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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범주론의 legetai와 명리탐의 칭위(稱謂)에 관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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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15 ㅣ No.1537

『범주론』의 ‘legetai’와 『명리탐』의 ‘칭위’(稱謂)에 관한 논의*

 

 

국문초록

 

17세기 중국에서 『명리탐』의 출간은 수용사적 관점에서는 대체로 실패로 평가된다. 그러나 『명리탐』 자체의 학술적 가치에 대한 평가는 이 평가와 상관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평가에서는 『명리탐』이 얼마나 많은 독자를 확보했는지가 아니라 번역이 얼마나 성공적인지 여부가 가장 비중 있게 검토되어야 한다. 이 글은 『명리탐』이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의 ‘legetai’의 번역어로 제시한 ‘稱’과 ‘謂’의 적절성을 검토하려는 시도다. 이 검토의 결과 『명리탐』의 번역자들이 그 두 번역어를 논의의 맥락에 맞게 구별하여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필자는 그것이 『명리탐』 전체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대목에서 성공적인 번역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검토를 근거로 필자는 『명리탐』 자체의 가치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그리고 번역의 성공은 수용사적 성공을 향한 어려운 첫 관문을 통과했다는 것을 뜻하니 만치 수용사적 관점에서 『명리탐』에 대한 평가도 어느 정도는 수정이 필요하다는 시사도 했다.

 

 

서양 논리학을 동양에 처음 소개한 책은 명(明)말인 1631년 중국에서 출간된 『명리탐(名理探, Minglitan)』이다. 『명리탐』은 포르투갈의 명문 코임브라(Coimbra)대학에서 논리학 교재로 사용되었던 ‘Commentarii Collegii Conimbricensis e Societate Iesu In Universam Dialecticam Aristotelis Stagiritae’이라는 긴 제목을 달고 있는 라틴어 서적의 번역서다(이하 약칭 ‘In Universam Dialecticam’으로 부르겠다). 번역은 바로 코임브라 대학에서 수학했던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푸르타도(Francisco Furtado, 傅汎際, 1587-1653)와 엘리트 관료인 이지조(李之藻, 1571-1630)가 협업해서 해냈다. 협업은 푸르타도가 라틴어 원문의 뜻을 새겨 설명하면(譯義) 이지조가 그 뜻에 맞는 한문 표현을 찾아내는(達辭)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둘은 이미 서학 문서의 한역(漢譯) 사업에 참여한 경력을 지닌 숙련된 인력이었다. 아마 당시 중국에서 이 둘보다 더 훌륭한 공역(共譯) 팀은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1)

 

그렇지만 이들의 역작인 『명리탐』은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인들의 기억 속에서는 그 흔적도 찾기 어려운 책이 되고 말았다. 사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명말의 중국인들은 서학을 접하면서 전통적으로 자신들에게도 낯설지 않았던 천문, 지리나 역법 등 실생활과 관련된 분야의 학문에는 어느 정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실생활의 현실적인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논리학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대단한 식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앞뒤가 맞는 이야기를 하려고 논리를 구사하는 정도의 일은 하니까 논리 자체가 낯선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냥 논리적인 법칙에 맞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과 그 논리적인 법칙에 대한 학문적 성찰을 토대로 논리학의 체계를 수립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서양에서는 서기전 4세기에 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체계적인 학문으로 수립되었다. 중국에서도 선진시대에 논리학이 태동했다고 하나, 태어나 제대로 중국의 학문사에 제 자리를 잡고 역할을 할 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논리학이나 논리학의 핵심을 이루는 논리적 법칙 또는 형식적 타당성과 같은 것은 명말 중국인들의 지식지평 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개념이었다. 그러니까 중국인들의 지적 관심사에서 연결 고리를 찾아 서양 논리학에 접할 수 있는 교두보를 설치하는 식의 전파 전략은 생각할 수 없는 사정이었던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논리학은 어디에 어떤 쓸모가 있는지도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아주 생소한 학문 분야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학문이 『명리탐』 책 한권이 출간되면서 곧 널리 전파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 것 같다.

 

게다가 『명리탐』은 전문적인 학술서다. 그 저본(底本) ‘In Universam Dialecticam’은 코임브라 대학의 교과 이수 규정에 따르면 일학년 교과과정의 수강과목 교재였지만, 내용이 오늘날 대학의 교양과정에나 설치될 ‘논리학 개론’ 또는 ‘논리학 입문’과 같은 과목의 교과서와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 신학 전공 필수 과정의 일부로 주로 사제가 될 학생들을 상대로 운영되는 집중 코스에서 일년 내내 학습할 내용을 담은 교재였다. 그런 책을 번역해 내놓은 것은 비유하자면 서양 수학을 공부해본 적이 없는 중국 선비에게 대뜸 서양의 미적분학 교과서를 한역해 놓고 읽기를 권하는 격이라 할 수 있겠다. 수학을 기초부터 공부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한문 실력이 도저한 선비라도 그 실력만으로 미적분학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수학의 초, 중등 과정을 건너 뛰고 미적분학부터 시작해서 수학을 가르쳐 전파하겠다고 하는 것을 밭갈이도 하지 않고 맨땅에 그냥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짓이라고 하면 『명리탐』을 통해 논리학을 전파하겠다고 하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명리탐』이 출간되면서 곧 널리 읽혔다면 그것이 오히려 아주 이상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연구가들 대부분은 수용사의 관점에서 『명리탐』의 출간을 실패로 평가한다. 그 실패에는 중국의 미흡한 수용 태세에 더해 저본의 선택이 또한 그에 못지 않은 큰 몫을 했다.

