖也. 乃天主第三位之稱)”라고 적고 있다.19)

 

리치가 저술한 『천주교요』의 존재를 통해 삼위일체론의 소개가 적어도 1605년의 시점에는 정식 교리의 하나로서 이루어졌음이 실증된다. 다만 소책자 교리서인 『천주교요』의 이 짧은 서술만으로 당시 중국천주교회가 삼위일체론을 얼마나 비중 있게 또 전면적으로 다루었는지를 가늠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천주의 삼위가 있다는 개념만을 언급하는 데에 그치고 있어 내용 자체가 소략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해설이 여전히 교리서 바깥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인 예비신자가 이 『천주교요』를 접하였다고 한다면 해당 소개 항목은 사실 삼위일체라는 개념에 대해 궁금증을 품고 더욱 깊은 질문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정도였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교리체계의 정립 과정을 고려한다면 『천주교요』를 통한 삼위일체 설명방식은 아직까지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현존하는 교리서류의 분석을 통해 살펴본 바, 루지에리와 리치가 주도하던 초기 중국천주교회의 교리서에서 삼위일체론은 리치의 『천주교요』 출간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유예되었다. 또한 비록 최초 삼위일체론의 서술이라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기는 하지만 소책자교리서로서 『천주교요』가 갖는 한계를 감안하면 아직까지 중국교회의 교리서 체제하에서 삼위일체론의 소개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말하자면 리치가 중국선교를 주도하기 시작한 1580년대부터 그가 사망하던 1610년까지는 적어도 삼위일체론의 소개를 중심으로 생각할 때 일종의 주요 교리의 설명에 대한 일종의 유예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리치 시대의 이러한 일정부분의 한계는 리치가 의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중국교회 자체가 아직까지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던 일시적인 미성숙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힌다. 이로부터 한 단계 교회의 성장을 도모한 사례로서 다음 세대 예수회 선교사로서 리치의 계승자로 흔히 회자되는 알폰소 바뇨니, 그리고 그의 저작 『교요해략』을 들 수 있다. 다음 장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Ⅲ. 최초의 삼위일체론 전면 부상, 바뇨니의 『교요해략(敎要解略)』(1615)

 

1605년 남경 지역에 배정받아 선교활동을 이어갔던 알폰소 바뇨니 신부는 리치를 이어 선교구장을 맡은 니콜로 롱고바르도와 더불어 1610년대 중국 예수회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2세대 예수회 선교사 중 하나이다. 바뇨니의 명민함과 성실함은 남경 교회의 성장을 견인하였다. 선배들의 길을 따라 파견 직후 중국어 학습에 열중하였고 현지에서 높은 수준의 소통이 가능할 만큼의 역량을 길렀음은 물론이다. 명망 있는 사대부들을 포함하여 남경에는 입교자가 급상승했고, 1611년에는 남경에서 성당을 건립하는데 북경에 이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이룬 성과였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1610년대 남경에서의 성공에 고무된 바뇨니는 리치 세대의 신중함과 다소 거리가 있는 좀 더 적극적이고 공개적인 선교활동을 이어간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20) 이후 용어나 선교방침 문제에서 중국 예수회 내에 격론이 벌어졌을 때에도 철저히 리치의 기존 노선을 지지했던 명실상부한 친-리치 노선의 계승자로 여겨지는 바뇨니였지만,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2세대 선교사들이 보인 일종의 흐름, 즉 리치 시대의 조심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공개적인 선교활동을 추진했던 특징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21)

 

