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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에세이61-64: 분쟁, 이단과 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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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17 ㅣ No.759

교회사 에세이 (61) 분쟁, 이단과 열교 (1)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언제나 일치와 단일성으로 수놓인 아름다운 기록만은 아닙니다. 오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유물의 아름다움처럼 수많은 성공과 그 만큼의 분열과 실패의 자국이 선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 분쟁은 이미 간략히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태동기에 이미 유다이즘과의 충돌에서 비롯되었고, 이런 충돌은 아주 조악하고 야비한 수준에서부터 높은 지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전파되는 과정을 통해서는 국가 종교 예절에 대한 불충실을 이유로 국가 권력이 폭력적으로 개입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충돌, 박해는 그리스도교가 주변 환경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방어하고 거리를 유지하는데 항상 어려움을 갖게 했고, 특히 국가라는 권력 앞에서 자신의 자유를 지키는 데 전력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다툼의 시간을 견디어 낸 후의 평화의 시간은 아주 짧았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교가 그 체계를 세우는 시기에 새로운 대립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갈등의 내용은 교회의 규율과 신앙의 고백에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갈등은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근원적인 논쟁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서로가 서로를 옳은 신앙에서 벗어났다고 고발하였으며 타협이 있을 수 없는 그런 논쟁이었습니다.

 

다툼과 논쟁이 신앙인들에게 구속력이 있는 가르침으로 이해되던 교의로 그 방향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이런 논쟁을 통해 교회는 정통으로부터 이탈을 가려내고, 신앙의 형식과 올바른 교의에 대한 확실한 규정을 확립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이런 교의적 논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세기경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고대 교회가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한 것이 바로 영지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굉장히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설명하기에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개략하면 영지주의는 구원에 대한 자립적 종교로 2세기 중반에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영지주의는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근본적인 비관주의에 기초하고, 이원론적 사고로 그것을 설명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세상은 하위의 신의 업적입니다. 세상은 마치 하나의 비극적인 창조물입니다. 상부의, 빛의 세상의 재앙으로 이 빛의 파편들이 하위의 영역에 떨어지면서 이 물질 세상이 창조된 것입니다. 결국 빛의 파편들이 하위의 영역에 떨어져 물질에 갇혀진 형국입니다. 이 조각들이 인간의 참된 영혼을 구성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기원과 조건에 대한 앎(영지, gnosi)을 통해서 다시 원래의 세상, 상부의 세상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자신들을 돕기 위해 육체가 되어 오신 구세주의 개입을 통해서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고 다양한 교의적 체계를 가진 독특한 하나의 운동이었습니다. 종교적 공동체의 형태도 띠었지만, 철학적 학교의 성격 그리고 개인주의 혹은 마술적 요소를 띠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세상과 구원에 관한 그들의 교의를 완성해 가면서 그리스도교 성경적 요소를 빌리기도 하였고, 교회의 실천을 모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그들을 그리스도교의 이단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에 대항하여 교회는 무엇보다도 창조주 하느님과 구세주 하느님의 정체성을 보호하고자 하였습니다. 창조된 세상의 선함과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의 보편성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창시자 마니(Mani)의 이름을 따 마니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영지주의는 아우구스티노 교부의 시대까지 존속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들과 대항하면서 방법과 형식에 있어서 발전하게 되지만, 한편으로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2016년 7월 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62) 분쟁, 이단과 열교 (2)

 

 

초기의 이단들 중에 몬타누스주의(Montanismo)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2세기 중반 프리기아(Frigia)에서 시작되었고, 창시자의 이름을 따 몬타누스주의라고 불렸습니다. 그의 협력자로는 예언자 프리스카(Prisca)와 막시밀라(Massimilla)가 있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도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몬타니스트들은 금욕과 엄격한 규율을 실천했고, 마지막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정 속에 살았으며, 자신들을 타협과 화해를 받아들이는 나태한 교회로부터 영적으로 구별되는 그리스도교의 참된 엘리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특히 도덕과 속죄의 규정이 매우 이완되었다고 교회와 격렬하게 싸우게 됩니다.

3세기에 접어들면 교회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교의적 논쟁들에 휘말리게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둘러싼 진술들,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 개념의 문제들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6세기까지 지속되게 됩니다.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뻴라지아니즘인데요, 이 논쟁은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개념과 ‘죄와 은총’에 관한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실천에 있어서 상이점과 문제를 드러냈던 이단입니다. 동방 교회는 뻴라지오(Pelagio)의 ‘인간과 은총’에 대한 신학적 지평을, 아프리카 교회를 이끌던 아우구스티노 주교처럼 단죄합니다. 뻴라지오의 사상은 금욕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역량에 대해 아주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는 ‘인간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담의 죄의 흔적은 세례로 온전히 지워졌기에 인간은 선을 온전히 행할 수 있고,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결정을 이룰 수 있도록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에 따르면 선에 대한 선택과 완수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지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인간의 업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그들을 거슬러 아담의 죄의 결과로 인간은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기우는 경향을 갖기에, 더 이상 선을 실천할 상태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있다.’고 응답합니다. 뻴라지오의 주장은 특히 아프리카와 동방의 교회에서 곧바로 배척됩니다.

