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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장발의 김대건 신부 초상화 연구 - 1920년 作 초상화 두 점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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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14 ㅣ No.1531

장발의 ‘김대건 신부 초상화’ 연구

- 1920년 作 초상화 두 점을 중심으로 -

 

 

국문 초록

 

이 논문은 새로 발견된 한국 가톨릭 성화의 선구자이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대학장을 지낸 우석(雨石) 장발(張勃, 루도비코, 1901~2001)이 그린 ‘김대건 신부 초상화’ 연구이다. 장발이 그린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는 한국 가톨릭 최초의 사제이다. 그는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25년 로마 바티칸 대성전에서 한국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되었으며,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성상(聖像), 성화(聖畫), 건축과 같은 종교성이 드러나는 시각적 이미지들을 복음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으며, 성경과 교리에 들어 있는 비가시적인(invisible) 본성을 가시적인(visible) 것으로 드러나게 하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왔다. 하지만 한국 가톨릭교회는 오랜 박해로 회화와 조각 등 그리스도교 미술이 자리잡고 발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초기 박해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 이희영(1756~1801)이 거론되지만, 그가 그린 성화는 남아 있지는 않다. 따라서 1920년에 장발이 그린 두 점의 초상화는 현전하는 성인화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장발은 동경미술학교 입학을 앞둔 19세의 나이인 1920년에 한국 가톨릭교회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초상을 두 점 그렸다. 하지만 최근까지 1920년에 그린 작품은 한 점이라고 알려져 왔다. 이에 본 논고에서는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은, ‘장발이 1920년에 두 점의 김대건 신부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 가운데 한 점이 이번에 ‘새로 찾은 김대건 신부 초상화’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김대건 신부 초상화 관련 문헌을 검토하는 동시에,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가 소장한 1920년대에 촬영된 유리건판을 통해 새로 발견된 김대건 신부 초상화의 제작 시기를 규명하고, 장발이 그린 김대건 신부 초상화의 조형적 표현 양식과 화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머리말

 

한국 가톨릭 성화(聖畫)의 선구자이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대학장을 지낸 우석(雨石) 장발(張勃, 루도비코, 1901~2001)이 그린 ‘김대건 신부 초상화’가 발견되었다(도. 1).1) 작품의 크기는 129.7×97.5cm이며 캔버스에 유화로 그렸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사제이다. 그는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9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해로 나갔다가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어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25년 로마 바티칸 대성전에서 한국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되었으며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2021년 김대건 신부는 인류애와 평등사상의 실천과 「조선전도」를 제작해 유럽 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0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희년으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2) 용서와 구원의 희년에 장발이 그린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를 새로 찾게 된 것은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성상(聖像), 성화, 건축과 같은 종교성이 드러나는 시각적 이미지들을 복음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으며, 성경과 교리에 들어 있는 비가시적인(invisible) 본성을 가시적인(visible) 것으로 드러나게 하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왔다. 이는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784년 한국에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설립된 이후 100여 년간의 오랜 박해로 한국 가톨릭교회 초기에는 회화와 조각 등 그리스도교 미술이 자리잡고 발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초기 박해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 「견도」, 「사슴도」, 「누각산수도」로 유명한 이희영(루카, 1756~1801)이 거론되지만, 그가 그린 성화는 남아 있지는 않다.3)

 

따라서 1920년에 장발이 그린 두 점의 초상화는 현전하는 성인화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화가이자 교육자로 한국 가톨릭 미술이 성장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장발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첫 사제이자 순교성인인 김대건 신부 초상을 여러 차례 그렸다. 지금까지 장발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김대건 신부 초상은 5점이었다. 1920년에 한 점, 김대건 신부가 시복된 이후인 1928년에서 1929년 사이에 한 점, 1987년에 한 점, 1994년에 한 점을 그렸다. 그리고 1925년 이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드로잉이 한 점 있다.4) 그런데 이번에 새로 김대건 신부 초상을 찾았으니 장발이 그린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는 총 6점이 된다. 장발은 동경미술학교 입학을 앞둔 19세의 나이인 1920년에 한국 가톨릭교회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초상을 두 점 그렸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1920년에 그린 작품은 한 점이라고 알려져 왔다.

 

이에 본 논고에서는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은, ‘장발이 1920년에 두 점의 김대건 신부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우선 밝히겠다. 이와 더불어 ‘새로 찾은 김대건 신부 초상화’(도. 1)가 용산신학교 교장 기낭(Pierre Guinand, 陳普安, 1872~1944) 신부의 사제서품 은경축(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며, 익히 알려진 초상화(도. 2)는 장발이 뮈텔 주교의 주교 서품 30주년을 기념하여 그렸다는 사실을 문헌과 사진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뮈텔 주교 일기(Journal de Mgr. Mutel)』, 『바티칸 포교 박람회: 세상을 보는 창(The Vatican Mission Exposition: a window on the world)』, 『타벨라(Tabella)』, 네덜란드에서 발행한 「선교 소식지」 등에 기록된 김대건 신부 초상화 관련 문헌을 검토하는 동시에, 1920년대에 촬영된 유리건판5)을 통해 새로 발견한 김대건 신부 초상화의 제작 시기를 규명하고, 장발이 그린 김대건 신부 초상화의 조형적 표현 양식과 화법을 살펴보겠다.

