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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옥잉애 원장과 소화어린이집의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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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6 ㅣ No.686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이유 있는 너그러움’ 속으로 날았던 소화어린이들 - 옥잉애 원장과 소화어린이집의 50년



천주교회는 교리교육에서부터 어린이의 인격과 권리를 강조해왔다. 물론 실생활에서도 어린이를 돌보기를 애썼다. 교회는 박해시대에도 ‘성영회’를 만들어 고아들을 돌보았다. 이는 고아를 각 가정에 입양시키고 일정한 나이까지 교회에서 매달 양육비를 주는 제도였다. 프랑스에서 홀본·장송이 시작한 제도이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오자마자 고아들을 한곳에 모아 돌보았다. 수녀원에서 이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아들에 대한 돌봄과 함께 일하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탁아개념의 어린이돌보기를 시작했다.

암에 걸렸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감기 몸살이예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곧 나아진다며 쉽게 관심을 거둔다. 아픈 순간 환자에게는 두 질병이 거의 같은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쏠리는 관심은 듣는 이의 판단에 좌우된다. 그렇지만 섬세한 마음은 새로운 고통을 읽게 된다. 옥잉애(Ingeborg Ellermkamp, 玉剩愛; 1932~ )는 한 어린이를 통해 미처 사회가 손쓰지 못한 아픔을 보았고 이 아픔을 사람들의 중심과제로 끌고 나왔다. 그러는 사이 우리나라에서도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져갔다.


네 살배기 아들을 옆에 태우고 운전하는 택시기사

옥잉애는 1963년 3월말에 김포에 도착하여 이튿날 대구로 내려왔다. 그는 독일에서 유치원교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해외선교를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해외선교는 주로 사회사업가나 학교교사를 요구하고 유치원교사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의 어린이들이 당신의 도움을 원하고 있다」는 하 마리아의 호소문을 읽게 되었다. 하 마리아는 그때 대구에서 SOS어린이마을을 짓고 있었다. 옥잉애는 한국행을 결심했다. 당시 외국인들은 초청이 있어야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는 서정길 대주교의 초청장으로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옥잉애는 SOS어린이마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한 젊은 택시기사가 네 살 된 어린 아들을 데려와서 통사정을 했다. 그는 두 달 전 아내를 잃고 어린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운전하다가 SOS마을을 알고 찾아왔다. 그러나 SOS마을은 고아만 받는 곳이었다. 사정을 하던 그는 아이를 몰래 내려놓고 가버렸다. 그때 옥잉애는 고아말고도 여러 면으로 딱한 처지의 아이들이 있음을 보았다. “많은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었고, 아버지가 있어도 전쟁으로 인해 신체 일부를 잃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엄마는 어린 아기를 등에 업고, 4살된 아이는 치맛자락에 매달려 양말 행상을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옥잉애는 서정길 대주교를 찾아가 탁아소 설립을 의논드렸다. 하지만 당시 교구는 재정여건상 도울 수가 없었다. 옥잉애는 강계원 대구시장을 찾아갔다. 그때 시에서는 자갈마당 근처에 시립탁아소를 운영하고 있던 터라 옥잉애의 뜻에 깊이 공감했다. 1년 후에 갚는 조건으로 시소유지를 임대받게 되었다. 옥잉애는 이명우 부주교(몬시뇰)와 대구시내 여러 시부지의 땅을 보러 다녔다. 그는 보유원(保幼院, 현 보육원)은 어린이들이 버스를 타고 오는 거리여도 안되고, 너무 커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1964년 대명3동의 채소밭 주변 땅 990여㎡를 임대받았다. 인근에는 대명시장이 있고, 계명대학과 맹아학교(후에 사회사업대학, 대구대학) 사이에 피난민들이 무허가집에서 생활하는 작은 동네였다. 비가 내리면 진흙탕으로 범벅이 됐고, 하수시설을 갖추지 않아 집이 침수되는 곳이 많았다. 수돗물을 받으려면 새벽 4시부터 줄을 서야 했다. 가장의 월수입은 보잘 것 없었고 어머니도 행상이나 고물장사 등 일터에 나가 어린이들은 왼종일 혼자 놀았다. 옥잉애는 독일 고향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친구들은 이 편지들을 복사하여 아는 지인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로텐브록 슈트가르트 교구와 독일 가톨릭국제개발원조기구인 미제레오르와 미씨오가 이를 지원했다. 11월, 모금된 40만 원으로 건축을 시작하여 이듬해 놀이터가 딸린 2층집이 완성됐다. 당시 쌀 한 가마 값은 3천680원이었다. 일 나가는 한 부모 자녀 중에 하루 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가장 어려운 형편의 아이부터 30명을 뽑았다. 1965년 5월 5일 「가톨릭소화보유원」으로 개원했다.