 

그렇지만 『명리탐』 출간을 실패로 평가했다고 해서 곧 『명리탐』 자체를 실패작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학술서로서 『명리탐』의 가치는 당대에 얼마나 널리 읽혔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미적분학 책이 인기 교양 도서 목록에 오르는 일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법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 책을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평가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명리탐』의 경우도 다를 바가 없다. 이 글에서 필자는 『명리탐』 자체의 가치를 평가하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 『명리탐』의 학술적 가치는 - 그것이 번역서인 한은 - 일차적으로는 어쨌든 원작의 학술적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은 서양 학문사에서 내내 고전의 위상을 지녀온 것이니까 원작의 학술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는 새삼 꺼낼 필요가 없겠고, 중요한 것은 푸르타도와 이지조가 얼마나 충실한 번역을 했는지 검토하는 것이다. 검토 결과가 긍정적이면 『명리탐』은 원작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성공작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경우 충실한 번역은 저본의 원의(原意)를 백지에 그대로 복사하듯이 옮겨 놓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명리탐』의 경우에도 번역의 목표언어(target language)인 한문은 백지가 아니라 중국문화로 빈틈없이 채색되어 있는 캔버스다. 번역의 품질에 대한 판정은 중국문화에 특유한 평가 기준을 무시하고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은 당연하다. 푸르타도와 이지조의 번역이 기점언어(source language)로 표현된 원의에 어긋나지 않는지 여부까지도 목표언어(target language)의 세계에서 확인되는 사항이다. 그 번역이 목표언어인 한문으로는 이해 불가한 것이라면 충실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아예 번역으로 인정될 수도 없다. 따라서 『명리탐』은 일단 기점언어의 세계와 목표언어의 세계를 섞어 새로운 배색(配色)을 고안해내는 시도로서 평가의 대상이 된다. 이제 그 시도의 결실이 중국문화의 캔버스에 제대로 착색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면, 『명리탐』은 진정 충실한 그리고 성공적인 번역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긍정적인 평가는 수용사적 관점에서 『명리탐』을 그냥 실패로 판정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명리탐』의 번역이 성공적이라는 것은 어쨌든 동, 서양의 지성이 서로 만나는 접면(接面)에서 두 세계의 배색과 착색의 가능성이 확인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성공적인 수용을 향한 첫 관문이 열린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명리탐』의 일부만을 평가 대상으로 검토했다. 그리고 검토한 부분에 대해서는 성공적이라는 긍정 평가를 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겠다. 아직 작품 전체에 대해 확실한 평가를 내놓을 수 있을 만큼 학계의 연구가 진행되어 있지 않은 이 시점에서 내놓는 그런 평가는 물론 잠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에 작품 전체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 평가가 완전히 뒤바뀌거나 무효화될 가능성은 별로 크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은 『명리탐』의 한 부분이기는 해도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명리탐』의 핵심은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의 한역인 ‘십륜(十倫)’이다. 나머지 부분은 이 핵심부분에 대한 주해(註解)이거나 논의의 내용을 보충하는 글이다.2) ‘십륜’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데, 그에 대한 해설이 – 더 정확하게는 그 해설의 번역이 - 신통치 않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십륜’ 자체의 평가까지 다시 해야 하게끔 되는 경우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이론이 그처럼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이유를 상기해보면서 그 이론의 중국 버전인 십륜에 대한 검토를 시작하도록 하자.

