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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강원도 프랑스 선교사 서한집 I · II(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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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6 ㅣ No.894

[자료] 《강원도 프랑스 선교사 서한집》 I · II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2015.

 

 

내 책상 왼편에는 이동식 삼단 책꽂이가 하나 있다. 원래 도서관에서 책을 나를 때 쓰는 것인데 흔히 북 트럭이라고 부른다. 바퀴가 고장나서 버리는 것을 얻었는데 손재간이 좋은 직원 분께서 고쳐 주셔서 유용하게 쓰고 있다. 항상 손이 닿는 곳에 두고 필요할 때 즉시 뽑아들어야 하는 책들은 대개 이 책꽂이에 둔다. 주로 사전이나 자료집이 꽂혀 있다. 오늘은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서한들을 모아서 번역한 《강원도 프랑스 선교사 서한집》(이하에서는 《서한집》이라고 부름)을 펼쳤다. 이 자료집은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에서 우편으로 보내준 것이다. (감사합니다, 김주영 소장 신부님!) 늘 곁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볼 생각이다. 이하에서는 《서한집》의 성격과 의의, 구성과 내용, 원천 자료 등을 살펴보고, 만약 내가 글을 쓴다면 이 자료집을 어디에다 활용하겠다는 것인지 그 학술적 용도를 제안한 뒤에, 사족으로 몇 가지 덧붙일 만한 사항들을 제시하겠다.

 

 

1. 성격과 의의

 

《서한집》은 2015년에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에서 2권으로 간행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춘천교구가 관할하는 강원도 지역의 교회사 연구에 요긴한 옛날 프랑스 선교사 서한들을 번역하여 묶었다. 《서한집》 I의 <해제>에 밝혀 놓은 바에 따르면, 춘천교구가 2000년 한국교회사연구소에 강원도 관련 천주교 자료의 복사를 의뢰하였다. 이에 2003년 전주교구의 지정환 신부가 자료를 판독하고 전산 입력하여 2004년 1월에 자료집을 간행하였다. 이 자료집의 제목은 불어로 되어 있었는데 Lettres du Kangwon Do이며, 한국어로 옮기면 《강원도 서한집》 정도가 될 것이다. 지정환 신부는 벨기에 사람인데, 원래 이름은 그 나라 말로 디디에 세르스테반스(Didier t’Serstevens)이다. 뮈텔 주교의 일기를 비롯해서 불어로 된 한국 교회사 관련 문헌들을 많이 판독하여 교회사 연구자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분이다. 그러니까 지정환 신부가 판독하였다면 믿을 만하다.

 

사실 한국 교회사 관련 불어 자료, 특히 선교사 서한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이 손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알아볼 수도 없다. 오죽 했으면 뮈텔 주교의 필체를 지렁이가 기어간 자국이라고 했을까.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오래도록 한국 교회사 불어 문서의 판독 작업을 해 오신 지정환 신부를 비롯하여, 대전교구의 서봉세 신부, 한때 수원교구에 계셨던 최세구 신부 같은 분들은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은인과도 같다. 물론 그 원조 격에 해당하는 분은 따로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설립자 최석우 몬시뇰과 의형제처럼 가까웠던 배세영 신부다. 1990년대에 간행된 앵베르 문서, 페레올 문서, 다블뤼 문서, 베르뇌 문서, 블랑 문서는 모두 배세영 신부가 판독한 것이었다. 그 정확성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차치하고 한국 교회사 불어 사료 판독의 역사로만 보자면 배세영 신부가 남긴 족적은 무척 크고 깊다. 고국에서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0년 7월 5일에 쓸쓸히 선종하신 그분을 기억하는 일도 교회사 연구자들의 과제이리라.

