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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2차 바티칸 공의회5-8: 공의회 이후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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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2부] 끝나지 않은 공의회,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사는가? (5) 공의회 이후 변화 ① 모국어로 미사 참례, 성경에 관심 증폭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미사 모습. 영성체 할 때는 제단과 신자석을 분리시키는 난간 앞에 무릎을 꿇고 입으로 성체를 모셨다. 오늘의 가톨릭신자들은 50년 전 개막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와 신자들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2010년 말 현재 한국 천주교회 신자 수는 520만5589명,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세대라고 할 수 있는 1965년 말 신자 수는 53만 217명이었습니다. 당시 신자가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살아서 신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그 비율은 전체 신자의 10%에 불과합니다. 이미 선종하신 분들을 고려한다면 그 비율은 훨씬 더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공의회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져다 준 변화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공의회 이후 변화에 대해 살펴보도록 합니다. 전례 쇄신과 하느님 말씀에 대한 강조 가장 먼저 이뤄진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전례 분야였습니다. 공의회의 첫 결실인 전례헌장이 반포되고(1963년 12월 4일) 난 직후 1964년 4월 한국 주교회의는 전례 쇄신과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 촉진이라는 전례헌장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산하에 전례위원회를 설치합니다. 전례위원회의 첫 결실은 한국어 미사였습니다. 당시까지 미사 전례는 라틴어로 거행했습니다. 신자들은 뜻도 잘 모르는 라틴어를 귀동냥으로 따라 했습니다. 알 수 없는 라틴어를 따라 하기 힘든 신자들은 미사와 상관 없이 묵주기도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말로 미사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획기적 변화였습니다. 주교회의는 공의회 기간인 1964년 10월 로마에서 회의를 열어 1965년 1월 1일부터 자비송, 대영광송, 독서, 복음, 신경, 거룩하시다 등 신자들이 함께 하는 부분은 한국어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변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제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교회의는 우리말 미사 취지가 신자들의 능동적 전례 참여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사제들에게 제대로 시행할 것을 당부하는 서한을 발표했습니다. '미사통상문'으로 지칭되는 우리말 미사는 이후 로마(교황청)의 미사경본 개정 작업에 따른 우리말 번역 작업과 수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됐습니다. 그렇지만 미사 전례에서 바뀐 것은 모국어 사용만이 아니었습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제대가 벽에 붙어 있었고 사제는 성찬 전례 때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신자들은 사제 등을 바라보며 미사 전례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 이후 사제는 지금처럼 제대를 중심에 두고 신자들을 바라보며 미사를 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대가 사제와 신자들 사이에 있다는 것은 제대가 상징하는 그리스도를 공동체의 중심에 모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신자석과 제단 사이에는 분리 난간이 설치돼 있었고 신자들은 난간에 무릎을 꿇고 성체를 입으로 받아 모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난간은 모두 치워졌고, 신자들은 서서 손으로 성체를 모십니다. 성당에서 하는 동작들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당에 들어가거나 성당에서 제대를 가로지를 때 지금은 모두 큰 절로 제대를 향해 예를 표시합니다만, 공의회 이전에는 마치 중세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시했습니다. 이 밖에 여성이 미사 복사를 서거나 평신도에게 예외적으로 성체 분배권을 수여하는 것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에 따른 변화들입니다. 전례력 개혁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에 따라 이뤄진 변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가 예수 성탄과 예수 부활을 두 축으로 해서 대림시기를 시작으로 성탄시기-연중시기-사순시기-부활시기-연중시기로 1년을 전례주년으로 지낸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입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성인들의 축일이 중심이었습니다. 공의회는 전례 쇄신을 통해 전례주년의 중심은 주님이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경축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에 따라 1969년 지금과 같은 전례력이 마련돼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례 쇄신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느님 말씀 곧 성경에 관한 강조입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미사에서 성찬 전례가 강조됐고 말씀 전례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졌습니다. 이는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들이 "오직 성경만으로!"를 주장한 데 맞서 가톨릭교회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성전(聖傳)과 함께 성사(聖事)를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성경을 소홀히 한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을 통해 하느님 말씀인 성경이 미사 전례에서 더욱 다양하고 풍요롭게 활용될 것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미사에서 말씀 전례도 성찬 전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이 부각됐습니다. 특히 공의회는 계시헌장을 통해 하느님 말씀에 맛들일 것을 강조하면서 성경 번역은 물론 성경 읽기와 성경 보급, 성경 연구 사도직 활성화 등을 제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 교회에서도 성경에 대한 관심이 일고 성경 공부에 집중하는 사도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주교회의 산하에 성서위원회가 설립된 것도 공의회가 끝난 후인 1965년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에는 제대로 다 번역된 신구약 성경이 없었고, 새로운 성경 번역을 추진하던 성서위원회는 1968년 개신교와 함께 공동번역위원회를 구성, 성경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1971년에는 공동번역 신약성경이 1977년에는 공동번역 구약성경이 출간되면서 합본으로 발간됐습니다. 이는 성경에 대한 관심과 함께 교회 일치 촉진이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 함께 작용한 결실이었습니다. 개신교 측에서 공동번역 성경을 사용하지 않아 취지가 무색해지면서 1980년대에 분도출판사가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를 펴냈고, 2005년에는 가톨릭교회의 독자적인 새 번역 성경이 출간됐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맛들일 것을 강조한 공의회 가르침은 일반 신자들을 위한 성경 공부 모임으로 이어졌습니다. 1972년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에서 대학생들을 위한 성서모임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다양한 성경공부 모임들이 생겨났습니다. 최근에는 성경 공부뿐 아니라 성경 필사를 통해서 하느님 말씀에 더욱 맛들이려는 노력들이 계속 확산되고 있습니다. 물론 전례 쇄신 운동과 성경 연구 및 보급 운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부터 특히 유럽 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운동들이 운동으로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변화와 쇄신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2년 2월 5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2부] 끝나지 않은 공의회,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사는가?
