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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마누엘 디아스와 성경직해(聖經直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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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02 ㅣ No.981

마누엘 디아스와 《聖經直解》*

 

 

국문 초록

 

1636년 중국 북경에서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누엘 디아스(Manuel Diaz, 陽瑪諾, 1574~1659) 신부가 불가타 성경의 번역 및 해설서인 《성경직해》(聖經直解)를 간행하였다. 디아스 신부의 저술은 매우 유려한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학식 있는 중국인 신자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방대한 양의 성경 해설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17세기 유럽에서 사용하던 성경 해설서들을 참고하였을 것이다. 또한 중국 역사책을 인용하거나 중국인들의 문화적 감수성에 맞춘 해설들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디아스 신부의 저술은 유럽 천주교 텍스트의 한역과 중국적 변용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탄생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디아스의 저작 《성경직해》가 지닌 번역상의 특성은 다섯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 미켈레 루지에리와 마태오 리치가 활동하던 시대에 없었던 새로운 번역어들이 탄생하였다. 연옥, 복음, 삼위일체 등이 그것이다. 둘째, 화체설이라는 독특한 교리를 가진 천주교를 중국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성체의 본질과 의미를 설명하는 노력을 보였다. 셋째, 종말과 심판의 교리 역시 중국인들에게 낯선 사고였는데, 그 의미를 해설하면서 연옥에 관한 가르침도 소개하였다. 넷째, 천주교에서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낱말들의 경우에는 유사한 의미를 담은 한자로 옮기거나, 히브리어 발음을 그대로 적었다. 다섯째, 성경 구절을 해설하거나 예수의 생애를 연대기로 나열할 때에 유럽과 중국의 역법을 대조하면서 그 내용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자면, 디아스의 《성경직해》는 서양과 동양, 천주교와 유교, 이렇게 두 종류의 문명적 흐름이 교차하고 있는 텍스트라고 평가할 수 있다.

 

 

1. 서론

 

1636년 중국 북경에서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누엘 디아스(Manuel Diaz, 陽瑪諾, 1574~1659) 신부가 불가타 성경의 번역 및 해설서인 《성경직해》(聖經直解)를 간행하였다. 디아스 신부가 한문으로 간행하였지만 이것이 그의 순수한 창작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매우 유려한 문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디아스 신부의 개인적인 작업의 소산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주변의 학식 있는 중국인 신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또한 방대한 양의 해설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 17세기와 18세기 유럽에서 사용하던 라틴어 불가타 성경에 대한 라틴어 및 프랑스어 해설서들을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유럽 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문화적 감수성에 맞추어 내용을 다듬은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디아스 신부의 한역 저술은 유럽 천주교 텍스트의 한역과 중국적 종교 관념의 수용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복합적인 혼효현상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2000년 이후 중국과 대만, 유럽 등지에서는 17세기 이후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간행한 천주교 관련 서적들이 영인본으로 간행 보급되었다. 주로 중국 상해의 서가회(徐家匯) 장서루(藏書樓), 프랑스 국립도서관, 로마 예수회 문서고 등에 소장되어 있던 한문 자료들이다. 이 중에는 《聖經直解》, 《聖經廣益》, 《聖年廣益》을 비롯하여 성경 관련 저술들이 상당량 들어 있다. 그러므로 디아스의 《성경직해》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주변 사료들은 어느 정도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자료의 풍성함에 비하여 아직 관련 연구는 대단히 미흡한 편이다. 《성경직해》의 저술 목적, 간행 경위, 사용 방식 등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연구가 나오지 않았다. 한국의 학계에서는 《성경직해》 자체보다는 《성경직해》의 한글 번역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1) 그래서 《성경직해》만을 독립적으로 다루는 연구는 희귀한 편이다.2) 이것은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중국 내의 서학 관련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다.3) 아울러 유럽의 중국학 연구에서도 《성경직해》에 관한 연구는 그렇게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4) 다만 최근에 들어서 중국 학계를 중심으로 불가타 성경의 한역에 관한 통시적인 연구들이 조금씩 제출되고 있다.5)

 

《성경직해》의 편성 체계는 주일과 주요 축일별로 해당 복음서 구절들을 번역한 경(經)과 이를 해설한 잠(箴)이 중심을 이룬다. 물론 경과 잠에 앞서서 머리말에 해당하는 자서(自序), 주일과 축일의 목록, 144개의 주요 용어들을 뽑아서 색인을 만든 잡사목록(雜事目錄) 등이 먼저 나오고, 이어서 ‘천주’, ‘예수’[耶穌], ‘그리스도’[契利斯督], ‘주일’, ‘성경’ 등의 용어에 대한 사전적 설명이 실려 있다. 이 부분은 《성경직해》 제1권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분량이 많다. 특히 129쪽으로 이루어진 잡사목록은 분량도 많을뿐더러 그 내용도 독특하다. 그 당시까지 중국 문헌에서는 색인이라는 항목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직해》 잡사목록은 중국 문헌에서 색인을 다는 관행의 효시를 이룬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성경직해》 제1권의 구성 체계와 수록 내용만을 독립해서 다루는 별도의 연구를 기약할 만하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성경직해》의 본문에 해당하는 경과 잠의 내용에 주목하고자 한다.

 

《성경직해》의 경(經)과 잠(箴) 부분에 들어 있는 복음서 구절들은 트리덴티노 전례(Liturgia Tridentina) 양식에 따른 전례주년과 축일의 독서 체계와 일치한다.6) 그래서 트리덴티노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의 결정에 따라서 비오 5세 교황이 1570년에 공포한 《로마 미사경본》에 실려 있는 주일과 주요 축일의 독서 가운데 복음서 구절들이 《성경직해》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성경직해》는 복음서 구절을 경이라는 제명으로 번역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잠이라는 제명 아래에 복음서 구절을 해설하기 위하여 교부 문헌과 성인전 및 라틴 고전 등 다양한 문헌들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실었다. 잠에 실린 내용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어디서 가져온 구절들인지를 밝히는 것 역시 중요한 작업이 된다. 그러나 이는 연구 논문 한 편에서 모두 다루기에는 너무 방대한 분량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성경직해》를 지은 저자 마누엘 디아스 신부 개인의 선교 활동에 대한 탐구, 그리고 《성경직해》의 복음 해설에 나타난 특징적인 번역 양상에 한정하여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하에서는 먼저 마누엘 디아스의 생애 및 저술 활동을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에 《성경직해》의 복음 해설인 잠 가운데 일부의 사례를 들어서 번역상의 특징과 의미를 살펴보겠다.

 

 

2. 마누엘 디아스 신부의 생애와 활동

 

17세기 중엽까지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가운데 마누엘 디아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두 명이다.7) 그래서 노(老) 마누엘 디아스(Manuel Dias, senior, 1561~1639)와 소(少) 마누엘 디아스(Manuel Dias, junior, 1574~1659)라고 구분해서 부른다.8) 《성경직해》를 지은 마누엘 디아스는 젊은 마누엘이다. 디아스 신부는 중국에 입국한 뒤에 자신의 이름을 양마낙(陽瑪諾)이라고 지었으며, 연서(演西)라는 이름을 자(字)로 사용하였다. 마누엘을 음차하여 마낙이라고 한 것 같으나, 왜 성을 양 씨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자를 연서로 한 이유도 불분명하다. 서양 나라에서 왔다는 의미와 디아스의 음차를 혼용하여 연서라는 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그의 생애부터 간단히 살펴보자.

