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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시복과 이시임 안나 삼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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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5-19 ㅣ No.628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시복과 이시임 안나 삼남매

 

 

2014년 8월 16일 교황님이 한국에서 시복식을 거행하신다. 이번 복자들은 103위 성인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은 바로 한국사회에서 그 낯선 가르침을 이해한 첫 사람들이다. 기해, 병오박해 때 이미 천주교 교리가 알려져 있기 때문에 관(官)에서도 교리에 대해서는 그렇게 다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초창기 박해 때는 정부가 교리를 잘 몰라서 잡혀온 이들에게 이를 묻고 그 내용도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신자들도 천주교리를 통하여 무엇을 깨달았으며 어떻게 살았는가를 토로하고 있다. 영세를 하자마자 삶의 방향을 전향한 사람들이다.


이시임의 가족관계

시복이 발표되는 순간, ‘우리도 삼남매 복자가 나오는구나.’ 싶었다. 이시임 삼남매는 때를 달리하여 순교했다. 이시임은 1816년 을해박해 때 신앙을 증거했고, 그의 오빠와 남동생은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오빠인 성지(일명 儒震)는 1835년에 57세의 나이로 순교했고, 동생 성삼(일명 儒定)은 1827년 32세 때 순교했다. 순교 당시 이시임은 35세였다, 그런데 오빠와 남동생은 이번 시복 대상에서 빠졌다. 그러나 그 오빠와 남동생은 먼저 체포된 여동생 이시임 때문에 더 심한 고문을 당했고, 순교했다. 이렇게 순교한 3남매 가운데 이시임 혼자만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다.

이시임(1782년~1816년)은 충청도 덕산인으로 일찍부터 천주교를 알았고 동정으로 살려고 동정녀 공동체를 찾아가다가 교우였던 뱃사공 박가(朴哥)에게 겁탈 당해 그와 살게 되었다. 그 후 아이가 태어났으나 뱃사공 박가가 얼마 되지 않아 죽게 되자 이시임은 진보 머루산 교우촌을 찾아갔다. 그리고 몇 해 안 되어 을해박해가 일어나 관덕정에서 참수치명했다. 이것이 이시임이 남긴 삶의 줄거리이다. 그러나 그들 남매에 관한 사료를 종합하면 그의 행적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이시임은 함평 이씨이며 충청도 덕산 높은뫼(현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대대로 무관을 지낸 양반가문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맏이 성지, 둘째 이시임, 그 아래 동생, 그리고 이시임과 13년이나 터울 진 막내 성삼이 있었다. 또한 덕산은 강완숙의 시가 동네이며, 우리나라 초기 교회에서 크게 활동한 홍씨 일가들의 세거지였다.

이시임은 어려서부터 입교하여 동정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가 몇 살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 집안에서 남자형제들은 1803년경에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1803년이면 이시임이 21살이었다. 당시는 이 나이를 어리다고 표현할 수 없었다. 이를 감안하면, 이 집에서는 이시임이 가장 먼저 천주교를 받아들인 다음, 오빠 성지를 설득해서 입교케 한 것 같다. 그리고 이시임의 오빠는 부모에게 입교하기를 끈질기게 권유하여 이 집안 전체가 천주학을 하게 되었다. 즉 이시임은 그 집안이 입교하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이시임은 혼기에 이르러 동정녀들이 공동생활을 하던 곳을 찾아 집을 떠났다. 시기는 신유박해 이전이 아니라면 훨씬 후였을 것이다. 천주교 조직이 와해되고 있는 박해기간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이시임의 오빠 성지는 25세의 나이로 신유박해가 거의 끝날 무렵 동생들과 함께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그는 영세는 했지만 장남이라서 고향에서는 외교인 친척들의 눈도 있고 해서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지는 결국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온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들어갔다.