 

범주 이론은 전통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도입부에 위치한 이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 본진에 해당하는 위치를 갖고 있는 것은 논증에 관한 이론이다. 논증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각 종류의 논증이 지닌 특색을 다루는 것이 논증 이론의 구체적인 중심 내용이지만, 어떤 종류의 논증이든 주어-술어 구조의 명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각 종류의 논증에 관한 논의 이전에 명제에 관한 논의부터 해야 한다. 그런데 명제는 주어나 술어의 역할을 하는 단어(term)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명제에 관한 논의에 앞서 명제로 결합되기 이전의 단위인 단어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결국 단어에 관한 논의에서부터 출발해야 논증 이론을 제대로 구축할 수 있는 것이다. 단어에 관한 논의가 바로 범주 이론이다.3) 범주 이론의 중심 과제는 언어의 기본 단위인 단어가 언어의 기술 대상인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밝히는 것이다. 범주 이론이 이 과제를 다루면서 논리학이 세계에 관한 지식을 탐구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는 일차적인 근거까지 마련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범주 이론은 논리학의 도입부에서 논리학이 성립할 수 있는 토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푸르타도와 이지조가 범주 이론의 이처럼 중요한 과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한문으로 표현하려 했는지 살펴보자. 『범주론』에서는 ‘legetai’(라틴역에서는 ‘dicitur’)라는 말로 단어와 세계의 연결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은 마치 『범주론』의 테마 곡조인 것처럼 각 장의 여기 저기에 아주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특별한 뜻을 가진 전문어가 아니다. 그저 ‘.. 라고 불린다’ 또는 ‘.. 라고 한다’는 뜻의 일상어로서4)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 즉 세계에 존재하는 (또는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에 관해 언급하려면 이러 저러한 언어적 기호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만 알려줄 뿐이다. 우리는 그 말이 언어와 세계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한다는 것 이상 그 교량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정보는 전혀 얻지 못한다. 푸르타도와 이지조에게 이 말에 해당하는 한문 표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많은 선택지 중 그들이 골라낸 말은 ‘칭(稱)’과 ‘위(謂)’였다. 이 두 말은 동의어처럼 서로 바꿔 쓰이기도 하지만, ‘謂’가 좀 더 많이 쓰인다. ‘십륜’ 전체에서 ‘稱’은 모두 97번 쓰이지만 ‘謂’는 173번 쓰인다. 사실은 둘 사이에 뜻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謂’가 좀 더 일반적인 뜻으로 더 많이 쓰이게 된 것이다. 그 둘의 차이는 뒤에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고 일단 ‘謂’가 쓰인 예부터 살펴보자.

 

『범주론』의 라틴어 번역 텍스트는 같은 소리지만 그 뜻이 서로 다른 말로 불리는 사물을 언급할 때는 ‘aequivoca’라는 명칭을 쓴다는 구절로 시작된다(先論之一).

 

Aequivoca dicuntur ea quorum nomen solum commune est, ratio uero substantiae nomini accomodata diversa, ut animal dicitur et ipse homo, et id quod est pictum. Horum enim nomen commune tantumodo est, ratio vero substantiae nomini accomodata diversa; si quispiam enim, quae nam sit utriusque ratio animalis, voluerit assignare, rationem utrisque profecto propriam assignabit.

 

이 구절을 푸르타도와 이지조는 다음과 같이 옮겼다.

 

同名歧義. 活人塑人, 皆謂之人. 厥名雖同, 體義則異.

 

푸르타도와 이지조는 ‘同名歧義’라는 말을 쓰면서 굳이 그 뜻을 풀어 설명하지 않았다. 글자를 보면 일단 거기에서 곧 뜻을 읽어낼 수 있는 한문의 특성 상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무엇의 명칭인지는 불명하다. 곧 이어 나오는 ‘活人塑人’이란 예를 통해서 그 말이 세계에 소속된 사물의 짝에게 붙이는 명칭이라는 것이 비로소 확실 해진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나 흙으로 빚은 사람의 상이나 다 같이 ‘人’이라고 부르는 경우 즉 ‘皆謂之人’하는 경우가 문제의 명칭이 쓰이는 사례라는 것이다.

 

『범주론』에서는 ‘aequivoca’에 이어 곧 ‘univoca’가 설명되는데, 이 설명의 번역에서 또 한 번 ‘謂’가 쓰인다.

 

Univoca ea dicuntur, quorum et nomen commune est, et ratio substantiae nomini accommodata eadam est: ut animal dicitur et ipse homo, et equus: nomine namque communi et homo, et equus animalia nuncupantur, et ratio quoque substantiae utrisque[Jn. utriusque] eadem est. Si quispiam enim utrisque[Jn. utriusque] rationem voluerit assignare, quaenam sit utriusque ratio animalis, eandem rationem omnino reddet.

 

外名內義, 皆合斯物, 是謂同名, 而亦同義. 

 

이 번역에서는 이름도 같고 이름의 뜻도 같은 말로 지시된 사물을 언급할 때 ‘謂’라는 말을 쓴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 번역에서는 또 ‘外名’과 ‘內義’라는 말이 주의를 끈다. 이름은 밖에 그리고 그 뜻은 안에 위치한다고 규정한 것은 그리스어 원본이나 라틴 번역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밖과 안의 대비를 더 보탬으로써 이름은 소리로 귀에 들리는 것이고 그 이름의 뜻은 마음 속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뜻을 더 명확하게 했다. 저본에 없는 말을 보탰지만, 사실상 저본의 뜻에 더 충실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으로서 더 좋은 평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사례라 하겠다.

