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드망즈 주교가 느낀 교회, 보이고 싶은 교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7-14 ㅣ No.715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드망즈 주교가 느낀 교회, 보이고 싶은 교회 - 1925년 만국전교박람회 조선교회 사진전

 

 

1925년 7월 5일 한국교회에는 첫 시복이 있었다. 당시 한국교회에는 주교가 네 분이었다. 네 분 모두 한국을 제2의 모국으로 여기는 선교사들이었다. 그들 선교사 주교는 한국을 어떻게 느꼈을까? 그들이 자랑하고 싶은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90년 전, 그 해는 수많은 대열이 바티칸으로 행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1925년을 성년으로 선포했고, 만국전교박람회를 열었다. 그리고 8차에 걸친 시복시성식을 행했다. 당시 조선교회도 순교자들의 시복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복식을 계기로 자신들의 그 험한 세월, 그 장한 인고의 순간들을 설명하고자 했다. 교회에서는 만국전교박람회에 ‘조선관’을 운영키로 했다. 당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조선주교회의는 일본교회에 소속되기를 거절하고, 조선과 간도지역의 교구들을 한데 엮어 조선주교회의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주교들은 성년을 기념해서 로마를 찾을 세계의 교회지도자들에게 조선교회를 알리고자 했다. 그들은 일본과는 다른 조선교회만의 독자적인 전시공간을 기획했다.

1924년 벽두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서울교구의 뮈텔 주교와 드브레 보좌주교,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 원산교구의 사우어 주교는 그해 7월, 천주교 역사는 물론 조선의 자연과 산업, 문화 등을 보이는 전시품 총 552점 14상자를 마련해서 발송했다. 그런데 선적된 이 물건들이 일본 고베 항에서 태풍을 만나 침수되어 파손당했다. 조선교회는 다시 전시품을 마련하여 12월에 재차 발송했다. 그러나 이 물품들은 시간적으로 너무 늦었다. 한국의 많은 물건들이 전시되지 않았다. 전시를 위해 특별히 마련했던 교우촌 지도, 교회서적들과 황사영백서의 금속판조차 보이지 않았다. 조선 전시품이 간혹 청나라 코너에 얹혀 있기도 했다. 열심히 준비했던 물품들은 만국전교박람회에 전시되어 우리의 인사를 세계교회에 전하지 못했다.

조선교회는 다행히 사진을 통해서 세계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드망즈 주교가 담당했던 사진은 다른 전시품보다 먼저 3월에 로마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조선교회는 번역이 필요없는 ‘사진’으로 지구 한 부분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한국을 전세계에 전했다. 그뿐 아니라 주교에게 사진찍히는 신자들의 편안한 포즈를 보면 그들과 주교 사이의 소통과 신뢰감도 읽을 수 있다. 더욱이 사진전의 제목은 ‘사진으로 보는 대구교구의 역사’였다. 그때 전시된 사진 65점이 지금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사진으로 보는 대구교구의 역사

시복과 박람회 한국관을 위해 주교들은 함께 일하지만 책임을 나누었다. 드브레 주교를 중심으로 『조선의 가톨릭교』를 출간했다. 뮈텔 주교는 황사영백서의 복사본과 『1839, 1846년 조선순교자 자료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박람회 전시품은 드브레 주교와 사우어 주교의 책임하에 백동에 있던 베네딕도회 수사들의 협조로 진행되었다. 사진전은 드망즈 주교가 맡았다. 그런데 책자들이 전체 역사를 다루다보니 서울에 치우쳐서인지 사진전은 대구교구 위주로 구성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평소 사진을 직접 찍었다. 관덕정순교기념관에는 그의 주름상자식 사진기가 있다. 드망즈 주교는 그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 기록의 사명의식에 불탔던 것 같다. 또 그는 교구장으로 일하는 동안 매일의 생활을 기록하고 해당하는 사진들을 정리해 넣었다. 자신이 촬영한 것은 물론 자신이 받은 사진도 정리했다. 그의 일지에는 약 800장에 이르는 사진이 들어있다. 전시된 사진들도 대부분 그곳에 있는 사진들이다. 그 덕에 당시 전시회의 캡션 내용을 몰라도 사진이 전하는 메시지를 쉽게 읽을 수 있다.

