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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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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2 ㅣ No.651

京城敎區 天主敎靑年會聯合會 硏究

 

 

1. 머리말 

2.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의 창립
3. 지방 청년회의 연합회 참여와 연합회 주요 인물
4. 연합회의 주요 활동
5. 맺음말


1. 머리말

1919년 3 · 1운동 이후 한국 사회 각 분야에서 청년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청년운동이 대두된 것은 사회주의와 같은 새로운 사상의 유입, 일제의 집회 및 언론의 부분적 자유 허용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1) 이러한 사회적 흐름은 종교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프로테스탄트의 경우 1919년 이후 각 지역에 지방 기독교청년회가 조직되면서 청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2) 또한 천도교에서도 1920년대 천도교청년회와 천도교청년당을 중심으로 문화운동이 전개되었다.3) 이러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1920년대부터 가톨릭청년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현재까지 일제시대 가톨릭청년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 성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를 주제로 다룬 몇 편의 글이 이미 발표되었다.4) 그러나 그 내용이 개략적이어서 이 시기 가톨릭 청년운동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또한 타 종교의 청년운동이 이미 적지 않은 연구 성과가 있는 반면 가톨릭청년운동과 관련된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이 글에서는 가톨릭청년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로서 1922년 6월에 창립되었던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이하 ‘연합회’)를 주목하려 한다. 연합회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 단체가 한국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청년회를 규합하여 창립되었다는 점과 연합회가 일제시대에 전개되었던 가톨릭청년운동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용이하다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이 글에서는 먼저 연합회의 창립 배경과 과정을 검토하려 한다. 다음으로 지방 청년회의 연합회 참여와 연합회의 활동을 주도하였던 주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합회의 주요한 활동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이와 같은 검토를 통해 일제시대 가톨릭청년운동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2.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의 창립

경성교구에서 본당 차원의 천주교 청년회가 조직된 것은 1900년대부터였다.5) 1906년 平壤本堂 청년들이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청년회를 조직하고 箕明學校(성모보통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또한 같은 무렵 黃海道 信川에서도 가톨릭청년들이 ‘日新會’란 명칭의 청년회를 조직하였다.6) 이후에도 각 지방 본당에 청년회가 조직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서 청년회의 조직 목적이나 추세 등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1922년 6월 당시 경성교구 소속 본당 38곳 가운데 적어도 16곳(약 42%)에 청년회가 조직되었음이 확인된다.7) 이와 같이 각 지역 본당에 청년회가 조직되는 가운데 경성교구는 청년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1922년 6월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가 창립되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경성교구가 청년회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다음의 사료를 참고해 보도록 하자.

가) - ① 개신교 신자들과의 접촉은 우리 신자들에게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30년 전에는 이곳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어떤 교파도 없었는데, 오늘날엔 감리교, 장로교, 조합 교회, 성공회, 그리스도 재림파, 구세군, 그 밖에 기억할 수 없는 많은 교파가 생겼습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많은 인적 · 재정적 자원을 갖고 있어서 학교, 병원, 사회사업 면에서 가톨릭에 도전하고, 또 오랫동안 가톨릭과 경쟁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활동은 특히 서울과 조선의 서북지방에서 활발합니다. 평양은 마치 그들의 아성처럼 되어버렸고, 여기서 전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은 이 모든 활동으로 인해 좀 당황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가톨릭 신자들은 일본인들과 미국인 목사들이 학교, 출판사업, 병원을 세워 많은 흥행물과 스포츠를 통해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활동이 너무 빈약하고 너무 소극적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모든 분야에서 오류를 가르치는 개신교 목사들과 대항하여 투쟁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또한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그램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인원과 재원을 어디서 찾아야 한단 말입니까?

② 현대의 청년들은 교육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학교에 가는 것을 강요당하지 않도록 개입을 찾았던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는 자리가 없는 데도 받아주도록 간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립학교나 개신교 학교들은 점점 늘고 있으며, 학교가 설립되자 학생들로 가득차게 됩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이미 설립된 학교들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놀랄만큼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새로 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선교사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재원을 학교에 바치고 있습니다. … 학교가 있는 곳이면 똑같은 실정이고, 어디서나 더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는 데 대한 똑같은 불평이고 똑같은 아쉬움입니다. 학교 예산이 너무 적고, 신자 교사가 아주 귀합니다.8)

