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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왜관성당 역대 주임신부들의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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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17 ㅣ No.722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순교할 이들과 살아보았나요?” - 왜관성당 역대 주임신부들의 순교

 

 

우리에게는 ‘그들’이 살았을 때는 순교자가 될지 몰라서 순교자로 대하지 않았고, 그들이 순교하고 난 뒤에는 그들과 연고가 없어져서 기억하지 못하는 순교자들이 있다. 지난해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프랑스 선교사들 가운데 여러 명이 대구대교구에서 활동했다. 우리는 그 순교자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 



복된 지방, 왜관성당

1950년 여름 동안 북한 공산군에 의해 체포된 13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중에서 6명은 대전에서 학살당했고, 죽음의 행진에서 5명이 희생되었으며 1명만 살아남았다. 그중 총살당한 리샤르(李東憲), 를뢰(盧), 코르데스(孔) 신부와 죽음의 행진에서 선종한 카다르(姜達淳), 뷜토(吳弼道) 신부는 대구교구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왜관성당 신자들이 추억하는 신부들이다. 왜관성당에는 1대부터 5대까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주임이었는데 그중 2대(카다르), 3대(리샤르), 4대(를뢰) 주임신부가 순교했다. 또 코르데스 신부는 리샤르 신부가 요양 간 동안 그를 대신했다.

왜관은 가실성당 관할 하의 공소였다. 당시로서는 또다시 성당을 세울 만큼 가실성당과는 떨어져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정재문 회장과 신자들이 솔선했다. 이에 가실성당의 투르뇌 신부도 건축비의 1/3을 부담하면서 1928년 성당이 완공되었다. 그는 가실성당 주임이면서 왜관성당의 초대주임을 겸했다. 5개월 후 카다르 신부가 2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독자적인 성당이 되었다. 그래도 전·현 주임신부는 함께 비용을 대어 사제관을 완성했다. 3대 주임은 수녀들을 초대했고, 현 순심학교의 근간이 되는 소화여자학원을 세웠다. 4·5대 주임은 2차대전 중에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 어려운 때를 이겨냈다. 왜관성당의 발전 속도와 교우들의 단결력은 『경향잡지』에 소개되었다. 또 전국에서 1인당 교무금이 가장 많은 성당으로 여러 번 평가받았다. 이렇게 신부와 신자는 서로 신앙을 키워갔다.

1948년 5월 대전교구(충남지목구)가 설정되고 서울교구와 대구교구에 소속되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이곳으로 재배치되었다. 대구에서는 그해 8월 29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송별식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새 출발은 곧바로 6.25전쟁에 휩싸였다. 공산군의 빠른 남하는 교구의 초기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본당을 맡고 있던 주임신부들은 신자들을 지키겠다며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들은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기 전까지 제한적이나마 성사집행과 미사를 거행했다. 공산군은 1950년 8월 중순 무렵 전황이 불리해지자 신부들을 일시에 체포했다. 예산성당의 리샤르 신부, 온양성당의 를뢰 신부, 당진성당의 코르데스 신부가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결국 목동 프란치스코수도원으로 이송되었다. 목동에는 대전형무소가 있었고, 수도원과 성당에 대전정치보위부 본부가 차려졌었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연합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공산군은 급해졌다. 그들은 북으로 쫓기면서 9월 23일에서 26일 사이에 체포한 사람들을 모두 그곳에서 처형했다. 정작 목동성당을 맡았던 카다르 신부와 공세리성당의 뷜토 신부는 서울로 이송된 후 북한으로 끌려갔다.


너의 순교를 내가 지키고

선교사들은 서로의 ‘순순한 순교’를 도왔다. ‘죽음의 행진’은 그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왜관성당 제2대 본당신부였던 카다르 신부는 1909년 대한제국에 들어와 전라남도 계량리 근처를 사목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정부는 해외에 있는 선교사들에게도 예비군 동원령을 내렸다. 대구교구에서는 드망즈 주교와 선교사 9명이 소집되었다. 이때 드망즈 주교는 다행히 교구장으로서 홍콩에서 소집유예를 받았다. 선교사들 대부분도 신체검사에서 탈락되거나 소집이 연기되었다. 그러나 카넬 신부는 1918년 베르덩 전투에서 전사했다. 카다르 신부는 이 징집에서 중위로 임관되어 통킹 보병대대에 배속되었다가 베트남의 남딘을 거쳐 중국 텐진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시베리아, 만주 등에서 근무했고, 휴가 때는 조선으로 나왔다. 그는 5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대구 성모당에 종군 시 받은 무공훈장을 봉헌했다. 그는 종군 때부터 1925년까지 『Missions Catholiques』의 특파원으로 조선에 대한 기사를 쓰기도 했다. 신부는 계량성당으로 복귀했고, 이어 되재, 나바위, 왜관성당에서 일했다. 경주성당에서는 사제관을 신축하고, 목재로 된 소성당을 고딕성당으로 개축하였다.