 

1) 생애

 

디아스는 1574년 포르투갈의 작은 마을인 카스텔루 브랑쿠(Castelo Branco)라는 곳에서 출생하였다.9) 디아스는 1593년 2월 2일 예수회에 수련자로 입회하였다. 1596년부터 1600년까지 그는 코임브라에 있던 예수회 학교에서 철학을 배웠다. 그리고 1601년 4월 11일 리스본에서 산티아고(Santiago) 호를 타고 유럽을 떠났다. 그는 1601년부터 3년 동안 인도에서 살면서 신학 수업을 끝냈다. 

 

디아스는 배를 타고 인도의 고아를 출발하여 1604년 마카오에 도착하였다.10) 그는 6년 동안 마카오에 머물면서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그런 뒤에 예수회 동료 가스파르 페레이라(Gaspar Ferreira, 1571-1649)와 함께 1610년 중국 소주(韶州)로 갔다. 당시 소주의 상황은 천주교 선교사들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1612년 4월 13일 예수회원들의 거주지가 약탈당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다. 디아스와 페레이라는 중국 남부를 흐르는 주강(珠江)의 지류인 북강(北江)을 따라서 여행한 다음에 1612년 7월 31일 광동의 북쪽 경계 지역에 있던 남웅(南雄)이라는 곳에 도착하여 새로운 선교지를 세웠다.

 

1613년 5월 말 무렵에 마누엘 디아스는 북경으로 갔다. 디에고 데 판토하(Diego de Pantoja, 1571~1618)와 사바티노 데 우르시스(Sabatino de Ursis, 1575~1620)와 함께였다. 이 시기에 디아스는 중국인 개종자 몇 사람과 함께 《천문략》을 준비하였다. 당시 북경에 자리를 잡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마태오 리치의 무덤이 있던 책란(柵欄) 묘지 근처의 거주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디아스는 《천문략》을 1614년에 완성하고 1615년 북경에서 간행하였다. 디아스는 1614년 하반기에 중국 선교지 순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곧바로 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1615년 초까지 판토하와 함께 북경의 책란 거주지에 머물다가 북경을 떠났다. 중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선교지역들을 순회 방문하여 상황을 점검하였다.

 

1616년 디아스가 남경에 있을 때 박해 사건이 터져서 마카오로 추방당했다.11) 중국으로 다시 입국하지 못하게 된 그는 1621년까지 마카오에 살았다. 1616년 8월 디아스는 중국 선교지 방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예수회 중국 관구장이었던 발렌팀 카르바요(Valentim Carvalho, 1559~1630)에게 보냈다. 몇 주 뒤인 1616년 9월 18일 디아스는 예수회 회원으로서 네 번째 허원식을 가졌다. 그리고는 1616년 12월 26일 마카오에서 예수회 제5대 총장 클라우디오 아콰비바(Claudio Acquaviva, 1543~1615)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작성하였다. 이 편지에는 중국에서 벌어진 천주교 박해에 관한 소식들이 담겨 있었다.

 

드디어 1621년 디아스는 북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북경으로 가서 서광계(徐光啓, 1562~1633) 등 중국인 개종자들과 함께 머무르면서 북경의 천주교 신자들을 방문하였다. 당시 예수회에 우호적이었던 인물들 가운데 명나라 황실에서 고위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유럽인들이 만주족의 침략에 맞서는 데 유용한 군사적 기술을 갖고 있음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니콜로 롱고바르도(Niccolò Longobardo, 1565~1655)와 디아스는 명나라 병부(兵部)를 돕게 되었고, 그 대가로 북경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는 허가를 받았다.

 

1623년에 조앙 다 호샤(João da Rocha) 신부가 사망하자, 디아스는 예수회 중국 부관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때부터 1635년까지 디아스는 중국 내 예수회원들의 최고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동안 디아스는 중국 전역을 다니면서 선교지 상황을 개선하고 성당과 신학교를 세웠다. 디아스는 남창(南昌)에 체류하던 시기에 예수회 제6대 총장이었던 무티오 비텔레시(Mutio Vitelleschi, 1563~1645)에게 보낸 1633년 11월 1일 서한에서 선교활동에 관한 소식을 전하면서 프란치스코회 탁발 수도사들의 중국 선교 활동에 대한 인상을 소개하였는데, 프란치스코회 선교 방식에 대한 반감을 보였다. 이것은 훗날 스페인 프란치스코회 안토니오 카바예로(Antonio Caballero, 1602~1669)와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12)

 

1635년 부관구장의 직책에서 물러난 디아스는 유럽어로 된 천주교 묵상 서적과 신심 서적들의 한역본 출판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였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저작으로 알려진 《그리스도를 본받아》(De Imitatione Christi)를 《경세금서》(輕世金書)라는 제명으로 번역 간행하였고, 또 본고의 연구 대상인 《성경직해》(聖經直解), 그리고 《경교비전》(景敎碑詮) 등도 세상에 내놓았다. 특히 《경교비전》은 781년에 세워진 이른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대해서 유럽인이 쓴 최초의 연구서이기도 하였다.

 

디아스는 1639년부터 항주(杭州)에서 살았다. 1643년 중병에 걸려서 남창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뒤에 1645년에는 복건의 건녕부(建寧府)로 가서 살다가 다시 연평부(延平府)로 갔다. 디아스는 1646년부터 1648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그는 다시 예수회 중국 부관구장에 임명되어 항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디아스는 줄곧 항주에서 지냈으며, 노령에다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654년까지 중국 부관구장의 직책을 유지하였다. 디아스는 1659년 3월 4일 항주에서 사망하였다.

 

2) 디아스의 묘지

 

디아스는 항주 성벽 밖에 있는 대방정(大方井)이라는 곳에 묻혔다고 알려져 있다. 그곳에는 디아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었다는 것이다. 항주 성벽 밖에 있었다는 대방정이라는 곳에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묘지가 들어선 내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명말 청초, 항주는 유럽 선교사의 주요 활동 중심이었다. 항주에 온 선교사는 복음전파는 물론 저술활동도 하였고, 이곳에서 잠든 이들도 있다. 1622년 양정균(杨廷筠)이 항주 도원령(桃源岭) 아래 대방정(大方井)의 토지를 선교사 묘지로 헌납하였다. 이후 그의 둘째 아들이 전방원(田房原)을 선교사에게 증정하였고, 그의 첫째 아들이 다시 주변의 토지를 사들여 묘지 터로 만들었다. 1676년 이탈리아 선교사 프로스페르 인토르체타(Prosper Intorcetta, 殷铎泽, 1625~1696)가 묘지를 한층 더 확장하면서 항주 각처에 안장되어 있던 선교사들의 유골을 이곳으로 이장하고, 그곳에 작은 성당도 하나 세웠다. 이렇게 해서 대방정은 천주교 선교사들의 전용 묘지가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선교사 마르티노 마르티니(Martino Martini, 卫匡国, 1614~1661)가 이곳에 이장되었다. 항주 사람들은 보통 이 묘지를 ‘卫匡国墓’(마르티니 묘)라고 부른다.”13) 마르티니의 유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데이비드 먼젤로에 따르면, 1678년과 1679년의 예수회 연례 보고서에는 마르티니가 죽은 지 18년이 흘렀는데도 유해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즉 머리카락, 수염 그리고 손톱이 생시와 똑같았으며, 악취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주의 천주교 신자들이 매년 마르티니의 묘소를 방문하여 머리카락과 손톱을 손질했는데, 이 일은 1843년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일종의 신이한 기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선교사들은 부지불식간에 이 일화를 천주교의 가르침과 도교에서 주장하는 육체적 불멸성 함양을 연결해 영적 훈련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표지로 여겼다는 것이 먼젤로의 해석이다.14)

