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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26년, 남영동 1985, 살인의 추억 세 영화가 우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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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670

[문화 읽는 다락방] “1980년대의 고통 지금은 끝났습니까?”

영화 ‘26년’, ‘남영동 1985’ 그리고 ‘살인의 추억’ 세 영화가 우리에게 묻는다


지난 18대 대선을 앞두고 개봉한 영화 ‘26년’과 ‘남영동 1985’에 대한 관심은 최근까지 뜨거웠다. 두 영화를 보는 동안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가 떠오른 것은, 세 영화가 공유하는 ‘국가폭력’에 대한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2013년, 우리는 왜 또다시 1980년대를 뒤돌아보는 것인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계속된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열 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하고 살해당한 이 사건은, 한국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으로는 최대의 기록으로 현재까지 미제로 남아있다. 1980년대는 우리나라가 외형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연약한 여자들은 어둠 속에서 강간당하고, 죽어갔다.


국가가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살해당한 사람들

조 형사가 술집에서 깽판을 칠 때,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부천 성고문 사건을 보여준다. 1980년대는 경찰이 여대생들에게 성고문을 일삼던 시기인데, 그 경찰들에게 시골 여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일이겠는가.

여자들은 모두 ‘어둠’ 속에서 살해당한다. 그런데 그 어둠은 인위적으로 국가가 만들어낸 ‘어둠’이라는 것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모티브이다.

실제로 아홉 번째로 여고생이 죽은 날은 민방위훈련 날이었다. 국가가 정권 유지를 위해 민방위훈련이나 하고 있을 때, 국가가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여자아이는 강간당하고 살해당한다. 범인이 더 쉽게 죽일 수 있도록, 국가는 더 어두운 밤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영화의 핵심은 등화관제이다. 이 영화에서 민방위훈련과 등화관제는 총 세 번 실시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였던 여중생이 잡혀가던 날, 그날 밤에도 등화관제가 실시되어 모든 가게는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세상은 어둠이 지배한다.


일상에서 폭력으로, 폭력에서 일상으로 국가의 일상적인 폭력성

영화 전반에는 폭력 또한 넘쳐난다. 형사들은 용의자들에게 고문을 하고, 형사들끼리 서로 폭행하기도 하며, 전경들은 데모하는 학생들을 폭력으로 진압한다.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취조실에서 백광호를 군홧발로 마구 짓밟으며 온갖 고문을 하던 조용구와 박두만은, 고문이 끝나면 일상적인 표정으로 돌아온다. 백광호와 나란히 앉아서 짜장면을 먹으며 1980년대 인기 드라마 ‘수사반장’의 타이틀곡을 신나게 따라 부른다.

중국집 배달원도, 보일러 수리공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취조실. 그 취조실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폭력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그 시대에는 그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리라.

식사가 끝나면 백광호는 다시 취조실 탁자로 질질 끌려간다. 일상에서 폭력으로, 폭력에서 일상으로 거침없이 이동하는 장면은 국가의 일상적인 폭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폭력이 일상의 일부인 상황은 1980년대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며, 이는 ‘남영동 1985’에서도 드러난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김근태는 유명한 고문 경찰 이근안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은 기억을 저술한 책 「남영동」에서, 고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취조실에서 고문을 하는 ‘작업’ 틈틈이 고문자들이 나누는 일상적 대화를 듣는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매서운 고문을 하던 사람들이, 쉬는 시간에 담배를 피우면서 나누는 대화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가장들이 나누는 소재였다는 것이다. 자식의 성적이나 부동산 시세에 대한 고민…. 그러나 폭력이 보편화된 1980년대, 그들은 그 폭력의 부당함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다.

이들 영화에서 범인은 국가다. 살인범을 잡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바보 같은 시대, 곧 1980년대의 대한민국인 것이다.


국가는 연쇄살인사건보다 시위를 더 두려워한다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은 왜 아무리 노력해도 살인범을 체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하는 것인가. 비오는 날 밤, 신 반장은 예고된 살인을 막고자 상부에 전경 2중대를 풀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시위진압 출동으로 남는 병력이 없다며 거절당한다.

