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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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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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1 ㅣ No.1242

[생명 사랑]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카라바조(Michelangelo ama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의 성 베드로의 배반(1609년 유채 캔버스).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대사제의 하녀 하나가 와서,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를 보고 그를 찬찬히 살피면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소.” 하고 부인하였다. 그가 바깥뜰로 나가자 닭이 울었다. 그 하녀가 베드로를 보면서 곁에 서 있는 이들에게 다시, “이 사람은 그들과 한패예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또 부인하였다. 그런데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던 이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당신은 갈릴래아 사람이니 그들과 한패임에 틀림없소.”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다.(마르 14, 66-72)

‘성 베드로의 배반’은 카라바조의 말년 작품 중에 하나이다.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이전의 작품들보다 단순함 속에 묻어나는 깊이를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붉은 색으로 밑칠을 한 후에 그려졌다. 그리하여 화면을 관통하는 기다란 빛으로 어두운 색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빛은 화면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삼각형의 모양으로 비춰지는데 그 끝에 베드로가 있다. 거의 일직선에 가깝게 화면의 3/4 정도의 위치로 베드로를 향해 빛이 비춰지고 있다. 이는 빛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처럼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성인의 표정과 몸짓을 강조한다.


우리 모두가 오늘을 사는 베드로

작품은 베드로의 얼굴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마치도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병사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옆의 하녀는 아주 분명한 눈빛으로 병사를 바라보며 베드로를 향해 손짓한다. 병사도 강렬한 빛의 그림자 속에서 검지를 들어 베드로를 지목하며 가리킨다. 병사의 이 어두움 속의 오른 손가락과 옅은 빛을 받은 하녀의 왼손가락은 온전히 유혹에 빠진 베드로의 모습을 강조한다. 이 장면을 카라바조는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는 하녀와 병사와 그와 관련이 없다고 만일 그렇다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말하며 배반하는 베드로의 아이러니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세 번째 빛이 위치하는 베드로의 손등에서는 극적이 반전이 나타난다. 빛은 베드로의 얼굴을 타고 내려와 그의 두 손등을 비춘다. 베드로는 얼굴로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있으나 두 손으로는 ‘바로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다’라고 자신의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외치고 있다. ‘성 베드로의 배반’은 참으로 극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카라바조의 ‘성 베드로의 배반’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도 반영하는 듯하다. 그는 빛의 강렬함을 통해 그 빛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말한다. 이 빛은 그리스도로부터 와서 베드로에게 비추어진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의 손을 향하고 있다. 그 손은 통해 베드로가 입으로 하지 못한 이야기, ‘내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우리는 베드로 배반을 안타깝게 생각할지 모른다. 만약 베드로의 상황이었다면 난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묵상한다면 우리는 결코 베드로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오늘을 사는 베드로이기 때문이다.


인간생명에 대한 세상의 위협은 더욱 증대되고 은밀해져

앞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강생의 신비로 모든 사람을 당신과 결합시키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절정이며 그 인간생명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받은 그래서 현세적 가치만이 아니라 영원성 안에서 그 충만함을 지닌 위대하고도 측량할 수 없는 가치와 존엄성을 지녔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걸어가야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길이 인간 곧 살아있는 인간(생명의 복음 2항)임을 밝혔다.

그러나 이렇게 측량할 수도 비교할 수도 대치될 수도 없는 존엄성과 가치를 지닌 인간생명에 대한 세상의 위협은 오늘날 더욱 더 증대되고 있다. 나아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동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생명에 대한 위협이 이전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은밀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무지와 태만 그리고 무관심으로 인해 더욱 더 은밀하게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한다.(생명의 복음 10항)

이전과 다른 새로운 방식의 생명에 대한 위협은 일반화된 여론으로 생명에 대한 공격을 더 이상 범죄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권리로 위장한다. 또한 특별히 생명이 가장 약한 시기에 자신을 방어할 아무런 힘과 수단을 지니지 못하고 있을 때 생명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공격이 생명의 성역이라고 불리는 우리들이 가정 안에서 조차 가족들의 공모로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그 심각함이 있다. 뿐만 아니라 ‘삶의 질’ 혹은 ‘웰다잉’과 같은 우리 귀에 거슬리지 않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생명에 대한 공격을 은폐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생명의 복음 11항)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다면 이러한 세상의 유혹과 생명에 대한 은밀하고 치밀한 위협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태만으로 인해 그 존엄한 인간생명에 대한 위협에 우리조차도 동조할 수 있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위험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일어났고 아직도 남아있는 그 일은 분명히 엄청난 잘못입니다. 그러나 실망에 굴복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오히려 무슨 일이 있어난 것인지 이해하고 정직하게 그 일을 마주대하십시오. 겸손과 신뢰로 여러분 자신을 참회에 내 맡기십시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용서하실 것이며 당신에게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생명에 대한 옹호자가 되어주십시오. 생명을 위해 봉사해 주십시오.”(생명의 복음 99항)

오늘 카라바조의 작품을 통해 만난 베드로에게 어느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날 그 장소에 예수님의 수제자요, 첫 번째 교황이 된 베드로만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은 베드로만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도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만난 베드로는 2000년 전 베드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

닭이 울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통곡하는 베드로처럼 나약하고 가난하며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 아래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오늘을 사는 베드로 바로 ‘나’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고 그 분의 도우심에 의탁해야 한다. 그 분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생명의 복음 100항) 그리고 베드로가 그랬듯이 이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확신에 찬 마음으로’ 고백하고 생명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5월호, 지영현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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