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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비잔티움의 멜리스모스 도상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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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14 ㅣ No.1533

비잔티움의 ‘멜리스모스’ 도상연구*

 

 

국문 초록

 

「멜리스모스」는 제대 위에, 혹은 성반(聖盤)이나 성작(聖爵)에 누인 아기 예수와 성찬례를 거행하는 주교들의 모습을 그린 도상이다. 때로 부제(副祭)나 천사가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12세기 후반기 비잔티움 미술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교회 내부 장식처럼 규모가 큰 작품으로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제작연대가 명확하게 알려진 최초의 예는 쿠르비노보(Kurbinovo)의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St. Georgius, 1191)에 그려진 「멜리스모스」다. 「멜리스모스」는 상징적 도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육화를 증언한다. 파스카의 어린양처럼 그리스도는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는 희생양이라는 사상을 담고 있다. 또한 성찬례의 봉헌물인 빵과 포도주는 축성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각적 확인이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역사의 한순간에 참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 사셨고, 현재 성찬례를 통해서 살아있는 빵으로 신자들 각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 된다는 의미다. 결국 「멜리스모스」는 참 하느님이자 참 인간인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상징의 복합체이다. 성작과 성합, 전례 용구, 주교의 두루마리, 촛불, 성령의 비둘기, 주교들과 천사-부제들, 그리고 암노스까지 모든 시각적 요소들이 인간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육화와 희생이라는 주제를 드러낸다. 초월적이고 비가시적인 세계를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종교미술의 사명이라면, 「멜리스모스」는 비록 현대인의 눈에는 생경하게 보일지라도 가장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한 예 중의 하나일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초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관련한 도상이 발전하였고, 성경의 내용을 따라서 예수의 탄생부터 십자가 처형, 그리고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주제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재현적이고 사실적인 그림과 더불어 상징적 도상도 발전하였는데, 포도덩굴과 닻, 또는 십자가와 키로(XP) 모노그램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련된 12 대축일(도데카오르톤, Dodekaorton) 도상이 확립되어 교회 내부를 장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도상과는 달리 매우 이질적이고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충격적일 수도 있는 그림이 비잔티움 제국 후반기에 등장한다. 바로 「멜리스모스」(Melismos)다. 이 그림은 얼핏 보면 한 어린아이가 둥그런 그릇 속에 누인 듯한 형태로서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닿아있는 것 같지 않은 도상이며, 때로 아기의 몸을 그릇보다 더 크게 그려 마치 그릇 위에 놓인 것처럼 표현할 때도 있다(그림1). 12세기 후반기부터 비잔티움 미술에 등장한 이 도상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앱스(apse)에 그려진 예가 많으며, 콤네노스 왕조로부터 시작하여 포스트 비잔티움 시기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음식을 담는 그릇 속에 아기를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유럽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멜리스모스」 도상은 어떤 연유로 비잔티움 제국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일까? 제작연대가 밝혀진 최고(最古)의 「멜리스모스」 도상은 앙겔로스 왕조(Angelos dynasty, 1185~1204) 시기로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도상이 왜, 그리고 정확히 언제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멜리스모스」에 관한 연구는 주로 근대에 제작된 「멜리스모스」를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중세 비잔티움 시기의 「멜리스모스」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1) 가리디스(M. Garidis)는 14~16세기에 세르비아와 그리스 교회의 앱스에 그려진 「멜리스모스」를 연구하여 성체성사의 상징적 표현에서 점차로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으로 변화하는 도상의 시각적 변천 과정을 보여주었고,2) 엘베른(Victor H. Elbern)은 16~17세기에 제작된 러시아의 「멜리스모스」 이콘의 양식적 문제를 연구하였다.3)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이 도상의 기원이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깊게 언급하지 않았고, 다만 성찬례의 알레고리로서 근대 초 그리스의 이오니아 지방에서 인기 있는 도상학적 주제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을 뿐이다.4)

 

우리나라에서는 이 도상을 주제로 삼은 연구가 아직 단 한 건도 진행되지 않았으며, 멜리스모스라는 단어 자체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본 연구는 비잔티움 미술이 발전시킨 독특한 도상 가운데 하나인 「멜리스모스」의 기원을 찾고 그리스도교 전례(典禮)와의 관계 안에서 도상학적 의미를 조명하려 한다.

 

 

2. 비잔티움의 「멜리스모스」


1) 쿠르비노보(Kurbinovo)와 베지라나 킬리세시(Bezirana kilisesi)

 

「멜리스모스」는 제대 위에, 혹은 성반(聖盤)이나 성작(聖爵)에 누인 아기 예수와 성찬례를 거행하는 주교들의 모습을 그린 도상이다(그림1, 2). 때로 부제(副祭)나 천사가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12세기 후반기 비잔티움 미술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교회 내부 장식처럼 규모가 큰 작품으로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멜리스모스라는 단어와 도상의 의미를 깊게 논하기 전에, 우선 연구 대상이 되는 주요한 비잔티움 도상을 점검하도록 하자.5)

 

 

 

제작연대가 명확하게 알려진 최초의 예는 쿠르비노보(Kurbinovo)의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St. Georgius, 1191)에 그려진 「멜리스모스」다(그림2).6) 이 성당은 지역 전통을 따라 나르텍스(narthex) 없이 단일 네이브(nave) 형태로 소박하게 지어진 건물이지만, 12세기 비잔티움 미술의 창의적 표현력과 예술적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회화를 선보였다.7) 동쪽을 향해 마련된 반원형 앱스는 상하 두 부분으로 나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는데, 위쪽은 아기 예수와 성모마리아가 옥좌에 앉아 천사들의 경배를 받는 모습, 그리고 아래쪽은 어린 아기를 누인 제대를 둘러싸고 주교들이 성찬례를 집전하는 모습, 즉 「멜리스모스」다. 제대 위의 어린 아기는 ‘암노스(amnos)’, 즉 희생양으로서 그려진 예수 그리스도이며 두 손과 발을 모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형태여서, 바로 위편에 미소 띤 얼굴로 성모마리아의 품에 안겨있는 쾌활한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이다(그림3). 「멜리스모스」의 아기 예수는 ‘아에르(aër)’8)로 덮여있으며, 그가 누워있는 제대는 성모자의 옥좌처럼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고, 제대의 왼쪽으로 아기 예수의 머리맡에 성작이 놓여있다. 한편 성 대 바실리우스(St. Basilius Magnus, 329~379)와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St. Joannes Chrisostomus, 344~407)를 비롯한 주교들은 성찬례의 기도문이 쓰여있는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서 예식을 진행하는 모습이다(그림2).

