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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2차 바티칸 공의회5-8: 공의회 이후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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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05 ㅣ No.488

[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2부] 끝나지 않은 공의회,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사는가?

(5) 공의회 이후 변화 ① 모국어로 미사 참례, 성경에 관심 증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미사 모습. 영성체 할 때는 제단과 신자석을 분리시키는 난간 앞에 무릎을 꿇고 입으로 성체를 모셨다.


오늘의 가톨릭신자들은 50년 전 개막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와 신자들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2010년 말 현재 한국 천주교회 신자 수는 520만5589명,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세대라고 할 수 있는 1965년 말 신자 수는 53만 217명이었습니다. 당시 신자가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살아서 신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그 비율은 전체 신자의 10%에 불과합니다. 이미 선종하신 분들을 고려한다면 그 비율은 훨씬 더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공의회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져다 준 변화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공의회 이후 변화에 대해 살펴보도록 합니다.
 

전례 쇄신과 하느님 말씀에 대한 강조

가장 먼저 이뤄진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전례 분야였습니다. 공의회의 첫 결실인 전례헌장이 반포되고(1963년 12월 4일) 난 직후 1964년 4월 한국 주교회의는 전례 쇄신과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 촉진이라는 전례헌장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산하에 전례위원회를 설치합니다.
 
전례위원회의 첫 결실은 한국어 미사였습니다. 당시까지 미사 전례는 라틴어로 거행했습니다. 신자들은 뜻도 잘 모르는 라틴어를 귀동냥으로 따라 했습니다. 알 수 없는 라틴어를 따라 하기 힘든 신자들은 미사와 상관 없이 묵주기도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말로 미사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획기적 변화였습니다. 주교회의는 공의회 기간인 1964년 10월 로마에서 회의를 열어 1965년 1월 1일부터 자비송, 대영광송, 독서, 복음, 신경, 거룩하시다 등 신자들이 함께 하는 부분은 한국어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변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제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교회의는 우리말 미사 취지가 신자들의 능동적 전례 참여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사제들에게 제대로 시행할 것을 당부하는 서한을 발표했습니다. '미사통상문'으로 지칭되는 우리말 미사는 이후 로마(교황청)의 미사경본 개정 작업에 따른 우리말 번역 작업과 수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됐습니다.
 
그렇지만 미사 전례에서 바뀐 것은 모국어 사용만이 아니었습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제대가 벽에 붙어 있었고 사제는 성찬 전례 때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신자들은 사제 등을 바라보며 미사 전례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 이후 사제는 지금처럼 제대를 중심에 두고 신자들을 바라보며 미사를 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대가 사제와 신자들 사이에 있다는 것은 제대가 상징하는 그리스도를 공동체의 중심에 모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신자석과 제단 사이에는 분리 난간이 설치돼 있었고 신자들은 난간에 무릎을 꿇고 성체를 입으로 받아 모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난간은 모두 치워졌고, 신자들은 서서 손으로 성체를 모십니다. 성당에서 하는 동작들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당에 들어가거나 성당에서 제대를 가로지를 때 지금은 모두 큰 절로 제대를 향해 예를 표시합니다만, 공의회 이전에는 마치 중세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시했습니다. 이 밖에 여성이 미사 복사를 서거나 평신도에게 예외적으로 성체 분배권을 수여하는 것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에 따른 변화들입니다.
 