 

대방정 선교사 묘지에는 천주교 인사 20여 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그중에는 유럽인도 있고, 중국인도 있다.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먼저 다호샤(João da Rocha, 罗儒望, 1591~1623)는 포르투갈인으로 서광계에게 세례를 주었고, 항주에서 사망했다. 저작으로는 《천주성상약설(天主聖像略說)》이 있다. 또한 프랑스인 니콜라 트리고(Nicolas Trigault, 金尼阁, 1577~1628)는 1601년 처음 중국에 왔고, 1613년 유럽으로 돌아갔다가 1618년에 다시 중국에 왔다. 1628년에 항주에서 사망했다. 저작으로는 중국어 발음을 로마자로 정리한 《서유이목자》(西儒耳目资) 등이 있고, 마태오 리치가 선종하기 직전에 이탈리아어로 남긴 선교 활동 보고서 원고를 정리하여 라틴어로 출판했다. 라자레 카타네오(Lazare Cattaneo, 郭居静, 1560~1640)는 이탈리아인으로 1593년에 중국에 와서 마태오 리치를 도와서 상해와 항주에 천주교를 처음 전파했다. 1640년에 항주에서 사망했다. 저작은 《영성예주》(靈性詣主), 《회죄요기》(悔罪要記) 등이 있다. 인토르체타는 이탈리아인으로 1659년 중국에 왔고, 1671년에 로마로 갔다가 1674년에 다시 중국에 돌아왔다. 주로 항주에서 생활하였고, 항주 무림문(武林門) 안에 천주당을 세웠다. 대방정 묘지를 크게 확장하였고, 1696년 사망하였다. 마르티노 마르티니는 이탈리아인으로 1643년 중국에 왔고 유럽에 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왔다. 1661년 항주에서 사망했다. 유명한 중국학자이며 주요 저작은 《달단전기》(韃靼戰記), 《중국신지도집》(中国新地圖集) 등이 있다.

 

청나라 강희제 연간에 대방정 선교사 묘지는 여러 차례 화를 당했으나 크게 훼손되지는 않았다. 옹정제와 건륭제에 의해서 천주교가 금지되었던 시기에 이곳은 점점 황폐해졌고 심지어 매각될 뻔했다. 건륭 원년(1736)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묘지를 지켰던 중국인 신자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860년부터 1864년 사이에 태평천국 군대가 항주를 점령했을 때, 대방정 묘지가 크게 훼손되었다. 태평천국 군대가 물러간 후, 1874년에 사람들은 묘지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그리고 돌을 깎아서 문을 세우고 정면의 상단에 ‘천주성교수사지묘’(天主聖教修士之墓), 그리고 돌문의 안쪽에는 ‘아신육신지부활’(我信肉身之复活)이라고 새겼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대방정 묘지는 다시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묘지의 일부분이 인접한 맥주공장에 들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묘역 안에 조성되어 있던 수목을 목재로 베어냈으며, 이와 함께 선교사 유해도 파헤쳤다. 현재의 묘역에는 묘지는 사라지고 석조로 된 묘굴만이 남아 있다. 이것은 문화대혁명 기간이 지나간 후에 다시 건립된 것이다. 종전에 흩어졌던 유해가 다시 열 몇 기의 무덤에 새로 안치되었다. 따라서 파헤쳐진 유해들이 모두 섞여버려서 식별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유골함들에는 이름이 없다. 긴 세월의 풍파를 겪은 선교사 묘역의 입구에는 ‘위광국(卫匡国) 전교사(傳敎士) 기념원(紀念園)’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며, ‘절강성 성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항주시(杭州市) 서호구(西湖區) 서계로(西溪路) 549호에 위치한 대방정의 선교사 묘역 내에 디아스의 흔적이 남아 있다.15) 묘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입구의 좌우에 같은 크기와 형태의 비석이 한 개씩 서 있다. 높이 1m 가량의 작은 비석이며 아무런 장식도 없다. 비문은 해서체로 되어 있으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는 순서로 세로로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묘굴에 유해가 수습되어 있는 선교사들의 이름, 국적, 중국 도착시기, 사망한 해 등으로 되어 있다.16) 일부 글자는 훼손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우측에 있는 비석에는 제일 첫 줄에 ‘천학야소회태서수사탁덕품급제공지묘’(天學耶稣會泰西修士受鐸德品级諸公之墓)라고 되어 있고, 이어서 여섯 명의 인물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좌측 비석에는 네 명의 이름과 간단한 기록이 나온다. 그중에서 첫 번째로 새겨진 비문은 다음과 같다.

 

陽演西先生 諱瑪諾 聖名瑪努厄爾 (低亞斯) 玻耳杜嘉爾國人,

扵萬曆庚戌年入中国 扵顺治己亥年 □月□日 卒 享年 □十□歲17)

 

위에서 연서 선생이라고 한 것은 디아스의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휘는 마낙인데 세례명은 마누으엘 (디아스)라고 되어 있다. 포르투갈 사람으로서 만력 경술년에 중국으로 들어왔고, 순치 기해년 □월 □일에 사망했으며, 향년 □십□세였다고 새겨져 있다. 사망한 달과 날을 적어야 하는 부분, 그리고 사망할 당시의 나이를 적어야 하는 부분들이 빈 곳으로 남아 있다. 아마 정확한 날짜와 나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워 둔 것으로 보인다.

 

3) 저술활동

 

앞서 보았듯이 1635년 예수회 중국 부관구장 직책을 사임한 디아스는 중국인들에게 천주교를 알리는 데 필요한 서적들을 집필하였다. 17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개인 이력과 저술 목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루이 피스터(Louis Pfister)는 디아스의 저술로 11종의 한문 서적들을 상세하게 열거하였다.18) 먼저 한자 제목, 로마자 발음, 제목의 프랑스 번역을 나란히 적었다. 그런 뒤에 책의 판본들과 주요 내용을 소개하였다. 피스터가 디아스의 저술로 확인한 11종의 서적은 다음과 같다.

 

① 《聖經直解》 : 1636년 북경에서 14권으로 간행, 1642년 및 1790년 북경에서 8권으로 간행, 1842년 상해에서 8권으로 간행, 1866년 토산만(상해)에서 8권으로 재간행, 1915년 2권으로 간행.

 

② 《天主聖教 十誡 直詮》 : 1642년, 1659년, 1738년, 1798년 북경에서 2권으로 간행. 1798년 판본에는 구베아 주교의 출판 승인이 붙어 있다. 1915년 토산만에서 재간행.

 

③ 《代疑論》 : 1622년 1권으로 간행.

 

④ 《景教碑詮》 : 1644년 항주에서 1권으로 간행, 1878년 토산만에서 재간행.

 

⑤ 《聖若瑟行實》 : 1674년 1권으로 간행.

 

⑥ 《聖若瑟禱文》 : 초간 연도 미상

 

⑦ 《天神禱文》 : 초간 연도 미상

 

⑧ 《輕世金書》 : 1640년 북경에서 2권으로 간행, 1757년, 1800년, 1815년에 북경에서 4권으로 재간행, 1848년 상해에서, 1856년, 1910년, 1923년 토산만에서 재간행.

 

⑨ 《默想書考》 : 초간 연도 미상

 

⑩ 《避罪指南》 : 초간 연도 미상

 

⑪ 《天問略》 : 1615년 북경에서 1권으로 간행.