 

각설하고 《서한집》은 지정환 신부가 2003년에 판독하고 2004년에 춘천교구 교회사 연구위원회 무지개 전산실에서 간행한 450쪽짜리 불어 자료집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자료집의 서지사항은 한국교회사연구소 도서관 홈페이지(www.libhistory.er.ro)에서 검색하였다.) 번역하는 데 수고하신 분은 성신여대 강사이며,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객원 번역위원인 김영운 소화 데레사 선생이다. 그리고 교회 용어의 특수한 쓰임새를 잘 반영한 번역이 되도록 전체적으로 번역서를 감수한 분은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주영 신부다. 이런 분들의 노고에 힘입어 《서한집》이 한국어로 번역 간행됨으로써 비로소 교회사 연구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사료로서의 쓰임새를 갖추게 되었다. 앞으로 강원도 지역의 교회사를 연구할 때에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될 것이다. 나아가서 강원도 지역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사 전반을 볼 때에도 다른 지역의 경우와 비교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해당 시기 천주교 신자들의 일상생활, 신앙 활동, 교회 상황 등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서한집》이 어떤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우리가 주목할 만한 내용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보자.

 

 

2. 구성과 내용

 

《서한집》에 담긴 서한들은 1892년부터 1928년까지 강원도 이천(伊川)과 평강(平康)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이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주고받은 것들이다. 여기서 이천은 경기도 이천(利川)과는 다른 곳이다. 강원도 이천과 평강은 오늘날로 치면 휴전선 이북에 위치한 곳이다. 그러니까 철원과 연천 너머의 북한 땅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에 이천, 평강 지역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는 세 사람이다. 뒤테르트르 신부, 루케트 신부, 부이수 신부가 그들이다.

 

먼저 1892년에 뒤테르트르 신부가 이천 본당에 부임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1883년 4월에 드게트 신부가 부임하여 강원도 지역과 함경도 지역까지 담당하면서 본당이 신설되었다. 그러다가 1884년 후반부터 프와넬 신부가 이천 본당의 주임을 맡았고, 다시 1년 뒤에 프와넬 신부가 경기도로 전임되면서 드게트 신부가 잠시 맡았다가, 1887년부터 쿠데르 신부가 5년 동안 이천 본당에서 정력적인 사목 활동을 펼쳤다. 1892년 4월 쿠데르 신부가 열병으로 선종한 뒤에 로 신부가 잠시 맡은 뒤에 뒤테르트르 신부가 이천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던 것이다. 12년 동안 이천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던 뒤테르트르 신부가 1904년 홍역으로 선종하자, 그 후임으로 루케트 신부가 부임하였다. 루케트 신부는 적극적인 사목 활동을 펼쳤는데, 1912년에 이질과 폐결핵으로 투병하다가 1914년 서울에서 선종하였다.

 

한편 뒤테르트르 신부가 활동하던 당시인 1896년에 이천 지역에서는 포내(浦內) 본당이 분할되었다. 강원도 일대와 함경도 지역의 신자가 늘어나자 뒤테르트르 신부가 새로운 본당을 설립할 것과 동료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뮈텔 주교에게 요청하였고, 이에 포내 본당이 신설된 것이다. 이때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선교사가 부이수 신부였다. 포내 본당이 관할하던 공소들은 강원도 이천보다는 황해도에 더 많이 분포하여 있었다. 그러다가 1925년과 1928년에 새로운 본당이 생겨나자 포내 본당의 관할 지역은 축소되었고, 결국 포내 본당은 1928년 정원진 신부가 담당하던 이천 본당의 관할 공소로 흡수되었다. 이에 1896년부터 1928년까지 32년 동안 포내 본당에서 활동하였던 부이수 신부는 경기도 청계리 하우현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이상의 이야기는 《서한집》의 <해제>에 들어 있는 설명을 참고한 것인데, 종합적으로 말해서 《서한집》에는 세 묶음의 자료들이 들어 있다. ① 뒤테르트르 신부가 이천 본당에 부임한 1892년부터 선종한 1904년까지, ② 뒤테르트르 신부의 후임으로 루케트 신부가 부임한 1904년부터 선종한 1914년까지, 그리고 ③ 부이수 신부가 이천의 포내 본당에 부임한 1896년부터 본당이 폐지된 1928년까지의 서한자료들이다. 뒤테르트르 신부 관련 서한은 64통이며, 루케트 신부 관련 서한은 71통, 그리고 부이수 신부 관련 서한은 135통이다. 이렇게 전체 서한의 분량이 많다보니 한 권으로 묶을 수 없어서 《서한집》Ⅰ, 《서한집》 II로 나누어 엮은 것 같다. 먼저 뒤테르트르 신부와 루케트 신부 관련 서한은 《서한집》 I에 실려 있고, 부이수 신부 관련 서한은 《서한집》 II에 실려 있다.

