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수)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현대 영성: 하느님의 존재가 의심되는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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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10 ㅣ No.1877

[현대 영성] 하느님의 존재가 의심되는 이들에게

 

 

몇 해 전 어느 청년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신부님, 하느님이 먼저 있었나요? 아니면 하느님을 생각한 인간의 뇌가 먼저 있었나요?” 이 질문은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 이성이 하느님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냐’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당연히 하느님이 먼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창조론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을 제외하고 이 질문에 답을 하려고 하면 왠지 인간이 자기 위안을 얻거나 한계를 회피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절대적인 존재를 만들어 놓고 믿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필자 역시 청년 시절, 신의 존재와 죽음, 무죄한 이의 고통과 신의 방관에 대해 많은 시간 고민을 했었기 때문에, 그 청년의 질문에 공감의 미소와 함께 이런 대답을 했다. “더 많이 사랑해 보세요. 그럼 하느님이 계심을 체험할 수 있을 거예요.” 사실 그 청년의 질문은 과일 가게에서 생선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의 이성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앎에 집착할 때 진정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했을 때 우리는 이성을 넘어 우리를 압도하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 그분의 섭리에 눈을 뜨게 된다. 새로운 차원에서 하느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가령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베드로는 더 이상 스승을 배반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깊은 영적 체험이나 사랑의 체험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게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이면서 동시에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분이다. 우리 곁에 계시지만 우리를 초월해 계신 분이시며, 우리의 이성으로 모두 파악할 수 없는 더 크신 분이다.

 

사실 복음서에 보면(루카 4,31-37 참조)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가 먼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아보고 그분을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분의 사랑을 깨닫지도 못했다. 오히려 자신을 멸망시키실 분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앎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고백하게 할 수 있지만, 그분을 통한 구원에 참여하는 데에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오히려 믿음 안에서 더 많이 사랑할 때 하느님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 같다. 얼마 전 어느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들려준 감동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린 딸이 물었다. “아빠, 엄마는 왜 나를 낳았어?” 그러자 아버지가 답을 했다. “그것은 엄마 아빠가 너무도 사랑해서 그 사랑을 가장 소중한 사람과 나누고 싶어서 너를 낳았단다. 너는 엄마 아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란다.” 이 아버지의 답변은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을 상기시킨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너무도 서로를 사랑해서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그 엄청난 사랑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끼게 된다. ‘마주 보는 사랑’은 오직 상대를 위한 사랑의 충만이지만 ‘함께 나누는 사랑’은 모두를 위한 더 큰 사랑의 비움이다.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함께 나누고자 우리를 매일매일 당신의 품으로 초대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배우고 나누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사랑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이 체험한 것처럼 “하느님은 사랑”(1요한 4,16)이시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이성의 영역을 넘어 사랑이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다. 다만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준비할 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주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마태 25,13 참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준비는 어떤 것이 있을까? 너무도 분주히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준비는 ‘고요히 머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안다고 고백하는 더러운 영에게도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라고 말씀하셨다. ‘지식에 의존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떠들고 다니지 말고 조용히 주님 곁에 머물러라, 그리고 네 안에 있는 교만의 영을 나가게 할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믿고 의탁하여라’는 의미로 들린다. 고요히 겸손하게 그분 곁에 머물며 그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묵상하고, 그 큰 사랑을 깨닫고 나누며 살아갈 때, 하느님 사랑의 영이 온 누리에 충만해질 것이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 가운데 드러난다.

 

[2022년 10월 9일(다해) 연중 제28주일 가톨릭마산 2면, 박재찬 안셀모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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