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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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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5 ㅣ No.170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상)


한국 선교 78년째 … 265명 선교사 활동

 

 

지난 2008년 홍콩 구룡지역에 마련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총본부 사무실 입구. 성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로고와 한자명이 새롭다.

 

 

홍콩의 구룡반도(Kowloon Peninsula)는 홍콩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원래 용이 여덟 마리가 살고 있었으나 중국 황제가 잠시 피신을 와서 용 한 마리가 더 늘었다는 유래를 가진 지명이 구룡이다.

 

이 지역은 홍콩 섬처럼 화려한 건물은 없으나 경제발전 원동력이 되는 상업지역으로 명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씸사쑤이(Tsimshatsui)’ 거리는 수많은 카메라 상점과 대형 쇼핑센터들이 몰려있는 곳. 그중에서 실버코드(Silvercord)라는 대형 쇼핑몰을 찾았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총본부가 있는 곳이다.

 

5층으로 올라서자 화려한 쇼핑센터 이미지는 간 곳 없이 업무 공간 모습이 확연하다. 사무실 정보판에서 ‘Missionary Society of St. Columban’(성골롬반외방선교회)이라는 낯익은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총본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참사위원들. 토미 머피 총장 신부, 트레버 트로터 부총장 신부 및 존 버리·에본 쉐리단 참사 신부가 선교회 업무와 관련한 회의를 하고 있다.

 

 

선교회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는 504호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영어와 한자로 표기된 선교회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환한 느낌의 사무실 공간이 현대적이다. 토미 머피 총장 신부, 트레버 트로터 부총장 신부와 존 버리·에본 쉐리단 참사 신부 등 본부 참사 위원들이 미팅 중이었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지난 2008년 5월, 1916년 창립 이후 1918년부터 자리를 지켜왔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이곳 홍콩으로 총본부를 옮겼다. 서구의 선교회가 본부팀을 아시아로 옮긴 첫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왜 홍콩일까. 선교회측은 이에 대해‘무엇보다 시대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고 미래를 위한 판단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1916년 갤빈 신부와 블로윅 신부에 의해 중국 선교를 목적으로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창립된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1920년 중국에 첫 선교사 파견을 시작으로 아시아를 향한 외방선교의 닻을 올렸다. 이후 선교사를 청하는 지역이 늘어남에 따라 중국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선교 지역을 아시아를 비롯해 영미권, 라틴아메리카 등으로 확장시켜 왔다. 국경과 언어, 종족을 초월해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한다는 설립 이념의 추구였다.

 

1920년 3월 20일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첫 선교사 16명이 아일랜드를 떠나 중국으로 향하기 앞서 기념 촬영했다. 앞줄 가운데 두 명이 골롬반회 창립자 갤빈·블로윅 신부다.

 

 

1980년대 들어서 아일랜드를 비롯해 서구 교회에서 성소자가 줄어드는 등 교회 흐름이 변화 조짐을 보이면서 1982년 선교회는 영어 문화권이 아닌 각 선교 지역 안에서 회원 양성이 이뤄질 수 있도록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해 최근 10여 년 사이 서품된 회원들 대부분은 환태평양 지역 나라들 출신이다. 또 현재 양성 중인 신학생들도 같은 상황이다. 홍콩 이전은 바로 이 같은 선교회 내 변화 흐름에 지도부가 호흡을 맞춰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비롯됐다.

 

국제적 허브 역할을 하고 있는 홍콩의 지역적인 요건, 즉 여러 선교 활동 국가들과 인접하고 있다는 장점도 새 본부를 홍콩으로 낙점하게 한 요소 중 하나다.

 

홍콩 본부 출범 3년째를 맞고 있는 현재, 선교회로서는 그 결과에 대해 만족하고 있고 선교회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상징적 시도라는 점에 회원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홍콩교구에서도 이들의 전입에 환대하는 분위기다.

 

선교회 측은 총본부의 이동과 관련 한마디로 ‘선교회의 미래를 드러내는 표징’, ‘다수의 유럽인 그룹에서 다문화적 소그룹으로 변화된 선교회 실상의 표현’이라고 밝혔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중국 홍콩지부에 마련된 경당에서 회원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모습.

 

 

“오는 2016년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이제 한 세기에 해당하는 선교시대의 새로운 막을 열어놓았고 그 도전들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의 이 같은 과감한 시도와 변신은 시대 변화와 교회 흐름에 따른 새로운 적응으로 비춰졌다.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의 새로운 복음화 노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선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좌우명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Perigrinari pro Christo)’처럼 그간 교회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고유 활동을 펼쳐왔던 선교회의 역할이 21세기 다변화된 세상 안에서 그에 맞는 새로운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로 접어든 것이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에는 현재 15개 국가에서 440명 회원이 활동하고 있고 40명의 신학생과 20명의 지원 사제, 그리고 60명의 평신도 선교사가 있다.