국가는 연쇄살인사건보다, 시위를 더 두려워한다. 힘없는 국민을 지키기보다,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여고생은 민방위훈련과 야간 등화관제가 실시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조용히 살해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1980년대의 형사 박두만은 평범한 가장이자 사회인이 되어 2003년의 현실로 돌아온다. 그가 처음 시체를 발견했던 농수로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관객들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그의 얼굴에는 범인을 잡지 못한 회한만 남아있을 뿐, 무고한 사람을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의 기미는 없다.

이 응시에는 범인이 우리들 속에 평범한 일상의 얼굴을 하고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그의 눈빛은, 시대에 대한 반성이 없을 때, 1980년대의 어둠은 다시 우리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불길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아직도 국가폭력을 묘사하고 있다

‘남영동 1985’에서도, 김종태가 불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있는 우리를 바라보며 끝난다. “우리는 과연 시대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용서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만 같다.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에 불법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22일 동안 고문을 받은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역할의 장의사(이두한)가 고문 ‘도구’로 ‘수술’을 한다. 우리는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이 고문의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강풀의 웹툰(인터넷 만화) ‘26년’을 각색한 조근현 감독의 영화 ‘26년’은 인물과 상황을 조금 바꾸었지만 원작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광주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김갑세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희생당한 유족들의 자식들인 전 국가대표 사격선수 심미진, 서대문경찰서 경찰 권정혁, 금남로 깡패 곽진배, 입양한 아들 김주안과 함께 전두환을 찾아가 사과를 요구하고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두 영화가 공유하는 것은 1980년대 국가폭력에 대한 묘사이다. ‘26년’은 학살자 전두환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복수, 곧 그를 살해한다는 내용이다.

한편 ‘남영동 1985’는 전두환의 집권시기였던 1985년을 배경으로 과거의 생생한 기록을 통해서 그 시대의 무자비한 폭력을 고발한다. 그리고 오늘날 다시 마주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용서’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마지막 순간에 던진 화두 사과와 용서

1980년대의 국가폭력을, 서로 다른 인물들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지독하게 앓는 두 영화 ‘남영동 1985’와 ‘26년’은, 마지막 순간에 같은 화두를 던진다. 사과와 용서.

‘남영동 1985’에서 무자비하게 고문을 했던 이두한은 세상이 바뀌어 감옥에 가있다. 그리고 자기가 고문했던 김종태에게 용서를 청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두한은 분명, “세상이 바뀌면 당신이 나에게 똑같이 복수하시오.”라고 말했었다.

오늘, 교도소 면회실에서 그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다음, 자신이 무자비하게 고문했던 이에게 말한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김종태는 차마 그의 머리에 손을 올리지 못하고 돌아선다.

‘26년’에서 대기업 회장인 김갑세는 말기암 선고를 받는다. 이를 계기로 1980년 5월에 계엄군으로 투입되었던 시절 이후, 평생 준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고 광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1980년 5월에 가족을 잃은 아이들을 만난다.

사죄 없는 현실 속에서 아직도 5월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은 김 회장의 계획에 동참한다. 최종 목표는 광주에서 자행된 학살의 주범을 암살하는 것. 그들은 드디어 전두환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총을 겨누고 요구한다.

“사과하세요, 진심으로 사과하세요. 그러면 용서할 수 있어요.”

‘남영동 1985’는 섣부른 화해나 용서대신, 김종태가 살아있는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끝난다. ‘26년’의 원작 웹툰은 방아쇠를 당기고 나서 끝난다. 영화에서도 총성은 울리지만, 그를 죽이지 못한다. 여기에는 권선징악이 없으며, 복수도 없다.

이제 대답은 우리가 할 차례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13년 대한민국은 과연 안녕한가?

* 박상미 - 문화비평가. 고려대학교에서 현대시(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심리상담(석사)을 공부했고, 현재 한양대학교 대중문화비평 박사과정에 있다. 고려대학교와 백석대학교 등에서 영화비평과 시나리오 창작을 강의하며, 다수의 잡지에 문화비평을 연재하고 있다. 또한, 독일을 오가며 다큐 영화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3년 3월호, 박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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