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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공소3: 인천교구 강화본당 냉정리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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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1-19 ㅣ No.912

[공소 公所] (3) 인천교구 강화본당 냉정리공소


조선 왕족의 첫 순교자 나온 강화에서 움튼 신앙, 65년 굳건히

 

 

- 냉정리공소 신자들이 채석장에서 주운 돌로 손수 지은 성모 동굴과 잘가꾼 해송으로 꾸민 성모 동산이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기도하게 한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 아래에 있는 아름다운 섬 ‘강화(江華)’. 강화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이 섬이 ‘강화’로 처음 불린 것은 940년 고려 시대 태조 23년 때이다. 이전에는 ‘해구’(海口), ‘혈구’(穴口)라 했다. 강화는 개성과 한양 인근에 있는 큰 섬이어서 고려와 조선의 많은 왕족이 이곳으로 유배 왔다. 강화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대표적인 인물이 연산군과 영창대군이다.

 

강화는 또 한국 가톨릭교회와 깊은 연을 맺고 있다. 이 인연은 조선 제25대 임금인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 이인(李)으로부터 시작된다. 은언군은 장종 곧 사도세자의 셋째 아들로 정조의 배다른 동생이다.

 

 

유배지 강화와 그리스도교 신앙

 

정조는 자식이 없었다. 효의왕후 김씨와 첫째 후궁 원빈 홍씨도 자식을 낳지 못했다. 정조의 최측근이자 원빈 홍씨의 오빠인 홍국영은 원빈이 급사하자 은언군의 큰아들인 상계군 이담(李湛)을 사후 양자로 정조의 대를 이으려 했다. 그러다 홍국영은 효의왕후를 독살하려 한 역모죄로 처형되고, 이담은 홍국영을 따르던 훈련대장 구선복 등이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모의한 것이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에게 발각되자 자결했다.

 

이 일로 은언군 이인에게까지 화가 미쳤다. 정순왕후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정조에게 이인을 죽여야 한다고 간언했다. 정조는 은전군 이찬(李)을 죽였는데 또 동생을 죽일 수 없다며 단식으로 맞섰다. 그래서 제주도 유배로 타협했으나 은언군이 귀양을 떠나는 날 정조는 “제주나 강화는 똑같은 섬이다. 더는 논하지 마라”며 유배지를 제주에서 강화 교동도로 바꾸었다. 은언군은 강화 교동도에 유배돼 있으면서도 정조의 부름을 받고 몰래 임금을 만나는 등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 냉정리공소는 1958년 강화본당과 함께 설립됐다. 2006년에 봉헌한 새 공소는 신자들의 품앗이로 모은 기금으로 세워졌다.

 

 

은언군의 집 한양 전동 양제궁에는 부인 송씨와 며느리 곧 상계군 이담의 처 신씨가 살고 있었다. 양제궁은 1786년 은언군의 강화 유배 이후 폐궁이 됐다. 이들은 나인 서씨의 외조모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강완숙(골룸바)이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둘에게 모두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주었다. 조선 왕족 가운데 첫 그리스도인이자 첫 순교자이다.

 

1800년 6월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조선에 피비린내는 숙청과 박해의 광풍이 불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11살의 어린 임금 순조를 앞세워 모든 실권을 손에 쥐었다. 정조의 아버지 장종(사도세자)의 죽음에 앞장섰던 정순왕후는 1801년 ‘척사윤음’을 반포해 외세인 가톨릭교회의 뿌리를 뽑는 박해를 일으키면서 정적들을 모두 제거했다.

 

신유박해로 가톨릭 신자임이 발각된 은언군 부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는 1801년 3월 강제로 사약을 받고 순교했다. 또 은언군은 그해 6월 사약을 받았다. 부인과 며느리가 중국인 신부를 폐궁으로 불러들여 숨겨준 것이 역모라는 이유에서다. 이 역모의 주동자가 바로 은언군이라며 정순왕후는 그에게 사형에 처한 것이다.

 

은언군의 셋째 아들 이광(李壙)은 큰형 상계군의 역모 사건, 신유박해, 은언군의 서자라는 이유로 왕의 종친 대접을 받지 못한 채 강화도 교동도에서 가난한 농부로 살았다. 1830년 유배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와 오늘날 서울 종로구 일대인 경행방에 자리를 잡고 1831년 첩실 염씨에게서 훗날 철종 임금이 되는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얻었다. 하지만 이광은 1836년 남응중 역모 사건에 연루돼 다시 강화로 유배됐다.

 

 

철종 외가 터 건너에 공소

 

1849년 6월 네 살 많은 7촌 조카 헌종이 23세로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조의 왕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이원범은 덕완군(德完君)으로 봉해지고 다음날 6월 9일 19세의 나이로 철종 임금으로 즉위했다.

 

철종은 어릴 적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임금이 된 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휘둘려 대신 한 명을 뽑는 데에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철종 자신도,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서자였다. 강화에서 농사짓고 나무꾼으로 살다 왕이 되었다 해서 조정 대신들과 사대부가는 물론 백성들도 “강화 도령”이라 조롱하며 철종을 멸시했다. 철종은 재위 14년 동안 자기 뜻을 제대로 한 번 펼쳐보지 못하고 33살에 요절했다.

 

강화군 선원면에는 철종의 외가 ‘용흥궁’(龍興宮)이 있다. 이원범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이다. 이 집은 원래 철종의 외숙인 염보길의 집으로 초가였다. 철종 4년인 1853년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지금의 집을 지어 ‘용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용흥궁(龍興宮)’이라 했다. 규모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한옥이다.

 

냉정리공소는 1958년 강화본당과 함께 설립됐다. 냉정리공소 내부.

 

 

신자들이 돌 주워다 성모동산 손수 꾸며

 

철종 외가 용흥궁 길 건너 언덕 위에 강화본당 냉정리공소가 자리하고 있다. 강화군 선원면 철종외가길 44번길 6이다. 냉정리공소는 1958년 강화본당이 설립되면서 함께 세워진 공소이다. 공소 터는 철종 임금 외가 염씨 가문의 이순옥(마르티나) 자매가 기증한 땅이다. 냉정리공소 신자들은 처음에는 천막 안에서 때로는 철종 외가 용흥궁 사랑채에서 공소 예절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제대로 된 공소를 짓자고 의기투합한 신자들은 두부, 된장, 고추장, 순무 김치 등을 도시에 내다 팔아 건축기금을 마련해 2006년 9월 14일 지금의 공소를 봉헌했다. 또 채석장에 가서 못 쓰는 돌을 주워다가 성모 동산을 손수 꾸몄다.

 

냉정리공소 신자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구응회 프란치스코 전 공소 회장은 “주일 미사에 나오는 신자가 70명이 된다”면서 “우리는 모두 한 식구”라고 말했다. 주일 미사는 본당 신부와 아우구스티노수도회 사제가 격주제로 공소를 방문해 봉헌하고 있다.

 

구 회장은 한국 교회에서 가장 작은 공소 사무실과 공소와 성모 동산을 어떻게 꾸몄는지 아주 극적으로 소개했다. 그러면서 넌지시 “아마 곧 본당으로 승격될지도 몰라. 주교님께서 약속해 주셨어!”라고 자랑했다. 전ㆍ현직 공소 회장의 구수한 입담과 공소 사랑은 직접 방문해 듣고 공감하시라. 60년 넘게 살아온 신앙의 터전에 대한 토박이 그리스도인의 진면모를 볼 수 있다.

 

문의 : 032-932-5288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월 15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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