만국전교박람회 한국관에 전시되었던 사진 크기는 24×33cm였다. 맨앞에는 조선교회의 역사를 보이는 상징나무가 그려져 있다. 1784년 한국교회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곳에 1911년 대구교구, 1920년 원산교구, 1922년 평양교구가 새로운 가지로 나왔다. 몸통에 1801년, 1839년, 1846년, 1866년이라는 벌레 먹은 것은 박해의 표시이다. 흠집 각각이 크기에 차이는 있으나 결코 나무 전체를 가로지르지는 못한다. 나무의 굵기와 뻗어나간 곁가지들이 각 교구의 위세를 드러낸다.

드망즈 주교는 사진을 통해서 박해, 한국생활상, 교회의 활동상을 보이고자 했다. 사진전은 정지용이 1866년 평양에서 가톨릭신자들을 전멸시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876년 세운 순중군정공지용척사기적비(巡中軍鄭公志鎔斥邪記蹟碑)로부터 시작했다. 주교는 이 비가 현재도 세워져 있음을 강조하면서 사적이 기록되어 있는 앞면, 공을 세운 이들의 이름을 적은 뒷면을 각각 소개했다. 이 비는 본래 1923년 순교사실 심사 중에 시복시성보충자료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조선의 광경을 눈에 그릴 수 있도록 천진하게 서 있는 여자아이, 일상 한복을 입고 전통적으로 머리를 얹은 여인, 수원의 왕릉, 징검다리가 놓인 냇가를 차례로 소개하며 우리를 자연풍경 안으로 초대했다. 그는 곧이어 농사짓는 모습을 살폈다. 가래질, 밭갈이, 물방아와 키질 등으로 곡식을 심어 요리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드디어는 밥상을 받고 앉은 인물을 찍었는데, 그 제목을 “많이 드세요.(Bon appetit)”라고 달았다. 이 유머에 이어 ‘근엄한 집중’이라고 하여 담배를 물고 있는 인물을 배치했다. 마치 식사 후 디저트처럼 흡연을 하는 조선사람의 습관을 짐작케 하는 섬세한 관찰이다.

드망즈 주교는 이어 짚신, 돗자리 등의 생활용품만들기와 목화솜빼기, 물레, 직조, 다듬이질 등의 피복을 위한 노동을 조명했다. 장기두는 모습이 옆에 소개되고 있는데 혹시 여성은 일을 하는데 남성은 장기를 두고 있다는 뜻은 아닐지 모르겠다. 또 꿀벌통을 소개했는데 그 앞에 머리를 깎고 한복에 학생모자를 든 학생이 있다. 이어 우리는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나룻배를 보고 나서 종교모습들을 마주친다. 석탑, 비구니, 성황당 등과 가뭄에 비내기를 기원하여 지붕위에 올려놓은 항아리 사진들이다.

다음으로 선교와 사목의 발전을 보이는 사진들이 있다. 우선 의주성문을 보이고, 그 성문을 통과했을 박해시대 선교사들이 입었던 상복차림을 소개했다. 이어서 1914년 드망즈 주교의 사목여행, 자신의 복사와 베르몽 신부의 복사, 안대동성당과 부주교, 공소, 사제관 등을 전시하여 새로 일어난 교회상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1913년 용호공소에서 찍은 김아가다 노인의 사진은 주목을 끈다. 이 사진을 찍은 날 주교는 일기에도 기록을 남겼다. 「1866년 순교자 남면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태형을 받고 놓여났다. 신부가 다시 들어온 줄 모르고 살다가 43년후 76세에 한 선교사를 다시 만났다. 그는 이전에 다블뤼 주교에게 견신성사를 받았다.좦 이러한 승리 위에 대구 최초 신부인 주재용과 그의 부모, 신학교, 신학생, 산책가는 학생 모습도 있다.