 

장발은 일찍이 종교 미술을 ‘천주를 위한 미술(Art pour Dieu)’과 ‘사람을 위한 미술(Art pour l’homme)’로 분류하였으며, “‘천주를 위한 미술’은 이상(理想)과 교리(敎理)를 발표하여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이고, ‘사람을 위한 미술’은 보는 자의 마음보다도 관능(官能)을 만족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6) 즉 전자의 경우 종교적 교리를 조형적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 보임으로써 보는 이에게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 보는 이의 오감을 자극하여 예술적 쾌감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보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장발은 그가 생각하는 종교 미술의 가치를 현대에 있어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이론(Beuron) 예술로 보았다. “표현된 성상의 단정하고 거룩한 점에 있어서, 고아한 미술적 가치에 있어서 보이론처럼 교회 의사에 합치되는 미술은 없다.”고까지 표현하였다.7) 그의 종교 미술에 대한 열정과 의지는 ‘김대건 신부’ 외에도 ‘김효주 골롬바와 아녜스’, ‘성 정하상 가족’, ‘성모자’, ‘예수 그리스도’, ‘순교도’ 등 다수의 성화를 통해 드러난다.

 

 

2. 장발의 생애

 

우석(雨石) 장발(張勃, 루도비코, 1901~2001)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대학장이자 한국 성화(聖畫)의 개척자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 미국 주재 대사이자 제4대 부통령, 제2·7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치인 운석(雲石) 장면(張勉, 요한, 1899~1966)의 동생이다. 장발은 1901년 4월 13일에 인천부(仁川府) 제물포 고잔동(古棧洞)에서 아버지 장기빈(張箕彬, 레오, 1874~1959)과 어머니 황 루시아(1878~1954)의 3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한 지 3일 후인 4월 16일에 인천 답동 성당에서 홍병철(洪秉喆, 루카, 1874~1913)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의 대부(代父) 김교원(金敎源, 요한)은 1909년에 강준(姜準, 바오로, ?~1933)과 함께 인천박문학교를 설립한 인물이다.8)

 

 

 

장발은 태어난 이후 줄곧 가톨릭 집안에서 신앙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부친 장기빈은 1896년에 세례를 받았으며 외가는 가톨릭 신앙을 대대로 믿는 구교(舊敎) 집안이었다. 장발은 서울 휘문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미술교사로 있던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에게 미술교육을 받으며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휘문학교 시절인 1916년에는 서울의 보성학교, 중앙학교, 오성학교 등이 함께 개최한 연합 학생 서화전람회에서 연필화로 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다.9) 당시 심사위원은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1920), 심전(心筌) 안중식(安中植, 1861~1919), 우향(又香) 정대유(丁大有, 1852~1927)였으며, 서화전람회는 12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경성부 교동 오성학교에서 열렸다.10)

 

장발은 스승 고희동이 설립한 고려화회(高麗畫會)의 창립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에 창립된 고려화회는 장발, 강진구(姜振九), 김창섭(金昌燮), 안석주(安碩柱), 이제창(李濟昶) 등이 시작하였으며 매주 토요일 1시에 종로 중앙청년회에서 그림을 그렸다. 고려화회 고문 겸 선생은 고희동과 야마모토 바이가이(山本梅涯), 타카기 하이스이(高木背水), 마루노 유타카(丸野豊) 등 4명이었다.11)

 

고교 졸업 후 장발은 1919년 9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으나 1922년 9월에 중퇴하였다. 바로 그해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국립디자인학교(National Academy of Design)에 입학하여 1923년까지 수업을 들었다. 뉴욕 국립디자인학교는 정식 학교가 아니라 영국 왕립미술원(Royal Academy of Art)처럼 일종의 명예단체 기구였으며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회화와 드로잉을 가르쳤다. 장발도 이곳에서 실기 레슨을 받으며 입학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1925년 6월까지 동 대학교 사범대학 내 실용미술학부(School of Practical Arts)에서 미술 실기와 19세기 역사 등의 이론 과목을 수강하며 컬럼비아대학 진학을 준비하였다.12)

 

장발은 1923년 9월 컬럼비아대학에 입학하였으나 1925년 6월 학교를 그만두고 바티칸으로 떠났다.13) 서울 대목구의 뮈텔 주교가 장발과 그의 형 장면을 조선천주교회의 평신도 대표로 ‘조선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참가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14) 그들은 6월 30일에 로마에 도착하여 조선에서 온 뮈텔 주교와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1868~1939) 신부 그리고 당시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시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로 온 기낭 신부와 함께 7월 5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역사적인 현장에서 시복식을 관람하였다.15)

 

“…복자들의 상본도 대소 수만장을 인쇄하였으며 白, 靑, 紅 등의 입전권 수만 장을 인쇄하여 무료 분급하는데 청구하러 오는 이가 매일 답지하여 당가 사무실이 대단 분망하며 사무원들은 밤을 새우면서 시무하더라. 白색 1등 입전권은 본디 ‘복자의 친척’이라 기록하였는데 복자의 정말 친척은 1인도 없었고 진[기낭] 신부, 한[기근] 신부, 루수 장발 씨 3인이 복자 친척을 대표하였도다. 요안 장면 씨는 피곤함으로 불참되고 그 외에는 각국인이 복자 친척의 자리에 앉았으며 1등 입전권의 자리는 제대 좌우편에 제일 가깝고 높이 참예하며 보기에 제일 좋은 처소더라.”16)

 

