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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 70년 분단 70년11: 한국 순교자103위 시성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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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01 ㅣ No.726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11) 한국 순교자103위 시성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순교자 영광 드러낸 민족 복음화의 전환점



198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된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에 함께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평화신문 자료사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베드로 바오로, 또 내게 맡겨진 권한으로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바오로 정하상 외 101명의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판정하고 결정하여 성인들 명부에 올리는 바이며, 세계 교회 안에서 이분들을 다른 성인들과 함께 정성되이 공경하기를 명하는 바입니다.”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 당시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 추기경이 복자 103위의 시성을 청원하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 복자를 성인 반열에 올렸다. 한국 교회 200주년 기념 대회에서였다.

교황의 엄숙한 ‘시성 선언’에 광장에 모여든 100만 인파 사이로 일시 침묵이 흘렀고, 이내 환호가 뒤따랐다. 기쁨도 그런 기쁨이 없었다. 100년간의 박해를 거쳐 선교시대로 접어든 지 100년 만에 한국 교회가 시성의 영예를 안게 됐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여의도광장은 우리나라 복음화의 선교 3세기를 연 역사의 현장이자 축복의 땅, 영광의 땅이 됐다.

시성식 직후, 교황은 “오늘날 한국에서 교회가 이렇게 훌륭히 꽃피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순교자들의 영웅적 증거의 열매”라고 말했다. 또 “지금도 그분들의 불굴의 기백이 비극적으로 갈라진 이 땅 북녘 교회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받쳐 주고 있다”며 북녘 교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잊지 않았다.

1984년 5월 4일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국립 소록도병원을 찾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평화신문 자료사진


한국을 첫 사목 방문한 교황은 한국 주교단을 비롯해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를 두루 만났으며, 타종교 지도자들과 정계 인사들도 만났다. 시성에 앞서 ‘화해의 날’로 정해진 4일엔 특히 광주를 찾아 5ㆍ18 광주민중항쟁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이날 행사 주제를 ‘화해’로 정한 광주대교구는 교구는 물론 지역 사회에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을 따라 하느님과 화해하고 자신과 화해하며 이웃과 화해할 것을 요청했다. 교황은 또 이날 국립소록도병원을 방문, 나환우들의 고통과 아픔에 함께하며 사랑을 나누고 그리스도의 희망과 용기를 가슴 깊이 심어줬다. ‘평화의 순례자’다운 사랑의 행보였다.

교황은 ‘나눔의 날’인 5일엔 대구대교구를 찾아 전국 12개 교구와 1개 수도회 소속 38명의 부제에게 사제품을 주고 청소년대회를 거행하며 고통과 희생이 전제되는 진정한 나눔과 봉사의 의미를 각인시켰다. 아울러 부산 일원 노동자들과 농ㆍ어민들을 만나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전하고, 이들에 대한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200주년을 맞은 한국 교회에 가장 뜻깊었던 행사는 역시 ‘증거의 날’인 6일 거행된 200주년 기념 대회와 103위 시성식이었다. 103위 시성은 한국 교회는 물론 한국 사회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천주교회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더불어 200주년 기념 대회와 시성, 교황의 사목 방문은 한국교회에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을 안겼으며, 민족 복음화의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200주년 대회를 계기로 복음화율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고, 또 한 번 한국 교회가 도약하는 계기가 되는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역시 200주년의 가장 큰 성과이자 업적은 ‘사목 의안’이었다. 1981년 1월 초 준비모임으로부터 시작해 1984년 11월에 폐막하기까지 12개 분과로 나눠 준비하고 교구 회람을 거쳐 최종 완성된 사목회의 의안은 한국 교회의 200년 교회 생활 전반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현실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겨레 복음화와 토착화, 선교 3세기에 대비하려는 취지에서 이뤄졌다. 특히 교황 방한 중 6일 전국 사목 회의의 막을 올려 7개월간 한국 교회의 쇄신과 민족 복음화의 길을 모색했다. 우리 교회 200년 역사에서 이처럼 하느님 백성 전체의 목소리를 수렴하고 응집한 일이 없었기에 그 성과물인 ‘사목회의 의안’은 그 의미가 클 수밖에 없었다. 12권에 걸친 방대한 문서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전례, 신심 운동, 지역 사목, 교리교육, 가정 사목, 특수 사목(청소년ㆍ농촌), 교회 운영, 선교, 사회정의 등 사목 전 분야를 모두 망라했다.

