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겟세마니 예수님의 영적고통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17 ㅣ No.1263

[생명 사랑] 겟세마니 예수님의 영적고통 (1)



올리브 산의 그리스도(산드로 보티첼리, 1444년경, 유채, 그라나다 왕실 성당 - 일부)

십자가상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느님께 기도한다. 그는 근심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고 있다. 그리고 기도한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기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울부짖는다. ‘이 잔을 거두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침묵하신다. 이러한 장면은 참으로 절박하고도 고통스런 인간 예수님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여기서 겟세마니의 예수님은 죽음 앞에 선 말기환자와 동일한 길을 걷는다.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처지는 임종을 목전에 둔 환자와 비슷하다. 따라서 겟세마니의 예수님은 매일 임종을 준비하는 병자를 만나는 우리에게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신다.

또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이제 다가올 고통과 십자가 길의 고난과 죽음을 수용하게 된다.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정립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하기 전에 근심하던 모습과는 달리(사라지고) 자고 있던 제자들을 깨우며 ‘자 일어나 가자’ 라고 외치면서 용감히 자신의 길을 가게 된다. 무엇이 예수님을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을까? 겟세마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던 것일까?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겪은 고통은 임종을 앞둔 말기환자들의 전형이다. 예수님은 임종자들이 겪게 되는 고통을 함께 겪고 있으며 그들이 바라는 것을 바라고 있다. 그들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알려주고 있으며, 알지만 거절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나약함마저도 인정하고 있다.


제 영혼이 당황하고 있습니다.(jh), 제 영혼이 죽기까지 근심합니다. 몹시 놀라 번민합니다.(mt, mk)

예수님은 자신이 이제 죽음의 문 앞에 와 있음에 극히 놀라며 당황해 한다. 근심과 번민에 쌓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그는 자신만이 이제 홀로 그 자리에 서 있게 됨에 큰 소외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부탁한다. “나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 달라” 이 말은 이 전에 성서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부탁의 말씀이다. 그 만큼 예수님은 힘들었던 것이다. 성서는 다시 시편 42,6-12을 인용하며 의자(義子)의 부당한 고통에 대해서 노래한다. 그러면서 침묵하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


가능하다면, 수난의 시간이 지나쳐 가게 해 주십시오(mk), 하고자만 하신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Lk)

“제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인간의 죽음에 대한 보편적 두려움을 예수님을 통해 진술하게 함으로써 예수님 또한 완전한 인간으로서 완성을 향하게 한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아버지께 거절하는 이 장면은 충격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도 한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서 나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이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도 커다란 위안이 된다. 애처롭게 아버지를 부르며 죽음을 거두어달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말기환자들의 그 외침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하고자만 하신다면’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요 고백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곡한 기도이다. 무작정 싫다고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말기환자들의 ‘내가 왜’라는 외마디 외침이다.


이 시간으로부터 저를 구원해 주소서(할까요?), 무엇이라고 말씀드릴까요? 아버지.(Lk)

아들의 이러한 기도에도 하느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침묵하는 하느님, 제자들은 스승의 이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제자들의 침묵, 그 고요한 밤에 세상에서 이제 혼자 남은 예수님은 깊은 소외에 빠져 버렸다. 깊고 어두운 밤, 깊은 침묵 속에 예수님 혼자만 남아있다. 침묵하는 하느님을 향해 예수님은 외친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께 무어라 말씀드릴까요? 제가 이 시간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할까요? 그 말을 듣고 싶으신가요? 아버지” 아버지를 원망하는 아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말기 환자들에게도 이러한 극도의 침묵과 소외는 더 큰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들도 하느님을 원망하고 가족과 세상을 향해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소서(mk),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Lk)

아직까지 아버지는 침묵하신다. 그런 아버지께 예수님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다. “그렇지만 제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소서.” 하느님과 타협하려 한다. 아직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 중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아버지, 이것이 지나쳐 갈 수 없고 제가 그것을 마실 수밖에 없다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mt, mk)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이제 이 잔을 내가 마셔야만 되는 그래서 다른 사람이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로 결정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 수용이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확신을 갖는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 생명을 봉헌할 만큼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자의식 뿐 아니라 이 죽음은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이요, 사랑고백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봉헌하고 있음을 밝힌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9월호, 지영현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b/botticel/91late/12agony.jpg)

 

 

[생명 사랑] 겟세마니 예수님의 영적고통 (2)



파올로 베르네세, 겟세마니의 그리스도, 1583-84년, 유채, 브레라미술관, 이태리 밀라노.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다다랐음을 아시고 매우 근심하시며 번민하셨다. 그 같은 영적 고통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머물러 있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신다.