바뇨니의 교리서 『교요해략』의 저술 역시 1610년대 2세대 예수회 선교사들이 주도한 교회의 자신감과 적극성이 반영되어 있었다. 리치가 『천주교요』를 보급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인 1615년, 바뇨니는 『천주교요』의 구성을 온전히 계승하되 교리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을 대폭 추가하여 덧붙였다. 이러한 특징은 사실 ‘『천주교요』를 풀이한다’는 제목을 통해서도 추론할 수 있거니와, 〈표 1〉22)에서 보듯 실제로 리치의 『천주교요』의 목차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목차 상에서 양자가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각 항목에서 ‘해략’ 부분이 추가되어 있거나 혹은 필요에 의해 보충장을 배치한 데에서 기인하고 있다. 한마디로 『교요해략』은 『천주교요』를 계승 발전시킨 확장판 교리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요해략』에서는 본고의 주요 관심 사안인 삼위일체론의 소개 차원에서 어떠한 전개를 보였을까. 최근 연구에서 이미 강조된 바와 같이 『교요해략』의 특징으로 그 이전까지의 교리서와 매우 두드러진 차이점을 보이는 지점이 바로 이 삼위일체론 서술에 있다. 리치의 『천주교요』가 천주삼위의 호칭을 간략히 드러내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면, 바뇨니의 『교요해략』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삼위일체론 교리를 전면에 내세워 해설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위의 〈표 1〉에서 밑줄로 표시한 세 군데의 장, 즉 사도신경[十二亞玻斯多羅性薄錄], 삼위일체론[天主一體三位論], 성호경[聖號經]에 걸쳐서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 있다. 『교요해략』의 특징적인 면모를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교요해략』 사도신경 해설 부분에서 삼위일체론 서술의 등장은 양적 질적 차원에서 『천주교요』를 훨씬 뛰어넘는다. 기존 연구에 어느 정도의 해설이 이미 이루어졌고 여기에서 일일이 번역 소개하기에는 분량이 지나치게 많으므로 훗날 『교요해략』의 역주본 작업을 통해 전체 번역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면서 구체적인 인용은 생략하고자 한다.23) 다만 이 부분에서 교리서류 한문서학서의 텍스트간 비교에서 도출할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을 한 가지만 간단히 짚자면, 현존하는 한문서학서 내에서 ‘위격(位格)’을 의미하는 persona의 음차어인 ‘백쇄아(伯

𤨏亞)’, 그리고 성령의 음차어인 ‘사피리다삼다’와 번역어인 ‘성신(聖神)’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처음으로 확인된다. 다음은 사도신경 ‘해략’ 부분의 첫머리인 천주성부[天主罷德肋]에 대한 주석을 인용한 것이다.

 

“천주는 하나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 세 존위를 포함하고 있다. 서양 선비는 이를 일컬어 ‘백쇄아’라 불렀으니 첫째는 ‘파덕륵’으로 번역하면 아버지이다. 두 번째는 ‘비략’으로 번역하면 아들이다. 세 번째는 ‘사피리다삼다’로 번역하면 무형영성 혹은 성신(聖神)이다. 존위의 분별로는 세 사람이 있지만, 본성과 본체로 말하자면 모두 하나의 천주일 따름이다. 이 셋 중 크고 작음이 없고 강하고 약함이 없으며 선후가 없다고 가히 말할 수 있다.”24)

 

위의 인용 구절은 『천주교요』에 등장하는 삼위일체론 개념 소개를 모두 포괄하면서도 해설과 용어에 있어서 확장판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준다. 그 가운데 ‘페르소나’의 음차어, ‘성령’의 최초 번역어인 ‘성신’ 용어의 등장은 1605년 판 리치의 『천주교요』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향후 한문서학서, 특히 교리서류에서 사용된 음차어나 번역어를 정리하는 작업에 있어서, 혹은 사용된 용어를 통해 특정 저술의 편찬 연대기를 획정하는 데 있어서 바뇨니의 이 저술이 중요한 기준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바뇨니의 삼위일체론 소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으로 또 하나 주목되는 사실은 사도신경 해설부분을 넘어 「天主一體三位論」이라는 별도의 장을 배치하여 추가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바뇨니는 이 장의 도입부에서, “천주가 하나의 본체에 세 개의 위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사도신경을 통해 개략적으로 언급하였다. 다만 상세하게 서술하지 않으면 혹시라도 마음에서 의심을 거두지 못할까 싶어 다시금 이 논의를 세운다.”25)고 하면서 세 가지의 단서를 제시한다. 세 가지 단서를 요약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신의 본성은 본디 명오(明悟)와 애욕(愛欲)을 가지고 있다. 명오가 없다면 혼미하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한다. 애욕이 없다면 허약하니 그 아는 바를 행할 수 없다.

 

2. 사물의 종품(宗品)에는 자립자(自立者)와 의뢰자(依賴者)의 구분이 있는데 자립이란 다른 본체에 기대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일컬으니 천주가 바로 순수한 본체로서 의뢰함이 없는 자립자이다.