(6) 공의회 이후 변화 ② 위계 중심 교회에서 친교 공동체로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2부] 끝나지 않은 공의회,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사는가?
(7) 공의회 이후 변화 ③ 교회 일치 끌고, 종교간 대화 밀고 - 오늘날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교회 일치 및 종교간 대화 협력 노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실이다. 사진은 2011년 10월 27일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열린 세계평화를 위한 종교지도자 모임. [CNS]
[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2부] 끝나지 않은 공의회,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사는가? (8) 공의회 이후 변화 ④ 세상 향해 화해와 대화의 손 내밀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세계와 전 인류 가족과 긴밀히 결합해 있음을 고백했다. 사진은 공의회 도중인 1965년 10월 4일 유엔 총회에서 세계 평화의 증진을 역설하고 있는 교황 바오로 6세. 교회와 세상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변화와 관련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한 분야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 혹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이해입니다. 4개 헌장과 9개 교령, 3개 선언으로 이뤄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공의회 이후를 살고 있는 교회와 신자 생활의 기본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특별히 다루고 있는 문헌은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입니다. 사목헌장의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는 인류와 인류 역사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1항). 공의회 문헌 가운데서 말 그대로 '심금을 울리는' 대목으로 꼽히는 사목헌장의 이 대목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하게 결부돼 있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 이전에 교회는 세상을 이런 시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공의회 이전에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은 이원론에 가까웠습니다. 이원론이란 한 마디로 세상이 영과 육, 성과 속, 정신과 물질, 선과 악의 대립 구조로 진행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물론 교회가 이원론을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이런 이원론을 언제나 단호히 배격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신자들의 실제 삶에는 이원론적 경향이 적잖게 배 있었습니다. 교회 일을 하는 성직자나 세속을 떠난 수도자에 비해 세속에 파묻혀 사는 평신도는 열등하다는 생각, 성을 속되다고 보고 독신이나 동정 생활을 결혼 생활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생각, 현세 삶은 귀양살이에 불과하기에 내세만을 본향으로 여겨 그리워하는 생각 등이 바로 이원론적 경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영혼의 세 가지 원수 곧 삼구(三仇)로, 마귀와 세속과 육신을 들면서 마귀만 아니라 세속과 육신까지도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성과 속, 영혼과 육신을 대립 구조로 이해하는 이원론적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구원의 방주로서 언제나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 천상 세계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교회가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보는 눈은 다소 비하적이고 경멸적이었습니다. 나아가 세속의 그릇된(?) 사조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교회는 오류표를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런 이원론적 경향에는 세상을 불변적이며 정적으로 이해하는 세계ㆍ역사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현세를 귀양살이로 여기고, 내세의 천국만을 그리워하는 것을 당연시 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와 역사의 변화와 발전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을 고정된 실재로만 여기는 정서와 무관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교회는 이런 세계관에서 벗어납니다. 바깥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그리스도 제자 공동체의 순수함과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세상과 대화하며 세상과 화해합니다. 교회는 단지 세상을 위해 혹은 세상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세상 안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한 마디로 전 인류 가족과 함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는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비롯하는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거룩하지만, 또한 나약한 인간들로 이뤄진 공동체라는 것도 새롭게 인식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돼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긴밀하게 결합해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헌장 첫 대목에 나오는 저 가슴뭉클한 메시지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사람들이 몸을 부비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인 세속은 더 이상 속되고 불결한 영역이 아닙니다. 세상과 세상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 하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히브 1,10 참조). 특히 인간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가장 존엄한 존재입니다. 비록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빛을 잃었지만 하느님의 아들 성자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인류와 세상을 다시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사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도 이제 세상에 파견돼 세상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교회는 이제 세상 사람들을 향해 구원의 방주인 교회 안에서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자신 안에 숨겨진 보화를 찾으라고,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된 고귀하고 존엄한 인간 모습을 되찾아 함께 기쁨을 누리자고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신 그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삶의 자리를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개선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초대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교회는 또한 세상으로부터도 도움을 얻습니다. 공의회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교회를 역사의 사회적 실재로 또 그 누룩으로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듯이, 바로 교회도 인류의 역사와 발전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지 않는다.…〔중략〕…교회는 그 공동체 안에서는 물론, 각각의 자기 자녀들 안에서 온갖 계층이나 신분의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고 있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닫고 있다. 가정, 문화, 경제, 사회, 정치의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인간 공동체를 향상시키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교회 공동체에…적지 않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사목헌장 44항). 이러한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해 달라진 모습입니다. 역사는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 변화하고 발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서 영과 육, 정신과 물질, 성과 속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할 때까지 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회가 바라보는 세계관, 역사관은 사목헌장의 다음 구절이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무대인 이 세계에는 인간의 노력과 실패와 승리가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가 창조주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보존된다고 믿는다. 죄의 노예 상태에 떨어졌으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악의 권세를 쳐부수시고 해방시키신 이 세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변혁되고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사목헌장 2항). <끝> [평화신문, 2012년 2월 26일, 이창훈 기자] 0 2,860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