 

멜리스모스 도상은 12세기 말에 아티카 지방 케라테아(Keratea)의 성녀 키리아키 성당(Hagia Kyriaki)과 키프로스 레프카라(Lefkara)의 대천사 성당(Archangelos) 등에도 그려졌다.9) 이후 더욱 널리 퍼지게 되어 13세기에는 아르메니아 지역10)에서도 발견된다. 베르투바니(Bertubani) 수도원은 13세기에, 그리고 찰렌지하(Tsalenjikha) 수도원, 마르트빌리(Martvili) 수도원, 소리(Sori) 수도원은 14세기에 성당 앱스를 멜리스모스 도상으로 장식하였다.11)

 

 

 

세르비아 지역에서는 소포차니(Sopocani) 수도원 성당이 13세기 중반에, 그리고 도냐 카메니카(Doña Kamenica)의 성모마리아 성당이 14세기에 멜리스모스 도상을 내부 장식으로 사용하였다.

 

카파도키아 지역의 경우는 으흘라라(Ihlara) 계곡의 암혈식(巖穴式) 성당인 베지라나 킬리세시(Bezirana kilisesi)에서 멜리스모스 도상을 볼 수 있다.12) 앱스의 천장은 데이시스(Deisis)로, 벽면은 「멜리스모스」로 장식되어 있다(그림5). 이 도상은 13세기 말 또는 14세기 초엽에 제작된 것으로서, 비잔티움의 종교·문화적 요인이 룸 술탄국(Sultanate of Rum) 치하의 카파도키아에도 영향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예다. 「멜리스모스」는 아주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벌거벗은 채 성반에 누인 그리스도와 그 둘레에서 성찬례를 거행하는 주교들로 구성되었다. 성 바실리우스와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제대 양편에 있고, 북쪽으로는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 329~390)가, 그리고 남쪽으로는 성 암필로키우스(St. Amphilochius, 339~394)와 성 블라시우스(St. Blasius, ?~316)가 자리 잡았다. 특이한 점은 제대와 치보리움(ciborium) 사이에 흰 새가 그려진 것이다. 하늘을 상징하는 치보리움에서 내려온 새는 바로 성령의 비둘기다. 주교들이 들고 있는 두루마리에는 성찬례의 기도문이 초서체 소문자로 적혀있고, 제대 위에는 성반과 성작뿐만 아니라 성찬식에 사용되는 다른 제구들도 같이 놓여있다. 앞쪽에는 봉헌된 빵 부스러기를 모으는 데 쓰이는 작은 솔과 작은 전례용 창,13) 그리고 왼쪽에는 아스테리스코스(asteriskos)14)가 있다. 뒤쪽으로는 두 개의 초에 불이 밝혀 있다. 천사들은 마치 성찬식의 부제(副祭)들처럼 제대 양편에 자리를 잡고 세라핌(seraphim)으로 장식된 리피디온(rhipidion)15)을 흔들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의 비둘기를 응시하고 있다. 한편, 앱스 벽면의 북쪽에는 부제 성 스테파누스(St. Stephanus, 5~34)가16) 한 손에는 성체함(pyx)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향을 피우며 성찬례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그림4). 그의 오른쪽에 프로테시스(prothesis)17)의 용도로 마련된 작은 벽감에는 그리스도 임마누엘(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ὁ Ἐμμανουήλ)18) 도상이 있다.

 

풍부한 장식과 색채의 사용, 그리고 세련된 인물 표현 등으로 미루어볼 때, 베지라나 킬리세시의 그림을 그린 화가는 비잔티움 제국의 중요한 예술 거점도시, 아마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9) 여기에 더하여 그가 사제였을 가능성이 큰데,20) 도상 곳곳에서 느껴지는 그리스도교 전례와 문헌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평범한 일반 화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멜리스모스 도상의 기원

 

암노스를 둘러싸고 성찬례를 거행하는 주교들, 그리고 예식에 함께 참여하는 천사들로 구성되는 멜리스모스는 12세기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교회 내부 장식에 사용된 멜리스모스 중에서 제작연대가 명확한 예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쿠르비노보의 도상(1191년)이다. 하지만 멜리스모스 도상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 즉, 암노스, 주교들, 그리고 천사들은 매우 일찍부터 앱스 장식에 사용되었다.

 

 

 

암노스(ἀμνóς)는 어린양, 특히 희생양을 의미한다.21)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표현하는 것은 구약의 파스카 축제와 연결된다. 구약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 민족은 제사 때 양을 희생제물로 바쳤고,22)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을 피하였다.23) 유대 민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날을 되새기던 파스카 축제(Pascha, 과월절)는 희생양의 개념과 함께 그리스도교에 이어졌는데,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은 파스카 축제 첫날 저녁에 이뤄졌기 때문에, 만찬 후 이어지는 십자가 처형은 인류 구원을 위한 어린양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24) 신약성경에서 세례자 성 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하였고,25) 사도 성 바오로는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으며,26) 교부들도 이러한 사상을 이어갔다.27)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암노스는 초기 비잔티움 시기부터 등장하며, 세상의 죄를 대신해 희생제물로 바쳐진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28)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San Vitale, Ravenna, 547) 모자이크화나(그림6)29) 막시미아누스 주교좌(Throne of Maximianus, 6세기) 등에 그려졌다(그림7). 이후 서유럽에서도 반 에이크 형제(Hubert Van Eyck, 1370~1426, Jan Van Eyck, 1390~1441)의 겐트 제단화(Ghent altarpiece) 중 <어린양의 경배>나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 1470~1528)가 그린 이젠하임 제단화(Isenheim altarpiece)의 <하느님의 어린양>처럼 암노스는 그리스도교 회화의 중요한 도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그런데 왜 「멜리스모스」 도상에서는 암노스를 어린 양으로 그리지 않고 어린 아기로 그리게 된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us II, 669~711)는 691/692년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트룰로(Trullo) 혹은 퀴니섹스툼(Quinisextum) 공의회로 불리게 되며,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고 성직자에 관련된 조항을 다듬는 등 이전 공의회의 내용을 보완하는 작업을 주로 하였다. 하지만, 서방교회는 이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퀴니섹스툼 공의회는 보편공의회의 성격을 갖출 수 없었고 따라서 공의회의 결정 사항도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퀴니섹스툼 공의회의 결정 중에는 성화에 관련된 것도 있었는데, 82조는 그리스도를 어린 양의 상징적 모습보다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기를 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강력한 금지라기보다는 권고에 가까웠던 이 조항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 되셨다는 육화(Incarnation)의 실제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30)

 

 

 