 

위에서 보듯이 디아스는 1615년에 간행한 《천문략》을 제외한 나머지 저술들을 1635년 이후에 간행하였다. 그리고 디아스의 저술은 서양 천문 역법을 소개하는 《천문략》을 빼면 모두 천주교 신앙생활과 관련한 서적들이다. 아마 디아스와 동료 선교사들이 문서 간행 사업에서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는 과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디아스는 한때 중국의 지식인들과 황실에서 인기를 끌었던 역법, 수학, 지리, 철학 등의 저술보다는 직접적으로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에게 보급할 목적을 띤 천주교 교리학습서나 신심생활 안내서를 지은 것 같다.

 

피스터는 그 외에도 앙리 코르디에가 작성한 유럽 선교사들의 한문 저서 목록에서 2권의 디아스 저작을 찾아내어 소개하였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천학거요》(天學擧要)와 《수진일과》(袖珍日課)가 디아스의 작품이라는 것이다.19) 실제로 《천학거요》를 확인한 결과, 자서(自序) 다음에 본문을 시작하면서 “극서(極西) 야소회사(耶蘇會士) 양마낙(陽瑪諾) 술(述)”이라고 명기하고 있으므로 디아스의 저작임이 확인된다. 그리고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 《수진일과》에도 “양마낙 동정(仝訂, 함께 바로 잡음)”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디아스의 단독 저술은 아니지만 중국인 신자들과 함께 지은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피스터에 의해서 확인된 디아스의 저술은 총 13종에 이른다.

 

디아스의 저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성경직해》이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서도 중국어에 대한 평가가 높다고 한다. 이 책은 1636년 북경에서 14권으로 출판되었고, 1642년과 1790년에 북경에서 중간되었다. 또한 《성경천해》(聖經淺解)라는 제명으로 관화본(官話本)이 간행된 적도 있다.20)

 

 

3. 《성경직해》의 번역 양상

 

한문본 《성경직해》에 나타난 편성 원리를 검토하기 위하여 본고에서 사용할 판본은 1790년 북경 무염시태(남당의 주보) 주교좌성당[始胎大堂]에서 14권으로 판각한 중간본(重刊本)이다. 이 판본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1984년에 10책의 영인본으로 간행한 《성경직 10冊》 속에 들어 있다. 앞서 루이 피스터는 1790년 판본이 8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영인본을 통하여 확인한 결과 1790년 판본도 초판본과 마찬가지로 14권으로 되어 있다. 이하에서는 《성경직해》에 실린 내용 가운데 서양 문헌의 한역이라는 상황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점들을 몇 가지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1) 새로운 용어들

 

《성경직해》는 사용하고 있는 한문 문장 자체가 수준 높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 외에도 구성 체계의 면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경직해》의 서두에 색인이 있다는 사실이다. 책의 발문에 이어서 주일과 주요 축일 목록이 나온 다음에 〈성경직해 잡사지목록(雜事之目錄)〉이라는 부분이 들어 있다. 이것은 주요 용어들의 색인집이다. 중국 문헌에서는 색인이라는 항목이 책 속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성경직해》의 간행에서 영향을 받아 책에 부록으로 색인을 넣는 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색인은 주일과 축일 목록 뒤에 있으며, 지면이 많아 특정 구절을 찾기 어려운 독자를 배려한 것이다. 어쩌면 유럽에서 간행된 성경 관련 해설서에서 특정 용어나 구절을 빨리 찾을 수 있도록 색인을 달아두는 관습을 가져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성경직해 잡사지목록(雜事之目錄)〉은 성경직해의 주요 용어 해설집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천주, 천주삼위일체, 천주성부, 천주성자, 천주성신, 오주(吾主), 오주지명, 성체, 제(祭), 십자성가, 성모, 천신, 마귀, 토신(土神), 영혼, 명사(明司), 의(意), 직리(直理), 사(思), 찰(察), 욕사(欲司), 주장(主張), 심(心), 사정(邪情), 구(懼), 육구(肉軀) 오사(五司) 삼교(三敎), 성교(聖敎), 성경(聖經), 성회(聖會), 주일, 첨례일, 종도(宗徒), 백탁라(伯鐸羅) 종도, 보록(葆祿) 성도, 성 약한(若翰) 종도, 성사(聖史), 성인, 치명자 등으로 시작하여 제일 마지막에 들어 있는 천당(天堂), 지옥(地獄)까지 총 144개의 용어를 나열하고 그 용어가 등장하는 장절을 표시한 다음에, 그 용어의 뜻을 풀어서 설명하였다. 여러 가지 뜻이 있을 경우에는 각각의 뜻이 등장하는 장절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전체 분량은 총 72장 142면이다. 그러니까 상당한 분량으로 천주교 주요 용어들을 나열하고 그 뜻을 소개하면서 관련 성경 구절들의 목록을 제시한 것이다.

 

디아스의 《성경직해》와 〈잡사지목록〉에 등장하는 용어 가운데에는 처음 만들어진 낱말들도 들어 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번역 과정에서 처음 만들어냈거나, 과거에 있던 용어에 새로운 뜻을 담아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세 단계의 시기로 구분하는 연구가 있다.21) 이에 따르면 미켈레 루지에리 시대(1582~1588), 마태오 리치 시대(1588~1610), 마태오 리치 이후 시대(1610~1644)의 세 시기가 있는데, 세 번째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이 마누엘 디아스와 조앙 다 로차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직해》에는 새로 등장하는 천주교 용어들이 상당수 있다고 하겠다. 이 용어들은 불가타 성경 및 성경 구절에 대한 주석들을 번역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舊詞新用 : 聖父, 聖子, 聖誕, 聖迹, 敎友, 罪惡

音譯新詞 : 基利斯多, 契利斯督, 둘 다 지금의 基督

意譯新詞 : 天主堂, 主日, 救世之主, 煉罪地獄(지금의 연옥), 敎皇, 榮福, 福音, 三位一體, 告解, 割損, 新敎, 信德, 望德, 愛德, 聖油, 聖佑, 聖殿, 聖歌, 聖爵, 聖會, 聖洗, 聖堂, 聖史

 

뿐만 아니라 《성경직해》의 주일과 축일 목록을 보면 삼왕내조, 봉재, 야소부활, 야소승천, 성신강림, 천주삼위일체, 야소건립성체 등 한자로 번역한 축일 명칭들이 다수 등장한다.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천주교 교리상의 주요 개념들과 불가타 성경을 번역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용어들은 《성경직해》를 통하여 중국 사회에 소개되었고,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을 것이다. 그중에는 교황, 영복, 복음, 삼위일체, 고해 등 오늘날에도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2) 성체(聖體)

 

천주교를 처음 접하는 중국인들에게 가장 낯선 교리는 아마 성체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멀쩡한 밀가루 빵과 포도주를 구세주 예수의 살과 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주교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성체라는 말을 전통적인 용어법으로 생각해보면 고귀한 군왕의 몸, 즉 옥체(玉體)와 같은 말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천주교 교리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면서 중국인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용어였을 성체에 대해서 《성경직해》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트리덴티노 전례력에 따르면 삼위일체 대축일22) 후 목요일을 성체축일로 기념하였다. 그날 미사에서는 두 부분의 성경 구절을 읽도록 되어 있었다. 첫째 독서는 불가타 성경의 서한에서 구절들을 뽑는다. 성체 축일의 독서는 코린토 1서 제11장 23절~29절이다. 그리고 둘째 독서는 복음서에서 선택하는데, 이날에는 요한복음서 제6장 56절부터 59절까지를 읽도록 되어 있었다. 《성경직해》의 해당 축일 독서 부분에는 똑같은 구절이 번역되어 있다.