위 사료는 1922년 6월 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도록 한 경성교구 보좌주교 드브레(E.A.J. Devred, 兪世竣) 주교가 작성한 1921년 보고서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9) 그는 프로테스탄트가 많은 인적 · 재정적 자원으로 학교 · 출판사업 · 병원 등의 사업을 전개하여 청년들을 교회로 끌어들였다는 점과 많은 학생들이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반면 천주교회는 교회 사업에 필요한 인원과 재원이 부족하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이와 같은 교회 사업에 필요한 인원과 재원의 부족은 초등교육 위주의 교육과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당시 천주교회는 지식인의 양성보다 대중의 계몽을 보다 더 시급한 문제로 여겼기 때문에 천주교의 교육 운동은 주로 초등 교육 기관이 중심을 이루었다.10) 그리고 서양 선교사 대부분은 선교를 우선시하고, 지력 계발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으며, 학생들은 고등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예비지식이 결여되어 있었다.11) 이 때문에 교육 활동 등의 교회 사업에 필요한 인원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교회 사업에 있어서 또 하나의 주요한 장애는 재정적인 어려움이었다. 1905년 프랑스에서 정교 분리가 이루어진 후 反敎權主義에 의해 프랑스 교회는 큰 피해를 입었고, 그 결과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각 선교지로 보내는 선교 자금이 대폭 삭감되었다.12)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서양 각국의 경제난으로 인해 선교 자금이 더욱 삭감되면서 외국의 지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한국 천주교회의 재정적인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다.13)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회는 교회 사업을 전개할 재정적인 여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처럼 천주교회가 교회 사업에 필요한 인원과 재원의 부족을 겪고 있던 반면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각종 교회 사업을 전개하여 청년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에 드브레 주교는 청년들을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한편 이들로 하여금 교회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청년회의 조직을 구상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1921년 合德本堂 주임인 크렘프(H.J.M. Krempff, 慶元善) 신부를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였다.14) 크렘프 신부는 청년회연합회의 창립 등을 논의하기 위해 1922년 6월 2일과 3일 양일간 鐘峴聖堂에서 본당 및 공소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지방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6월 3일 크렘프 신부와 지방 대표자들은 각 지방 청년회를 지도하고, 서로 연락을 취하게 하는 기관의 조직을 목적으로 연합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청년회가 존재한 본당 및 공소 17곳과 청년회가 없지만 곧 조직하기로 결정한 13곳을 합쳐 30곳이 연합회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이어 대표자들은 연합회 규칙 초안을 통과시켰고, 지방 청년회의 수입액의 5분의 1을 연합회에 납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무기명 투표를 통해 회장에 曹秉相, 총무에 朴準鎬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이하 ‘연합회’)가 창립되었다.15) 이와 같이 창립된 연합회는 성직자의 지도 아래에서 천주교의 진리를 널리 선전하고, 교회에서 추진하는 각종 사업을 성심껏 돕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16)


3. 지방 청년회의 연합회 참여와 연합회 주요 인물

1922년 6월 3일 연합회 창립 당시 본당 및 공소 30곳이 연합회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京城의 鐘峴 · 藥峴本堂, 京畿道의 安城 · 下牛峴本堂, 忠淸北道의 長湖院本堂, 忠淸南道의 扶餘(金寺里) · 牙山(貢稅里)本堂, 黃海道의 長淵 · 殷栗 · 載寧 · 沙里院 · 安岳(?花洞)本堂과 海州公所, 平安北道의 義州本堂, 平安南道의 鎭南浦 · 永柔 · 平壤本堂 청년회에서 연합회에 참여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京畿道의 開城 · 旺林 · 龍仁(압고지)本堂, 江原道의 原州 · 龍召幕 · 伊川 · 浦內本堂, 忠淸北道의 槐山本堂과 淸州公所, 忠淸南道의 瑞山 · 唐津(合德) · 公州本堂, 平安北道의 新義州本堂에서는 청년회를 조직하여 연합회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17) 


그러나 실제 1923년 2월까지 연합회에 참여한 지방 청년회는 경성의 종현 · 약현, 경기도의 왕림 · 하우현, 강원도의 이천 · 춘천 · 용소막(원주 신림), 충청남도의 부여 · 서산 · 합덕 · 논산 · 대전, 황해도의 사리원, 평안남도의 진남포 · 평원 · 평양 청년회 등 16곳에 불과하였다.18) 청년회를 조직하고 연합회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지만 연합회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창립 초기 연합회에 참여한 지방 청년회가 그리 많지 않았음을 보여준다.19) 


