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5: 최의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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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30 ㅣ No.1043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5) 최의순 작가


“사물에서 발견한 아름다움과 삶의 여정, 작품에 담아냅니다”

 

 

- 최의순 작가와 작품 ‘김태관 신부 두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적성이 된 예술

 

제가 미술을 하게 된 계기는 다양했던 것 같아요. 어릴 적에는 나무판을 신발 크기로 맞춰 자르고 가운데 굵은 철사를 박아 넣어 스케이트를 만들어 타기도 했어요. 만드는 쪽으로 적성이 있었던 거죠. 거기에 이모님께서 일본에서 유학을 하셨는데, 방학 때 집에 오시면서 제게 크레용 세트와 스케치북을 선물로 주셨어요. 당시에 알록달록 크레용으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아이는 별로 없었어요. 일제 말기라 물자가 귀했던 때였으니까요.

 

초등학교 때에는 학교 대표로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도 했어요.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어느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부르시더니 미술반에 들어오라 그랬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그림을 곧잘 그렸던 걸 아셨던 거죠.

 

6·25전쟁이 나고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때였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돼서 대학 진학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어요. 당시 수의학과 대학원생 한 분이 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셨는데, 학생들이 진로에 대해 고민을 털어 놓으니, 수업을 제쳐두고 진로 상담을 해주셨어요. 그분은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적성이 있고, 적성에 맞는 진로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집에서는 제가 의대, 그러니까 의예과에 가길 바라셨어요.

 

당시에는 저도 젊고 혈기가 왕성한 때여서, “젊을 때 남이 한 것을 뒤쫓아 가는 것은 편하지만 개척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 그 선생님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어요. 그래서 슬쩍 의예과를 예과로 바꿨어요. 당시 서울대 미술대학을 ‘예술대학’이라고 불렀거든요. 그렇게 부모님 몰래 예술대학으로 진학했어요. 그중에서도 2차원인 서양화나 동양화보다는 3차원인 조소를 선택하게 됐어요.

 

명동대성당 중앙문.

 

 

평생의 스승, 김종영 교수와 김태관 신부

 

서울을 수복하고 학교가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래서 1학년 때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집에서 제가 예술대학에 들어간 걸 알고 반대를 많이 했어요. 재수를 하고 다시 의대에 가라고요. 속으로 고민도 많이 했는데, 제 선택을 밀어붙였어요.

 

조소과에 남아서 공부를 하는데, 뭐 아는 게 있어야죠. 그때 김종영 선생님을 만났어요. 교수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면담을 하러 갔어요. 당시 1학년이던 제게 선생님께서는 “예술의 길은 혼자 걸어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속으로 “비싸게 등록금 내고 학교에 들어왔는데, 독학을 하라는 건가?”라고 생각했죠. 그만큼 저도 어렸죠. 나중에 곱씹어보니 ‘자기가 안 하면 끝나는 거고, 하면 작품이 되는 거고, 다른 사람이 이걸 대신 만들어줄 수 없는 거’라는 말씀이셨어요.

 

선생님께서는 “개념적으로 보지 말고 직관적으로 보라”고 하셨어요. 의미나 목적을 다 빼버리고 그냥 사물 자체를 바라보라고. 그리고 거기서 느낀 감동을 표현하라고요. 밝은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 안에 담긴 감동을 찾아 표현하기 시작했죠.

 

저는 세례를 군대에서 받았어요. 제대 후 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하는데, 그곳에서 예수회의 김태관 신부님(토비야, 1919~1990)을 처음 만났어요. 이 신부님이 예술대학에서 강의를 하셨는데, 제게 “좋은 마음이 인격으로 드러나고 예술로도 이어진다”는 말씀을 남기셨어요. 덕을 쌓으면 아름다움이 저절로 흘러나온다는 것이었죠. 덕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쌓이는 게 아니잖아요. 끝까지 한눈팔지 말고 덕을 쌓으라는 가르침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것 같아요.

 

 

조각의 본질은 작가의 감정 표현

 

제 조각 작품에는 사물에서 제가 발견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어요. ‘수난자의 머리’에는 6·25전쟁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했어요. 절두산순교성지 십자가의길 14처를 만들고 얼마 뒤였죠. 전쟁 후 덤으로 사는 느낌을 표현한 거에요. 그리고 명동대성당 중앙문에도 제가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읽고 여러 성지를 다니며 느꼈던 것을 담으려고 노력했지요.

 

예전 같지 않지만 아직도 석고를 이용해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요. 남들은 쉽게 깨지고 돈도 되지 않는 것을 한다고 타박하지만, 석고 작업에서 매력을 느껴요. 석고는 한번 붙이고 나면 금방 마르고, 덧붙이면 두꺼워져서 쉽게 고치질 못해요. 미리 계획을 짜서 만들기 시작해야 하죠. 틀이 없으니 똑같은 조각을 찍어낼 수도 없고요.

 

작품에 거짓을 넣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계속 작업을 하려고요. 한 사람의 작가가 그동안의 삶의 과정을 담는 과정이라고 여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최의순(요한 비안네) 작가는…

 

193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195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거쳐 57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1965년부터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로 임용돼 교육자이자 조각가로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1969년 제10회 상파울로비엔날레를 비롯해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으며, 1999년 국민훈장 석류장, 2005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미술부문을 수상했다. 2009년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중앙문을 제작했으며, 2010년 제15회 가톨릭미술상 조각부문 특별상을 받았다.

 

 

상 017.



절두산순교성지 십자가의길 제11처.

 

[가톨릭신문, 2024년 1월 28일, 최용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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