퀴니섹스툼 공의회의 82조에 따라 비잔티움 세계에서는, 서유럽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그리지 않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31) 이런 과정을 거쳐 어린 양의 이미지는 어린 아기의 이미지로 대체되어 갔다.32) 암노스를 사람으로 표현한 초기의 예는 사오르비시(Saorbisi)의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그림8). 8~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샹셀판(chancel plate)에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봉헌물을 둘러싸고 기도하는 자세로 표현된 기증자와 그의 자녀들, 향로와 십자가를 손에 든 사제가 조각되어 있다.33) 미사가 거행되는 제대 바로 앞부분의 샹셀판을 장식하는 조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성찬례의 장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방추형 봉헌물은 완벽한 아기의 모습은 아니지만, 사람으로 표현된 암노스의 이른 예에 해당한다. 퀴니섹스툼 공의회 이전이라면, 봉헌물은 아마도 어린 양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멜리스모스」 도상의 이론적 토대는 교부들을 통해서 마련되었다. 예루살렘의 주교 성 치릴루스(St. Cyrillus, 315경~387)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법에 따라 희생제사를 드리는 한 어린아이를 나는 봅니다. 그러나 천상에서는 그 아이가 모든 거룩한 희생을 받아들입니다. 그 자신이 제물로 바쳐지며 정화되었으나, 그 자신이 모든 것을 제물로 바치며 정화합니다. 그는 봉헌물이며, 동시에 사제입니다”라고 했다.34)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리주교였던 성 제르마누스(St. Germanus, 634경~733)는 『성찬례에 관하여(On the Divine Liturgy)』에서 성찬례가 거행되는 앱스를 그리스도가 탄생한 베들레헴의 동굴에 비유한 바 있다.35) 또한, 10세기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성 니폰(St. Niphon)의 생애』에는36) 성인이 환시를 본 내용이 쓰여있는데, 천사들이 축성된 빵 대신 아기 예수를 성찬례의 희생제물로 바치는 광경이 기록되어 있다.37) 비잔티움 회화에서 그리스도를 희생된 아기의 모습으로 성찬례 도상에 도입한 것은 12세기 후반기의 일이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성찬례의 희생제물로서 아기 예수를 언급했던 것이다.

 

한편, 필사본의 채색삽화도 「멜리스모스」 도상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루살렘의 정교회 박물관에 소장된 전례용 두루마리(Stavrou 109)는38) 11세기 말 또는 12세기 초엽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작되었는데,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전례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텍스트의 중간 부분에 그리스도가 천사들과 함께 드리는 천상 성찬례를 채색삽화로 그려 넣었다(그림9). 비잔티움 교회에서는 사제가 봉헌물을 제대 위에 놓은 뒤에 프로스코메디아(Proskomedia) 기도문을 읽게 되는데, 예루살렘의 전례용 두루마리에서는 이 기도문이 적혀있는 페이지의 가장자리에 전례를 거행하는 두 명의 천사를 그렸다. 왼쪽의 천사는 향을 들고 있고, 기도문의 첫 알파벳인 ‘K’ 형태로 되어 있다. 성작과 성반이 놓여있는 제대 양편에도 두 명의 천사가 있다. 그들은 부제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대입당 때 부제들이 드는 전례용 부채를 잡고 있다. 이 문헌은 11세기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전례에 관한 관심과 당시 비잔티움 세계를 휩쓸던 신학 논쟁을 반영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3. 「멜리스모스」의 의미


1) 그리스도교 전례와 「멜리스모스」

 

12세기 후반에 등장한 「멜리스모스」는 비잔티움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교회의 내부장식 프로그램에 영구적으로 속하게 되었다. 「멜리스모스」 도상은 교회라는 전례적 공간에서 어떤 중요한 가치를 얻게 되었던 것일까? 이제 「멜리스모스」의 의미를 전례와의 관계에서 밝힐 차례다.

 

멜리스모스(μελισμός)는 그리스어로 ‘나누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멜리조(μελίζω)에서 파생되었으며,39) 성찬례의 후반부에 거행되는 영성체(Communion)를 위해 사제가 축성된 빵을 몇 개의 조각으로 나누는 전례 의식, 즉 ‘빵 나눔’을 의미한다.40) ‘빵 나눔’ 예식은 최후의 만찬에서 비롯하는데,41) 그리스도는 수난 전날 밤 파스카 음식을 제자들과 함께 먹는 자리에서 그들에게 빵을 떼어 나눠주며 “받아먹어라,”42)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하였다.43)

 

비잔티움 전례에서는44) ‘빵 나눔’ 예식에 앞서 프로스코메디아(Proskomedia) 또는 프로테시스(Prothesis)라고 부르는 준비예식이 있다. 이는 성찬례에 사용할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이때 사제는 누룩을 넣어 구운 프로스포론(prosporon, 전례용 빵)의 중앙 부분을 사각형으로 따로 잘라내는데,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기에 암노스라고 부른다. 포도주를 성작에 담아 준비하면서 사제는 성창으로 암노스의 오른쪽을 찌르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창에 찔려 피를 흘림을 상징한다.45) 이후 암노스를 성반에 담아 그 위에 아스테리스코스를 올려놓고, 포도주가 담긴 성작과 함께 아에르로 덮어둔다. 대입당(great entrance) 행렬 때 준비된 빵과 포도주를 제대로 가져오고, 이를 성체와 성혈로 변화시키는 아나포라(anaphora, 감사기도 혹은 성찬기도) 예식을 행한다. 이때 에피클레시스(epiclesis, 성령청원기도)를 드리며, 빵 나눔과 영성체가 이어진다. 성찬례는 주교 또는 사제가 집전하며, 부제는 향을 피우거나 전례용 부채를 드는 등 전례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는다.

 

「멜리스모스」 도상은 이러한 비잔티움 성찬례를 시각화한 도상으로서 예식의 중요한 부분인 ‘빵 나눔’을 충실히 표현한 것이다. 주교들은 성찬례를 집전하고 있으며, 그들이 펼쳐 든 두루마리에는 성찬례의 절정인 아나포라 기도문이 적혀있다. 제대의 양편에 항상 성 대 바실리우스와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그려지는 점은 주목할만한데, 이들이 쓴 아나포라 기도문을 사용하는 성찬예식이 비잔티움 전례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46) 베지라나 킬리세시의 「멜리스모스」에는 성찬례 중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부분의 기도문이 쓰여있다(그림4). 내용은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성 바실리우스의 에피클레시스로서 전자는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후자는 사순시기의 주일과 가장 중요한 축일에 사용되었다. 성 바실리우스 곁에는 “τὸν μὲν ἄρτον τοῦτον αὐτὸ τὸ τίμιον σῶμα τοῦ Κ(υρίο)υ καὶ Θ[(εο)ῦ] κα[ὶ σωτῆρος ἡμ]ῶν), 이 빵이 하느님이시며 우리 구원자이신 주님의 고귀한 몸이 되게 하소서”라고 적혀 있다. 한편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곁에는 “τὸ δὲ ἐν τῷ ποτηρίῳ τούτῳ τ[ί]μιον αἷμα τοῦ Χ(ριστο)ῦ, 그리고 이 잔에 들어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가 되게 하소서”라는 글귀가 있다.47)

