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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36: 카알대제와 그리스도교적 황제권의 완성 - 유럽사회 발전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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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27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36) 카알대제와 그리스도교적 황제권의 완성 - 유럽사회 발전의 기초 다져

 

 

- 서구 황제권의 상징 아헨대성당

 

 

[아헨=김상재 기자] 수백마디 설명보다 하나의 상징이 더욱 명확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것이 100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독일의 아헨대성당. 피핀의 아들이자 그리스도교적 황제권을 완성한 카알대제가 786년부터 짓기 시작해 800년에 축성된 성당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말 위에서 보내며 대제국을 이룩했던 카알대제의 왕궁성당인 아헨대성당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자신의 통치이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부활을 상징하는 8각형 구조에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성당을 따른 황제식 원형 천장. 여기에 제대 맞은편 서쪽 정면에 위치한 자신의 옥좌는 맞은 편 예수님의 이콘과 마주보고 있다. 세상구원을 위해 동쪽에서는 예수님이 서쪽에서는 황제가 온다는 의미라고 한다. 또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성당 안팎의 화려한 장식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이후 400년간의 문화공백기를 메우는 카알대제 시절의 문예부흥을 상징해준다.

 

 

생애와 활동

 

카알의 면모는 그의 친구이자 비서였던 아인하르트가 쓴 전기 '카알의 생애'(Vita Caroli) 덕분에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다.

 

이 전기에 따르면 카알은 신앙심 깊은 황제로 하루에 서너번씩 왕궁성당에서의 기도에 참여했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지막히 성가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완전한 그리스도국가의 실현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한 그는 식사 때마다 아우구스티노의 '하느님의 도시'(신국론)를 읽게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데도 열정적이어서 자신의 왕국내에서 만이 아니라 멀리 바다건너 시리아, 이집트, 예루살렘 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인들이 곤궁한 처지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돈을 보내곤했다. 또한 이교도의 통치 아래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돕기위해 그들과 친선을 맺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마교회를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를 종식시키고 중세 초기 문명으로의 전환을 완성한 카알은 771년 왕위에 올라 814년까지 통치했다.

 

카알은 왕위에 오르면서 두가지 정책을 실시한다. 첫째는 모든 게르만민족을 하나의 왕국으로 결합하는 확장정책이고 둘째는 자신이 정복한 모든 영토내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정책은 로마를 침입한 랑고바르드족을 정복하면서 공인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된다. 랑고바르드족은 카알에 반대하기 위해 하드리아누스 교황에게 동맹을 제의했으나 교황이 이를 거절하자 773년 즉각 로마를 침입했다. 이에 카알은 이탈리아로 원정해 랑고바르드족을 정복하고 스스로 랑고바르드의 왕위에 올랐다. 이 전쟁중 카알은 774년 부활절을 보내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는데 이때 교황과 같이 성 베드로 사도의 무덤 앞에서 서로에게 충실할 것을 맹세했다. 여기서 카알은 로마 최고의 귀족으로서 로마를 군사적으로 보호할 책임을 받았다. 이때부터 '로마교회의 수호직무'는 곧 서구 황제들의 직무가 됐다.

 

이로써 자신의 교회적 종교적 지위가 확보되자 카알은 더욱 강력하게 자신의 정복을 교회의 이름으로 추진해 나갔다. 그의 전쟁은 철두철미하게 왕국의 국경 주변을 압박하던 미신자와 이교도들을 향했고 그리스도교화가 정복과 결합돼 이민족들의 그리스도교화는 그들에게 프랑크 왕국의 통치권에 굴복함을 의미하게 됐다. 800년 무렵이 되자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와 독일 대부분,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차지했다. 일견 해체된 서로마제국의 부활이었다.

 

 

제국이념과 교회정책

 

카알의 통치적 특징은 로마의 문화, 게르만적 생활방식, 그리스도교 이 세가지에 기반을 둔것이다. 자신의 전 통치기간 동안 이 세가지 요소를 결합해 하나의 왕국을 만들었고 유럽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 그래서 이후 지식인들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Patria Europae)라고 칭송했다.

 

아우구스티노의 신국사상의 실현을 꿈꾼 카알은 완전한 하나의 강력한 그리스도교적 제국을 만들기 위해 백성들의 종교적 교회적 문화적 향상에 전념해 학문과 예술을 번성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카알의 이러한 제국이념은 비잔틴 황제의 이념을 알게된 후부터 더욱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이 사라져 신정정치화 했다.

 

측근들이 자신을 다윗 왕으로 부르는 것을 즐겨한 카알은 자신의 직무를 하느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파견된 그리스도교계의 지도자요 보호자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재산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교구와 수도회를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로 채웠으며 수도원장과 성직자들에게 국가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이러한 지나친 정교유착은 경건하고 강력했던 군주였던 자신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을 때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의 사후 후계자들에 의해 다시 교회가 세속화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카알의 신정정치 이념은 800년 성탄대축일에 교황 레오3세가 자신을 기습적으로 황제로 대관한 것에 대한 불쾌감에서도 잘 나타난다.

 

799년 교황 레오 3세는 로마귀족들과의 불화로 로마에서 쫓겨나 카알의 도움을 청했고 카알은 이듬해 직접 로마로 가서 교황권을 복위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희망에 따라 아들을 성탄대축일에 도유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성탄축일 밤기도 중에 레오 3세가 카알에게 황제관을 씌우고 황제로 선언하자 깜짝 놀랐다.

 

교황 레오 3세는 황제를 대관할 수 있는 권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통일된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교황권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이미 동로마 황제와 대등한 위치에 있던 카알은 황제가 교황과 로마인에 의해 대관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1년반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로마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다.

 

동방은 레오교황의 행동에 대해 분노하고 무시했으나 이레네의 실각 이후 그의 황제권을 마지못해 승낙했다. 이로써 서구의 황제권이 재건됐고 제국의 이념은 카롤링거 왕조 와해 이후에도 수세기 동안 서구 역사의 내용과 방향을 제시했다.

 

위대한 황제 카알도 마지막 순간까지 가져간 것은 성경책 한권 뿐이었다. 그의 사후 200년 뒤에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뼈만 남은 황제의 손은 무릎위에 펼쳐진 성경중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마태 16, 26)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12월 16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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