1945년 그는 교구의 선교사들 대부분과 함께 일본 경찰에 의해 대구신학교에 연금되었다. 선교사들이 대전교구로 이전할 때 그는 백내장 수술을 받기 위해 대구에 남았고, 수술의 결과가 좋지 않아서 한동안 더 대구에 머물렀다. 그는 이듬해 대전으로 이동하여 프란치스코수도회가 운영하던 목동성당의 14대 주임이 되었다. 한국전쟁 초기 대전이 미군들에 의해 전략지역으로 지정됨에 따라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렸으나 그는 피난을 거부했다. 자신은 이미 노인이니 별일 없을 것이라며 수도원과 본당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북한군은 7월 21일 그를 체포하여 대전형무소에 수감했다. 그는 8월 19일 형무소를 탈출하여 수도원으로 돌아와 미사를 집전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체포되어 재수감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 달 후 그는 압록강변 만포진에서 먼저 잡혀온 동료신부들을 만났다. 그는 그 와중에도 동료를 만난 기쁨을 시로 노래했다. 그는 수술로 인해 한 눈을 잃었고 거의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72세 고령임에도 늘 활기를 돋우는 생각과 기력을 갖고 있었다.

‘죽음의 행진’은 미국인 포로 700여 명, 온갖 국적의 외국인들이 함께 뒤섞인 대행렬이었다. 그곳에는 8개 이상의 종교가 있었다. 이 생활은 선교사, 수도자들이 고통스럽고 돌발적인 상황에서 ‘천주교인’으로 사는 모습을 드러내는 현장이었다. 포로들은 완전히 기력이 떨어졌지만 물속이고 눈속이고 가리지 않고 걸으며 고통을 견뎠다. 이 행진의 종점에 다다랐을 때, 탈진한 동료를 부축하느라 있는 힘을 다 쏟은 포로들은 파리 떼처럼 쓰러져 갔다. 중강진 체류 때부터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1월 10일 아침 따로 떨어져 있던 비에모(禹一模) 신부가 이들에게 운반되어 왔다. 그는 동료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고통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 그룹에는 공베르 형제 신부가 있었다. 형 공베르 신부는 자신도 온몸이 열에 들떠 비틀거리면서도 비에모 신부가 마지막 기도를 드리도록 도왔다. 공베르 신부는 자기 목소리가 들리냐며 따라하라고 외쳤다. 81세 노인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죽어가고 있는 75세 친구가 이끄는 대로 기도를 되풀이했다. 예전에 두 사람은 임종 때 서로 돕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이튿날 비에모 신부는 이미 혀가 굳었다. 그는 해맑은 얼굴로 시종 미소를 띠면서 차례로 악수했다. 비에모 신부는 기도로써 당신을 돕는 동료들과 번 주교에게 에워싸여 숨을 거두었다. 그들은 유해를 중강진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으로 운반했으나 땅이 얼어 무덤을 파지 못하고 유해를 돌로 덮어 놓았다.

이튿날 아침에도 그들은 극심한 한파 속에서 체조를 해야 했다. 공베르 신부는 지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이질에 시달려 탈진한 상태였다. 그래도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끌려 나갔다가 체조가 끝난 후 다시 숙소로 쓰던 교실로 들어왔으나, 기절해서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죽음이 임박하자 두 형제 사이에 있던 코요스 신부는 동생에게 이를 알리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동생은 곧 자기 형 쪽으로 몸을 굴렸다. 그는 하도 아파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73세의 동생은 자기의 길고 흰 수염으로 형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형님! 형님은 가도 괜찮아요 … 주님의 밭에서 일을 잘 했고 … 곧 하늘문이 활짝 열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손수 형님을 품에 안아주실 게예요. 내일 나도 따라가지요.” 그 다음날 동생은 약속한 대로 형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도 아침체조에 끌려 나갔다가 기진맥진했다. 그는 마실 물을 청했지만 그들에게는 동료에게 줄 물 한 방울도 없었다. 그는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성실하시거든 … 나는 그분께로 가는 것이 기뻐요.”라고 했다. 번 주교가 마지막 사죄경을 염하는 동안 그는 주위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신부 셋은 그렇게 언 땅위에 나란히 남겨졌다.