 

 

 

제대 위의 아기 예수가 아에르를 덮고 있는 모습은 「멜리스모스」 도상을 성찬례의 상징으로 해석할 때만 이해할 수 있다. 아에르는 봉헌용 빵과 포도주가 담긴 성반과 성작을 덮는 데 쓰이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아기 예수가 희생양이자 봉헌된 빵 ‘암노스’라는 상징적 의미를 드러낸다(그림10).48) 그의 주변에 포도주가 담긴 성작, 전례 용구인 아스테리스코스와 성창, 작은 솔 등이 그려져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인간구원을 위한 희생과 속죄의 제물로서 바쳐지기 위해 준비된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그림11). 

 

성찬례에서는 빵 나눔 전에 축성된 빵(암노스)에서 아에르를 벗겨둔다. 베지라나 킬리세시의 <암노스>가 아에르 없이 벌거벗은 아기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성찬례의 이 부분을 표현한 것이다(그림5). 아기 예수가 미동도 없는 모습으로 혹은 벌거벗은 채 그려지는 것은 성찬례의 봉헌제물로 바쳐지는 희생양임을 상기시킨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제르마누스는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특히 7~8절의 내용을 성찬례의 상징으로 해석하였다.49)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50) 성 제르마누스 이래로 ‘빵 나눔’은 그리스도의 몸을 쪼개어 나눈다는 의미에서 수난과 희생의 상징성이 강조되었다.51) 성창을 사용하여 프로스포론에서 암노스를 잘라내어 오른쪽 옆을 찌르는 행위 역시 성찬례를 그리스도의 수난과 연결 지은 것이다.

 

베지라나 킬리세시와 마트카 성당에 그려진 성령의 비둘기는 에피클레시스(성령청원기도)를 바쳐 봉헌물을 성체와 성혈로 변화시키는 예식을 상징한다(그림1, 5).52) 성 대 바실리우스의 아나포라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지극히 거룩하신 이여, 당신의 선하신 은덕을 베푸시어 우리와 여기 놓인 이 선물들에 성령을 내리시고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이 빵이 주 그리스도의 고귀한 몸이 되게 하소서. 아멘. 또한 이 잔에 들어 있는 것이 주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가 되게 하소서. 아멘. 당신의 성령으로 이 변화가 이루어지이다. 아멘, 아멘, 아멘.”53) 베지라나 킬리세시의 경우, 치보리움으로부터, 즉 하늘로부터 비둘기가 내려와 암노스를 누인 성반과 포도주가 담긴 성작 위에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이는 성령의 힘으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하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성령의 상징으로서 페리스테리움(peristerium, 성체성사의 비둘기)을 제대 위에 매다는 관습은 이와 관련되어 있다.54)

 

제대 곁에 그려지는 천사들은 케루빔의 기도를 상징한다. 마트카 성당의 경우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두루마리에 케루비콘(Cherubikon, 케루빔의 기도문)이 적혀있다. 천사들은 또한 성찬례에 참여한 부제들의 상징이기도 한데, 부제복을 입고 대입당 때 부제들이 들고 오는 리피디온을 쥐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그림1). 부제를 천사로 표현한 것은 지상 교회에서 드리는 성찬례가 천상 전례와 결합한다는 사상을 반영한다.

 

성찬례의 아나포라를 시각화한 「멜리스모스」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앱스의 장식으로 가장 적합한 도상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멜리스모스」는 전례적으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앱스에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콘의 형태보다 모뉴멘탈한 앱스 장식에 많이 활용된 것은 이 도상이 성찬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도상의 위치는 많은 경우 제대 바로 뒤편인데, 성찬례를 집전하는 사제의 위치에서 본다면 실제의 봉헌물이 놓이는 제대의 배경이 된다. 그런데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동안 제대는 커튼으로 가려지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은 이를 볼 수 없다. 따라서 「멜리스모스」 도상은 일차적으로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사제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제는 비잔티움 전례를 창시한 장본인인 성 대 바실리우스와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일치하여 성찬례를 거행하게 되는 셈이다.

 

 「멜리스모스」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강론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신비로운 제대가 준비되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여러분을 위해 제물로 바쳐지십니다(...). 성스러운 제대에 신성한 불꽃이 솟고, 케루빔들이 거기 함께하며, 세라핌들은 날개를 펼칩니다. 신성한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흠 없는 어린 양의 옆구리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잔을 채웁니다.”55) 그리스도교의 성찬례는 인간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다. 「멜리스모스」는 성찬례의 시각적 배경으로서 실제 성찬례와 하나가 된다.

 

2) 시대 상황과 「멜리스모스」

 

이제 새로운 문제로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이전 시기에 비잔티움 교회의 앱스를 장식하던 전통적 도상, 곧 「마예스타스 도미니」(Majestas Domini)와56) 「데이시스」(Deisis)는57) 왜 「멜리스모스」로 대체되었던 것일까? 왜 비잔티움 교회는 전통적 이미지 대신 새로운 도상을 선택했던 것일까?

 

「멜리스모스」 도상이 나타나기 직전, 11세기 말부터 12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지식인들 사이에 큰 논쟁이 있었다. 논쟁의 배경은 11세기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 철학에 관한 관심과 연구였다. 미카엘 7세 두카스(Michael VII Doukas, 1071~1078) 치하에서 절정을 이룬 그리스 철학 연구는 논리학과 변증법의 발달로 이어졌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도그마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철학자와 교의론자 사이의 논쟁은 12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논쟁의 중심은 그리스도론이었다. 요한 이탈로스(John Italos, 11세기 후반)와 같은 철학자는 어떻게 로고스(Logos)가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있는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신성에 결합할 수 있는가를 문제 삼았다. 그는 인간과 세상을 헬레니즘의 사유 체계 안에서 이해하려 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의 육화(肉化, Incarnation), 부활, 최후의 심판,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교 핵심 교리를 부정하였다. 그의 사상은 12세기에도 영향력이 지속되어 수많은 논쟁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성찬례와 관련된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당대의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회적 요인은 비잔티움 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여러 그리스도교 이단이다. 이원주의에 바탕을 둔 바오로파(Paulicianism), 마니교, 보고밀파는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 즉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느님이자 완전한 인간이라는 양성론(兩性論)을 부정하는 여러 이설(異說)로 제국의 기초를 뒤흔들었다.58)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Alexios Komnenos, 1081~1118)는 지식인들에게 고대 그리스 문화보다 교회 문헌을 존중하도록 권고하였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단척결에 나섰다.59) 황제의 명으로 에우티미오스 지가베노스(Euthymios Zigabenos, 1050년경~1120년경)는 『파노플리아 도그마티카』(Panoplia Dogmatica)를 써서 이단의 역사와 오류를 드러냈다.60) 또한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1143~1180)는 1166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시노드(synod, 교회회의)를 개최하여 그리스도 양성론에 해를 입히는 이단을 파문에 처하였고, 회의의 결정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대리석에 새겨놓았다.61)