이러한 상황은 이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1927년 경성교구 산하 지방 청년회 22곳 가운데 같은 해 5월 1일에 개최된 연합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청년회가 12곳이었다.20) 그리고 1931년 9월27일에 개최된 연합회 정기 총회에서도 청년회 12곳만이 참여하였다.21) 이처럼 연합회에 참여한 청년회의 수가 많지 않았던 주된 이유는 꾸준한 활동을 전개한 청년회가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즉 조직은 되었지만 매년 일정하게 활동하는 청년회가 적었고, 이로 인해 연합회에 참여한 청년회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22) 이와 함께 교구의 분할과 설정으로 인해 지방 청년회가 연합회에서 탈퇴한 점을 들 수 있다. 1927년 3월 平壤敎區가 설정되면서 평안도 지방 청년회도 자연히 연합회에서 탈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931년 9월 27일에 개최된 연합회 정기 총회에 참여한 청년회 가운데 평안도 지방 청년회가 없었다는 점을 통해 확인된다.23) 이러한 점을 통해서 볼 때 연합회 창립 이후 연합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던 지방 청년회는 대략 10여 곳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연합회가 활동하는 동안 이를 주도하였던 인물들이 누구였는지가 궁금하다. 1922년 6월 3일 연합회 창립 당시 지방 대표자들은 회장에 曹秉相, 총무에 朴準鎬를 선출하였다.24) 그리고 1924년 9월 20일에 개최된 연합회 제1차 총회에서 지방 청년회 대표자들은 회장과 기타 임원을 투표로 선출하였다.25) 이후 연합회 임원진은 몇 차례 改選되었는데, 확인된 것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1>과 같다.

 

<표1>에서 1928년 6월과 1929년 10월은 임원의 사망으로 인해 발생한 공석을 충원한 것이었고, 그 이외에는 연합회 총회에서 개선된 임원이었다. <표1>을 보면 연합회 산하에 總務 · 智育 · 德育 · 體育 · 經理部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합회 규칙을 확인할 수 없어 각 부서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다만 1922년 10월 18일에 작성된 약현 청년회의 자료를 통해서 보면 총무부는 규칙과 관련된 업무, 임원과 통상회의 개최, 회원의 가입과 탈퇴, 대외적인 연락과 통상 업무, 회원들 및 각 부서간의 상호 연락 등을, 지육부는 강의와 교육 관련 활동을, 덕육부는 회원들의 신앙과 신심을 위한 일, 자선과 장례 관련 업무를, 체육부는 체육과 건강 관련 업무를, 경리부는 회비의 수납과 지출 업무를 각각 담당하였는데, 연합회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27) 


위 <표1>에서 주목할 점은 종현 · 약현 · 백동 청년회 신자들이 연합회의 활동을 주도해 나갔다는 점이다. 본당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는 이원모를 제외한 17명 가운데 종현 청년회는 7명, 약현 청년회는 6명, 백동 청년회는 4명이었다.28) 특히 1929년 1월에 ‘親友會’라는 명칭으로 창설된 백동 청년회는 1931년 4월 29일 연합회가 가입한 후 1930년대 후반 연합회의 활동을 주도하였음을 주목할 만하다.29) 요컨대 연합회는 경성교구 내에서도 서울 지역의 본당 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합회 임원들 중에는 교육과 관련된 인물들이 많았다. 박준호는 1924년 5월 3일부터 1936년 9월까지 南大門商業學校(현 동성중 · 고등학교) 교장으로 활동하였고, 1924년에는 啓星普通學校(현 계성초등학교) 교장직을 겸임하기도 하였다.30) 장면은 박준호에 이어 1936년 11월 9일 東星商業學校(전 남대문상업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하였다.31) 이 밖에 조병상 · 이세영 · 이동구 · 한창우는 동성상업학교, 여용현은 加明普通學校, 장발은 徽文中學校 교사로 재직하였다.32) 교육계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교회 사업 가운데 교육 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연합회가 동성상업학교를 지원하고, 박준호가 지방 청년회에서 강연을 하였던 사례 등은 이러한 점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33) 


또한 1939년 9월 초 천주교회가 己亥迫害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의 입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장면 · 조종국 · 박병래 · 박대영이 중앙위원으로, 이동구 · 한창우가 중앙위원회 간사로 임명되었다.34) 이들은 같은 해 9월 24일에 개최된 연합회 총회에서 새 임원진으로 선출되었다.35) 이것은 당시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신자들이 연합회를 이끌어 나갔음을 말해준다. 