장발은 시복식에 참석하고 교황 비오 11세(Pius XI, 1922~1939 재위)를 알현하는 기쁨과 영광을 누리고 그해 가을 귀국하였다.17) 귀국 후 장발은 자신의 모교인 휘문학교를 시작으로 경신고보, 동성상업학교의 교사로 재직했으며 1934년에는 구본웅(具本雄), 길진섭(吉鎭燮), 이마동(李馬銅), 김용준(金容俊) 등과 목일회(牧日會)를 조직하고 전시를 개최하기도 하였다.18) 1944년에는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를 설립하여 초대교장을 역임하였으며,19) 1945년 해방과 함께 그해 12월 경성부 학무국장으로 부임하였다.20) 그리고 미군정기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에 따라 서울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서 미술학부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에는 성미술 전람회를 개최하였고 1960년에는 서울 혜화동 성당 신축을 총지휘하였다. 1953~1961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으로 재직할 당시 박갑성, 이순석, 김종영, 장우성 등 교수들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거나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다.21) 장발은 그들과 함께 한국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개인적인 작품 활동에 전력하기보다는 오히려 화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61년 학장 임기를 마친 장발은 이탈리아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을 받았으나 5·16 군사 쿠데타로 제2공화국이 무너지면서 대사 발령은 무산되었고, 1964년 교환교수 자격으로 미국으로 도미하였다.22) 이후 세인트 빈센트대학(Saint Vincent College)에서 미술사 강의를 하였으며, 추상 작업과 다수의 가톨릭 성화를 제작하였다. 2001년 ‘100수 기념 전시회’를 한 달여 앞둔 4월 8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백번째 생일을 지내고 선종하였다. 고인의 장례미사는 뉴욕 성가족 성당에서 아들 장흔 신부(張昕, 고르넬리오, 성 베네딕도회)의 주례로 봉헌되었으며 고인의 유해는 뉴욕주 맨해튼 플러싱 묘원(Flushing Cemetery)에 안장되었다.23)

 

 

3. 1920년에 그린 김대건 신부 초상화 두 점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근대 한국 가톨릭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장발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를 여러 차례 그렸다. 1920년에 그린 두 점의 초상화 외에 김대건 신부가 시복된 이후인 1928년에서 1929년 사이에 한 점, 도미하여 1987년에 한 점 그리고 1994년에도 한 점을 그렸다. 이 외에 1925년 이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드로잉 한 점이 있다.

 

장발이 1920년 기낭 신부 사제 서품 25주년을 축하하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같은 해에 조선 대목구장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를 위해서도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주목받지 못하였다. 장발이 뮈텔 주교를 위해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했다는 사실은 『뮈텔 주교 일기(Journal de Mgr. Mutel)』를 통해 확인하였다.24) 『뮈텔 주교 일기』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뮈텔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교구장으로 임명된 1890년 8월 4일부터 1933년 1월 14일까지 거의 매일 작성한 것으로 모두 6천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며, 뮈텔 주교 개인과 신변의 사정은 물론 교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일어났던 교회 안팎과 조선 사회의 주요한 사건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25)

 

1920년 5월 24일

오늘 신학교에서 교장 신부의 은경(사제 서품 25주년)을 축하했다. 9시 장엄 미사에 모든 조선인 신부들이 참석했다. 11시경에 대신학교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신학생들과 신부 그리고 선교사들, 또 그들과 함께 아빠스, 가시아노와 갈리스도 신부들도 함께 촬영했다. 11시 30분에 성체 강복과 테 데움(Te Deum), 정오에 오찬이 있었다. 식당은 매우 귀엽게 장식되어 있었다. 즉 독서대 뒤편에 교우 화가 장 씨에 의해 그려진 김 안드레아(金大建) 가경자의 유화 한 폭, 그리고 가문(家紋)과 꽃 장식 등이 걸려 있었다.26)

 

1920년 9월 21일

나의 주교 서품 30주년이다. 또 오늘은 1914년에 1915년으로 연기된 환갑과 전쟁 때문에 지내지 못한 1915년의 주교 서품 은경축도 지낸다. … 축하식은 10시 30분경에 여학교 뒤편에 세운 천막 아래서 거행되었는데, 천막 앞에는 엄청난 교우 군중이 여러 학교 학생들과 함께 모여 있었다. … 그리고는 선물들이 잇달았다. 용산에서는 김 안드레아(金大建) 가경자의 유화 한 점을 주었고, 또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장 루수(張勃)는 내 사진에 의거해 그린 유화 초상화를 그의 형을 통해 내게 증정하게 했다.27)

 

당시 서울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자신의 일기에서 장발이 그린 두 점의 김대건 신부 초상화에 대해 언급하였다. 5월 24일 자 일기에는 용산신학교 기낭 교장 신부의 은경축에서 본 ‘김대건 초상화’에 대하여 적었으며, 9월 21일 자 일기에는 자신이 주교 서품 30주년 선물로 받은 ‘김대건 초상화’에 대하여 적었다. 지금까지는 장발이 같은 해에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를 두 점 그렸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가톨릭대학교 전례박물관에 소장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도. 2)를 기낭 신부의 은경축 선물로 그려진 것이라 여겨왔으며, 현존하는 한국인이 그린 최고(最古)의 성화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런데 장발이 1920년에 김대건 초상화를 두 점 그렸다면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김대건 신부 초상화가 기낭 신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뮈텔 주교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앞서 살펴본 장발의 생애를 통해 그가 처음 김대건 신부를 그리게 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 당시 장발의 형 장면이 용산신학교 강사로 일하고 있었기에 김대건 신부 초상화를 그릴 화가로 동생 장발을 추천했을 수 있다.28) 둘째, 장발은 휘문학교 시절부터 춘곡 고희동에게 그림을 배웠고 연합 학생서화전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다. 셋째, 1919년 고려화회 창립회원으로 당대 유명 서양화가들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이미 동경미술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한 상황이었다.

