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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사건으로 보는 평신도: 최익형(崔益馨, 로베르토, 1890~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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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12 ㅣ No.1519

[사건으로 보는 평신도] 최익형(崔益馨, 로베르토, 1890~1950)

 

 

우리가 기억해야 할 평신도 최익형은 독립운동과 민족운동뿐만 아니라 일찍이 협동조합을 세우는 등 사회운동에도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불꽃처럼 살았다. 자신의 신앙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였으며 신앙의 열정을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세상에 넘쳐 흐르게 하였다.

 

 

안악사건(安岳事件)으로 옥살이하다

 

1910년 11월 황해도 신천 지방에서 조선인 160명이 동시에 검거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안악사건’이다. 일명 ‘안명근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1879~1910)과 사촌인 안명근(安明根, 야고보, 1879~1927)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고 자금을 모집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검거된 사건이다. 일제는 이 사건을 해서 및 서북 지역 민족 지사들을 탄압하기 위한 빌미로 삼았으며, 김구, 김홍량 등 황해도의 민족지사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이때 안명근의 매부 최익형도 함께 검거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최익형(崔益馨, 로베르토, 1890~1950)은 1890년 1월 25일 황해도 문산면 원성리 상촌에서 아버지 최호원(崔豪元, 세례자 요한)과 어머니 이(李) 씨 사이에서 10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호원은 신자가 아니었으나 천주교 집안이었던 처가의 권유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늦게 신자가 되었으나 매우 열심하여 안악읍 비석거리로 이주한 후에는 공소회장을 지냈으며, 1931년 경에는 평안북도 운향시 본당의 전교회장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일 년 후 다시 돌아와 황해도 신천 본당에서 전교회장으로 활동하다가 매화동에 정착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10남매 모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3남 최익훈(崔益勳, 마티아)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사제가 되지 못하고 1927년에 병사하였으며, 장녀 최익수(崔益洙) 바르바라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입회하여 13년 동안 안성 본당의 안법학교에서 근무하다가 1942년에 선종하였다. 차녀 최익순(崔益淳, 요안나)은 원산에 있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하기도 하였다. 그중 막내 최익철(崔益喆, 베네딕토)은 1950년 11월 21일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우표 모으는 사제’로 유명했던 최익철 신부는 2020년 98세로 선종하였다.

 

최익형의 모교인 봉삼학교 여자부 학생들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수녀들. 최익형은 매화동 선교회 활동을 통해 봉삼학교 운영비를 담당하였다.

 

 

최익형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우도(Oudot, 吳保祿) 신부가 매화동에 설립한 봉삼학교(奉三學校) 출신이다. 봉삼학교는 황해도 지역 최초의 사학(私學)으로 남자부에서는 교리 및 한문을, 여자부에서는 한글, 가사, 기도문 등을 가르쳤다. 1908~1909년에는 4년제 사립학교로 성장하였으며 1912년부터 양잠 강습소를 개설하고 기술을 가르치고 보급함으로써 주민들의 소득증대에도 기여했다. 최익형은 학교 재학 당시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에 안창호, 양기탁, 전덕기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단으로 교육 및 계몽 운동, 출판 운동 등을 통해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던 단체였다. 안악사건이 일어나기 전 최익형은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의 사범속성과를 수료하고 교사 자격증을 얻어 경기도 이천에서 교편을 잡다가 안악으로 돌아와 있었다. 안악사건으로 검거된 최익형은 1911년 1월에 붙잡혀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14년 10월 27일에 서대문형무소에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최익형은 안악으로 돌아와 고향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며 교회 일에 봉사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그의 사촌 처남 안정근으로부터 군자금 모금을 부탁받고 활동하다가 1921년 또 한 차례 체포되었다. 그는 해주 감옥에서 복역하였고, 1923년 9월 말 만기 출옥하였다. 전과 때문에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었던 최익형은 봉삼학교 학감으로 근무하며 유지들로부터 학교 발전 기금을 모금하여 학교를 후원하였다. 그러면서도 봉삼학교 출신 가운데 민족의식에 눈뜬 청년들을 자비로 상해로 망명시키기도 하였다.

 

 

협동조합을 세우다

 

1928년 12월 2일 자 《동아일보》에는 최익형 씨의 사회로 협동조합 창립총회가 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조합원은 20명이었으며 자본금은 300원이었다.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 매화리에서는 유지 김영환, 임성빈 양씨 외 7인의 발기로 객월 18일 오후 7시에 동리 사립 봉삼학교 교실 내에서 회원 20여 명이 집회하여 최익형 씨의 사회로 협동조합 창립총회를 열고 임원을 선거한 후 제반 사항을 결의하고 동 10시 반경에 폐회하였다는데 피선된 임원과 결의사항은 여좌하다 하며 동 조합을 설치함은 다수인의 소액의 자금을 합자하여 농촌에 이용되는 각종 농기구 및 일용 잡화 등을 구입하여 염가로 구매하여서 일반 동민의 소비절약을 목적함이라더라.”