전례력 개혁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에 따라 이뤄진 변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가 예수 성탄과 예수 부활을 두 축으로 해서 대림시기를 시작으로 성탄시기-연중시기-사순시기-부활시기-연중시기로 1년을 전례주년으로 지낸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입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성인들의 축일이 중심이었습니다. 공의회는 전례 쇄신을 통해 전례주년의 중심은 주님이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경축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에 따라 1969년 지금과 같은 전례력이 마련돼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례 쇄신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느님 말씀 곧 성경에 관한 강조입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미사에서 성찬 전례가 강조됐고 말씀 전례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졌습니다. 이는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들이 "오직 성경만으로!"를 주장한 데 맞서 가톨릭교회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성전(聖傳)과 함께 성사(聖事)를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성경을 소홀히 한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을 통해 하느님 말씀인 성경이 미사 전례에서 더욱 다양하고 풍요롭게 활용될 것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미사에서 말씀 전례도 성찬 전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이 부각됐습니다. 특히 공의회는 계시헌장을 통해 하느님 말씀에 맛들일 것을 강조하면서 성경 번역은 물론 성경 읽기와 성경 보급, 성경 연구 사도직 활성화 등을 제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 교회에서도 성경에 대한 관심이 일고 성경 공부에 집중하는 사도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주교회의 산하에 성서위원회가 설립된 것도 공의회가 끝난 후인 1965년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에는 제대로 다 번역된 신구약 성경이 없었고, 새로운 성경 번역을 추진하던 성서위원회는 1968년 개신교와 함께 공동번역위원회를 구성, 성경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1971년에는 공동번역 신약성경이 1977년에는 공동번역 구약성경이 출간되면서 합본으로 발간됐습니다. 이는 성경에 대한 관심과 함께 교회 일치 촉진이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 함께 작용한 결실이었습니다. 개신교 측에서 공동번역 성경을 사용하지 않아 취지가 무색해지면서 1980년대에 분도출판사가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를 펴냈고, 2005년에는 가톨릭교회의 독자적인 새 번역 성경이 출간됐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맛들일 것을 강조한 공의회 가르침은 일반 신자들을 위한 성경 공부 모임으로 이어졌습니다. 1972년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에서 대학생들을 위한 성서모임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다양한 성경공부 모임들이 생겨났습니다. 최근에는 성경 공부뿐 아니라 성경 필사를 통해서 하느님 말씀에 더욱 맛들이려는 노력들이 계속 확산되고 있습니다.
 
물론 전례 쇄신 운동과 성경 연구 및 보급 운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부터 특히 유럽 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운동들이 운동으로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변화와 쇄신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2년 2월 5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2부] 끝나지 않은 공의회,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사는가?

 

(6) 공의회 이후 변화 ② 위계 중심 교회에서 친교 공동체로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져다 준 획기적 변화 가운데 하나는 교회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는 한 마디로 엄격한 위계 중심의 교계제도로 이뤄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교황이 있고, 그 아래에는 주교들이 있습니다. 주교들 아래에는 신부들이 있고 그 아래에는 하급 성직자인 부제가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이 위계 중심의 교계제도의 지시를 받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교회가 모두 이런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특히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모습은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교회관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공의회는 교회를 무엇보다도 하느님 백성으로 이해했습니다. 세례로 하느님 자녀가 된 신자들은 비록 교회 안에서 수행하는 직무에 있어서는 성직자들과 본질적 차이가 있지만(평신도의 보편 사제직과 성직자의 직무 사제직) 하느님 백성으로서 똑같은 품위와 존엄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교회를 친교 공동체로 보는 '친교의 교회관'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위계 중심의 제도 교회에서 친교 공동체로 전환이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대단히 크게 강조되는 소공동체 운동은 바로 공의회가 제시하는 친교 공동체로서의 교회 모습을 구현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계 중심의 제도 교회가 틀렸다거나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헌장」은 제1장 교회의 신비와 제2장 하느님의 백성에 이어 제3장에서 교회의 위계 조직에 대해 상세히 밝히면서 위계 조직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위계 조직이 하느님 백성을 위한 봉사 조직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 백성인 교회, 친교 공동체인 교회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운 교회관은 교회 통치 혹은 운영 면에서도 변화를 가져다 줬습니다. 우선 주교단 단체성 혹은 주교단성(主敎團性)을 들 수 있습니다. 주교단성이란 주교들이 교황을 단장으로 하나의 주교단을 이뤄 보편 교회(전 세계 교회)에 대해 최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주교단 단체성을 통한 최고 권력은 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하게 행사됩니다.
 
이 주교단 단체성은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닌 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제1부에서 살펴보았듯이, 제1천년기 이후 교회에서는 공의회 결정이 우선하느냐 아니면 교황 권한이 우위에 있느냐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역대 교황들은 공의회 우위설을 단죄했지만 교황과 주교단 관계는 계속해서 껄끄러운 주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870년에 끝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 교리를 확정했고, 이에 따라 주교단은 교황에게 예속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사도단이 보여준 것과 같은 친교 모습과 맞지 않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친교 교회관에 입각해 교황을 단장으로 하는 주교단 단체성 교리를 통해 주교단이 이루는 단체적 일치와 합의체적 (통치) 행위에 대한 교리적 근거를 확립한 것입니다.
 