 

3. 천주는 지극히 영험하고 지극히 신묘한 존재라 말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시작과 끝이 없으며 선후가 따로 없는 존재이므로 천주는 하나의 본성과 본체를 가지지만 그 위격은 셋으로 나뉜다. 마치 하나의 하천이 세 갈래로 흐르는 것과 같으니 세 갈래의 구분이 있으되 실상은 하나의 하천일 따름이다.26)

 

기존 연구에서도 평가되었듯 별도의 장으로 추가된 삼위일체론의 논의는 양적으로도 증가하고 있지만 그 논의의 심도 역시 유럽의 ‘대교리서(Large Catechism)’의 논의에 뒤지지 않는 정도의 신학적·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통해 명말 중국천주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의 전면적인 소개가 1615년 『교요해략』의 저술과 함께 바뇨니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졌음이 확인된다.

 

1615년 바뇨니에 의해 그간 유보적이었던 삼위일체론이 전면 부상한 것은 두 가지 차원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우선 한문서학서 교리서 장르의 정착 과정 측면에서 볼 때 이것은 ‘한시적 유예기’였던 리치 세대를 지나 2세대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천주교회 교리교육이 정례화, 체계화되어갔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방침 차원에서 볼 때 삼위일체론 서술이 마침내 부상하게 된 것은 그만큼 중국천주교회의 성장에 고무된 자신감의 발현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1610년대 들어 명말 중국교회가 한층 성숙해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교요해략』에서 삼위일체론의 논의가 고도의 신학적 담론까지를 포함하는 양적 질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전개되었던 사실은 당시 예수회가 가졌던 자신감, 혹은 교회의 성장이 갖는 구체적인 양상을 떠올리게 한다. 즉, 고도의 담론을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문인 신자들이 중국교회 내에서 입지를 높여갔던 맥락이 주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명말 중국천주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삼대지주인 서광계, 양정균, 이지조를 비롯한 명망있는 문인신자들의 입교가 확대된 시점이다. 리치 사후에야 본격화된 삼위일체론의 부상은 교회의 양적, 질적 성장에 고무된 2세대 예수회 선교사들이 드러낸 자신감의 표현이라고도 해석된다.

 

 

Ⅳ. 『교요해략(敎要解略)』을 전거로 삼은 교리서

 

『교요해략』의 출간 이후 명말 중국교회 전체에 어느 정도로 널리 유통이 이루어졌는지를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실증의 차원에서 『교요해략』을 통해 삼위일체론의 부상과 교리교육 체계 내에서 정립되어 갔음을 밝힐 수 있었지만, 그 파급력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는 섣부르게 결론내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요해략』에서 멀지 않은 후대에 간행된 교리서들과의 텍스트간 비교 분석을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다. 바로 후대 편집본 『천주교요』와 후대에 편집을 거쳐 재출간된 『천주성교실록』에서 『교요해략』이 직접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되는 텍스트적 상관관계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먼저 구체적인 연대는 확인되지 않지만 리치의 1605년판 『천주교요』보다 후대의 것으로 판단되는 『천주교요』 이본에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삼위일체론에 대한 서술이 포함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605년 판 『천주교요』에서는 사도신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삼위일체 개념이 등장하는 반면, 후대 편집본 『천주교요』에서는 첫 번째 장인 ‘성호경’ 항목에서 삼위일체 개념이 소개되고 있으며, 십계명을 다루는 장절 바로 이어서 「要理八端」이라는 제목의 세주에서 세 번째 항목에 좀 더 자세한 삼위일체론 개념의 소개가 등장한다. 또한 성령에 대한 번역어를 제시함에 있어서 리치의 『천주교요』는 ‘무형영성(無形靈聖)’을, 『교요해략』은 ‘무형영성’과 ‘성신’을 함께 언급했던 것과 달리 이 『천주교요』 이본에서는 ‘성신’만을 대표 번역어로서 제시하고 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후대편집본이 『교요해략』 출간 이후 이를 참고하여 삼위일체론 서술 편집에 활용되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1637년 이후 상당한 편집을 거쳐 재출간된 『천주성교실록』의 사례가 매우 흥미롭다. 이 재출간본 『천주성교실록』에는 용어상의 편집뿐만 아니라 장절의 체제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로 「天主聖性章」이라는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고 그 안에서 삼위일체론 교리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27) 그런데 이 새롭게 추가된 장의 내용을 추적해 보면 『교요해략』에서 삼위일체론을 다룬 두 항목, 즉 앞선 3장에서 인용했던 사도신경 해설 도입 부분, 즉 ‘페르소나’의 음차어가 등장하였던 그 구절과, 「천주일체삼위론」에서 다룬 ‘세 개의 단서’ 내용, 즉 명오와 애욕 개념, 자립자의 개념, 세 갈래로 갈라진 하나의 하천 이야기를 결합하여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28) 요컨대, 『천주성교실록』에서 새롭게 추가된 주요 부분인 삼위일체론의 추가 설명 부분은 다름 아닌 바뇨니의 『교요해략』의 내용을 발췌하여 넣은 결과물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천주실록』에서 『천주성교실록』으로 체제변화를 추적하면서 삼위일체론이 새롭게 추가된 것에 주목했지만 정작 그 추가된 텍스트의 전거를 밝히는 데에까지는 나가지 못하였다.29) 본고를 통해 후대에 편집을 거쳐 재출간된 『천주성교실록』의 「천주성성장」 전체가 바뇨니의 『교요해략』을 전거로 한 것임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한문서학서 교리서 체제의 정립에 있어서 1615년 바뇨니의 『교요해략』이 갖는 영향력과 사료적 중요도가 인정된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라 삼위일체론의 유예와 부상을 중심으로 하여 명말 한문서학서 교리서류의 텍스트간 상호 영향관계를 도식화하면 아래의 〈표 2〉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Ⅴ. 결론

