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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에세이65-66: 신학적 경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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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15 ㅣ No.773

교회사 에세이 (65) 신학적 경향들 (1)

 

 

이제 살펴보게 될 주제는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안에서 그리고 수많은 종교들 안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위치 짓고 드러내는지에 대한 좀 더 깊은 문제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인식과 구원에 관계된 담론이고, 세상과 인간의 본질적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과정이라 여겨집니다.

 

고대 교회는 그리스도교를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고 표현하기 위한 많은 해설과 작업들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노고는 많은 신학적인 진술들을 생산해 내었고, 그리스도교의 신학들은 아주 분명하게 시대와 환경 그리고 신학의 목적들을 구분 지으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개념화할 수 있는 넓은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대의 수많은 근본적 신학적 개념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의식하고 있는 어떤 자신에게 합당한 경향과 연속성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어떤 지점을 동시에 가리키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세상의 보편적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그리고 비그리스도교 환경과 자신과의 관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어떤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경향은 세상에 둘러싸인 그리스도교인의 삶을 인도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직 매우 어린 종교적 공동체인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필요와 요구들에 응답하는 노력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제 막 시작되었고, 세상과 자신을 둘러싼 이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인식은 사실 많은 비그리스도교인들로부터 비판과 이의제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가 살펴볼 신학적 경향들은 이런 외부의 물음과 비판에 대한 논쟁적이고 호교론적 응답을 대표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내부를 향해서는 확신과 안전함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비그리스도교인들의 가장 대표적인 질문과 비판은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 모든 이의 구원이 자신들의 종교에 달려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왜 이렇게 늦게서야 세상에 나타났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세대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절대자이신 하느님이 이처럼 심판자처럼 행동하는가? 입니다. 이런 질문과 유사한 많은 질문들은 그리스도교가 보편 역사와의 관계와 그 역사 안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결정하고 답하지 않으면 안 될, 미룰 수 없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고대 교회는 역사 신학들에 대하여 숙고하였고, 특별한 용어들로 대답하게 됩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행위는 오직 나자렛 예수를 통해서 시작되지 않았고, 하느님의 창조로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구원사업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로고스(logos, 진리)를 통해 그들과 통교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연약하였고, 이해하지 못했고, 교육되기가 쉽지 않았기에 오랜 견습과 실습의 시간들을 통해서 진리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지금에서야 생겨난 것이 아니라, 마치 이 진리처럼 이미 세상에 있어 왔던 것입니다. 지금은 오직 진리가 완전하고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고, 이미 예고된 것처럼 구원이 효과적으로 완성되기에 이른 것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온 인류의 역사와 모든 종교들은 어떤 오류 중에도 그 자신 안에 진리를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리스도교의 전 역사처럼 자신을 드러냈던 것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비밀스럽게 드러났고, 예언자들을 통해서 예고되었던 이 진리가 이제 보편 역사에서 온전하게 자신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구원 역사의 결정적 사건의 증인처럼 자신의 삶에서 그 구원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가 보편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 것이며 더 이상 다른 신들과 종교들 그리고 그들의 교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인을 혼란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2016년 8월 14일 연중 제20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66) 신학적 경향들 (2)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능력은 그리스도를 향한 예언적 말씀으로 읽혀오던 히브리 성경, 구약성경으로 향하면서 자신을 드러내게 됩니다. 구약성경은 교회를 방향 짓는 주요한 도구가 됩니다. 이제 교회가 이 구약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을 이해해 나아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한 고대 교회의 기본적인 이해를 살펴보면, 구약은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선포된 진리를 이미 포함하고 있었고, 한 구절 한 구절이 신약에 대한 예언이고, 그것은 이제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온전히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 해석은 교회의 영원한 임무일 뿐 아니라 교회 자신이 도구가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성서는 그 자신의 기원과 내용에 있어서 히브리적 책이었고 아직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았기에 그것을 바르게 읽는 것은 그리스도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했고, 참되고 권위적인 의미를 가려내는 방법으로 읽어야 했습니다.

고대교회의 공통된 확신에 따르면 구약 성경의 자구적 의미는 그 가치가 온전하지 못하며, 모든 것이 잠정적인 것이라 여겼고, 그런 생각은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에 이르러 초기 그리스도교와 이후 세대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우의적 성경 해석을 내놓게 됩니다. 이런 경향은 구약 성경이 글자의 의미보다 더 깊고 심오한 의미적 지층을(영성적, 우의적, 전형적, 도덕적 의미) 갖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성경 해석은 중세를 특징지었고, 이 방법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실천되었습니다. 우의적 성경 해석의 결정적 요소는 글자의 의미 밑에 더 의미 깊은 영성적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에 기반합니다. 우의적 개념 안에서의 구약 성경 읽기는, 고대의 여러 저술들에서 시작하여, 진리를 입증함에 있어서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우의적 신학은 그리스도교 이전 그리스 철학 안에서 이미 발전된 방법이었으며 구약 성경에서 이미 히브리인들에 의해서 사용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토대로 고대 교회의 교부들은 성경을 들여다보았고, 수많은 주석을 내놓게 된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과는 다른 방법과 역할 안에서 발전해 나갑니다. 신약 성경은 초기 교회의 선택적 작업에 의해서 이뤄졌고, 길고 다양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거룩한 말씀의 ‘정경’(canone)을 갖추기에 이릅니다. 이런 과정은 결정적으로 정경이 고정된 4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에는 특별하고 완전한 기준이 있었는데, 그 기준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 그리고 사도들의 설교를 담은 것들이라는 기준이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살펴본 바 있는 이단과 열교의 등장은, 교회가 자신의 원천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게 했습니다. 각 그룹들은 원천으로 돌아가 거기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얻어내고, 교의적 영역에서 다름을 발견하고자 애썼습니다. ‘누가 올바른 이유(근거)를 갖느냐?’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것은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전형적인 사건이 2세기에 있었던 그노시스와의 논쟁입니다. 정통 교회는 그들을 맞서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게 되는데, 그 논거는 이러했습니다. 진리는 주교에 의해서 보호된다, 나아가 주교는 끊어지지 않는 계승이라는 하나의 사슬로서 즉 그들과 같은 주교좌에 앉았던 사도들과 기원에서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의 흐름을 따를 때, 초기 그리스도교 스승들의 전통과 연결되고 사도 시대까지 거슬러 오르는 사제들과 연결된다는 주장이었고, 이런 주장은 리용의 이레네오(Ireneo di Lione)에 의해서 공고하게 됩니다. 전통이 진리의 근거가 됩니다.

4세기와 5세기에 이르면 교부들이 신학적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증거로 원천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경향은 과거가 현재보다 진리의 소유에 있어서 우위에 있었다는 개념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전통이란 증거만이 유일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성경을 대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경은 전통과 교부들의 안내 안에서 읽혀지게 되었습니다. [2016년 8월 21일 연중 제21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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