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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디오메데스 수녀와 작은 디오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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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11 ㅣ No.719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디오메데스(1909-1998) 수녀와 ‘작은 디오메데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가슴에 추억을 남긴다. 그러나 한 마을 전체에 추억을 묻기는 쉽지 않다. 주민 70여 명 되는 마을에 기념관이 서 있는 곳이 있다. 기념관은 ‘디에모의 집’이라 하는데, 그 중심에는 디오메데스 메펠트(툿찡 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 수녀가 있다. 디오메데스 수녀가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험했다. 본래 의사면허증은 갱신하는 자격증이 아니다. 그러나 디오메데스 수녀는 89년 생애에 네 번이나 의사면허를 얻었고, 그때마다 다른 스타일의 의사가 되었다.



네 번 의사면허 시험을 치른 박사수녀

디오메데스 수녀는 1909년 독일 바이트말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월반하여 오빠와 같은 학급에서 공부할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진찰실의 손쉬운 기구들을 만지며 놀았다. 그는 성장하면서 아프리카에 ‘의료선교’하는 수녀가 되기를 소망했다. 그는 1928년 윌츠부르크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이 대학은 졸업하면 최소 3년은 해외에서 근무할 의무가 있는 국립의료원이었다. 거기서 그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툿찡 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 지원자 마리아 루카스를 만났다. 마리아 루카스는 후일 동 수녀회 총장수녀가 되었는데, 그때 디오메데스 수녀가 ‘성심의원’에서 사는 것을 허락했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25세 때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내과 의사면허까지 취득했다. 그가 수녀원에 입회하겠다는 결심을 밝혔을 때 아버지는 반대했다. 그의 아버지는 임종 때까지도 이미 예비수녀인 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37년 착복식을 하고 ‘디오메데스’란 수도명을 받았다. ‘디오메데스’는 희랍어로 ‘치료하는 신’이란 뜻이다. 그는 착복식 후 바로 에나타 수녀, 벨트뷔나 수녀와 함께 한국으로 파견되어 그해 원산항으로 입국했다. 그때부터 그는 수녀원의 객실에서 사우어 주교가 보낸 교우환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디오메데스 수녀가 한국에 왔을 때는 일본어로 교리교육을 시키는 시대였다. 그때는 병원 운영의 정식인가를 받으려면 일본이 발행하는 의사면허증이 필요했다. 당시 서울에서의 시험은 특정 지역에 한정되는 면허증이었다. 그는 우선 서울성모병원에서 내과와 전염병과에 근무하면서 시험을 준비했다, 그리고 1939년 말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의사자격을 취득했다. 이 사실은 성심의원 개원소식과 함께 『경향잡지』에 소개되었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1941년 종신허원을 하고 함흥분원의 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성심의원’도 개원했다. 성심의원은 건물의 형태가 네모로 되어 있고 가운데 굴뚝이 높이 솟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굴뚝집의 박사수녀’라고 불렀다. 지방에는 병원이 거의 없던 시절, 성심의원에는 환자들이 새벽 4시부터 줄서서 기다리기 때문에 진료는 거의 밤 12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또 주일에도 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왕진을 나갔는데, 키가 185cm나 되는 큰 체격으로 여성용 자전거에 왕진가방을 매달고 달렸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자격증 있는 사람이 적은 때여서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원산과 신고산 시약소에도 명의상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매달 한 번씩 원산을 거쳐 신고산의 약방도 순회했다. 그가 진료하는 날이면 두 곳의 시약소 앞에는 환자들이 행렬을 지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의사 한 번 못 보고 죽는 이들도 많았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부터는 약품도 구하기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경우는 공산치하에서 생겼다.

