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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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김수환 추기경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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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16 ㅣ No.1522

[돌아보고 헤아리고] 김수환 추기경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올해는 김수환(스테파노, 1922~2009) 추기경님 탄생 100주년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추기경님의 전기 『아, 김수환 추기경』을 집필하면서, 김수환 추기경님이 해방 이후 우리나라 가톨릭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어른이자 정신적 스승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매우 잘 이해하고 실천한 분이셨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기간 만 3년, 햇수로 4년 동안 현 가톨릭신문사의 전신인 가톨릭시보사에서 사장 신부님을 지내셨습니다. 김수환 당시 신부는 공의회 관련 외신이 들어오는 대로, 공의회에서 채택한 문헌이 발표되는 대로, 밤을 새워 번역해서 바로 그다음 주 신문에 소개할 정도로 공의회의 의미와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공의회 기사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4면으로 발행하던 신문을 8면으로 증면할 정도였습니다. 공의회 폐막 후, 1965년 12월 8일부터는 「공의회 회고와 전망」이라는 기사를 세 번에 나눠 싣고, 12월 25일 자에는 「공의회 의의」라는 자신의 칼럼을 실었습니다. 이 칼럼에서 김수환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사랑과 대화로 인간을 구하기 위한 교회 쇄신과 교회 현대화(아조르나멘토, Aggiornamento)”라고 규정하셨습니다. ‘교회 현대화’와 ‘교회 쇄신’은 교황 요한 23세가 언급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키워드였습니다. 그만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공의회가 개막한 1962년에는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고, 공의회 제3회기가 시작된 1964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김수환 신부! 그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이에 놓인 운명과도 같은 시·공간의 끈은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필연이었을까요? 당시 김수환 신부는 귀국 후 곧바로 문서 선교에 앞장섭니다. 물론 언론사 사장이었으니 많은 지면을 할애해 공의회 관련 보도를 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과 문헌이 현대 가톨릭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뮌스터대학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할 당시의 지도 교수이던 독일의 회프너(J. Hoffner, 1906-1987) 교수 신부와 폴크(H. Volk, 1903~1988) 교수 신부(두 분 모두 훗날 추기경)로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근간이 되는 ‘인간의 존엄’, ‘사회 정의’, ‘공동선’, ‘국가와 개인의 관계’ 등에 관한 학문적 가르침을 받고 신학적 시야와 사고의 폭을 넓혔습니다. 또 교회 쇄신의 지지자이자 탁월한 이론가로서 교의신학을 강의한 라칭거(J.A. Ratzinger, 1927~ , 훗날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수 신부 등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 전문위원(peritus)’으로 발탁된 교수 신학자들에게 “사회 속의 교회”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함께 토론도 했습니다. - 그래서 2007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김수환 추기경의 안부를 물으며, “뮌스터대학 시절에 대화를 많이 나눴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 이러한 과정을 통해 김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요성을 잘 알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천주교회에도 ‘교회 현대화’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는 물결이 일었습니다.

 

공의회 폐막 직후인 1966년 2월, 김수환 신부는 44세의 젊은 나이에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 주교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968년 4월, 당시 한국 교구 중 가장 작았던 신설 마산교구의 젊은 주교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만 47세에 ‘세계 최연소 추기경’에 서임되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등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인 ‘교회 현대화’의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파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추기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영광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영광은 잠시였고, 고난의 길이 멀고 험난했습니다. 1970~80년대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과 교회를 아울러 보살피고 지켜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권은 물론 교회 안팎에서도 교회가 정치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일었지만, 김수환 추기경은 “정부나 교회나 사회 지도층은 국민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양심의 외침을 질식시켜서는 안 됩니다.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불행해집니다.”라며 약자를 보호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졌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사랑과 겸손에 메말라가고 물질과 권력, 명예에 중독된 현대 사회에서 굵직굵직한 업적들을 남길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사랑과 대화로 인간을 구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탄생 100주년’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60주년’을 맞으며, 우리가 각박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잃어버리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성찰의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교회와 역사, 2022년 5월호, 이충렬 실베스테르(전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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