이런 이단들은 교회의 일상적 실천 안에서 또 다른 문제들을 생겨나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3세기 중엽의 이단들의 세례에 관한 논쟁입니다. 로마와 아프리카의 주교들은 정통 교회로 돌아오고자 이단을 버린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치를 이루지 못합니다. 아프리카와 거의 모든 동방은 이런 경우, 그들이 반드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고 실행했는데, 그들을 세례 받지 않은 자로 간주하는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관습은 ‘이단은 성령을 받지 못한다.’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로마 교회는 이들에 대한 재세례의 관습이 없었습니다. 그가 ‘세례적 믿음의 고백과 올바르고 유효한 형식 안에서 세례 받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성사는 유효하지만 효과를 내지 못함을 구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속죄하는 사람처럼 주교의 손을 얹음을 통해서 그들의 세례가 효과를 낸다고 생각했습니다. 255-257년 경, 로마의 주교 스테파노가 이런 로마의 실천을 아프리카 교회에 적용시키고자하면서 큰 분쟁에 이르게 됩니다.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교회가 이것에 반대하였지만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는 로마에 찬성하였고, 마침내는 로마의 실천이 전체 교회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런 결말의 신학적 토대는 성사의 유효성은 그것을 거행하는 자의 ‘올바름, 성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근거하였던 것입니다. [2016년 7월 24일 연중 제17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63) 분쟁, 이단과 열교 (3)

 

 

지금까지 간략하게 이단들을 살펴보았는데요, 물론 앞으로도 고대 교회사 안에서 이런 신학적인 논쟁은 공의회들을 통해 계속 살펴볼 것입니다. 이제 잠시 이런 이단들 외에 고대 그리스도교에 큰 충격과 파열을 가져온 소위 말해 ‘열교’, ‘갈라진 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열교는 이단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요? 이단이 교의적인 측면에서 정통 교회와 일치하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열교는 교회 삶에서의 실천과 조직 등에서 정통교회와 일치하지 못하는 점에서 출발합니다. 이 열교는 교의적인 측면에서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교회의 단일성을 파괴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예를 들자면, 교회의 시작부터 있어온 소위 ‘파스카의 거행에 관한 논쟁’을 들 수 있습니다. 3세기 말 경이 되면 모든 개별 교회들은 파스카를 춘분 후의 만월을 이어오는 주일에 거행하였습니다. 오직 소아시아의 몇몇 지역과 시리아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의 파스카를 ‘히브리의 파스카 날’에 거행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니산 월의 14일에 거행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전통을 따른 결과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이방 문화 환경에서 왔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유다이즘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수면위로 떠오른 것은 서기 150년이 조금 지난 즈음, 로마에서 아니체토(155-166)의 주교와 스미르나(Smirne)의 뽈리까르뽀(Policarpo) 주교가 이 문제로 토론을 벌이면서입니다. 하지만 이 담판이 모든 이들의 기대와 달리 어떤 해결책도 도출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것입니다. 당시까지 교회의 가장 큰 규범이었던 ‘교회의 단일성’이란 큰 명제를 앞에 놓고도, 어느 한 편도 자신들의 의견을 포기하거나 다른 이들의 견해에 호의를 갖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교회의 관행은 그리스도교-유다이즘적 파스카 거행이 ‘유다교로부터 충분하고 온전하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의심과 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단일성은 보호되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결과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분열로 예상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비토레 주교가(Vittore I, 189-199) 파문을 경고하면서 분위기는 한층 긴장되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를 포함한 대부분의 교회의 실천에 ‘작은 교회’들을 통합하고자 최후통첩을 날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4일을 거행하는 자’들은 325년 첫 번째 보편 공의회인 니체아 공의회까지 지속되었고, 공의회의 파문으로 결말을 맺게 됩니다.

이제 다른 이유로 서방 교회에 더 긴 분열을 가져온 고해성사의 규율과 관련된 분열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이미 간략하게 언급되었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는지를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볼까합니다.