이즈음에 이시임도 고향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는 가족처럼 여성신앙공동체로 들어가고자 했으리라. 집을 나선 이시임은 교우 뱃사공 박가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그런데 길을 가던 도중 박가는 이시임의 동정을 빼앗았다. 그리하여 그는 뱃사공 박가와 살 수밖에 없었다. 이시임은 종악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몇 해 안 되어 과부가 되었다. 이시임은 아이를 데리고 진보 머루산 신자촌에 정착했다. 1815년 그가 체포되었을 때 그의 아들 나이가 4살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본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제시해 준다. 한편 같은 교우로서 그의 처지를 알았을 뱃사공 박가의 무례한 행동을 보면, 이시임이 고향을 떠난 시점은 그 집안이 번듯한 양반의 처지에서 밀려났던 때로 상정할 수 있다.

고향을 떠난 이시임의 아버지와 형제들도 얼마 안 되어 가져온 재산은 바닥나고 식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러자 비신자인 부친은 가족을 파경으로 이끈 천주학을 원망했다. 이시임의 오빠 이성지는 아버지의 개심을 위해 기도하고 고행했다. 10년이나 흘러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했고, 열심을 다하다가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 가족은 진보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과부가 된 이시임은 진보 교우촌을 찾아갔을 터였다.


순교한 세 남매, 그중에 복자는 하나

이시임은 1815년 ‘부활 축일’에 진보 머루산에서 많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안동진영을 거쳐 대구에 있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었다. 1815년 10월 이시임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11월 그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형은 1년이나 지나서 집행되었다. 따라서 이시임은 약 20개월간 옥중생활을 했다. 이때 함께 옥살이를 하던 김종한은 감옥에서 이씨와 유씨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가족을 부탁했다. 즉 “몸담을 곳이 없는 내 아내를 보살펴 주십시오. 내 아내를 형의 집에 받아들이고 친척처럼 대하며, 그의 육신과 영혼의 생명을 보존해 주는데 힘쓰시면, 형은 그것으로 형 자신의 구원의 일을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 형의 따님이 우리와 함께 갇혀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부탁을 한층 더 마음 가볍게 하는 것입니다.”라는 편지였다. 김종한은 옥살이를 1년 이상 한 뒤에 이 편지를 썼다. 당시 옥에는 나중에 관덕정에서 순교하는 이시임과 구성열 등 7명이 함께 있었다. 그러므로 편지에서 언급된 ‘이씨의 딸’은 이시임일 확률이 높다. 즉 김종한은 그때까지 진보에 살고 있었던 이시임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달래 신부가 이시임을 이성삼의 딸로 잘못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사는 집으로 부친 편지에서 온 오해였지 않을까?

이시임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더는 고문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최악의 궁핍과 굶주림을 당했다. 전국적으로 무서운 기근이 들었던 1815년 감옥 안의 식량 사정은 더욱 험악했다. 그러나 이 죄수들은 감옥 속의 어려움을 견디면서 천주교가 무엇인지를 알렸다. 그들은 낮에는 생계를 위해 짚신을 삼았고, 밤이 되면 함께 성경을 읽으며 공동기도를 드렸다. 그들은 규율이 잘 잡힌 가족과도 같았다. 외교인들도 감탄했고, 포졸들도 가끔 와서 천주교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려 했다. 이시임의 아들 박종악은 감옥 안의 엄마 품에서 죽었다. 이시임은 ‘아들이 죄짓지 않고 천국에 일찍 갔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순교의 날이 왔다. 관덕정 형장에서 남자 다섯 명이 먼저 목숨을 바쳤다. 이시임과 구성열은 그 과정을 고스란히 견디어 냈다. 마지막 순간 관장은 다시 한 번 여자의 몸으로 왜 굳이 죽음을 택하느냐며 배교를 유도했다. 그네들은 “남자들은 천상의 아버지이신 천주를 공경하고, 여자들은 천주를 공경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라고 답했다. 체포와 옥살이, 처형의 과정에서 이시임의 담대한 신앙고백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시임의 오빠 이성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을 거느리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전라도 고산땅에 정착했다. 그는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고, 흉년에는 길에 뒹구는 시체들을 거두어주며 봉사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1827년 3월 24일 전주 포졸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이른바 정해박해였다. 그때 온 가족 13명이 끌려왔는데, 옥이 비좁아 몇 식구는 옥에, 몇 식구는 개인 집에 분산되어 갇혔다.

