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수)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13: 겸손의 덕을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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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10 ㅣ No.1879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3. 겸손의 덕을 살고 싶어요


자신의 결점마저 수용하고 사랑하는 것이 진짜 겸손

 

 

우리는 겸손의 덕 또한 주님께 청해야 한다. 14세기 고해사제 성 요한 네포묵 신부가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베푸는 모습. [CNS]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수녀원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덕 중의 하나가 ‘겸손’인데요. 사실 솔직함을 좋아하는 제겐 때론 꽤 부담스러웠던 말이기도 했지요. 예의상 상석을 양보하고 낮은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나 마음에 없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는 것도 위선처럼 느껴졌지요. 겸손은 마음속의 욕구를 통제합니다. 그렇기에 때론 솔직하지 않고 허위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그럴 수 있죠’라는 말을 하면서도 속으론 괜찮지 않고 이해 안 되고 그럴 수 없을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과 행동이 억지스러운데도 겸손하다 하니 혼란스러웠습니다. 때론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이 저지당하고 억압받는 그런 느낌도 있었고요. 요즘 젊은 세대들을 보면 그들만의 당당함이 느껴지는데요. 가끔은 ‘조금만 겸손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저 자신에게 화들짝 놀랄 때도 있습니다. ‘나도 꼰대가 되어가나?’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편으론 자기애가 충만한 오늘 이 시대, 자기 자랑을 대놓고 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겸손’이란 말이 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겸손의 덕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우린 겸손을 자기를 낮추고 사회적 구조의 종속을 인정하는 표시로 규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알고 있지요. 욕구를 통제하니 인위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그것이 위선처럼 느껴질 수는 있겠어요. 때론 애써 예의를 지키려고 하는 모습도 겉으로만 꾸민 위세처럼 보일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비록 속마음은 상대를 존경하지는 않더라도 아니 미워한다고 해도 상대에게 존중의 말과 태도는 나쁘다고 할 수 없을 거 같아요. 누군가를 존중하려고 애쓴다는 차원에서 그런 태도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린 누구나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만약 자신이 진짜 겸손한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있어요. 어떤 사람이 스스로 “난 결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솔직하고 겸허하게 말했어요. 그런데 듣고 있던 사람이 “맞아요. 당신은 정말 결점이 많아요”라고 말했을 때 김 수녀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만약 화를 내면서 “당신이 더 결점이 많아요!”라고 소리 지른다면 당신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거짓 겸손을 보여준 것이지요. 하지만 “맞아요. 제가 부족한 것이 많아요”라고 한다면 자신을 스스로 낮춘 진짜 겸손이고요.

 

교만은 거짓 겸손과 나란히 갈 때가 많아요. 겸손으로 가장하여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려 하기도 하고요. 거짓 겸손과 진짜 겸손의 차이는 애덕을 행하느냐 혹은 애덕을 손상하느냐에 달려있는데요. 누군가 “자매님, 요리를 잘하시던데 노숙자들을 위해 봉사를 해보실래요?” 하는데 “아이고, 전 요리 못 해요. 그리고 그런 봉사를 하다 보면 제가 뭐 큰일이나 한 것처럼 교만해질까 봐 아예 하지 않으려고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악의가 숨어있는 겸손입니다. 겸손을 구실 삼아 자기애와 교만을 그럴듯하게 위장하는 것이니까요.

 

또 어떤 사람은 화려한 옷을 입고 멋진 말을 타고 뽐내면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가 자랑해야 할 것은 깃털의 주인인 새와 그 옷을 만든 재봉사와 자신을 태워준 말이죠. 허세란 바로 내게 없는 것, 내게 있어도 내 것이 아닌데 마치 내 것인 양 자랑하는 것이죠. 모두 하느님께로 받은 것인데 자기 것인 양(1코린 4,7) 허영에 빠진 것이죠.

 

또 어떤 사람은 교만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어리석은 척하기도 해요. 이는 순수함과 진심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물론 위대한 삶을 살다간 성인들 가운데 일부러 아둔한 척을 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그만의 이유가 있기에 모방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다윗 임금은 권위를 내려놓고 주님의 궤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요. 당시 미칼과 사람들은 임금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비웃었지요.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더 천하게 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해요.(2사무 6장 참조)

 

그렇다고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어 열등의식을 느끼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가짜 겸손입니다. 진짜 겸손은 자신의 결점과 천함마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사랑하면서 열등감이 아닌 자존감을 얻는 행위입니다. 살다 보면 분명 손가락질당할 때가 있는데요. 그것이 진심으로 나의 잘못이 아니라면 안심하고 다윗 임금처럼 춤을 추며 기뻐해도 좋지 않겠어요.

 

어떤 사람은 “나는 겸손의 덕이 없어요. 그것이 저의 한계에요”라고 솔직하게 말해요. 물론 내가 원한다고 겸손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셔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청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받을 수 없어요. 겸손의 덕도 그러하겠지요.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씀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0월 9일, 김용은(제오르지오, 살레시오 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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