4. 연합회의 주요 활동

연합회 초기의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연합회가 창립된 지 2년 만인 1924년 9월 20일에 제1회 연합회 총회가 소집되었다는 점36)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연합회 초기의 활동이 부진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의 자료를 검토해 보도록 하자.

나) 아직은 조직적인 활동시기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연합회(La Federation)는 18(19?)개의 단체로 이루어져 있고, 1018명의 활동회원(역주 : 정회원)과 169명의 준회원, 75명의 지원자가 있습니다. 숫자만을 볼 때 좋은 결과라고 결론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활동이 국한되어 있었다는 것을 솔직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좋은 의도로 활동했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단체의 목적을 아직 아주 잘 알지 못하고, 그들의 육체적인 일(직업, 업무) 때문에 바라는 바를 익히기 위해 자주 모이지 못합니다(이하 생략).37)

위 사료는 1923년 6월 1일에 작성된 크렘프 신부 서한의 일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크렘프 신부는 연합회의 조직적인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회원들이 연합회의 목적을 잘 이해하지 못하며, 직업이나 업무로 인해 자주 모이지 못한다는 점을 부진의 원인이라 하였다.38) 이처럼 부진이 지속되자 연합회는 1924년 12월에 개최된 총회에서 연합회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였다. 총회에서는 청년회 소식을 알리기 위한 회보를 발간하고, 청년회가 조직되지 않은 지방의 경우 본당 신부에게 청년회 창립을 의뢰하기로 결의하는 등의 방안이 제시되었다.39) 이러한 모색의 결과 연합회는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연합회의 활동으로는, 첫째, 교육 사업을 들 수 있다. 초등 교육 기관 위주의 교육 사업을 전개하던 천주교회는 1920년대 초반 중등 교육 기관의 운영을 계획하였다. 이처럼 천주교회에서 중등 교육 기관을 운영하려는 이유는 신자 자녀들을 교육함과 동시에 학교를 전교 기관으로 삼아 외교인을 입교시키기 위해서였다.40) 이에 따라 1922년 4월 천주교회는 1907년 9월 서소문 일대의 지역 유지들에 의해 설립된 昭義商業學校(인수 후 ‘남대문상업학교’로 개칭)를 인수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41)

연합회의 교육 사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이 상업학교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천주교회가 상업학교를 인수하였지만 학교 재정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회가 상업학교의 지원에 나선 것이었다. 연합회의 구체적인 지원 내역을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1922년 6월에 열렸던 지방 대표자 회의에서 신자 1명씩 유지비로 매년 25전씩 내고, 30전씩을 일시에 납부하여 상업학교의 부채를 갚자는 데에 합의하였으며, 이러한 결정에 따라 많은 신자들이 유지비를 납부하였다는 사실을 참고할 만하다.42) 이후에도 연합회 총회에서 상업학교 사업과 관련된 경과보고가 있었던 것43)으로 보아서 연합회의 상업학교 지원은 꾸준히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연합회 기관지 《별》의 발행이었다. 연합회는 1924년 9월경부터 소식지 〈聯合靑年會報〉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1927년 7월 10일 지면을 확대하고, 많은 기사를 수록한 새로운 기관지인 《별》을 창간하였다.44) 《별》의 창간 목적은 문화 창달 · 생활 개선 · 종교 도덕의 보급을 통해 경성교구 가톨릭청년들의 문화 · 종교 활동을 활성화시키려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별》의 주요 내용은 교리 · 종교 관련 기사 · 문학 · 각 청년회 소식 등으로 구성되었다. 


창간 당시 《별》의 편집 겸 발행인은 연합회 회장 박준호였다. 경성교구 보좌주교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발행 경비를 조달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연합회 임원 한 두 사람이 편집을 비롯한 모든 사무를 담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31년 4월 12일 ‘별’보 후원회가 조직되어 《별》의 발행과 관련된 전반적인 사무를 맡았다. 이 후원회에는 약현본당 보좌 尹亨重(마태오) 신부를 비롯하여 장면 · 정지용 · 장발 · 이순석 · 조종국이 참여하였다.45) 


이와 같이 발행되던 《별》은 1933년 5월 10일 제71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폐간된 이유는 1933년 3월에 개최된 조선 5교구 주교회의에서 5교구가 연합하여 《가톨릭靑年》을 발행하기로 결정하고, 《가톨릭靑年》과 《京鄕雜誌》만을 모든 교구의 잡지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별》은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1933년 5월 10일 폐간되었다.46)

