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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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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7-16 ㅣ No.631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의 역할

 

 

학교는 각각 고유의 설립 목적이 있다. 목적 실천의 방법은 물론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사회에서 사제양성교육만큼 한결같이 한 목적을 지향했으면서도 변화가 컸던 제도도 드물다. 신학교 교육은 박해시대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교육단계부터 무인가 학교단계로 진행되었던 때도 있었다. 당시는 국가의 교육체제와는 무관하지만, 교회의 관행에 따라 신학과정을 교육했었다. 그러나 공교육을 국가가 장악한 이후에는 신학생 교육도 당국의 정식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신학교 교육과정은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가장 한국적 특성이 스며 있으면서도 역사에서 가장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제도가 있다. 신학교 예비과이다. 신학교 예비과를 운영했던 대표적 사례가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 드러난다. 예비과는 소신학교 입학자격을 주기 위해 운영했던 성유스티노신학교의 부설 초등교육과정이었다. 성유스티노신학교는 1922년부터 폐교될 때까지 소신학교 예비과를 운영했다. 1934년부터는 서울교구의 예비과 학생들까지 맡아 교육하면서, 전국의 어린 성소자들을 품었다. 나중에는 대신학교 예비과도 운영했다.



성유스티노 소신학교 예비과 학생들

김수환 추기경은 군위에서 학교를 시작하여, 대구, 서울에서 공부했고, 일본과 독일에 유학했다. 그는 7개의 명예박사 학위 소지자이지만 그 학력의 바탕은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였다. 또 박상태 신부는 화원에 있는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 공부하다 5학년 때인 1932년에 소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했다. 이곳을 졸업하고 1934년 중등교육기관인 동성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박신부는 보통학교 졸업장이 없어 서울 계성보통학교 졸업장을 만들어 입학했다. 이는 소신학교 예비과를 초등학교 5, 6학년 과정으로 인정했던 데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부산교구 이갑수 주교는 영세하고 3년이 못되어 입학한 경우이다. 그의 모친이 병으로 누웠을 때, 삼덕당의 동정녀 율리아가 돌보아 주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온 집안이 영세했다. 그가 영세를 하자 본당신부 및 당시 영천본당 신학생이었던 박동준,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2년 선배 장병보 등이 권유하여 이갑수 어린이는 1938년 예비과에 입학했다. 또 전주교구 김재덕 주교는 1935년 전북 진안 마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예비과에 들어갔다. 그는 김수환과 함께 예비과를 마치고 동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예비과에서는 한 해 약 30명을 선발했다. 이 정도라면 유스티노신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500명이 넘는 학생이 입학했으리라는 계산이 선다. 그 중에는 김동한, 전석재, 신상조, 박성운, 강윤식, 조순업 등이 있다. 증언에는 나왔으나 아직 학적부상 확인을 못한 그밖의 신부들도 많다.


소신학교 예비과 설치

드망즈 주교는 지인들에게 조선인들은 자신의 아들을 바치니 프랑스 교우들은 신학교를 하나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드디어 1914년 신학교를 세우고 사제양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가장 어려운 일은 의무교육제도가 없던 사회에서 중등교육과정인 소신학교를 바로 시작하는 일이었다. 소신학교 교육을 시작해도 학력 수준이 고르지 못했고, 뒤떨어지는 학생들은 탈락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라는 유화정책을 내세워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다. 이제 소신학교에 입학하려면 초등학교 졸업 정도의 수준이 정식으로 요구되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형편이 어렵거나 또는 인근에 학교가 없어 초등교육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드망즈 주교는 소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인 초등교육을 보충하면서 소신학교 입학을 준비시키는 예비과를 설치했다. 그리고 예비과를 마친 학생들에게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의 졸업학력으로 인정해 주었다.

소신학교 예비과는 1922년 신입생 30명으로 시작되었다. 예비과생은 매년 모집했는데, 다만 소신학교 신입생이 입학하는 해에는 예비과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이들은 물론 신학교 재학생 통계에 집계되는 정식 학생이었다.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 기록을 꼼꼼히 남겼는데, 이들 예비과에 대해서도 동일했다. 예비과 학생들은 성유스티노신학교의 ‘으뜸신부(교장 신부)’와 ‘당가신부(관리국장 신부)’ 밑에서 소신학생, 대신학생들과 똑같이 규칙을 지켜가며 생활했다. 그러나 때로 이들은 보충수업을 받기도 했다. 1924년 신학교에서는 각기병이 발생하자 학생들을 한 달 동안 귀가시켰다. 그러나 이때도 예비과생들은 수업을 보충하기 위해 학교에 남았었다. 평소 이들은 신학교 당가신부의 지도아래 두 명의 부제 등 대신학교 상급반 학생들의 지도와 도움을 받았다. 후에 서정도 신부가 예비과 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임명되기도 했다.

소신학교 예비과는 입학조건의 연령이나 학력을 엄격히 제한해 나갔다. 그럼에도 입학인원이 학교의 수용 능력을 초과할 경우에는 입학 후 첫 번째 시험으로 퇴학생을 가려냈다. 이들은 1년 내지 4년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3년마다 실시되는 소신학교 입학에 대비했다. 일정기간 공부하고도 소신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면 그 풋풋한 성소를 접어야 했다. 18세가 되도록 예비과 과정을 마치지 못해도 학교를 떠나야 했다. 드망즈 주교는 1930년 예산문제로 예비과 폐지론이 대두되었을 때도 이를 극복했다. 서울에서는 이미 1926년에 예비과를 폐지한 상태였다. 드망즈 주교는 1934년부터는 서울 라리보 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서울의 학생들도 받았다. 명실공히 사제 양성의 첫 단계를 성유스티노신학교가 감당해 내었다.