탁아의 개념은 조선에서 한창 기해박해가 시작될 무렵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육아교육은 이 무렵 독일에서 프뢰벨이 주창했다. 가톨릭소화어린이집은 맞벌이 부부의 탁아를 맡으면서 또한 독일의 발달한 유아교육을 적용했다. 이 교육을 위해 교사들은 놀잇감이나 교재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교사들은 그림책, 인형 등도 만들었다. 소화어린이집은 당시 사회에서 어린이 돌봄뿐만 아니라 그들 교육에 대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대명시장에서 가게를 하던 분은 형편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나 일이 많았고, 또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는 이곳에 자녀를 보내고 싶었다. 그는 셋방사는 동생의 서류를 빌어 자신의 아이를 등록시켰다. 그런데 같은 동네 아이들끼리는 서로 알고 있어서 이 사실이 드러났다. 3일 후 옥잉애 원장이 가게로 찾아와 “거짓말하면 안 되지요.”라고 단호히 말했다. 또 한 할머니는 “우리 아이는 부모가 다 있는데 왜 여기 있느냐?”며 들어섰다. 시골에 사는 할머니가 다니러 왔다가 부모는 맞벌이 나가고, 손주가 어린이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기겁하여 달려온 것이다. 어린이집과 고아원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개신교나 사회 유지 등에 의해서 탁아형 어린이집이 설립되어 가던 시점이었다.


늘어나는 살림 - 기념할 일이 있는 학교

옥원장은 지원하는 학생들을 다 받지 못하는 것이 늘 가슴 아팠다. 계속 독일에 편지를 띄워 독일에서 보내오는 돈이 모일 때마다 방을 1칸씩 늘려갔다. 2년 후 세 개 반을 증설했고, 이듬해 또 1개 반을 증설했다. 물론 이런 초기를 지나 분원을 짓거나 큰 공사에는 대구교구, 한국정부 등의 지원이 적지 않았다. 드디어 1971년 성당시장 근처(대명 4동 3001-17)에 분원을 설립했다. 첫 어린이집에서 분원까지는 대구대학교 뒷담길을 따라 소화성당을 지나면 옥원장의 걸음으로 10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그는 매일 양쪽 집을 오가며 일했다. 오갈 때는 교재를 날라 한 교재를 양쪽집이 이용할 수 있었다. 1978년에도 2개 반을 증설하여 300여 명의 어린이를 돌보게 되었다.

그 사이 어린이집 주변 환경은 변해갔다. 시장이 번창해서 어린이집을 에워쌌다. 드디어 옥원장은 1988년 대명동의 첫 번째 어린이집을 처분하고 상인동(1429번지)으로 이사해서 이듬해에 개원했다. 이렇게 120명 정원의 대명동 어린이집과 200명 규모의 상인동 어린이집이 설립되었다. 모원이 상인동으로 이전하자 두 어린이집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멀었다. 대명시장과 성당시장 사이처럼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1994년 말 옥원장은 대명동에서 퇴임했다. 대명동에서는 1995년부터 이숙희 원장이 맡아 운영하다가 2014년에는 박미숙 원장이 취임했다. 박원장은 고등학교 졸업 후 아르바이트로 어린이집에서 일한 인연도 있었다. 옥원장은 교사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한 교실에 아르바이트 학생 한 명씩을 딸려 주었기 때문에 그는 여기에서 일할 수 있었다.