심문이 시작되었다. 관장은 조상의 위패를 어떻게 모셨는가 물었다. 이성지는 산에서 잘라온 나무쪽이 부모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판관은 신자들의 명단을 실토하라고 하며 팔주리를 십여 차례나 틀었다. 그는 팔이 부러지고 의식을 잃었다. 3일 후 다시 심문을 받으며 똑같은 질문을 여남은 번 받고, 곤장을 모두 300대나 맞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시임의 동생 이성삼이 죽었다. 이성삼은 어릴 적에 부모가 글공부를 시켰다. 그 덕으로 그는 천주교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팔거나 거저 주었다. 가난한 교우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함께 갇힌 신자들이 자신의 서적을 이성삼이 베껴주었다고 발설했다. 그는 신자들의 괴수로 지목받고 더욱 혹독히 고문당했다. 이성삼은 사형이 확정되고 판결문을 기다리던 중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했다. 이시임의 오빠 이성지도 옥살이 8년에 옥중 순교했다.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성삼의 부인 김 아나타시아와 딸 이 아나타시아는 1839년 박해 때 전라도 광주에서 유배살이 하던 홍재영(1779~1839년)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김 아나타시아는 남편이 순교한 이후 남편과 같은 고향사람인 홍재영이 유배당한 곳으로 왔다. 홍재영의 집에는 그의 직계가족 이외에도 7명의 객식구가 있었다. 이들은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를 보면 그들은 유배지에서도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홍재영은 충청도 예산 출신으로 홍낙민의 아들이고 홍봉주의 부친이다. 홍낙민은 이승훈, 정약용 등과 함께 초기교회를 위해 활동하다가 1801년 처형되었다. 또한 홍양한의 아들인 홍낙민은 교회창설 이전에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실천했던 홍유한의 7촌 조카였다. 강완숙의 남편인 홍지영은 홍철한의 아들로, 홍낙민의 서팔촌손이었다. 한편 홍재영 자신은 이벽의 누이와 정약현 사이에서 낳은 딸과 혼인했다. 정약현의 또 다른 딸은 황사영의 부인이며, 정약현의 여동생은 이승훈의 부인이었다. 이시임의 올케와 조카가 이러한 사람 집에 의탁했던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시임의 가족은 교회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보겠다.


순교자의 생활을 비추어야

풍비박산 난 이시임 집안의 순교는 완성으로 향한 여러 번의 담금질이었다. 이들 가운데 이시임만이 2014년의 시복 대상자가 되었다. 물론 이번 시복은 한국 주교들 공동의 노력이 이룬 결실이다. 10여 년을 수없는 회의를 거듭하면서 각기 독립적인 교구들이 일사분란하게 협조했다. 특히 대구대교구는 이문희 대주교에서 시작하여 최영수 대주교, 조환길 대주교 등으로 교구장이 바뀌면서도 꾸준히 이 일을 해냈다. 다만 순교자들의 생애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못했던 듯하다.

이번 시복 대상자들은 그들의 순교지를 관할하는 각각의 교구에서 선정한 인물들이었다. 이시임의 순교지는 대구대교구에 속했고, 그의 남자형제들은 전주교구 지역에서 순교했다. 아마 이 두 교구의 시복대상자 선정기준에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이 과정에서 이시임의 오빠와 남동생이 시복 대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승에서 풍비박산 났던 그들 가족들은 시복식의 자리에서도 함께 모일 수 없게 되었다. 시복될 이시임을 현양하고 그의 오라비와 동생들을 복자 위에 올리는 일은 앞으로의 과제이다. 또한 우리는 순교자들이 살았던 생활 자체를 좀 더 천착함으로써 순교자의 신앙만을 중시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던 그 삶의 의미를 간과하던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하면 신자와 비신자들 모두는 순교자들에게서 진정한 삶의 방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월간빛, 2014년 5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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