 

經 聖若翰第六篇

維時耶穌謂衆曰 予體眞食 予血眞飮 領予體 飮予血 伊懷予 予懷伊 生活聖父命予 予生繇父 領予一然厥神生繇予 此乃自天降食 汝等父者向過曠野 皆食瑪納 而皆死亡 領予弗爾 咸存生命 以迨無窮23)

(그때에 야소께서 무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몸은 참된 먹을 것이요 내 피는 참된 마실 것이다. 내 몸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나를 품고 나도 그를 품으리니 살아계신 성부께서 나에게 명하신 것이다. 나는 성부로 말미암아 사니, 이와 같이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는 곧 하늘에서 내려온 먹을거리다. 너희 조상이 광야를 지나면서 모두 만나를 먹었지만 모두 죽었다. 나를 먹는 것은 이와 같지 않다. 생명을 보존하여 영원히 살 것이다.)

 

성체 축일의 독서 내용을 설명하면서 ‘予體眞食 予血眞飮’이라는 구절에 대해서 디아스는 주석을 붙였다. 《성경직해》에는 경(經)이라는 항목에서 성경 본문을 큰 글자로 찍고, 유교 경전의 소주(小注)처럼 작은 글자로 짧은 해설을 붙인다. 그 다음에는 잠(箴)이라는 항목을 따로 두어서 약간 긴 주석을 첨부하였다. 이 잠 속에는 구절 풀이와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바실리오 등 유명한 교부나 신학자들의 성경 해설들이 인용되어 있다. 그러므로 디아스의 독창성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아마 이 잠 항목이 아닐까 한다. 디아스는 성체에 관련한 성경 본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잠을 붙였다.

 

聖體 靈性之食飮也 比之肉軀 飮食多故

一 飮食充解飢渴 性理家曰 飢渴飮食之欲是也 內熱恒延如火 令內空乾 空則飢 乾則渴 食充內空 飮潤內乾 飢渴乃止 但食飮有眞假 繪味雖滿 不能充解飢渴 得眞者 飢渴則止 靈性亦然 惟所冀 或僞或眞 僞世物也 雖笈盛庫實 不能充解 惟聖體眞實飮食 充解靈性之飢渴焉.24)

(성체는 영성의 음식이다. 육신의 음식에 비유하는 연고는 여럿이다.

첫째. 음식은 배고픔을 채워주고 목마름을 풀어준다. 성리가가 말하는 배고프고 목마르면 음식을 탐한다는 것이 이 말이다. 속에 있는 열이 늘 끌어들이니 불과 같다. 그러면 속이 비고 마르게 된다. 비면 배고프고, 마르면 목마르다. 먹을 것은 속이 빈 것을 채우며, 마실 것은 속이 마르는 것을 적셔준다. 그러면 기갈이 멈춘다. 다만 음식에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다. 그림에 맛있는 것이 가득 차 있어도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채우고 풀어주지 못한다. 참된 것이라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멈추게 된다. 영성도 이러하다. 바라는 것에는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이 있다. 거짓된 세상 물건이 비록 상자에 가득하고 창고에 차 있어도 영성의 목마름을 충분히 풀어주지 못한다. 오직 성체만이 진실한 음식이어서 영성의 기갈을 채우고 풀어준다.)

 

위에서 보듯이 디아스는 성체를 영성(靈性)의 음식이라고 풀었다. 여기에 나오는 영성은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영성(spirituality)과는 다르다. 문맥으로 보면 영혼이라고 해야 할 부분에 영성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아마 디아스 당시에는 영혼과 영성을 섞어서 사용하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성리가의 말을 인용하였다. 성리가란 성리에 대해서 식견을 갖춘 사람을 뜻할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 불확실하다. 17세기 초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의 유학자들을 성리가라고 지칭한 것인지, 아니면 성(性, 이 말은 자연의 번역어로 쓰인 적이 있었다) 또는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주목할 것은 세물(世物)과 영성(靈性)의 구별이다. 당시는 물질/비물질, 물질적/영적 등의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성체의 영적인 측면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바로 세물(세상 사물=물질세계)과 영성(영혼=영적인 세계)이 아닌가 한다.

 

3) 종말과 심판

 

《성경직해》에 실린 성경 구절과 그 주석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으로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다. 즉 종말과 심판에 관한 내용이 실린 성경 구절이 어떻게 번역되었고, 또 이에 대해서 디아스는 어떤 주석을 붙였는가 하는 점이다. 17세기 중국인들에게 사람이 죽으면 살아 있을 때의 행실에 따라서 천당이나 지옥을 가게 된다는 주장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불교 교리를 통해서 유사한 주장들을 보고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익숙한 내용이었으리라고 본다. 또 예수라는 인물이 신의 아들이고 사람들을 구해주려고 지상에 내려왔다는 주장 역시도 이질성의 측면에서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고, 그들은 모두 예수에 의해서 선악 행실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주장은 어떠할까?

 

《성경직해》는 종말과 심판에 관한 성경 구절을 매우 특별한 축일에 배당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천주교 신자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축일이며, 날짜는 11월 2일이다.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위령의 날이지만, 《성경직해》에는 ‘推思聖敎先人瞻禮’라고 나온다. 혹은 중국에서 나온 천주교 문헌에서는 ‘追思已亡’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트리덴티노 전례력에서 위령의 날은 11월 2일이며, 이날의 성경 독서는 코린토 1서 제15장 51~57절과 요한복음서 제5장 25~29절이다. 《성경직해》에는 요한복음서의 구절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經 聖若翰第五篇

維時耶穌語衆曰 確與爾云 有時死者聆天主子之音 命穌而穌 是時已至 聖父本有生活 與子同有生活 因子降世成人 父畁判世權 爾勿異予言 定有定時 瘗者聆天主子之聲 善者復活以享常生 惡者復活以受永苦25)

(그때에 야소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천주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나라고 명령하니 깨어나는 때가 온다. 이미 그때에 이르렀다. 성부께서는 원래 생명을 가지고 계시고, 아들도 마찬가지로 생명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들을 내려 보내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성부께서 세상을 심판하는 권한도 주셨다. 너희는 내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정해진 때가 되면 무덤에 있는 자들이 천주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선한 이들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악한 자들은 부활하여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

 

한편 디아스는 《성경직해》에서 위령의 날에 배당된 성경 구절을 제시하기 전에 위령의 날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을 삽입하였다.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실려 있다. 특히 영혼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이것을 보면 앞서 성체에 대한 설명에서 사용한 영성은 영혼과는 다른 의미를 담은 용어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천당, 지옥과 더불어 연처라는 표현이 나온다. 연옥과 같은 의미를 담은 용어이겠지만 《성경직해》는 아직 연옥이라는 고정된 용어가 정립되기 이전에 나왔기 때문인지 연옥이 아니라 연처라고 하였다.

 

聖敎先人瞻禮之理

須信人人各有靈魂 各靈恒存不滅 後世有天堂以賞 地獄以罰 煉處以補也 敎友倘勿急于行 獨恃其信 信不及 其恃必負也.26)

(마땅히 믿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각자 영혼을 가지고 있다. 각 영혼은 영원하며 불멸하다. 내세에 천당이 상으로, 지옥이 벌로 주어진다. 연옥은 기워서 갚는 곳이다. 교우들은 혹시라도 급하게 행동하지 말고 오로지 이 믿음을 지켜라. 믿음에 이르지 못하면 그것은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된다.)