 

그러면 《서한집》의 내용을 한 번 들여다보자. 뒤테르트르 신부 관련 소한자료들의 목차를 일별하면 제일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사건’이다. ‘복주산 공소 박 펠리스 사건’, ‘사제관 약탈 사건’, ‘이방춘, 맹시화 사건’, ‘구당 사건’, ‘김순식 사건’ 등등. 계속해서 무슨 무슨 사건에 대해서 뮈텔 주교에게 보고를 올리고 도움을 요청하거나, 사후 처리 결과를 보고하고 주교의 도움에 감사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아마도 뒤테르트르 신부가 활동하던 1892년부터 1904년 사이의 시기가 한국 근대사에서 격동의 시절이었고, 천주교와 지방 관아 내지 지방민 사이에 충돌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비단 강원도 북부 지역에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소위 ‘교안(敎案)’이 빈발하였다. 대개 서울의 뮈텔 주교가 프랑스 공사의 도움을 받아 외교적인 협상에 나서고, 또 지방에 주재하는 선교사들은 한불조약의 조약문과 자신의 여권을 내보이면서 강하게 지방관을 압박함으로써 천주교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되곤 하였다. 뒤테르트르 신부의 서한 자료에도 이러한 경향이 드러난다.

 

한편 뒤테르트르 신부가 선종하고 그 후임으로 부임한 루케트 신부가 활동하던 시기인 1904년부터 1914년 사이에는 통감부가 설치되고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급기야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여 무단통치를 실시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하지만 천주교회의 당국자들이 보기에는 정치 상황이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 정치적 환경보다는 교회 내부의 문제, 즉 일상적인 신앙생활에 눈을 돌려야 하는 시점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서 루케트 신부 관련 자료들은 사제관 공사, 학교 설립, 혼배와 같은 사목상의 문제들이 많이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은 1912년 7월 30일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 죽고 9월 13일에 장례식이 거행되었을 때 루케트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영결식에서 천황의 영정 앞에 절을 하는 것이 미신이냐 아니냐를 물으면서, 정부에서 아무리 세속적 의례라고 말하더라도 루케트 신부는 이것이 미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절을 해도 된다고 말한 교리교사를 벌해야 하지 않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1920년대 후반에 가서야 신사참배 문제가 불거졌지만, 이미 1912년부터 동아시아 지역의 전통적인 장례의식과 일본의 신도의식에 참석하여 절을 하는 문제에 대한 의구심이 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뒤테르트르 신부와 루케트 신부의 활동 시기 전체를 관통하여 강원도 북부 지역에서 본당 주임으로 일했던 부이수 신부의 서한자료들에는 위에서 말한 특징들이 골고루 나타난다. 그러니까 근대 개항 무렵의 사회적 혼란에서 시작하여 조선 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이르는 과정들, 이에 대응하는 조선 천주교회의 태도, 점차 증가하는 교회 내부의 사무에 몰두하는 자세 등이 부이수 신부의 서한 자료에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선교사들의 서한 자료들은 내용이 너무 소략하다.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정말 의아한 일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에 대해서 부이수 신부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이수 신부의 1920년 사목 보고서(253쪽)에는 아동 매매라는 통탄할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는 이야기밖에 없다. 그리고 사목보고서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내용이 부실하다. 한 해 동안 거행한 성사 실적 보고도 들어 있지 않으며, 본당 관련 대소사나 지역 상황을 보고하는 내용도 없다. 게다가 부이수 신부의 경우에는 활동 지역이 강원도 이천보다는 황해도 일대에 더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고 <해제>에 나오는데, 1890년대와 1900년대 황해도에서 개신교와의 마찰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저런 사실들을 취합해 볼 때 만약 연구자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서한 자료를 사료로 사용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당대의 여러 사료들과 교차 검토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또 뒤집어 이야기하자면 메이지 천황 영결식 사례에 보듯이 기존의 사료들에서 부족한 부분을 선교사 서한 자료가 메워줄 수도 있다.