 

지금까지 명말 초기 중국천주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을 다루는 교리체계가 한시적 유예기를 거쳐 전면적으로 등장하고 정착되는 과정을 실증해 보았다. 본 연구의 의의를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들 수 있겠다. 첫째, 명청시기 출간된 한문서학서류의 상호 연관관계를 추적하는 텍스트간 비교연구방법론의 한 사례를 제시하였다. 그동안 개별 한문서학서에 대한 소개나 분석은 적지 않게 축적돼 오고 있으나 아직까지 문헌 간의 비교와 영향관계를 분석하는 문제의식을 제출하고 이를 실증하는 노력은 턱없이 부족해 왔다. 본 논고가 그러한 시도의 한 가지 방법론을 제시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예수회에 의해 성립된 근세 중국교회의 초기 교리서류가 정착되어간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구체적으로 삼위일체론을 둘러싸고 명말 저술된 교리서류 간에 구체적인 서술상의 계승 발전과정을 추적하는 실증적 사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 특히 후대에 재발간된 『천주성교실록』이 갖는 특징 중 삼위일체론의 새로운 삽입이 바뇨니의 『교요해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임을 실증하였던 것은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다. 셋째, 리치 후속세대에 해당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업적이 갖는 의의를 명료화하는 작업에 기여하였다. 최근 리치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과 저술을 다루는 연구가 축적되고 있으나 여전히 개별 저술에 대한 고증과 번역 및 주석,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는 연구가 진행될 여지가 많이 남아있다. 본고를 통해 바뇨니의 저술, 구체적으로 『교요해략』이 갖는 교회사적 의의를 드러냄으로써 바뇨니가 수행한 리치 세대의 단순한 답습이 아닌 발전적 계승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리치 후속세대 선교사들에 의해 달성된 1610년대 중국천주교회의 성장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제시할 수 있다.

 

근세 중국천주교회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근자에 교회사, 사상사, 과학사, 동서교류사 등 다양한 역사분과의 영역에서 한문서학서의 연구가 활성화되고는 있지만, 정작 그중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장르인 호교서류, 교리서류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매우 제한적이다. 서광계의 꿈 이야기가 담긴 서한이 이미 오래전부터 소개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삼위일체론이 초기 중국천주교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소개되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을 갖고 추적하려는 실증적인 노력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경향성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향후 한문서학서 중 실용서, 과학서 분야뿐만 아니라 호교서, 교리서류에 대한 연구, 무엇보다 텍스트적 상관관계를 추적하는 연구의 축적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한문서학서 전반에 대한 실증적인 이해가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가기를 고대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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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鳴旦, 杜鼎克 主編, 『聖經約錄』, 『耶蘇會羅馬檔案館明淸天主敎文獻』 第一冊, 2002.

鐘鳴旦, 杜鼎克 主編, 『天主敎要』 『耶蘇會羅馬檔案館明淸天主敎文獻』 第一冊, 2002.