셋째, 병원의 설립 시도였다. 1931년 연합회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병원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연합회가 병원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병원이 전교 활동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성직자 · 수녀 · 신자들을 치료할 의료기관이 필요하다는 점과 병원 운영으로 인해 상당한 수입을 거둘 수 있다는 현실적인 배경 때문이었다. 이러한 연합회의 구상은 신자들의 호응을 얻어 백주년기념병원 기성회가 조직되었고, 설립 기금이 모금되었다.47) 이와 같은 연합회의 병원 설립 시도는 5년 후인 1936년 5월 天主敎 京城區 維持財團에서 병원을 설립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48) 


넷째, 자선 활동이었다. 연합회는 교회 내 빈곤한 신자들을 돕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까지 자선 활동을 확대 · 전개하였다. 이러한 자선 활동은 주로 수재 등의 자연재해를 당한 지역에 구조금과 구제품을 보내는 것이었다. 몇몇 자선 활동은 東亞日報社나 朝鮮日報社 등의 언론사와 함께 전개하기도 하였다.49) 이와 같은 자선 활동은 신문사 등 외부 기관과의 연계를 통해 전개되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연합회의 여타 사업과 차이가 있었다. 


이와 같은 활동을 전개하던 연합회는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부진을 겪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31년 9월부터 1939년 9월까지 연합회 총회가 개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볼 때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이처럼 연합회가 부진을 겪은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1933년 5월 10일 기관지 《별》이 폐간되면서 연합회와 청년회 간의 연락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50), 1933년 평양교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51)에 연합회 관련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점52) 등으로 인해 연합회의 활동이 위축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연합회는 1939년 9월 24일 총회를 개최하여 장면을 회장으로 한 임원진을 구성하고, 같은 해 11월 26일 교리 연구를 장려하기 위하여 교리시합대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53) 그러나 일제에 의한 전시 동원 체제의 강화로 1939년 5월 경성교구에서 國民精神總動員 京城敎區聯盟을 결성함에 따라 연합회도 국민정신총동원에 협조하게 되었다.54) 이후 1940년대 전시 체제하에서 연합회의 활동은 중단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광복 후 1946년 7월 7일 연합회는 임시 총회를 열어 회칙을 개정하고 임원을 선출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55)


5. 맺음말

이상으로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맺음말은 연합회의 활동에 대해 평가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개벽》 48호(1924. 6. 1)에 실린 〈在京城 各敎會의 本部를 歷訪하고〉에서는 천주교 청년회에 대해 “청년의 활동으로 天主敎 靑年會가 있으나, 本히 天主敎는 新敎와 判異하여 어디까지 敬神的이오 保守的인 바 청년편의 활동은 심히 不振하다”라고 평가하였다.56) 이러한 평가가 곧 연합회에 대한 평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연합회의 근간이 지방 청년회라는 점에서 위 평가가 연합회와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연합회는 성직자의 지도 아래에서 천주교의 진리를 널리 선전하고, 교회에서 추진하는 각종 사업을 성심껏 돕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다. 이에 따라 연합회는 수해 구제 등과 같은 자선사업을 제외하고 주로 교회 내의 활동을 주로 전개하였다. 《개벽》에서 천주교청년회를 “경신적이고 보수적”이라고 한 것은 이처럼 천주교청년회의 활동이 프로테스탄트와 비교해서도 주로 교회 내적인 활동에 국한되었음을 지적한 것으로 여겨진다.

연합회 내부에서도 이와 같이 연합회의 활동을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별》14호(1928. 8. 10)에 실린 〈天主敎 靑年會員의 任務〉에서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우리 天主敎靑年會員은 個人으로는 外敎人과 多數? 交際를 ?야 親合?나 天主敎 團體 卽 會의 名稱으로는 敎理가 不同?으로 흔히 交際를 避?은 現狀이다”이라 하였다. 덧붙여 “天主敎靑年會 範圍 內에 잇? 問題는 다 鬪爭?여 왓스며 將來도 그러? 것이다. … 다만 注意? 것은 社會問題만 鬪爭키를 目的? 團體와는 出發點이 다른 것을 알아두어야 ?다”이라고도 하였다.57) 즉 연합회의 활동을 교회 내적인 활동에 한정해야 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연합회는 당시 침체해 있었던 교회 사업을 주도하고 지원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중등학교의 운영을 지원하고, 병원을 설립하고자 기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은 교회 사업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연합회는 경성교구 전 지역을 아우르는 평신도 단체였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 이후 1922년 연합회가 창립되기 전까지 이와 같이 교구 전 지역의 평신도 단체를 연결하여 교회 사업을 전개하였던 사례가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연합회의 창립과 활동 그 자체만으로도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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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건호, 〈1920년대 전반기 청년운동의 전개〉, 《한국 근현대 청년운동사》, 풀빛, 1995, 54~81쪽.

