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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에세이32-35: 교회의 조직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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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22 ㅣ No.729

교회사 에세이 (32) 교회의 조직과 삶 (1)

 

 

박해 중에도 그리고 박해를 벗어나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된 이후에도, 고대 교회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이 세상에 현실화할 것인가?’였습니다. 현실화란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어떻게 가시적 통일성을 갖게 하고 조직화 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신앙의 신비의 전례적 거행의 통일과 그리스도 신앙 고백의 공식화야말로 가장 앞선 주제들이어야 했고, 그리스도교적인 도덕의 실천 또한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현실화를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교회의 편에서 볼 때 이것들은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국가 혹은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원칙을 정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이미 형성된 전통과 성경의 인도를 통해 현실에 상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이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사적 현실화의 측면을 살펴보겠습니다.



특별 교회와 지역 교회

그리스도교는 몇몇 사람들의 모임만 있다면 어디든지 공동체를 건설하였고, 공동체를 통하여 진리에로 사람들을 초대하였고, 모인 이들은 열렬한 삶과 도덕적으로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가시적 공동체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공통적인 세례와 성찬례의 거행, 그리고 은혜와 각 개인의 카리스마(은사) 위에 건설되었고, 이 외에도 다양한 임무들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충만한 의미에서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개별 교회는 통교와 친교를 통해 하나이고 참된 의미의 교회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이 교회란 하나의 지역에서 개별 공동체의 너머에 있는 지역 공동체들의 총합과 그 지역 전체를 의미하는 ‘교회’였습니다.

서로마의 전통에 따르면 보편 교회가 중앙 집권적 조직을 갖는 것이 친근하고 자연스런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로마 교회의 주교, 즉 교황의 중심적 권위가 조직적, 법률적 그리고 신학적 영역에서도 중심적 권위를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교회의 모습은 주로 서방에서 전개되고 성장하였고,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교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에서부터 합의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위에 짧게 언급된 것처럼 혹은 지금의 교회의 모습처럼 중앙 집권적인 하나의 조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모습은 세상 전체를 품는 공동체의 그물망과 같았고, 그 응집력은 지역마다 동일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개별 혹은 특별 교회들의 자율권이 존중되면서 교회들 사이에 ‘차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전례를 예로 든다면, 서로 다른 전례의 순서와 양식, 날짜와 축제들을 갖고 있었고, 교회의 구조는 지역적 특별함을 가졌습니다. 규율적 측면에서도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이 외에도 신약성서의 정경은 오랜 시간 다르게 갈라져 있었고, 신앙 고백의 형식과 내용도 서로 같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현상은 공동체의 신심들, 즉 기도와 단식과 보속 등에서도 같은 현상을 보였습니다.

신학적 측면에서도 고대 교회는 다양성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교부들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교육과 조직 그리고 전통과 전망에서 서로 다름을 발견합니다. 개별, 특별 교회들은 그들의 역사 문화적 조건의 다양성에 따라 자신들의 고백들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리아나 혹은 아프리카 그리고 갈리아에서 신앙의 고백들이 서로 동일한 형식을 띄지 않았었습니다. 교회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잘 알고 있었고, 이것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 일치의 증거로 자리매김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15년 11월 22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33) 교회의 조직과 삶 (2)

 

 

우리는 지금 고대 교회의 초기 교회 공동체들이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성장해 나가고 있음을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교회는 자신들의 이런 다양성이란 측면을 온전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들의 관계 안에서 이런 다양성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고,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교회 생활에서의 다름과 다양성은 오히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증거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불일치와 다툼과 논쟁들도 종종 그들 안에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단일화하려는 의지가 고대 교회의 특성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지역 교회들의 언어적 상이성 안에서도 같은 믿음과 그리스도의 같은 말씀을 선포한다는 확신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었고, 단일화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모든 개별 교회들도 사도적 기원의 토양 위에 세워졌음을 주장했지만, 서로를 존중한 사실이 이것을 뒷받침 해줍니다.

