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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대재와 소재로 본 신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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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3-12 ㅣ No.625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예수님을 위한 배고픔” - 대재와 소재로 본 신자생활

 

 

우리가 무엇을 이루는 데는 어떤 일을 하는 작위(作爲)의 방법이 있다. 이와 함께 무엇을 하지 않는 부작위(不作爲)의 방법도 많은 일을 이루어 낸다. 특히 부작위의 방법 중 특별한 지향을 둔 절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이 절제를 통해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을 우리 교구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님께 우리의 절제를 모아드리는 가장 보편적 방법이 파공(罷工) 및 대재(大齋)와 소재(小齋)일 것이다. 1960년대 이후로는 대재를 단식재로, 소재는 금육재라고 부른다. 교회의 구성원인 사람들은 언제나 명예욕, 물욕, 생식욕, 그리고 식욕 등에 노출되어 있다. 그중에 사람들은 식욕에 가장 빈번히 노출되어 왔다. 그리고 식욕 앞에서는 무절제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도 한다. 교회에서 식욕을 절제하라는 대재와 소재를 설정한 까닭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신앙을 실천하라는 뜻일지 모른다. 동시에 대·소재는 예수의 고난에 대한 철저한 묵상이며 복음의 생활화이다.


신자로서 약속의 표시 - 박해시대 신앙생활 척도

한국교회에서는 천주교 수용부터 대·소재를 지켜왔다. 홍유한처럼 달력이 달라서 언제가 재를 지키는 날인지도 몰랐던 신자들이라도 나름대로 요일을 계산해서 이를 지켰다. 또한 사제도 성당도 없고 지도자는 뿔뿔이 흩어진 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자들은 묵묵히 의무를 다 했다. 대재와 소재는 천주교 신자의 상징이기도 했다. 일반인들은 대재와 소재의 실천 여부를 보고서 신자인지를 가늠하기도 했다. 그래서 1811년 북경 교구장께 선교사 파견을 청하는 편지에 조선의 신자들은 대·소재의 관면을 요청해야 했다.

순교자들의 생을 보면 그들은 마치 대·소재를 잘 지켜서 순교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이에 엄격했다. ‘하느님의 종 125위’에 들어 있는 대구의 순교자 김세박은 1827년의 박해로 옥에 갇혔다. 그는 자신이 먹는 음식이 인근 주민들에게 추가로 세금을 걷어 마련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식욕을 절제하여 철저히 대재를 지켰다. 결국 그는 형벌과 잦은 대재로 쇠약해져서 이듬해 옥사했다. 안군심도 보통 1주일에 세 번씩이나 대재를 지켰다. 순교자들은 대재와 소재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로 여겼다. 이 전통은 박해 후에도 계속되었다.
 

대·소재, 시간 속에 단어도 의미도 변해


우리는 대재와 소재를 박해시대에만 지켰다고 착각하기 쉽다. 박해시대의 기록을 보면 대재는 만21세부터 60세 되는 날(환갑 전)까지 지키라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대재를 지켜야 할 연령이 18세로 조정되었다. 반면 소재는 만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한다. 옛 교우촌에서는 대·소재를 지키지 못하면 당연히 고해성사를 봐야 했다. 1923년 발간된 『회장직분』에는 대재를 지키는 요령이 적혀 있다.

‘하루에, 다만 한 끼만 먹되, 오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저녁에 조금 요기하는 것을 허락하고, 어떤 사유가 있으면 점심을 저녁으로 바꾸어 점심에 요기만 하고 저녁에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또 소재는 ‘가축의 고기와 고기죽과 고깃국을 금하나, 계란이나 다과 종류나 음식을 준비할 때 쓰는 양념과 반찬을 준비할 때 쓰는 가축의 기름 등은 금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재를 지켜야 하는 날짜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많은데, 현재 대재일은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이다. 소재는 연중 모든 금요일이며,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은 대·소재가 겹친다. 박해시대의 사회에서는 재일(齋日)도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서 옛날 신자들은 큰 첨례표에 맞추어 생활했다. 대재를 지키도록 규정된 날의 첨례표에는 “대 ”라고 별도로 표시되었다. 반면 소재는 첨례표의 주의사항 난에 별도로 ‘주일 2일전(첨례6)’, 즉 오늘날의 금요일에 소재를 지키라고 표시해 놓았다. 첨례표에 따라 살던 그들의 일상은 바로 재의 점철이었다. 특히 사순절과 대림절 기간은 지켜야 할 재계가 많았다. 그들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에 이르는 40일간을 ‘재를 받드는’ 봉재(封齋) 때라고 했지만 오늘의 교회에서는 이를 사순절이라고 한다. 대림시기의 옛말은 장림(將臨)이다. 장림은 ‘예수 성탄 대첨례’, 즉 크리스마스 이전 40일간의 기간이었다. 장림이란 단어는 ‘장차 임하실’아기 예수를 맞이한다는 의미였다. 당시 교회에서는 봉재나 장림기간에는 신자들의 혼인도 허락하지 않았다.