 

그리스도의 육화와 양성론, 그리고 성찬례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은 교회미술에서도 감지된다. 바로 이 시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멜리스모스」를 통해서다. 성찬례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교회는 하나의 소우주라는 개념에62) 더하여 성찬례를 거행하는 장소라는 개념으로 전례 공간을 재인식하게 되었으며,63) 내부 장식도 전례적 성격이 강조된 도상을 채택하였다. 암노스와 주교들, 그리고 부제-천사들이 성찬례의 구조 안에 창의적으로 연결된 「멜리스모스」의 도상학적 새로움은 11~12세기의 신학적 논쟁에 대한 시각적 해소 방법이었던 것이다.

 

제대 위의 아기 예수는 인간으로, 그것도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태어난 성자 그리스도를 보여준다.64)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육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멜리스모스」는 이탈로스를 비롯한 당대 철학자들이 받아들이기 거부하던 그리스도의 육화에 대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시각적 설명을 제공한다. 베지라나 킬리세시의 프로테시스에 그리스도 임마누엘 도상을 그린 이유는 이곳이 성찬례의 봉헌물을 준비하는 곳이고, 봉헌물인 아기 예수는 육화의 신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아이로 표현된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성찬례를 거행하는 주교들은 미사의 핵심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멜리스모스」는 성찬례의 절정인 아나포라를 구체적인 시각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미사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고 재림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봉헌물로 바쳐지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과 피라는 점을 강조하여, 그리스도가 스스로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제물이 됨을 드러낸다.

 

비잔티움 세계에서는 성화상 논쟁 이후 전례와 설교집의 영향으로 새로운 도상학적 주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65) 12세기에는 이러한 변화가 두드러졌는데, 「멜리스모스」는 비잔티움 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던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첨예한 대립,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충돌 사이에서 탄생한 도상이었다. 

 

 

4. 나가는 말

 

그리스도교 미술의 독특한 점 중의 하나는 그림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기에, 상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멜리스모스」는 상징적 도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육화를 증언한다. 파스카의 어린양처럼 그리스도는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는 희생양이라는 사상을 담고 있다. 또한 성찬례의 봉헌물인 빵과 포도주는 축성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각적 확인이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역사의 한순간에 참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 사셨고, 현재 성찬례를 통해서 살아있는 빵으로 신자들 각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 된다는 의미다.

 

결국 「멜리스모스」는 참 하느님이자 참 인간인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상징의 복합체이다. 성작과 성합, 전례 용구, 주교의 두루마리, 촛불, 성령의 비둘기, 주교들과 천사-부제들, 그리고 암노스까지 모든 시각적 요소들이 인간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육화와 희생이라는 주제를 드러낸다. 초월적이고 비가시적인 세계를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종교미술의 사명이라면, 「멜리스모스」는 비록 현대인의 눈에는 생경하게 보일지라도 가장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한 예 중의 하나일 것이다.

 

수용미학의 차원에서 「멜리스모스」가 당대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신앙의 차원에서는 그들과 비슷한 감정을 느껴볼 수 있을듯하다. 현대 어느 사제의 글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성찬례를 바라보는 관점을 소개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자 구약의 긴 역사가 필요하셨습니다. 한두 세대가 아니라 수천 년의 기나긴 시간입니다. 아울러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따뜻함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예수님의 자기 결심이 필요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긴 역사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멸시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랑의 절정을 성체와 성혈이 품고 있습니다.”66)

 

 

* 이 결과물은 2021년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내연구비 지원에 의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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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 Garidis, “Approche realiste dans la representation du Melismos in XV,” Jahrbuch der Osterreichischen Byzantinistik Graz 32-5, 1982, pp. 495~502; R. Taft, G. Farnedi ed., “Melismos and Comminution: The Fraction and Its Symbolism in the Byzantine Tradition,” Traditio et progressio: Studi liturgici in onore del Prof. Adrien Nocent, OSB, Rome, 1988, pp. 531~552; Victor H. Elbern, “Eine Ikone des ‘Melismos’ aus Russland,” Ostkirchliche Studien, 1992, 41-1; Milanović Vesna, “The fresco at the entrance to Danilo II church of the Mother of God at Peć.” Zograf, 30, 2004, pp. 141-165; Chara Constantinides. Ho Melismos, Athens, 2008.

 

2) M. Garidis. “Approche réaliste dans la représentation du Mélismos,” pp. 495-502.

 

3) Victor H. Elbern, “Eine Ikone des ‘Melismos’ aus Russland,” Ostkirchliche Studien, 41-1, 1992

 

4) 크레타섬의 유명한 화가 미카엘 다마스케노스(Michael Damaskenos, 1535–1592)는 16세기에 코르푸섬에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의 작품 「The Divine Liturgy」에는 ‘멜리스모스’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Henry D. Schilb, Ellen C. Schwartz ed., “Byzance après Byzance and PostByzantine Art from the Late Fifteenth Century through the Eighteenth Century.” The Oxford Handbook of Byzantine Art and Architecture, New York, 2021, p. 265.

 

5) 본 연구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널리 알려진 예는 다음과 같다. 파포스의 아기아 솔로모니 성당(Agia Solomoni, 12세기), 아티카의 스피리아 펜텔리 성당(Spilia Penteli, 13세기 2/4분기), 소포차니 수도원(1270), 피르기(Pyrgi)의 예수변모 성당(13~14세기), 테살로니키의 아기오스 니콜라오스 오르파노스 성당(Agios Nikolaos Orphanos, 14세기 1/4분기), 원래의 코라 수도원(14세기 1/4분기), 카스토리아의 성 스피리돈 성당(St. Spyridon, 15세기 4/4분기), 데차니 수도원(Decǎni Monastery, 1335~1355).