 

 

3. 학술적 활용

 

프랑스 선교사들의 서한 자료집이 지닌 가치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특정 개인의 서한이라는 문서 형식 자체는 공신력을 지닌 공적인 사료라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하지만 선교사 본인이 주교에게 연례적으로 또는 특정 사안에 관하여 보고하는 내용으로 된 서한일 경우에는 완전히 사적인 서한은 아니며 상당한 정도로 공적인 성격을 지닌 사료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일선 선교사와 주교 사이에 오고 간 서한 속에는 당시 교회 안팎의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정부가 공적인 목적으로 편찬한 사료나 신문, 잡지와 같이 공신력을 지닌 사료에 실리지 않은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가 담기기도 한다. 다만 서한 자료 자체는 항상 여타의 공적인 사료와 교차 검토를 통하여 신빙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이런 사실을 전제하면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 강원도 북부에서 활동한 뒤테르트르, 루케트, 부이수 등 세 선교사 관련 서한 자료들을 묶은 《서한집》의 학술적인 활용 가능성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뭔가 있어 보이는 체 하려고 어렵게 학술이니 활용이니 했지만,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런 것이다. 만약 나라면, 내가 이 《서한집》에 담긴 내용을 사용하여 논문을 쓴다면 어떤 내용들에 흥미를 가질까? 나는 《서한집》을 읽으면서 두 가지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혼배와 죽음이 그것이다.

 

먼저 혼배 문제는 지금도 한국 천주교에서 교구 법원이 처리하는 일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까다롭고 복잡하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히 문화와 관습이 판이한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천주교 성사 규범에 따른 혼배 규칙과 전통 관습의 충돌도 있었을 것이고, 또 근대화에 따라서 교회 규범과 세속 관행 사이의 괴리도 있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 교회사 연구 가운데에는 혼배와 관련한 역사적 및 문화적 연구가 빈약한 편이다. 그래서 더더욱 《서한집》에 나오는 혼배 관련 내용들에 눈길이 머문다.

 

뒤테르트르 신부는 1894년에 뮈텔 주교에게 이렇게 문의한다. 2~3년 전 세례를 받은 신자의 자식으로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12살쯤 된 딸아이가 세례를 준비하는 한 젊은이와 혼인할 수 있는가?(46쪽) 뮈텔 주교의 답장이 남아 있지 않아서 뭐라고 지시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세례를 받지 않은 두 남녀의 혼인에 대해서 혼인성사를 베풀 수 있느냐를 묻는 것 같다. 우리는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의 교회법 규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서한을 읽다보니 흥미진진한 사례들이 많이 나타난다.