예수님의 영적돌봄 요청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 차례에 걸친 말씀을 통해 점층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형언할 수 없이 매우 큰 영적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의 간절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잠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시고 그 고통을 홀로 감내하셔야 했다.

1단계 :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시오.(마르코 14,34; 마태오 26,38)

2단계 : “여러분은 나와 함께 이처럼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했소?” “깨어 기도하시오.”(마르코 14,37-38; 마태오 26,40-41)

3단계 : “아직도 쉬어야겠소?”(마태오 26,45) “됐습니다.”(마르코 14,41-42) 1)


영적 돌봄자(spiritual carer) - 하느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 분을 격려하였다.’(루가 22,43-44)라는 말씀을 통해 결국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격려를 받으셨음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지만 하느님만은 예수님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계셨다. 그리고 천사를 시켜 그분을 위로하셨으며 그분과 함께 머물러주셨다. 이 사건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고 그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 예수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들으셨지만 그를 고난으로부터 해방시킨다거나 예수님이 받아야 하는 고난에 대해 해명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며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계신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 답도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침묵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하느님의 침묵은 곧 고통을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주체로서의 예수를 존중하시는 것이며 이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하느님께로 부터의 절대 소외를 당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나고 있다.

사실 자기 존재의 존엄성을 인정받은 사람은 소외로부터 벗어나 가족과 사회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맺으며 서로 사랑을 나눔으로서 하나가 된다. 그 사람은 자신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아직 자신이 존중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소중한 사람이란 자의식을 통해 행복을 느끼며, 죽음2)이 죽음3)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며 현실적 시작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말기환자에게 이제 죽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서 죽음을 이해하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콘카 세바스티아노, 겟세마니의 그리스도, 1746, 유채, 바티칸 박물관.

반면에 자기 존재의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환자는 육체적으로 소외된 자신은 사회에서 아무런 의미나 가치를 갖지 못하는 존재로 스스로 생각하게 되고 절망하게 된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 무의미한 존재로서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의 경험인지 모른다. 세상에서 사랑을 받을 자격조차도 없는 존재이며 하느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고 하는 체험은 곧 지금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며 죽음으로서 이제의 모든 고통이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종료형으로서의 죽음을 희망하게 된다.

이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이며 그에게는 죽어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미칠 것 같은 두려움과 고통 속에 좌절하고 말 것이다.4)

다가올 죽음 앞에 선 겟세마니의 예수님은 말기환자의 영적 고통에 동참한다. 예수님은 다가올 죽음 앞에서 “내 영혼이 죽기까지 근심합니다.”(마태오 26,38)고 말하며 고통스러워한다.

또한 “가능하다면 수난의 시간이 지나쳐 가게 해 주십시오.”(마르코 14,35), 라고 하시며 죽음 앞에서 영적 두려움과 고뇌를 나타낸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나와 함께 있어 주시오. 나와 함께 기도해 주시오.”(마르코14, 43-42) 절대소외라고 하는 두려움이 예수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이제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를 만남으로서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또한 그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시고 존중해주시는 하느님의 돌봄을 통해 그는 다시 일어선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오 26,42) 이 겟세마니 사건은 죽음 앞에 선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영적 돌봄의 모델이 된다.

-------------------------------
1) 정양모, 배은주, 노혜정 엮음, 네 복음서 공관 제1권, 분도출판사, 1983, 168-169p
2) 여기서 죽음이란 영원한 생명을 향한 진행형으로서, 희망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3) 이 죽음은 단절과 완료형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하며 결국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절망하고 좌절하게 되는 종료형으로서의 죽음이다.
4) 지영현, 말기환자에게 자율성 존중의 원칙이 필요한 이유에 관한 숙고, 문학석사학위논문, 가톨리대학교대학원, 2006, 57-60p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10월호, 지영현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v/veronese/05_1580s/10garden.jpg)
(원본 : http://www.wga.hu/art/c/conca/gethsema.jpg)



파일첨부

3,55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