 

6) 쿠르비노보의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의 크테토르(ktetor, 설립자)로서 비잔티움 황제 부부와 고위 성직자 2명의 초상이 서쪽 정면에 그려졌는데, 설립연도로 추정할 때 앙겔로스 왕조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Isaac II Angelos, 1156~1204, 재위 1185~1195)와 황후 헝가리의 마르가리타(Margarita, 1175~1223), 쿠르비노보 성당이 세워진 오흐리드(Ohrid) 교구의 대주교 요한 카마티르(Johan Kamatir), 그리고 쿠르비노보의 최고관리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쿠르비노보는 현재 북마케도니아에 속해 있다.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에 관해서 다음의 연구를 참고. L. Hadermann-Misguish. Kurbinovo, Les fresques de saint Georges et la peinture Byzantine du XII siècle, Bruxelles, 1975; C. Grozdanov, L. Haderman-Misgvish, Kurbinovo, Skopje, 1992: Elizabeta Dimitrova. The Church of Saint George at Kurbinovo, Skopje, 2016.

 

7) 쿠르비노보의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도상이 많이 남아 있다. 일례로, 남쪽 네이브의 벽면에는 성녀 안나가 아기 마리아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도상이 있으며, 예수 탄생 도상에는 목자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드리러 간 사이 주인의 양들을 지키는 목자의 개가 그려져 있어 생생한 느낌을 준다. 각주 7의 문헌 참고.

 

8) ‘아에르’는 성작과 성반을 덮는 직사각형의 커다란 전례용 베일이다.

 

9) Χ. Κωνσταντινίδη, Ο Μελισμός. Οι συλλειτουργούντες ιεράρχες και οι άγγελοι-διάκονοι μπροστά στην Αγία Τράπεζα με τα τίμια δώρα ή τον ευχαριστιακό Χριστό, Θεσσαλονίκη 2008, pp. 125–158.

 

10) 역사적 아르메니아를 의미하며, 이는 현재 터키 동부,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북서부를 포함한다.

 

11) Nina Iamanidze, “Icons of Ritual: The Earliest Georgian Templa Programs,” Millennium 7-1, 2010, p. 349.

 

12) 베지라나 킬리세시는 수도원 성당이며, 장례 예식을 위한 방이 딸려 있다. 이 성당에 관해서 다음 논문을 참고. Catherine Jolivet-Lévy, “Bezirana kilisesi (Cappadoce). Un exceptionnel décor paléologue en terres de Rūm. Nouveau témoignage sur les relations entre Byzance et le sultanat,” Zograf 41, 2017, pp. 107~142.

 

13) 그림이 훼손되어 성창(聖槍)은 손잡이만 남아 있다.

 

14) 아스테리스코스는 일종의 지지대로서 반원형이며 축성된 빵 위에 놓고 그 위에 베일을 덮는 용도로 사용한다.

 

15) 전례용 부채.

 

16) 베지라나 킬리세시에는 성인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으나, 성체함을 들고 향을 피우는 부제의 모습으로 성 스테파노스를 그리는 도상 전통에 따른 해석이다.

 

17) 프로테시스(prothesis, πρόθεσις)는 중앙 앱스의 북쪽에 마련되는 보조 앱스이며, 이곳에서 성찬례를 위한 봉헌물을 준비함. 봉헌 탁자 위에는 빵과 포도주, 성반과 성작, 아스테리스코스 등을 준비해둠. 서쪽에 마련되는 또 다른 보조 앱스인 디아코니콘(diaconicon)에는 사제복, 미사용 성경 등을 보관한다.

 

18)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이며,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19) 졸리베 레비에 따르면, 성 블라시우스의 두루마리에 적힌 청원기도문은 카파도키아의 다른 성당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명한 수도원인 테오토코스 페리블렙토스(Theotokos Paribleptos) 성당의 모자이크에서 볼 수 있다. 이점은 베지라나 킬리세시의 후원자 또는 화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연관이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Catherine Jolivet-Lévy, “Bezirana kilisesi (Cappadoce),” p. 112.

 

20) 13세기 카파도키아에 아르시게타스(Archigetas)라는 이름의 사제가 화가로서 활동한 예가

있다.

 

21) Michael Ferber, A Dictionary of Literary Symbol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 191~192.

 

22) 창세기 4장 4절(“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창세기 22장 13절(“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열왕기 상권 8장 5절(“솔로몬 임금과 그 앞에 모여든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함께 궤 앞에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양과 황소를 잡아 바쳤다”), 이사야서 1장 11절, 에제키엘서 46장 4~15절 등.

 

23) 탈출기 12장(파스카 축제: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을 마련하여라... 그 피는 받아서...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탈출기에 의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데리고 나오려 할 때,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이집트에는 열 가지 재앙이 내리게 되었고, 마지막 재앙은 맏아들의 죽음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재앙으로부터 구해졌고, 마지막 재앙이 지나간 뒤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해방된다.

 

24) 사도행전 8장 32절(“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 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베드로1서 1장 18~19절(“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25) 요한복음서 1장 29절, 36절.

 

26)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5장 7절. 요한묵시록 5장에 나오는 ‘어린 양’은 ‘암노스’가 아니라 ‘아르니온(ἀρνίον)’이라는 다른 단어의 번역이므로 본 연구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27) 사르데스의 멜리토(Melito of Sardes, 2세기)는 “주님은 어린 양이셨다”라고 했으며, 에메사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 of Emesa, 4세기)는 ‘숫양(ram)’이라는 표현을 썼다. 가발라의 세베리안(Severian of Gabala, 4~5세기)은 ‘양(sheep)’이라고 했으며, 셀레우키아의 바실(Basil of Seleucia)도 설교에서 같은 표현을 썼다. P. W. Van der Horst, Jews and Christians in Their Graeco-Roman Context: Selected Essays on Early Judaism, Samaritanism, Hellenism, and Christianity, Mohr Siebeck, 2006, p. 204.

 

28) S. J. Nortjé, “Lamb of God (John 1:29): An Explanation from Ancient Christian Art,” Neotestamentica 30-1, 1996, p. 143; C. Jolivet-Lévy, Etudes Cappadociennes, London, 2002, p.403.

 

29)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의 경우, <이사악의 희생>과 <아벨과 대사제 멜키체덱의 제사>에 희생양을 그렸으며 가장 윗부분인 천장에는 네 명의 천사의 흠숭을 받는 그리스도 암노스를 그려,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는 신약의 제사, 곧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인 성찬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J. Robert Wright, “Iconography and Eucharistie Ecclesiology in the Apse Mosaics of San Vitale, Ravenna, and Their Distant Liturgical Echo in the First Anglican Canon of 1549.” Anglican and Episcopal History 78-2, 2009, pp. 219~226.

 

30) C. Jolivet-Lévy, “Le Canon 82 du Concile Quinisecte,” Etudes Cappadociennes, London, 2002, pp. 402, 410(퀴니섹스툼 공의회 82조의 그리스어 전문과 프랑스어 해석이 실려있음).

 

31) 조수정. 「비잔티움 콤네노스 왕조의 동물싸움 도상 연구」,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46, 2017, 40쪽.