 

그 다음 흥미 있는 예는 『범주론』의 라틴 텍스트의 다음 구절이다.

 

Eorum quae dicuntur, Alia cum complexione, alia sine complexione dicuntur. Illa talia sunt, homo currit, homo vincit. Haec istius modi sunt, homo, bos, currit, vincit.

 

푸르타도와 이지조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옮겼다(先論之二).

 

凡稱名者, 或合而謂, 或專而謂. 馬馳人辯, 皆合而謂. 云人云馬, 云辯云馳, 則專而謂.

 

이 번역에서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언급할 때 이름(또는 명칭)을5) 둘 이상 합쳐서 쓰는 경우와 단독으로 쓰는 경우를 구별하면서 전자를 ‘合而謂’, 후자를 ‘專而謂’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전자의 예시로서 “말이 달린다”(馬馳)와 “사람이 말한다”(人辯)를 들고 있다. 이 두 예는 문장(sentence)을 발언하는 것이 ‘謂’의 일종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단독으로 쓰이는 이름의 예로는 이 문장의 주어나 술어로 쓰인 말들을 즉 사람이나 말 나아가 달리는 것, 말하는 것의 이름을 들고 있다.

 

그러면 ‘謂’가 눈길을 주게끔 하는 대상은 어떤 것이 있을까? 위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일단 세계 내에 자리하고 있는 소위 존재자들, 명사로 지시되는 것만이 아니라 동사로 지시되는 것들까지 포함해서 모두 그 대상에 포함된다. 나아가 사실(fact)이라고 해야 할지 또는 그것보다는 더 넓게 사태(state of affairs)라고 할지 아니면 명제적 내용(propositional content) 이라고 해야 할지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문장이 지시하는 것도 포함된다. 뿐 아니라 동명이의나 동명동의와 같이 좀 복잡한 구조의 의미론적 현상도 ‘謂’의 대상에 포함된다.6) 이것은 세계 내의 존재자 중 하나이기는 하나, 세계와 언어의 관계에 관한 메타수준의 반성적 사고를 통해 구성된 대상이다. ‘謂’는 그만하면 ‘legatai’ 또는 ‘dicitur’의 한문 번역어로 가장 넓은 뜻을 가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어휘의 사용만 검토하면 『명리탐』 나름의 언어철학적 특징이 따로 있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謂’의 용법은 일반적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명리탐』에서는 ‘謂’만이 ‘legatai’ 또는 ‘dicitur’의 번역어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쓰인 ‘云’이란 어휘도 그 번역어 중 하나다. ‘云’은 ‘云人云馬’, ‘云辯云馳’라는 구절에서 쓰이고 있는데, 이 예를 얼른 읽으면 ‘云’은 ‘謂’와 그 뜻이 특별히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 쓰임새가 서로 다르다. ‘謂’는 ‘사람’이라는 어휘를 발화(發話)하는 행위가 시선을 그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 즉 사람에게 향하게끔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지만, ‘云’은 시선과 동시에 귀에 들리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게끔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謂’는 전적으로 대상 쪽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云’은 상대적으로 언어 자체에 더 큰 비중을 두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云’의 쓰임새를 가장 잘 알 수 있게끔 해주는 예는 『명리탐』의 머리말에 나오는 ‘愛知學者 西云斐錄瑣費亞’라는 구절이다. 철학이란 학문을 언급하면서 서양에서는 이 학문을 ‘philosophia’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을 말하는 대목인데, 그 서양 이름의 말 소리가 어떤지 전하기 위해 ‘斐錄瑣費亞’로 음차(音借)한 어휘를 썼다. 여기서 철학의 뜻을 염두에 두고 ‘愛知學者’라는 말을 썼고 그 학문을 가리키는 서양 말 소리를 염두에 두고 ‘斐錄瑣費亞’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 얼른 확인된다. 이 예를 통해 ‘云’의 쓰임새가 어떤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아주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云人’이나 ‘云馬’, ‘云辯’, ’云馳’등의 뜻을 우리가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끔 번역하려면 ‘사람’이니 ‘말’, ‘말한다’(또는 ‘말함’), ‘뛴다’(또는 ‘뜀’)라는 소리를 사용한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날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云’이 이렇게 ‘謂’와는 다른 쓰임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이제 ‘謂’에 대하여 좀 더 선명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謂’는 확실히 범용(汎用)이라 할 만큼 그 쓰임새가 넓지만, 그래도 세계와 언어 사이의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시선이 대상 쪽을 향한다는 특징을 가졌기 때문에 언어 쪽에 시선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맥락에서는 ‘云이라는 다른 어휘를 쓰게 되었다. 그런데 이미 앞에 시사한 바 있지만, 시선이 대상을 향한다는 특징으로 말하면 ‘稱’도 그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제 ‘謂’와 ‘稱’의 쓰임새가 완전히 같을지 아니면 어떤 차이가 있을지 검토해보기로 하자.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도 ‘稱’은 등장했다. ‘凡稱名者’에서 ‘稱’이 쓰였다. 이 ‘稱’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라는 번역의 일부로서 그 뜻이 ‘謂’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두 말이 동의어처럼 서로 바꾸어 써도 의미 상의 변화가 생기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 두 말을 하나로 묶은 ‘稱謂’로 쓰인 경우도 있다. 범주 이론의 중국 버전인 ‘십륜’을 ‘稱謂’에 관한 논의로 규정하기도 했고 ‘皆稱謂勇’과 같이 하나의 뜻을 가진 동사인 것처럼 쓰인 예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 두 말이 각각의 뜻을 따로 가지고 합쳐진 것인지, 그냥 같은 뜻의 말이 반복되어 쓰인 완벽한 이어일상(二語一想, hendiadys)인지 얼른 판단하기 쉽지 않다. ‘稱謂’라는 복합표현은 ‘십륜’에서는 단 두 번만 사용된다. 용례를 근거로 그 뜻을 확실하게 밝혀 내기는 어렵다. 어쨌든 ‘稱謂’라는 복합 표현의 문제를 더 이상 다루지 않아도 ‘칭’과 ‘위’의 같고 다름을 검토하는 데에는 큰 지장은 없으니까 ‘稱’이 단독으로 쓰인 예를 검토하면서 논의를 진행시켜 나갈 수 있다.