 

한국은 선교회의 세 번째 진출국이다. 1933년 교황청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청을 받아 10명의 선교사를 파견했는데, 이로 인해 한국교회 안에 발걸음을 내딛은 세월은 올해로 78년째를 맞고 있다.

 

그 세월동안 265명의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았고 20명의 평신도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를 위해 함께 일했다. 1970년대에는 150명의 선교사들이 활동했을 만큼 선교회 안에서 한국교회가 차지한 부분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현 시점에서도 활동이나 선교 영역 면에서 필리핀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비중이 크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새로운 교회 환경에 적응하며 설립 100주년을 향한 선교 행보를 가다듬고 있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의 모습은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라고 가르치며 6세기 유럽 각지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던 주보성인 골롬바노가 현재에 활동하고 있는 양상이었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24일, 홍콩(중국) 이주연 기자]

 

 

[인터뷰] 토미 머피 총장 신부


“78년 한국 선교는 가치 있는 여정”

 

 

토미 머피 총장 신부.

 

 

“현재 선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도전은 큰 규모의 선교회에서 소수의 모습으로, 또 고령화 되어가는 기존의 유럽, 영미권 회원들 속에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교회 출신 젊은 회원들이 새롭게 선교회 구성을 이뤄가는 ‘과도기’적인 상황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개최된 총회에서 우리는 그 같은 도전의 열쇠를 ‘상호문화성(Interculturality)’으로 규정했습니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총장 토미 머피 신부는 선교회 내의 변화의 흐름을 설명하면서 “그런 배경에서 회원들 간 다양성을 식별할 수 있는가, 또 그 다양성 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선교회 안에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면서 “그것은 선교회 카리스마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깨달음으로 작용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머피 신부는 앞으로 선교회는 이러한 변화된 환경을 위해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구조를 갖춰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보다 다양화된 회원 양성과 투명한 재정 운영, 소그룹 구성에 맞는 조직 체계 등인데 이 모든 것들이 지도부에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 말씀에서 ‘떠남’의 의미는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출신 회원이 칠레교회에서 유럽의 방식이 아닌, 나름의 다른 방법으로 선교를 펼치고 있는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머피 신부는 그러한 사례를 통해 선교회 안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조화롭게 일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긍정적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고 했다.

 

학생시절 고향 본당을 찾았던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사제의 한국 선교 경험담, 특히 공소 선교 이야기에 감동해서 외방선교사의 꿈을 키웠다는 토미 머피 총장 신부.

 

그것을 계기로 교구 사제가 되는 계획을 접고 성골롬반외방선교회에 입회했다는 머피 신부는 사제 서품 뒤 소원대로 한국에 파견돼 4년여에 걸친 선교 생활 및 공소 선교를 경험했다.

 

머피 신부는 “골롬반회의 78년에 걸친 한국 선교는 참으로 놀라운 모험이었고 가치 있는 여정이었다”면서 “선교사들의 지원을 받던 처지에서 자체적으로 선교사를 양성하고 다른 지역으로 선교를 나가는 한국교회 모습은 아직도 기본적 선교 활동에 머물고 있는 일본이나 페루, 칠레 등과 비교할 때 확연히 다른 모양”이라고 한국교회의 저력을 높이 평가했다.

 

평신도들에 의해 가톨릭교회의 창립이 이뤄진 점에 대해 ‘특별함’을 표시한 머피 신부는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평신도들에 의해 복음이 싹을 틔운 그 열정으로 아직 복음 전파가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서는 노력, 특히 외방선교에 관심을 갖는 정성을 더욱 발휘해 달라”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24일, 이주연 기자]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하)


격변의 세월 함께 나눈 ‘복음화의 전우’

 

 

서울 동소문동 6가에 위치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센터. 선교지 정보와 사전 교육 등을 제공하기 위한 교육 시설의 필요성에 의해 2003년 건립됐다.

 

 

한국교회에서의 세월

 

고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 1993년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 진출 6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이 같은 말을 남겼다.

 

“언제나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데 민감하고 시대의 요구에 응하는, 특히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가난한 형제자매들에게 헌신하는 골롬반회 신부님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 특수사목에서도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분산되고 흩어져 사는 사람들과 어려움에 부딪힌 사람들의 필요에 꼭 맞는 사목을 창안하셨습니다.”

 

김 추기경의 회고처럼,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 지부가 78년 세월 속에서 일관되게 지켜온 정신은 ‘시대적 요구에 앞장선 응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골롬반 선교사들이 처음 한국에 도착한 날은 1933년 10월 31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었다. 당시 서울대목구장은 원형근 아드리아노 주교, 대구대목구장은 안세화 플로리아노 주교였는데,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었던 이들이 성골롬반외방선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한 것이 결실을 본 것이었다.

 

이날 도착한 10명의 선교사들은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 6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우고 공부를 마친 후 1934년 광주·제주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부터는 춘천으로도 파견됐다.