 

한편 <도. 2>가 대중에게 최초로 공개된 것은 용산신학교에서 한국교회 성직자를 대상으로 출판하던 잡지 『타벨라(Tabella SS. Cordis Jesu)』 1921년 9월 1일 자를 통해서였다(도. 3).29) 『타벨라』는 예수성심신학교에서 1912년 6월부터 라틴어로 간행되었으며,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을 통해 유럽의 여러 나라에 배포되었다. 당시 기낭 신부가 잡지의 편집 책임을 맡고 있었다. <도. 2>는 『타벨라』에 소개된 다음 해인 1922년 11월에 네덜란드 지부에서 발행한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30) 소식지의 표지에도 등장하였다(도. 4).31) “가경자 김 안드레아 1845년 8월 17일에 사제품을 받은 한국의 첫 현지인 신부로, 1846년 9월 16일에 신앙을 위해 순교했다.”라는 표지 설명과 “한국은 100년 전에 이미 사제 순교자를 배출한 나라이며 그 장본인은 가경자 김 안드레아로, 한 젊은 한국인 신자가 그린 그의 초상화가 본 팸플릿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라는 해설을 덧붙여 한국 가톨릭교회의 박해와 첫 사제의 순교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도판에 보이는 바와 같이 <도. 1>은 캔버스의 찢김, 구멍, 긁힘 등 표면 손상이 심한 상태이며 유화 특유의 광택 등 표면 질감은 사라졌다. 실견 당시 유화 분말화 등의 징후를 볼 수 있었으며 전반적으로 먼지와 곰팡이에 의한 오염이 심하였다. 작품의 뒷면은 오염된 상태를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데 액자를 교체하면서 찢어지고 접힌 캔버스를 그대로 현재의 스트레처(stretcher)에 고정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다행히도 자외선 조사를 통해 분석한 결과 제작 이후 덧칠이나 수리복원 등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32) 그러나 보이론 화파의 영향을 받은 장발 특유의 화풍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기하학적 조화에 의한 정확성, 단순성, 명확성을 화면에 드러냄으로써 종교적으로 깊은 영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장식적으로 분할된 화면 속에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전통에서 내려오는 순교자의 상징적인 도상들이 충실하게 드러나 있다. 화면 중앙에 선 김대건 신부의 얼굴은 좌안(左眼), 즉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화면에 왼쪽 얼굴 위주로 보이도록 하였다.33) 오른손에는 영광의 순교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으며, 왼손으로는 성경책을 감싸 가슴 쪽으로 당겨 안았다.

 

화폭 중앙의 직사각형은 마치 창문처럼 보이는데 프레임 안의 김대건 신부는 자신이 걸은 굳센 신앙의 길, 하느님을 가장 첫 자리에 놓았던 자신의 길을 함께 가자는 듯 결연하게 앞을 응시하고 있다. 화폭의 가장자리에는 각각 4개의 십자가를 그려 넣었으며 상하 좌우에는 직선과 곡선이 만나면서 4개의 원을 완성시켰다. 상단 원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세례명 ANDREA와 성명 KIM의 이니셜인 ‘AK’를, 좌우와 하단 원에는 도유(塗油) 십자가를 그려 넣었으며, 순교자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로 장식하였다. 3개의 도유 십자가는 화면 속 인물이 도유된 사제로 하느님께 거룩하게 봉헌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도유는 종교 예식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이나 사물을 거룩하게 하는 예식으로 구약성서를 보면, 임금, 사제, 예언자들은 도유를 통해 성별(聖別)되었다.34) 도유를 통해 사제는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거룩한 요소들을 만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제의 손은 미사 전례에서 예수의 몸과 피를 축성하고 거양하며 신자들에게 전달하는 매우 중요한 신체의 일부이다. 장발은 얼굴과 대조적으로 손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순교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와 성경을 들게 함으로써 인물의 신분적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도. 1>과 <도. 2>가 가장 다른 점은 배경의 유무이다. <도. 1>은 배경으로 성곽과 성문, 민가를 충실하게 묘사하였다. 그림의 배경으로 그려진 성문은 조선시대의 최대 형장이 있는 서소문밖 네거리로 가는 서소문(소의문)이다. 서소문을 나선 비탈길의 묘사는 샤를르 달레의 표현처럼 순교자의 고통을 느끼게 한다.35) 김대건 신부도 서울 포도청에서 3개월간 투옥되고 반역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뒤,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를 거쳐 당고개를 지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36) 18~19세기에 서소문 밖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서소문 밖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따라서 서소문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순교터로 맥락화된 의미를 부여받은 상징적인 공간이다.37) 장발은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김효임 골롬바와 김효주 아녜스 성화를 제작할 때에도 서소문을 배경으로 사용하였다.

 

무엇보다 <도. 1>은 장발이 주장한 보이론 예술의 특징, 즉 부동의 자세를 통한 엄숙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모든 형체를 단순화함으로써 신격 혹은 인격을 고상하게 드러내며 정적 표상을 강조하였다. 또한 작가 스스로 주장한 바와 같이 시간을 초월한 영원성을 표현하기 위해 빛의 음영을 초월하고 색의 농담으로 물체의 경계를 표현하고 있으며 원근법을 부정확하게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38)

 

<도. 1>과 <도. 2>의 세부를 살펴보면 한 작가의 화법으로 보여지는 유사점을 더 관찰할 수 있다. 정면을 바라보는 김대건 신부의 시선, 종려나무 가지와 성경을 감싸 안은 손의 움직임, 그리고 두루마기 자락의 곡선을 묘사한 부분 등 화면의 구성과 세부 표현에서 작가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의 처음에 밝힌 바와 같이 <도. 1>이 1920년대에 원효로 용산신학교 성당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은 유리건판 2장과 사진 1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유리건판은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에 소장되어 있으며, 사진은 성심수녀회에서 소장하고 있다. 우선 <도. 5>와 <도. 6>은 성 베네딕도회의 총 아빠스 노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가 1925년 조선을 방문했을 당시에 촬영한 유리건판이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는 선교지인 조선의 문화와 풍습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품고 있었으며 거의 전국을 다니면서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하였다. <도. 5>와 <도. 6>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당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좌우 벽에 두 점의 그림 액자가 분명하게 걸려 있다.