1945년 민족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북한으로 진입한 소련군은 일본이 접수했던 교회시설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교회기관에 심하게 간섭했다. 이후 정권을 이양 받은 북한공산당은 가톨릭교회에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그들은 각 병원에 의사면허증을 새로 발급했다. 1947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디오메데스 수녀에게 새 면허증을 내주었다. 그리고 매월 상당한 세금을 부과했다. 시약소들도 폐쇄당했다. 결국에는 덕원수도원을 시작으로 독일인 신부와 수도자들 59명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석 달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자강도 전천군에 있는 돌투성이 언덕 옥사덕에서 3년 6개월간 강제노역을 했다. 누군가 아파도 그들은 아픈 동료를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들 각자는 매일 할당받은 일을 하러 나갔기 때문에 그들은 일하는 동안 내내 저녁에 돌아가면 병든 형제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걱정했다. 무덤이 줄지어 생겨났다. 그래도 의사수녀가 있어 희생이 덜 났는지도 모른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마치 ‘어미사자’와도 같이 자기 환자들을 위해서 포효(咆哮)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작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손에 넣을 수 없었다. 17명이나 사망했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그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이렇게 끝맺었다. “나는 그들의 시신을 안치하고 꽃을 덮어주는 것으로, 필요한 것이 없어서 또 가진 것이 모자라서 그들에게 해줄 수 없었던 일들을 대신할 뿐이었다.” 이 보고서는 공산정권하에서 순교한 이들의 시복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옥사덕에서 강제 노역하던 성직자, 수도자들은 1954년 1월 독일로 귀환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체포되면서 수도원 밖으로 내쫓겼던 한국인 베네딕도 회원들이 남한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독일에 송환된 18명의 수녀 중 10명이 건강을 회복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재입국을 기다리는 동안 외과, X선과, 소아과, 피부과 등의 의술분야를 넓혔다. 그는 1958년 아사시아 수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대한민국 의사면허증을 취득했다. 네 번째 면허증이었다.


수녀원 밖에 살은 수녀, 그 마을을 사회로 옮겨놓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파티마의원 의사로 일하면서 대구희망원에 시간제 봉사를 나갔다. 그러다가 그는 당시 한국 한센인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시 연세대학병원 피부과에서 한센병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1961년부터 에나타 수녀와 함께 한센인에 대한 이동진료를 나갔다. 왜관(삼청) 베다니아농장, 성주 성신원, 상주 성심원, 문경 상신원 등을 방문했다. 1962년 왜관수도원에서는 성주군 용봉 정착마을에 ‘성심의원’을 세웠다. 그리고 수도원장 티모테오 아빠스는 병원운영을 그에게 맡겼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대구에서 용봉으로 출퇴근했다. 그러다가 1963년부터는 대구파티마병원을 사임하고 성심의원 원장 및 담당의사로 취임했다. 그는 한동안 성주분원에서 출퇴근했으나 1982년부터는 아예 병원 안으로 이사했다.