이 의안의 많은 내용은 1995년에 발간된 한국 교회의 지역 교회법이라 할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에 반영돼 한국 교회 사목의 준거가 되는 규범으로 오늘에까지 기능하고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일정

△ 5월 3일 김포공항 도착, 절두산 순례, 청와대 방문, 신학생들과의 만남, 주교단과의 만남
△ 4일(화해의 날) 광주 성인 입교예식 미사, 국립소록도병원 방문, 외교단과의 만남
△ 5일(나눔의 날) 대구대교구 사제서품식ㆍ청소년대회, 부산 노동자ㆍ농어민과의 만남, 성직자ㆍ수도자와의 만남, 문화인과의 만남
△ 6일(증거의 날) 서울대교구 명동성당 참배,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 전통 종교 지도자와의 만남, 개신교 지도자와의 만남, 사목회의 개회식, 젊은이와의 만남
△ 7일 출국(파푸아뉴기니로 출발) [평화신문, 2015년 11월 1일, 오세택 기자]

 

 

“103위 성인의 삶과 신앙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위 사무국장 박신언 몬시뇰

 

 

“200주년 기념 행사는 한국 천주교회 200년 역사와 신앙의 뿌리를 되새기고 3세기 복음화를 향해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82년부터 2년을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위원회 사무국장 겸 기획분과위원장으로 산 박신언(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몬시뇰에게 200주년 기념 행사는 잊을 수 없는 행사였다. 2년간 398차례나 회의를 주관하면서 행사 개최에 온 힘을 쏟았다. 그 땀과 노력 덕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입국에서 출국에 이르기까지 20권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졌고, 이 자료는 훗날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때까지 요긴한 ‘참고 자료’가 됐다.

“한국 교회에 신앙의 뿌리를 찾아주고 자부심을 느끼게 한 행사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한 단계 도약하는 전기가 됐고, 신자들 자신도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선교에 나서는 기폭제가 됐어요. 200주년 기념 행사를 전후해 교세가 가파르게 상승했고, 이 행사는 5년 뒤 세계성체대회를 여는 밑바탕이 됐습니다.”

박 몬시뇰은 이어 “103위 시성은 특히 신앙의 후손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신앙은 죽음마저 불사하는 숭고한 가치인 동시에 세월을 넘어 영원히 기억된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기회였다”면서 “정부 측에서도 ‘교황님의 방한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이라는 세계적 행사를 치르는 데 좋은 경험이 됐다’고 했다”고 전했다.

어려움도 많았다. 여의도 광장에 철골 빔 제대 설치 비용 마련에 난항을 겪어야 했다. 이에 박 몬시뇰이 군종 사제 시절 천주교 장교회 회장으로 활동한 허청일(베드로) 의원(당시 민정당 총재비서실장)을 통해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자 정부는 육군 공병대를 통해 자재를 포함, 설치비를 제공해주어 무사히 행사를 치르도록 도왔다.

박 몬시뇰은 또 “200주년 기념 행사는 전국에서 열차와 함께 버스 수백 대가 왔는데도 그 넓은 광장에 휴지 하나 남기지 않은 질서 있는 행사였다”면서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의 자부심과 긍지를 드러낸 행사였다”고 회고했다.

박 몬시뇰은 103위 시성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더는 순교할 필요가 없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서 순교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103위 성인은 우리에게 목숨까지 하찮게 여길 정도로 하느님을 굳게 믿고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200주년 기념 행사와 103위 시성식을 기억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103위 성인의 삶과 신앙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1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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