문제의 발단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3세기 중엽, 아프리카 교회를 거슬러서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대다수를 거슬러 로마의 사제 노바씨아노(Novaziano)가 소위 말하는 ‘배교자’(lapsi)들을 공동체로 되 받아들이지 않기로 선언하면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이 ‘거룩한 이들의 공동체’라 불리는 열교를 창설하였던 것입니다. 그들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순결한 이들’(puri)이라고 칭했습니다. 자기 공동체에 자부심을 가졌고, 나머지 대부분의 교회를 나태하다는 이유로 경멸하였습니다. 노바씨아노의 교회는 널리 퍼져나갔지만, 교의적인 부분에서 가톨릭 교회와는 온전하게 일치하였습니다. 하지만 4세기와 5세기의 로마의 황제들이 이 노바씨아노 교회에 반대하는 법령을 공포함으로써 그들은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들이 되어버립니다. [2016년 7월 31일 연중 제18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64) 분쟁, 이단과 열교 (4)

 

 

또 한 번 드라마틱한 열교가 발생하는데 이름하여 도나티즘(Donatismo)이고, 그 무대는 다시 한 번 아프리카였습니다. 카르타고(Cartagine)에서 체칠리아노(Ceciliano) 주교의 서품식이 거행되었는데, 한 외부 주교가 아프리카 교회의 엄격한 전통에 따르면 아주 엄중한 죄를 지은, ‘교회의 서적을 넘겨준’(‘traditor codicum’) 주교였던 것입니다. 그는 디오클레찌아노(Diocleziano) 박해 때 이방인들의 손에 거룩한 책들과 거룩한 물건들을 넘겨준 주교였습니다. 아프리카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죄인은 어떤 예절도 거행해서는 안 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체칠리아노의 서품은 유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주교를 선발하게 되는데 그가 마조리노(Maggiorino) 주교였습니다. 그의 열렬한 추종자 도나토(Donato)가 있었고, 그의 이름을 따 도나티스트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런 갈라짐의 배경을 보면, 도나티스트들은 ‘자신들의 교회야말로 엄격한 순교자들의 교회이며, 성덕이라는 이상을 근본적으로 실현하는 이들이다.’라고 생각해서 자신들에게 진리의 특권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처음 아프리카 교회 내부에서, 어떤 직무를 맡은 이들의 거룩함에 대한 극단적 그룹들 간의 다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 종교적 파열은 아프리카 교회를 혼돈으로 몰고 갔고, 사회, 정치적인 상황이 결합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됩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코스탄티노입니다.

막 서방 로마의 황제에 오른 코스탄티노는 이 도나티스트의 문제로 혼란스런 제국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 313년 로마와 314년 아르스(Arles)에 시노드를 소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노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도나티스트들의 탓으로 규정지어 갔습니다. 그들의 반대는 격렬해졌고, 그만큼 황제는 아프리카 가톨릭 교회를 더욱 뚜렷한 방법으로 도왔습니다. 반면 이 도나티스트들은 경찰적인 권력의 물리적 제약으로 타격을 받게 되자, 폭력적인 저항을 시작하는데, 교회를 소유하기 위한 공격이 진행되고 교회들 간에 물리적 충돌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고, 국가는 더욱 가톨릭 교회에 도움이 되는 제재를 가합니다.

이런 물리적인 개입으로 도나티스트들에게는 순교 의식이 강화되었고, 많은 이들, 특히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과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 이들 그룹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도나티즘의 대열에 함께한 이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반대자들(로마와 연결된 지역권세가)과 진정한 분쟁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아프리카에서 도나티스트들은 가톨릭 교회보다 숫적으로 우세하였습니다. 4세기 말경, 히뽀의 주교 아우구스티노는 이런 상황을 끝내고자 그들과 대화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 대화는 단일화라는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맙니다. 국가는 더 엄하게 대응하는데, 도나티스트들을 분열주의자가 아닌 이단으로 지칭하고, 이단에 대항하여 내걸었던 규정과 법률을 그들에게 적용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430년까지 지속됩니다. 이 모든 분쟁은 반달족(Vandali)이 북아프리카를 정복할 때, 그리스도 교회가 파괴되면서 소멸되고 맙니다.

이 논쟁은 교회의 거룩함에 관한, 그리고 거행자의 적합성과 관계된 성사의 효력에 관한 신학적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논쟁을 통해 성사의 효과는 그것을 거행하는 자의 도덕적 가치에서 독립적임을 분명하게 합니다. 결국 이 논쟁은 서방 교회의 성사 신학의 발전에 결정적 공헌을 합니다. 하지만 정통에 관한, 교회의 단일성에 관한 논쟁은 어떤 타협도 없는 격렬함 가운데 진행되었고, 이런 일치와 평화를 위한 선긋기는 실제 재일치를 가져오지는 못하였습니다. 정통과 단일성을 유지했지만 한편 그리스도교 본질을 위한 무엇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던 것입니다. [2016년 8월 7일 연중 제19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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