 

‘稱’이 단독으로 쓰일 때 ‘謂’와 확실하게 구별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예는 많다. 그 중 가장 구별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경우만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稱’도 ‘謂’와 마찬가지로 ‘legetai’를 옮긴 말인데, ‘legetai’에 ‘kata hypokeimenou tinos’(라틴어, de subjecto)라는 구가 같이 쓰이면 ‘稱’이 ‘legetai’의 공식적인 번역어인 것처럼 쓰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그 예는 앞에 인용한 구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아래 구절이다(先論之二).

 

凡謂有者, 或不在底, 而能稱底. 如人稱某, 非謂在某

 

이 구절을 일단 우리말로 옮기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 중에 어떤 것은 바닥에 내재해 있지 않으면서, 바닥이 [무엇인지] 일컬을 수 있다. 예컨대 ‘사람’은 어떤 사람을 일컬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에 내재하고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이 구절은 다음의 라틴어 텍스트를 번역한 것이다.

 

Eorum quae sunt, alia. De subiecto quidem dicuntur, in nullo vero sunt prorsus subiecto; ut homo de quodam homine dicitur, ut de subiecto, in nullo autem est subiecto.

 

필자는 인용한 한역을 저본인 라틴어 번역 외에 그리스어 원본에 조회해보면서 아주 탁월한 번역이라고 판단했다. 첫 문구인 凡謂有者에 해당하는 원본이나 저본의 표현은 그냥 ‘존재하는 것들’(ton onton, eorum quae sunt)이다. 거기에는 ‘謂’에 해당하는 표현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원본에 없는 말을 첨가한 것이 오히려 원본의 본 뜻을 더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원본인 그리스어 원문과 저본인 라틴어 본의 해당 구절을 그대로 새기면 존재하는 것이 곧 稱한다고 하는 셈인데, 그것은 사실 부정확한 표현이다. 실재 존재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이 稱하는 데에 쓰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의 마지막 문구인 ‘非謂在某’도 그리스어본이나 라틴본에는 없는 ‘謂’를 첨가하고 있는데, 그 역시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속성으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그냥 인간이 어떤 사람에게 속성으로 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보다는 더 정확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술함으로써 언어와 대상의 관계로서 ‘稱’과 ‘謂’의 대비가 더 명확해진다.

 

이제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으로 넘어가기 위해 인용한 부분에 나오는 ‘稱’의 용법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인용문에서는 속성과 실체의 유명한 구별이 첫 선을 보이고 있는데, ‘稱’은 주로 실체와 연관되어 쓰인다. 그러나 ‘稱’ 즉 일컫는 것의 목적어로 당장은 실체가 아니라 ‘底’다. ‘稱’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底’라고 번역된 기체 基體,(hypokeimenon, 라틴어 subjectum)의 개념 내용부터 알아 보아야 한다. 기체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보통 ‘개체(individuum)’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컨대 ‘홍길동’, ‘소크라테스’등 고유명사로 지시하는 존재자들이다. 『명리탐』에서 특별한 고유명사를 동원하기를 피하고 ‘某’ 또는 ‘甲’이라고 표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보통 우리가 고유명사로 지시하는 개체는 인간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아닌 존재자에는 개체적 구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아닌 개체적 존재는 순전히 인간만큼 귀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일일이 고유명사로 부르는 대접을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범주론』에서는 사람에게만 개체성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고유명사로 불리는 대접을 받지 못하는 존재자들에게도 개별성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된다.7) 어쨌든 개체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 질문에 답을 하여 그 정체 즉 본질을 드러내는 이름을 말하면 그 이름이 붙는 대상이 기체다. 그래서 ‘hypokeimenon’ 또는 ‘subjectum’은 ‘기체’가 아니라 가끔 ‘주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문법 용어로 주어를 서양에서 ‘subject’로 부르는 것에서 영향을 받은 번역인데, 『범주론』에서 쓰인 용어가 후대에 문법 용어로 쓰이게 되었으니까 결과가 거슬러 올라가 원인의 이해를 결정해준 셈이 되겠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은 기체 자체는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홍길동’인 고유명사가 아니라 개체인 홍길동이 기체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홍길동을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곧 ‘稱’인 것이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 기체를 稱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된다.