박해가 끝나고 문호가 개방되어 사회가 바뀌어 갔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교황의 관면(寬免)으로 신자들이 재를 지키는 생활은 박해시기보다 다소 완화되었다. 그리고 이를 대신해서 애긍시사(哀矜施舍)가 강조되었다. 애긍이나 시사는 오늘날의 말로는 ‘헌금’이 된다. 일제시대 『회장직분』에서도 ‘관면을 준행하는 자는 마땅히 봉재 때에 혹 애긍하며 혹 주일마다 매괴 오단을 외옴으로써 궐함을 기울지니라.’고 했다. 이러한 사순절 애긍의 경험이 사회적 운동으로 일어나 1907년 국채보상운동으로 타오르기도 했다. 이 운동을 주동했던 서상돈, 정규옥 등은 교구설립 등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한국교회에서는 시기에 따라 각기 다른 대·소재를 지켜왔다. 드망즈 주교는 1914년 『대구대목구 사목지침서』를 공포했다. 이때 대소재에 관한 내용은 박해시대와 동일했다. 그러나 1921년 교황의 조선교회 관면과 세계교회의 변화를 반영하여 내용이 완화되었다.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 중에는 하야사카 주교가 대·소재를 관면했다. 해방이 되고 하야사카 주교를 이은 주재용 교구장은 모든 규칙을 다시 세우고자 했다. 그는 대재와 소재를 준수하고, 매일 기도를 바치며 조과와 만과를 열심히 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지라는 이유로 대·소재 등이 관면되었다. 이때는 판공찰고, 주일학교, 주일파공, 대축일 파공 등에 대해서도 또한 관면이 주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한국주교회의는 다시 전쟁 중에 허용했던 대재, 소재를 비롯한 일괄 관면을 취소했다. 다만 대·소재가 음력설이나 정월 대보름 등과 겹칠 때에는 교구장이 관면을 내리거나 이를 옮겨 실시토록 했다. 특히 재의 수요일은 구정연휴와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교회는 외형적으로 재를 다 지키지 못하더라도 절제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에 대신하여 애긍을 해서 가난한 이웃에게 돌리도록 했다.


봉재애긍은 돼지저금통으로

이것이 ‘봉재애긍’이다. 대구교구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봉재애긍은 1965년 사순절에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가톨릭부인회가 중심이 되어 봉재 사십일 동안 대재를 지킴으로써 절약된 것을 현금으로 바꾸어서 대구대교구를 도왔다. 이 도움으로 청소년교육관, 여성교육관 등이 건립되었다. 한편 같은 시기 교구에서도 감사의 기도로 화답하고 있었고, 이와 동시에 애긍을 실천했다. 그래서 당시 교회는 부활 판공성사표를 교부해 줄 때, 봉재애긍 금액에 영수증을 발부했다. 애긍총액은 신학생 양성을 위해 사용했다.

이 이후부터 신자들은 사순절에 대·소재를 실천하며 희생과 극기를 하고, 그만큼을 헌금으로 모았다. 1977년에는 주교단에서 단식재를 지킨 몫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교회에 헌납하도록 결의했다. 이때쯤 사순절 저금통이 나왔다. 교구에서는 이 해에 저금통 2만 개를 각 본당에 배부하여 1만여 개를 걷었다. 저금통을 나눠주고 사순절 동안 가정에서 헌금토록 하는 이러한 관행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85년 사순절부터는 첫 주일 헌금이 순교자 현양을 위해 이루어졌다. 시작은 관덕정순교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이었다. 1986년 서정길 대주교는 「관덕정에 순교자 기념관을 세우자」라는 담화문을 내었다. 대주교는 “관덕정은 성 이윤일 요한을 비롯한 54명이 순교한 곳이며 순교자의 피로써 축성된 대구의 유일한 성지인데, 성인이 순교하신 지 120년, 복자가 되신 지 19년, 성인이 되신 지 2년이 되지만 그 형장에 비석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다.”며 기념관건립을 위한 사순절 애긍을 당부했다.

이외에도 사순절에는 세계교회와 함께 하는 특별헌금들도 많았다. 1989년 성금요일에는 특별헌금을 걷어 이스라엘 성지를 복구하는데 참여했고, 전 세계 교회와 함께 레바논 평화를 위한 기도도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3년 재의 수요일을 중동의 평화를 위한 기도와 단식의 날로 선포했다. 이에 전 세계의 본당과 가정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묵주기도를 바쳤다. 가톨릭교회만이 발휘할 수 있는 위대한 힘으로 평화가 갈구되었다.


주일과 의무축일 파공 의무와 금육의 관면과 취소

1967년 한국주교회의는 주일 파공에 대한 관면을 교황청에 청원하여 인준받았다. 이와 함께 한국주교회의에서는 소재를 관면해서 ‘재의 수요일’과 사순절 동안의 금요일만 지키도록 했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를수록 대·소재는 사순절이나 성주간 행사처럼 되어 갔다. 또한 대·소재를 애긍, 즉 헌금으로 대치하다보니 사순절은 특별헌금 걷는 시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1989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추계총회에서는 1967년부터 주어졌던 주일 파공과 금육에 대한 관면을 취소했다. 그리하여 1990년 재의 수요일부터 주일 파공과 금육재 관면이 전면 환원되었다. 이제는 다시 모든 주일과 의무 축일에 파공을 지켜야 하며, 금육재도 재의 수요일과 연중 모든 금요일에 지키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교회에서 대·소재 규정은 자주 변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 본연의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다. 더욱이 신자들은 교리를 배운 시기에 따라 대·소재 규정에 대해 제각각 생각하기도 했다. 대·소재 규정이 자주 변해온 과정을 고려한다면 신자들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사의 흐름을 따라 변해온 대·소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그 속에는 진정으로 예수의 이웃사랑을 닮으려는 노력이 역사의 켜를 따라 쌓여져 갔다. 우리는 대·소재를 지킴으로 그 모든 역사의 유산을 체득할 수 있다. 대·소재의 본질은 자신의 정화와 이웃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 도움 : 대구대교구공문집, 참사회의록, 화보집, 『회장직분』, 관덕정, 김정환 신부

[월간빛, 2014년 3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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