 

《동아일보》 12월 2일 자(왼쪽)와 12월 11일 자. 최익형이 조합장으로 활동하던 안악군 용문면에 설립된 ‘매화 협동조합’ 관련 기사이다. 12월 11일자 같은 신문에는 ‘안악 용문면에 협동조합 설치’라는 제목으로 조합원을 모집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조합장은 최익형, 감사는 최봉균, 이사는 임성빈 · 김승환 · 강두호 · 김봉목 · 위용혁이고 출자는 한 사람당 1구좌만 가능하며 1구좌는 10원이었다. 1930년대 쌀 한 가마가 13원이었으니 1구좌가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나타난 협동조합은 1919년 3·1운동의 흐름 속에서 설립된 소비조합들이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이들 협동조합은 1919년에 설립된 명칭 미상의 소비조합과 1920년 4월과 5월에 설립된 강계공익조합 및 목포소비조합 등이었다. 협동조합운동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전반 사이에 더욱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등장하였기에 1928년에 설립된 ‘매화 협동조합’은 한국협동조합이 역사에서 볼 때 매우 유의미하다. 특히 개신교와 천도교의 협동조합사와 비교하여 좀더 깊이 있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료 발굴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한국 가톨릭교회 평신도의 생애와 주요 활동을 새롭게 인식하고 모범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최익형의 활동은 교회 활동으로도 활발하게 이어진다. 그는 조합장으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매화동 본당에 선교회를 설립하였다. 1930년대 초에 설립된 매화동 선교회는 설립 10년 만인 1941년에는 총 자본금 13,000원, 연수입 3,300원에 이르는 탄탄한 선교회로 성장하였다. 이 수입으로 봉삼학교 유지비의 절반과 성당 경상비, 전교사 2인의 급여까지 지불하였다. 매화동 선교회는 《경향잡지》 1941년 3월호에 “황해도 매화동 교회 선교회의 위대한 업적”이라는 제목으로 지역 교회 자치의 성공적인 표본으로 소개되었다.

 

1941년 3월호 《경향잡지》. 최익형이 이사로 활동하던 매화동 선교회는 “교회 자치의 성공적인 표본”으로 소개되었다. 

 

 

“…그전부터 먼저 깬 정신을 가진 교우들이 있는 지방에는 일찍이 이 방면에 착수하여 오늘에 이르러는 커다란 결실을 거두고 있는 지방교회도 더러 있나니, 우리는 이번에 황해도 안악군 매화리 교회 내 유지 교우들로 조직된 선교회(宣敎會)를 지방 교회 경제적 자치 준비의 생활한 표본으로 전선 모든 지방 교중 앞에 추천한다. …매화동 선교회가 창립되기는 불과 10여 년 전의 일로서 당시 매화동 유지 교우들은 해지방 전교 사업을 돕자는 취지로 선교회를 조직하여 회원들로부터 회비 1원을 증수하고 찬조회원들의 기부를 받아 7, 8원이란 기본금을 세우게 되었다. 최익형 놀벨도 씨와 옥천 베드로 씨 이외 5, 6인 유지교우가 선교회의 이사가 되고 이 이사회가 저 기본금을 지혜롭게 관리하여 오늘의 커다란 결과를 얻게 되었나니, 선교회의 기본이 이처럼 견고케 되었음에는 저 이사들의 교회를 위하는 붉은 정성이 그 원인이라 할 것이다. …선교회의 현금사업을 보면 당 지역 교회에서 경영하는 봉삼학교의 유지를 절반 이상 거들어오고 전교사 2인을 두어 전교하며 성당 내 모든 비용을 담당하여 오는 중이다. 이상과 같이 선교회의 수입이 1년에 3,300원이나 되나 당지 교우들은 이것으로써 만족하지 않고 다른 지방 교우들과 같이 또한 교무금을 성심으로 헌납하고 있는데 이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미상하나 이 모든 것을 합하면 경제적 자치 수준에 육박하고 있는 것으로서 당지 교회가 비록 일개 촌교회에 불과하나 다른 도회지 교회에 앞서 솔선하여 좋은 모범을 보여주는 선각자로 되어 있다.”

 

당시 매화동 선교회는 “매화동 교회는 실로 닭 가운데 학이요, 학 가운데 봉황이라 할지니 만일 조선 모든 지방교회가 이만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면 비록 구라파가 깨어진다 할지라도, 아메리카가 무너진다 할지라도 조선 가톨릭은 엄연히 그대로 서 있을 것이 아닌가!”라는 표현처럼 지역 교회의 경제적인 독립을 기대하는 교회의 희망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이들이 광복 후 모여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앞줄 가운데가 김구이고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최익형이다(1946. 1. 23).

 

 

한편 최익형은 1934년 직접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임무를 맡고 돌아왔다. 바로 안악에 거주하던 김구의 어머니와 아들을 상해로 보내라는 밀명으로, 김선량에게 자금을 마련해 주어 호송하게 하였다. 이러한 여타의 활동으로 최익형은 일제에 의해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되었고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최익형은 장연으로 이사하여 본당의 재정 담당 회장을 맡아 봉사하다가 1947년 월남하였다. 월남 후 인천 옹진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던 중 1950년 10월 15일 낙오된 국군을 집에서 숨겨준 것이 발각되어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최익형은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평신도 최익형(崔益馨, 로베르토, 1890~1950)은 독립운동과 민족운동뿐만 아니라 일찍이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 매화리에 협동조합을 세우는 등 사회운동에도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불꽃처럼 살았다. 자신의 신앙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였으며 신앙의 열정을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세상에 넘쳐 흐르게 하였다. 무엇보다 ‘함께 걸어가는 길’을 모색하는 지금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하는 평신도이다.

 

[평신도, 2022년 통권 제72호, 송란희 가밀라(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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