 

여기서 또 하나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은 ‘홍길동’이란 고유명사로 홍길동을 부르는 것은 ‘稱’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유명사 ‘홍길동’은 홍길동의 진정한 정체 즉 본질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려주는 바가 없다. 어떤 존재자를 가리켜 ‘홍길동’이라고 하면 그것이 개인지 사람인지 도깨비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유명사로 기체를 가리키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칭(稱)하지는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이론에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일차 실체(一次 實體)의 가장 기본적인 규정이다. 물론 이 규정에서 일차 실체라고 하는 것이 홍길동이 아닌 ‘홍길동’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은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차 실체를 이야기하면서 홍길동과 ‘홍길동’의 차이를 계속 무시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8)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해당 구절에서 기실은 일차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을 그냥 줄여서 일차 실체라고 한다는 호의적인 해석을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일차 실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는 ‘稱’과는 상관이 없고, 홍길동의 경우에는 최근류(最近類, infima species)를 가리키는 이름인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 ‘稱’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홍길동을 가리키면서 ‘人’이라고 하면 그것이 ‘稱’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서술(predication)과는 다른 것이다. 서술은 ‘홍길동’이라는 주어에 ‘사람’이라는 술어를 연결하여 “홍길동은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稱’은 ‘홍길동’과는 상관이 없고 홍길동이라는 개체를 지시하면서 ‘人’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리탐』에서는 “홍길동은 사람이다”라는 문장의 진위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홍길동에게 ‘人’이라는 이름을 맞게 일컬은 것이냐가 우선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서술이 아니라 명명(命名, appellation)의 문제가 먼저라는 것이다. 모르기는 하되, 그것이 아마 정명(正名)의 문제일 것이다.9) 그런 점에서 『명리탐』에는 플라톤의 『크라튈로스』와 접점을 가지고 있는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필자는 그렇다고 『명리탐』에는 서술에 대한 개념이 부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미 앞에 살펴본 바 있는 ‘馬馳’와 ‘人辯’은 진위를 가릴 수 있는 문장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의 시비를 가리기 이전에 단독으로 쓰인 ‘말’이나 ‘사람’ 그리고 ‘달린다’나 ‘말한다’가 제대로 쓰인 이름인지부터 살펴야 한다는 것이 아마 『명리탐』의 입장일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이 근거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다음 구절을 인용하겠다(先論之三).

 

凡稱稱者, 稱所指底, 亦其所稱. 擧人稱某, 人是稱者, 某是其底. 凡所稱人, 亦必稱某. 又如生覺, 挾本然者, 用以稱人, 則亦稱人. 所稱之某, 緣某爲人, 幷爲生覺

 

이 구절이 번역한 저본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Cum quippiam de quopiam praedicatur, ut de subiecto: ea quae de praedicato dicuntur, dicentur etiam de subiecto: ut homo de quodam homine praedicatur animal, autem de homine praedicatur: igitur animal de quodam etiam homine praedicatur: [p. 253] quidam enim homo, et homo est, et etiam animal.

 