 

4) 사악한 영적 무리들

 

신약성경에서 예수와 대적한 영적인 존재들을 지칭하는 낱말들이 《성경직해》에서는 어떤 한자어로 번역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마귀, 악마, 귀신 등과 같은 한자어가 천주교 교리의 맥락 속으로 끌려 들어가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부분을 보여주는 대목은 《성경직해》의 사순 제3주일 성경 독서이다. 복음서로는 루카 복음서 제 11장 14~28절이 여기에 배당되어 있다. 그중에서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經 聖路加第十一篇

維時 耶穌命魔出人 渠瘖啞者 魔出瘖啞者言 衆愕 惟若而人曰 倚白爾責布 諸魔魁驅魔27)

(그때에 야소께서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니 벙어리 마귀였다. 마귀가 나가자 벙어리가 말을 하였다. 군중이 놀랐다. 몇 사람이 말했다. 여러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에 의지하여 마귀를 몰아낸 것이다.)

 

먼저 성경 본문에서 사람이나 지명 등 고유명사를 번역하지 않고 그 음을 그대로 옮겨와서 한자로 적을 때에는 그 글자의 오른쪽에 줄을 그어서 표시하였다. 그래서 루카나 예수와 같은 이름 옆에 줄을 그었다. 또한 불가타 성경 본문에 다이모니움(daemonium)이라고 나오는 영적 존재를 마(魔)라고 번역하였다. 다만 거(渠)에 소주를 붙이면서 ‘卽 魔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마와 마귀를 섞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은 고유명사라고 보고 그 음을 옮겨와서 한자로 적었다. 한편 ‘베엘제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소주를 붙였다.

 

當時 近國 不知眞傳 不知眞主 土神甚多 其間有一 稱爲白爾責布 譯言蠅神

或云 神堂內 常殺多犧 以奉斯神 蒼蠅多至啄犧 謂之蠅神故

或云 當時 國患于蒼蠅 國人立社 祝禳蠅災 謂之蠅神故

後人借名以名魔鬼之首 今所名露祭弗爾是也.28)

(그 당시 가까운 나라들은 참된 가르침과 참된 주인을 몰라서 토신(土神)이 무척 많았다. 그중에 하나가 있었으니 베엘제불이라고 하였다. 번역하여 말하면 파리 귀신이다. 혹자는 말한다. 신당 안에서 늘 희생물을 많이 죽여 이 신에게 바쳤다. 그때 파리가 많이 몰려와서 희생물을 쪼았다. 그래서 파리 귀신이라고 한다. 또는 이런 말도 있다. 당시 나라에 파리가 많아서 근심하였는데 사당을 세워서 파리 재앙을 피하기를 빌었다. 훗날 사람들이 그 이름을 빌려 마귀 괴수의 이름으로 삼았다. 요즘 이름으로는 루시퍼가 그것이다.)

 

《성경직해》에서 마, 마귀, 귀, 귀신, 악마 등 종교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은 개념이나 대상물을 가리키는 번역어의 사용 방식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용어들에는 번역어로 선택되기 이전에 한자 문화권 내에서 갖는 의미들이 있었을 것이며, 이 의미망과 천주교 교리의 의미망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귀신과 같은 개념은 성리학에서 제사와 흠향의 원리와도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의 일면적인 이해를 넘어서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지칭어들의 변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여지가 많을 것이다.

 

5) 동서 역법의 대조

 

《성경직해》의 성경 번역과 주석 양상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다룰 지점은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 본문에 대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다. 그 주석에 등장하는 내용이며, 디아스의 중국 문헌에 대한 이해도가 반영된 부분이다. 이것은 사순 전 삼주일에 읽게 되어 있는 복음 내용에 대한 주석에 나온다. 트리덴티노 전례력으로 사순 전 삼주일은 부활 대축일 전 70일이 되는 날이어서 칠순주일(七旬主日, Septuagesima)이라고도 부른다.

 

사순 전 삼주일의 복음 독서는 마태오 복음서 제20장 1절~16절이다. 그 내용은 포도밭 일꾼들에게 하루 삯을 치르는 밭주인의 비유이다. 이른 아침[卯時]에 만난 일꾼, 아침 9시[巳時 初]에 만난 일꾼, 12시[正午]와 오후 3시[申時 初]에 만난 일꾼 그리고 오후 5시[酉時 初]에 만난 일꾼들에게 일을 시키면서 모두 동일한 하루 삯을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제쳐두자.

 

《성경직해》에서는 이 구절에 주석을 달면서 일꾼들이 일한 하루를 천지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이 세상의 정해진 시간을 가리키는 비유라고 설명한다.29) 즉 묘시는 아담부터 노아 홍수 때까지의 첫째 시간인데 약 1,056년이라고 한다. 사시 초는 노아 홍수부터 아브라함 때까지의 둘째 시간으로 대략 922년이다. 그런데 이 연도를 중국의 역사와 대비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즉 둘째 시간은 중국 역법으로 따지면 하나라 괴왕(槐王) 17년 정축년이라는 것이다. 정오는 아브라함부터 모세까지의 셋째 시간으로 대략 425년이고 상나라 태술(太戌) 39년 임오년이라고 한다. 신시 초는 모세부터 예수 강생까지의 넷째 시간으로 대략 1,597년이고 한나라 애제(哀帝) 원수(元壽) 2년 경신년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유시 초에서 저녁까지의 다섯째 시간은 천주 강생에서 종말까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디아스는 어떻게 이런 역법 비교를 할 수 있었을까? 그가 참고한 것은 무엇일까? 《사기》(史記), 《통감》(通鑑), 《죽서기년》(竹書紀年) 등 다양한 중국 역사서가 떠오른다.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디아스를 비롯하여 17세기 초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읽었던 중국 역사서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이것은 선교사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중국인도 아담의 자손이라면 중국인의 역사도 성경의 역사 속에서 설명이 가능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성경의 연대기와 중국 역사의 연대기를 맞추어 대조하는 작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우왕의 치수 신화와 노아의 홍수 신화가 유사하다는 점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본고의 주된 분석대상인 《성경직해》에 나타나 있듯이 히브리 성경의 연대기와 고대 중국의 연대기를 대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4. 결론

 

본고는 17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마누엘 디아스 신부의 불가타 성경 번역본 《성경직해》의 특성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 디아스의 간략한 생애와 선교 활동 및 저술 활동을 우선적으로 살펴보았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그의 유해가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항주의 대방정 선교사 묘역을 직접 방문하여 묘비를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아울러 디아스가 간행한 한문 서적들이 모두 몇 종인지, 그리고 어떤 내용들을 다룬 것인지도 밝혔다. 중국 본토에 상륙한 지 15년 만에 간행한 《천문략》을 제외하면 모두 천주교 신앙 서적들이었다. 디아스의 저술 활동과 관련하여 아직 해명되지 못하고 남은 점은 중국인 조력자들이 누구였느냐 하는 문제이다. 아무리 디아스가 중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한문으로 책을 짓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사리에 맞다. 그렇다면 지식인에 속하는 중국인 천주교 신자의 도움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디아스 신부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한문 서적들을 편찬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며 앞으로의 연구 과제이다.