신학교의 교육개혁과 예비과의 강화

대구교구는 1931년부터 소신학생을 서울 동성상업학교에서 교육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를 거쳐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때 드망즈 주교는 소신학생의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 운영 중인 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를 강화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대신학교 예비과도 설치했다. 대신학교 예비과는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서 소신학교 과정을 마친 학생들이 성유스티노 대신학교로 입학하기 전에 1년 반 정도 라틴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학생들을 서울로 보냈던 주교는 그들에게 유스티노 대신학교에서 생활하기 위한 담금질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1937년 동성상업학교 을조 교육을 마친 학생 10명으로 대신학교 예비과가 시작되었다.

한편 소신학교 예비과는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과정의 2개 반을 운영, 이 과정은 정부가 인정한 해성보통학교의 5학년과 6학년 이수로 인정받도록 했다. 그러므로 예비과에는 최소한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 학생들이 입학할 수 있었다. 물론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소신학교에 진학하고자 한 학생들도 이곳에서 1년 동안 예비과 교육을 거쳤다. 드망즈 주교는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매 학년 20명의 자리를 확보해 놓고, 매년 25명 내지 30명을 보내려고 했다. 그리고 1931년 유스티노-동성상업소신학교 운영부터는 매년 예비과생을 선발했다. 평신도인 최봉기, 정인규 교사가 예비과생들에게 일반과목을 가르쳤다. 동성상업학교 진학을 위해 입시과목에 치중하여 매일 6시간씩 교육했다. 학생들은 이 시기를 신학생으로서 갖춰야 할 품성교육과 함께 당시 꽤 까다로웠던 ‘중학교 진학시험을 준비’시키는 과정이었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를 거쳐서인지, 서울, 평양, 대구 연합교구 중에서 대구의 입학률이 제일 높았다.


성유스티노신학교 생활

예비과 출신 신학생들에게는 서울에서 공부할 때보다 대구 신학교 시절이 더 인상에 남았다. 이들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학교에서 만들어 준 앞코가 물렁물렁한 구두를 신고 다녔다. 이 구두는 학교에서만 신었고 방학을 맞아 집에 갈 때는 학교에 벗어 놓고 가야만 했다. 이 복장은 1931년 예비과생들이 서울로 진학한 이후 바뀌어갔다.(사진 참조) 이들은 잠자리에 들면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동료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서로 말은 안하지만, 막연하고 긴 사제의 길 문턱에서 밤에는 집이 그리운 어린이들이었다. 당시 소신학생과 예비과생 기숙사는 유스티노신학교 ㄷ자 건물에서 현재의 김대건체육관 쪽에 있었다. 예비과 학생들은 밤이면 성직자 묘지가 무서워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고 박상태 신부는 회고했다. 당시 휑한 화원언덕 위에서 생활하던 꼬마 신학생들의 두려움이었다.

예비신학생들은 특히 겨울철 생활을 힘들어했다. 그들은 겨울에 난로 하나를 놓고 70여 명이 지냈다. 동상이 걸려 다리가 퉁퉁 붓기도 했다. 새벽에 세수를 하려면 신학교 마당에 있던 꽁꽁 언 샘물을 깨야 했다. 물로 세수를 했다기보다 얼음으로 얼굴을 씻었다고들 기억한다. 김수환 추기경도 ‘얼음이불’을 덮고 잔 겨울을 회고했다. 학창시절에 건강을 상한 학생들도 많고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신학교를 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더욱이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주교들은 신학생을 굶기지 않으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심지어 무세 주교는 1년 동안 신학교를 휴교하거나, 다른 수도회에 운영을 위탁하는 방안을 놓고 고민하기도 했다. 당시 신학교를 운영하는 교구나 그곳에서 살던 신학생 꼬마후보들이나 간에 ‘위대한 어려움’을 견뎠다. 박상태 신부의 예비과 동기는 17명이었는데 사제가 된 이는 3명뿐이었다.

1923년 통계에 신학생 수는 105명인데 대신학생 28명, 소신학생 62명, 예비과 15명이었다. 여기서 바로 전 해에 30명이 입학한 예비과생이 1년 새 반으로 줄었음을 보게 된다. 이 숫자는 사제성소를 시작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한국교회 사제양성과정에서 소신학교 예비과는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예비과 과정은 성유스티노신학교가 대표적으로 운영해온 제도였다. 김수환 추기경, 김재덕 주교, 이갑수 주교는 물론 교구의 수많은 사제들이 이 예비과의 열매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는 매년 중도 탈락한 2/3이상의 학생이 있었다. 그 소년들은 사제성소를 지향하면서, 당시 사회에 필요한 교양과목을 배우고, 신앙생활의 훈련과정을 거쳤다. 이들이 1년 혹은 2년 동안 닦은 배움은 교회에 그대로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미완의 완성을 이룬 교회의 결실들이었다. 이들은 성유스티노신학교가 교회에 남긴 선물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비과 학생들의 명단과 생활을 찾아 정리해야 하는 이유이다. 열두세살 어린 소년들의 진지한 고민은 우리 교회의 기둥과 서까래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월간빛, 2014년 7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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