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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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부부 사랑의 감정적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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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0-09 ㅣ No.1342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부부 사랑의 감정적 차원

 

 

세상의 모든 사랑이 다 그렇지만, 특히 부부 사랑은 몸과 마음의 표현들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더 헌신적일 수 있지만, 한 존재와 다른 한 존재를 연결하는 관계적 신비와 총체성을 가장 드러내는 것은 혼인의 사랑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랑은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과 함께한다는 것을 상징”(‘사랑의 기쁨’, 142항)합니다. 하지만 초자연적 사랑과 천상의 사랑은 “우정이나 효도, 또는 봉헌보다는 부부 사랑에서”(142항) 그 상징과 표현을 더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성적인 차원에서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부모 자식의 관계와 사랑보다는 부부 관계와 사랑에 더 비견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혼인의 사랑은 몸과 마음의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차원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감정과 느낌으로서의 사랑

 

혼인 생활에서 마음의 물결과 파동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부부의 삶에서 욕망, 느낌, 감정들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143항 참조). 인간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우리는 감정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대상을 추구하는 특성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언제나 즐거움이나 괴로움, 기쁨이나 고통, 편안함이나 두려움 같은 기본적인 감정의 표징을 지닙니다”(143항).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 역시 “참된 인간으로서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셨습니다”(144항). 한탄하시고(마태 23,37 참조), 눈물 흘리시고(루카 19,41; 요한 11,35 참조), 연민을 느끼시고(마르 6,34 참조),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시는(요한 11,33 참조)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신의 감정을 드러내신 것은 당신의 인간적 마음이 다른 이들을 향해 얼마나 많이 열려 있는지를 보여줍니다”(144항). 감정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감정을 느끼는 것과 어떤 욕망이나 반감이 들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삶 안에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 자체로서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고 죄가 되거나 비난받을 만한 일도 아닙니다(145항). 감정과 느낌과 욕망은 행위와 연결될 때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 윤리적으로 사랑하지 말아야 할 어떤 사람에게 감정을 느끼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감정을 일부러 용인하고 그 감정을 행동으로 옮길 때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감정에 따라 나쁜 행동을 할 때, 다시 말해, “그 감정을 더욱 키우려는 결심과 그 감정에 굴복한 악한 행위 안에 악이 존재하게 됩니다”(145항).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감정 자체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 감정이 유발시키는 행동들은 우리 책임의 영역에 속합니다.

 

감정은 어떤 행동들을 발생시킬 요소들을 갖고 있습니다. 좋은 감정은 좋은 행동을 낳고 나쁜 감정은 나쁜 행동을 낳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과 행동이 언제나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단순히 어떤 좋은 감정을 지녔다고 해서 자기가 선하다고 믿는 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145항). 겉으로 보기에 좋은 감정이 때때로 이기적인 욕망과 욕심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끌림으로 그 사람을 좌지우지하려 한다면, 나의 감정을 오로지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145항).

 

감정과 행동이 늘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감정은 행동을 이끌어 내고 관계의 깊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부부 사랑은 좋은 감정의 표현과 감정의 교류를 통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건강한 감정의 표현과 교류는 부부의 정서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좋은 감정의 표현과 교류는 부부 사이에 건강한 감수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이 감수성은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하여 저마다의 자유를 존중하고 이 자유에서 흘러나와 이 자유를 풍요롭고 아름답게 해주며 더욱 조화를 이루어 줍니다”(146항).

 


감정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부부 사이에 건강한 감정의 표현과 교류, 건강한 정서 생활과 바람직한 감수성의 형성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감정은 행동을 유발하게 하고, 감정의 표현과 교류는 부부 관계의 깊이와 밀도를 좌우할 수 있습니다. 감정이 본능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감정과 욕망과 느낌 역시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훈육의 길, 곧 절제도 수반하는 과정을 요구합니다”(147항).

 

교회가 감정과 욕망의 절제와 훈련에 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흔히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가 절제와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위선과 가식, 금지와 편협한 금욕주의를 내세워 왔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감정과 욕망을 금기시하고 왜곡된 금욕주의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감정과 욕망의 절대화와 우상화를 반대했을 뿐입니다. “성경에 충실한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에로스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왜곡되고 파괴적인 형태의 에로스를 물리치고자 하였습니다. 에로스를 그릇되게 신격화하는 이러한 행위는 사실상 에로스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에로스를 비인간화하기 때문입니다’”(147항).

 

영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일부 영적 사조에서 감정과 욕망을 극단적으로 부정시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고통은 욕망에서 오는 것이기에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149항)하거나 기쁨과 즐거움은 영성적 덕목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극단적인 흐름이 있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분명하게, 감정과 욕망에 관한 이러한 왜곡되고 편협된 이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유의 확장을 통해 “욕망을 거부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넓히고 완성하는 것”(149항)을 강조합니다.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항상 자율적인 것은 아닙니다. 감정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조정되고 조율됩니다. 때때로 우리의 감정은 사회 체계에 의해 지배되고 정향(定向) 되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단순히 경제적 체제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 깊숙이 파고들어 인간의 사고방식, 감정과 행동양식을 규정하는 힘으로 작동되기도 합니다. 내가 느끼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감정하는 방식대로 우리는 살아가기도 합니다(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참조).

 

그래서 더욱 “감정과 본능에 대한 훈육이 필요하며, 여기에는 때때로 제한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148항). 우리의 감정과 욕망이 하느님을 향하고 또한 건강한 방향성을 지닐 수 있도록 훈련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감정과 욕망에서 시작된 열정이 어떤 한 가지 즐거움에만 집착하고 자제력을 잃으면 그것은 우리를 파괴합니다. 감정을 훈련한다는 것은 그 감정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점검하면서 그 감정의 열정이 주는 기쁨과 더불어 “관대한 헌신, 인내심 있는 기다림, 어쩔 수 없는 피로,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의 순간들과 함께 어우러지도록 하는”(148항) 일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0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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