 

<도. 7>에서는 새로 찾은 김대건 신부 초상이 걸려 있는 모습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도. 7>은 성심 수녀회에서 소장한 사진으로 가톨릭교회의 사제 서품식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서품자들이 몸 전체를 땅바닥에 맞대고 엎드리고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모든 성인들에게 호칭 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제대 앞에 서 있는 주교관을 쓰고 목장을 든 이는 라리보(Adrien-Joseph Larribeau, 원형근, 1883~1974) 주교이다. 라리보 주교는 1926년 1월에 갑자기 선종한 드브레드(Emile Devred, 兪世竣, 1877~1926) 부주교(coadjuteur)에 이어 12월 23일 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927년 5월 1일 명동 대성당에서 주교 착좌식을 가졌다. 따라서 이 사진은 1927년 라리보 주교의 착좌 이후에 촬영된 것이다. 성당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의 문양, 성체등, 백합 모양의 세부 조명 장식 등을 비교해 볼 때 세 장의 사진은 비슷한 시기에 촬영된 것을 알 수 있다.

 

 

 

장발이 1920년에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를 두 점 그렸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밝혀졌다. 이어 두 점 가운데 현전하는 최고의 김대건 신부 성화가 어느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1925년 11월에 뉴욕 맥밀런(Macmillan) 출판사에서 간행된 『바티칸 포교 박람회: 세계를 보는 창』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당시 메리놀 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 책임자인 조셉 콘시딘(Joseph Considine) 신부가 박람회를 감상하고 정리한 일종의 방문기이다.39) 사진 아래에는 “한국의 젊은 화가가 그렸으며 이 그림은 서울의 주교관에 걸려 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책에 실린 도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액자 상단에는 “VENERABILIS ANDREAS KIM(가경자 안드레아 김)”이라고 새긴 명판이 달려 있다.

 

 

 

기낭 신부는 당시 신학교 교장 신부였고 신학생들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영성을 모범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자신이 선물로 받은 김대건 신부 초상화를 신학교 성당에 걸어 놓고 신학생들에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더욱이 용산신학교 성당에 1902년에 미리내에서 이장하여 온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가능성을 더 확신하게 한다. 또한 새로 찾은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에는 서소문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기낭 신부의 은경축 선물을 장발에게 의뢰한 사람은 드브레드 신부였을 것이다. 드브레드 신부는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다가 1919년 10월에 용산신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해 기낭 신부의 은경축을 축하하는 동시에 학생들의 라틴어 공부를 위해서 안드레아 김 신부 치명 성극의 극본을 라틴어로 저술했다.40) 일반적으로 순교자나 성인의 초상화나 조각을 의뢰할 때 신부나 주교는 작가가 영감을 얻어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언을 한다.41) 5월 24일에 열린 치명 성극 팸플릿(도. 9)을 보면 <도. 1>의 배경이 된 서소문과 그 앞의 비탈길 묘사의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도. 1>은 여러 군데에 구멍과 찢김이 심하다. 그림의 상태를 더 연구해야 이러한 손상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표면에 매우 불규칙하게 손상된 크고 작은 흔적은 포탄이 떨어진 충격으로 벽이나 유리가 부서지면서 파편들이 그림을 뚫고 나가면서 손상을 입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당시 용산신학교 성당에 떨어진 포탄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실제로 용산신학교 성당에서 미사를 보던 중 떨어진 포탄으로 제대 뒷벽 스테인드글라스의 예수성상이 깨지는 현장에 있었다는 소신학생의 증언이 남아 있다.42)

 

1920년에 두 점의 김대건 신부 초상화를 그린 장발은 1925년 로마 바티칸에서 열린 시복식에 참석하고 온 후 김대건 초상화를 비롯한 여러 순교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1928~29년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김대건 신부 전신상을 그렸다. 이 초상화에서는 장발 화풍의 변화를 볼 수 있는데 19세기 말 프랑스 나비파(Les Nabis)의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 1870~1943)가 표현한 종교화적 특성, 즉 성당이나 수도원의 벽화 같은 느낌, 밝은 색채와 자연스러운 표현이 잘 드러나 있다. 이후 작품에서도 장발은 유사한 색채와 양식성을 보여주고 있다. 순교자를 상징하는 도상인 종려나무 가지와 성경을 들고 있는 모티브는 1920년에 그린 김대건 신부 초상화와 동일하지만 얼굴 뒤쪽으로 후광(後光)이 그려져 있다는 점은 다른데 이는 1925년 시복 이후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을 가슴에 품듯이 들고 있는 직각으로 꺽은 오른팔의 선과 도포의 끈, 수직으로 곧게 내려진 갓끈은 직선으로 일체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화면의 아치형 구조 위에는 “나를 위하야 무궁셰가 곳 시작하리니 그대들도 사후 진복을 누리려하거든 셩교를 봉행하라”는 김대건 신부의 메시지를 적었으며, 다른 부분에는 “네가 영원히 탁덕이로다(아래) / 복자 김신부 탄생 一八二一년 탁덕승품 一八四五년(오른쪽) / 참슈치명 一八四六년 로마에셔 시복식 一九二五년(왼쪽)”이라고 적었다.