 

루케트 신부가 1906년에 문의한 내용이다. 김 씨라는 비신자가 아내와 첩과 함께 살고 있었다. 두 달 간격으로 김 씨와 아내가 죽고 첩만 남게 되었다. 김 씨는 대세를 받고 죽었다. 첩은 개종하여 신자와 혼인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첩은 반벙어리라서 제대로 말을 못 한다. 그 여자는 어렸을 때 비신자와 혼인을 했다가 쫓겨났던 적이 있었다. 그 뒤에 첩이 되어 김 씨와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첫 번째 남편의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여자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관면혼배를 위한 예비 조사를 할 수가 없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뮈텔 주교의 답신은 이랬다. 관면혼배 예비 조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관면을 받기 전에 그 여자는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191~193쪽) 이처럼 신자들의 삶은 오만가지 우여곡절로 점철되어 있고, 교회법의 규정은 일일이 모든 사례들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놓고 있지 못하다. 이런 경우에는 주교가 통찰력을 발휘하여 사태의 본질을 꿰뚫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아마 개항 이후부터 식민지 시대에 걸쳐서 한국의 주교들은 혼배와 관련한 다양한 질문과 해법 요청에 무척 시달렸을 것 같다.

 

교회법과 세속법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혼배 문제도 있었다. 부이수 신부는 1913년에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문의한다. 즉 피정에서 돌아온 후 혼인성사를 주었는데, 신랑이 교회법상으로 혼인이 가능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교회법상으로 혼인을 위해 요구되는 나이는, 조선의 관습이 아니라 유럽에서 계산하는 방식에 따라 남자는 14살, 여자는 12살이다. 1887년에 블랑 주교가 공포한 《조선 교회 관례집》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런데 면장이 말하기를 신랑이 세속법상 18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교회법상 혼인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경우에 부모들이 세속법에 정한 나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혼인시키기를 원한다면 혼인성사를 줄 수 있는가? (191쪽) 과연 뮈텔 주교는 뭐라고 답장을 보냈을까? 1907년 8월 17일에 일본 민법을 본떠서 남자 만 17살 이상, 여자 만 15살 이상이 되어야 혼인할 수 있다는 칙령이 선포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교회법이 정한 남자 14살, 여자 12살과 맞지 않는다. 그러면 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나도 궁금하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궁금할 것이다. 답을 아는 분도 계실 것이고. 누군가 한국 교회사 속의 혼배 문제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가 있다면 《서한집》에 실린 사례들을 사용하여 연구해 보시라!

 

두 번째 주제는 연옥이다. 나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연옥 교리, 연옥 의례, 연옥 서사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서한집》을 읽으면서 금방 눈에 들어오는 기사가 하나 있었다. 부이수 신부가 1907년에 뮈텔 주교에게 문의한 것이다. 부이수 신부가 관할하는 공소 가운데 부수해 공소라는 곳이 있었다. 공소 교리교사의 건강한 아들이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바깥에서 하룻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이틀 후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시신을 땅에 묻으려고 건장한 신자가 와서 일을 하는데 날이 어두워지고 피곤이 밀려와서 깜빡 졸았다. 그런데 꿈에 죽은 자를 만났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살아나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이렇게 외쳤다. “죽은 자네를 묻으려고 하는데 살아있다니, 아니 이럴 수가!” 그러자 죽은 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죽었소,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나를 완전히 저승으로 보내지 않으셨소. 신자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면 좋겠소. 미사 10대를 드려주면 내 영혼이 위로받을 수 있을 듯하오. 그것을 말하려고 이곳에 왔소.” 부이수 신부는 묻는다. 이 일을 믿어야 하는가? 그 꿈과 관련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하도록 권하고 신부 자신도 꿈에 나타난 죽은 자의 뜻에 따라 미사를 거행해야 할까? (156쪽)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꿈 이야기를 믿느냐 마느냐가 중요하지는 않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버지가 벌인 사기극일 수도 있고, 연옥에 대한 깊은 신앙을 가졌던 신자가 무의식중에 그런 환영을 꿈에 보았을 수도 있다. 또는 실제로 연옥에 간 아들이 현몽하는 일이 없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나는 마지막 해석을 믿는 편이다. 그래야만 선친께 못다 한 효성을 바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또한 죄 많은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가까운 이의 죽음을 접할 때 연옥에 대한 가르침을 상기하였으며, 또 이에 입각하여 (죽은 이를 위한 기도 등을) 실천하고 (연옥 영혼의 현몽을) 경험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서한집》에 실린 짤막한 일화가 입증해준다. 한국 신자들이 연옥을 어떻게 경험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라면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수집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서한집》을 활용하여 다룰 수 있는 주제들은 무척 많을 것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는 춘천교구사 내지 강원도 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위에서 말했던 혼배나 연옥과 같은 주제들을 다룰 때에도 가치 있는 사례들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교 설립 활동과 관련해서도 《서한집》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비신자들의 자금을 끌어들여 학교를 세우고 비신자 자녀들을 학생으로 받아들인다면 종교 교육을 어떻게 실시해야 하는가, 학교 설립 신청 시에 명의를 누구로 해야 하는가, 나아가서 법인이 설립되면 학교 운영 주체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등등. 이렇게 사료는 항상 눈 밝은 연구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4. 사족 몇 가지