대구교구 당시 사제와 수녀들도 소개했다. 주교부터 프랑스인 사제, 방인사제들을 각각 이력을 붙여 한 장에 4-6명 정도씩 정리했다. 대구의 수녀들, 수녀원 안의 고아들도 빼놓을 수 없는 교회 식구들이다. 그리고는 되재에 있는 선교사의 무덤에 서 있는 한 소년의 사진이 있다. 그런데 그 제목이 선교사의 무덤이다. 선교사들은 생을 마치지만, 그 십자가 앞의 어린 청년이 미래를 잇는다는 것 같다. 자연스럽게 교회의 열매를 눈으로 드러낸 성당으로 이어졌다. 명동성당, 계산성당, 나바위마을전경, 전주성당과 전주시내의 전통종, 퇴재성당, 한옥 공소를 전시했다.

마지막 분류로는 제주도 소개이다. 제주도의 뗏목, 항구, 사제관과 신부들, 성문, 농부, 젊은이, 아기를 구덕에 업고 안고 여인들을 보인다. 삼성혈, 폭포 등의 풍경도 있다. 그리고 제주도의 관덕당 마당을 사진찍고 1901년 600명의 천주교인이 학살된 장소라고 설명했다. 주교 자신이 복사와 함께 숲가에서 쉬고 있는 사진이 있다. 주교가 버선에 짚신을 신고 있는 모습이 흥미롭다.

그런데 이 사진들을 살펴보면 모든 교구가 협력한 작업임을 알 수 있다. 드브레 주교의 『조선의 가톨릭교』에는 사진이 35장 들어있다. 그 중에 성당을 소개한 그림 등 9장이 이곳에 나오는 사진이다. 다만 드망즈 주교는 정지용 척사기적비의 양면을 소개한데 비해 드브레 주교는 앞면만 넣었다. 또 드브레 주교는 유스티노신학교의 정면사진을 넣었는데 비해 드망즈 주교는 주교관 베란다에서 찍은 사진을 보였다. 그런데 정지용 척사기적비는 베버 아빠스가 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도 소개되고 있다. 짚신만들기는 물론, 베버 아빠스가 촬영했던 조선인의 노동과 일상에 관한 사진이 이 사진전에 포함되어 있다. 한편, 사진전에는 제주도 소개가 많음이 눈에 띈다. 드망즈 주교가 제주도의 생활풍습이 내륙과 다르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국내에서 사목방문 중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이 제주도였음도 간과할 수 없다. 드망즈 주교는 거의 매년 전국을 사목방문했지만 그 지역의 풍물을 볼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1911년 교구장이 된 첫 사목방문에서 그는 사목방문을 마치고 일주일 동안 제주도 여행을 했다. 게다가 돌아오려고 하던 중 발을 삐어 일주일을 더 머물렀다. 아마 오래 있었기 때문에 사진이 더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국전교박람회에 출품된 사진들은 조선의 네 명 주교가 마음을 합쳐 보이고 싶었던 조선교회 모습이다. 그들은 일반 서민의 일상을 바탕으로 교회의 발전을 얹었다. 이곳에는 조선교회에서 전개되었던 교구간 협조정신도 배여 있다. 또한 이 사진들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전통문화에 대해 선교사들이 품었던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된다. 1925년 당시는 조선사회에 양풍과 일본풍이 거세게 밀려들고 있었다. 한국사람들도 개화 및 근대화란 명목으로 변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시 사진에는 그러한 모습은 단 한 점도 없다. 주교들은 전통적 한국의 모습을 선정했고 또 변하지 않은 모습들만 담았다. 90년 전 소박하나 정겨운 이 사진들은 신앙을 지켜 온 조선의 순교를 세계에 드러내는 또 다른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전시회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교회의 정체성을 묻는다.

[월간빛, 2015년 7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2,19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