 

장발이 그린 이 전신 초상화는 매우 이른 시기에 유럽에 소개되었다. 독일 뮌헨에서 출판하던 잡지 『그리스도교 미술(Die christliche Kunst)』과 프랑스 리용에서 인쇄한 교황 전교기구인 성 베드로 전교회 후원 모집용 리플릿의 표지에 게재되었다. 1929년이 출판된 『그리스도교 미술』에는 한국에서 활동하던 성 베네딕도회 수도사인 안드레아 에카르트(Andreas Eckardt, 1884~1974) 신부의 논문이 소개되었다. 안드레아 에카르트 신부는 1905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회에 입회하여 1909년 사제품을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성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첫해에 파견된 신부였다. 그는 1928년 조선을 떠날 때까지 조선의 곳곳을 다니며 조선의 건축, 미술, 회화, 공예 등을 연구하여 『조선 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를 썼으며 장발에게 서양화를 가르쳤다. 그는 이 잡지에 「루도비코 장과 한국의 그리스도교 미술」(Ludwig Chang und Die christliche Kunst in Korea)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재하면서 “장발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 수개월 간 자신에게 유화를 배웠다.”고 하였다.43)

 

『그리스도교 미술』은 1904년~1937년까지 독일 뮌헨에서 간행하던 잡지로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 미술과 미술사에 관한 논문과 다양한 도판을 주로 게재하였다. 에카르트 신부는 이 잡지에 장발이 그린 「복자 김대건 신부」의 유화와 드로잉을 소개하며 장발이 “방학 기간 동안에 김대건 신부를 그렸고, 원산 성당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삼위일체를 완성하였다.”고 적었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김효주 골롬바와 효주 아녜스」, 명동 주교좌성당 제대 뒷벽에 걸린 「14사도」를 소개하였으며, 김대건 신부 초상 드로잉과 14사도를 그리기 위해 장발이 그린 다양한 손 스케치를 도판으로 실었다.44) 한편 이 전신 초상화는 프랑스 리용에서 현지인 신학교 설립 기도문과 후원회 모집지의 표지에 사용되었다.

 

 

 

이 외에 1928년 시복식 이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 드로잉 한 점도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교 미술』에 쓴 논문의 참고 도판으로 실려 있다.45) 1987년에 장발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김대건 신부를 그렸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던 모습에서 벗어나 짧은 머리를 하고 수단을 입었으며, 정면을 바라보던 형식에서 몸을 사선으로 틀어 먼 하늘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도. 12)46) 순교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와 칼을 들고 있으며, 배경색의 소용돌이 아래로 서소문과 명동대성당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1994년 장발은 또 한 번 김대건 신부 초상화를 그리는데 다시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있다(도 13). 도포의 선과 갓끈 그리고 도포의 고름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으며 성인을 상징하는 후광이 금빛으로 강조되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왼손에는 순교를 상징하는 칼을 들고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펴서 화면 밖의 어느 곳을 가리키고 있다.

 

 

 

 

4. 맺음말

 

장발은 한국에 서양화단이 형성되기 시작한 1920년대 초에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하였다. 그리고 1920년 중반부터는 한국의 순교자 성화로 한국 가톨릭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발은 19세에 한국의 첫 사제이자 순교자인 성 김대건 신부의 초상을 두 점 그려 한 점은 용산신학교장 기낭 신부에게, 한 점은 서울 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선물했다. 이후 장발은 2001년 선종하기까지 계속해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순교자를 그렸다. 특히 장발이 그린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는 현재까지 6점이 확인되었다. 그가 그린 김대건 신부의 초상을 보면 제작 시기에 따라 표현 양식이나 색채 등이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초기작의 경우에는 인물의 사실적 묘사에 중점을 두었다. 강렬한 선과 면을 통해 한국 가톨릭교회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가진 아우라(aura)를 강하게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무엇보다 원시적인 소박함 속에서 순교자의 굳은 신앙심과 순교의 영광이 순수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장발은 김대건 신부가 지닌 불변하는 본질을 본떠서 화면 위에 형상화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초상화는 정신의 표현을 목표로 한다. 물론 정신을 내포하는 내용은 동양과 서양이 다르고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렇다 하더라도 초상화는 그 대상 인물을 기억하고 싶고 숭배하고 싶은 성정(性情)이 드러나야 한다.47)

 

이번 연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첫째,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장발이 1920년에 김대건 신부의 초상을 두 점 그렸다는 사실이다. 둘째, 바티칸 포교박람회를 소개한 책을 통해 장발이 1920년에 그렸으며 뮈텔 주교의 사제관에 걸려 있던 김대건 신부 초상화(도. 2)가 1925년 바티칸 만국 포교박람회에 전시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셋째, 1920년대에 용산신학교 성당 내부를 촬영한 세 장의 사진을 근거로 하여 새로 찾은 김대건 신부의 초상이 용산신학교 성당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20년에 장발이 그린 두 점 중 지금까지 알려진 현전하는 제일 오래된 김대건 신부의 초상(도. 2)은 뮈텔 주교의 주교 서품 30주년을 위해 그려진 것이며, 새롭게 알려진 김대건 신부 초상(도. 1)이 기낭 신부 은경축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석 장발은 가톨릭 신앙 안에서 성장하였고 최초로 김대건 성인화를 그렸으며 한국 가톨릭 미술에 미친 영향 또한 적지 않다. 날카로운 지성과 섬세한 감성이 강한 의지와 순순한 사랑으로 순화되어 영원한 아름다움이 아마득하게 건너다보이는 그 고지(高地)는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48) 그럼에도 그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으며, 아직 소개되지 않은 작품도 다수 있다. 장발의 작품 연구와 함께 그가 그린 성화와 그가 제작한 성인 메달49), 십자가 등의 성물까지 한 번에 조명할 수 있는 전시나 도록 출판이 이루어진다면 한국 가톨릭 미술의 한 부분을 온전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새로 찾은 김대건 신부 초상’이 김대건 신부가 남긴 신앙의 유산에 다시 한번 주목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참고 문헌


1. 자료

 

『뮈텔주교일기』

『가톨릭靑年』

『경향잡지』

『매일신보』

『세례대장』

『Tabella』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한국가톨릭대사전』

『교회와 역사』

『가톨릭평화신문』

『가톨릭신문』

 

2. 논문

 

John Joseph Considine, The Vatican Mission Exposition: A Window on the World, New York : Macmillan, 1925.