한역에서 ‘凡稱稱者’를 논한다는 것은 기체를 가리켜 稱한 것(A)을 다시 稱하는 것(B)에 관해 설명하겠다는 것이다. 그 설명에 의하면 간단히 말해 앞의 문장에서 약자 B로 표시한 이름은 약자 A가 稱하는 기체를 稱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뒤의 예시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사람’이란 이름을 들어 어떤 특정 개체 가령 홍길동을 稱하는 경우에, 사람을 稱하는 모든 것 가령 ‘동물’이란 이름을 사용해 사람을 稱하게 되면 ‘동물’이란 이름은 특정 개체인 홍길동도 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그 개체 홍길동이 사람이며 아울러 동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는 이 경우 ‘稱稱者’에 관한 설명을 서술문 ‘사람은 동물이다’를 통해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사람’과 ‘동물’의 관계 즉 주, 술 관계는 기실 ‘사람’이 稱하는 것들을 ‘동물’도 稱한다는 것으로 나뉘어진다는 것이 위에 인용한 글의 요지다. 좀 더 일반화하여 다시 말하면 ‘A는 B다’(A는 유, B는 종을 표시함)의 뜻은 X를 ‘A’가 稱하면 X를 ‘B’도 稱한다는 사실로 분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문제의 서술문의 핵심인 서술보다 이치상 더 우선하는 것이 명명(命名)이라는 것이 재삼 확인되었다 할 수 있다. 필자는 『명리탐』이 문장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다고 하기 보다는 문장의 존재를 부차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고 해석하고 싶다. 『범주론』 5장에서 logos나 doxa의 진위 문제를 논의하는 부분을 『명리탐』이 과감하게 생략해버린 것도 필자는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문으로 문장의 진위를 논하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했겠지만, 그것은 결코 극복 불가능한 난관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보다는 그 까다로운 논의를 굳이 수고스럽게 소개할 의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제 『명리탐』의 언어철학적 기본 틀이 어떤 것인지 주로 ‘稱’ 그리고 ‘謂’와 ‘云’의 개념과 비교해보면서 밝혀보려는 시도를 마무리하겠다. 우선 ‘稱’과 ‘謂’의 개념적 구분을 다시 한번 명확히 하면서 『명리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짚어보겠다. ‘稱’은 오직 개체로서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 즉 그것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려주기 위해 이름을 붙이는 경우에만 쓸 수 있는 말이고, ‘謂’는 개체 또는 개별적인 것의 본질을 알려주는 경우 이외의 다른 모든 경우까지 포함해 이름과 존재자를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시킬 때 쓰는 말이라고 보면 둘의 차이가 가장 잘 설명될 것이다. 이 설명을 통해 『명리탐』이 비록 문장에 관한 생각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거리를 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 형이상학만큼은 그 요체를 수용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확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 글에서 푸르타도와 이지조의 번역 품질을 검토하면서 『명리탐』의 학술적 가치를 평가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 검토가 ‘稱’과 ‘謂’의 개념적 구별에 관한 문제에 집중하면서 자연스럽게 『명리탐』의 특징적인 언어철학적 관점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푸르타도와 이지조가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던 때문이겠다. 두 사람의 협업은 동, 서양의 만남을 통해 문화의 배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한 것이다. 비록 『명리탐』은 중국에서 당대에 많은 독자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수용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첫 단계에 성공적으로 도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이 글의 미흡한 점도 스스로 짚어내고자 한다. 『명리탐』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논의를 하면서 ‘십륜’에서 ‘선론(先論)’이라고 불리는 부분에서만 예를 취해 검토한 것은 좀 증거자료 제시가 부족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후속 논문을 통해 좀 더 많은 다른 증거자료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변명에 대신하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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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준 · 염정삼(2016). 코임브라대학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라틴어본 서문과 중국어본 『명리탐』 서문의 번역〉, 《인간·환경·미래》 17,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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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리탐』에 착수하기 바로 전에 두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De Caelo’를 저본으로 하여 그의 우주론을 소개하는 내용의 『환유전(寰有詮)』을 같이 집필했었다. 그 때도 둘은 역의와 달사로 임무를 나누어 협업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이지조는 그 전에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을 도와 여러 서학 문서를 펴내는 일에도 적극 관여했었다. 그 중 서학 관련 총서라고 할 수 있는 『천학초함(天學初函)』을 편집한 것과 수학 기본서인 『동문산지(同文算指)』를 저술한 것을 특기할 수 있다.

 

2) 『명리탐』의 저본 ‘In Universam Dialecticam’은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집필자도 여럿이다. 『범주론』의 라틴어 번역 텍스트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부분은 범주 이론의 학습을 돕기 위해 쓰였다는 포르퓌리오스(234-305 AD)의 『입문(isagoge)』의 라틴어 번역 텍스트다(‘입문’이라는 제목이 바로 ‘범주론 입문’의 약칭이다). 이 저술에 대한 주석과 머리말 부분을 쓴 코임브라 대학의 교수 S. do Couto(1567-1639)는 형식상 대표 집필자로 인정될 수 있으나, 집필자의 목록 맨 앞에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포르퓌리오스가 거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저자의 저술을 라틴어로 번역한 J. Argylorpoulos(1415-1487)도 집필진의 일원으로 포함될 수 있다.