 

《서한집》에 실린 선교사 서한자료는 대부분 <뮈텔 문서>에 들어있던 것들이다. <뮈텔 문서>가 무엇이며, 어떻게 발견되었고, 어떤 식으로 분류 정리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원순 선생님의 글(, 《한국천주교회사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이 있다. 특히 한글, 국한문, 한문, 일문 등 동양어로 된 문헌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동양어 문헌보다 10배나 더 많다는 서양어 문헌에 대한 연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머지않은 시점에 <뮈텔 문서>를 종합적으로 다룬 박사 학위 논문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서한집》에는 간혹 출처가 다른 자료들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가령 루케트 신부 관련 서한 가운데에는 정리번호가 BH51-1로 된것이 있다. 아마 <뮈텔 문서>와는 다른 출처에서 나온 서한들인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에 속한 것은 루케트 신부가 뮈텔 주교가 아니라 로마의 주임신부에게 보냈다는 서한들(164~165쪽, 179~180쪽, 189~190쪽)이기 때문이다. 또 부이수 신부 관련 서한 가운데에는 H13이라는 정리번호가 붙어 있는 서한들(20쪽, 26~27쪽, 32~34쪽)이 있다. 모두 3통인데 수신자가 어느 신부라고만 되어 있다. 이 기호들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뮈텔 문서>의 정리번호는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다른 출처의 문서들 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강원도 선교사들의 서한이 더 남아있는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의 후속 작업을 기다려야 하겠다.

 

처음 《서한집》을 받아서 읽을 때에는 번역문만 있어서 약간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해제>를 읽어보니 이미 별도의 불어 판독본이 나왔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번역본만을 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하며 볼 수 있도록 처음부터 대역본의 형태로 간행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 김에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지금까지 프랑스 선교사들의 서한들을 한국어로 번역한 자료집이 간행된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모두 본당이나 교구에서 관련 선교사들의 서한만을 추려서 펴낸 것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뮈텔 문서> 혹은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고 소장 한국 관련 문서철들(v. 577, 579, 580, 581, 582)에서 해당 서한만을 뽑아서 번역하였다. 이런 식의 번역은 낱장으로 된 개별 서한 자료들을 특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 및 정리하여 만든 문서철이나 문서군(컬렉션)을 훼손하게 된다. 물론 물리적으로 훼손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특정 인물, 본당, 지역, 교구 관련 자료만 추출하기 때문에 전후 맥락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 교회사 관련 사료 번역에서 파리나 로마, 서울 등 원본 문서를 소장한 곳의 문서철 혹은 문서군 전체를 대상으로 한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각 교구 교회사연구소에서 진행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많은 전문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고 상당한 물적 자원이 확보되어야 해결될 수 있다. 듣기로는 주교회의에서 한국 천주교 사료 목록화 사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어쩌면 사료들의 목록을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번역까지 하지 않을까?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펴본 《서한집》과 같이 기존에 간행된 자료집들이 많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자.

 

[교회사 연구 제48집, 2016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 전공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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