함흥에서 열었던 병원의 같은 이름의 ‘성심의원’에서 그는 다시 ‘하늘이 낸 박사수녀’로서 똑같은 활동을 시작했다. 이 병원의 진료과목은 한센병을 비롯한 피부과, 내과, 외과, 산부인과였다. 그러나 진료과목을 넘어서는 온갖 질병을 가지고 한센인은 물론 다양한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용봉 벽촌에서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의 ‘주치의’가 되어 갔다. 그는 환자들을 긴 시간을 들여 진료했고, 그들의 사연까지 들었다. 그는 한 번 진료를 시작한 환자는 완쾌될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성심의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환자들은 다른 기관에 연결해 주었다. 이 시절 디오메데스 수녀는 청진기를 꽂고 환자를 진찰하다가 조는 일도 왕왕 있었다. 그는 낮에는 환자를 보고 밤에는 약을 분류했다. 독일 제약회사들이 약품을 도와주었는데, 그들은 약을 무더기로 그냥 싸서 보냈다. 약품설명서는 독일어로 된 의학전문용어였으므로 다른 이가 도와주기도 쉽지 않았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자신의 침실 바닥에 약을 펼쳐 놓고 분류했기 때문에 그의 침실은 언제나 침대를 제외하고 온통 약으로 덮여있었다. 성심의원 앞에는 새벽부터 남한 각지에서 물어물어 찾아온 환자들이 줄을 섰다. 자연히 진료를 기다리거나 혹은 진료를 늦게 받게 되어 당시 교통상 그날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결국 그들이 머무를 대기실 건물을 지었다. 용봉마을은 이렇게 드나드는 환자들의 편리를 도모하고 뒤치다꺼리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나(癩)치유자와 사회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교육을 잘 받은 독일인 의사수녀와 자신을 포기하고 싶은 한센인들 사이에는 갈등도 있었다. 용봉인들에게는 초기 세 가구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스스로 흙벽돌을 찍어 세운 성당이 있었다. 그래서 왜관수도원에서 이들을 지원하면서 마을 입구에 다시 성당을 지을 때 그들은 반발했다. 자신의 마을에 사는 수녀가 이웃마을로 온 물건을 해당하는 이들에게만 주는 것도 간혹 오해하고 섭섭해했다. 또 자신들의 지인을 병원에 취직시켜 달라는 등의 투정도 했고, 요구가 거절되었을 때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디오메데스 수녀는 자신의 원칙을 지키며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1983년 성심의원이 대구가톨릭대학병원에 속한 이후에도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5년 뒤 병원이 문을 닫은 뒤에도 그곳에 살았다. 그는 1995년 32년간의 용봉생활을 마치고 본원으로 돌아왔고, 3년 후 선종했다.

90년도 채 안 되는 생애에서 그는 독일, 일제식민치하, 북한공산치하, 대한민국의 체제를 겪으면서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했다. 한국교회의 특수상황을 직접 겪으며 그 중 32년을 한센인과 살았다. 물론 그는 환자를 치료한 것뿐만은 아니었다. 디오메데스 수녀와 환자들은 긴 세월동안 서로 다른 입장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했다. 디오메데스 수녀가 왜 굳이 용봉에서 살기를 고집했는지를 설명한 적은 없다. 아마도 그는 옥사덕 수용소에서 체험한 것과 같은 완벽한 공동체 생활을 믿었는지도 모른다. 절망적이고 폐쇄된 공간에서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이 적나라하게 표출되기 쉽다. 동시에 그곳은 내적으로 결코 해체되지 않을 공동체가 되기도 한다. 디오메데스 수녀와 나치유자들은 이러한 공동체를 이루어 내었다. 그것은 디오메데스 수녀가 통과한 ‘다섯 번째 면허증’일 수 있다. 디오메데스 수녀를 만난 이들은 자신의 병을 이겨냈음은 물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용봉마을 사람들은 본당건축비 마련을 위해 새벽 4시에 장사를 나가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오기도 했다. 또 그들은 전국 나치유자들의 진로를 모색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5·8장학회를 조직하고 사회복지기관 등에서 근무하는 등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다. 그들은 ‘작은 디오메데스’가 되어가고 있다.

나치유자들은 디오메데스 수녀 선종 후 10년 동안 그의 무덤에서 미사를 드렸다. 그 후로도 디오메데스 수녀의 기일에는 꼭 묘를 찾는다. 올해 디오메데스 수녀의 기일에 묘지를 향해 오르던 용봉 사람들은 이미 묘지를 방문하고 가는 베다니아농장 사람들을 만났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십니다.”라며 서로 반가워했다. 용봉마을은 입구에 성당과 병원이었던 기념관이 있다. 또 삼청 베다니아농장은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선물처럼 지어진 성당이 있고, 성당을 중심으로 동네가 펼쳐져 있다.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가톨릭 조직체로서의 위용을 지니고 있다. 디에모의 집에 전시된 디오메데스 수녀가 사용하던 의료기구, 일상용구 등을 보면서 더 많은 이들이 작은 디오메데스 그룹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도움: 보나벤투라 수사, 김태규 신부, 김진국, 박진희, 손경옥)

[월간빛, 2015년 8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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