2) 전택부, 《한국 기독교청년회 운동사》, 범우사, 1994, 184~192쪽.

3) 조규태, 《천도교의 문화운동론과 문화운동》, 국학자료원, 2006, 105~138쪽, 167~197쪽.

4) 일제시대 가톨릭청년운동과 관련해선 최석우, 〈가톨릭청년운동〉, 《京鄕雜誌》1444호(1988. 7), 92~95쪽 ; 안홍균, 〈한국 가톨릭청년운동의 약사〉, 《연합회보》 12호(1984년 가을), 명동천주교회 청년단체연합회, 31~35쪽 등이 참조된다.

5) 京城區天主敎靑年會聯合會, 《朝鮮天主公敎會略史》, 1931, 64쪽.

6) 최석우, 앞의 글, 1444호(1988. 7), 92~93쪽.

7) 1922년 6월 당시 청년회가 조직된 본당은 경성의 종현과 약현 본당, 경기도의 안성 · 하우현 본당, 충청북도의 장호원본당, 충청남도의 부여(금사리) · 아산(공세리)본당, 황해도의 장연 · 은율 · 재령 · 사리원 · 안악(매화동)본당, 평안북도의 의주본당, 평안남도의 진남포 · 영유 · 평양본당이었다(〈디방?표쟈회의〉, 《京鄕雜誌》496호[1922. 6. 30]). 


8)〈1921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II) 1904~1938, 明洞天主敎會, 1987, 162~163쪽.

9) 《朝鮮天主公敎會略史》, 京城敎區天主敎會靑年會聯合會, 1931, 64쪽.

10) 趙珖, 《韓國 天主敎 200年》, 햇빛출판사, 1989, 66~70쪽.

11) 金成喜, 〈한국 천주교회의 교육 활동 - 1882~1910년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732~734쪽.

12) 金眞召,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선교 방침과 민족의식〉, 《敎會史硏究》 1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30~32쪽.

13) 현? 실디 샹황을 말?건대 구쥬대젼? 이후로 외국 젼교?업을 위?야 연조금을 보내던 구미 각국 신쟈들은 ?긔네 본국에 필요? ?업을 몬져 도라보게 되엿슴으로 죠션 ?흔 젼교디방에 ?지는 젼?히 만히 도아주지 못?게 되엿슴니다(〈경셩교구 ? 신셜 ?업에 ??야〉, 《京鄕雜誌》500호[1922. 8. 31]).

14) 〈1921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II) 1904~1938, 明洞天主敎會, 1987, 162~163쪽.

15) 〈디뱡?표쟈회의〉, 《京鄕雜誌》496호(1922. 6. 30).

16) 청년회련합회의 사명은 성직자의 지도하에 공교진리를 널니 선전하며 각종 교회사업을 성심으로 방조함에 있다(《朝鮮天主公敎會略史》, 京城區天主敎會靑年會聯合會, 1931, 64쪽).

17) 〈디뱡?표쟈회의〉, 《京鄕雜誌》496호(1922. 6. 30).

18) 〈참가회와 회원수〉, 《京鄕雜誌》512호(1923. 2. 28).

19) 크렘프 신부의 1923년 6월 1일 서한에서도 당시 연합회에 소속된 청년회는 18~19개
라고 하였다.

20) 〈京城敎區 天主敎靑年會聯合會 第二會 定期總會 同日懇話會 槪要〉, 《별》1호(1927. 7. 10) ; 〈靑年會員에 對?야〉, 《별》2호(1927. 8. 10).

21) 〈聯合會總會〉, 《별》 52호(1931. 10. 10).

22) 地方靑年會로는 每年 一定?게 勞力?? 곳이 十餘處에 不過?다 ?여도 過言이 아닐
것인즉 (이하 생략)(〈聯合會 總會 不得을 보고〉, 《별》14호(1928. 8. 10)).

23) 〈聯合會總會〉, 《별》52호(1931. 10. 10).

24) 〈디뱡?표쟈회의〉, 《京鄕雜誌》496호(1922. 6. 30).

25) 〈텬쥬교 쳥년회 뎨一회 총회〉, 《京鄕雜誌》 550호(1924. 9. 30).