鐘鳴旦, 杜鼎克 主編, 『天主實錄』 『耶蘇會羅馬檔案館明淸天主敎文獻』 第一冊, 2002.

 

2. 연구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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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모, 최정연, 「최초의 중문 교리교육서 『천주성교실록』 연구: 라틴어 저본과 중문 판본 비교를 중심으로」, 『교회사학』 15, 2018.

손은실, 「중세의 삼위일체론」, 역사신학연구회 편, 『삼위일체론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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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현. 「明末 天主敎 敎理書의 형성과 전개- Alfonso Vagnoni의 『敎要解略』(1615)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57, 2020.

제네스 저, 신대원 역, 『중국가톨릭교회 교리교육사』, 천주교안동교회사연구소, 2015.

조지 듄, 『거인의 시대: 명 말 중국 예수회 이야기』,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

 

1) 『利瑪竇全集』 4, 『利瑪竇書信集』 下, 光啟出版社, 1985, p. 290. 본 번역문에서 ‘묘당’, ‘소성당’ 등의 표현은 인용한 리마두전집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차후 『리치원전』 속의 이탈리아어 원문을 고증하여 번역어 선택이 적절했는지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만 본 논고의 논지나 논의의 범위와는 거리가 있으므로 따로 다루지 않고 차후 『리마두전집』 용어 선택의 적절성을 전반적으로 검증하는 과제 수행을 기약하며 남겨두고자 한다.

 

2) 여기에서 교리서류라고 하는 것은 넓은 범위에서의 호교서(Apologetics), 예비입교자 교리교육을 위한 catechism 혹은 좀 더 좁은 의미의 Doctrina Christiana류를 사실상 구분하지 않고 통칭한 것이다. 세부적인 분류를 고려하고 또 교리서의 역사를 논하는 데 있어서 구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후속 연구를 통해 각각의 세부적인 분류를 전제로 한 논의도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본고의 논의 범위로 삼은 명말 시기 중국 천주교회 초기 교리서류의 경우 교회 내에 교리교육 체계가 충분히 정착되기 이전 단계인 측면이 있어 함께 논의하는 것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3) 손은실, 「중세의 삼위일체론」, 역사신학연구회 편, 『삼위일체론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2008, pp. 255-293.

4) 고노이 다카시 지음, 이원순 역, 『일본 그리스도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pp. 174-179.

 

5) McDonald, William P., Christian Catechetical Texts, Lewiston, N.Y.: Edwin Mellen Press, 2011, pp. 167-310; pp. 531-553.

https://search-ebscohost-com-ssl.access.yonsei.ac.kr:8443/login.aspx?direct=true&db=e000xww&AN=439699&lang=ko&site=ehost-live.

 

6) 고노이 다카시, 앞의 책, pp. 174-179.

 

7) 서원모, 최정연, 「최초의 중문 교리교육서 『천주성교실록』 연구: 라틴어 저본과 중문 판본 비교를 중심으로」, 『교회사학』 15, 2018, pp. 5-54; Michele Ruggieri 지음, 곽문석 외 역주, 『신편천주실록 라틴어본 중국어본 역주』 동문연, 2021, pp. 14-50.

 

8) 기존 연구에서는 1584년 저술된 『천주실록』을 두고 종종 『천주성교실록』, 혹은 『신편천주실록』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1637년 이후에 상당한 편집을 거쳐서 재출간된 『천주성교실록』과의 명확한 구별을 고려하면 루지에리의 원 저서를 칭할 때에는 『신편서축국천주실록』으로 전체 서명을 적시하거나 『천주실록』으로 약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1584년 루지에리의 저술을 『천주실록』으로, 후대 편집본의 경우 『천주성교실록』으로 일괄 칭하고자 한다. 

 

9) Ronnie Po-chia Hsia, A Jesuit in the Forbidden City: Matteo Ricci 1552-1610,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pp. 93-97; 『신편천주실록 라틴어본 중국어본 역주』, pp. 14-50.

 

10) 서원모, 최정연, 위의 논문; 『신편천주실록 라틴어본 중국어본 역주』, pp. 14-50.

11) 『신편천주실록 라틴어본 중국어본 역주』, p. 116.

12) 『신편천주실록 라틴어본 중국어본 역주』, p. 117.

13) 『신편천주실록 라틴어본 중국어본 역주』, p. 44; p. 117.