친교 교회관에 바탕을 둔 주교단 단체성을 보여주는 또 한 가지는 교회와 사회의 주요 현안과 관련해 교황을 자문하는 상설기구인 주교시노드(주교대의원회의)입니다. 주교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있었지만 보편 교회의 교회법적 기구로서 상설화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교들이 의결 투표권을 갖는 공의회와 달리 주교시노드에 참가하는 대의원 주교들은 건의 투표권만 갖습니다. 건의 투표권만 갖는다고 해서 주교시노드의 결정을 교황이 함부로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문기구 성격을 지니지만 주교시노드가 교회법적 기구로 존재하게 된 것은 친교 교회관에 바탕을 둔 주교단 단체성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교황은 주교들 의견을 더욱 존중해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친교 교회관을 반영하는 교회법적 기구로 오래 전부터 지역 교회 차원에서 지역 주교회의와 관구 공의회 등이 있었지만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별 교회인 교구 차원에서 이를 반영하는 교회법적 기구들이 마련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교구 사제평의회와 교구 사목평의회입니다.

개별 교회인 교구의 최고 목자인 교구장 주교는 교구 사제들을 대표하는 사제평의회와, 사제뿐 아니라 수도자와 평신도 등 교구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교구 사목에 반영토록 하기 위한 사목평의회를 의무적으로 두게 돼 있습니다. 사제평의회와 사목평의회는 물론 교구장 자문기구입니다. 따라서 교구장은 자신이 원하면 굳이 사제평의회와 사목평의회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만 생각한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쇄신 정신 특히 친교 교회관을 왜곡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각 본당마다 설치돼 있는 본당 사목협의회(사목평의회) 역시 친교 공동체로서의 교회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을 반영하는 교회법적 기구입니다. 교구장 주교가 합당하다고 판단하면, 본당마다 설치해야 한다고 현행 「교회법전」이 규정하는 본당 사목평의회는 본당 주임신부의 자문기구이지만 본당 신자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 더욱 효과적으로 사목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단지 자문기구라는 법적 이유만으로 주임신부가 사목협의회 의견을 외면한다면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교구 사목평의회나 본당 사목평의회가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기구라는 사실입니다. 평신도들이 교회 운영 또는 사목에 참여할 길을 열어놓은 것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져다준 획기적 변화입니다. 친교 교회관을 바탕으로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를 사목 대상으로 여긴 이전과는 달리 사목 협력자로, 교회 사명에 함께 참여하는 주체로 이해했습니다. 신학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평신도를 위한 공의회'라고 부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인 교회, 친교 공동체인 교회. 여기에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목자인 주교와 그 협조자인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세례와 견진성사로 하느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은총 속에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도 하느님의 영인 성령께서 작용하신다는 것을 공의회는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서로 역할은 다르지만 같은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가 바로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로 이뤄진 하느님 백성인 교회입니다. 신자들은 목자를 존경하며 따르고, 목자는 신자 공동체 안에서 부는 성령의 바람을 존중하는 것, 이것이 친교 공동체인 교회 모습입니다. [평화신문, 2012년 2월 12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2부] 끝나지 않은 공의회,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사는가?

 

(7) 공의회 이후 변화 ③ 교회 일치 끌고, 종교간 대화 밀고



오늘날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교회 일치 및 종교간 대화 협력 노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실이다. 사진은 2011년 10월 27일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열린 세계평화를 위한 종교지도자 모임. [CNS]
 

교회 일치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을 발표할 때부터 새 공의회가 일치를 위한 공의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을 정도로 교회 일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 사안이었습니다.
 
후임 교황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는 1964년 1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 정교회 수석 총대주교인 아테나고라스 1세와 역사적 회동을 한 데 이어 그해 9월 13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에 탈취해 보관하고 있던 사도 성 안드레아 유해를 그리스 파트라에 반환했습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는 그리스 정교회 수호성인이었습니다. 교황은 이를 통해 정교회와 화합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교황은 공의회 폐막 전날인 1965년 12월 7일 1054년에 있었던 콘스탄티노플과의 상호 파문을 911년 만에 철회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합니다.
 
공의회가 끝난 후 바오로 6세는 1967년 7월 터키를 방문, 이스탄불에서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 다시 만났고, 그해 12월에는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가 처음으로 바티칸을 방문합니다.

이에 앞서 교황은 1966년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를 만났고, 이 만남을 계기로 성공회와 가톨릭 교회의 쟁점들을 논의하기 위한 성공회-로마 가톨릭 국제위원회(ARCIC)가 설립됩니다. 바오로 6세는 196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본부를 찾았고, 1973년에는 로마에서 칼케돈 공의회(451년) 때 갈라져 나간 고대 동방교회인 이집트 콥트 교회 총대주교 쉐누다 3세와 그리스도 신앙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합니다.
 