Andreas Eckardt, “Ludwig Chang und Die christliche Kunst in Korea”, Die christliche Kunst, 1929.

정형민, 「창작과 교육의 공존을 위하여」, 『조형』 19호,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 1996.

전영우, 「한국근대미술의 형성과 가톨릭」, 『조형예술』 3호, 1998.

조윤경, 「장발의 생애와 작품활동에 관한 연구: 가톨릭 성화를 중심으로」,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2000.

이경모, 「인천화가 장발과 한국 근대미술」, 『인천학연구』 1호, 2002.

윤선자, 「일제 말기 가톨릭 여성교육과 계성여고」, 『한국기독교와 역사』 24권, 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정영목, 「장발 평전 1946~1953」, 『조형 아카이브』,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 2010.

조선미, 「한국 초상화의 세계」,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오오바야시 겐타로, 「유리건판과 보존」, 『기록물 보존복원』 제4호, 2011.

윤선자, 「한기근의 <로마여행일기>」, 『교회사연구』 5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3. 저서

 

이원순, 『소신학교사』, 2007.

허동현, 『건국 · 외교 · 민주의 선구자 장면』, 분도출판사, 1999.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강홍빈, 『서소문별곡』, 서소문역사박물관, 2014.

이용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살이 안내서(2020. 11. 29.-2021. 11. 27)』,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20.

 

……………………………………………………………………………………

 

1) 장발이 그린 김대건 신부 초상화는 수원교구 이상돈 신부가 소장하고 있다. 소장 경위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장발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지인 A씨에게 초상화를 주었다. A씨는 오랜 기간 소장하고 있다가 이경우 스테파노 씨에게 주었으며 이상돈 신부의 친구 박상립 씨가 이경우 씨의 사무실에서 우연히 초상화를 보고 그 소재를 이 신부에게 알렸다. 이 신부는 이경우 씨를 방문하여 초상화를 확인하였으며 기증받았다.

 

2) 사도좌 내사원 「교령」(문서번호_284/20/1),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살이 안내서(2020. 11. 29.-2021. 11. 27)』,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20, 13쪽.

 

3) 전영우, 「한국근대미술의 형성과 가톨릭」, 『조형예술』 3, 1998, 8쪽 ; 『서소문별곡』, 서소문역사박물관, 2014, 79쪽.

 

4) 김대건 신부의 초상 드로잉은 성 베네딕회 안드레아 에카르트 신부가 독일에서 간행하는 『그리스도교 미술』(1929년)에 쓴 논문의 참고 도판으로 실려 있다.

 

5) 유리건판은 할로겐화은을 포함한 감광유제를 유리판에 바른 후 건조시킨 것이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흑백 사진 필름 유제의 원형이다. 무겁고 깨지기 쉬우나 해상도와 평면성이 뛰어나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오오바야시 겐타로, 「유리건판과 보존」, 『기록물 보존복원』 4, 2011, 56쪽.

 

6) 장발, 「보이론 藝術」, 『가톨릭靑年』, 1934년 2월호, 55쪽.

7) 위의 책, 같은 쪽.

 

8) 인천 답동본당에 소장된 「세례대장」에 따르면, 장발은 4월 13일에 제물포 고잔에서 태어났으며 세례일은 4월 16일이고 세례명은 ‘알로이시오’이다.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의 인적 사항을 적는 기록부인 「세례대장」은 당시 답동 본당의 보좌 신부였던 홍병철 루카 신부가 작성하였다. 본문에는 ‘Aloysius’라고 적었으나 대장 번호 아래는 ‘張 루수’라고 적었다가’ ‘알로이시오’로 고친 흔적이 있다. 한편 허동현이 쓴 책에 실린 아버지 장기빈이 작성한 친필 가보(家譜)에는 4월 3일에 태어나 4월 6일에 세례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루수’, 즉 루도비코이고 대부는 ‘김교원 요한’이라고 적혀 있다(허동현, 『건국 · 외교 · 민주의 선구자 장면』, 분도출판사, 1999, 13쪽). 

 

9) 『每日申報』, 1916년 12월 13일자 기사에 세 편의 수상작 사진이 실려 있으며 그중 장발의 연필화도 있다. 당선작을 소개한 신문기사에 장발을 보성학교 출신으로 보도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당시 장발은 휘문학교 학생이었다.

 

10) 「生氣橫溢」, 『每日申報』, 1916년 12월 10일자.

11) 「高麗畫會 出現」, 『每日申報』, 1919년 11월 25일자.

12) 정영목, 「장발 평전 1946~1953」, 『조형 아카이브』, 2010,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 13쪽.

13) 정영목, 같은 논문, 14쪽.

 

14)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시복식에 참가할 신자를 구하였으나 긴 체류 기간과 여비로 부담을 가져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1925년 5월 10일,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에서 장면을 시복식 참가 대표로 선거하여 지명하였다. 요청을 받은 장면은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 중이던 동생과 함께 로마로 출발하였다(『한국가톨릭대사전』, 10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7320쪽 ; 윤선자, 「한기근의 <로마여행일기>」, 『교회사연구』 53, 2018, 210~211쪽).