 

디아스의 생애와 저술에 대해서 살펴본 다음에, 그의 최대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성경직해》에 담겨 있는 번역 양상과 그 특징을 다루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적 활동을 통하여 새롭게 탄생한 개념과 용어들이 무엇이었는지, 중국인 신자들에게 어려운 문제로 다가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교리상의 요점들이 어떻게 서술되고 있는지, 그리고 중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디아스의 지식과 이해가 투영되어 있는 지점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을 서술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성경직해》는 예수회의 중국 선교가 정착 단계를 지나서 본격적으로 개화하는 시기에 성립한 것으로, 천주교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새로운 개념이나 용어가 만들어지고, 중국인들의 사유와 관습에 적합한 형태로 교리 내용을 다듬은 흔적을 보여주며, 중국에 관하여 습득한 지식들과 서구사회의 종교적 및 사상적 원천들을 조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담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성경직해》의 복음 해설 부분인 ‘잠’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성경직해》에 관한 연구가 해명해야 할 과제들은 여전히 산적해 있다. 그 가운데에서 두 가지 사항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는 《성경직해》의 저본이 되는 유럽 문헌에 대한 탐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성경직해》가 지닌 번역상의 특징을 충실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서구어에서 중국어로 번역된 문헌과 중국어에서 서구어로 번역된 문헌을 교차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먼저 《성경직해》의 저본이 되는 유럽 문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경’ 부분은 불가타 성경의 한문 번역이기 때문에 별도의 유럽 저본이 존재할 까닭이 없다. 《로마 미사경본》에 지정되어 있는 주일과 주요 축일에 읽어야 할 복음서 구절들을 정확하게 한문으로 옮기면 되는 일이다. 물론 주요 축일들이 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시대에 따라서 새로운 축일이 지정되기도 하고, 또 옛 축일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로마 전례력에 들어 있다고 해도 대축일이 아닌 경우에는 지역 교회나 수도회에 따라서 주요 축일들을 선별하여 지내는 일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경직해》의 판본에 따라서 어떤 축일의 복음 독서가 실려 있는지를 살피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30)

 

하지만 저본 탐구에서 가장 큰 과제는 《성경직해》의 ‘잠’ 부분이 어디서 왔냐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디아스가 《성경직해》를 지을 때에 같은 포르투갈 예수회원이었던 세바스티앙 바라다스(Sebastião Barradas, 1542~1615)가 1606년부터 1612년 사이에 프랑스 리옹에서 간행한 사복음서 공관 해설서31)를 주로 참고하였다고 주장한다. 로마 예수회 문서고에 소장된 한문 서적들의 카탈로그를 만든 예수회원 알버트 찬(Albert Chan)은 디아스의 《성경직해》가 바라다스의 저작 제3판의 일부를 번역한 것이며, 바라다스의 저작을 중국에 가져온 것은 니콜라 트리고였을 것이라고 하였다.32) 하지만 바라다스 저작이 《성경직해》의 저본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도 있다.

 

디아스의 저작과 바라다스의 저작을 비교한 니콜라 스텐데르트는 다섯 가지 점에서 두 저작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바라다스의 저작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따라서 연대기 순서로 성경 구절을 배열하였지만, 디아스의 저작은 주일 독서 체제의 순서로 성경 구절을 배치하였다. 둘째, 바라다스의 저작이 디아스의 저작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자세하다. 셋째, 바라다스의 저작에서 인용된 성경의 각 절들은 디아스의 저작 속에 들어 있는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넷째, 디아스의 저작과 달리 바라다스의 저작은 복음 독서의 인용 구절 속에 짧은 해설이 들어 있지 않다. 다섯째, 디아스와 바라다스는 모두 교부 문헌들을 폭넓게 인용하고 있지만, 인용 부분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바라다스가 참고한 문헌이 디아스의 저작에는 나오지 않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33) 스텐데르트의 비교 분석을 신뢰한다면 디아스가 《성경직해》를 지을 때 실제로 바라다스의 저작을 참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게 해명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직해》의 해설 부분이 어떤 유럽 문헌을 저본으로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34)

 

두 번째 과제와 관련해서 일화를 한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35) 로마 국립중앙 도서관에는 사서(四書)의 라틴어 초역본이 보관되어 있다. 그 속에는 《대학》, 《중용》, 《논어》 그리고 《맹자》의 첫째 장 번역이 들어 있다. 이 초고의 저자는 누구인가? 서명을 한 미켈레 루지에리(Michele Ruggieri)가 필자이며, 실제 번역자인가? 아니면 마태오 리치(Matteo Ricci)의 번역 원고를 필사한 것인가? 이것은 하나의 논쟁을 이루었다. 사실 중국 경전의 첫 유럽어 번역본인 만큼 그 저자가 누구인지는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마태오 리치가 유럽에 보낸 중국 선교 보고서의 원본이 발견되자 이를 판독하고 주석을 첨가하여 방대한 리치 저작집을 간행한 바 있던 파스쿠알레 델리아(Pasquale D’Elia)는 1935년에 리치가 번역자이고, 리치가 자신의 원고를 루지에리에게 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가설의 토대는 두 가지였다. 첫째, 날짜의 일치이다. 이탈리아로 돌아갔던 루지에리는 《대학》, 《중용》, 《논어》를 1591년 11월부터 1592년 8월까지 번역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리치가 중국에서 번역을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그래서 리치가 루지에리에게 보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루지에리의 중국어 실력은 그런 과업을 이해할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서의 초역본은 중국에서 리치가 만들었고, 그 뒤에 이를 건네받은 루지에리가 로마에서 필사했다는 것이다.

 

델리아는 나중에 입장을 바꾸었다. 루지에리가 중국에 있을 때 사서를 번역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591년부터 1592년에 로마에서 그것을 다듬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리치의 번역과는 상관없이 루지에리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번역이라는 점을 강조되었다. 루지에리는 그것을 예수회 총장 아콰비바에게 보여주고 출판할 의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596년 발리냐뇨는 루지에리의 중국어 실력을 신뢰하지 않아서 출판을 중단하라고 아콰비바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1998년 이탈리아 학자 프란체스코 다렐리(Francesco D’Arelli)가 다른 주장을 제시하였다. 루지에리의 번역이라고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첫째, 포세비노가 출판한 루지에리의 천주교 교리서에는 사서 가운데 《대학》의 초반부 번역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도서관 소장 초고와 일치한다. 그러나 포세비노는 루지에리 자신이 번역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루지에리 자신이 사서를 번역했다는 언급도 없다. 둘째, 초고에서 루지에리는 자신이 《대학》, 《중용》, 《논어》 번역을 모은 사람(collector)이라고 말했다. 나아가서 다렐리는 리치가 사서를 번역했음이 분명한다고 주장한다. 리치 편지를 분석한 다렐리는 리치가 1593년 2월부터 1594년 11월까지 사서를 번역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1584년부터 리치는 중국인 학자와 사서를 읽기 시작했었다. 결국 다렐리의 주장은 리치가 초기 번역 초고를 완성하여 루지에리에게 보냈고, 루지에리가 그것을 1591년부터 1592년 사이에 필사했다는 것이다.