실제로, 여러 지역의 교회들은 자신들의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였습니다: 즉 자기들의 도시와 지역에서 어떤 사도가 설교했으며, 자신들의 교회는 그분에 의해서 설립 되었고, 그분이 첫 번째 주교로 착좌했으며, 그곳에서 죽고 묻히셨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렇게 개별 교회들은 자신들이 사도적 전통에 머물고 있다는 확신 안에서 개별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성장하지만, 한 사도가 다른 사도들과 일치한 것처럼 다양한 교회들은 서로의 일치를 이루어 갔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하나되어 가는 것은, 믿음에서의 일치와 지역과 개별 교회들 간의 통교를 통해서 근본적으로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어로는 koinonia(코이노니아), 라틴어로는 communio(꼼무니오)로 표현되는 이 ‘친교’ 개념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개의 용어는 모두다 ‘통교’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또 교회가 같은 믿음 안에 모여진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란 의미에서 교회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시초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 그리스도인들 간의 하나 됨을 통해 개별 교회들의 친교를 이루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하였고, 이 친교는 분명한 형식 안에서 특히 성찬례의 거행에서 실현됩니다. 성찬례의 거행은 그리스도와 하나 됨과 교회와 하나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찬례의 장소는 지역의 교회였습니다. 성찬례의 거행자들은 거기에서 하나의 빵과 공통의 믿음의 고백과 똑같은 희망 안에서 온전하게 친교를 경험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4세기에는 ‘친교’란 낱말이 성찬례를 설명하는데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큰 도시들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곳에 모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4세기부터는, 적어도 의미와 목적에 따라 설립된 전례 거행에 있어서의 며칠 동안은 도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했고, 그렇게 그들은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와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투르의 교회에서 이런 것들이 보여집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거행할 장소를 갖지 못하는 경우에, 그곳에 각각의 교회들의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성찬례는 주교의 인도에 따라 공식적으로 거행되었고, 주교는 친교의 표징이었으며, 이름 붙여진 지역 교회들에 모인 공동체에게도 이 성찬례의 축성된 ‘빵의 조각’들이 보내졌습니다. 이 빵들은 성작 안에 놓여 졌고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을 연결하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공동체와의 친교가 단절된 경우가 아닌, 합당한 이유로 이 거행에 참석하지 못한 이에게 ‘빵’이 나누어짐이 확인되기도 합니다. [2015년 12월 27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34) 교회의 조직과 삶 (3)


 

초기 교회 공동체들은 다양성 안에서의 점점 하나 됨과 일치를 지향하며 성장하게 됩니다. 지난 호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친교’란 개념 안에서 그들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것의 가장 두드러진 표지는 친교라고도 불리던 ‘성찬례’였습니다. 이런 ‘친교’는 서로 다른 공동체들 사이에서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 교회 공동체들 간의 친교의 표지로 중요하게 여겨지고 기능했던 것을 들라면 그것은 ‘서신 교환’이었을 것입니다. 초기 1세기경에 다양한 교회들 간의 빈번한 서신 교환은 특징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들 중에 성경이 아닌 가장 오래된 문서는 로마의 공동체로부터 코린토의 공동체에 보내진 소위 말하는 ‘클레멘스의 첫 번째 편지’일 것입니다. 이 서신들은 여러 지역의 교회들이 서로를 성장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교회 공동체들은 서로간의 소통을 원했고, 특히 어려움과 분쟁의 상황에서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있음이 발견됩니다.

이 서신들의 어조는 주로 권고, 포교, 비평, 지적, 교정, 지도 등으로 매우 다양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들 간에 이미 법적인 의존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친교는 내면적으로 서로 동등한 교회라는 생각에 상응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서기 160-170년경에 코린토의 주교 디오니시오(Dionigi)가 자신이 어떤 법적인 권한도 가지 않는 지역의 교회들과, 심지어 대단히 멀리 떨어진(예 : 스파르타, 아테네, 로마 등) 여러 교회들에 일련의 편지들을 씁니다. 이 편지들의 주제들은 주로 그 시대의 주된 염려들과 관련된 것으로, 올바른 믿음, 이단, 평화와 일치에 대한 자발적 참여와 이 외에도 그리스도교적인 열성과 도덕적으로 완전한 삶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편지에서는 권고 받는 교회의 사도적 기원의 찬란함 혹은 과거의 모범적 모습들이 기억되었고, 칭찬과 위로의 말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성경의 해설과, 성덕에 대한 고양과, 사목적인 지도 등에 대한 가르침들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이외에도 죽음, 주교의 선출 그리고 박해와 새로운 이단의 위협들에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도 질문과 조언들을 주고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서신의 교환들은 서로의 앎을 깊게 하였고 그들을 가족처럼 가깝게 연결하였습니다. 이 서신들은 구체적인 상황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서들로 보관되었고, ‘친교’의 살아있는 증거처럼 매번의 모임마다 받아들여졌습니다. 사실 우편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서신들을 보낸다는 것은 공동체들 간의 아주 긴밀한 접촉의 결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서신들은 전문적인 그리스도교 순회 설교자들이나 적당한 사람들 편에 보내졌고, 이런 소식 전달자들은 수신처에 도착하면 거기서 무료로 숙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소통과 친교를 강화하였는데, 이런 손님에 대한 환대는 고대 교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덕이었습니다. 고대 교회에서의 환대는 그리스도교적 실천처럼, 그리고 믿음에 있어서 통교의 숨겨진 또 다른 표현의 하나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서신 교환에서의 남용을 피하기 위해서 주교는 서신 전달자에게 외부 공동체들에서 그의 정체성을 증거할 것을 함께 주어 보냈습니다: 그것은 ‘친교의 편지’나, 추천의 편지 혹은 평화의 편지라고 불렸는데, 이런 공인 문서는 실천적인 면에서의 장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개별 그리스도인들과의 아주 많은 접촉에 있어서 정규적인 교환을 보증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실천에 있어서 문제들도 생기게 되는데 이 경우는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016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35) 교회의 조직과 삶 (4)