 

32) 어린 양의 이미지가 어린 아기의 이미지로 대체되는 과정은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고, 저항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파도키아의 경우는 9~10세기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그린 예가 남아 있다. 토푸즈 다으(Topuz Dagı) 성당, 일타슈(Iltaş) 성당, 그리고 귈뤼 데레의 성 요한 성당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 양 도상이 있다. C. Jolivet-Lévy, “Le canon 82 du Concile quinisexte et l'image de l'Agneau: à propos d'une église inédite de Cappadoce,” Deltion tes Christianikes Archaiologikes Etaireias 17, 1993, p. 46.

 

33) 조각판의 연대에 관해서는 학자 간 이견(6~12세기)이 있으나, 이마니제(Nina Iamanidze)는 8~9세기로 추정하였다. 사오르비시 성당의 샹셀판에 관해 다음 논문을 참고. Nina Iamanidze, “Icons of Ritual: The Earliest Georgian Templa Programs,” Millennium 7-1, 2010, pp. 345, 347~350.

 

34) 예루살렘의 성 키릴루스에 관하여 다음 문헌을 참고. Migne PG 140, col. 156~176 (https://archive.org/details/patrologiaecurs90migngoog/page/n96/mode/2up, 2022년 2월 23일 검색); Gordana Babić, “Les discussions christologiques et le décor des églises byzantines au XIIe siècle. Les éveques officiant devant l’Hétimasie et devant l’Amnos,” Fruhmittelalterliche Studien 2-1, 1968, p. 384.

 

35) St. Germanus, J. Meyendorff ed., On the Divine Liturgy, New York, 1984, p. 43.

 

36) BHG 1371z; V. Marinis, “The Vision of the Last Judgment in the Vita of Saint Niphon (BHG 1371z)”, Dumbarton Oaks Papers 71, 2017, pp. 193~194.

 

37) Nina Iamanidze. “Icons of Ritual,” p. 350. 성체를 아기 예수로 표현하는 그리스도교 전통은 현대까지도 이어져 오는데, 성녀 파우스티나(St. Faustina, 1905~1938)는 미사 중 아기 예수의 모습을 한 성체를 사제가 먹는 모습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나의 고해신부님이 미사를 드리고 계셨다. 잠시 후에 나는 제대 위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았다. 아기 예수님은 즐겁고 장난스럽게 자신의 두 손을 신부님에게로 내밀었다. 그러나 잠시 후, 신부님은 그 아름다운 아기를 손으로 잡더니 살아 있는 채로 쪼개서 먹어버렸다. 처음엔 이 사제가 아기 예수님에게 한 일이 싫었었다. 그러나 즉시 이 사건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M. 파우스티나 수녀, 『일기, 내 영혼 안에 계신 하느님의 자비』, 오영숙, 박금옥, 송기범, 최성은 역, 수원, 2011, 217쪽.

 

38) Greek Orthodox Patriarchate Museum Ms. grec Stavrou 109. André Grabar, “Un Rouleau Liturgique Constantinopolitain et Ses Peintures.” Dumbarton Oaks Papers 8, Dumbarton Oaks, 1954, p. 174; Gordana Babić. “Les discussions christologiques et le décor des églises byzantines au XIIe siècle. Les éveques officiant devant l’Hétimasie et devant l’Amnos,” Fruhmittelalterliche Studien 2-1, 1968, p. 374.

 

39) R Taft, “Fraction,” The Oxford Dictionary of Byzantium,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Retrieved 3 Jan. 2022, from https://www.oxfordreference.com/view/10.1093/acref/9780195046526.001.0001/acref-9780195046526-e-1958).

 

40) 초기 교회에서 ‘빵 나눔’은 성찬례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빵 나눔’은 신약성경의 사도행전에서 처음 언급되었는데,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2장 42절),”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2장 46절),” “주간 첫날에 우리는 빵을 떼어 나누려고 모였다(20장 7절),” “바오로는 다시 올라가 빵을 떼어 나누고(20장 11절)”라는 내용으로 첫 신자 공동체의 전례를 소개하였다.

 

41) Leah Sinanoglou, “The Christ child as sacrifice: a medieval tradition and the Corpus Christi plays,” Speculum 48-3, 1973, p. 494. ‘성찬례를 제정하시다’: 마태오 26장 26~30절, 마르코 14장 22~26절, 루카 22장 14~20절, 코린토 전서 11장 23~25절. 요한복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6장 51절).”

 

42) 마태오복음서 26장 26절: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 말씀하셨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43) 루카복음서 22장 19절.

 

44) 그리스의 인문주의자 레오 알라티우스(Leo Allatius, 1586~1669)는 1645년에 비잔티움 전례와 예술에 관한 저서(『De templis Graecorum recentioribus』)를 출간하였는데, 근대 초기의 교회 의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https://archive.org/details/bub_gb_1IWEI8JQoTAC/page/n67/mode/2up, 2022년 2월 14일 검색).

 

45) 요한복음 19장 34절. 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9장 14절).

 

46)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전례에 관하여 다음 저서를 참고. Robert A. Taft, A History of the Liturgy of St John Chrysostom, Pontificio Istituto Orientale: Roma, 1978~2008.

 

47)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의 두루마리에는 “Ἡμᾶς δὲ πάντας τοὺς ἐκ τοῦ ἑνὸς ἄρτου [ἐκ τοῦ ἑνὸς π]οτη[ρίου μετέχωντας ἑνῶσαι ἀλλήλοις] εἰς ἑνὸς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κοινωνίαν καὶ μηδένα ἡμῶν εἰς κρίμα ἤ εἰς (κατάκριμα...),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을 모시는 우리 모두를 한 분이신 성령의 영성체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 중 누구도 심판이나 처벌(받지 않도록)”이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성 암필로키우스의 두루마리에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에피클레시스에 해당하는 기도문이 적혀있다; “ὥστε γενέσθαι τοῖς μεταλαμβάνουσιν εἰς νῆψιν ψυχῆς, εἰς ἄφεσιν ἁμαρτιῶν, εἰς κοινωνίαν τοῦ ἁγίου σου πν(εύματο)ς, εἰς βασιλείας πλήρωμα, εἰς παρρησίαν τὴν πρὸς σέ, μὴ εἰς κρίμα ἤ εἰς κα(τάκριμα), 그것을 받아 모시는 사람들은 영혼의 정화와 죄의 용서, 성령의 일치, 천국의 충만함, 믿음의 보증을 받게 하시되, 처벌의 심판은 면하게 하시고.” 성 블라시우스의 두루마리에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전례의 에피클레시스에 이어지는 청원 기도가 적혀있다;“Ἔτι πρωσ[φέ] ρομέν σοι τὴν λογικὴν ταύτην λατρείαν ὑπὲρ τῶν ἐν πίστει ἀναπαυσαμένων π(ατέ)ρων [πατριαρχῶν] προφη[τῶν] ἀποστόλων κηρύκων εὐα[γγ]ελ[ιστῶν...], 저희 역시 신앙 안에 잠든 사제들과 주교들, 예언자들과 사도들, 설교자들과 복음사가들을 위해 이 영적 전례를 당신께 바칩니다.” Catherine Jolivet-Lévy, “Bezirana kilisesi (Cappadoce). Un exceptionnel décor paléologue en terres de Rūm. Nouveau témoignage sur les relations entre Byzance et le sultanat,” Zograf 41, 2017, pp. 118~119.

