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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안중근 의사, 히로부미 저격 후부터 순국 전까지 비화 담은 빌렘 신부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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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4-08 ㅣ No.626

'안중근 의사, 히로부미 저격 후부터 순국 전까지 비화' 담은 빌렘 신부 기고


기도 후 당당히 처형대에 올라 '대한제국 만세' 외쳐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최용록 신부는 최근 1909년 10월 26일에 이뤄진 안중근(토마스, 1879~1910)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격살 이후부터 이듬해 3월 26일 순국하기까지 비화를 담은 빌렘 신부의 기고를 공개했다. 안 의사 순국 104주년을 맞아 공개된 이 원고는 빌렘 신부의 고향 로렌주에서 발행되던 「프리부르크 가톨릭 선교」 등 교회잡지에 실렸던 것으로,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서 가져온 문서를 최 신부가 번역하던 중 찾아냈다. 다음은 원고 요약.


1909년 10월 31일 제성첨례날(諸聖瞻禮日, 모든 성인의 축일) 저녁에 이토가 암살됐다는 전통이 하얼빈에서 날아들었다. 사촌동생 안명근(야고보)이 신천경찰서로 호출됐다가 돌아와 안 토마스가 그랬다고 전했다. 거사는 정정당당히 이뤄졌다고 한다. 1909년 10월 26일 코사크 기병들의 포위망을 뚫고 이토가 러시아 장관과 악수하려는 순간 권총 3발을 발사해 명중됐고, 20분 뒤 이토가 사망했다.

요즘 난 잠을 이루진 못한다. 내 신자인데 그대로 두고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지난 4년간 일본군과 싸우면서 안 토마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잘 알고 있다. 일군과 전투를 벌이면서도 안 토마스는 강탈행위는 하지도 않았고, 단 하루도 아침ㆍ저녁기도, 묵주 기도를 빼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형제들이 편지로 내게 성사를 청해왔다. 사리원에서 가려면 여비도 많이 들고 여행도 어려움이 많아 망설였지만,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미나베 주조(眞鍋十藏) 판사는 안 토마스의 양심적 처신에 감동해 직접 편지를 보내와 와 달라고 하니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3월 2일 눈 속을 뚫고 출발했고, 3월 8일 동생 정근(치릴로)과 공근(요한)을 데리고 뤼순 형무소로 향했다. 두 간수와 함께 면회실로 들어온 안 토마스는 내게 큰 절을 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난 자부적 사랑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아, 가련한 토마스! 이런 곳에서 너를 만나다니…." 면회는 우호적이었다. 다음날인 3월 9일 오전 10시에 고해성사가 예정돼 있었는데,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은 규정상 고해성사 집전은 어렵다고 난색을 보였다. 그래서 난 "고해성사는 절대 비밀엄수가 요구된다"고 강력히 요청했다. 그래서 결국은 고해성사를 허락하되 간수와 통역이 동석하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고해 비밀은 지켜주기로 약속했다. 방에는 토마스가 수갑을 찬 채로 두 간수와 함께 있었다. 다만 서로 암묵적으로 멀리 떨어져 고해성사를 보게 됐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는 내일(3월 10일) 영성체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난관에 봉착했다. 형무소 규칙엔 외부 음식 반입이 일체 금지돼 있었다. 독살 우려 때문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자살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자 다시 제병을 문제삼았다. 결국은 우리가 가져온 제병을 자기들이 고르는 것으로 합의했다.

- 빌렘 신부


3월 10일 감방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 중에만 수갑을 풀어달라고 요청해 토마스에게 복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토마스, 그대는 오늘 하느님 은총을 받기에 불충분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 미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도록 해라. 그대의 마지막 미사가 될 것이다." 5년간 미사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토마스는 온전히 복사를 섰다. 예상치 못한, 그러나 장엄한 미사였다. 미사는 토마스의 영성체와 병자성사로 마무리했다.

토마스는 3월 25일 성 금요일에 사형이 집행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날은 순종의 탄생일인 건원절이어서 이튿날 사형이 집행됐다. 토마스는 형장에 끌러가기에 앞서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한 뒤 용감하게 스스로 형장에 섰다고 한다. 그리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치고 교수형을 받았다. 이 내용은 일본 신문을 통해 알게됐다. 그의 성격을 미뤄 당연한 이야기다. 다음날 부활절 미사 직후 "처형이 집행됐다"는 전보를 받았다. 신자들은 이 소식에 다들 성당에서 울부짖으며 기도를 바쳤다. 임종 종이 천천히 울려퍼졌다. [평화신문, 2014년 4월 6일, 정리=오세택 기자]

 

 

안중근 의사 '태극인장'에 담긴 의미는 - '가톨릭 신자' 정체성 드러내

 

 

안중근 의사가 거사 이틀 전인 1909년 10월 24일 당시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의왕 이강에게 보낸 엽서편지에 찍힌 태극인장(왼쪽)과 거사 이후 순국하기까지 남긴 장인.


안중근(토마스, 1879~1910) 의사의 편지나 유묵에 남아 있는 장인(掌印) 외에 '태극 인장(太極 印章)'이 거사 전후 안 의사의 내면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도진순(하상 바오로) 국립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지난 3월 27일 서울 성동구청 3층 대강당에서 열린 특강에서 "1909년 10월 24일 의거 이틀 전 안 의사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의왕 이강에게 의거 계획을 알린 엽서편지에 남아 있는 태극 인장은 가톨릭 신자로서 안중근의 정체성을 각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심원 2~3개로 이뤄져 있는 태극 인장은 △ 맨 바깥쪽 원은 한국을 뜻하는 코레(COREE)와 안 의사의 세례명 안 토마스(AN THOMAS)가 새겨져 있고 △ 도장의 심장에 해당하는 맨 안쪽은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 현 태극기의 태극 문양과는 조금 다르지만, 1909년 2월 안 의사가 연해주에서 단지할 때 '대한독립'이라고 쓴 혈서 태극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가운데 태극 문양과 바깥 문양 글씨 사이에는 태극의 4괘 자리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이 태극인장이 대한국인이자 가톨릭 신자로서 안 의사의 정체성을 각인한 인장이라고 도 교수는 주장했다.

도 교수는 또 10월 24일자 엽서편지에서 안 의사는 거사 계획을 나열하고 "일의 성사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면서 빽빽하게 편지를 쓴 뒤 유일하게 하늘 천(天)자 앞에 한 칸을 비워 하늘에 대한 지극한 공경을 표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동포들의 선한 기도로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기를 엎드려 바라고 또 바라나이다"라고 쓴 엽서편지의 기도는 안 의사가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하기까지 쓴 유묵이나 유언과 일치한다면서 "앞으로 남은 과제는 이 태극인장을 찾고 제대로 기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평화신문, 2014년 4월 6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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