 

교회는 성찬례와 서신 교환을 통하여 ‘친교와 일치’를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서신 왕래에 있어서는 몇 가지의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주 로 그런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몇몇의 주교들이 이단과 혹은 개인적인 죄로 인해 이 ‘친교’에서 제외되는 이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주교들의 공인 편지들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친교와 일치’를 잃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주교들을 제외한, 정통 주교들의 목록을 공동체 안에 비치해야 할 필요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실제로, 죄와 분쟁의 결과로 ‘친교’가 줄어들기도 하는데, 이것은 교회에 매우 힘들고 어려운 경험이었습니다. 왜냐면 마치 단일성과 평화처럼 ‘친교’란 그 시대 교회에 있어서 하나의 현실이고 의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역사의 흐름 안에서 현실 교회는 여러 개의 교회들로 쪼개지면서, 보편 교회는 그의 친교와 일치를 지켜내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죄와 이단은 지역 교회들과 개별 교회들간의 일치라는 끈을 약하게 했지만, 또한 이런 분열은 공동체 자체의 내부에서도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후자의 경우, 교회는 파문의 조처를 취했는데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친교’로부터 축줄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묘사했던 교회 구조에서 ‘친교’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자는 누구나가 교회의 존재 이유를 실현하기 위하여 다른 이들을 친교에서 제외시킬 권한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주교가 신자와 사제들 혹은 다른 주교들에 대해서 그런 권한을 행사하였고,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 신자 혹은 공동체가 주교에 대해서 같은 권한을 갔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는 상당히 예외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호간의 ‘친교’에서의 축출을 의미하는, 파문의 가능성은 유쾌하지 않은 상황을 초래했고 교회의 혼란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규율의 문제들과 혹은 권력의 이유들 때문에 발생된 지속적인 분쟁 안에서 ‘친교’도 ‘파문’도 자신에게 유용한 전략적 무기처럼 이용되고 남용되는 경우가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적 통교와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교적 일치와 합의를 가르는, 근본으로부터 번민하게 만드는 원칙들이 되기에 이릅니다.

지역 교회와 개별 교회들간의 일치의 실천에 있어서 시노드(synodo)와 공의회(concilio)가 다시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2세기의 하반기의 중반쯤부터 여러 차례의 시노드들이 열립니다. 이런 모임에는 같은 관할 구역의 이웃한 교회들이 서로 모였고, 이후에 시노드는 원칙적으로는 신자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모든 교회들의 모임이 됩니다. 이 시노드에는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교회적 질서와 관계된, 교의적인, 그리고 전례와 규율에 관계된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해서 주교들이 교회들의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공동의 결정들은 공통의 실천을 가져왔고 그것을 통해서 지역 교회의 일치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결정들은 다른 지역의 모든 교회들에게도 기록을 통해서 통보되었습니다. 2세기 후반의 초기 시노들의 역사적 의미는 그리스도교의 특별한 조류인 단성론(monotesimo)이란 이단의 발생과 이 외에, 개별 교회들간의 부활절의 날짜에 관한 논쟁들이나, 주로 보편 교회의 예배와 관련된 문제들이었습니다. 비록 시노드가 모든 이견을 좁히지는 못했을 지라도, 시노드는 친교를 실현하기 위한 그리고 어려운 때에 교회를 구하는 이상적인 도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주교직을 통해서 지역 교회들을 넘어 교회의 일치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합의를 도출해 내지 못하고 저항이 있는 경우 다수가 소수에게 ‘친교’를 지키기 위한 의무를 지우기 시작합니다. 자연스럽게 시노드의 결정과 실천에 있어서 주교들과 지역 교회들 간의 권위의 불균형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큰 도시의 주교들은 그들 지역의 교회의 인도자로서의 역할을 맡기 위해 피할 수 없이 공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교회는 완전할 수는 없지만, 시노드를 통해 발생하는 문제들 안에서 또 하나의 일치를 이루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입니다. [2016년 1월 10일 주님 세례 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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