 

15) 장발, 「조선 순교복자 시복식 인상기」, 『가톨릭靑年』, 1933년 9월호, 24~29쪽. 

 

16) 한기근, 「로마여행일기」, 『경향잡지』 1925년 9월호(제573호). 한기근 신부는 1925년 5월 31일(566호)부터 1927년 6월 15일(615호)까지 총 39회에 걸쳐 여행기를 기고하였다.

 

17)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40주년 기념 화보집-빛 믿음 흔적』(2004)에 당시 교황을 만난 후 촬영한 기념사진(No. 334)이 실려 있다.

 

18) 이경모, 「인천화가 장발과 한국 근대미술」, 『인천학연구』 1, 2002, 466쪽.

 

19) 윤선자, 「일제 말기 가톨릭 여성교육과 계성여고」, 『한국기독교와 역사』 24, 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151~152쪽. 당시 장발은 계성학교 교장으로 형 장면과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의 설립부터 개교까지 여러 실무 과정을 함께 논의하였다.

 

20) 『한국가톨릭대사전』, 10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7322쪽. 

 

21) 장우성(1912~2004)은 2004년 9월 8일에 ‘요셉’으로 김수환 추기경에게 세례를 받았고, 김종영(1915~1982)은 1982년 임종 직전 서강대 교수였던 예수회 김태관 신부에게 ‘프란치스코’로 세례와 종부성사를 받았다.

 

22) 정영목, 같은 논문, 17쪽.

23) 「한국 가톨릭미술의 개척자 우석 장발 선생 선종」,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15일 자(제 2245호), 7면.

 

24) 이번 연구의 주요 문헌 자료로 활용한 『뮈텔 주교 일기』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1984년에 번역을 시작하여 2008년에 번역을 끝냈다. 번역서는 1986년부터 2008년까지 총 8권으로 간행되었다. 일기의 원본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소장되어 있다.

 

25) 최석우, 「해제」, 『뮈텔 주교 일기』, 1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3쪽.

26) 『뮈텔 주교 일기』 6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357~358쪽.

27) 위의 책, 383~384쪽.

28) 장면은 1917년부터 192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원순, 『소신학교사』, 2007, 65~66쪽.

29) 『타벨라』 1921년 9월 1일 자.

 

30)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는 “누구도 성소에서 제외될 수 없다”라는 모토 아래 각 선교 지역의 현지인 사제 양성을 후원하는 단체로 1889년에 설립되었다. 이듬해 교황 레오 13세의 인준을 받았고, 1922년에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산하 기구가 되었다.

 

31) 송란희,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1)」,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0일 자(1596호) 9면.

 

32) 김겸, 「작품 상태 확인서」, 2021, 참조.

 

33) 조선미는 “우리나라 초상화는 상용형식이 다양하지 못하고 일종의 전형성을 보이는데 안면각도는 7분면에서 10분면까지 택해지며 동적 느낌을 던져주는 포즈는 취하지 않으며 시선 처리도 얼굴 각도와 같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김대건 신부 초상화의 경우는 ‘좌안 9분면’이다. 조선미, 「한국 초상화의 세계」,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259쪽.

 

34) Jovian Peter Lang, 박요한 영식 역, 『전례사전(Dictionary of the Liturgy)』, 가톨릭출판사, 2005, 94쪽.

 

35)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하였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샤를르 달레, 안응렬·최석우 역, 『한국천주교회사』, 하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405~406쪽.

 

36)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박 베드로, 86회차.

 

37) 서소문은 103위 한국 성인 가운데 44위가 탄생한 곳으로 순교자 현양비가 설립되어 있다. 바로 옆에는 서소문역사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공원 아래에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있다.

 

38) 장발, 「보이론 藝術」, 『가톨릭靑年』, 1934년 2월호, 132~134쪽. 

39) J. Joseph Considine, The Vatican Mission Exposition: A Window on the World, New York : Macmillan, 1925, p. 170.

40) 이현주, 「김신부전」, 『교회와 역사』 2021년 11월호, 13쪽.

 

41) 장발은 명동 대성당의 제대에 뒤에 설치할 「14사도」를 그릴 때에도 김 요셉 신부의 조언을 들었다. 이경모, 같은 논문, 468쪽.

 

42) 이원순, 앞의 책, 2007, 144쪽. 당시 소신학교 4학년 김항식은 “한번은 미사를 드리는데 성당 가까운 곳에 포탄이 떨어져 제대 뒤 예수 성상의 모자이크 유리창이 깨졌습니다.”라고 회고하였다.

 

43) Andreas Eckardt, “Ludwig Chang und Die christliche Kunst in Korea”, Die christliche Kunst, 1929, p. 180.

44) ibid, p. 188.

45) ibid, p. 188.

46) 조윤경, 「장발의 생애와 작품활동에 관한 연구: 가톨릭 성화를 중심으로」,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2000, 110쪽 도판.

47) 조선미, 앞의 책, 260쪽.

48) 박갑성, 「추상미술과 가톨릭사상-우석 장발 선생의 서울전을 보고」, 『경향잡지』, 1976년 8월호, 56쪽.

 

49) 드브레드 주교가 기낭 신부에게 쓴 1925년 9월 12일 자에 편지에서 “장 루수가 4개의 성인 메달을 만들어 주었다, 복자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것으로, 성삼일 축제 때에 대성당 회랑의 깃발에 걸 것”이라고 했다(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자료).

 

[교회사 연구 제60집, 2022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송란희(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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