2000년 옥원장은 직접 운영하던 상인동 어린이집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상인동 어린이집은 한국노틀담수녀회에서 운영을 맡았다. 역대원장으로 황자연 수녀, 전인숙 수녀, 이연순 수녀를 거쳐 현재 다시 황자연 수녀가 책임을 맡고 있다. 두 어린이집은 함께 ‘소화어린이집 5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두 소화어린이집은 기념할 정신이 있는 생명 있는 집이다. 소화어린이집은 양보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놀이터이다. 옥원장은 어린이는 놀이를 통해 성장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놀이시설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소화어린이집은 두 곳 다 복잡한 골목에 위치해 있지만 놀이터만은 크다. 마치 밀집된 주택가 안에 소공원 같다. 50년 전에 세웠던 첫 집도 놀이터를 갖추었다.

옥원장의 놀이터에 대한 마음을 보이는 일화가 있다. 그는 첫 어린이집에서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닭 300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어린이 놀이터 뒤에 닭장을 지었으나 청결상 곤란하여 즉시 접었다. 다시 돼지 10마리를 키웠으나 이도 오래하지 못했다. 한편, 상인동 어린이집 바로 옆에는 동네 어린이놀이터가 있다. 그러나 옥원장은 유리조각과 같은 안전문제나 청결문제를 직접 점검하지 못한 놀이터에는 어린이를 내보내지 않았다. 옥원장이 원하는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여 어린이집을 설계하고 지은 사람은 조기보(마태오)였다. 그는 세 곳의 어린이집을 모두 건축했다. 특히 그는 소화어린이집이 설계와 공사비를 형편이 되는대로 찔끔찔끔 지불해도 묵묵히 일해 준 원군이었다. 대구의 SOS어린이마을, 삼덕성당, 대봉성당, 소화데레사성당들도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하얀 원장님’의 뜻을 사랑한 사람들

가톨릭소화보유원은 맞벌이 부부를 돕기 위한 무료탁아를 목표로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가 변하면서 형편이 되는 대로 부모들도 부담을 나누어갔다. 1970년경 옥원장은 원아 1명에게 간식비로 일일 5원씩을 받았다. 당시는 라면 1개 값이 20원이었던 때였다. 그리고 1972년부터는 정부에서 어린이집을 정식으로 관리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부터는 지원과 감독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톨릭소화보유원, 가톨릭새마을유아원, 가톨릭소화어린이집으로 그 명칭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현재는 원아 전원이 정부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은 부부 중 한 명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놓고 저녁에 데려가는 일이 일상의 모습이 되었다. 어린이교육제도가 발달하면서, 초기 ‘조건 없는 너그러움’을 창출했던 사람들이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또 원장의 교육이념을 실천할 여지도 없어졌다. 그러나 초대원장 옥잉애는 자신의 수고를 어려운 아이들에게 나누었다. 다양한 기관으로부터 상도 여러 번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쏟은 것만큼의 순수한 사랑을 받았다. 그는 “사람들이 나를 받아 주었어요. 내가 한국말을 잘못해도 다 알아들어 주었어요.”라고 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서 힘을 받아가며 그는 일할 수 있었다.

옥잉애는 박현수와 박옥순을 특별히 기억한다. 박현수는 계명대학을 졸업한 유아교사였는데, 어린이집 초기 유아교육의 기틀을 잡아 주었다. 그는 3년간 근무하고,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부원장 박옥순(수산나)은 옥원장의 30년지기였다. 그는 박옥순 덕분에 아이들의 식사준비나 살림 걱정없이 지낼 수 있었다. 박옥순은 해방 직후 단신 월남하여 생활하다가 옥원장이 입국하자 옥원장 사업에 합류했다. 그는 1999년 암으로 선종했다. 옥잉애는 택시기사가 아이를 두고 갔을 때 보호되지 않는 새로운 아픔을 보았다. 그리고 이 시선 속으로 수많은 이들이 따뜻함을 보탰다. 그들은 함께 어린이들과 행복하게 웃었다. 이들을 기억할수록 오늘 내 앞에 있는 새로운 고통에 무디지 않게 될 것이다.(도움: 옥잉애 원장, 황자연 원장, 박미숙 원장, 백영술)

[월간빛, 2015년 5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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