14) 『利瑪竇全集』 3, 『利瑪竇書信集』 上, 光啟出版社, 1985, pp.191-215.

 

15) 16세기 말 중국 선교 상황의 연대기와 선교구의 성립에 관해서는 顧保鵠, 『中國天主敎史大事年表』, 光啓出版社, 1970의 기술을 따랐다.

 

16) 『천주실의』의 목차와 포함하고 있는 교리에 대한 대강의 설명은 동국역사문화연구소 편, 『조선시대 서학 관련 자료 집성 및 번역·해제』 1, 경인문화사, 2020, pp. 539-552 참조.

 

17) 리치가 추구한 단계별 선교방침에 대해서는 Gianni Criveller, Preaching Christ in Late Ming China, Taipei: Ricci Institute, 1997, p. 40; 조한건, 「丁若鍾의 『쥬교요지』에 미친 西學書의 영향」, 2006, 서강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pp. 2-4; 신주현, 「明末 天主敎 敎理書의 형성과 전개- Alfonso Vagnoni의 『敎要解略』(1615)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57, 2020, p. 163 참조.

 

18) 참고로 본 논고에서는 『천주교요』의 여러 이본 중에서 『耶蘇會羅馬檔案館明淸天主敎文獻』 第一冊(2002)에 수록된 『聖經約錄』을 리치의 1605년작 『천주교요』와 가장 가까운 판본 중 하나로 간주한다. 『천주교요』의 이본과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고증과 관련해서는 신주현, 「明末 天主敎 敎理書의 형성과 전개」, pp. 164-169 참조.

 

19) 『聖經約錄』, 『耶蘇會羅馬檔案館明淸天主敎文獻』 第一冊, pp. 96-97.

20) 조지 듄, 『거인의 시대: 명 말 중국 예수회 이야기』,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pp. 200-201.

 

21) 바뇨니와 롱고바르도 등 2세대 선교사들의 선교방침상의 공통된 특징에 대해서는 신주현, 「명말 예수회 선교노선지형 재검토」, 『명청사연구』 56, 2021, pp. 55-85 참조.

 

22) 〈표 1〉의 내용은 신주현. 「明末 天主敎 敎理書의 형성과 전개」, p. 176 에서 재인용. 『천주교요』의 이본인 『성경약록』에 대해서는 pp. 166~168 참조.

 

23) 최근 연구에서 『敎要解略』의 삼위일체론 소개부분을 설명한 것은 신주현. 「明末 天主敎 敎理書의 형성과 전개」, pp. 181-184를 참조.

 

24) 『敎要解略』 上 「十二亞玻斯多羅性薄錄」. 『耶蘇會羅馬檔案館明淸天主敎文獻』 第一冊, p.180. “天主一性. 而包含三尊位. 西士謂之伯瑣亞也. 第一曰罷德肋. 譯言父也. 第二曰費略. 譯言子也. 第三曰斯彼利多三多. 譯言無形靈聖. 或聖神也. 分別尊位. 有三者. 合性體言之. 摠一天主而已. 須知此三者. 更無大小. 無强弱. 無先後. 可言也.”

 

25) 『敎要解略』 上 「天主一體三位論」. 『耶蘇會羅馬檔案館明淸天主敎文獻』 第一冊, p. 211. “天主一體三位之意. 信經已槩言之. 但未述其詳. 則或不能無疑於心矣. 故今復立此論.”

 

26) 『敎要解略』 上 「天主一體三位論」. 『耶蘇會羅馬檔案館明淸天主敎文獻』 第一冊, pp. 211-214.

 

27) 『天主聖教實錄』 원문은 Bnf. Gallica의 온라인 자료를 참조하였다.

https://gallica.bnf.fr/ark:/12148/btv1b90061134.r=Tian%20zhu%20sheng%20jiao%20shi%20lu?rk=21459;2

 

28) 본문 3장 참조.

 

29) 서원모, 최정연, 「최초의 중문 교리교육서 『천주성교실록』 연구: 라틴어 저본과 중문 판본 비교를 중심으로」, 『교회사학』 15, 2018, pp. 5-54; Michele Ruggieri 지음, 곽문석 외 역주, 『신편천주실록 라틴어본 중국어본 역주』, pp. 14-50.

 

[학술지 교회사학 제21호, 2022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신주현(대구대학교 강사)]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418684&Page=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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