 

48) 비잔티움 전례와 마찬가지로 로마가톨릭 미사 전례에서도 성찬 감사송에서 희생양 그리스도를 언급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며 십자가의 구원을 길이 기념하도록 흠 없는 어린양이신 자신을 아버지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완전한 찬미의 제물로 봉헌하셨나이다.” 미사 통상문, 성찬 감사송 2 (http://ebook.cbck.or.kr/fileRoot/kr/c/b/cbck/DigitalAlbumRoot/171106000020/mobile/index.html#p=49. 2022년 2월 17일 검색).

 

49) 각주 36. Saint Germanus I, Paul Meyendorff tr., On the Divine Liturgy, New York, 1984, pp. 6, 21, 36.

 

50) 이사야서 53장 7~8절.

 

51) Eutychios of Constantinople, PG 86.2:2396A; Apophthegmata Patrum, PG 65:156C-160A; R. Taft, G. Farnedi ed., “Melismos and Comminution: The Fraction and its Symbolism in the Byzantine Tradition,” Traditio et progressio: Studi liturgici in onore del Prof. AdrienNocent, OSB, Rome, 1988, pp. 531–552; 각주 35.

 

52) 마트카 성당의 도상에서는 제대 아랫부분에 성령의 비둘기를 그렸다.

 

53) 최창덕, 「감사기도 제4양식에 영향을 미친 동방전례의 아나포라들(1)」, 『가톨릭사상』 49, 2014, 34~35쪽. 성 대 바실리오 성찬예배서: 우종현, 『성찬예배서』, 한국 정교회 출판부, 2003, 56~65쪽.

 

54) 페리스테리움에 관해 다음 논문을 참고. Anita Paolicchi, “The Eucharistic Dove: Considerations on the Meaning of Two Balkan Examples,” Старобългарска литература 63-64, 2021, pp.323~335.

 

55)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회개에 대한 아홉 번째 강론. Homélie sur la pénitence: http://www.livres-mystiques.com/partieTEXTES/Chrisostome/homt3/penitence/penitence009.htm(2022.02.10.검색); C. Jolivet-Lévy, “Le Canon 82 du Concile Quinisecte,” pp. 403~404.

 

56) 조수정, 「비잔틴 회화의  연구」, 『미술사학보』 25, 2005, 313-341쪽.

 

57) 조수정, 「데이시스(Deisis)의 도상학적 정의에 관한 소론 - 카파도키아의 교회벽화를 중심으로 -」, 『대구사학』 110, 2013, 249-278쪽.

 

58) 당대 저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인 미카엘 프셀로스(Michael Psellos, 1018~1073)와 요한 이탈로스(John Italos, 11세기 후반) 등은 우주와 인간의 기원 문제를 연구하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프로클로스, 포르피리우스, 이암블리쿠스 등 고대 철학자를 인용하였다. 이탈로스는 인간 영혼의 재생(Metempsychosis)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주장을 되풀이하였고, 이콘을 공경하지 않았다. Gordana Babić, “Les discussions christologiques et le décor des églises byzantines au XIIe siècle. Les éveques officiant devant l’Hétimasie et devant l’Amnos,” pp. 368~372. 요한 이탈로스에 관해 다음 도서를 참고. Lowell Clucas, The Trial of John Italos and the Crisis of Intellectual Values in Byzantium in the Eleventh Century, Munchen, 1981.

 

59) 황제 알렉시오스 콤네노스는 직접 이단의 지도자들을 만나 설득하고, 교회로 돌아온 이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하사하는 등 이단 척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같은 책, p. 369.

 

60) Zigabenus Euthymius, Euthymii Monachi Zigabeni Orthodoxae Fidei Dogmatica Panoplia, apud Hieronymum Scotum (https://books.google.co.kr/books?hl=ko&lr=&id=5GhTAAAAcAAJ&oi=fnd&pg=PA2&dq=Panoplia+Dogmatica&ots=2iJBaniexn&sig=BwJn_0iA1ZPvb11NY1NA3Sh5odc#v=onepage&q=Panoplia%20Dogmatica&f=false, 2022년 2월 21일 검색); J.-P. Migne, Patrologia Graeca, 128~131.

 

61) Georges Sidéris, “Ces gens ont raison : La controverse christologique de 1165-1166, la question des échanges doctrinaux entre l’Occident latin et Byzance et leur portée politique,” CRMH 24, 2012, p. 28.

 

62) 조수정, 『비잔티움 미술의 이해』, 북페리타, 2016. 58쪽.

 

63) 일찍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제르마누스는 “교회는 하느님의 성전이며, 거룩한 공간, 기도하는 집, 백성들의 모임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이 땅의 하늘이며, 초월자 하느님께서 당신 집처럼 사시고, 거니시는 곳이다. 또한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과 부활이 실현된 흔적(안티티포스, antitypos)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느님의 집으로서 생명을 주는 거룩한 신비가 거행되는 곳이며, 동시에 성소와 거룩한 무덤의 가장 깊은 내면이다. 교회 안에는 무덤과 식탁이 있어서, 영혼의 양식이 되고, 생명의 보증이 된다. 그 안에 결국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몸소 가르쳐주신 거룩한 가르침의 교리가 참으로 값진 진주목걸이처럼 담겨 있다.”(PG 98, coll. 384B – 385A)라고 한 바 있다.

 

64) E.M. 아렐야노, 김현태 옮김, 『고통의 가치』,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5, 221-222쪽.

 

65) A. Cutler, “Iconography,” The Oxford Dictionary of Byzantium, Oxford University Press, 1991(https://www.oxfordreference.com/view/10.1093/acref/9780195046526.001.0001/

acref-9780195046526-e-2421, 2022년 1월 3일 검색).

 

66)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6일 성체성혈대축일, 오늘의 묵상」, 『매일미사』, (https://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12705&gomonth=2021-06-06&missatype=DA).

 

[교회사 연구 제60집, 2022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수정(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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