교황은 또 공의회를 준비하기 위해 설치했던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을 공의회가 끝난 후에는 교황청 상설기구로 설치해 일치 문제를 관장하게 합니다. 이 일치 사무국은 1988년 교황청 기구 개편과 함께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약칭 일치평의회)로 개편돼 오늘에 이릅니다.
 
보편교회 차원의 일치 노력은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교황 때 더욱 활발하게 펼쳐졌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특히 정교회와 일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79년에는 이스탄불을 방문, 디미트리오스 1세 총대주교를 만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가톨릭-정교회 합동 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교황은 또 1987년에는 디미트리오스 1세를 바티칸으로 초청한 데 이어 1995년 그 후임 바르톨로메오 1세 총대주교를 초청했습니다. 루마니아(1999)를 비롯해 우크라이나와 아르메니아(2001)를 방문했을 때나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시나이, 예루살렘, 시리아, 그리스까지 성경의 세계를 순례했을 때 정교회와 고대 동방교회들과 일치도 주요 사안이었습니다. 특히 1995년에 발표한 회칙 「하나되게 하소서」는 교회 일치를 위한 교황의 염원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문헌입니다.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는 1978년 이후 해마다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는 가톨릭 대표단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가 있는 이스탄불을 방문하고,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축일에는 정교회 대표단이 로마를 방문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교회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갈라져 나간 개신교 교회들과의 일치 노력 역시 꾸준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교황청 일치평의회는 신앙교리성 등 유관 부서와 협조하면서 정교회와 고대 동방교회들뿐 아니라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침례교, 오순절교회, 복음주의교회 등 주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과 일치를 위한 대화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1999년에는 루터교와 함께 '신앙에 의한 의화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 16세기 종교 분열의 한 원인이 된 의화 교리 문제에 있어서 원칙적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 공동 선언은 2006년 7월 서울에서 가톨릭교회와 세계감리교협의회 그리고 루터교 세계연맹의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일치 노력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닙니다. 정교회 일부 교회들은 특히 동유럽 지역에서 가톨릭교회가 정교회 신자들을 개종시키려 한다며 탐탁치 않은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 성공회와의 일치 노력은 성공회에서 여성 사제 서품을 인정한 것이 암초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갈라진 형제들과 일치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교간 대화

종교간 대화 노력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새롭게 시작됐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공의회가 진행중인 1964년 6월 타종교와의 관계 증진을 위해 비그리스도교 사무국을 설치했습니다. 공의회가 비그리스도교 선언 「우리 시대」(1965년 10월 28일)를 발표한 후 이 선언의 정신에 따라 타종교와 대화를 추진해 온 사무국은 1988년 교황청 기구개편과 함께 종교간대화평의회로 개편했습니다. 종교간대화평의회는 보편교회 차원에서 그리스도인들과 타종교인들과의 상호 이해와 존중을 증대하고 대화와 협력을 증진하고 있습니다. 종교간대화평의회 의장이 해마다 불교와 힌두교, 이슬람교 등 주요 종교의 축제일에 경축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는 것도 그 일환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6년 아시시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종교지도자 모임을 열었고, 아시시 25주년을 맞아 지난해 10월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역시 아시시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지도자 기도 모임을 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교회일치과 종교간 대화

한편 한국 천주교회의 일치 노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일치 교령 「일치의 재건」(1964년 11월 21)을 반포한 이듬해인 1965년 7월 전국 그리스도교 재일치위원회(이하 일치위원회) 설립과 함께 본격화했습니다. 1968년 1월 일치 기도 주간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처음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합동 기도회를 개최하고, 각 교파 대표자 간담회도 마련합니다. 이후 합동 기도회, 순회 기도회가 전국적으로 개최되기도 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일치 노력은 특히 1970년대 이후에는 민주화, 통일, 환경 등 다양한 사회적 현안들에 대해 협력하는 형태로 추진돼 왔습니다. 주교회의 일치위원회는 1990년대부터는 그리스도교 일치 분야만이 아니라 종교간 대화와 협력 분야까지 담당하면서 이름도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교회 일치와 종교간 대화 협력은 오늘날 일치 기도 주간 합동 기도회뿐 아니라 신학자 간담회와 워크숍, 신학생 만남, 종교 상호 방문, 여성 수도자 모임(삼소회)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이나 종교간 대화와 협력 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과 일치와 협력, 타 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이 가능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공의회 문헌들을 살펴볼 때에 더욱 자세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2년 2월 19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2부] 끝나지 않은 공의회,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사는가?