 

그때 광주에서 사목활동을 했던 매리난 신부 회고에 따르면 “본당 관할 공소가 26개나 되었기에 전교회장, 복사와 함께 공소 방문을 나가면 공소 회장 집에서 오래 머물러야 했고,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주로 전교회장을 통해 「요리 강령」이라는 그림 교리책으로 전교를 했다”고 한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일본 경찰들은 골롬반 선교사들을 스파이 혐의를 들어 감옥에 가두고 사제관에 연금시키는 행태를 보였다. 연금 상태서, 또 옥고를 치르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은 영양실조와 제때 치료하지 못한 질병으로 희생되기도 했는데, 1945년 해방이 돼서야 선교사들은 비로소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한국교회가 부흥기를 맞았듯 골롬반 선교사들도 그간 못 다한 활동을 벌였다.

 

6·25 전쟁은 선교사들에게 더 큰 고초를 안겼다. 당시 공산당에 체포된 9명의 신부들 중 7명은 살해되고, 춘천지목구를 맡았던 퀸란 신부는 ‘죽음의 행진’ 끝에 시베리아를 경유, 기적적으로 생환했고 후에 다시 한국 땅을 밟기도 했다.

 

해외로 파견되는 평신도 선교사에게 안수하고 있는 모습.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한국교회 최초로 외방선교를 위한 평신도 선교사 제도를 도입했으며, 지속적인 선교사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전쟁 이후 한국 사회의 재건 노력 속에서 골롬반 선교회도 어려움 극복에 함께 동참했다. 잿더미 위에 쓰러진 성당을 다시 세우고, 또 공동체를 조직하고 해외 원조를 통해 전후 피해자들을 돕는 나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선교회가 봉헌한 성당은 127여 개에 달했다.

 

1960년대 말부터 보이기 시작한 도시집중화 현상은 농촌에서 도시로 많은 이들을 쏠리게 했다. 이런 상황서 선교회를 통해 서울 지역에서만 23개 본당이 건축됐다. 본부로부터의 선교사 영입도 보다 활발해 져서 1970년에는 인원이 153명까지 늘어났다. 1977년에는 9개 교구에서 72개 본당을 맡았다. 특히 1953년에는 레지오마리애를 도입, 한국 신자들의 신심부흥 운동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한국인 사제가 늘어나면서 골롬반 선교사들은 교구 사제들 손이 미치지 못하는 특수 사목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도시화 영향으로 발생되는 제 문제들에 대응키 위해 노동사목, 야학운영, 카운슬러, 병원사목 등에 눈을 돌렸고 빈민사목, 노인 복지, 장애인 복지, 피정 지도 등 분야에도 참여하게 된다.

 

1984년 한국천주교회 설정 200주년을 지낸 이후 한국교회 내에 해외 선교의 필요성과 관심이 고조되면서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한국교회가 보다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 활동 초점을 맞췄다.

 

선교회 총회를 통해 비영어권 지역 출신자들도 회원으로 영입될 수 있는 방안이 결정되자 한국인 신학생 지원자들을 받아들였으며 한국교회 최초로 외방선교를 위한 평신도 선교사 제도를 도입했다. 또 교구 사제들의 선교사 체험을 돕는 지원사제 프로그램을 시도했고 해외 파견을 앞둔 선교사들을 위해 교육을 마련했다.

 

한국전쟁 순교 사제 기념비.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일곱 사제들의 삶과 신앙을 현양하고자 마련됐다.

 

 

이 같은 선교회 흐름은 25년전 본당 사목에 주력했던 때와 비교하면 완전히 선교의 패러다임을 달리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더욱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도록 협력하는 체제로 전환된 것이라 볼 수 있다.

 

2003년 건립된 골롬반 선교센터는 그런 바람의 결집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1~3월 중 해외 선교사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열리는데, 금년에도 파견을 앞둔 50여 명 선교사들이 기본적인 선교 개념과 소양들을 익히고 있다.

 

2013년 한국 진출 80주년을 앞두고 있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 지부의 이 같은 발걸음들은 한국 역사와 사회 안에서 격동의 시기를 함께한, 마치 ‘전우’를 보는 느낌이 아닐 수 없다.

 

그 세월동안 성골롬반선교회에서는 총 260명 사제들이 일했다. 그중 100명이 선종했으며 22명은 그들이 소임을 다했던 한국 땅에 묻혔다. 현재는 32명 회원이 본당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6명의 한국인 회원도 배출됐고 10여 명의 한국인 평신도 선교사 역시 세계 각국에서 활동 중이다.

 

한국지부장 오기백 신부는 “앞으로도 사회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분야에 새롭게 도전하는 활동은 계속 되어질 것”이라고 했다. 또 “비약적으로 성장한 한국교회 안에서, 이제 수적으로는 작은 그룹이고 또 그로 인해 능력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문화 간 교류를 활성화 시키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통해 새로운 복음의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 역시 인종 언어는 달라도 세상 모든 이들이 한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선교’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5월 1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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