 

다렐리의 주장은 확증되지 않았다. 루지에리의 중국어 실력이 충분히 좋지 않았다는 가설도 틀린 것으로 판명 났다. 게다가 다렐리는 리치가 1593년 이전에 사서 번역에 착수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단지 공부하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결국 논쟁을 종결시킨 최종적인 주장은 사서의 초고 번역자는 리치가 아니라 루지에리라는 것이다. 결정적인 증거는 ‘귀신’(鬼神) 개념이었다. 초고에는 《논어》에 나오는 귀신이 악마적인 힘(diabolic force)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귀신은 우상이나 미신 개념과 동일한 것이 된다. 그러나 리치는 《논어》의 구절을 설명하면서 귀신을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로 묘사했다. 악마적인 힘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리치의 개념 체계에서 상제는 데우스(Deus)에 상응하고, 귀신은 엔젤(Angel)에 상응한다. 따라서 로마에 보관된 초고는 귀신을 악마적인 힘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아, 리치의 것이 아니라 루지에리의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로써 긴 논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로마 국립 중앙 도서관에 소장된 중국 경전 초고의 번역자가 마태오 리치인가 아니면 미켈레 루지에리인가 하는 논쟁을 소개한 까닭은 번역 문헌의 교차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성경직해》를 번역할 때 디아스는 디아볼루스(Diabolus)를 마(魔) 또는 마귀(魔鬼)라고 하였다. 그러면 귀신이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 사용하였을까? 이처럼 《성경직해》의 번역어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정반대의 번역서를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즉 예수회 선교사들이 유교 경전들을 라틴어나 기타 유럽어로 번역한 것들과 대조하는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 인토르체타의 《중국의 철학자 공자》(1687), 프랑수아 노엘(François Noël)의 사서(四書) 번역(1784~1786) 등을 조사하여 《성경직해》의 용어들과 대조표를 만들어 본다면 17세기 중국을 무대로 하여 벌어졌던 동서양 사이의 번역과 개념 역사를 다시 조명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작업 역시 동서양의 교차−문화적 텍스트로서 《성경직해》를 연구할 때 반드시 요청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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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화선, 〈《셩경직》의 연구〉, 《최석우 신부 화갑 기념 한국교회사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조한건, 〈《셩경직광익󰡕 연구〉, 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 이승희, 〈《셩경직광익》에 대한 국어학적 고찰〉, 《교회사연구》 41,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 ; 박순란, 〈《셩경직》의 형성 과정과 텍스트 수정 양상에 대한 국어학적 연구〉,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5.

 

2) 서원모, 곽문석, 〈17세기 초 예수회 선교사의 복음서 한문 번역 연구〉, 《장신논단》 49(2), 2017.

 

3) 康志杰, “一部由欧洲传教士编纂的索引 : 评阳玛诺的 《圣经直解杂事之目录》”, 《辞书研究》, 2000 ; 郑海娟, “文白变迁 : 从《圣经直解》到《古新圣经》”, 《华文文学》, 2000.

 

4) 마누엘 디아스 신부의 또 다른 저서 《천문략》(天文略)에 대한 연구들은 찾아볼 수 있다. Henrique Leitão, “The Contents and Context of Manuel Dias’ Tianwenlüe”, and Rui Magone, “The Textual Tradition of Manuel Dias’ Tianwenlüe”, in Luís Saraiva and Catherine Jami, eds., The Jesuits, the Padroado and East Asian Science(1552-1773), World Scientific Publishing Company, 2008, pp. 99~138. 그러나 《성경직해》에 관해서는 독립된 연구를 찾기 어렵다. 다만 니콜라 스탠데르트가 편집한 중국 천주교 핸드북에 《성경직해》에 관한 간단한 언급이 실려 있다. Nicolas Standaert, ed., Handbook of Christianity in China, Volume One : 635~1800, Leiden : Brill, 2001, pp. 623~624.

 

5) 王碩丰, 《早期漢語 《聖經》 對勘硏究》, 北京 :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17.

 

6) 조현범, 〈유럽 천주교의 불가타 성경 사용 양상 : 트렌토 공의회 이후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종교문화비평》 32,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7, 265~271쪽.

 

7) 예수회 선교사 마누엘 디아스는 문헌에 따라서 엠마누엘 디아스(Emmanuel Diaz)로 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마누엘 디아스(Manuel Dias)로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본고는 마누엘 디아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8) 조지 듄, 《거인의 시대 : 명 말 중국 예수회 이야기》,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6, 83쪽.

9) Henrique Leitão, op. cit., p. 99.

 

10) 디아스의 중국 선교 활동에 관해서는 다음의 자료를 참고할 수 있다. Louis Pfister,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ographiques sur les Jésuites de l’Ancienne Mission de Chine, Tome I, Chang-Hai : Imprimerie de la Mission Catholique, 1932, pp. 106~108 ; 方豪, 《中國天主教史人物傳》, 北京 : 宗敎文化出版社, 2007, 122~123쪽.

 

11) 1616년 남경에서 벌어졌던 천주교 박해 사건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조지 듄, 앞의 책, 210~238쪽.

12) Henrique Leitão, op. cit., p. 102.

13) http://www.vccoo.com/v/6d12m3?source=rss

 

14) David Mungello, The Great Encounter of China and the West, 1500~1800, New York :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2013, pp. 60~61.

 

15) 필자는 2018년 2월 6일 항주의 ‘위광국 전교사 기념원’을 직접 방문하여 디아스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을 확인하였다.

16) 沈坚, 〈卫匡国墓墓地的演变〉, 《杭州文博》, 2014 (1), 197쪽.

17) □로 표시한 부분은 글을 새기지 않고 비워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8) Louis Pfister, op. cit., pp. 109~111.

 

19) Henri Cordier, L’Imprimerie Sino-Européenne en Chine: Bibliographie des Ouvrages Publiés en chine par les Européens au XVIIe et au XVIIIe Siècle, Paris : Imprimerie Nationale, 1901, pp. 22~23.

 

20) 塩山 正純, 〈カソリックによる聖書抄訳 ディアスの《聖経直解》〉, 《文明》 21(20), 2008, 58쪽.

21) 王銘宇, 〈明末天主敎文獻所見漢語基督敎詞汇考述〉, 《漢語學報》 44, 2013, 59쪽.

22) 성령 강림 대축일 후 첫 주일을 가리킨다.

23) 《성경직해》 권지구, 육십일~육십이.

24) 《성경직해》 권지구, 육십이.

25) 《성경직해》 권십사, 팔~구.

26) 《성경직해》 권십사, 칠.

27) 《성경직해》 권지사, 사십삼.

28) 《성경직해》 권지사, 사십삼(뒷면).

29) 《성경직해》 권지삼, 이(뒷면).

 

30) 조한건은 한문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에 없는 축일들이 한글본 《셩경직광익》에 들어 있는 경우를 지적한 바 있다. 조한건, 앞의 글, 43쪽. 따라서 중국에서 《성경직해》를 간행할 때 시대별 판본에 따라서 유사한 현상이 없었는지를 입증하는 것도 문헌학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31) 책의 원래 제목과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Sebastião Barradas, Commentariorum in Concordiam et Historiam Quatuor Evangelistarum, Lugduni(Lyon): Sumptibus Horatij Cardon, 1610.

 

32) Albert Chan, Chinese Books and Documents in the Jesuit Archives in Rome, A Descriptive Catalogue, Japonica-Sinica Ⅰ-Ⅳ, New York : M.E. Charpe, 2002, p. 123.

 

33) Nicolas Standaert, “The Bible in Early Seventeenth-Century China,” in Irene Eber, et. al., eds., Bible in Modern China : The Literary and Intellectual Impact, London : Routledge, 2016, pp. 44~45.

 

34) 앞서 본론에서 디아스 신부가 히브리 성경의 연대기와 중국 연대기를 대비한 부분을 소개하였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성경직해》 자체는 동서양 문헌이 모두 포괄되어 있는 대단히 복합적인 텍스트이며, 그 저본을 수색하는 작업은 그만큼 더 지난한 과제가 될 것임을 직감할 수 있다.

 

35) Thierry Meynard, The Jesuit Reading of Confucius, Leiden : Brill, 2015, pp. 4~6.

 

* 이 논문은 2016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6S1A5A8018678).

 

[교회사 연구 제52집, 2018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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