(8) 공의회 이후 변화 ④ 세상 향해 화해와 대화의 손 내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세계와 전 인류 가족과 긴밀히 결합해 있음을 고백했다. 사진은 공의회 도중인 1965년 10월 4일 유엔 총회에서 세계 평화의 증진을 역설하고 있는 교황 바오로 6세.
 

교회와 세상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변화와 관련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한 분야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 혹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이해입니다.
 
4개 헌장과 9개 교령, 3개 선언으로 이뤄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공의회 이후를 살고 있는 교회와 신자 생활의 기본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특별히 다루고 있는 문헌은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입니다. 사목헌장의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는 인류와 인류 역사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1항).
 
공의회 문헌 가운데서 말 그대로 '심금을 울리는' 대목으로 꼽히는 사목헌장의 이 대목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하게 결부돼 있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 이전에 교회는 세상을 이런 시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공의회 이전에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은 이원론에 가까웠습니다. 이원론이란 한 마디로 세상이 영과 육, 성과 속, 정신과 물질, 선과 악의 대립 구조로 진행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물론 교회가 이원론을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이런 이원론을 언제나 단호히 배격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신자들의 실제 삶에는 이원론적 경향이 적잖게 배 있었습니다. 교회 일을 하는 성직자나 세속을 떠난 수도자에 비해 세속에 파묻혀 사는 평신도는 열등하다는 생각, 성을 속되다고 보고 독신이나 동정 생활을 결혼 생활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생각, 현세 삶은 귀양살이에 불과하기에 내세만을 본향으로 여겨 그리워하는 생각 등이 바로 이원론적 경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영혼의 세 가지 원수 곧 삼구(三仇)로, 마귀와 세속과 육신을 들면서 마귀만 아니라 세속과 육신까지도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성과 속, 영혼과 육신을 대립 구조로 이해하는 이원론적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구원의 방주로서 언제나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 천상 세계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교회가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보는 눈은 다소 비하적이고 경멸적이었습니다. 나아가 세속의 그릇된(?) 사조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교회는 오류표를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런 이원론적 경향에는 세상을 불변적이며 정적으로 이해하는 세계ㆍ역사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현세를 귀양살이로 여기고, 내세의 천국만을 그리워하는 것을 당연시 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와 역사의 변화와 발전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을 고정된 실재로만 여기는 정서와 무관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교회는 이런 세계관에서 벗어납니다. 바깥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그리스도 제자 공동체의 순수함과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세상과 대화하며 세상과 화해합니다. 교회는 단지 세상을 위해 혹은 세상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세상 안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한 마디로 전 인류 가족과 함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는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비롯하는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거룩하지만, 또한 나약한 인간들로 이뤄진 공동체라는 것도 새롭게 인식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돼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긴밀하게 결합해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헌장 첫 대목에 나오는 저 가슴뭉클한 메시지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사람들이 몸을 부비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인 세속은 더 이상 속되고 불결한 영역이 아닙니다. 세상과 세상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 하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히브 1,10 참조). 특히 인간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가장 존엄한 존재입니다. 비록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빛을 잃었지만 하느님의 아들 성자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인류와 세상을 다시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사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도 이제 세상에 파견돼 세상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교회는 이제 세상 사람들을 향해 구원의 방주인 교회 안에서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자신 안에 숨겨진 보화를 찾으라고,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된 고귀하고 존엄한 인간 모습을 되찾아 함께 기쁨을 누리자고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신 그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삶의 자리를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개선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초대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교회는 또한 세상으로부터도 도움을 얻습니다. 공의회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교회를 역사의 사회적 실재로 또 그 누룩으로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듯이, 바로 교회도 인류의 역사와 발전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지 않는다.…〔중략〕…교회는 그 공동체 안에서는 물론, 각각의 자기 자녀들 안에서 온갖 계층이나 신분의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고 있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닫고 있다. 가정, 문화, 경제, 사회, 정치의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인간 공동체를 향상시키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교회 공동체에…적지 않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사목헌장 44항).
 
이러한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해 달라진 모습입니다. 역사는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 변화하고 발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서 영과 육, 정신과 물질, 성과 속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할 때까지 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회가 바라보는 세계관, 역사관은 사목헌장의 다음 구절이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무대인 이 세계에는 인간의 노력과 실패와 승리가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가 창조주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보존된다고 믿는다. 죄의 노예 상태에 떨어졌으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악의 권세를 쳐부수시고 해방시키신 이 세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변혁되고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사목헌장 2항). <끝> [평화신문, 2012년 2월 26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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