 

3) 이처럼 범주 이론에 논리학이라는 큰 건축물의 토대와 같은 비중을 부여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체계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에 따른 것이다. 그런 이해에 대해서는 그것이 과연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진의에 합치하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또 그런 이해에 따르면 논리학의 영역이 너무 확장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우려도 이야기할 수 있다. 실제로 범주 이론은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영역에도 한 발을 딛고 있는 논리철학 또는 언어철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17세기 이후에나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이 글은 17세기의 지평 내에 머물러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4) 이 말은 종종 ‘..말해지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어색한 수동형의 표현이지만 표준국어 대사전에 기입되어 있으니까 이 표현을 쓰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5) 이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onoma’는 애당초 문법적으로 명사의 범주에 속하는 것만이 아닌 넓은 뜻으로 쓰였다. 우리에게 남겨진 문헌 중에는 플라톤의 『소피스트』에서 최초로 ‘onoma’가 명사로서 동사/술어를 의미하는 ‘rhema’와 구분되고 있다(262a). 『소피스트』 이전에 저술된 플라톤의 작품(『변명』, 『향연』 등)에서도 ‘onoma’와 ‘rhema’는 구분되어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 구분은 명사와 동사/술어의 구분과는 다른 것이다. 『크라튈로스』에서도 두 말은 아주 명백하게 구별되어 쓰이고 있지만(399ab), 이 구별 역시 명사와 동사/술어의 구분이 아니라 두 마디 이상으로 이루어진 구句와 한마디로 된 이름의 구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D. Sedley는 여기서 ‘rhema’는 기술(description)의 뜻이라고 해석하는데 (Plato’s Cratylus,

Cambridge,2003, 162-4), 그 해석이 옳다면 뒤에 그것이 동사/술어의 뜻을 갖게 될 단초가 『크라튈로스』에서 마련되었고 onoma도 명사로서 이름의 뜻을 갖게 될 단초도 아울러 주어졌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플라톤에서 ‘onoma’의 뜻이 문법적으로 좀 더 엄격한 뜻으로 한정되었다고 해도, 그 말이 일상적으로나 철학자들 사이에서나 여전히 넓은 뜻으로 품사 구별과 상관없이 쓰일 수 있었다. 그 점을 의식하고 포르퓌리오스는 『범주론』 주석서에서 ‘onoma’를 넓은 뜻으로 쓰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변을 제시하기도 한다(62.1-7). 그에 따르면 한 문장(logos)의 어떤 부분이든 ‘onoma’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근거는 그 부분 앞에 명사처럼 정관사를 붙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간단, 명쾌하지만, 적절한지는 의문스러운 논변이다. 어느 부분이든 정관사를 이용해 명사형으로 만들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해당 부분의 말은 대상 수준에서 메타수준으로 옮겨져, 더 이상은 대상을 지시한다는 뜻에서 이름으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onoma’나 ‘名’이 넓은 뜻의 이름으로 쓰이는 것은 그냥 가리키는 대상이 있다는 정도의 느슨한 정당화 이상은 불필요하다.

 

6) 고대 말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들은 이런 대상들을 ‘이차 설정(he deutera thesis, secunda positio)’ 수준의 이름이라고 불렀다. 일차 설정의 수준에서 우리는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것들 예컨대 사람, 말, 달림, 말함과 같은 것에 직접 이름을 붙이지만, 이차 설정 수준에서는 그런 이름과 대상과의 관계까지 언급하기 위해 또 다른 이름을 사용한다. 이 구별은 중세로 전해져 계속 논의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W.&M. Kneale(1962)의 논리학사를 참조할 수 있음.

 

7) 아리스토텔레스는 특이하게도 개체에게 속한 속성에도 개별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여기 놓여있는 빨간 모자는 하나의 개체이지만, 그 모자에만 특유한 색인 빨강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개별적인 것이다. 그래서 속성 역시 개체와 마찬가지로 기체 노릇을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기체’라는 번역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별적인 빨간색에 ‘체’體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용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는 한역 ‘底’가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개별적인 속성의 문제는 논의하지 않겠다. 『범주론』에서 속성이 기체 노릇을 하는 경우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후에 형이상학적 논의를 깊이 하는 단계에서는 개별적인 속성을 다시 문제삼지 않는다. 개별적인 속성의 문제는 『범주론』 이후에는 사실상 망각되었고, 실체는 개체이고 속성은 보편적인 것이라는 상정이 오랫동안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공통 의견(communis opinio)이 되었다. 개별적인 속성은 20세기 후반에서나 trope란 명칭으로 다시 논의의 주제가 되었다.

 

8) 심지어 『범주론』의 5장에는 “모든 실체는 tode ti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3a8)는 구절도 발견된다. 이 구절에서 ‘가리킨다’고 번역한 말은 ‘semainein’이다. 이 말에 대한 한역은 거의 일관되게 ‘指’를 쓰고 있다. 홍길동이나 사람이 그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의 역할을 할 리는 없다. 그런 역할을 ‘홍길동’ 또는 ‘사람’이라는 이름이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실체’라고 번역해온 ‘ousia’는 언어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9) 『명리탐』의 문제 의식과 중국 정명론의 문제 의식 사이의 연관성에 관한 논의로는 Yijing Zhang(2019)을 참조할 수 있음.

 

* 이 논문은 2016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6S1A5A2A03928082)

 

[학술지 교회사학 제20호, 2022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이태수(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410650&Page=3&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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