카다르 신부는 그 기나긴 죽음의 행진을 끝까지 해냈다. 그러나 그는 이질과 살이 썩는 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는 수용소 생활 초기부터 이질로 시달렸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캄캄할 때 밖에 나갔다가 운 나쁘게도 유리조각 위에 넘어져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상처를 소독하지도 못했고 붕대 대신 더러운 수건으로 감았기 때문에 상처는 살을 파고 들어가 썩고 있었다. 그는 쇠약해져 있었음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걸으면서도 그는 유머를 잊지 않았다. 12월 17일 카다르 신부는 평소처럼 활발하게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그날 밤 잠이 들고는 더 이상 깨어나지 않았다. 다음 해 초 주의공현대축일에 뷜토 신부가 자기 생애를 하느님께 드렸다. 죽음의 행진 동안 그는 쓰러지는 동료들을 끝까지 부축했다. 건강하던 그의 모습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수척해질 때까지 동료를 도왔다. 그러나 감시병은 이를 보고 그가 힘을 다 쏟지 않고 요령을 피운다고 하며 맷돌을 돌리게 했다. 거기서 그의 마지막 원기가 소진되었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었다. 뷜토 신부는 얻어맞으면서도 『성무일도서』를 보관해서 동료들이 성무일도를 이어갈 수 있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부산진성당 주임이었다.


코요스(具仁德) 신부의 증언

파리외방전교회는 회원 13명을 6.25전쟁 행방불명자로 처리했다. 그들은 한 명이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받았고, 그가 코요스라고 했을 때 모두들 놀랐다. 그는 포로들 중에 가장 연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전교회에서는 당시 한국전쟁에서 박해의 제물이 된 회원들의 이름을 써서 성당 문 앞에 붙여놓고 이를 기억하도록 했다. 1953년 전교회에 도착한 코요스 신부는 그 명단의 13번째인 자신의 이름을 두 줄로 지운 것을 보았다. 코요스 신부는 1933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조선에 입국, 논산성당에서 사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년 만에 폐결핵에 걸려 치료차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는 1950년 4월 다시 입국, 서울 대신학교 교수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석 달 후 6.25가 터졌다. 그는 죽음의 행진을 걷고 나서 폐결핵, 이질 등 병이란 병은 다 지니게 되었다. 한 달 동안 정신착란 상태에 빠지기도 했고, 여섯 달 동안 목소리를 잃기도 했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45kg이었다. 북한 의사는, “네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그럼 널 낫게 해달라고 해봐.”라며 빈정대었다. 어느 날 의사는 그가 죽을 거라고 했다. 신부는 주검을 벗어버리고 아버지집으로 들어가리라는 희망으로 기다렸지만 이튿날 아침에도 그는 살아 있었다. 그는 실망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신이 파리외방전교회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죽음을 전하기 위해 누군가가 살아남아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성심께 9일 동안 특별기도를 바치고, 자신의 집에서 루르드까지 걸어서 순례하겠다고 성모께 약속드렸다. 놀랍게도 그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물론 저절로 회복되어 간 건 아니다. 카다르 신부는 늘 그를 격려했었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으제니 수녀는 마늘을 얻어오고, 자기 몫의 배급을 남몰래 건네주면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되풀이 했다. 1951년 봄에는 지난해 체포된 743명의 미군 중에서 140명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코요스 신부는 그런 시간을 33개월 견뎠다. 그는 그때의 사실을 『나의 북한포로기』로 전했다. 이 책은 195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상을 수상했다.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사회가 변하는 것만큼이나 크게 변해왔다. 그러나 급속히 변한다고 있었던 사실을 잊을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더구나 순교자들과 함께 생활했다면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훨씬 강렬하다. 1955년 리샤르(李) 신부의 여동생은 왜관성당을 방문했다. 오빠가 8년간 생활하던 본당을 두루 살폈다. 그는 생존했다면 55세밖에 되지 않을 오빠를 그렇게라도 만나고자 했다. 우리는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전하면서 강렬한 순교자성월을 지낸다. 그것은 순교자처럼 되고픈 열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도움: Cuny 신부, 『나의 북한포로기』, 『왜관반세기』)

[월간빛, 2015년 9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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