26) 〈디뱡?표쟈회의〉, 《京鄕雜誌》 496호(1922. 6. 30) ; 〈텬쥬교 쳥년회 련합회 총회〉, 《京鄕雜誌》 555호(1924. 12. 15) ; 〈京城敎區 天主敎靑年會聯合會 第二會 定期總會 同日懇話會 槪要〉, 《별》1호(1927. 7. 10) ; 〈련합회 임원 보결〉, 《별》13호(1928. 7. 10) ; 〈련합회 임원회〉, 《별》29호(1929. 10. 10) ; 〈聯合會總會〉, 《별》52호(1931. 10. 10) ; 〈경성교구 청년회연합회 제四회 정기총회 개최〉, 《京鄕雜誌》910호(1939. 9. 28).

27) 藥峴聖堂百週年史編纂委員會 편, 〈56. 약현자료-3 : 약현본당 청년회 규약〉, 《성직자 사목서한과 약현 관계 자료》, 1991, 294~305쪽.

28) 임원들 중에는 거주지의 이전으로 소속 본당을 옮기는 사례가 있었는데, 박병래 등이 그 예였다. <표1>에서는 임원으로 선출되었을 당시의 소속 본당을 표시한 것으로,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였다. 藥峴聖堂百週年史編纂委員會 편, 〈56. 약현자료-3 : 약현본당 청년회 규약〉, 《성직자 사목서한과 약현 관계 자료》, 1991, 294~305쪽 ; 〈靑年會 消息欄〉, 《별》 3호(1927. 9. 10) ; 〈련합회 임원 보결〉, 《별》 13호(1928. 7. 10) ; 〈련합회 임원회〉, 《별》 29호(1929. 10. 10) ; 〈천주교회보〉 1930. 8. 1 ; 〈聯合會總會〉, 《별》 52호(1931. 10. 10) ; 백동 70년사 편찬위원회 편, 《백동 70년사》, 1997, 82~84쪽. 이동구는 1943년 7월 사망 후 종현본당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던 점을 참작하여 종현본당 신자로 분류하였다(〈이동구〉, 《한국가톨릭대사전》 9, 한국교회사연구소, 6958쪽).

29) 〈친우회 련합회에 가입〉, 《별》47호(1931. 5. 10) ; 백동 70년사 편찬위원회 편, 《백동 70년사》, 1997, 92쪽.

30) 〈샹업학교쟝 임명 인가〉, 《京鄕雜誌》542호(1924. 5. 15) ; 〈동성상업학교장 박준호씨 五十三세를 일기로 금월 十九일에 별세〉, 《京鄕雜誌》 838호(1936. 9. 28).

31) 〈동성상업학교장은 동교 교유 장면씨가 피임〉, 《京鄕雜誌》 842호(1936. 11. 28).

32) 〈가명보교에 다년 근무자 표창〉, 《京鄕雜誌》 818호(1935. 11. 27) ;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기인회의 성명〉, 《京鄕雜誌》 909호(1939. 9. 12) ; 《東星 八十年史》, 東星中?高等學校, 1987, 167쪽.

33) 〈論山靑年會 講演 主催〉, 《별》15호(1928. 9. 10).

34)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기인회의 성명〉, 《京鄕雜誌》 909호(1939. 9. 12).

35) 〈경성교구 청년회연합회 제四회 정기총회 개최〉, 《京鄕雜誌》 910호(1939. 9. 28).

36) 〈텬쥬교 청년회 련합회 뎨一회 총회〉, 《京鄕雜誌》 550호(1924. 9. 30).

37) 크렘프 신부 서한(1923년 6월 1일).

38) 이러한 점은 〈텬규교 청년회 련합회 뎨一회 총회〉, 《京鄕雜誌》 550호(1924. 9. 30)에서도 언급되었다.
 
39) 〈텬쥬교 청년회 련합회 총회〉, 《京鄕雜誌》 555호(1924. 12. 15).

40) 〈즁학교를 위?야 긔구?고 힘쓰?이다〉, 《京鄕雜誌》 491호(1922. 4. 15).

41) 《東星 八十年史》, 東星中?高等學校, 1987, 105쪽.

42) 〈남대문샹업학교의 과거와 현? 형편 - 교쟝 박쥰호씨 담〉, 《京鄕雜誌》 559호(1925. 2. 15).

43) 〈聯合會 總會〉, 《별》52호(1931. 10. 10).

44) 〈경셩교구에 별보 발?〉, 《京鄕雜誌》 617호(1927. 7. 15). 《별》과 관련해서는 안홍균, 〈해제〉, 《(별》 영인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2~18쪽을 참고할 것.

45) 〈본보 후원회 조직〉, 《별》47호(1931. 5. 10).

46) 〈廢刊을 告하며〉, 《별》71호(1933. 5. 10) ; 안홍균, 앞의 글,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15~17쪽.

47) 〈죠션교구 셜뎡 ?쥬년 긔념으로 젹은 병원 ?나 셜시?시다〉, 《京鄕雜誌》 713호(1931. 7. 15) ; 〈?쥬년 긔념 병원 셜뎡에 ??야 동셩샹업학교 긔셔는 여좌?더라〉, 《京鄕雜誌》 715호(1931. 8. 15) ; 〈?쥬년 긔념 병원에 ??야〉, 《京鄕雜誌》 719호(1931. 10. 15).

48) 최석우, 앞의 글, 1444호(1988. 7), 95쪽.

49) 〈청년련합회의 수해 구제〉, 《京鄕雜誌》 788호(1934. 8. 27).

50) 이와 관련해서는 1933년 《가톨릭靑年》의 발간으로 인해 《별》과 함께 폐간되었던 大邱敎區 天主公敎靑年會 회보 《天主敎會報》와 관련된 다음의 내용이 참고가 된다.

一九三三年 三月 十八日 全鮮敎區長會議 決議에 依하여 敎會出版物을 統一하여 中央에서만 發刊하고 地方敎會의 出版物을 中止하게 되었다는 五位 主敎의 敎書에 依하야 創刊 六週年 四月 一日附 第七十三號의 記錄을 남기고 天主敎會報를 休刊하였다. 그 後의 靑年運動은 中央에서 刊行되는 出版物은 가톨릭靑年誌뿐이요, 相互連絡이 끈허지고 活潑하든 事業이 中斷(원문에는 ‘中繼’로 되어 있지만 誤記로 보임)되여 活氣를 잃게 되자 漸次로 解이해지고 그 中에 日帝의 所謂 滿洲支那事變 大東亞戰爭 等等의 戰時를 當하여 最後 發惡의 彈壓으로 運動은 中斷(원문에는 ‘中繼’)되었다(〈大邱 가톨릭 靑年運動 四十年史〉, 《天主敎會報》1949. 4. 1).

51) 가톨릭운동은 교회 당국의 위임과 지도하에 행하는 평신도의 조직적 활동을 말한다. 가톨릭운동이란 말을 평신도 단체에 처음 적용시킨 사람은 교황 비오 10세(1903~1914 재위)였으나 평신도 운동을 조직화한 것은 비오 11세(1922~1939 재위)였다. 교황 비오 11세가 가톨릭운동을 강조함에 따라 가톨릭운동은 전세계로 확산되었고, 한국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1931년 9월에 개최된 전 조선 주교회의에서 가톨릭운동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리고 1933년 3월 평양지목구장 모리스(J.E. Morris, 睦怡世) 몬시뇰이 조선가톨릭진행회 위원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가톨릭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가톨릭운동〉, 《한국가톨릭대사전》 1, 한국교회사연구소, 181~182쪽 ;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운동〉, 《敎會史硏究》 1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212~225쪽)

52) 1931년 ‘별’보 후원회에 참여하였던 장면 · 정지용 · 장발 · 이동구 등이 《가톨릭靑年》의 편집 실무와 원고 작성 등을 맡았다는 점이 대표적인 예였다. 《가톨릭靑年》 편집 및 원고 작성과 관련해서는 車基眞, 〈가톨릭 靑年과 교회 언론의 변모〉, 《가톨릭靑年》 1(영인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8~14쪽. 


53) 〈경성교구 청년회연합회 제四회 정기총회 개최〉, 《京鄕雜誌》 910호(1939. 9. 28) ; 〈경성에 남자교리시합〉, 《京鄕雜誌》 915호(1939. 12. 12).

54)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 결성〉, 《京鄕雜誌》 902호(1939. 5. 28) ; 〈경성교구 청년회연합회 제四회 정기총회 개최〉, 《京鄕雜誌》 910호(1939. 9. 28).

55) 〈재생한 청년회연합회〉, 《京鄕雜誌》 977호(1946. 8. 1).
56) 〈在京城 各敎會의 本部를 歷訪하고〉, 《개벽》 48호(1924. 6. 1).
57) 〈天主敎 靑年會員의 任務〉, 《별》 14호(1928. 8. 10).

[교회사연구 제28집, 2007년 6월, 양인성(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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